어쩌다 “독서"가 취미라고 애기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어떤
분야의 책을 좋아하는지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때마다 “동양철학"이라고 답하기가 망설여지곤
합니다. 동양철학은 사주, 운명에 관한 분야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다는 짐작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동양철학에 관심을 두면서 『사주명리학』을
방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호기심에서라도 한번은 공부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요.
대략 대 여섯권 정도의 책을 읽고
고민해 본 수준에 불과하지만, 관련서적들 중에서 “사주학은 미신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적시하지
않은 책을 만나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명리학을 조금 공부해 본
후 사주학은 학(學)이 아니라 잡술이라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기문둔갑이니 자미두수니 하는
다른 방법론은 공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안다고 하는 것도 단지
명리에 국한됩니다.
많은 분들께서 "대한민국은 『미신공화국
』이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진실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주요 일간지조차도 「오늘의 운세」 를 싣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사주(四柱)는 『 년,
월, 일, 시 』 라 불리는 네 기둥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년월일시』의 네 기둥을 「갑자」 년 「정묘」시 「
기해」 일 「무진」시 처럼 육십갑자에서 추출한 2글자로 각각
표현했으니, 모두 여덟 글자, 즉 팔자(八字)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주는
팔자로 나타나기에 「사주팔자」라고 붙여 부릅니다. 이 팔자(八字)로 나타나는 태어난 시간을 통하면,
평생운세를 알 수 있다는 것인데요...
명리『학』이니 하여 학문의 가면을 쓰고, 명문대학을 나오신 분, 종교의
수행자 분도 나서고 있으니, 사람들이 솔깃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 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잡술이라고 하신 분들은 없었을까요? 물론 많이
계십니다. 많이 계시지만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정약용선생님을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민족 최고의 석학중 한 분으로 칭송받는 정약용
선생께서는 『여유당전서』를 통해 "사주는 학문이 아니라 잡술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정약용 선생께서 잡술이라
단정하신 까닭은 「갑자(甲子)」로 시작 되어야 마땅한 천지창조의 시간은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제시하십니다. 한나라 무제 이후의 사람이 이름 붙이기 시작한
그 해가 반드시 갑자(甲子)년 이라는 것도 우습지만, 설령 우연히 맞았다 하더라도,
태초력을 사용하던 한나라, 황초력을 사용하던 위나라, 원가력을 사용하던 송나라, 대현력을 사용하던
당나라 등 크게 역법의 기준이 바뀐 것만 따져보더라도, 현재의 2009년이 기축년이
틀림없다는 근거를 댈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이
논리에 답하는 분들도 거의 없으시지만, 도통한 선학께서 후천적으로 찾아낸 진리라고 주장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물론, 연역적인 논리가 아니라 귀납적인 논리로도 진리에 도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천척으로 찾아낼 수 있는 진리라면 어떤 사람에게 연월일시를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언제 태어났는지 묻지 않고도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음양오행의 기운으로 연월일시까지도 당연히 귀납적으로 추론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백 번 양보해서 「만세력」
이 정확하다고 가정해 보기로 합니다. 시(時)의 기준은 두시간을 간격으로 하기에 똑같은
사주팔자를 가진 사람은, 출생률이 낮은 현재의 우리나라만 가정하더라도 족히 100명은 넘을
것입니다. 60갑자로 순환하니, 옛 사람까지 합하면 같은 사주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집니다. 세계적으로 따지면 더더욱 늘어납니다. 사주팔자가 같은데, 왜 태어나면서부터 굶주림에
운명이 묶여버린 아프리카의 사람과 달리 다른 운명을 따라가게 되는 것일까요? 또
한편으로 사주팔자의 논리를 따져보면, 최초 호흡을 통해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이
어찌 사람만의 일일까요? 동물들은 어째서 태어나면서 최초 호흡을 통해 천지의 기운을
받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어째서 2시간을 기준으로 달라지는 사주팔자에서 식용돼지의 운명은 똑같게
귀결되는 것일까요?
음양오행의 심오한 이치를 단순하게 규격화한 것을 신뢰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여자는 항상
음일까요? 남자로 대립시켜야 음이며, 동물로 대립시키면 양이 됩니다. 물도 항상 음일까요?
