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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자 하는 뜻은 풀이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살고자 하는 뜻은 물고기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모두 하늘이 준 귀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고기를 잡으셨습니다.

공자께서 낚시는 하셨으나 그물로 잡지는 않으셨다. 새를 잡았으나 둥지의 잠자는 새를 쏘지는 않으셨다. [논어 제7편 술이 제27장]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토끼를 보면 연민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토끼보다 나쁜 생명일까요?
호랑이는 제 성(性)을 따르는 것 뿐입니다.

 

성(性)을 따른다는 것은,
하늘이 준 그대로의 자연(自然)스러움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性)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는데 있어서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중용(中庸)'을 이탈하게 합니다.


고상함과 고원함을 추구하여,
인간을 채식동물로 만들려고 하고,
야성을 극도로 추구하여
다른 생명들의 씨를 말려버리려고도 합니다.

 

욕구도 성(性)입니다.
욕구를 아예 없애는 것은 성(性)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중용의 사유는 모자람도 경계하고, 지나침도 경계합니다.

욕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거나 지나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유학은 차별적 사랑도 긍정합니다.
하늘이 준 감정(情)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어미가 제 새끼를 우선 돌보는 것은 자연(自然)스러움입니다.
문제는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다른 새끼를 우선 돌보라고 하거나,
나를 위해 자기 새끼를 죽여도 괜찮다는,
그런, 치우침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합니다.

 

혹시 오해가 생길까 싶어 부연하고 가야겠습니다.

‘중용’의 정신은 보편적 타당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태가 틀렸다’는 일반론으로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 나를 떠나 있는 진리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지극히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의 성(性)을 밝혀

모자라지도 치우치지도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제반 사정을 감안하여 가장 마땅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출발점이며,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가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 기준을 세우는데 있어서 지극히 진실한 마음으로 접근하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남들의 이목, 선입견 등등의 모든 속박을 걷어내고,

나만이 알 수 있는 내면의 울림으로, 진실한 성(性)을 따르는 마음으로,

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로 접근하는 것이 중용입니다.

 

중용 제1장입니다.

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을 삼가고 두려워해야하니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드러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고 [莫見乎隱]

나타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다 [莫顯乎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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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알깨기

인간도 동물입니다.

‘고도의 지능’이라는 특이한 성(性)을 부여받은 동물입니다.

특이할 뿐인데,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정(情)이라는 것은 인간의 성(性)이 아니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서 정(情)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기계가 되고,

인간에게서 이성(理性)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동물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순환하고 있고,

유학의 발전과정도 그러했습니다.

 

흥에 취하고, 신나하고, 울먹이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단단했고, 한번도 ‘음악’에 대해서 논한적이 없었습니다.

감성과 이성의 중용을 이탈하여, 이성중심으로 흘렀고,

조선조의 선비는 판박이 기계의 모습으로 꽉 막힌 사람들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情)으로 치우치면, 인간은 동물로 접근해 갑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명(命)하여 준 차별화된 성(性)은 ‘고도의 지능’입니다.

이 녀석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참으로 위험합니다.

불가능을 모르고, 한계를 모릅니다.

인간을 기계보다 더 한 기계로 만들 수도 있고,

인간을 동물보다 더 못한 생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유학의 배움은, 하늘이 준 ‘고도의 지능’을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中庸)에 맞추는 것입니다.

 

‘고도의 지능’은 해야할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귀’를 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역할은 짐승과는 다르게, 기계와도 다르게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은 다르지만, 귀가 맛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고도의 지능’은 제 한계를 모릅니다.

이 괴이한 녀석을 그대로 방치해 버리는 것은,

눈이 들을려고 애쓰게 만드는 것과 같고,

귀가 냄새를 맡으려 애쓰게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모든 조화가 깨어지고 부서져 버립니다.

 

그래서 중용 제1장에서 강조합니다.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행하도록 다듬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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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