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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에 해당되는 글 20

  1. 2013.01.14 제2편 위정(爲政) 제22장
  2. 2013.01.04 제2편 위정(爲政) 제7장
  3. 2010.09.28 하늘의 시간 건(乾) 2
  4. 2010.02.20 사람의 성(性)과 교육의 필요성
  5. 2010.02.01 33. 遯卦(둔괘) : 버리면 얻는 것을 알아도 버리기가 쉽지는 않다.
  6. 2010.02.01 30. 離卦(리괘) : 공든탑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7. 2010.02.01 29. 習坎卦(습감괘) : 함정은 잴 수 있지만, 절망의 깊이는 잴 수 없다.
  8. 2010.02.01 28. 大過卦(대과괘)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9. 2010.02.01 27. 頣卦(이괘) :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입 무거운 사람이 좋다.
  10. 2010.02.01 26. 大畜卦(대축괘)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1. 2010.02.01 25. 无妄卦(무망괘) : 자연을 지키지 못하면 인류를 지킬 수 없다.
  12. 2010.02.01 24. 復卦(복괘) :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13. 2010.02.01 23. 剝卦(박괘) :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14. 2010.02.01 22. 賁卦(비괘) : 멋을 부리고 치장하는 것은 젊을 때의 일이다.
  15. 2010.02.01 20. 觀卦(관괘) : 미래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16. 2010.02.01 19. 臨卦(임괘) : 인생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숙명
  17. 2010.02.01 18. 蠱卦(고괘)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8. 2010.02.01 17. 隨卦(수괘) : 생명은 편안하고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려 한다.
  19. 2010.02.01 15. 謙卦(겸괘) : 지극한 겸손은 남을 위해 애쓰는 것이다.
  20. 2010.02.01 14. 大有卦(대유괘) : 가진 자는 부(富)를 명예롭게 사용하라.
2013. 1. 14. 20:15

제2편 위정(爲政) 제22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4. 20:15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사람이 믿음이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큰 수레에 예(輗)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軏)이 없다면 [大車無輗 小車無軏]
어찌 움직일 수 있겠는가 [其何以行之哉]

 

  믿을 신(信)은 하나와 하나를 연결(人)시키는 말(言)이라는 의미다. 악당들조차 믿음이 없다면 그 무리는 해체된다. 좋은 연결이건 나쁜 연결이건, 연결되려면 믿음(信)이라는 연결끈이 있어야 한다. 예(輗)는 소가 끄는 우차에 소를 연결하고, 월(軏)은 마차에 말을 연결하는 기구이다.


  유가에서의 인간의 본성을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으로 분별한다. 분별은 언제나 조화를 지향하는 것. 결국은 성(性)으로 한 덩어리이다. 가슴속(心)에 살아있는(生) 것이 성(性)인데, 유가의 지향점은 이 성(性)을 찾는 것이다.

학문의 도(道)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 [맹자 고자 상 11.11]


  공자는 체득의 영역인 인(仁)은 그저 인(仁)이라며 설명하지 않았지만, 맹자가 보완하고자 설명하면서 부작용이 생겼다. 소위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비유 때문에 "측은지심 = 인(仁)"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후학들이 안과 밖에 있는 것을 가린다고 논쟁했다. 이렇게 다시 설명해보려고 한다.

"가녀린 아이가 불량배에 피가 터지도록 맞고 있다"

  맞고 있는 어린아이가 가여운 마음이 인(仁)이고, 이 폭력을 저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의(義)며, 북량배를 죽여버리지 않으려는 절제가 예(禮)이며, 나서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지 따져봄이 지(知)며, 이 사건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직시하는 것이 신(信)이다.


  끼워맞춰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마음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함께다. 의(義)를 강조했던 맹자 역시 의(義)는 독립되고 붙잡을 수 있는 관념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라고 설명했다.

의(義)를 행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의를 행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에서 잊어서도 안 되지만, 억지로 조장해서도 안 된다. [맹자 공손추 상3.2]


  얘기가 길어진 것 같다. 신(信)은 성(性)의 일면이라는 것. 신(信)이 없음은 한 덩어리로 융화하려는 도(道)에 역행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마무리 해야겠다. 예수를 믿지 못하면 예수와 이어질 수 없고, 붓다를 믿지 못하면 붓다와 이어질 수 없다. 마나님을 믿지 못하면 차려준 음식을 고맙게 먹을 수 없다. 멀어지고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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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자유가 효에 관해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 子游問孝 子曰:]
오늘날 효라는 것이 봉양을 잘 하는 것이라 얘기하곤 하는데 [今之孝者 是謂能養]
개나 말도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至於犬馬 皆能有養]
공경함이 없다면 (개와 말과 부모님이) 어찌 다르다 하겠는가 [不敬 何以別乎]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말씀이다. 물질적으로 봉양을 잘 한다고 해서 효행을 다했다고 여기는 것은, 부모님을 기르는 개나 말 취급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하신다.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공경하는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애완견을 잘 먹이면서 사람보다 더한 애정을 주고 받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애정과는 또 어떻게 다르다는 뜻일까?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맹자 진심 상 13.37]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먹여주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짐승으로 기르는 것이요, 사랑은 있으되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를 짐승으로 사귀는 것이다.

 
  다소 추상적인 얘기지만
경(敬)에는 신성하고 두려운 정서가 포함된다. 공포가 아니라 존경과 숭배에서 발현되는 두려움의 감정인데, 이것은 이해해야 하기보다 체험해야 할 영역인 것 같다. 유학에서 경(敬)이라는 개념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인데, 대강 경외와 숭배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정도의 관념을 가지고 앞으로 경(敬)에 대해서 접근하시면 좋을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만 보면 어려울 것이 없다.
부모님께 단지 물질적으로만 잘 봉양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가? 그점을 자문하면 쉬이 가슴으로 공감이 되는 가르침일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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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2010. 9. 28. 23:41

하늘의 시간 건(乾)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9. 28. 23:41

맹자가 제나라에 전해오는 말을 소개하였다 [맹자 공손추 상 3.1]

출중한 지혜를 갖는 것보다 유리한 기회를 잡는 것이 낫고,
좋은 농기구를 갖는 것보다 적절한 농사철을 기다리는 것이 낫다.

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다른 경우가 많다.
겨울에 씨를 뿌리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미숙할 때 움직이려 하지 말라’는 잠룡물용(潛龍勿用)과
‘물러나야 할 항룡일 때 물러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긴다’는
항룡유회(亢龍有悔)는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하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참 많이 쓰는 말이 있다. “바빠서 말이지…”
옛날 사람들도 이렇게 바쁘게 느끼며 살아갔을까? 옛날의 노래, 옛날의 춤과 같은 문화적 산물로 유추해보면 일견 오늘날보다는 여유로운 듯도 한데, 옛 글들을 보면 역시 바쁘다는 글이 많다. 장자가 말했다.[장자 제물론]

사람은 만물과 서로 다투기만 하고
말달리듯 지나가면서도 멈추고자 하지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종신토록 허덕여도 성공을 볼 수 없고
고달파 쓰러지면서도 되돌아가야 할 바를 알 지 못하니
참으로 애처롭지 않겠는가!

과거에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오늘날 군대는 천국일거라 여기기도 하지만, 더 좋은 환경 같은데도 여전히 힘들어 하고 자살을 하기도 한다. 옛날의 군대나 오늘날 군대나 옛날의 시간이나 오늘날의 시간이나 힘들고 바쁘기는 마찬가지란 말일까? 조선시대에도 행복하게 살았던 여인들이 있고, 풍족한 오늘날에도 불만 속에 사는 여인들이 있다.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와의 갈등’은 드라마나 소설의 소재로 자주 사용되던 얘깃거리였다.
돈 많지, 잘 생겼지, 마음씨 좋지,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A를 마다하고, B가 좋다는 아이 때문에 부모는 경악한다. 단 하나만 B보다 A가 못한 것을 말해보라며 애원하기도 한다. “완벽한데도 정이 안 가!”     
공자가 말했다.

삼군대장의 권력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일개 보통사람의 그 의지를 빼앗을 수는 없다 [논어 9.26]


사람은 합리적 사고로만 결정하고 느끼는 로봇이 아닌 까닭에,
하늘의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일정하지만, 사람이 만나는 시간의 속도는 일정할 수 없다.
결국 변화(易)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자연의 변화는 저절로 변하는 것이며,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 같은 ‘느끼는 변화’는 바깥이 아니라 자기 마음 내부에서 변화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유명한 광고문구가 있다.
더러운 세상을, 배려심이 없는 남편을, 말 안 듣는 아이에게 변화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易)를 원한다면 자기에게서부터 변화를 찾아가야 한다.
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행복하다고 하며 감동하는 사람도 있으니,
과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같은 세상을 두고,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리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자연의 변화(易)와 바꿀 수 있는 느끼는 변화(易)를 분별하고,
바꿀 수 있는 변화라면, 나로부터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 주역이 말하는 변화(易)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주역은 미숙한 잠룡일 때는 성급히 움직이려 하지 말아야 하고,
물러나야 할 항룔일 때 물러나지 않으면 후회를 남긴다고 가르치는데,
과연 잠룡인지, 항룡인지는 어떻게 안다는 것일까?

본래, 스스로 잠룡인지, 항룡인지를 알면서도 서둘거나 고집하는 경우만을 주역이 상정한 것은 아니다.
남들과 세상은 모두 다 잠룡인 줄 알고, 항룡인 줄 아는데,
자기 스스로는 잠룡이 아니라고 여기고, 항룡이 아니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역시 마음이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당한 시간이 되었다는 것, 밥을 먹어야 할 때인지, 잠을 자야 할 때인지는 본래 스스로 가장 잘 안다.
그러나, 먹지 않고 사는 ‘독립영양인간’이 있다는 뉴스를 본 후 안 먹다가 죽었다는 사람도 있더라.
신이 부르시니 가야 할 때가 되었다며 자살했던 신도들도 있더라.

결국, 주역의 판단은 중용(中庸)의 철학을 향해서 흘러간다.
나를 돌아보지만, 나만 보는 것이 아니다.
너로부터 돌이켜도 보지만 너의 시선에 전적으로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는 중용(中庸)이라는 균형의 기준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적당한 때를 판단해야 하는 것은, 주관(나)에서 시작하여 객관(너)으로 판단하며 내가 감수한다(나)는
[나 → 너 → 나]의 3단 구조를 갖는다.

참고로 이 3단 구조는 유가철학의 큰 근본이다. 논어의 제1편 학이 제1장을 예로 들어본다.

배워서 때때로 익혀보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먼 곳일지라도 찾아주는 벗 생기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리니 어찌 군자이지 않겠는가?

[나의 기쁨→너와 더불어 함께하는 즐거움→자존을 잃지 않는 나]
유가철학의 개념들은 모두 이 [나 → 너 → 나]의 구조로 얘기할 수도 있다.

왜 효도를 하나요? [내가 기쁘기 때문입니다 → 부모님께서 알아주시면 함께 즐겁구요 → 부모님께서 몰라주셔도 여전히 기쁘며 원망이 생길 리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알아주기를 바라고 효도하겠다는 것이 아니니까요... 

【爻辭】


元亨利貞
(시간이 맞아야)
씨앗에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죽게 된다

【初九】

潛龍勿用 잠룡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말라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
【九三】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군자가 되어 종일 최선을 다하고
어두움을 경계한다면 위태로울지라도 허물이 없다
【九四】 或躍在淵 无咎 도약을 신중히 헤아리며 연못 속에 있어야 허물이 없다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하늘을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
【上九】 亢龍有悔 오르려고만 하는 용은 후회가 있다
【用九】 見群龍无首 吉 용의 무리에 우두머리가 없으니 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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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깨기

인간도 동물입니다.

‘고도의 지능’이라는 특이한 성(性)을 부여받은 동물입니다.

특이할 뿐인데,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정(情)이라는 것은 인간의 성(性)이 아니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서 정(情)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기계가 되고,

인간에게서 이성(理性)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동물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순환하고 있고,

유학의 발전과정도 그러했습니다.

 

흥에 취하고, 신나하고, 울먹이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단단했고, 한번도 ‘음악’에 대해서 논한적이 없었습니다.