불로 대립시켜야 음이며, 공간으로 대립시키면 양이 됩니다. 컵에 채워진 물은 양이며,
비워있는 것이 음일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음양의 분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제가
읽은 명리학책은 모두 지적하고 있었지만, 그 상대성을 부각시킨 책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남자에게 관성은 재물이며 여자라고 “정의”을 해서 독자들에게 좀 더 선명한 모양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결론적으로 정약용 선생께서 염려하여 하신 말씀처럼, 사주팔자로 운명을 재단함은 "
천대를 속이고 억조창생을 속이는 잡술"일 것 같습니다. 아무개님의
사주팔자를 가져와서 스스로를 비추어 보십시오. 제법 맞아들어 갈 지도 모릅니다.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에 비교가 되지 않는 로또당첨의 확률이지만,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보다 로또당첨의
확률이 더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적 요인 때문에, 사주팔자에 기대어 보려는
마음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무왕이 천하를 통일할 때 역(易)에 밝았던 책사 ‘강태공'이 흥분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기 전에 주역점을 보았더니 흉한 점괘가 나왔습니다. 강태공이 거북껍질을 짓밟으며 말했습니다. “마른 껍데기와 죽은 풀이 어찌 길흉을 알겠는가?” 강태공이 흥분한 까닭은 상나라 도처에 사람을 깔아 상나라의 정세를 손바닥 보듯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쯤되면 정이천이 역에 가장 통달했다고 칭송했던 맹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보다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보다 못하다" 태어난 시간(하늘)만을 고려하여 정해진 운명을 논하려는 시도는 가소로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성현들께서
공통적으로 노력하신 일은 무조건적인 맹신(미신)을 없애려는 것이었습니다. 권력화 된 맹신적 갇힘을 뚫어 주시려던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유대교의 랍비(정신적 지도자)였던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막힌 「율법주의」에 맞서 돼지고기를 먹어도 되고, 반드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기도해도 된다고 하셨으며, 베드로께서도 할레(포경수술)를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무조건적 믿음」을 강요하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유대 율법의 고루함에 막혀있었던
고인 물을, 생명을 바쳐서 바르게 흐르도록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전성기의 소크라테스, 참으로 존경하는 공자, 석가, 성스러운 전쟁인 「지하드」
를 뿌리내려 테러의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랑을 강조했던 마호메트-
성전은 방어적인 의미입니다. 딤마(dhimma), 즉 생명존중과 재산존중은 사랑이며 배려의 정신입니다 -등등, 이러한 성인들께서 힘쓰신 일은 미신적인 맹목적 믿음과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에
「사랑」이란 바람이 불도록 애쓰셨다는 것일 것입니다.
말이 새어나간 것 같지만, 하고싶은 말은 「사주팔자」는
미신이며 맹신할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사주처럼 일관성이 없는 주장을 접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합충론을 따르느냐 부터 시작해 고전격을 고집하는 사람 용신격을
주장하는 사람등등, 모두가 해석론이 제각각입니다. 수긍할 수 있는 깊은 논리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결국은 무조건 믿으라는 말만 남게 됩니다.
음양으로 구별하려는 빈부귀천도 상대적 개념일 뿐입니다. 100억을 가진 부자도 재물에
집착하면 가난한 자이며, 100원을 가진 빈자도 재물에 집착하지 않으면 부자일 것입니다.
사주팔자의 뿌리는 음양오행에서 시작되지만, 음양오행의 근본에서 벗어나 엉뚱한 규격화를 시키는 것이
사주팔자의 이상한 이론입니다.
재미로 사주팔자를 보는 것은
문제삼을 만한 해악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재미를 넘어서서 그 해석에 알게
모르게 구속되어 버리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조상 중에 객사한 귀신」이
있어서 부적을 쓰거나 굿을 해야 하니, 수백만원을 들여 기도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려진대로 아프리카의 원인이
인류의 조상이라면, 그로부터 시작해 객사한 조상이 없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악(惡)은 언제나
선(善)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종교인이지만 비도덕한 사람을 만나기는 더욱 쉬운
법입니다. 카멜레온처럼 악(惡)을 감추고자 선(善)한 종교인의 옷을 입고 숨으려던 까닭은 아닐까요?
해외로 도피하는 것보다는, 승려가 되는 방법으로 도망치는 것이 수월했던 까닭이라며 승려의
세계를 고백하신 어떤 분의 말씀처럼, 소위 조폭을 비롯하여 절로 숨어 든
악인(惡人)들도 없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총명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 바뀌지 않는다"[논어 제17편 양화 제3장]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릅니다. 단지 극단에 치우쳐 바뀌지 않으려고 하는
두 사람만 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모두
바뀌겠지요. 그런 까닭에 당연히 명(命)도 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드시
부적을 쓰고 굿을 하여야만 바뀌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주팔자를 알아서 음양오행의
모자란 기운을 보충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육신은 가둘 수
있어도 마음을 가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자 사주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이 넘쳐도 가난한 사람이 참으로 많은 법이니까요.
한자로 바쁠 망(忙) 자는 바쁘게 되면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여 서울과 부산을 몇시간에 왕래하는
문명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과거보다 더 여유가 없고 더 바빠진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바빠져 마음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사주팔자에 조금의
마음도 남기지 마십시오. 만약 정해진 운명이 있다손 치더라도 마음이 관통하지 못하는
족쇄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한 해가 또 다시 지나려고 하니 사주팔자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계셔서 주절거려 봤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방치하였는데, 많은
분들께서 찾아주셨습니다. 통계를 보니 주역과 운명때문에 찾아주신 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다” 라고 믿습니다. 제가 오해속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주명리학이 절대적 진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최악의 궁합을 만나도 잘 사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