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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3. 12:19

제2편 위정(爲政) 제21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3. 12:19

어떤 이가 공자께 말했다.[或謂孔子曰:]
선생께선 왜 정치에 종사하지 않는가요? [子奚不為政]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서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書云:]
효(孝)다. 오직 효다. 형제간 우애있으면 정치에 이르는 것이다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이것이 정치인데 어찌 정치를 따로 하겠습니까? [是亦為政, 奚其為為政]

 

  하지 않는 것을 물으면 피곤한 법이다. "육식을 왜 하지 않지? 주식을 왜 하지 않지?" 취향에 속하는 이런 질문은 그나마 괜찮다. 하지만 "결혼을 왜 하지 않지? 치마를 왜 입지 않지?" 같은 질문은 신중해야 한다. "누군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느냐고" 하면서 부글부글할 수 있으니. 주유천하로 유명한 공자였다. 14년을 천하를 돌며 도덕정치를 구현할 군주를 찾았다. 그러니 어찌 정치에 종사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 글은 어떤 이(或)가 아픈 곳을 찔러도 무시하지 않았다는 예(禮)를 전하고자 함일까? 아니면 만사에 단절이 없다는 도(道)를 설명한 수준 높은 가르침일까? 《서경》까지 인용하는 걸로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늘날에도 유명인의 말이나 글을 빌려 와 수식을 하곤 한다. 조선조는 유교경전과 공자 왈 맹자 왈을 할 수 있어야 지성인이었는데, 요즘은 서구인을 언급해야 더 있어 보인다고 한다. 상표와 간판도 서구어로 넘쳐나니 문화적 경향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어쨌건, 공자께서도 말에 더 신뢰를 얻기 위해 《시경》과 《서경》을 종종 언급 하셨다. 잡설을 이리 늘어놓는 이유는 이어지는 글이 무겁기 때문이다...

  유가의 도(道)는 '분별'에서 출발하기에 난해하다. 그 이론에 곧고 강직했던 선비 이미지가 오버랩되면 엄격하게 맺고 끊는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그러니 이 장처럼 효가 곧 정치요, 우애가 정치라고 하면 어렵다. 나를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이 곧 제가(齊家)요 치국(治國)이요 평천하(平天下)라고 하면 더욱 혼란스럽다. 본래 유가의 철학 중용(中庸)은 분별해서 가르지 않는다. '분별 후 조화'를 도모한다. 가르기 위한 분별이 아니라 붙이기 위한 분별임을 이해해야 한다. 유학은 도(道)를 가장 간명하고 자신있게 설명하는 학문이다.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다 할 수 있다. 본질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不貳 [중용 제26장]


  남녀로 나누고, 형제와 4촌을 나누고, 군주와 신하를 나누어 둘이 되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로 합쳐짐을 지향한다. 분리의 이미지가 없다. 태극기의 태극처럼 떨어진 둘이 아니라 꼭 붙어있는 둘, 그래서 결국은 하나이다. 조금 더 자세히는 <이곳> 설명을 참조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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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손가락의 의미로 비교하여,
저 사람의 (여섯번째) 손가락은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以指喩指之非指]
일반적 손가락이 아닌 특이한 손가락으로 비교하여,
저 손가락은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에도 못 미친다[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일반적인 말(馬)의 의미로 비교하여
저 (양처럼 생긴) 말은 말(馬)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以馬喩馬之非馬]
일반적인 말이 아닌 특이한 말(馬)로서 비교하여,
저 말(馬)이 말(馬)이 아니라고 하는 것에도 못 미친다[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천지도 이와 같은 하나의 다른 손가락이며[天地一指也]
만물도 이와 같은 하나의 다른 말(馬)에 불과하다[萬物一馬也]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요[可乎可]
틀렸다고 하면 틀린 것이다[不可乎不可]
도의 움직임에 의해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것이며[道行之而成]
만물은 그렇다고 하면 그런것이다[物謂之而然]
어째서 맞는가[惡乎可]?
맞다에 의해 맞는 것이다[可於可]
어째서 틀리는가[惡乎不可]
틀렸다에 의해서 틀린 것이다[不可於不可]
만물은 그대로이면 그대로이고[物固有所然]
만물은 옳다면 옳은 것이다[物固有所可]
만물이 그대로가 아닌 것이 없고[無物不然]
만물이 옳지 않은 것이 없다[無物不可]



때문에 말하자면[故爲是],
지탱하는 대들보와 받치는 나무기둥[擧莛與楹],
문둥이와 서시라는 미녀[厲與西施]
허풍쟁이와 사기꾼이나 말쟁이와 괴상한 사람[恢恑憰怪]
모두 도(道)의 관념으로 통하면 마찬가지로 같은 것이다[道通爲一]



