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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효에 관해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 子游問孝 子曰:]
오늘날 효라는 것이 봉양을 잘 하는 것이라 얘기하곤 하는데 [今之孝者 是謂能養]
개나 말도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至於犬馬 皆能有養]
공경함이 없다면 (개와 말과 부모님이) 어찌 다르다 하겠는가 [不敬 何以別乎]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말씀이다. 물질적으로 봉양을 잘 한다고 해서 효행을 다했다고 여기는 것은, 부모님을 기르는 개나 말 취급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하신다.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공경하는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애완견을 잘 먹이면서 사람보다 더한 애정을 주고 받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애정과는 또 어떻게 다르다는 뜻일까?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맹자 진심 상 13.37]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먹여주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짐승으로 기르는 것이요, 사랑은 있으되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를 짐승으로 사귀는 것이다.

 
  다소 추상적인 얘기지만
경(敬)에는 신성하고 두려운 정서가 포함된다. 공포가 아니라 존경과 숭배에서 발현되는 두려움의 감정인데, 이것은 이해해야 하기보다 체험해야 할 영역인 것 같다. 유학에서 경(敬)이라는 개념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인데, 대강 경외와 숭배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정도의 관념을 가지고 앞으로 경(敬)에 대해서 접근하시면 좋을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만 보면 어려울 것이 없다.
부모님께 단지 물질적으로만 잘 봉양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가? 그점을 자문하면 쉬이 가슴으로 공감이 되는 가르침일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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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젊은이들은 집에서는 효도하고 [弟子入則孝]
밖에서는 어른을 공경하고 [出則悌]
행동은 신의로우며 [謹而信]
널리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汎愛衆]
인(仁)으로 다가가야 한다 [而親仁]
그리 행하고 힘이 남는다면 [行有餘力]
글을 배우는 것이다 [則以學文]

 

  마지막 구절에 무게를 싣고 있다. 행동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고, 글을 읽는 것은 가장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는 의미이니, 『논어』를 독서하는 가치를 낮추어 버리는 말씀이기도 하다.

  
  내용이 훌륭한 책보다 잘 팔릴 책을 우선 출판하는 이 시대에는 이런 글이 초반부에 배치된다면 출판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따져보면 참 이치에 맞는 말씀이다.

 

  오늘날의 우리 시대는 글을 모르기에 도리(道理)를 모르고 있는 시대인가? 글을 알고 도리(道理)를 알아도 '그렇게 실천하지는 못하겠다'는 시대인가? 아는 것과 실제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요, 유학은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이다.

 

  한편, 널리[汎] 사랑한다는 의미는 잘난사람 못난사람, 빈부귀천을 떠나서,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월급이 얼마요, 직업이 무엇이요, 학벌이 어떠한지 등등 그러한 외부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는 사랑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만으로 함께하는 진실된 사랑이다. 

  그러한 '참된 사랑으로 교감’하는 것이 인(仁)으로 가깝게 다가가, 인(仁)과 친해지는[親仁]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난해하게 인(仁)을 설명하지 않고 ‘인(仁)=진실한 사랑’으로 단순하게 정의하는 학자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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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 말씀하셨네 : [曾子曰:]
나는 날마다 세가지로 내 스스로를 반성한다 [吾日三省吾身]
남을 위해 힘씀에 최선을 다하였던가 [為人謀而不忠乎]?
벗과 더불어 사귐에 신의를 다하였던가 [與朋友交而不信乎]?
전해준 것이 익히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가 [傳不習乎]?

 

『논어』에서 공자와 함께 「선생님」을 뜻하는 자(子)라는 호칭을 유자(有子)와 증자(曾子)에 사용하므로, 『논어』는 유자와 증자 문하에서 편찬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쨌건 증자(曾子) 곧, 증 선생님이 말한 것은 ‘너희들은 이렇게 세가지로 반성해라’가 아니고, ‘내가 이렇게 반성한다’이다. 이 화법은 숨겨진 뜻이 있다. 비교적 쉽게 보이는 것은 ‘나에게 요구한다’는 유학의 '자기 실천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한편, 증자 자신도 어떨 때는 대충 힘쓰기도 하며, 어떨 때는 친구를 의심하기도 하며, 어떨 때는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전하기도 한다는 반성이 숨겨져 있다. 이미 그러지 않는 경지에 올랐다면, 날마다 자기를 돌아보며 반성할 까닭이 없으니, 이 장은 증자가 선생인 자기도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학이 요구하는 사람인 군자는 ‘완전한 성자’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치려고 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말로 잘못은 지나간 잘못이 아니라, ‘잘못을 숨기고 감추려고 애쓰는 꾸밈’이라고 했다.