감성과 이성의 중용을 이탈하여, 이성중심으로 흘렀고,

조선조의 선비는 판박이 기계의 모습으로 꽉 막힌 사람들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情)으로 치우치면, 인간은 동물로 접근해 갑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명(命)하여 준 차별화된 성(性)은 ‘고도의 지능’입니다.

이 녀석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참으로 위험합니다.

불가능을 모르고, 한계를 모릅니다.

인간을 기계보다 더 한 기계로 만들 수도 있고,

인간을 동물보다 더 못한 생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유학의 배움은, 하늘이 준 ‘고도의 지능’을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中庸)에 맞추는 것입니다.

 

‘고도의 지능’은 해야할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귀’를 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역할은 짐승과는 다르게, 기계와도 다르게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은 다르지만, 귀가 맛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고도의 지능’은 제 한계를 모릅니다.

이 괴이한 녀석을 그대로 방치해 버리는 것은,

눈이 들을려고 애쓰게 만드는 것과 같고,

귀가 냄새를 맡으려 애쓰게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모든 조화가 깨어지고 부서져 버립니다.

 

그래서 중용 제1장에서 강조합니다.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행하도록 다듬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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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遯 亨 小利貞
【初六】遯尾 厲 勿用有攸往
【六二】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九三】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九四】好遯 君子吉 小人否
【九五】嘉遯 貞吉
【上九】肥遯 无不利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것이 바른 도(道)이다. 둔(遯)괘는 숨는다는 뜻이나 비겁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용기있게 물러나는 것이다. 둔(遯)은 집에서 기르던 돼지(豚)가 우리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공자께서 “함부로 위험한 나라에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 거처하지 않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살아있으면 나와 일해야 하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숨어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3장]고 하셨으니, 외형은 물러남이지만 결과는 바른 곳으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둔(遯)괘이다.

 

遯 亨 小利貞
물러나야(遯) 할 때는 성장기(亨)여야 하고 결실기와 마감기(利貞)에는 득이 적다(小)
  물러나는 것도 때를 놓치면 어렵게 된다. 일을 시작하여 성장하는 단계에서 물러나는 것이어야지 이미 결실기와 마감기로 접어드는 때 물러나는 것은 발을 너무 깊게 담근 상태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초창기에 과단하게 발을 빼야 한다. 시기가 늦으면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배신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遯尾 厲 勿用有攸往
미련을 남겨두면(遯尾) 위태로우니(厲) 시간이 지나가도록 기다리지 말라(勿用有攸往)
  많은 경우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기다리는 것은 좋지 못하다. 물러나야 할 때라면 미련을 두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과단하게 물러나야 한다.

 

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황소의 가죽처럼 굳세고 질기게 물러나야 하니(執之用黃牛之革)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물러나겠다는 말을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莫之勝說)
  미련을 남기지 말고 황소의 가죽처럼 단호하게 물러나야 한다.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여 혼란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맹자』의 ‘부유하고 귀한 것이 흔들 수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것이 바꾸게 할 수 없고 위협과 무력이 굽히게 할 수 없다’는 말처럼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물러나야 할 때라면 과단성 있게 물러나야 한다.

 

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물러남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係遯) 병통이 있고(有疾) 위태로울 수도 있다(厲) 대비하여 신첩을 길러야(畜臣妾) 길(吉)할 것이다
.
  물러나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어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물러나기가 어렵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다섯번째 괘 수(需)괘에서 말한 발을 빼기 쉬운 모래밭에 있는 것(需于沙)이 아닌 발을 빼기 힘든 진흙밭에 있는 것(需于泥)이다. 진흙밭에 거주해야 한다면, 만약을 대비하여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신첩의 신(臣)은 남자종 첩(妾)은 여자종을 의미한다.

 

好遯 君子吉 小人否
즐겁게 물러나는(好遯) 군자는 길하나(君子吉) 소인은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小人否)
  즐거운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는 이유는 밀려나는 것이 아니요,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요,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니 곧, 바른 길(道)을 따르는 것이기에 즐겁고 그 결과도 길(吉)할 것이다. 중용에 “군자가 중용을 행하는 것은 군자로서 때와 상황을 헤아려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인이라면 오직 ‘물러난다’는 사실만 아프게 직시하여 즐거울 수 없을 지 모른다.

 

嘉遯 貞吉
칭찬속에 물러나니(嘉遯) 끝까지 길하다(貞吉)
  물러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고 아름답게 여기니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물러나는 마음을 알아주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구나. 달아날 때 홀로 뒤쳐져 있다가 성문을 들어올 때 말을 채찍으로 때리며 뒤를 지킨 것이 아니라 말이 빨리 달리지 않았다고 하는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15장]라고 칭찬하셨다.

 

肥遯 无不利
물러나더라도 풍족하다면(肥遯)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풍족은 단지 물질적 풍족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니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던 은자(隱者)들처럼 탐심을 없애니 오히려 더 커진 마음의 풍족함이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지으신 ‘도산잡영(陶山雜詠)’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돌우물이 맛있고 시원하니 진실로 풍족하게 물러날 수 있는 장소를 베풀어 주셨도다(石井甘冽 允宣肥遯之所)’라는 표현에서 이 비둔(肥遯)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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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離 利貞 亨 畜牝牛 吉
【初九】履錯然 敬之 无咎
【六二】黃離 元吉
【九三】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九四】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六五】出涕沱若 戚嗟若 吉
【上九】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리(離)괘는 아래 위로 해가 두 개인 괘이다. 이미 해가 있으면 다시 해를 만들지 않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리(離)괘는 해가 있음에도 하나의 해를 더 만드는 것이니, 곧 바람직하지 않은 힘의 행사이다. 새로운 해는 기존의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세상에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저물어 없어지고 난 후에 나서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 시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옳지 못한 침략을 상징한다.

 

離 利貞亨 畜牝牛 吉
침략(離)은 결실을 얻고 끝을 낸 후에(利貞) 성장시키겠다는 것이나(亨) 순한 암소를 기르듯(畜牝牛) 순응해야 길(吉)하다.
  주역이 말하는 순탄한 변화의 법칙은 씨(元)가 자라서(亨) 열매를 맺고(利) 소멸하는(貞)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침략은 엎어버린 후에(利貞) 성장(亨)을 도모하는 것을 말함이니 천도(天道)를 벗어난 것이며 섭리에 따르지 않는 조급함이다. 곧 해가 있는데 해가 나서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긋남을 도모하지 말고 순한 암소를 기르듯 해야만 길할 것이다. 암소는 곤(坤)괘의 암말과 마찬가지로 유순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유순하지 못하면 전쟁이 있고 파괴가 있고 이별이 있게 된다.


履錯然 敬之 无咎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면(履錯然) 그것을 공경해야(敬之) 허물이 없다(无咎)

  이착연(履錯然)은 발소리가 어지럽다는 말이다. 어지러운 발소리는 군사들이 훈련을 하는 소리이다. 급박하게 뒤섞인 발소리를 들으면, 보지 않아도 군사의 훈련임을 안다. 비가 오기 전에는 청개구리가 울고, 제비가 낮게 나는 등등의 비의 징조가 있고, 태풍이 불기 전에는 별이 지나치게 맑거나 해륙풍이 무너지는 징조가 나타난다. 중용에도 “나라와 집안이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고, 나라와 집안이 망하려 하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조짐이 있다”[중용 24장]고 하였다. 어지러운 군사의 발소리는 침략의 징조이다.

 

黃離 元吉
중용의 덕으로 침략을 대하면(黃離)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문종이 김종서에게 ‘중정(中正)’에 관해서 물으니, "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으며 지나침도 없고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을 뜻합니다. 정(正)이란 것은 지극히 공평하여 조금도 사심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정(正) 또한 중(中)입니다" 즉,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의 중간이 아니라, 바른 것이 중(中)이라는 말이다. 중은 또한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中)으로 침략을 대하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해가 중천에 있는데 다른 해를 만들려는 것이라면 응징해야 하고, 이미 기운 해라면 물러나는 것이 곧 중(中)을 따르는 것일 게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나라가 희망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고려에게 나라를 바쳤으니, 그 또한 중용으로 침략을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해가 기울면 침략을 대비해야 하는데(日昃之離) 북을 쳐서 경계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니(不鼓缶而歌) 경험 많고 혜안이 있는 노인네가 탄식하게 되어(則大耋之嗟) 흉(凶)하다.
  해가 차서 기울고, 기존의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등장하게 되는 변화가 이어지게 하는 것이 하늘의 섭리이다. 해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해가 떠 오르는 순조로운 순환이 이뤄지면 좋겠지만,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급하게 그 틈을 노리는 침략의 위험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침략을 대비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만 하고 있으니 경험 많은 노인네가 어찌 탄식이 없겠는가? 공자께서 “사람이 멀리 내다보고 고민하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이 가까운 날 생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2장]고 하셨다.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침략은 갑작스레 이뤄져(突如其來如) 불태워버리고(焚如) 죽여버리고(死如) 내다버리고(棄如) 한다.

  평화롭던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것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와 힘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공든 탑은 오랜 시간이지만 그 무너지는 것은 일순간이다. 급작스럽게 불타고 죽고 버려지게 된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出涕沱若 戚嗟若 吉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出涕沱若) 탄식이 쏟아져 나오니(戚嗟若) 길(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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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이 비오듯 하고  탄식소리가 끊임없는 까닭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니 길하다. 불타고 죽고 버려져도 끝장이 난 것이 아니니, 침략자가 순리를 따르지 않은 까닭이다. 해가 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해를 만들려고 한 침략세력의 과욕 때문이니 천명(天命)이 침략자들에게 있지 않은 까닭이다.

 

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왕이 출정하여(王用出征) 기쁨을 줄 것이다(有嘉). 우두머리는 참수(折首)해도 그 부하들은 죽이지 않아야(獲匪其醜) 허물이 없다(无咎).
  왕이 출정을 하는 것은 바른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이다. 왕이 사람들을 모아 반격을 하여 승전할 것이나 다만 우두머리는 참수해도 그 부하들은 죽이지 않아야 한다. 주역의 이 가르침에 의하면 일본의 위정자들은 미워해도 일본 국민을 미워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된다. 백성들은 모두 같은 힘없고 가엾은 생명일 뿐이다. 참수하고 미워해야 할 이는 그들을 이용한 우두머리 계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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習坎 有孚 維心亨 行 有尚

【初六】習坎 入于坎窞 凶

【九二】坎 有險 求 小得

【六三】來之坎坎 險 且枕 入于坎窞 勿用

【六四】樽酒 簋貳 用缶 納約自牖 終 无咎

【九五】坎不盈 祗既平 无咎

【上六】係用黴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

  인생은 함정의 연속이기도 하다. 사람의 교활함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만 그물을 펼치고 함정을 만들지는 않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한 적은 인간이라고 하였다. 공자께서는 "사람마다 모두 자신이 지혜롭다고 과신하지만 그물과 덫이나 함정으로 몰아넣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중용 제7장]고 안타까워 하셨다. 습감(習坎)괘는 함정에 빠짐을 의미하는 괘이다. 습(習)은 잘못 들어간 글자로 보아, 감(坎)괘라고 하기도 한다.

 

習坎 有孚 維心亨 行 有尚

함정에 빠져도(習坎) 신념을 잃지 말고(有孚) 마음을 붙들어야(維心) 발전(亨)이 있다. 그렇게 나아가야(行) 복이 생긴다(有尚)

  영특한 제자였던 제아가 공자에게 "어진 사람이 있는데 우물에 사람이 떨어졌다고 하면 그는 구하려 내려갈까요?"라고 여쭈었다. 말하자면 어진 자를 속이고 이용해 먹기는 쉽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공자께서는 "어진 사람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를 우롱할 수는 없을 것이다"[논어 제6편 옹야 제26장]고 답을 하셨다. 인자(仁者)를 속일 수도 있으니 그를 함정에 빠뜨릴 수는 있다. 하지만 속임을 당했다고 속인자를 미워하거나 어질었기에 당했음을 한탄하여 어질지 않은 길을 가도록 변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셨다. 그 뜻은 유학에서 말하는 ‘신독’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 즉 자신만이 아는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니, 물리적 함정보다 더 위험한 것은 정신적 함정이다.

 

習坎 入于坎窞 凶

구덩이에 빠지고(習坎) 다시 구덩이에 빠지면(入于坎窞) 흉(凶)하다.

