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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睽 小事 吉
【初九】悔亡 喪馬勿逐 自復 見惡人 无咎
【九二】遇主于巷 无咎
【六三】見輿曳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
【九四】睽孤 遇元夫 交孚 厲 无咎
【六五】悔亡 厥宗 噬膚 往 何咎
【上九】睽孤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匪寇婚媾 往 遇雨則吉

  규(睽)괘는 어긋나다는 뜻이니, 단절과 헤어짐을 뜻한다. 12번째의 비(否)괘와의 차이는 비(否)괘는 수치스러워도 숙이고 복종하면 어울림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헤어지는 것이며, 규(睽)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단절이다. 예를 들면 이혼을 하여 다른 길을 가는 결별은 비(否)괘이지만 배우자와 사별(死別)하게 되는 것은 규(睽)괘이다. 37번째 가인(家人)괘에 이어서 등장하는 이유는 부인이 지아비를 잃는 상황을 상정한 까닭이다. 과거 전쟁 등으로 사별하는 여인들이 많았기에 과부들도 많았을 것이다.

 

睽 小事 吉
헤어짐(睽)은 작은 일로 받아들여야(小事) 길(吉)하다.

  헤어짐은 하늘의 순리로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며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이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나지 않았으면 이별이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니, 주역에서 말한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자연의 섭리라고 받아들여야 길하다.

 

悔亡 喪馬勿逐 自復 見惡人 无咎
후회가 없다면(悔亡) 잃어버린 말을 다시 찾으려 하지 마라(喪馬勿逐) 스스로 돌아오기 마련이다(自復) 악인을 외면하지 않아야(見惡人) 허물이 없다(无咎)
  후회가 없어야 한다(悔亡)는 것은 자책은 하지 마라는 말이다. 떠나는 것(사랑)을 막으려 하지 말고 오는 것(惡人)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惡人)은 마음속에 살고 있는 악마이니 임을 떠나 보내고 원망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그를 외면하지 말라는 말이니 역설적으로 ‘자책을 하지 말고 하늘을 원망하고 미워하라’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원망(惡人)은 저절로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허물이 아니다. 옛 성현들께서 강물을 대하시며 생각하시던 ‘그 들고나는 물은 쉼 없이 바뀌지만 강물이 흐르는 것은 변함없이 일정한 모습이구나’하는 뜻과 닮아있다. 사랑은 다시 찾아온다.

 

遇主于巷 无咎
우연히(遇) 거리에서 주군을 만나니(主于巷) 허물이 없다(无咎).

  잃어버린 말은 찾으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오듯 사랑은 다시 찾아온다. 나의 새로운 주인 될 낭군님도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역은 수절하고 사는 과부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형사취수”는 동양에서는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었다고도 하니(고구려 고국천왕의 부인이었던 우씨의 산상왕 선택) 홀로된 여인을 배려하기 위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見輿曳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
소가 끌어야 할 수레를 보니(見輿曳其牛掣) 그 사람이 코가 잘리고 죄수의 표식을 하고 수레를 끌고 있다(其人天且劓)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나(无初) 끝이 있는 것(有終)이다
.
  한 사람의 삶이 너무도 비참한 지경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어 안타깝고 가여운 마음에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어찌할 줄 모르게 될 것이나 그 사람의 불행한 삶도 하늘(영원한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찰나일 뿐이다.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은 변하고 끝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끝이 있으며, 모든 만남은 이별이 있다. 죽음의 의미를 깨달으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의 큰 일은 아닌 것이다.

 

睽孤 遇元夫 交孚 厲 无咎
이별은 외로움을 낳지만(睽孤) 근원적 아버지를 만나게 되니(遇元夫) 믿음으로 교류하면(交孚) 위태로워도(厲) 허물은 없다(无咎).
  사람이 혼자 남겨지고 고독해지면 깨달음이 생긴다고 한다. 근원적 아버지(元夫)는 종교로 말하면 신이며 철학으로 말하면 깨달음일 것이다. 아프고 괴롭기 때문에 근원적 아버지를 만나고 그를 믿고 따르며 구원을 바라는 것은 냉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믿음이라 위태로움은 있을 것이지만 의지해도 허물은 아니라고 한다.

 

悔亡 厥宗 噬膚 往 何咎
후회를 없애면(悔亡) 가족이나 종족이(厥宗) 고기를 씹도록 해 줄 것이니(噬膚) 그렇게 나아감(往)에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何咎)

  후회는 스스로 자책하여 자신을 망치는 것을 말한다. 자책하지 않고 이별의 순리를 인식하고 순리로 받아들여 작은일(小事)이라 여기는 것이 후회를 없애는 것이니,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종족으로부터 위로해주고 보살펴주는 도움의 손길이 있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이다.