  내용으로 돌아와보면, 증자의 세가지 반성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내면의 진실성’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할 때 자기를 더 내세우고 싶은 욕구가 이는 것이 사람이다. 이것을 ‘이중인격’이라고 비난해 버린다면, 이 세상에 이중인격자가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될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식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더 진실된 ‘나’를 이루라고 다그쳐야 한다. 그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는 나무랄 것이 아니라, 그런 욕구가 있음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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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말씀하셨네 : [有子曰: ]
그 사람됨이 효성과 공경이 있는데 [其為人也孝弟]
윗사람을 범(犯)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더라 [而好犯上者 鮮矣]
윗사람을 범(犯)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不好犯上]
난리를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而好作亂者]
아직 없었다 [未之有也]
군자는 근본에 힘써야 하며 [君子務本]
근본이 바로서야 도(道)가 생겨난다 [本立而道生]
효성과 공경이라는 것 [孝弟也者]
그것이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다 [其為仁之本與]


효(孝)는 부모를 공경으로 대하는 것이며,
제(弟)는 집안어른을 공경으로 대하는 것이다.
부모에 무조건 '복종'하고, 집안 어른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고마운 마음을 거부할 수 없어 저절로 그리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해 준게 뭐가 있어? 순이 엄마는 X도 해 주고 Y도 해 주는데'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다. 고 김수환추기경께서 생전에 '내 탓이요'라는 운동을 하셨던 적이 있다. 세상이 '원망'으로 채워져 가는 것을 그저 두고 보실 수 없으셨던 까닭이었을까?

 

이미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는 것이 인생의 한 단면이기도 하기에,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따져보면 세상은 한없이 감사해야 할 것으로 가득가득 채워져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자신을 살려주고 있는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부터 가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운 시대이다. 

만약, 어느 순간 자연이 공기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을 욕해야 할까? 
'이 XX 자연아! 당연히 니가 공기를 줘야지, 왜 안주냐?' 하고 욕해야 옳은 걸까?

현대인들이 가장 잘못 사용하는 말이 '고맙습니다'를 '당연하지'로 바꾸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니깐 당연히 그래야지...

 

산다는 것은, 내 의지로만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젖을 먹여 살수 있게 도와 주었고,
자연이 햇살과 공기와 물을 주고
하늘이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어
나를 살려주고도 있다.
 

사람은 일체의 도움이 없어도, 저절로 살 수 있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 인(人) 이라는 한자어는 하나(I)가 하나(I)를 받쳐주는 모습이다.

효(孝)와 제(弟)를 아는 마음은,
내가 나 저절로 잘나서 내가 아니라
나의 생(生)을 도와주었고 도와주고 있음을 아는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다.

'남'을 다 죽이면 나는 살 수 있을까?
'자연'을 다 없애면 나는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진정으로 효(孝)와 제(弟)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의 아들에서 단절될 수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삼촌의 조카에서 떨어질 수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남'으로 부터 떨어질 수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그런 일련에 구속된 '나'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연결되어 있어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다.

'더불어 하나'임을 아는 사람이
나만 보고 남을 범(犯)하려 하고,
나만 보고 난리(亂)를 피우려 하겠는가?

 

유자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움을 참으로 아는 것이 인(仁)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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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人莫不飮食也]
맛을 아는 사람이 드물구나 [鮮能知味也]

중용 제4장에 나오는 공자 말씀입니다.

그래서 밥먹는 중용을 한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왜 밥을 먹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배가 고픈 고통을 주어 결국은 먹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에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왜 변을 누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고통을 주어 결국 화장실로 향하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 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을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을 먹어 기쁨을 찾기 위해 훔쳐옵니다. 변을 누어 기쁨을 찾기 위해 화장실에 있는 놈을 끌어냅니다. 왜요? 천도를 따르는 것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성(性)을 따름을 고집함으로써 성(性)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와 너는 다른가요? 도(道)의 정의를 연결시켜보겠습니다. 나와 너는 ‘떨어 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태초이래로 '너'가 없는 '나'만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천도를 따라 기쁘고, 너도 천도를 따라 기쁘고, 그럼으로써 함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논어 첫장의 가르침’을 통해 연결해보시면서 그림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맛을 안다는 것'으로 넘어오겠습니다.