  처음의 구덩이는 물리적인 함정이지만, 또 다시 빠지게 되는 구덩이는 자기 내면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함이니, 곧 마음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함정에 빠졌다고 뜻을 저버리는 것은 재차 함정에 빠지는 것이니, 공자께서 "군자는 어쩔 수 없는 때에도 원칙을 벗어나지 않지만, 소인은 어쩔 수 없게 되면 곧 함부로 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장]고 하신 말씀이 연상되는 효사이다.

 

坎 有險 求 小得

구덩이에(坎) 위험이 있을지라도(有險) 절망하지 않고 방도를 구하면(求) 적게라도 얻음이 있을 것이다(小得)

  외적인 함정은 벗어날 수도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였고,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하였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은 마음의 함정이며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來之坎 坎 險 且枕 入于坎窞 勿用

구덩이로 와서(來之坎) 빠지지는 않았으나 구덩이(坎)가 위험하다고(險) 잠자듯 나아가지 못한다면(且枕) 그 역시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같으니(入于坎窞) 그렇게 잠자듯 하지 말아야 한다(勿用)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재물이 아까워 쓰지 못하고 묻어두는 부자는 재물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자와 다를 것이 없다. 구덩이에 빠질까 두려워 나아가지 못함은 구덩이에 빠져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樽酒 簋貳 用缶 納約自牖 終 无咎

술을 정성스레 마련하고(樽酒) 두 그릇의 기장밥을 준비하는 마음으로(簋貳) 소박하게 하여(用缶) 창을 통해 들이고 받으며(納約自牖) 제사를 지내면 마침내(終) 허물이 없을 것이다(无咎).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는 까닭은 바른길을 가게 해 주십사, 세상을 바르게 해 주십사 비는 것이다. 혜택을 비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움을 비는 것이며, 나를 위해 비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비는 것이다. 공자께서 병이 들었을 때 자로가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러 가려고 하였다. 공자께서 그런 선례가 있는지를 물으니 자로는 자신 있게 '너를 위해서 천지신령께 기도한다'는 고대의 문헌을 근거로 내 세웠다. 그러자 공자께서는 그 문헌에서 말하는 기도는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 길을 가게 해 주십사 하는 기도이니, “그런 기도라면 내가 행한지 오래되었다”고 하셨다.[논어 제7편 술이 제35장] 함점에 빠졌어도 내가 아닌 전체를 둘러봐야 허물이 없다.

 

坎不盈 祗既平 无咎

구덩이가 아직 차지 않았을 때(坎不盈) 세상이 바른 기운으로 돌아온다면(祗既平) 허물이 없다(无咎).

  함정은 악을 가두기 위해 마련한 감옥이 아니라, 바르지 못한 자가 바른 자를 해치기 위하여 준비한 함정이다. 세상이 바르게 돌아온다면 바르지 못한 자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구덩이가 차지 않았다면 곧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 또한, 함정에 빠진 바른이가 그 곳에서 빠져나오는 것 보다 세상이 바로잡히는 것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허물이 없다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係用黴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

팔다리가 단단히 묶여서(係用黴纆) 빽빽하게 심겨진 가시나무속에 갇히게 되었다면(寘于叢棘) 삼년이 지나도 풀려날 수 없음이니(三歲不得) 흉(凶)하다.

  팔다리를 단단히 묶여야 하는 까닭은 그가 강자이기 때문이다. 강자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함정을 헤어나기 어렵게 된다. 강자가 함정에 빠진 이유는 강한 힘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 때 드러냈기 때문이다. “뛰어난 재주를 어리석음으로 감추고, 지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명철함을 지키고, 청렴함을 혼탁 속에 가려두고, 굽힘으로써 몸을 펴는 것, 이런 처세가 험난한 세상을 건너는 배를 타는 것이며, 몸을 보호하는 방편이다”[채근담 제1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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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過 棟 撓 利有攸往 亨

【初六】藉用白茅 无咎

【九二】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九三】棟橈 凶

【九四】棟隆 吉 有它 吝

【九五】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上六】過涉滅頂 凶 无咎

  대과(大過)는 심하게 지나간 것이니, 시기가 너무 늦었음을 말한다. 주역의 첫 가르침,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야 하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순리(乾)를 따르지 않았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시들고 메마른 버드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니 법이라고 한다. 대과(大過)괘의 효사는 시기를 놓친 남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기가 어긋나 있어도 기운이 조화를 이룰 수도 있는 법이니, 사람마다 기운이 일정하지 않고 일찍 열매를 맺을 수도 늦게 열매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도(道)가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완전한 법칙은 아니라는 말이다.

 

大過 棟撓 利有攸往 亨

혼기를 놓쳤으니(大過) 용마루가 굽을 것이지만(棟撓) 시간이 지나면 이로울 것이니(利有攸往) 발전해 나갈 것이다(亨)

  용마루가 굽은 이유는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을,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용마루로 비유한 것이다.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것이니 시간이 지나도 이로움이 없을 것이나,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늦은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게 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높았던 눈이 낮춰지고 분수를 알게 되어 과거에는 부족하다고 외면했던 짝이라도 충분하다 여겨지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치마만 두르면 되는 것이다.

 

藉用白茅 无咎

흰 띠로 자리를 짜서 사용하듯(藉用白茅) 순박한 마음이면 허물이 없다(无咎)

  자용백모(藉用白茅)는 제사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는 흰 돗자리를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마음 즉, 때 묻지 않은 맑고 경건한 마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도 약탈혼이 빈번하였다고 알려진다. 주역에서 혼인을 언급할 때 말(馬)을 등장시키는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나라는 문화가 성숙되고 도(道)과 예(禮)에 대한 관념이 자리잡아 힘을 숭상하는 관념이 약해지고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순간에 약탈혼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니, 순박한 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대과(大過) 하였다고 힘으로 취하려는 것을 경계한 의미일 것 같다.

 

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시든 버드나무에(枯楊)도 싹이 돋는 법이니(生稊) 나이든 지아비가(老夫) 어린부인을 맞으면(得其女妻)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나이든 홀아비는 양기가 쇠하고 어린 여자는 음기가 성장하고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기운이 음양조화에 어긋나여 궁합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시든 버드나무에는 새싹이 돋는다. 버드나무는 물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매우 강해서 아무리 메말라도 좀처럼 죽지 않기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 그래서 강한 성(性)을 상징하기도 하는 나무이다. 버드나무의 이런 성질 때문에, 창기(娼妓)를 두고 영업을 하던 술집을 버들 류(柳)자를 써서 화류(花柳)라고도 불렀다.

 

棟橈 凶

용마루가 굽으면(棟橈) 흉하다(凶).

  초육에서 말한 것과 같은 뜻이다.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 무게에 억눌려 있으면 흉(凶)하다는 말이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도 어렵고 시든 버드나무에 싹을 틔울 수도 없을 것이니, 늙음을 의식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棟隆 吉 有它 吝

단단하고 곧은 나무여야(棟隆) 길(吉)하지만 뱀처럼 힘이 없다면(有它) 어려워진다(吝)

  용마루가 굽은 것은 마음에 장애가 생긴 것을 말하지만, 뱀(它)은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뜻한다. 나무처럼 곧고 단단하지 못하고 뱀처럼 물렁거리고 휘어지는 성기라면 어려워진다. 그러나 흉(凶)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교감을 이루지 못하는 용마루가 휜 것이 흉(凶)하다고 하였으니, 신체가 따르지 못함보다 마음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 보다 큰 문제이다.

 

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시든 버드나무라도(枯楊) 꽃이 피는 법이니(生華) 나이든 부인이(老婦) 젊은 지아비를 얻어도(得其士夫) 허물이 없다(无咎) 그러나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无譽).

  버드나무는 강한 성(性)을 상징한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그래서 여인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허물은 없어도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니, 그것이 옛 시대의 관념인 듯 하다. 늙은 사내가 어린 처녀와 조화를 이루면 자랑하려고 하지만, 늙은 여인이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루면 음탕하다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적인 시각에서 보면 허물(咎)은 아니다.

 

過涉滅頂 凶 无咎

지나친 부부관계는 기력을 소진시켜(過涉滅頂) 보기에 흉(凶)하나 허물은 없다(无咎)

  지나치게 관계하여(過涉) 정점까지 이르러 끝을 본다면(滅頂) 흉측하지만 허물은 아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허물(咎)은 내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며, 길흉(吉凶)과 명예(譽)는 외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대과(大過)하여 조화가 맞지 않는 외양을 가진 한 쌍의 남녀가 부부관계를 과하게 가지면 외면적인 시각에서는 흉(凶)측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고 하건 당사자들에게는 허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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頣 貞吉 觀頣 自求口實
【初九】舍爾靈龜 觀我朵頣 凶
【六二】顛頣 拂經 于丘 頣 征 凶
【六三】拂頣貞 凶 十年勿用 无攸利
【六四】顛頣 吉 虎視眈眈 其欲逐逐 无咎
【六五】拂經 居貞 吉 不可涉大川
【上九】由頣 厲 吉 利涉大川

  "군자는 말은 더디게 하고 행동은 부지런히 한다”[논어 제4편 이인 제24장], "옛사람들이 쉽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행하지 못할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논어 제4편 이인 제22장]"등등, 공자께서 말에 대해 언급한 것은 논어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PR시대가 되고 방송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이(頣)는 턱을 제대로 쓰는 것을 말하니, 말을 잘 가려 하는 것을 뜻한다.

 

頣 貞吉 觀頣 自求口實
말을 가리면(頣) 끝까지 길하니(貞吉) 말로 인한 여파를 헤아려(觀頣) 그 말이 결실을 맺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自求口實)
  공자께서 “큰 길에서 듣고 작은 길에서 뱉어버리는 것은 도덕을 버리는 것이다”[논어 제17편 양화 14장]라고 하셨다. 바쁘게 흘러가는 세상이라 그런지 껍데기를 주워듣고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여기고, 심지어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舍爾靈龜 觀我朵頣 凶
영적인 거북이 떠나게 됨은(舍爾靈龜) 자기의 늘어진 턱을 고려해 보면(觀我朵頣) 알 수 있을 것이니, 입 단속을 못한 까닭이라 흉(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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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거북의 등껍데기로 점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거북은 북방을 지키는 수호신이기도 했다(현무). 이 신령스런 거북이 떠나가는 이유는 턱이 늘어져 입을 닫지 못할 정도로 떠들고 다니기 때문이다. 입은 재앙의 근원이라 하였다.

 

顛頣 拂經 于丘 頣 征 凶
턱이 뒤집혔는데(顛頣) 도리가 곡해되고 있다고(拂經) 언덕에 올라(于丘) 말하고자 하니(頣) 그렇게 나아가면(征) 흉(凶)하다.

  턱이 뒤집혔다는 것은 조리 있게 말을 잘 못하는 것이다. 경전의 훌륭한 뜻을 제대로 전달할 능력이 부족하다. 사람들이 모인 언덕에서 바른 뜻을 전하고자 하지만 흉하다. 왜냐하면 언덕 위에 모인 군중은 쉽게 흥분하니 말재주로 선동하기가 쉬운 만큼 돌을 맞기도 쉽기 때문이다. 웅변력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을 말로써 바른 도리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니 흉하다.

 

拂頣貞 凶 十年勿用 无攸利
입단속은 끝까지 하지 못하면(拂頣貞) 흉(凶)하다. 십년을 잘 참았더라도(十年勿用) 유리할 것이 없다(无攸利).
  비밀을 지켜준 시간이 하루이거나 10년이거나 결국 뱉어버리면 똑같이 흉할 뿐이다. 말이 퍼지는 속도는 번개보다 빨라서 따라잡지 못하니 "한마디 말(言)이 이미 나오면 네마리 말(馬)로도 따라가기 어렵다"[논어 제12편 안연 제8장]고 하였다. 친부모가 아니라는 비밀을 10년을 잘 지켜주었더라도 입단속을 못하고 뱉어버리면 10년을 참아 주었다고 유리할 것이 없다.

 

顛頣 吉 虎視眈眈 其欲逐逐 无咎
오히려 턱이 뒤집히는 것이(顛頣) 길(吉)하다.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때를 잘 가리고(虎視眈眈) 말하고자 하는 바가 순수하여야(其欲逐逐) 허물이 없기(无咎) 때문이다.

