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道德經) 제1장 간상(赶上)/노자(老子)2013. 1. 4. 16:37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
▣ 常(상) ≒ 영원한. 불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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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를 도(道)라 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도(道)일 수 없고, |
영원불변의 도(道)가 도(道)라는 이름을 갖는 순간 그것은 진정한 도(道)가 아니게 됩니다. 진정한 도(道)는 명칭과 형상이 끊어져 말로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시작은 이렇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내(노자)가 도(道)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완전한 도(道)일 수 없음을 참작하고 들으세요."
귀로 듣지 말고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통(通)하라는 당부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금강경의 상(相)에 관한 개념으로 대체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도(道)라는 상(相)에 사로잡히면 진리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죠.
무릇 모든 상(相)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
노자는 무(無)로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무(無)라고 이름 한 것일 뿐, 불교의 공(空)이나 다른 종교의 신(神)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모두 가리키고 있는 곳은 마찬가지니까요. 가리키는 손가락만 다를 뿐.
무(無)로부터 나온 천지라는 이름이 하나를 낳고 둘을 낳고 만물을 낳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입니다. 도덕경 제42장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슬픈 현실이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이름입니다. 나타나는 것은 다 그러합니다. 만나고 헤어집니다. 생겨나서 소멸합니다. 드러나는 현상의 측면은 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노자는 무(無)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노자는 말합니다. 무(無)와 유(有)를 함께 일통하여 하나임을 보자고 합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나지만, 그 무(無)는 유(有)가 있어야만 무(無)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서로가 서로를 이루고 있음을 보자는 말입니다. 무(無)와 유(有)가 서로서로 이루고 있음을 보는 것이 모든 신묘함을 풀어줄 열쇠라고 합니다.
앞에 언급한 금강경 사구계와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상(相)을 유(有)로 바꾸어 볼까요? '유(有)가 유(有)가 아님을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 여래(如來)는 진리, 도(道), 불(佛) 무엇으로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