나누는 것이 이루는 것이며[其分也成也]
이루는 것은 부서지는 것이다[其成也毁也]
만물은 이루고 부서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凡物無成與毁]
돌고 돌아 통하여 하나로 있다[復通爲一]



오직 도달한 사람만이 그 하나라는 이치를 알아[唯達者知通爲一]
쓸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쓰여지게 놓아둔다[爲是不用而寓諸庸]
저절로 쓰여지는 것이야 말로[庸也者] 쓰는 것이며[用也]
그리 쓰는 것이야 말로[用也者] 그대로 통(通)하게 하는 것이다[通也].
그리 통(通)하는 것이야 말로 제대로 얻는 것이어서[得也]
가장 적합하게 되니[適得而幾矣] 이에 그렇게 놓아두는 것이다[是因是已]
그렇게 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줄을 모르는 것을[已而不知其然]
도(道)라고 부른다[謂之道]



애를 써서 하나로 만들려고 하면[努神明爲一]
결코 하나됨에 이르지 '못한다[而不知其同也]
이를 조삼이라고 말한다[謂之朝三]
조삼이 무엇인가?[何謂朝三]?
이러하다 [曰:]
원숭이 사육사가 도토리를 주며 말했다[狙公賦芧曰]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줄 것이다"[朝三而暮四]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었다[衆狙皆怒]
다시 말하기를 [曰:]
"그렇다면,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줄 것이다"[然則朝四而暮三]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衆狙皆悅]
말한 것과 실제가 달라진게 없었으나[名實未虧]
기쁘게도 화나게도 하였다[而喜怒爲用]
역시 (준다는 말 없이) 그냥 주면 되었을 뿐이었다[亦因是也]



따라서 성인은 시비가 조화되도록[是以聖人和之以是非]
자연의 섭리에 맡기고 쉬는데[而休乎天釣]
이것을 어긋나지 않고 함께 가는 양행(兩行)이라고 말한다.[是之謂兩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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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지혜는 한가롭고 느긋하게 해 주고[大知閑閑]
작은 지혜는 바쁘고 초조하게 만든다[小知間間]
큰 말은 담담하게 들리고[大言炎炎]
작은 말은 수다스럽고 시끄럽다[小言詹詹]



잠잘 때는 혼백이 분주하고[其寐也魂交]
깨어 있을 때는 형상과 접촉하여[其覺也形開]
쉬지않고 쫒아다니기만 하니[與接為構] 언제나 마음이 싸울려고만 하는 것이다[日以心鬪]
우유부단한 사람[縵者] 속셈이 있는 사람[窖者]  감추는 사람[密者]이 되고,
조그만 두려움에도 벌벌떨면서[小恐惴惴] 큰 두려움임에는 태연한듯 하는 것이다[大恐縵縵]
활을 쏘듯이 쏘아붙여[其發若機栝] 시비를 가려내려 하고[其司是非之謂也]
딱 잡아떼고 맹세하여[其留如詛盟] 고집스레 이기려 하는 것이다[其守勝之謂也]
죽여버리려는 마음이 가을겨울의 추위처럼 매서워[其殺若秋冬]
오히려 나날이 제 기력을 잃어가게 되는데[以言其日消也]
이미 잠겨버렸기에[其溺之所為之]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不可使復之也]
욕망으로 조여가고 묶어가는 것이[其厭也如緘] 늙을수록 더 심해지니[以言其老洫也]
죽은 마음에 다가간 것이어서[近死之心] 되살릴 수가 없다[莫使復陽也]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喜怒哀樂]
걱정하고 한탄하고 변덕을 부리기도 하고 고집하기도 하고[慮歎變慹]
까불기도 하고 방탕하기도 하고 들춰내려하고 꾸미려고도 하는 것이[姚佚啟態]
소리가 빈 구멍에서 생겨나고[樂出虛]
습한 기운이 곰팡이를 만들듯[蒸成菌]
밤낮으로 반복되며 눈앞에 나타나지만[日夜相代乎前]
어째서 그런지를 알지 못한다[而莫知其所萌]
못난 사람 얘기는 여기까지만 할란다[已乎] 여기까지만 할란다[已乎]



아침 저녁으로 이렇게 마음이 변화는 것은[旦暮得此]
어떤 까닭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其所由以生乎]?
그것이 없다면 내가 없고[非彼無我] 내가 없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으니[非我無所取]
저것과 나는 그처럼 가깝지만[是亦近矣] 무엇이 그리하는지 알 수는 없다[而不知其所為使]
참된 주재자가 있는 것 같은데[若有真宰]
애를 쓴다고 그 조짐을 알 수는 없고[而特不得其眹]
그 작용은 믿을 수 있는 것이지만[可行己信]
그 형체를 볼 수는 없다[而不見其形]
참된것은 있으되 형상이 없을 뿐이다[有情而無形]