  턱이 뒤집히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말을 조리있게 잘 하는 웅변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웅변력이 없음에도 오히려 길(吉)한 이유는 말재주가 부족하니 급하게 말할 수도 없고 사람들이 귀 기울어 들어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은 호랑이가 먹이를 잡듯 때를 잘 가리고 살펴서 순수한 마음을 다해 뜻을 전하려고 해야 허물이 없는데, 말재주가 있는 사람은 오히려 서두르고 급하게 말을 뱉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공자께서도 “말은 잘해서 무엇 할 것인가? 말만 잘할 뿐이라면 미움만 받게 될 뿐이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5장]라고 하셨다.

 

拂經 居貞 吉 不可涉大川
도리가 어긋나 있어도(拂經) 끝까지 멈추어 있는 것이(居貞) 길(吉)하니, 큰 내를 건너듯 과단하게 나아감은 불가하다(不可涉大川)
  말재주가 있어도 오히려 멈추는 것이 길하니, 말로서 사람을 감화시켜 경전의 바른 도리를 깨닫게 하기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는 말이 행동을 넘어서는 것을 엄히 경계를 시켰다. "스스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면 저절로 명령하지 않아도 따르고,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논어 제13편 자로 6장]고 하셨으니, 진정으로 바른 도리를 전하려고 하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이로울 것이다.

 

由頣 厲 吉 利涉大川
입을 단속한 까닭에(由頣) 위태로울 수도 있으나(厲) 길(吉)하다. 큰 내를 건너듯 과단하게 고집해야 이롭다(利涉大川)
  입을 잘 단속한 까닭에 위태로울 수도 있으니 즉, 외롭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역은 끝까지 입을 잘 단속하는 것이 길하다고 한다. 재미를 위한 어울림은 입이 가벼운 사람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하고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입이 무거운 사람과 어울리려고 할 것이다. 물론, 입이 무거운 사람과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은 다르다. 때와 장소를 잘 헤아려 말하는 사람이 입을 잘 단속하는 사람이다. 공자께서 “말 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교만이라 하고, 말할 때가 되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 하고, 안색과 상황을 살피지 않고서 말하는 것을 맹목이라고 한다”[논어 제16편 계씨 제6장]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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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畜 利貞 不家食 吉 利涉大川
【初九】有厲 利已
【九二】輿說輹
【九三】良馬逐 利艱貞 曰閑輿衛 利有攸往
【六四】童牛之牿 元吉
【六五】豶豕之牙 吉
【上九】何天之衢 亨

  주역의 아홉번째 괘 소축(小畜)은 가정에서의 성취를 뜻하여 임신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대축(大畜)괘는 사회에서의 성취를 뜻한다. 윤봉길 의사께서 말씀하신 이상(理想)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理想)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理想)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靑年時代)에는 부모(父母)의 사랑보다 형제(兄弟)의 사랑보다 처자(妻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江山)과 나의 부모(父母)를 버리고 라도 그 강의(剛毅)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決心)하여 이 길을 택(擇)하였다”[윤봉길 의사 어록]

 

大畜 利貞 不家食 吉 利涉大川
큰 성취(大畜)는 열매를 맺고 마감하는 시기(利貞)의 일이니, 가족의 먹이는 것이 아니라야(不家食) 길(吉)하고, 큰 강을 과단성 있게 건너야 이롭다(利涉大川)
  소축은 성장기(亨)에 의욕해야 하는 일이며, 대축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해서(利貞) 이뤄야 하는 일이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대축은 소축과 달리 가정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니 가족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야 하고, 과단하게 나아가야 이롭다. 윤봉길의사께서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대장부가 집을 저버리고 나서니 살아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자식으로서의 도리, 남편으로서의 도리,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못하고, 집을 나서니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셨다. 가족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는 모든 일은 근본과 말단이 있다. “모든 일은 근본과 말단이 있으며, 시작과 마침이 있으니,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대학 제1장]

 

有厲 利已
위태로움이 있구나(有厲)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함이여(利已)
  대축(大畜)은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소축(小畜)과는 다른 것이요, 사회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성장기를 지나서 열매를 맺고 마감해야 할 시간에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하늘(시간)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요, 땅(자리)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니 위태로움이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 꾀꼬리를 보시고 “머무를 때에 그 머물러야 할 곳을 아니 사람이 새 보다 못할 수 있으랴!”[대학 제3장]라고 하셨다.

 

輿說輹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함은 수레에서 바퀴가 빠져버린 것과 같다(輿說輹) 
  앞 효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대축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해서(利貞) 이뤄야 하는 일이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소축(小畜)을 이뤄야 할 시기 곧 형(亨)의 시기에 의욕 해야 하는 일이다. 대축을 이룬다면서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은 수레에서 바퀴가 빠져버린 것과 같은 어긋남이다.

 

良馬逐 利艱貞 日閑輿衛 利有攸往
좋은 말은 달려야(良馬逐) 하는 것이니, 끝까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달려야 이로운 것이다(利艱貞) 날마다 수레를 세우면서(日閑輿衛) 시간을 보내야 이롭다(利有攸往)
  하늘은 사람을 내면서 임무를 맡기셨다고 했으니 곧 맡은바 사명을 부여하셨다. 말이 달려야 하는 것처럼 사람도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말이 잘 달리기 위해서는 수레가 튼튼하고, 바퀴가 잘 맞아야 한다. 늘 세우고 점검하는 철저한 준비성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니, 사람도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준비와 대비를 철저히 하고 신중하여야 한다.

 

童牛之牿 元吉
송아지의 뿔은 사람을 찌르지 못하도록 해 두어야(童牛之牿)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송아지는 냉정하지 못하고 혈기가 잘 제어가 되지 않는 사람을 비유한다. 대축은 혼자서 도모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마땅히 어울려 나아가야 하는데, 송아지는 그 혈기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 뿔이 자신을 다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므로 나무토막을 대어 방비를 해 둔다. 그런 부류의 사람과 함께 하려면 단속이 필요하다.

 

豶豕之牙 吉
거세한 돼지는 잘 먹여야(豶豕之牙) 길(吉)하다.
  돼지의 수컷은 거세를 해야 냄새가 없어지고 고기가 연하게 된다고 한다. 거세를 했다는 말은 대축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을 한 것을 말한다. 그 희생을 모른 척 하지 말고 잘 먹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니, 논공행상을 잘 해야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何天之衢 亨
하늘의 뜻을 알고 따라야(何天之衢) 형통(亨)한다. 
  하늘의 준 사명이 있는데, 다른 일을 도모하는 것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는 일이 막히기만 하고 잘 풀려나가지 않으면 하늘이 크게 쓰려고 시련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물을 거스르고 있는 것인지 하늘의 뜻을 헤아려 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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无妄 元亨利貞 其匪正 有眚 不利有攸往
【初九】无妄 往 吉
【六二】不耕 穫 不菑畬 則利有攸往
【六三】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九四】可貞 无咎
【九五】无妄之疾 勿藥 有喜
【上九】无妄 行 有眚 无攸利

  사람에게 고기를 주기 위한 것으로 명이 바뀐 동물이 있고, 사람의 치장을 위해, 사람의 건강을 위해 멸종에 이르는 동물도 있고, 인간 거주의 편의를 위해 없어지는 산과 강이 있다. 주역은 인간의 탐욕으로 자연(自然)이 파괴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자연 곧 천도(天道)가 무너지면 인간 역시 생존하지 못한다. 무망(无妄)은 하늘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니,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것을 뜻한다.

 

无妄 元亨利貞 其匪正 有眚 不利有攸往
천도에 순응(无妄)하여야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순탄한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천도에 순응하는 그 바름을 따르지 않는다면(其匪正) 재앙이 있으리니(有眚) 천도를 거스르며 시간을 보낸다면 이로울 것이 없다(不利有攸往)

  씨앗이(元) 자라서(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 되는(貞) 순탄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려면 시간과 공간과 사람과 노력 등등이 필요하지만, 또 하나 필요한 것이 무망(无妄)이다. 주역은 하늘(시간)외에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인류도 언젠가는 종말을 맞게 될 것 같다. 인간에게 주어진 지능으로 인해서 오히려 멸할 수 있는 위험이 있으니, 뛰어난 지능으로 인해 하늘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태어나서 죽게 되는 것은 하늘이 주관하는 일이지만, 고기를 먹기 위해 생명을 만들고 생명을 죽이고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버리니 다른 생명이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도록 하면서 스스로는 천수(天壽)를 누릴려는 중용을 벗어난 모순을 꿈꾸는 것이다. 공자께서 “사랑하는 이는 살기를 바라면서 미워하는 이는 죽기를 바란다면 살리기를 원하면서 죽이기를 원하니 이것은 모순인 것이다”[논어 제12장 안연 제10장]라고 하셨다. 사람이 인위(人爲)로 천수(天壽)를 주관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천수(天壽)를 끊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无妄 往 吉
천리에 순응하여(无妄) 나아가야(往) 길(吉)하다.
  누구나 보전된 자연(自然)을 보면 아름답게 여기고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자기의 이익과 관련되면 곧 그 자연(自然)이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곧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탐욕이다. 공자께서 “멀리 내다보고 고민해 보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이 가까운 날 생길 것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2장]라고 하셨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하며, 하늘을 두려워 해야 한다.

 

不耕 穫 不菑 畬 則利有攸往
밭을 갈지 않아도(不耕) 얻을 수 있고(穫) 개간하지 않아도(不菑) 경작할 수 있으니(畬)  그렇게(則)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이로움이 있다(利有攸往).
  주역은 인간이 조작하지 않아도 자연이 배려한 자연 생산물로 살 수가 있다고 한다. 생태계가 그러한 조화를 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도가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랑이는 배가 부르면 토끼를 잡아먹지 않는다. 만약 호랑이에게 인간의 머리를 주었다면 호랑이는 두고두고 먹으려고 토끼를 잡아 비축해 두고자 경쟁했을 것이기에 벌써 생태계의 조화가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무망의 재앙은(无妄之災) 누군가가 매어둔 소를(或繫之牛) 지나가는 행인이 가져가서(行人之得) 고을 사람들이 의심을 받게 되는 재앙(邑人之災)이다.
  천리에 순응하지 않으면 결국은 하늘이 재앙을 부른다고 한다. 하늘의 재앙은 자연을 망친 자에게 직접적으로 향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말이다. 운이 나쁜 사람이 벼락을 맞는다고 하였다. 누군가가 매어둔 소를 도적질한 것은 지나가는 행인이었지만, 의심을 받는 것은 고을 사람들이니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 하늘과 땅처럼 위대한 존재에게도 사람들은 서운해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중용 12장]라고 하셨나 보다. 자연을 파괴한 이들은 선진문명국이지만, 가뭄과 재앙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오히려 더 발생하고 있다.

 

可貞 无咎
끝까지 순리를 지키면(可貞) 허물이 없다(无咎)
  무망을 따르지 않는 재앙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 것'과 같은 억울한 결과가 생긴다고 해서 곧 변신하여 천도(天道)를 어기려 하지 마라는 말이다. 허물(咎)은 길흉(吉凶)과는 다른 내적인 시각이다. 무망을 따른다는 것이 손해와 이익을 견주어 이해관계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바른 길이기에 무망의 길을 가고 천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无妄之疾 勿藥 有喜
자연적인 병통(无妄之疾)은 약을 쓰려 하지말고(勿藥) 기쁨으로 받아들여라(有喜).
  천리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병, 즉 노환으로 천수를 다하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약이 개발이 되어도 불로초가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무의미한 연명을 위한 치료가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병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천리에의 순응이 아니라, 천수(天壽)가 다 하여 찾아오는 병을 거부하고 삶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삶의 집착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남는다고 하였다.

