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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改邑 不改井 无喪无得 往來井井 汔至 亦未繘井 羸其瓶 凶
【初六】井泥不食 舊井 无禽
【九二】井谷 射鮒 甕敝漏
【九三】井渫不食 爲我心惻 可用汲 王明 並受其福
【六四】井甃 无咎
【九五】井 洌寒泉食
【上六】井收勿幕 有孚 元吉

  이전의 곤(困)괘는 마음이 중용(中庸)의 도를 벗어났기 때문에 겪는 곤경이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정(井)괘는 그 마음을 중용의 도에 따르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니 쉼없이 배움을 추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물물은 아무리 사용해도 부족하지 않으니 끊임없이 샘솟는다. 그래야 좋은 우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머리도 끊임없이 사용하고 채우면서 깨끗하고 차게 유지시켜야 한다. 그렇게 순환을 시키지 않으면 곧 고여서 썩게 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우물이 되어버린다. 성인으로 추앙 받는 공자께서도 미혹되지 않게 된 40, 천명까지 알게 된 50, 귀가 순해진 60, 마음대로 행동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된 70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자랑하시기도 하셨다. “열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에도 나처럼 충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은 반드시 있겠지만, 나처럼 이렇게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논어 제5편 위령공 제28장]

 

井改邑 不改井 无喪无得
우물이 마을을 열지만(井改邑) 마을이 우물을 열수는 없다(不改井) 우물물은 줄지도 넘치지도 않아야 한다(无喪无得)

  맑고 깨끗하고 줄지도 넘치지도 않는 좋은 우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는 것처럼, 좋은 우물과 같은 사람이 사람을 모이게 한다. 그러나 고을을 만들만큼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라고 하여 그 곳에 좋은 우물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처럼, 고을을 형성할 정도로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우물과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우물물은 줄지도 넘치지도 않아야 좋은 우물이니, 기존의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움만 추구하는 배움은 곤란하고 기존의 가르침만 고집하여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중용을 지켜야 한다.

 

往來井井 汔至 亦未繘井 羸其瓶 凶
사람들이 반복해서 우물을 왕래하면(往來井井) 우물이 금새 다 마르고(汔至) 두레박 줄이 우물물에 미치지 못하여(亦未繘井) 두레박조차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니(羸其瓶) 흉(凶)하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곧 그 밑천이 보이게 될 것이니, 사람들이 우물을 거듭(井井) 찾으면 우물이 말라서 퍼 갈 물이 없게 될 것이니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우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두레박은 사람들에게 우물물을 퍼 주었던 조력자이니, 두레박은 군주를 상징하고 우물은 인재를 상징한다. 인재가 받쳐주지 않는 군주도 쓸모가 없다. 융통성 없는 고집스러움으로 중요한 두 사람이 쓸모없게 되었고, 전체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井泥不食 舊井 无禽
우물물이 진흙물이 되어 먹을 수 없는(井泥不食) 오래 방치된 우물이라면(舊井) 날짐승조차 없을 것이다(无禽)

  스스로 쓸모없게 되었고 그 조력자까지도 쓸모없게 만들었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낡은 이론만 고수하고 배우려 하지 않으니 날짐승조차도 찾아오지 않는다. 사람은 물론이요 이제는 짐승조차도 외면하는 아무런 쓸모없는 생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井谷 射鮒 甕敝漏
우물물이 골짜기를 타고 흘러(井谷) 붕어에게 향하고(射鮒) 두레박도 깨져서 물이 샌다(甕敝漏).

  짐승조차도 먹어주지 않으니 그 진흙탕이 된 우물물이 골짜기를 타고 흘러 미물인 붕어에게만 혜택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참으로 초라한 우물이 되었다. 두레박은 이미 쓸모가 없어졌기에 사람들이 깨어버린 까닭일 것이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라면 나라의 지휘부가 함께 망하는 것이다. 절대 진리란 없다. 시대정신에 맞아야 한다. 공자께서도 “삼베 관을 쓴 것이 예(禮)인데 지금은 명주 관이 검소하니 나는 대중과 시류를 따르겠다. 대청 아래에서 읍하는 것이 예(禮)인데 지금은 대청 위에서 읍하지만 교만하니 대중과 시류에 어긋나더라도 대청 아래에서 읍하겠다”[논어 제9편 자한 제3장]고 하셨다. 변함없이 고수해야 할 원칙도 있고 시대정신에 따라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것도 있으니 지나치게 원칙만 고집하여 미물에게만 쓸모 있을 따름인 학식이어서는 곤란하다.