몸은 백 개의 뼈마디[百骸] 아홉개의 구멍[九竅] 여섯의 장기가[六藏]
모두 갖춰져야 하는데[賅而存焉] 내가 어느것과 더 친해야 하나[吾誰與為親]?
그 모두를 사랑해야 할까[汝皆說之乎]? 특별히 하나를 사랑해야 할까[其有私焉]?
이것들은 주인은 없이 신하와 첩으로만 있는 것인가[如是皆有為臣妾乎]?
신하와 첩이라면 어찌 서로서로가 다스릴 수 있겠는가?[其臣妾不足以相治乎]?
번갈아가면서 군신관계가 된다는 말인가[其遞相為君臣乎]?
진정한 주재자가 있음이다[其有真君存焉].
그 참됨이 있음을 알아주건 몰라주건[如求得其情與不得]
그 참됨의 작용은 아무 변화가 없을 것이다[無益損乎其真].
몸의 요소는 사람의 형체안에 하나가 되어[一受其成形]
없어지지 못하고 역할을 다하면서 기다려야 할 뿐이다[不亡以待盡]



사람은 만물과 서로 다투기만 하고[與物相刃相靡]
말달리듯 지나가면서도[其行盡如馳] 멈추고자 하지 않으니[而莫之能止]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不亦悲乎]!
종신토록 허덕인다고 성공을 볼 수는 없고[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고달파 쓰러지면서도 되돌아가야 할 바를 알 지 못하니[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참으로 애처럽지 않겠는가[可不哀邪]!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고 하게되면[人謂之不死] 이로움이 있겠는가[奚益]?
모습은 마음과 더불어 늙고 변하게 될 터인데[其形化其心與之然]
(죽지 않는것이) 더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는건가[可不謂大哀乎]?
사람들이 사는 것이 이처럼 어리석은 것인가[人之生也 固若是芒乎]?
나 혼자 어리석고 남들이 어리석지 않은 것인가[其我獨芒 而人亦有不芒者]?



본래 지닌 참된  마음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으니[夫隨其成心而師之]
그 누가 스승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誰獨且無師乎]?
자기 마음을 얻은 사람에게만 스승이 있었다 하겠는가[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역시 있는 것이다[愚者與有焉]
여전히 이르지 못하고 시비가 남아있다면[未成乎心而有是非]
오늘 월(越)나라를 떠나면서 어제 도착했다는 것이요[是今日適越而昔至也]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있다고 하려는 것이다[是以無有為有]
없는데도 있다고 하는 것은[無有為有]
성인인 우(禹)라도[雖有神禹] 알 수 없을 것인데[且不能知].
하물며 내가 어찌 알아줄 수 있겠는가[吾獨且奈何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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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3. 19:43

무왕불복(无往不復)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3. 19:43

   무왕불복(无往不復)은 주역 태(泰)괘의 셋째 효사에 나오는데, 주희가 대학장구 서문에 '천운순환((天運循環)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한 이래로, 이 명언은 주역의 명언이 아닌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주역의 효사는 ‘무평불피(无平不陂) 무왕불복(无往不復)’으로 시작됩니다. 주희는 ‘하늘의 운행은 순환하는 것이니 가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며, 주역은 ‘비탈지지 않는 평지가 없고, 돌아오지 않는 떠남은 없다’는 것입니다만, 무왕불복(無往不復)의 의미가 다르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无는 無의 고어(古語)입니다. 불교에도 유사한 명언이 있습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즉, 떠난 사람은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연(緣)을 따라 윤회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왕불복(无往不復)의 심오한 뜻은, 도(道)에 관한 얘기가 선행되어야 하며, 본래 떠남은 만남과 함께 생겨나는 방생(方生) 사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만, 그 어려운 얘기가 궁금하시면 <이곳>을 참고하시길 바라며, 어떤 경우에 흔히 인용되는지를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갈까 합니다.