 

无妄 行 有眚 无攸利
천리에 순응(无妄)하는 것을, 억지로 행하려고 하면(行) 재앙이 있고(有眚) 유리함이 없다(无攸利)
  행(行)하려는 것은 의욕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역시 자연스러움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위(人爲)적인 것이다. 무망(无妄) 괘는 인간이 인위(人爲)로 만들려고 하는 탐욕에 의해서 천도(天道)가 무너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데, 천도를 따르는 것 조차 억지로 인위로 하려고 하니 더 모순적인 일이다. 재앙만 있을 뿐이며 유리할 것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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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 亨 出入无疾 朋來无咎 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初九】不遠復 无祇悔 元吉
【六二】休復 吉
【六三】頻復 厲 无咎
【六四】中行 獨復
【六五】敦復 无悔
【上六】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 以其國 君 凶 至于十年 不克征

  복(復)괘는 본래 자기 자리로 되돌아 오는 것을 말한다. 가야 할 길이지만 쉽게 갈 수 있도록 해 놓지 않았으며, 가지 말아야 할 길인데도 쉽게 갈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 하늘이 정해 놓은 길(道)이다. 땀 흘려 곡식을 얻기는 어렵고 도박과 투기로 재물을 불리기는 쉬워 보인다. 그러나 땀 흘려 일군 곡식은 해롭게 하고 얻은 것이 아니지만, 도박과 투기로 불린 재산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가져온 것이다. 어렵더라도 바른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도전을 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로또 복권을 긁는 기이한 일을 도모하는 것도 아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편안하고 일상적인 도를 따르는 것이니, 곧 송충이가 솔잎을 먹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

 

復 亨 出入无疾 朋來无咎 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복귀(復)는 성장기(亨)여야 한다. 들고 남에 병통이 없고(出入无疾) 벗이 찾아오는 것이니 허물이 없다(朋來无咎). 진정으로 복귀하는데(反復其道) 7일이 걸릴 것이나(七日來復) 그 시간이 지나가야 이롭다(利有攸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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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긋난 길로 들어섰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성장하는(亨) 시기여야 한다. 이미 때가 지나 어긋난 열매(利)를 맺어 버리면 늦으니,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미 회복불능의 시간을 지나지 않은 형(亨)의 시기라면 들고 나는 시행착오가 반복되어도 병통이 되지 않는다. 벗(깨우침)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히려 배움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7일은 음양오행을 말한다. 음양오행의 변화를 한번 거쳐야 진정으로 복귀가 가능한 까닭은 미련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어긋난 길의 끝으로 한번 가 보아야 미련을 두지 않고 “이 길이 아니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不遠復 无祇悔 元吉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오면(不遠復) 뉘우침도 늦춰지지 않을 것이니(无祇悔)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주역은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라고 본다. 그래서 첫 괘가 건(乾)괘로 시작한다. 오래지 않아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오면 시간을 그만큼 아낀 것이니 근원적으로 길하다.

 

休復 吉
여유로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休復)이 길(吉)하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돌아오는 길은 시간을 잃어버리고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급하게 돌아와 잃은 시간을 만회하려 급하게 서둘지 않아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다.

 

頻復 厲 无咎
절박한 복귀(頻復)는 위태롭기는 해도(厲) 허물은 없다(无咎)
  급하게 돌아오는 빈복(頻復)은 휴복(休復)이 아니라서 길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허물은 없다. 제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고집을 부리고 돌아오지 않으려는 것이 가장 흉(凶)하다. 그래서 “소인이 잘못을 범하면 허물을 덮으려고만 한다”[논어 제19편 자장 제8장]는 가르침처럼, 고치지 않으려는 것을 더 큰 잘못으로 본다.

 

中行 獨復
중용의 도를 따라(中行) 외롭더라도 돌아와야 한다(獨復)
  ‘모두가 YES 할 때 NO라고 하고 모두가 NO 하는데 YES’라고 하던 광고가 있었다. 아무런 신념이 없이 그렇게 한다면 소위 왕따가 될 뿐이다. 중(中)은 좌로 치우치지도 않고 우로 치우치지도 않은 곧음이니, 지극히 곧은 것을 말한다. 곧 중용의 도를 기준으로 삼아 옳다면 설령 외롭게 되더라도 돌아와야 한다. 바른길임을 알았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선택이 아닐 것이다.

 

敦復 无悔
후덕한 마음으로 돌아와야(敦復)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无悔)
  돌아오는 길은 실패를 하고 돌아오는 까닭에 원망을 담고 올 위험이 있다. 잃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왜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느냐는 등의 원망하는 마음이 갖지 않고 내 탓으로 여겨 자기를 책하는 반성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돈복(敦復)이다. 그래야 후회를 남기지 않고 좋은 경험이자 배움이었다는 감사한 마음일 수 있다.

 

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 以其國 君 凶 至于十年 不克征
혼미한 상태로의 복귀(迷復)는 흉(凶)하니 재앙이 있을 것이며(有災眚)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면(用行師) 마침내 크게 패할 것이다(終有大敗) 그 나라의(以其國) 임금(君) 역시 흉(凶)하게 될 것이니, 설령 10년이 된다 하더라도(至于十年) 이기지 못할 것이다(不克征)
  ‘이 길이 아니구나’하는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돌아오지 못하여 미련이 남은 까닭이다. 이렇게 미련을 남기고 돌아오면 다시 그 잘못된 길이 바른 길인지 혼란하여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흉하여 재앙이 따를 것이다. 전쟁에 나간 장군처럼 높은 지위의 사람이 혼미한 상태로 돌아와 착각 속에 오판하고 있으면 자기만 흉한 것이 아니라 결국 군사를 죽이게 만들고 그 임금까지도 해롭게 만들 것이니 흉하다. 10년의 시간은 준(屯)괘에서 말한 10년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안되는 것이지만 결국 통하게 만드는 지극한 정성을 의미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상황이 군사를 사용하는 전쟁이라면 지극한 정성으로도 통하지 않는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장수는 모두를 해롭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장군이 전 조선수군을 궤멸되었던 아픈 역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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剝 不利有攸往
【初六】剝床以足 蔑 貞 凶
【六二】剝床以辨 蔑 貞 凶
【六三】剝之 无咎
【六四】剝床以膚 凶
【六五】貫魚 以宮人寵 无不利
【上九】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박(剝)은 떨어져 나가고 무너지고 파괴되고 박살 나는 것을 뜻한다. 괘를 보면 하나의 양(陽)이 다섯의 음(陰)에 밀려 위에 서 있는 형상이다. 떼를 지어 덮치는 데 당해낼 힘이 없어 쓰러지는 것이 박(剝)괘이다. 대표적으로 중세의 참혹한 ‘마녀사냥’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약한 여성을 마녀로 몰아 화형을 시키는 것이 일도 아닌 시대가 있었다. 요즘에 인터넷의 폐단의 하나인 악의적인 글로써 공격하여 여론을 악의적으로 몰아가 떼를 지어 공격을 감행하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괘이다. 올바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자이기 때문에 힘이 없어 당하게 되는 것이 박(剝)이다. 또한 박(剝)의 파괴는 시간이 지나면 곧 새살이 돋아 지난 일이 되어버리는 수준의 시련정도가 아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정도의 회복할 수 없는 무너짐이다.

 

剝 不利有攸往
박살이나면(剝) 시간이 지나도(有攸往) 이로울 게 없다(不利)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다’는 시간의 섭리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 박(剝)괘가 담고 있는 강력한 파괴성이다. 지독한 가난은 상황이 변하면 추억이 될 뿐이다. 그러나 팔다리가 잘려나가면 시간이 지난다고 새로 팔다리가 생겨 회복되지는 않는다.

 

剝床以足 蔑 貞 凶
침상다리만 부서져도(剝床以足) 전체가 궤멸된 것이니(蔑) 끝까지(貞) 흉(凶)하다.
  이렇게 어려운 박(剝)의 시절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 침상다리를 내어주고 침상의 상판을 보전하려고 하는 것이 길(吉)할까? 박(剝)괘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파괴를 뜻하고 힘이 약하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강력한 급류에 가족이 휩쓸렸고 한 명만 구할 미약한 힘만 가지고 있는 남편이 부인만 구하고 아이들을 포기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리만 부서진 침상이 제 역할을 못하듯, 아이가 그런 사고를 당한 가정이 본래대로 회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체이기 때문이다.

 

剝床以辨 蔑 貞 凶
침상의 상판만 부서져도(剝床以辨) 전체가 궤멸된 것이니(蔑) 끝까지(貞) 흉(凶)하다.
  침상의 다리만 부서지는 것과 반대의 상황이다. 아이를 살리고 아내를 포기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으니 그 역시도 흉하다. 삶이 힘들어 자살을 하는 어머니가 어린 아이와 함께 생을 마감하는 뉴스를 어렵게 않게 만날 수 있다. 저 혼자 죽을 것이지 왜 죄없는 아이들까지 함께 데려가느냐고 욕을 하기도 하지만,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

 

剝之 无咎
차라리 모두 부서져야(剝之) 허물이 없다(无咎).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것,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하는 것, 그것이 강력한 파괴의 기운인 박(剝)의 시기에 처신하는 조화로운 방법이라고 한다. 처자식이 급류에 휩쓸렸는데 단지 한 명만 구할 힘이 있다면 부인을 구할 것인가? 아이를 구할 것인가? 주역은 부인과 아이를 함께 구하기 위해 애쓰다가 힘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다면 함께 죽는 것이 남편의 바른 처신이라고 보는 듯 하다.

 

剝床以膚 凶
침상의 껍데기가 부서졌으니(剝床以膚) 흉(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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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히 부서진(剝) 것이 아니라, 침상의 껍데기(膚)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급류에 휩쓸린 가족의 예를 계속해서 든다면 모두 온전하게 살아 남기는 했으나, 팔을 잃거나 다리를 잃거나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해를 당한 상태로 살아남은 것을 뜻한다.

 

貫魚 以宮人寵 无不利
물고기를 쭉 꿰어놓은 것처럼(貫魚) 궁녀들을 사랑하면(以宮人寵)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박(剝)이라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파괴를 당하는 이유는 힘이 약하여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나의 양(陽)이 다섯의 음(陰)을 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군주는 혼자서도 능히 수십 수백의 궁녀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 한 번에 그 많은 궁녀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쭉 꿰어놓은 것처럼 한 번에 한 명씩 상대하기 때문이다. 힘을 분산시킬 수 있으면 나누어 상대하면 이롭지 않음이 없다.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종자를 먹지 않고 남겨둔(碩果不食) 군자는 수레를 얻겠지만(君子得輿) 소인은 오두막마저 깨뜨리게 된다(小人剝廬)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이미 고사성어가 된 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종자는 먹지 않고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박(剝)의 어려움은 단순한 시련 수준은 아니다. 배고픔은 상황이 바뀌면 지난 일이 되어 버리지만 박(剝)은 끝까지 안고가야 할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큰 해를 입는 박(剝)의 파괴를 만났어도 종자(씨과실)를 먹어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 박(剝)의 시간도 영원히 계속될 수 없으니 결국은 변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종자를 남겨두어야 훗날 수레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수확을 기약할 수 있다. 소인은 상황을 절망하여 남겨진 오두막마저 다 부수어 버리고 말 것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모든 것은 극에 이르면 반드시 뒤집힌다’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가르침을 전하는 효사는 주역에 참으로 많이 등장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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賁 亨 小利 有攸往
【初九】賁其趾 舍車而徒
【六二】賁其須
【九三】賁如 濡如 永貞吉
【六四】賁如 皤如 白馬翰如 匪寇 婚媾
【六五】賁于丘園 束帛 戔戔 吝 終吉
【上九】白賁 无咎

  외모를 꾸미고 치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획일적인 교복에서 벗어나 좀 더 개성적으로 꾸며 입고자 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억지로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무분별한 자유를 허용하는 방종과 개인의 개성을 존중해 주는 것은 다른 일인 것 같다.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공자께서는 외양을 꾸미는 것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비유를 하면서 "덕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용모를 좋아하듯 하라"[대학 제6장 성의]고 하셨다. 꾸미고 치장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 여우를 멸종 시키는 인간의 탐욕이 무서운 것이다.

 

賁 亨 小利 有攸往
치장하고 꾸미는 것(賁)은 성장기(亨)의 일이니 성숙기에는 효과가 적다(小利) 시간은 흐른다(有攸往)
  외모를 치장하고 꾸미고 가꾸는 것은 성장기(亨) 때의 일이라고 한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시기(利)에 접어들면 즉, 노화가 시작된 후라면 아무리 꾸며도 효과가 적으니(小) 젊음의 아름다움을 치장으로 이겨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나가게 마련이고 사람은 늙기 마련이다.

 

賁其趾 舍車而徒
그 발을 꾸미게 되면(賁其趾) 수레를 버리고(舍車而) 걸으려 한다(徒).

  예쁜 신발을 신고 발을 꾸미게 되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수레를 버리고 걸으려고 하니 그만큼의 고생이 따르는 법이다. 얻으려 하면 잃는 것이 있게 되는 이치이다. 그렇다는 것이지, 주역은 그것이 허물이라는 등의 평가를 하지는 않고 있다.