 

睽孤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匪寇婚媾 往 遇雨則吉
이별은 외로움이 따르나(睽孤) 진흙을 바른 돼지를 만나게 될 수도 있어(見豕負塗) 한 수레의 귀신처럼 실려온다(載鬼一車) 먼저 화살로서 맞서보면(先張之弧) 후에 활을 내려놓게 될 것이니(後說之弧) 도적이 아니라 혼인을 청하러 오는 것이다(匪寇婚媾) 손잡고 나아가면(往) 비를 만나 진흙이 씻겨져 나갈 것이니 길하다(遇雨則吉)
  사별하고 난 후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주역은 말한다. 팔을 벌려서 새 인연을 맞아 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귀신이라 여기고 ‘화살로서 맞서보라’고. 그러면 그가 귀신이 아니라 돼지임을 알게 되고, 결합하러 찾아 오는 새 인연임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나에게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날을 세우면서도 서서히 마음이 열려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드라마의 줄거리가 생각나는 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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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離 利貞 亨 畜牝牛 吉
【初九】履錯然 敬之 无咎
【六二】黃離 元吉
【九三】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九四】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六五】出涕沱若 戚嗟若 吉
【上九】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리(離)괘는 아래 위로 해가 두 개인 괘이다. 이미 해가 있으면 다시 해를 만들지 않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리(離)괘는 해가 있음에도 하나의 해를 더 만드는 것이니, 곧 바람직하지 않은 힘의 행사이다. 새로운 해는 기존의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세상에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저물어 없어지고 난 후에 나서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 시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옳지 못한 침략을 상징한다.

 

離 利貞亨 畜牝牛 吉
침략(離)은 결실을 얻고 끝을 낸 후에(利貞) 성장시키겠다는 것이나(亨) 순한 암소를 기르듯(畜牝牛) 순응해야 길(吉)하다.
  주역이 말하는 순탄한 변화의 법칙은 씨(元)가 자라서(亨) 열매를 맺고(利) 소멸하는(貞)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침략은 엎어버린 후에(利貞) 성장(亨)을 도모하는 것을 말함이니 천도(天道)를 벗어난 것이며 섭리에 따르지 않는 조급함이다. 곧 해가 있는데 해가 나서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긋남을 도모하지 말고 순한 암소를 기르듯 해야만 길할 것이다. 암소는 곤(坤)괘의 암말과 마찬가지로 유순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유순하지 못하면 전쟁이 있고 파괴가 있고 이별이 있게 된다.


履錯然 敬之 无咎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면(履錯然) 그것을 공경해야(敬之) 허물이 없다(无咎)

  이착연(履錯然)은 발소리가 어지럽다는 말이다. 어지러운 발소리는 군사들이 훈련을 하는 소리이다. 급박하게 뒤섞인 발소리를 들으면, 보지 않아도 군사의 훈련임을 안다. 비가 오기 전에는 청개구리가 울고, 제비가 낮게 나는 등등의 비의 징조가 있고, 태풍이 불기 전에는 별이 지나치게 맑거나 해륙풍이 무너지는 징조가 나타난다. 중용에도 “나라와 집안이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고, 나라와 집안이 망하려 하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조짐이 있다”[중용 24장]고 하였다. 어지러운 군사의 발소리는 침략의 징조이다.

 

黃離 元吉
중용의 덕으로 침략을 대하면(黃離)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문종이 김종서에게 ‘중정(中正)’에 관해서 물으니, "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으며 지나침도 없고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을 뜻합니다. 정(正)이란 것은 지극히 공평하여 조금도 사심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정(正) 또한 중(中)입니다" 즉,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의 중간이 아니라, 바른 것이 중(中)이라는 말이다. 중은 또한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中)으로 침략을 대하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해가 중천에 있는데 다른 해를 만들려는 것이라면 응징해야 하고, 이미 기운 해라면 물러나는 것이 곧 중(中)을 따르는 것일 게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나라가 희망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고려에게 나라를 바쳤으니, 그 또한 중용으로 침략을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해가 기울면 침략을 대비해야 하는데(日昃之離) 북을 쳐서 경계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니(不鼓缶而歌) 경험 많고 혜안이 있는 노인네가 탄식하게 되어(則大耋之嗟) 흉(凶)하다.
  해가 차서 기울고, 기존의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등장하게 되는 변화가 이어지게 하는 것이 하늘의 섭리이다. 해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해가 떠 오르는 순조로운 순환이 이뤄지면 좋겠지만,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급하게 그 틈을 노리는 침략의 위험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침략을 대비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만 하고 있으니 경험 많은 노인네가 어찌 탄식이 없겠는가? 공자께서 “사람이 멀리 내다보고 고민하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이 가까운 날 생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2장]고 하셨다.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침략은 갑작스레 이뤄져(突如其來如) 불태워버리고(焚如) 죽여버리고(死如) 내다버리고(棄如) 한다.

  평화롭던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것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와 힘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공든 탑은 오랜 시간이지만 그 무너지는 것은 일순간이다. 급작스럽게 불타고 죽고 버려지게 된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出涕沱若 戚嗟若 吉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出涕沱若) 탄식이 쏟아져 나오니(戚嗟若) 길(吉)하다
.
  눈물이 비오듯 하고  탄식소리가 끊임없는 까닭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니 길하다. 불타고 죽고 버려져도 끝장이 난 것이 아니니, 침략자가 순리를 따르지 않은 까닭이다. 해가 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해를 만들려고 한 침략세력의 과욕 때문이니 천명(天命)이 침략자들에게 있지 않은 까닭이다.