맛이란 것은 주관입니까? 객관입니까?
사람마다 달리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살던 지역, 문화, 먹어왔던 음식 등등에 따라서 모두가 다릅니다. 
나에게도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배가 고플 때, 배가 부를 때, 기분 좋을 때, 오랫만에 먹을 때, 언제나 틀립니다.

 

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람의 갇힌 머리는 맛을 일반화시키려 하고 객관화 시키려 합니다.
내가 맛있다고 느낀 음식을 상대가 맛있다고 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반드시 같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경우가 사실은 너무 많습니다.

‘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똑같이 알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도 없습니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있고 적게 아는 것도 있고, 사람마다 모두 틀린게 정상입니다.

엄친아(엄마친구의아들) 보다 못한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못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나와 똑같을 수 있는 사람은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잘나고 못난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맛을 안다는 것은 사람마다, 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분별 이후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으로 옮겨와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여 조화를 이룰려고 하는 것이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군주의 도(道)가 우월하고, 남편의 도(道)가 우월하고, 군자의 도(道)가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만든 것은 우위가 아니라 다름입니다.
우위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논어 제11편 선진 제15장을 통해서, 유학의 공경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께서 "유(由)는 어찌하여 내 집에서 비파를 타느냐?"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由)의 성취는 대청에 올랐고, 방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니라”

자로는 공자에 9살 적은 나이 많은 맏형입니다.
그런데도, 한소리 들었다고 까마득한 학생들이 우습게 대하기도 합니다.
보다 못한 공자께서 조정에 나섭니다.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대청에서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려했던 것이니, 너무 그러지들 말라고 합니다.

 

자로가 나이를 내세우며 호통을 치고 복종시켜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공자께서 다른 제자들을 혼내줘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유학에서의 분별은 '복종'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성별, 지위 등등의 분별은 언제나 '조화'를 향해 지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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困 亨 貞 大人 吉 无咎 有言 不信
【初六】臀困于株木 入于幽谷 三歲不覿
【九二】困于酒食 朱紱方來 利用享祀 征 凶 无咎
【六三】困于石 據于蒺蔾 入于其宮 不見其妻 凶
【九四】來徐徐 困于金車 吝 有終
【九五】劓刖 困于赤紱 乃徐有說 利用祭祀
【上六】困于葛藟 于臲卼 曰動悔 有悔 征 吉

  곤(困)괘는 내적으로 부족하거나 지나쳐 중용에 곧게 서지(利) 못함을 뜻하는 괘이다. 공자께서 “도를 실천하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안다. 지혜로운 사람은 너무 똑똑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자라기 때문이다”[중용 제4장]라고 하셨다. 곤(困)은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겪게 되는 곤란이 아니라 전적으로 마음이 중용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곤경이다.


困 亨 貞 大人 吉 无咎 有言 不信
곤경(困)은 모자라거나(亨) 지나친(貞) 이유이니 대인(大人)은 길(吉)하고 허물이 없다(无咎) 여러 소리가 들리겠지만(有言) 신뢰할 수 없다(不信)
  곤경(困)은 열매를 맺지(利)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좌로 치우쳐 여물지 못했거나(亨) 우로 치우쳐 기울어(貞) 만나게 되는 것이다. 대인이 길한 이유는 대인은 중용(中庸)의 도를 알기 때문이다. 곤경에 부딪히면 여러 소리들이 들리게 마련이다. 경청할 소리도 있으나 도움의 소리가 아니라 잘난 척 스승을 자처하는 교만의 소리도 있을 것이다. 약자에게는 입을 열고 모여들고 강자에게는 귀를 열고 모여들기 때문이다.

 

臀困于株木 入于幽谷 三歲不覿
곤장을 맞아 엉덩이가 곤란을 겪으려 하면(臀困于株木)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入于幽谷) 삼년 동안 세상을 돌아보지 마라(三歲不覿).