 

賁其須
남자도 그 수염을 꾸미려 한다(賁其須)
  발을 꾸미고 싶어하는 것은 여자의 치장을 빗대어 말한 것이지만, 남자도 역시 마찬가지로 꾸미고 치장하고 싶어 하는 젊음의 기운을 갖고 있는 것이요, 치장은 성별을 떠난 젊음의 본능이니 그 수염을 꾸미려고 할 것이라 한다.

 

賁如 濡如 永貞吉
꾸밀 수 있는 것은(賁如) 은혜를 입은 것(濡如)이니 끝까지 계속할 수 있어야 길하다(永貞吉).
  꾸미고 싶어도 꾸밀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농담 삼아 '호박을 꾸민다고 수박이 되냐?'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농담이기도 할 것이다. 끝까지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신체를 끝까지 잘 간수하라는 말이다. 『효경』에서 신체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주역이 쓰여진 주나라 시대의 봉건 사회에서는 성형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기에, 성형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다치고 병드는 것으로 신체를 훼손시키는 것을 뜻한 말일 것이다.

 

賁如 皤如 白馬翰如 匪寇 婚媾
멋지게 꾸민(賁如) 백발의 신사(皤如)가 백마를 타고 갈기를 날리니(白馬翰如) 도적이 아니라(匪寇) 혼인을 청하려고 하는 것(婚媾)이다.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가진 것을 뺏어가려는 도적일 것이요, 다른 하나는 마음으로 함께 어울리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백발의 신사는 젊음은 잃었으나 오히려 내면의 중후한 멋을 가진 사람을 비유하니, 내면에서 우러나는 중우한 멋이 있는 사람이다. 내면적인 멋을 지닌 사람이라면 도적이 아니라 함께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일 것이라는 말이다. 내면의 덕은 나이를 들면 외모를 통해 드러나는 법이다. 그래서 마흔 이후의 얼굴은 자기 책임이라고 한다.

 

賁于丘園 束帛 戔戔 吝 終吉
정원을 잘 가꾸었으나(賁于丘園) 예물이 적으면(束帛) 불평이 있어(戔戔) 어려움이 있겠지만(吝) 마침내 길하다(終吉). 
  혼인은 둘만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과의 결합이라고 한다. 정원을 잘 가꾼다는 것은 ‘둘이서 화목하게 가정을 잘 꾸리는 것’을 말한다. 예물이 많더라도 두 사람의 금술이 좋지 못한 것보다 예물이 적더라도 두 사람이 잘 사는 것이 부모들의 근원적인 바램일 것이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고 하듯 작은 것을 탐하면 오히려 큰 것을 잃어버린다.

 

白賁 无咎
순박하게 꾸미는 것(白賁)이야말로 허물이 없다(无咎).

  화려함으로 꾸미는 것이 아닌 담박하게 꾸미는 것을 뜻한다. 『중용』에서 시경을 인용하며 ‘비단옷을 입고 흩옷을 덧입는다’[중용 제33장]고 하였다. 겉은 소박한 옷으로 걸쳤지만 속의 비단무늬가 은은히 우러나오는 것처럼 입어야 담박하기 때문에 싫증을 내지 않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니, 비단옷만 걸치고 거리를 활보하면 곧 싫증이 나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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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 盥而不薦 有孚顒若
【初六】童觀 小人无咎 君子吝
【六二】闚觀 利女貞
【六三】觀我生 進退
【六四】觀國之光 利用賓于王
【九五】觀我生 君子无咎
【上九】觀其生 君子无咎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운명을 믿고, 자기의 생활과 앞 길을 지배하는 주재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여 신에게 기도하여 구하려 하고, 점을 쳐서 복을 구하려 하고 재난을 면하려 한다. 아무런 혜안이 없는 나에게 누군가가 미래를 알려달라고 찾아와도 자신 있게 답해 줄 수 있는 미래가 있다. 당신은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여 말할 수 있다. 비가 내리고 있으면 정확히 언제 그칠지는 몰라도 분명히 그친다는 것은 알며, 찜통 같은 더위가 계속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추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 올 것을 장담할 수 있다. 공자께서 “과거를 돌이켜 미래를 살필 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논어 제2편 위정 제11장]고 하셨다. 유학은 신비한 능력으로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觀 盥而不薦 有孚顒若
통찰(觀)은 몸을 씻고(盥而) 마음을 정갈히 하여(不薦) 믿음으로서(有孚) 공경을 다하여야 한다(顒若).
  관(盥)은 제사를 시작하기 전에 몸과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을 말하며, 천(薦)은 제사 때 제물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깨끗이 하지만 제사를 드리는 중이라면 마음이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관이불천(盥而不薦)은 초심을 잃지 않는 깨끗한 마음을 의미한다. 불가에서는 수행으로 마음이 맑아지면 일반적이지 않은 6가지 신통한 능력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반면, 공자께서는 평범을 벗어난 궁벽한 이치를 찾고 괴이한 일을 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바른 마음으로 보다 넓은 안목을 가지게 될 수는 있어도 전생과 내생까지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에는 반대하셨을 것 같다. 어느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공통분모는 ‘마음이 맑아지면’ 안목이 넓어진다는 것 일게다.

 

童觀 小人无咎 君子吝
아이의 어리석음으로 바라보는 것은(童觀)은 소인에게는 허물이 없으나(小人无咎) 군자라면 어려워진다(君子吝).
  소인은 사사로움을 도모하고 제 한 가정을 잘 꾸리기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는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손해를 입지 않는가 하는 그런 정도의 어리석은 혜안이니 소인에게는 허물이 없다. 그러나 군자는 혜안을 그러한 사사로움을 도모하는데 쓰려는 사람이 아니니, 동관(童觀)을 도모하는 것은 어렵게 된다. 군자로서 맡은 바 사명을 잊지 말고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말라는 뜻이다.

 

闚觀 利女貞
엿보는 통찰(闚觀)은 여자에게는 끝까지 이롭다(利女貞).
  요즘 시대에 '예기'에 나오는 여성의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언급한다면 무척이나 강심장이라고 할 것이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르라'는 뜻처럼 여인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삶을 엿보면서 보살펴주는 ‘땅의 덕성’으로 살라는 뜻을 담은 것이 이 효이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구분한 것도 하늘이 성별을 가려 세상에 낸 이유가 있으니, 그 역할을 다하여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다. 이른바 조선조의 소인유(小人儒)들이 세상을 현혹시켜 여성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멸시하고 복종을 강요하였으나, 옛 성현의 진실한 뜻은 음과 양이 조화로움을 이루는 ‘중용’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觀我生 進退
자기의 생을 통찰하여(觀我生)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그 말이 의미하는 뜻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라는 것을 아는가를 지식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객관식용 시험에 맞추어진 교육의 폐단이다.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늘이 더 크게 쓰려고 시련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 하기에(하늘이 맡긴 사명을 거스르기 때문에) 힘들고 성과는 없는 것인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통찰력(觀國之光)을 가졌다면 임금으로부터 손님으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니 이롭다(利用賓于王).
  이름난 지자(知者)들은 천기를 헤아려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고 하는데, 주역에서도 그런 인물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나라의 영광까지를 내다볼 줄 아는 통찰력을 가졌다면 유비가 제갈공명을 삼고초려로 모시었듯 그렇게 귀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觀我生 君子 无咎
자기를 통찰할 수 있는(觀我生) 군자는 허물이 없다(君子无咎).

  군자와 소인의 사명은 다르다고 하였다. 소인은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고 군자는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 자기를 통찰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소인이 아니라, 자기를 통찰하여 공공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군자여야 혜안을 가져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

 

觀其生 君子 无咎
타인과 다른 사물을 통찰하는 것(觀其生)도 군자라야 허물이 없다((君子无咎).
  바르지 못한 이가 혜안을 가진다면 세상은 더 어렵게 된다. 알려진 역사의 진실과 평가를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한명회에 대한 평가가 맞다면, 한명회가 혜안을 가짐으로써 세조가 권력을 찬탈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희생되었다. 자기 자신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과 미래의 세상을 보는 혜안을 가졌더라도 군자로서 바른 도를 추구하는데 사용하여야만 허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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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 元亨利貞 至于八月 有凶
【初九】咸臨 貞吉
【九二】咸臨 吉 无不利
【六三】甘臨 无攸利 既憂之 无咎
【六四】至臨 无咎
【六五】知臨 大君之宜 吉
【上六】敦臨 吉 无咎

  임(臨)괘는 다스림을 뜻하는 말이지만, 원형리정(元亨利貞)과 관계하는 ‘하늘의 다스림’을 말하니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숙명(宿命)이다. 순탄하게 원형리정의 변화의 과정을 겪으려면 때가 맞아야 하고(乾) 자리가 맞아야 하고(坤) 사람을 만나야 하고(屯) 노력해야 하지만(蒙) 그것만으로 순탄한 원형리정의 변화를 겪을 수는 없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교통사고를 만나기도 하여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를 겪을 수 없게 되기도 하니, 이러한 인간이 장악할 수 없는 우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숙명이라고 한다. 『중용』의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하늘과 땅처럼 위대한 존재에게도 사람들이 서운해 할 일이 있다’[중용 제12장]는 것이다.

 

臨 元亨利貞 至于八月 有凶
숙명(臨) 역시 변화의 순리(元亨利貞)를 좌우한다 그러나 8월에 이르면(至于八月) 흉함이 있다(有凶)
  씨로부터 시작해(元)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사라지게 되는(貞) 순탄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려면 하늘의 뜻이 맞아야 한다. 8월은 더위의 정점(양기의 최고점)을 지나는 시간이다. 즉, 숙명에 대해 극단으로 치우쳐 받아들이면 흉하다. 양의 극단은 분노로 폭발하는 것이며, 음의 극단은 체념하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봉황이 날아오지 않고 황하에 상서로운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구나”[논어 제9편 자한 제9장]라고 아쉬워 하셨고, 은자(隱者)들로부터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는 자’라고 비웃음을 샀지만, 최선을 다해서 사명을 다 하셨다.

 

咸臨 貞吉
마음으로 교감하여 숙명(咸臨)을 맞음은 끝까지 길하다(貞吉).
  유전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나기도 하고, 고아가 되기도 하고,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교통사고가 나기도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숙명을 바라보는 마음은 원망하는 마음이 아니라 교감하는 마음이어야 길하다. 하늘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을 다하여 숙명이라는 손님을 거부하지 않으니 곧 어렵고 힘들어도 주어진 삶을 사랑하는 자세를 견지하라는 말이다.

 

咸臨 吉 无不利
마음을 다하여 숙명(咸臨)을 따름은 길(吉)할 뿐 아니라,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아프리카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미국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조선시대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현세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어 사람마다 어찌할 수 없는 정해진 숙명적인 삶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싫어도 나의 부모가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남자가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흑인이 백인이 될 수는 없다.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한탄하고 원망하여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해진 숙명 속에서의 '나'를 사랑하고 나의 주위를 보듬어야 한다는 주역의 가르침이다. 공자께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아래로 인간사를 배워 위로 천리를 깨달았다”[논어 제14편 헌문 제35장]고 하셨다.

 

甘臨 无攸利 既憂之 无咎
달콤한 숙명(甘臨)을 꿈꾸면 유리할 것이 없으나(无攸利) 뉘우치고 근심함이 있다면(既憂之) 허물이 없다(无咎)
  나의 부모가 재벌이라면 나에게 로또가 당첨된다면 하는 달콤한 상상은 현재의 부모님을 원망하게 하고, 하늘을 원망하게 한다. 그러한 달콤한 숙명을 꿈꾸면 유리할 것이 없다. 하지만, 과거에 그러했더라도 깨달음이 있어 뉘우치고 반성을 하였다면 허물이 없다. 주역에서 ‘고치면 그것으로 좋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효사가 참으로 많다. 공자 말씀하시길 "잘못을 하고서도 고치지 않으려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논어 위령공 제15편 제30장]고 하셨으니, 고치지 않고 궁색한 변명을 찾고 잘못을 합리화 시키려는 것이 문제이다.

