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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그 행위(현재)를 보고 [視其所以] 
동기(과거)를 살펴보고 [觀其所由] 
바램(미래)을 통찰해라 [察其所安] 
어찌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人焉廋哉]
어찌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人焉廋哉]

 

  인(仁)은 다양하게 정의하며 그 개념 논쟁도 많지만, 정서를 중시하는 측면에서 ‘참된 사랑’이라고 쉽게 정의하기도 한다. 그 뜻을 조금 더 풀어서 ‘남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헤아려 관계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본래 자신의 속마음도 정확히 몰라서, 왜 내가 이러는지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는데, 어찌 남의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말일까? 그것에 대한 답이 되는 장이기도 하다.

  ‘다름의 분별후 조화’를 핵심으로 하는 중용철학은 한계와 가능 역시 마찬가지로 분별한 후 조화를 도모한다. 사람은 날 수 없다(한계). 사람은 도구를 만들 수 있다(가능). 그래서 스스로는 날 수 없지만 비행기를 만들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불가능을 가능과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 인위(人爲)라는 측면인데, 이러한 관념은 무위(無爲)를 주장하는 노장사상의 후학들에게 집중공격을 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학에서 판단하는 사람이 사람의 속마음까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한계이다. 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짐작이다. 그래서 조화를 도모하여, 최대한 짐작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 장에서 말하는 ‘헤아림’이다. 최대한의 짐작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상대방의 과거부터 열심히 살펴주려는 노력이다.

  과거(동기)는 현재와 미래를 이끄는 힘이 있다. 담배를 처음 피우고 난 후, 나쁜일을 하고 난 후, 손찌검을 하고 난 후, 그 이후에 그 행위가 보다 수월하게 행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과거의 경험은 현재와 미래로 연결시키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좋지 못한 일 뿐 아니라 좋은 일도 그러하다. 그래서 처음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두번부터는 쉬워진다. 이 과거(동기)를 헤아린다는 것은, 그렇게 습관화되어 나와 경험이 다른 까닭에 나와 생각과 취향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미국인이기에 마늘냄새가 역겨울 수 있고, 먹기 싫어 하겠다는 짐작을 우선 하는 것은 내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알아서가 아니라, 그가 지내온 과거(동기)를 추측하여 나와 다를 수도 있겠다는 배려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권해야 하나? 대화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란 미국인일 수도 있고, 마늘을 경험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사를 확인해서 마늘을 먹고 싶다고 하면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있나? 권하는 여인이 미인이라 먹고 싶은 척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에 무게를 둔다. 이 세상이 모두 착한 사람만 살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유학의 사유이다. 다만 최선을 다하여 노력한다는 것이다. 논어 후반부 18편에 많이 나오는 공자에게 ‘불가능임을 알면서도 하려는 자’라는 은자들의 조롱을 제자들이 논어에 꺼리낌없이 실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유학은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려는 ‘실천행위’에 의의를 둔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공자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지동설을 알았던 것도 자동차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의 시대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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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내가 안회와 종일 얘기했는데 [吾與回言終日]
다른 의견이 없어 어리석다고 여겼다 [不違如愚]
그 이후에 사생활을 살펴보고 [退而省其私]
도리어 내가 깨우치게 되었으니 [亦足以發]
안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다 [回也不愚]

 

   안회에 대한 공자의 감탄은 여러차례 나온다. 본래 유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길러준다는 관계였다. 중용이 말하는 조화(和)로움의 사고이며, 논어의 첫 장부터 강조하고 있는 더부는 즐거움(樂)의 사고이다. 유학은 본래 단절이 없었고 ‘함께’를 지향했는데, 스승은 가르칠 것만 있는 사람이어야 마땅하고, 학생은 배울 것만 있어야 마땅하다는 권위적 관계로 어긋나 버렸다.