 

  그 심오한 뜻과는 달리 인용하는 경우는 오히려 단순합니다. 주로 삶의 굴곡을 얘기하기 위해 인용합니다. 항상 좋을 수도 없고, 항상 나쁠 수도 없고 파도가 치듯 왔다 갔다 변하는 것이 인생이기도 합니다. 종종 이 세상에서의 이별을 위로할 때 인용하기도 합니다. 애인간의 헤어짐, 재물을 잃음, 지위에서 물러나는 등등의 경우입니다. 또한 저 세상으로의 이별을 위로할 때 인용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을 더이상 함께 할 수 없게된 경우가 대표적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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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0. 20:01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20:01

발자국

한계란 명칭은 대개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시작할까 합니다.
즉, ‘자유’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자유란 조금 쉬운 느낌이죠. 새처럼 훨훨~ 나는 것 같습니다.
갇혀있는 새장을 없애버리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요?

자유를 찾음은 갇힌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로든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갇힌 것을 떨쳐버리는 예를 하나 들기로 하겠습니다.

 

담배로부터 자유를 한번 찾아볼까요?
먼저 담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누가 자유롭나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담배를 끊기가 힘들다는 마음을 짐작정도만 할 것 같습니다.
그 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담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담배가 뭔지 모르는 두세살된 아이나, 담배를 접해보지 못한 비문명국의 어른이나,

모두 완벽하게 담배로부터는 자유롭습니다.

 

번뇌로부터는 어떻게 자유를 찾겠습니까?
담배로부터의 자유가 힌트가 될 것입니다.
번뇌를 인식하지 못하면,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이름이 있습니다. 백치하고 비슷합니다.
백치가 되어 인식이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백치하고 붓다는 같은 뜻,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앎을 통해서도 백치가 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본래 함께 있었습니다.
'도(道)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억나시는지요?

 

미쳤다는 의미가 싫어지는 것은
말과 문자의 좋고 나쁨에 갇혀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학이 추구하는 미침을 보겠습니다.
정상인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미치기도 합니다. 배움에 미치기도 합니다.
공자께서 '석달동안 고기맛을 잊었다'는 비유와도 연관됩니다.
순간을 집중하게 마음을 붙드는 것이 생기면(미치게 만들면),
다른 것에는 아무 생각도 미치지 않습니다.

 

유가의 선비들이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이 순간을 지극히 열심히, 집중하여 사는 것,
즉, 현재의 삶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참된 자유로움을 찾아갑니다.
이것이 중용을 실천하고 사는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억지로 가는 길일까요?
대학에 가기 위해 시험문제에 몰두하는 것과 같을까요?

욕구를 계산하는 마음에서 생긴 집중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결코 오래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기쁨에 미쳐,

현재의 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을,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가의 도(道)는 꽉 움켜쥐고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순간을 사랑하면서 평생 나아가는 행위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도(道)라는 한자가 우리말의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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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lleaf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성(性)을 따르는 것으로 관점을 돌려보겠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하늘이 준 것을 한번 따져 보겠습니다.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닌 게 무엇입니까?
생명, 사람, 이세상, 남자, 부모님 등은 쉽게 보입니다.
도(道)의 '떨어질 수 없음'을 접목하여 안목을 넓히면,
생명만 준 것이 아니라 죽음이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남성만 준 것이 아니라 여성도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나중에는 사람만 아니라 자연도, 다른 생명도, 다른 사람도 함께 붙여준 것으로 의미를 넓혀가야 합니다만,

지금은 제한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으로 들어와서 생각해 봅니다.
감정도 욕구도 지혜도 모두 하늘이 준 것입니다.

먹기 싫다고 먹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싫다고 자지 않을 수 없고,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정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입니다. 
 

가장 쉽게 정의하면 ‘태생적 한계’가 성(性)에 가깝습니다.

이쯤에서 장자의 설명을 빌려오겠습니다.
나를 엮고 있는 백개의 뼈마디와 아홉개의 구멍 오장육부들 중에서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게 있습니까?
하늘은 우위와 열위로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르게 만들어 역할을 달리하게 해 조화로움을 도모했습니다.

 

태생적 한계가 성(性)이지만,
태생적 한계가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입니다. 
눈과 귀가 똑같이 소중한데,
눈이 들을 수 없다고 속상해 하고,
귀가 볼 수 없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인간이 머리가 중용을 벗어나 만들어낸 것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욕구, 곧 도(道)와
성(性)을 따르지 않는 욕구, 도(道)가 아닌 욕구가 있습니다.

‘자기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인식이 그렇게 만듭니다.
나는 특별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다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예뻐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로또에 당첨될 수 있습니다.

… 
나는 특별해서 새처럼 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와 너는 다를 뿐입니다.
나은 것도 있고, 모자란 것도 있고, 그렇게 다를 뿐입니다.
결국 함께 있습니다.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성(性)을 따르는 것은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예시한 몇 가지가 아니라, 안목을 넓혀 더 많이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중용에서는 거짓과 위선을 걷어낸 순결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중용 제22장에서 말합니다.