 

至臨 无咎
최선을 다해서 숙명(至臨)에 순응함은 허물이 없다(无咎).
  인생 일체가 ‘하늘의 뜻'이라고 ‘숙명'이라고 핑계를 삼고 수동적으로 살려고 하는 나약함을 가져서는 안되며, 반대로 좋은 숙명에 처한 이도 거만하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하늘이 그렇게 다스린(臨) 이유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는(至) 것이 지림이니, 원망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 허물이 없다. 가난이 싫다고 가족과 단절하여 뛰쳐 나가고, 병든 부모를 부양하지 않고 버리는 사람이 문제이다.

 

知臨 大君之宜 吉
숙명을 아는 것은(知臨) 임금의 뜻(大君之宜)이므로 길(吉)하다.

  숙명의 진의를 깨달으면 사명(하늘이 맡긴 임무)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주어진 숙명적인 상황을 한탄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 사명을 다하여 조화를 이루는 세상은 임금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니 길하다.

 

敦臨 吉 无咎
절도 있게 숙명을 따르니(敦臨) 길(吉)하고 허물이 없다(无咎).
  세상만사가 모두 숙명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난 신체와 태어난 고향은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삶은 사람의 노력으로 개척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중용』에 “남이 한 번에 그리하면 나는 백 번 할 것이며 남이 열 번에 그리하면 나는 천 번을 하면 된다”[중용 제20장]고 하였으니, 숙명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발전적인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 곧 숙명에 대해서 절도를 지키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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蠱 元亨 利涉大川 先甲三日 後甲三日

【初六】幹父之蠱 有子 考 无咎 蠣 終吉

【九二】幹母之蠱 不可貞

【九三】幹父之蠱 小有悔 无大咎

【六四】裕父之蠱 往 見吝

【六五】幹父之蠱 用譽

【上九】不事王侯 高尙其事

  고(蠱)는 산 아래에 바람이 부는 괘이다. 인간의 욕망은 양면성이 있다. 긍정적으로는 삶의 동력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는 괴로움의 뿌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노력여하에 따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개개인이 최고의 에너지를 발산하여 발전된 사회가 이루어졌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반면 그 편리해진 만큼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70억에 가깝게 된 세계인구를 따져볼 때 한국인의 생활수준은 상위에 있으며 부족하지 않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라는 녀석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형(荊)에 대해 말씀하시며 “조금의 재산을 갖게 되자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하였고, 조금 더 늘어나니 지극히 갖추어졌다 하였으며, 더 가지게 되자 지나치게 대단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논어 제13편 자로 제8장]고 하시며 칭찬하셨다. 만족할 줄 알면 이미 부자이며, 만족을 모르면 가난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蠱 元亨 利涉大川 先甲三日 後甲三日

욕망(蠱)은 근원적으로 혹은 성장기에 자라나는 것이니(元亨) 휘둘리지 말고 큰 강을 건너듯 과감하게 나아감이 이롭다(利涉大川) 어렵고 고통이 따르나(先甲三日) 절제하여야 한다(後甲三日).

  근원적인 욕망은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의 동물적인 감각적 욕망이며, 성장하면서 생긴 욕망은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 등의 사회적 욕망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고(蠱)는 그릇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이니 욕망이 중용의 선을 넘은 것을 말한다. 갑은 십간 즉,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갑을 말하니, 선갑삼일은 신(辛)이고 후갑삼일은 정(丁)을 말한다. 신(辛)은 고생을 뜻하고 정(丁)은 못처럼 바로 서 있다는 뜻을 나타내며 강하고 굳건한 것을 상징한다. 탐욕에 휘둘리지 말고 큰 강을 건너듯 과단하게 나아가야 하니, 힘들어도 절제를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幹父之蠱 有子 考 无咎 蠣 終吉

아버지의 욕망을 바로함은(幹父之蠱) 자식이 있어(有子) 생각할 수 있다면(考) 허물이 없고(无咎) 위태롭기는 해도(蠣) 마침내 길할 것이다(終吉).

  아버지의 욕망은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이성의 절제력이 본성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본래 부양의 의무감은 남자의 본능이라고도 한다. 처 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있어,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면(考)’ 태생적으로 강한 이성의 힘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幹母之蠱 不可貞

어머니의 욕망을 바로하려는 것은(幹母之蠱) 고집하면 좋지 못하다(不可貞)

  역할분담의 시대에 어머니의 일과 아버지의 일이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욕망은 바깥에서 도적질을 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어머니의 욕망은 가정을 조금 힘들게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요즘처럼 명품중독과 주부도박으로 집밖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없었던 시대였고, 한계가 있었음이니, 억지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아도 시간이 바로잡아 줄 것이다.    

 

幹父之蠱 小有悔 无大咎

아버지의 욕망을 바로함은(幹父之蠱) 작은 후회가 있겠지만(小有悔) 큰 허물은 아니다(无大咎).

  아버지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자식의 마음에 작은 후회를 남기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들어주어 바로하게 된다면 큰 허물이 될 것은 아니다. 

 

裕父之蠱 往 見吝

오히려 아버지의 욕망이 넘침에도(裕父之蠱) 그대로 두면(往) 궁색함을 만나게 된다(見吝)

  공자께서는 "부모님을 모실때는 허물이 있으면 간곡하게 권고한다. 만일 들어주지 않더라도 여전히 존경하면서 거스르지 않으며, 비록 괴롭더라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논어 제4편 이인 제18장]고 하셨다.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효’이고 무조건적으로 나이 많은 이를 섬기는 것이 ‘공경’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맹자께서도 '부모께 아첨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다가 부모를 불의(不義)한 행위에 빠지게 하는 것'을 불효의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幹父之蠱 用譽

아버지의 욕망을 바로하여(幹父之蠱) 명예롭게 사용하도록 하라(用譽).

  겸손을 뜻하는 겸(謙)괘에서 언급하였지만, 공자께서 말씀하신 "자기가 서고자 하는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 서게 하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 도달하게 하는 것"[논어 제6편 옹야 제30장]을 의미하니 곧 휘겸(撝謙)과 다르지 않은 뜻이다. 아버지의 욕망으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헤아려,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이 욕망을 이루도록 애쓰시게 하는 것이 욕망을 명예롭게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무인도에서 배고픔속에 죽어가면서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는 동생을 위로하며, “우리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버려져 죽어가는 고통이 어떠한지 알게 되었으니,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반드시 그러한 가엾은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자”고 하셨던 관세음보살의 전생이야기가 떠 오른다. 나의 고통을 통해 남의 고통을 보며, 나의 욕망을 통해 남의 욕망을 보아야 한다.  

 

不事王侯 高尙其事

왕후의 자리일지언정 버리고(不事王侯) 더 고원한 가치를 추구하여야 하는 것이다(高尙其事)

  백이, 이윤, 공자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맹자께서는 “옳지 않은 일을 한 가지만 저지르거나 죄없는 사람을 한 명만 죽인다면 곧바로 천하를 얻게 해 준다 유혹하더라도 그 분들은 결코 그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맹자 공손추 상]고 말씀하셨다. 이완용이 조선의 최고 갑부가 되고 일본의 귀족이 되었던 반면에 만세(萬世)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달콤한 유혹과 욕망을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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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 元亨利貞 无咎
【初九】官有渝 貞吉 出門交 有功
【六二】係小子 失丈夫
【六三】係丈夫 失小子 隨 有求 得 利居貞
【九四】隨 有獲 貞 凶 有孚 在道 以明 何咎
【九五】孚于嘉 吉
【上六】拘係之 乃從維之 王用亨于西山

  신하는 임금을 따르고, 자식은 부모를 따르고, 부인은 남편을 따르라는 그 따름은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소인유(小人儒)들이 그렇게 변질시켜 놓은 것일 뿐이다. 왕이 왕도를 행하지 않으면 왕이란 잘못된 이름을 가진 악한에 불과하니 이름을 바로잡기 위해 엎어버려도 된다고 맹자께서 말씀하셨으니, 마찬가지로 남편이 남편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부모가 부모의 도리를 다 하지 않으면 남편이 아니며 부모가 아니다. 자식을 학대하고 심지어 성 노리개로 삼는 자가 부모라고 해서 자식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순자께서도 “도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지 않으며, 의로움을 따르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셨고, 공자께서도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논어 제12편 안연 제11장]고 하셨으니, 유학은 「정명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수(隨)괘에서 말하는 따름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따름이며 맹목적 복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隨 元亨利貞 无咎
따르는 것(隨)은 순탄하게 변하도록 하니(元亨利貞) 허물이 없다(无咎)

  따름의 도(道)는 따뜻한 곳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따름이다. 주역의 첫 4괘는 원형지정의 순탄한 변화를 맞이하기 위해, 시간을 따르고(乾) 자리를 따르고(坤) 사람을 따르고(屯) 바른 도리를 따르는(蒙) 것을 말했다. 여기서는 그러한 따름의 도(道)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따름이어야 태어나서(元) 자라고(亨) 결실을 맺고(利) 죽는(貞)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를 맞이할 수 있어 허물이 없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 아니라 따스한 봄에 씨를 뿌리고(元) 메마른 모래밭이 아니라 비옥한 땅에 씨를 뿌리고(坤) 밟아 죽이려는 자가 아니라 거름을 주고 보살펴주려는 사람을 만나고(屯) 그늘 속에 있으면 태양을 더 잘 받기 위해서 몸을 비트는(蒙) 그러한 따뜻하고 편안함을 지향하는 따름이어야 한다.

 

官有渝 貞吉 出門交 有功
관직에 변화가 있는 격변의 시기(官有渝)에는 끝까지 길 하려면(貞吉) 문밖으로 나와서 사귐을 가져야(出門交) 이루는 것이 있다(有功)
  관직에 변화가 있는 것은 권력이 부딪히는 격동기이기 때문이다. 주역은 그러한 격동기라면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 밖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격동기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사귐, 곧 사람(人)을 통해 찾아야 한다고 한다. 문밖으로 나와서 사귐을 가지는 것은 두루두루 널리 사귐을 갖는 것을 뜻한다. 따름의 도(道)는 수동적인 웅크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격변의 시기를 따르는 도(道)는 적극적으로 문 밖을 나서는 것이다.

 

係小子 失丈夫
소인과 관계(係小子)하는 사귐은 장부를 잃게 된다.
  문 밖을 나와 두루두루 사귐을 가지더라도 소인배와 교제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소인(小人)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필부필부하는 보통의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의 소자(小子)는 정말로 소인배를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이다. 장부(丈夫)는 사(師)괘에서는 ‘신체가 건장한 남자’로 풀었지만, 여기서는 ‘마음이 건장한 남자’를 의미하니 군자(君者)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소인배와는 함께 어울리고 있으면 장부는 그런 사귐을 가지는 나와도 상종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係丈夫 失小子 隨 有求 得 利居貞
장부와 관계(係丈夫)하여 소인배를 잃는다 해도(失小子) 그러한 사귐을 따르고서야(隨) 구원이 있고(有求) 득이 있게 된다(得) 그렇게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居貞) 이롭다(利)
  두리번거리면서 다른 기회를 찾으려고 잠시 의탁하는 따름이 아니라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지조(志操)있는 따름을 말한다.