 

井渫不食 爲我心惻 可用汲 王明 並受其福
우물을 깨끗이 해도 먹을 수 없으니(井渫不食) 내 마음이 측은하다(爲我心惻) 능히 물을 공급할 수 있다면(可用汲) 임금을 밝혀(王明) 더불어 그 복을 받도록 하라(並受其福).
  설(渫)은 우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우물이 깨끗하게 되었으니, 그 인재가 이제 바른 길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런데 그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두레박이 깨어지고 없다. 이미 군주의 마음이 돌아섰기 때문일 것이며, 군주의 신임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물물과 그것을 퍼 내는 두레박 모두가 조화를 이뤄야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이제 두레박만 있으면 되니, 왕을 일깨워 두레박의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인재도, 군주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井甃 无咎
우물은 돌담을 쌓아 정비해야(井甃) 허물이 없다(无咎)
  우물은 돌담을 쌓는 것은 아무나 함부로 망칠 수 없도록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을 말함이니,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청아래에서 읍함이며, 시대를 가리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는 그 신념은 지켜주는 것을 말한다.

 

井 洌寒泉食
우물물은(井) 차고 맑고 끊임없이 샘솟아야 먹을 수 있다(洌寒泉食)
  그러나 돌담을 지나치게 쌓아서 순환시키지 않으려 한다면 고이고 썩어 쓸모없는 우물이 되고 만다.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명주 관을 쓰는 것을 말함이며, 시대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차고 맑게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井收勿幕 有孚 元吉
우물을 거두더라도 덮개를 씌우려 하지는 말아야 하니(井收勿幕) 신념이 있어야(有孚)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우물을 거두는 것은 고여서 썩는 것을 방비함이다. 그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덮개를 씌우는 것은 그 우물의 자존까지 뭉개는 것이니 지나친 것이다. 억지로라도 시대정신을 따라서 나아가게 해야 하지만 그 신념까지 무너뜨리는 것은 옳지 못하니 스스로 깨우쳐 나아갈 수 있는 기회까지 박탈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야 근원적으로 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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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初六】浚恒 貞 凶 无攸利

【九二】悔亡

【九三】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九四】田无禽

【六五】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上六】振恒 凶

  항(恒)괘는 변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곧 신념을 뜻한다. 지나치게 강한 신념은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지만, 신념이 없으면 자기 생과 삶을 개척해 나가지 못하고 이목에 이끌려 피동적으로 따라다니는 삶을 살게 만든다. 신념은 맹목과 맹신이 아니다. 귀를 닫고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귀를 더 열고 눈을 더 크게 떠야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의무필무고무아(毋意毋必毋固毋我)'하셨다고 하니, "맘대로 짐작하는 것, 반드시 하려는 것,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 자신만 옳다고 하는 것" 이 네 가지 병통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논어 제9편 자한 제4장]

 

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신념(恒)을 세우는 것은 성장기여야(亨) 허물이 없고(无咎) 성숙기와 마감기로(利貞) 시간이 지나가면 결실을 맺게 된다(利有攸往)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모범의 틀에 갇혀있으면 1등을 할 수는 있겠지만 수동적인 틀에 박힌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공자께서는 "함께 배운다고 반드시 같은 길을 가지는 않으며, 같은 길을 간다고 반드시 같은 성취가 있는 것이 아니며, 같은 성취가 있다고 반드시 같은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9편 자한 제30장]고 하셨다. 사람은 기계부품처럼 같을 수 없으니 젊을 때 자아를 확립하고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을 때의 확립된 자아와 신념은 식견이 부족하여 냉정하고 정확할 수는 없을 것이나 허물은 아니다. 성숙기 마감기를 향해 시간이 지나가면, 식견이 높아지고 그 신념이 바르게 확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浚恒 貞 凶 无攸利

지나치게 고집하면(浚恒) 끝(貞)이 흉(凶)하니 유리할 것이 없다(无攸利)

  준항(浚恒)은 조금의 융통성도 용납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고집스러움을 뜻한다. 논어에 “큰 절개는 엄격해야 하지만, 작은 절개는 때론 들고 날 수가 있다”[논어 제19편 자장 제11장]고 하였다. 제자 안회가 죽자 공자께서도 지나치게 슬퍼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상심하였느냐? 그러나 이런 사람을 위해서 지나치게 상심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서 지나치게 하겠느냐?”[논어 제11장 선진 제9장]고 하셨다. 조선조의 유학은 작은 절개가 들쑥날쑥하면 마음이 방종해져 큰 절개를 해친다고 주장하며 엄격한 원칙론을 고수하였으니, 주역에서 말하는 준항(浚恒)이 아니었는가 싶다.