오직 세상에서 가장 지극한 진실함(誠)으로서
그 성(性)을 다하게 할 수 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사람답게 살았다고 하는 평가에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다르게 부여받은 천명을 알고, 그 성(性)에 따라 내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고통스런 의무의 길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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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guk

『중용』시작부의 도(道)의 정의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도(道)는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간단히 생각하면 쉬우면서도, 어려운 얘기입니다.

유학경전에서 A = B로 완전하게 정의를 시도한 부분은

이 「도(道)」의 정의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도(道)입니다.

조금 쉽게 다가올까 싶어 ‘아담과 이브’를 등장시킵니다. 태초이래로 생겨난 인간은 한 명일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체가 느껴지는 것 뿐 아니라, 무형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마음조차도 그러합니다.

「사랑」과 「미움」이 별개요, 「고통」과 「쾌락」이 별개일까요?

사랑의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크게 키우면 미움이 보다 선명히 나타납니다. 고통이라는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쾌락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고통의 크기를 크게 키우면 함께 있었던 쾌락이 더 선명히 나타납니다.

 

떨어질 수 없다’는 것, ‘관계가 없는 그것 뿐인 것은 없다’는 이 관념이 정립되면, 모든 것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사유로 연결되어 갑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국의 음양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무극에서 생겨난 ‘태극’의 개념과 연결되며, 유가, 도가, 불가의 가르침도 역시 이 개념으로 함께 통(通)합니다. 삶과 죽음도 함께 있고, 깨달음과 무지도 함께 있고, 나와 너도 함께 있고, 선과 악도 함께 있고, 유와 무도 함께 있고, 현재와 비현재도 함께 있습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도(道)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도덕경』의 첫장입니다.

도(道)라는 도(道)는 참된 도가 아니며, [道可道非常道]
이름으로 정해진 것은 진정한 그것만이 아닙니다. [名可名非常名]
천지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은 본래 이름이 없었는데 [無名 天地之始],
이름으로 가두어버림으로써 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有名 萬物之母]

그러기에 가두지 않음으로 그 신비함을 보아야하고 [故常無欲以觀其妙]
가두어져 막혀 있는 것도 보아야 합니다. [常有欲以觀其]

‘갇히지 않음(무욕)’과 ‘갇힘(유욕)’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생긴 것이지만 이름이 다릅니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이 둘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있으니 혼란합니다 [同謂之玄]
아득하고 또 아득합니다. 모든 신비의 문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중용』에서 말하는 도(道)와 다른가요?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는 중용의 설명에 덧붙여,

도(道)라는 그 개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만 떨어질 수 없다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진정한 그것과 갇혀진 그것, 역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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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01

교과서『중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도(道)를 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도(道)라는 것은 어떠한 것임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도(道)를 행한다는 것」의 개념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야 할 것은 오직 그대로의 성(性)입니다.
스승도, 부모도, 남편도, 조상도 아닙니다.
책도, 좋은 말도, 인격자도, 지식도 아닙니다.
머리도 아니고, 육체도 아닙니다.
오직 성(性)입니다.

 

순자의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도(道)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의(義)를 따르지,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유가는 공자를 칭송하고 존경하지만, 공자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성(性)'을 따릅니다. 곧 도(道)를 행합니다.

 

오직 성(性)만을 따른다는 것은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에서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텅 비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치우침을 일으키는 것을 비워버리고
성(性)을 진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정반대에 있는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라는 유가의 일신(日新)이나,
날마다 벗어내라는 도가의 일손(日損)이나
가두고 있던 것을 떨쳐내는 유가의 유위(有爲)와
가두고 있던 것을 비워내는 도가의 무위(無爲)는
같은 말, 다른 표현입니다.

 

알아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는 것 모두를 말로 완벽하게 할 수 있습니까?

들어도 모든 것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렇게 말이라는 녀석과 귀라는 녀석은

또한, 눈이라는 녀석과 머리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로

제가 가진 성(性)에 따라 한계가 있습니다.

 

머리로만 만나려는 사람은
그대로의 성(性)도 머리만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다는 맹신에 갇힌 것일지 모릅니다.