 

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왕이 출정하여(王用出征) 기쁨을 줄 것이다(有嘉). 우두머리는 참수(折首)해도 그 부하들은 죽이지 않아야(獲匪其醜) 허물이 없다(无咎).
  왕이 출정을 하는 것은 바른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이다. 왕이 사람들을 모아 반격을 하여 승전할 것이나 다만 우두머리는 참수해도 그 부하들은 죽이지 않아야 한다. 주역의 이 가르침에 의하면 일본의 위정자들은 미워해도 일본 국민을 미워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된다. 백성들은 모두 같은 힘없고 가엾은 생명일 뿐이다. 참수하고 미워해야 할 이는 그들을 이용한 우두머리 계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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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否之匪人 不利君子 貞 大往小來
【初六】拔茅茹以其彙 貞 吉 亨
【六二】包承 小人吉 大人否 亨
【六三】包羞
【九四】有命无咎 疇 離祉
【九五】休否 大人 吉 其亡其亡 繫于苞桑
【上九】傾否 先否後喜

비(否)는 ‘막히다’라는 뜻이다. 비괘의 괘상은 하늘과 땅이 서로 강건하여 교합하지 못하고 막히는 괘상이다.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만, 도저히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하늘과 땅이 서로 강건하게 자리하여 가는 길이 다르니, 어울려 소통될 수 없는 만남이다. 서정윤 시인의 싯구가 떠오르는 괘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否之匪人 不利君子 貞 大往小來
헤어짐은 사람의 할 일이 아니라며(否之匪人) 군자가 고집(貞)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不利君子) 큰 것을 보내고 작은 것을 얻는 것(大往小來)이다
.
  앞의 태(泰)괘에서 어울림은 작은 것을 보내고 큰 것이 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비괘에서 어울림을 고집하는 것은 큰 것을 보내고 작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라 한다. 군자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서는 헤어져야 한다. 

 

拔茅茹以其彙 貞 吉 亨
띠풀 하나를 뽑으면 뿌리가 얽힌 여러 포기가 함께 뽑히니(拔茅茹以其彙) 그렇게 사람들과 엮여야 끝까지(貞) 길(吉)하고 형통(亨)한 것이다. 
  앞 편의 태(泰)괘에서 말한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엮여서 더불어 나가야 마땅하며, 진리인 것은 틀림없다.

 

包承 小人吉 大人否 亨
그렇다고 무조건 순종하여(包承) 어울리는 것은 소인에게는 길할 것(小人吉)이나, 대인은 그러한 사귐은 거부하여야(大人否) 발전이 있다
.
  어울리고 함께 하기 위하여 눈을 막고 귀를 막고 무릎을 꿇는 것을 뜻한다. 집안을 가장 중시하는 소인이라면 그렇게라도 억지로라도 어울려야 좋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익(公益)을 도모하는 대인은 그러한 어울림은 거부하여야 형통하다. 공자께서도 "가는 길이 같지 않으면 함께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40장]고 하셨다.

 

包羞
무조건 순종하는 것(包)은 수치스러운(羞) 일이다.
  어울리기 위해서 굽히는 것은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이다. 그러나 소인은 그 수치스러움을 감당하고서라도 어울려 가정을 위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자와 대인은 그런 어울림이라면 거부하여야 한다. 물론 소인보다 군자와 대인이 우월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명과 맡은 역할이 다른 사람일 뿐이다.

 

有命无咎 疇 離祉
사귀지 못함이 운명(有命)이라면 허물이 없다(无咎). 절도를 지키며(疇) 헤어짐이(離) 복(祉)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
  하늘은 똑 같은 생명을 주었지만, 토끼와 호랑이는 어울리지 못하게 하셨다. 천성적으로 어울릴 수 없도록 한 것이 하늘의 명(命)이라면 따라야 한다. 명(命)이 다르다면 헤어지는 것이 오히려 복이다. 떠나야만 하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다. 보내 주어야 한다.

 

休否 大人 吉 其亡其亡 繫于苞桑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休否) 대인에게는(大人) 길(吉)하다. 죽을 듯 죽을 듯 하더라도(其亡其亡) 질긴 뽕나무뿌리에 매어놓아야 한다(繫于苞桑)
 
   대인(大人)은 본시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이별을 해야만 하는데 어찌 가슴이 찟어질 듯 아프지 않겠는가? 시간을 쉬어가는 것이 하나의 지혜다. 마치 죽을 것처럼 아프더라도 단단하게 단도리를 잘 해야 한다. 뽕나무뿌리는 어떤 식물보다 질기고 견고한 뿌리로 알려져 있다.

 

傾否 先否後喜 
막힘이 뒤집힐 것이니(傾否) 헤어짐으로 시작해(先否) 기쁨을 찾는 것이다(後喜).
  지나가는 시간앞에서 모든 것은 변하게 된다. 20살때 죽을 것 같았던 이별이 40때가 되어 생각해 보면, 좀 더 선명히 기억나는 꿈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인생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도 하는 것일게다. 이별이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고, 변화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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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