 

隨 有獲 貞 凶 有孚 在道 以明 何咎
따르면서(隨) 사사로이 챙기면(有獲) 끝까지(貞) 흉(凶)하니, 뜻을 가지고(有孚) 도리를 하다고(在道) 숨김이 없으면(以明)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何咎)
  따르면서 사사로운 챙김을 추구하면 어찌 상대도 이로움을 따져서 대하지 않겠는가?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이 개입하면 그 교류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孚于嘉 吉
뜻을 아름다운 것에 두어야(孚于嘉) 길(吉)하다.
  짐승들도 따뜻한 곳을 찾아서 모여든다. 인간도 본능으로 어느 곳이 따뜻한 곳인지 안다. 맹자께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설명하며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 할 때 놀라며 구하려는 것은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며,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 위해서도 아니며, 아이의 울음소리를 싫어해서도 아니고 본능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으니, 보통 사람들은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샘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배워서 영리해져서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 하면 도움을 주러 달려가지 않는다. 천성적으로는 모성(母性)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 영리해져서 낙태를 하고 제 이익을 꾀하곤 한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사람의 천성은 서로 가깝지만, 학습으로 멀어진다"고 하셨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장]. 바른 도리를 들으면 그것이 따뜻한지를 누구나 알지만 ‘그렇게 살면 손해다’라는 영리함을 개입시킴으로써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拘係之 乃從維之 王用亨于西山
구속이 되고 얽매이게 되더라도(拘係之) 사람들이 따르고(乃從) 받쳐주게 될 것이니(維之), 임금이라면 서산에 제사를 드려 물어볼 일이다(王用亨于西山)
  뜻을 아름다운 곳에 두면 사람들이 좋아하여 따르게 될 것이니, 임금이라면 서산에 제사를 드려 확인해 보라는 말이다. 뜻을 아름다운 곳에 두었다면 백성들이 따를 것이요, 뜻이 바르지 못하다면 백성들이 외면하게 될 것이다. 교활하고 아름답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까지도 무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르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어야만 박수를 친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좋은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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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 亨 君子 有終

【初六】謙謙 君子 用涉大川 吉

【六二】鳴謙貞吉

【九三】勞謙 君子有終 吉

【六四】无不利 撝謙

【六五】不富以其鄰 利用侵伐 无不利

【上六】鳴謙 利用行師 征邑國

  고전은 용어에 대한 의미를 단번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독서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논어에서 겸손을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과 같은 단계에서 언급한 곳은, 공자께서 “군자는 의로움을 바탕으로 삼고, 예로써 행하고, 겸손으로 표현하며 신의로써 완성한다(義以爲質,禮以行之,孫以出之,信以成之)”[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7장]고 하신 부분이다. 마땅히 낮추어야 할 때 즉, 어른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예(禮)이지 겸(謙)이 아니다. 겸손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임에도 자신을 낮추는 것을 뜻하는 반면, 오히려 자기에게는 더 엄격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자기를 나무람을 엄격히 하고 남을 나무람을 가볍게 하면 자연히 원망이 멀어질 것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5장]고 하셨다. 자기에게 더 엄격하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게 되고 남에게 더 관대하게 된다. 자랑하지 않아야 겠다고 낮추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낮추게 되는 것이다. 주역은 자신을 낮추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남을 높여주는데 애쓰는 적극적인 겸손까지 강조하고 있다.

 

謙 亨 君子 有終

겸손(謙)의 덕을 성장기(亨)에 익히면 군자로서(君子) 마침이 있다(有終)

  주역에서 언급하는 변화의 순리 원(元) 형(亨) 리(利) 정(貞)에서 유독, 형(亨)의 시기에 대해서 많은 언급이 되고 있는 이유는 근본(元)을 바꾸기는 힘들지만, 성장(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떤 결실(利)을 맺고 죽는지(貞)가 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키를 더 키우기 위해서 애쓸 수 있는 시간은 성장기이다. 겸손은 사람이 성장기(亨)에 잘 익혀야 쉬이 변치 않으므로 군자로써 생을 마칠 수 있게 된다. 성장기에 얻은 품성이 평생을 가는 것이다.

 

謙謙 君子 用涉大川 吉

겸손의 덕이 넘치는(謙謙) 군자는(君子) 큰 내를 건너는(用涉大川) 과단성을 갖추기만 하면 길하다(吉)

  겸손의 덕이 넘치는 군자는 겸손이 지나침을 말한다.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지나치게 되면 과단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길로 나가가려면 과단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鳴謙貞吉

사람들의 명성을 얻은 겸손은(鳴謙) 끝까지 길하다(貞吉).

  명겸(鳴謙)은 세상이 널리 알아주는 겸손을 말한다. 겸손한 척하는 사람이라면 명성을 탐하겠지만,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라면 명성을 탐하지 않을 것이니, 그런 사람이 얻은 명성이라면 비단 위에 꽃을 더한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勞謙 君子有終 吉

노력하여 겸손을 이루어도(勞謙) 군자로서 마침이 있을 것(君子有終)이니 길(吉)하다.

  성장기(亨)에 겸손의 덕성은 쌓아야 함은 끝까지 바뀌지 않아 군자로서 마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를 지나 거만하고 타인을 업신여기던 사람이 늦은 나이에 개과천선하면 어떻게 되는가? 마찬가지로 군자로서 마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공자께서 “사람이 개과천선하여 진보하고자 하면 마땅히 현재의 깨끗함을 용납해야 하니, 이것은 과거를 감싸주자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7편 술이 제29장]고 하셨다. 고치면 그것으로 좋고 과거를 허물 삼을 필요가 없다.

 

无不利 撝謙

이롭지 않음이 없구나(无不利) 나보다 남을 높이는 겸손(撝謙)이여!

  휘겸(撝謙)이란 자신을 낮추는 수준을 넘어서 힘써서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겸손을 말한다. 공자께서는 ‘자기가 서고자 하는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 서게 하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 도달하게 만드는 것’은 인(仁)의 한 모습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논어 제6편 옹야 30장] 그래서 공숙문자가 자신의 가신이었던 선을 천거하여 자기와 동일한 관직으로 오르게 애쓴 것을 두고 “참으로 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논어 제14편 헌문 제18장]라고 감탄하시며 칭송하셨다.

 

不富以其鄰 利用侵伐 无不利

부유함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에(不富以其鄰) 침략하여 응징해도(利用侵伐)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부유함이 아니라 겸손의 덕으로써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므로, 해를 끼치는 잘못된 자를 응징하여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침략하여 응징함은 남을 위해 애쓰는 휘겸(撝謙)의 뜻을 실천하는 자기 희생이요, 자기 낮춤이기 때문이다.

 

鳴謙 利用行師征邑國

명성을 얻은 겸손(鳴謙)은 군사를 일으켜 이웃나라를 정벌해도 이롭다(利用行師征邑國)

  휘겸(撝謙)의 군자가 명성까지 얻었다면 이웃나라를 정벌해도 이롭다고 한다. 『맹자: 양혜왕 하편』에서 맹자께서는 ‘천하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었으므로 동쪽으로 향하면 서쪽에서 원망하고 남쪽으로 향하면 북쪽에서 원망하며 어찌 우리나라의 정벌을 뒤로 미루시는가?’하였다며 『서경』을 인용하여 해방전쟁을 말씀하셨다. 남을 높여주기 위해 애쓰는 휘겸(撝謙)의 군자가 이웃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정복전쟁이 아니라, 이웃 백성들을 삶을 높여주기 위해서 해방전쟁으로 나가는 것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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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九】无交害 匪咎 艱則 无咎
【九二】大車以載 有攸往 无咎
【九三】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
【九四】匪其彭 无咎
【六五】厥孚 交如 威如 吉
【上九】自天祐之 吉 无不利

  많은 것은 어쨋건 좋은 것이다. 하지만 부(富)가 행복으로 가기 위한 절대요건은 아닐 것이다. 자식이 많다고 자식복이 있는 것이 아니듯, 재산이 많다고 재복이 있는 것도 아니요, 일이 많다고 일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식으로 인해 근심이 없는 것, 재물로 인한 근심이 없는 것, 일로 인해 근심이 없어야 하는 것, 그것이 자식복, 재복, 일복이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갈망하던 모든걸 가졌던 석가모니께서는 행복하지 않다는 고민에 빠져서 길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결국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아 얽매이지 않는 것이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되셨다는데, 자유주의라고 규정된 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날개는 돈에 묶이고, 남의 눈에 묶여 자유롭게 날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大有 元亨
많이 가진 것(大有)은 태어나(元) 성장(亨)하기데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이 나이 40을 기준으로 선천운과 후천운을 구별하기도 한다. 나이 40까지는 부모의 영향을 받는 다는 뜻인데, 링컨도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으니, 링컨이 동양사상과 교감이 있었던 것 같아 흥미롭기도 하다. 자식은 싫건 좋건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외모와 체질을 물려받고 가진 재물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모든 것은 변하니 그 영향력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성장(亨)하기까지는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고 한다.


无交害 匪咎 艱則 无咎
사귐에 해로움이 없어야(无交害) 허물이 없다(匪咎). 어려운 것(艱)이지만 그래야(則) 허물이 없다(无咎).
  주역은 서두의 ‘건(乾)곤(坤)준(屯)몽(蒙)’괘를 통해, 시기를 알고, 자리를 알고, 사람을 알고, 노력해야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순조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결국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다. 자기(노력)와 타인(만남)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맹자께서는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보다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 사이의 화합보다 못하다”[맹자 공손추 하]고 하셨다. 많이 가진 대유자는 오히려 사람을 얻기가 더 어렵다. 가진 것이 많은 자 주위에는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진 것이 많으면 도적을 만나기 쉽고, 가진 것이 없으면 친구를 만나기 쉽다’고 하였다. 마음으로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우니 대유자는 사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大車以載 有攸往 无咎
큰 수레에(大車) 짐을 가득 실어두고(以載) 시간을 보내도(有攸往) 허물이 없다(无咎)
  많이 가진 것을 수레에 실어 잘 비축해 두는 것이다. 가진 것을 쓰지 않으려는 것은 없는 것과 같고, 시기(乾)와 자리(坤)에 맞지 않게 함부로 사용해서도 안되니, 때를 기다려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 “사람이 멀리 내다보고 고민해보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날 근심이 생길 것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2장]고 하신 것도 그러한 대비를 말씀하신 것이다.

 

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
공공의 일에 참여하여(公用) 천자를 위해 베푸는 향연(亨于天子)은 소인이라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小人弗克)
  천자를 위해 제후들이 베푸는 향연은 천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자를 비롯, 공곡의 복을 도모하고, 또 음식과 가무를 모인 사람들이 함께 먹고 즐기는 전체를 위한 행사였다. 그런데 이 공익적인 소비를 위해 돈을 내 놓아야 한다면 소인이라면 아까워 견디지 못한다는 뜻이다. 소인(小人)은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사사로움을 가장 중히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匪其彭 无咎
군자라도 요란하게 하지 않아야(匪其彭) 허물이 없다(无咎).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가진 것을 사용할 줄 아는 군자라도 요란하게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좋은 집을 장만하고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여 자기를 챙기는 것이 소인의 요란스러움이라면, 베푸는 것이기는 하지만 크게 이름을 광고하여 기부를 하는 것 같은 것이 군자의 요란스러움이다. 논어의 첫 장부터 언급되어 가장 많이 반복되고 있는 가르침이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말라’는 말이다.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며 요란하게 내 놓지는 말아야 한다.

 

厥孚 交如 威如 吉
마음으로(厥孚) 사귀어(交如) 위엄을 세워야(威如) 길(吉)하다.
  대유자는 참된 사귐을 가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가진 것으로 사귀려고 해서도 안 된다. 마음과 신념으로 함께 하는 사귐이 되어야 한다. 자공이 공자께 벗과의 사귐을 여쭈자 “그를 충심으로 권고하고 선으로 인도하다가 만일 들어주지 않으면 곧 그쳐서 모욕을 받지 않아야 한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3장]고 하셨다. 허물을 말해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도 하지만, 지나치면 강요며 교만일 따름이다. 충분한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또 나의 행위를 통해 깨닫게 배려하고 도저히 스스로 고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조심스런 마음으로 충고해 주어야 한다. 위엄을 세운다는 뜻은 이러한 친구지간의 도리(道理)와 예(禮)를 지키는 사귐을 말한다.

 

自天祐之 吉 无不利
하늘이 스스로(自天) 그를 도운 것이니(祐之) 길(吉)하고 불리할 것이 없다(无不利)

  자하는 '죽음과 삶에는 명이 있고 부유함과 귀함은 하늘에 달려있다(死生有命 富貴在天)'고 배웠다고 한다.[논어 제12편 안연 제5장] 자본주의는 노력여하에 따라 성공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배우지만, 평생을 연구한 이름난 경제학자보다 배움에 일천한 부자들도 많다. 많이 배우고 많이 노력한다고 부가 찾아오는 것이 절대진리는 아니니, 그래서 부(富)를 인간이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지만, 완전한 숙명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또한 공자께서도 부(富)를 나쁜 것으로는 보지 않으셨다. 오히려 공자는 자공을 칭찬하기까지 하셨다. "자공은 운명의 안배를 뛰어넘어 크게 재산을 불렸고 언제나 적중하였다"[논어 제11편 선진 제18장] 공자께서 염유가 주군의 재산을 불려준 것을 나무라면서도, 반대로 자공의 재산불림을 칭찬한 까닭은 무엇일까? 자공이 불린 재산을 홀로 누리는데 소비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학에서의 부유함은 하늘의 명을 내려 사람들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라고 임무를 맡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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