  죄인으로 몰려 부당한 형벌을 받게 되는 곤경에 처하니, 세상의 도가 무너졌는데 나아가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는 은둔 해야 하는 것이 중용이다.

 

困于酒食 朱紱方來 利用享祀 征 凶 无咎
먹거리로 인한 곤경에 처하면(困于酒食) 주황색가리개를 하고 찾아가(朱紱方來)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이롭다(利用享祀) 내세우면(征) 흉(凶)하나 허물은 없다(无咎)

  먹거리로 곤경에 처하니 곧 궁핍한 가난이다. 주불(朱紱)은 천자의 명으로 제후나 공경의 높은 지위의 신하가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가리개이다. 당장 주불을 받을만한 능력이 있는 자가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뜻을 지나치게 숭상하기 때문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길흉(吉凶)은 외면적 시각이고, 허물(咎)은 내면적 시각이다. 자리를 달라고 내세우면 보기에 흉하지만 허물은 없다. 때를 기다리는 수(需)괘에서 말한 경제적인 기반 속에서 기다림(需于酒食)이어야 중용이기 때문이다.

 

困于石 據于蒺蔾 入于其宮 不見其妻 凶
돌 위의 곤경(困于石)으로 가시덤불 속에서 잠을 청하니(據于蒺蔾) 집에 들어가더라도(于其宮) 그 아내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不見其妻) 흉(凶)하다.
  돌 위에서 자는 것은 부부관계를 혐오하는 지나치게 고상함을 따르려는 곤경이다. 납가새(蔾)는 가시덤불을 이루는 한해살이 풀로 그 곳에서 잠든다는 것은 성욕을 참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지나치게 고상하여 마음을 닫았으니 그 아내가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 흉하다. 동물적 본성을 지나치게 혐오하지 말아야 한다. 대소변을 누는 것도 고상한 일은 아니다.

 

來徐徐 困于金車 吝 有終
서서히 오는(來徐徐) 금차에서의 곤경(困于金車)은 궁색해지면(吝) 끝낼 수 있다(有終)
  금차에서의 곤경은 부자의 곤경이다. 서서히 오는 것은 이웃들의 수근거림이며, 그 까닭은 인색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베풀어 스스로 궁색해지면 그 곤경은 마무리를 할 수 있다. 부자는 욕심을 줄이고 그 재물을 나누는 것이 중용이다.

 

劓刖 困于赤紱 乃徐有說 利用祭祀
코를 베이고 다리를 절단 당하는(劓刖) 적불에서의 곤경(困于赤紱)은 천천히 기쁘게 하여야 하니(乃徐有說)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롭다(利用祭祀)
  적불은 천자의 명으로 대부들이 제사에 사용했던 가리개이다. 주불(朱紱)을 받는 신하보다 낮은 계급의 신하이다. 코가 베이고 다리가 절단 당하는 형벌을 받은 까닭은 제 분수를 모르고 제사에 참석하라는 천자의 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자의 명을 받들어 기쁘게 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롭다. 공자께서는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4장]고 하셨다. 본분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또한, 갑자기 기쁘게 하는 것은 변절자가 가지는 태도이니 서서히 고집을 꺾어 기쁘게 하는 것이 중용을 따르는 것이다.

 

困于葛藟 于臲卼 曰動悔 有悔 征 吉
칡덩굴처럼 얽히고 섥힌 곤경(困于葛藟)과 위태위태한(于臲卼) 곤경은 말하자면(曰) 후회가 움직일 것이라는 뜻이니(動悔) 뉘우치고(有悔) 극복하기 위해 나선다면(征) 길(吉)하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고 위태위태한 곤경이란 잘못을 즉시 바로잡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가 그 문제가 걷잡을 수 업게 된 상황에 처한 것을 뜻한다. 그제서야 뉘우치게 될 것이니 극복하기 위해 나서면 길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때이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는 “태어나면서 안다면 최고요, 배워서 안다면 그 다음이요, 곤경을 만나 배우면 그 다음이요, 곤경을 처해서도 배우지 않는다면 참으로 하등이다”[논어 제16편 계씨 제9장]고 하셨다. 뉘우치고 극복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곤경에 만나 비로소 느껴서 배우려고 하는 것이니 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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