 

똑똑한 자공이 말(言)에 갇혀가고 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으려 한다. (중략)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이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나
하늘은 아무 말이 없지 않느냐?" [논어 제17편 양화 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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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明夷 利艱貞
【初九】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六二】明夷 夷于左股 用拯馬壯 吉
【九三】明夷于南狩 得其大首 不可疾貞
【六四】入于左腹 獲明夷之心 于出門庭
【六五】箕子之明夷 利貞
【上六】不明 晦 初登于天 後入于地

  명이(明夷) 괘는 밝음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공자께서 한탄했던 도가 무너진 세상을 의미한다. 공자께서는 “천하에 도가 살아있으면 나와서 일해야 하고 천하가 태평하지 않으면 숨어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13장]고 하셨다. 물론 산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갈고 닦으며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明夷 利艱貞
세상의 도가 무너지면(明夷) 성숙기와 말년사이가 어렵다(利艱貞)
  열매를 맺고 마감을 해야 하는 짧은 시간 속에서 도가 무너졌으니 뜻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으니 시절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명이(明夷)의 시절에 전성기가 지나가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해 결실을 맺고 마감을 할 수 없다면 그것도 천명(天命)일 지 모른다.

 

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도가 무너지면(明夷于飛) 날아야 할 때 그 날개를 접어야 한다(垂其翼) 군자의 길을 가면(君子于行) 3일 동안 먹을 수 없게 되고(三日不食) 시간이 지나가도(有攸往) 주인의 꾸지람만 듣게 된다(主人有言)
  도가 무너진 세상에서 오히려 군자의 길을 가면 배고픔이 있다고 한다. 좋은 소리를 들을수도 없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하게 될 것이요, 명예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해야 하는가? 주역은 날아야 할 때 그 날개를 접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변신하여 현실과 타협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나아가려고 애쓰지 말라는 뜻이다.

 

明夷 夷于左股 用拯馬壯 吉
도가 무너져서(明夷) 왼쪽 허벅지에 화살을 맞더라도(夷于左股) 구조에 사용할 말의 힘이 세면(用拯馬壯) 길(吉)하다.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왼쪽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으니 바르지 못함에 당한 것이다. 그러나 왼쪽 허벅지는 치명적이지 않은 신체의 부분이다. 치명타를 입지는 않았고 도와주는 센 힘이 있다면 큰 걱정이 아니다. 길(吉)한 이유는 날개를 접지 못하고 있는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날개를 억지로 접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明夷于南狩 得其大首 不可疾貞
도가 무너졌을 때 남쪽으로 사냥을 떠나서(明夷于南狩) 그 적의 수괴를 사로잡았다 하더라도(得其大首) 끝까지 서둘지 마라(不可疾貞)
  따뜻한 남쪽은 바른 도리를 상징한다. 그 곳에서 우두머리를 얻었으니 곧 세상을 밝은 도리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끝까지 서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도가 무너져 있으므로 급하게 세상을 변하도록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성왕이 나타나더라도 한 세대가 지나야만 세상을 어질게 만들 수 있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2장]고 하셨다. 세상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入于左腹 獲明夷之心 于出門庭
왼쪽 뱃속에 들어가(入于左腹) 도가 무너져있는 마음을 알았다면(獲明夷之心) 속해있던 집단에서 나와야 한다(于出門庭).

  왼쪽 뱃속이란 곧 심장이 위치한 곳을 말한다. 옛 사람들은 사람의 생각이 살고 있는 장소는 뇌가 아니라 가슴으로 여겼다 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고 생각하였고, 전통적으로 사람의 사망을 심장이 정지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근래에 뇌사를 인간의 사망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이 강하고 아마도 곧 그렇게 바뀌게 될 것 같기는 하다. 여하튼 그 마음을 통찰하여 도가 무너져 있음을 알았다면 속히 그 집단으로부터 나와야 현명하다고 한다.

 

箕子之明夷 利貞
도가 무너졌음을 알고 있는 현자(箕子之明夷)는 끝까지 이롭다(利貞)

  도가 무너졌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도 안목이 없다면 판단하기 힘든 일이다. 명이(明夷)의 세상에는 교묘한 말이 진실을 속이고, 사이비가 진짜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도가 무너진 세상은 말재주가 좋은 사람과 화려하게 꾸밀 줄 아는 사람이 존중 받는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난무하는 세상이라면 바른 도가 무너져 있는 세상일 것이다.

 

不明 晦 初登于天 後入于地
도가 무너졌음을 알지 못하는(不明) 어두움(晦)이라면 처음에는 하늘에 올라도(初登于天) 곧 땅으로 추락함으로써(後入于地) 마감을 하게 될 것이다.
  도가 무너졌음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안목을 가졌다면 처음에는 하늘에 오르는 것으로 착각하여도 후에 그 곳이 땅으로 추락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바른 도(道)가 무너졌음을 왜 알지 못할까? 도(道)에 마음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 지 못한다”[대학 제7장 정심수신]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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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遯 亨 小利貞
【初六】遯尾 厲 勿用有攸往
【六二】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九三】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九四】好遯 君子吉 小人否
【九五】嘉遯 貞吉
【上九】肥遯 无不利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것이 바른 도(道)이다. 둔(遯)괘는 숨는다는 뜻이나 비겁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용기있게 물러나는 것이다. 둔(遯)은 집에서 기르던 돼지(豚)가 우리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공자께서 “함부로 위험한 나라에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 거처하지 않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살아있으면 나와 일해야 하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숨어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3장]고 하셨으니, 외형은 물러남이지만 결과는 바른 곳으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둔(遯)괘이다.