 

悔亡

그러나 후회는 없을 것이다(悔亡).

  지나친 원리원칙주의자는 외적으로는 흉하나 내적으로 후회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맞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옳다고 믿기 때문에 고수하는 것이기 때문인 까닭이다.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신념 없이 순종하는(不恒其德) 것이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하고(或承之羞) 끝내(貞) 어려움을 당하게 한다(吝)

  신념이 있는 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자아가 확립되고,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신념 없이 순종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고 끝내 어려움을 당하니, 생각이 없어 갈대처럼 휘둘리는 사람보다는 지나쳐 융통성이 없을지라도 신념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田无禽

사냥을 해도(田) 잡은 짐승이 없을 수는 있다(无禽)

  신념으로 인해 먹는 문제 즉, 경제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는 있다. 순종하는 사람과 지나치게 고집하는 사람 모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신념 없이 순종하면 수치스럽게 되니 곧 정신적인 아픔을 당하고, 지나치게 신념을 고집하면 고고함은 지킬 수 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런 심리적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신장은 욕심이 많은데 어떻게 굳셀 수 있겠는가?”[논어 제5편 공야장 제11장]라고 하셨다.

 

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그 덕이 한결같아(恒其德) 끝까지(貞) 변치 않으면 부인은 길하겠지만(婦人吉) 남편은 흉하다(夫子凶).

  그래서 부인의 뜻을 꺾기가 더 어려울 지도 모른다. 남편은 집안과 가정을 위해서 그 뜻을 쉽게 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양의 의무감은 남자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역의 손(損)괘에서는 가정이 없는 충복(得臣无家)을 얻는다는 효사가 등장한다. 가정이 있으면 완전한 충복이 되기가 어렵다. 가정의 생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인의 덕은 가정을 단속하는 것이기에 변치 않아야 길하고, 남편의 덕은 소축기(가정), 대축기(사회)를 거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변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결같으면 흉하다라는 해석도 좋은 것 같다.  

 

振恒 凶

신념을 흔드는 것(振恒)은 흉(凶)하다.

  신념은 내면적인 자존이다. 외부에서 영향을 주어 신념을 가지도록 하거나 신념을 굽히도록 강제하는 것은 흉할 뿐이다.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삼군대장의 권력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일개 보통사람이라도 그 의지를 빼앗을 수는 없다”[논어 제9편 자한 제26장]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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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往)이 독자적으로 쓰일 경우에는 ‘나아가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장소를 뜻하는 유(攸)와 결합하면, 유유왕(有攸往)은 '나아갈 곳이 있다면'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나는 왕(往)이 언제나 나아가는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 "내 보낸다"는 뉘앙스를 가진다고 생각되는 곳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에서 왕(往)은 래(來)와 결합하여 곧 잘 사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大往小來(대왕소래)"는 큰 것을 내 보내고 작은 것을 받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유유왕(有攸往)은 ‘시간을 내 보내는 것’으로 풀었다.
일반적으로 유(攸)는 장소를 뜻하지만, '시간이 오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해석을 시도했냐고 하면,
대부분은 그렇게 해석해야 전체적으로 문맥과 더 어울려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리유유왕(利有攸往)'갈 곳이 있으면 이롭다'해석하는 것과
'시간이 지나가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해석이 되어버린다.
그 점을 감안하면서 주역을 보시길 바란다.

 

나아감을 뜻하는 말은 정(征)과 행(行)도 있다. 왕(往)은 길을 모르고 나아가는 것이라면,
정(征)은 바르다는 내적 확신을 하고 힘차게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행(行)은 피동적인 뉘앙스로 ‘따라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쁠 부(孚)에 대해서 그 의미에 큰 논란은 없다.
새가 그 다리를 바꿔가며 알을 품어주어, 그 알을 깨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인데,
특히 유부(有孚)라는 결합어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신념’이요, ‘믿음’이요, ‘생각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는 어렵지 않으나 문맥상 적당히 번역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이 없어 곤란한 면이 있다.
생각없이 하는 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을 갖고 하는 것'이란 뉘앙스로 해석했으면 한다.

 

이상, 주요한 용어에 대한 간단한 원론적인 설명을 마친다. 이러한 용어풀이가 모든 주역에 통용되는 주역 사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변화를 거쳐서 괘효사가 추가, 삭제, 수정되는 과정에서 전체를 통괄하는 완벽한 통일성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이러한 상식을 갖고 문맥에 가장 어울리게 해석하는 융통성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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