 

遯 亨 小利貞
물러나야(遯) 할 때는 성장기(亨)여야 하고 결실기와 마감기(利貞)에는 득이 적다(小)
  물러나는 것도 때를 놓치면 어렵게 된다. 일을 시작하여 성장하는 단계에서 물러나는 것이어야지 이미 결실기와 마감기로 접어드는 때 물러나는 것은 발을 너무 깊게 담근 상태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초창기에 과단하게 발을 빼야 한다. 시기가 늦으면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배신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遯尾 厲 勿用有攸往
미련을 남겨두면(遯尾) 위태로우니(厲) 시간이 지나가도록 기다리지 말라(勿用有攸往)
  많은 경우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기다리는 것은 좋지 못하다. 물러나야 할 때라면 미련을 두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과단하게 물러나야 한다.

 

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황소의 가죽처럼 굳세고 질기게 물러나야 하니(執之用黃牛之革)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물러나겠다는 말을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莫之勝說)
  미련을 남기지 말고 황소의 가죽처럼 단호하게 물러나야 한다.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여 혼란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맹자』의 ‘부유하고 귀한 것이 흔들 수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것이 바꾸게 할 수 없고 위협과 무력이 굽히게 할 수 없다’는 말처럼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물러나야 할 때라면 과단성 있게 물러나야 한다.

 

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물러남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係遯) 병통이 있고(有疾) 위태로울 수도 있다(厲) 대비하여 신첩을 길러야(畜臣妾) 길(吉)할 것이다
.
  물러나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어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물러나기가 어렵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다섯번째 괘 수(需)괘에서 말한 발을 빼기 쉬운 모래밭에 있는 것(需于沙)이 아닌 발을 빼기 힘든 진흙밭에 있는 것(需于泥)이다. 진흙밭에 거주해야 한다면, 만약을 대비하여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신첩의 신(臣)은 남자종 첩(妾)은 여자종을 의미한다.

 

好遯 君子吉 小人否
즐겁게 물러나는(好遯) 군자는 길하나(君子吉) 소인은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小人否)
  즐거운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는 이유는 밀려나는 것이 아니요,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요,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니 곧, 바른 길(道)을 따르는 것이기에 즐겁고 그 결과도 길(吉)할 것이다. 중용에 “군자가 중용을 행하는 것은 군자로서 때와 상황을 헤아려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인이라면 오직 ‘물러난다’는 사실만 아프게 직시하여 즐거울 수 없을 지 모른다.

 

嘉遯 貞吉
칭찬속에 물러나니(嘉遯) 끝까지 길하다(貞吉)
  물러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고 아름답게 여기니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물러나는 마음을 알아주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구나. 달아날 때 홀로 뒤쳐져 있다가 성문을 들어올 때 말을 채찍으로 때리며 뒤를 지킨 것이 아니라 말이 빨리 달리지 않았다고 하는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15장]라고 칭찬하셨다.

 

肥遯 无不利
물러나더라도 풍족하다면(肥遯)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풍족은 단지 물질적 풍족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니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던 은자(隱者)들처럼 탐심을 없애니 오히려 더 커진 마음의 풍족함이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지으신 ‘도산잡영(陶山雜詠)’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돌우물이 맛있고 시원하니 진실로 풍족하게 물러날 수 있는 장소를 베풀어 주셨도다(石井甘冽 允宣肥遯之所)’라는 표현에서 이 비둔(肥遯)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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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

고전을 읽을 때 극복하지 않으면 길을 헤메는 관문이 있다.
중(中)의 관념이 서지 않으면 혼돈으로 빠져든다.
중(中)에서의 직선은 가둠을 관통하는 있는 것을 말한다.
갇힌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통(通)하여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엇으로 그 가둠을 관통하고 있을까?

공자께서 "증삼아 내가 말하는 도는 하나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자 증삼은 "그렇습니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이 "뭔 말이야?"라고 묻자, 증삼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지극한 서(恕)야" 라고 하였다. [논어 제4편 이인 제15장]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을 동(同)하여 관통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중(中)은 가둠의 안과 밖을 마음으로 일관하여(恕) 관통하는 「진리」이다.

원효대사께서 마신 해골에 담긴 물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다.

사물은 변한 것이 없는데 (해골에 담겨있던 물은 똑 같은 물이었지만)
눈으로 보고나니 마음이 변하더라.

이 일화를 「일체유심(一切唯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대학』 역시 마음(心)을 강조한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대학 제7장 정심수신]


중(中)은 마음으로 통(通)하여야 알 수 있는 「진리」이므로
노엽고, 두렵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걱정스러우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공자의 말씀도, 석가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모두 머리에서 지워내어야 할 것이다.

 

용(庸)은 이러한 중(中)의 진리」에 조화롭게 맞추어 대응하는 「응답이다.
정이의 "바뀌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라는 설명은 오해를 일으키기 딱 좋다. 주희의 "일상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묶어 설명하려고 하니, 진순처럼 "오곡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은 만고의 일상이라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갈수록 이해하기만 어렵게 하였다.

 

위 속에 음식이 알맞게 차 있도록 유지시키는 것이 중용(中庸)은 아니다.
그러려면 그 중간을 맞추기 위해 하루종일 조금조금 먹고만 있어야 한다.
밥을 많이 먹고, 다시 많이 부족해지면 다시 과하게 채우는 것이 밥먹는 중용이다.
그래서 배가 부를 때를 만나고, 적당히 좋을 때를 만나고, 배가 고플 때를 만난다.
각 시기(時)에 알맞는 응답은 모두 다르다. 100년치 밥을 한꺼번에 먹고 한꺼번에 배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중용의 응답은 시공(時空)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즉, 용(庸)은 일반적 인식으로는 바뀌는 것으로 설명해야 오해가 덜하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지능도 모두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10대, 20대, 30대가 다르다.
이러한 다름을 분별(分別)하여 가장 적합하게 맞추어 조화롭게 응답하는 것이 중용이다.
병(病)을 기준으로 똑같은 약을 쓰는게 아니라,
각 사람의 특성을 기준으로 다른 처방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동양의학이었고,
역시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 제자들마다 그 다른 특성을 감안하여 다르게 가르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한 마디는 그 한마디 말과 글에만 갇혀서 이해하려면 오해가 생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무엇을 위해서 그러한 대화를 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증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대화는 상상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중(中)의 사유는 안과 밖을 통(通)하는 것이며,
중용(中庸)의 사유는 분별(分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어리석은 중생아 개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왜 모르느냐고 한다.
그렇지만 개와 사람이 교감하기 위한 육체사랑을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는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기도 하다는 중(中)이며,
진리에 반응하는 응답은 개와 사람이 다르다는 분별(庸-용)이다.

현상계가 만들어 내는 거짓에 갇혀있는 중생들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현상계가 만들어내는 것은 허상이라는 깨달음에 갇혀서,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무지(無知)도 생각을 가두고, 지(知)도 생각을 가둔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지(知)도 중용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까닭을 알겠구나. 지자(知者)는 과(過)하고 우자(愚者)는 부족하구나” [중용 제4장]


결국 유가의 진리는 세속과 초월의 한 쪽이 아니라 통(通)하는 것이기에,
속세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높고 원대한 이론으로 나아가 고원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로 돌아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것이 곧 도(道)이기도 하다.
현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도(道)이기는 하여도, 중용의 도리에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자기와 남은 별개의 분별(分別)된 개체이면서 또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에
개인(個人)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옷을 벗고 싶어도 아무곳에서나 나체로 있으면 안되며 예(禮)를 지켜야 한다.
물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중용에 따라 그 적합한 응답은 변한다.

그런데,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이 중용의 생기발랄함과 융통성이 없어져 버렸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말하였다 “큰 덕은 한계를 지켜야 하지만, 작은 덕은 들고 나는 것이다 [논어 제19편 미자 제11장]

송대 이후의 학자들이 이 장을 비난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작은 덕이 어찌 들고 날 수 있겠는가? 작은 덕이라고 해서 들쑥날쑥한다면, 곧 마음이 방종해져서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는 등등의 실랄한 비난을 받았다. 아마도 자하의 말이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 같다. 그러나 자하가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송대이후의 학자들도 고원함과 깨끗함을 추구할 수록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고원함은 사람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송대 이후의 학자들은 소인은 멸시하여 멀리하고, 선비라는 자들끼리만 어울리는 계급과 권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단발령이 일제의 강제라고 해서 선비들이 반발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의 명령이라고 해도 따를 수 없었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정절을 유린당한 여인처럼 실성하여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 목을 매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어찌 유학만 고여서 막히고 가두어 졌겠는가? 사찰과 교회도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과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가두고 막아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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