  공자는 전지전능함이 없었기에 신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모자란 것도 있고 나은 점도 있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앉아 걸식하는 걸인이라고 해도, 하는 일 없이 앉아 있기 경쟁을 해 보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유학은 묻는다. 사람이 아는 것이 있어 봐야 얼마나 알 것이며, 사람이 잘난 것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잘날 수 있겠는 지를 묻는다. 유학이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는 분별 후 조화’를 모색하는 사상이다. 우월함, 존귀함 그런 것은 없다. 내가 나은 것으로 보태주려 하고 내가 모자라는 것은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중용(中庸)의 조화로운 어울림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장은 공자께서 안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반성이다. 안회는 스승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있었는데, 공자는 안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회가 공자보다 더 뛰어난가? 안회도 또한 공자보다 나은 점이 있었고, 모자란 점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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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예의 작용은 조화로움이 중요하다 [禮之用 和為貴]
선왕의 도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先王之道斯為美]
작고 큰 것이 조화를 이뤄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小大由之 有所不行]
조화를 위한 조화만 알고 [知和而和]
예로써 조절할 줄 모른다면 [不以禮節之]
순조로울 수가 없다(참된 조화가 아니다) [亦不可行也]

 

   이 장이 해석이 분분한 이유는 ‘어떻게 해라’는 선명한 실천행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의 철학인 중용(中庸)을 설명하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禮)는 내면의 실질과 드러난 꾸밈의 조화이다. 마음이 없는 예는 허례이며, 솔직한 마음을 꾸밈없이 다 발산하는 것도 무례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中庸)의 균형선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곧 조화라고 하여 조화만을 추구하려는 꽉막힘도 문제이다.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힘을 사용해 막아야 하는 행위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형식적 예에 어긋나고 부자간의 조화가 깨어지더라도, 근본의 예[실질]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참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장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이고 늘 그러해야 한다는 고정된[죽은] 원칙은 없다는 중용(中庸)의 조화라는 관념이 정립되면 좀 더 선명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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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初九】虞 吉 有他 不燕

【九二】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六三】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六四】月幾望 馬匹 亡 无咎

【九五】有孚攣如 无咎

【上九】翰音 登于天 貞 凶

  이제 주역의 남은 마지막 4괘는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괘이다. 결국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면 중용(中庸)이다. 사서의 하나인 『중용』을 『소(小)주역』’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 철학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역은 시작하는 4괘에서 근본적인 것을 모두 말하였다. 자연스럽고 조화롭고 편안하고 그래서 아름답게 변화하여 마감하는 4가지 진리를 말하였다. 곧 때를 헤아리고(乾) 자리를 잘 잡고(坤) 함께하고(屯) 깨우치는(蒙)것을 말하였다. 첫4괘와 마지막4괘를 제외한 나머지는 첫4괘와 마지막4괘의 이치를 나누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역의 글 역시도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조화를 맞추고 있으니, 중용을 가르치고 중용을 보여줌으로써 끝내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곧은 믿음이(中孚) 돼지와 물고기에 이르니(豚魚) 길(吉)하다. 큰 내를 건너듯 과단성을 가지면 이롭고(利涉大川) 끝까지 이롭다(利貞).

  중부(中孚)는 미물인 돼지와 물고기 조차 의심할 수 없는 바른 믿음을 뜻하니 신급돈어(信及豚魚)의 줄임말이다. 신급돈어는 돼지나 물고기 등(等) 무심(無心)한 생물(生物)조차 믿어 의심(疑心)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올바른 믿음이라면 과단하게 나아가야 하고 끝까지 이로운 것이다.

 

虞 吉 有他 不燕

깊이 헤아리는 것(虞)이 길(吉)하나 다른 것이 생긴다면(有他) 편안하지 않다(不燕)

  공자께서는 계강자가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하였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이면 충분하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20장]고 말씀하셨다. 계강자가 지나치게 신중하고 생각이 깊었던 까닭인데, 지나치게 헤아리는 것 자체가 중용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주려 한 것이었다. 생각을 한번 더 한다고 늘 이로운 것은 아니다.

 

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어미학이 그늘에서 부르니(鶴鳴在陰) 그 새끼가 화답한다(其子和之) 나에게 좋은 잔이 있으니(我有好爵) 나와 너 함께 더불어 나누리라(吾與爾靡之).

  배움을 새를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익힐 습(習)이란 글자도 어린새가 어미새를 보고 날개짓을 하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어미학이 그늘에서 소리를 내어 그 새끼를 부르고 그 새끼가 화답하는 것처럼 중용의 바른 도리를 먼저 깨우친 자가 미숙한 이를 불러 더불어 잔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습 역시 조화로움을 꾀하는 중용이다.

 

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적을 얻으니(得敵) 두드려보고(成鼓) 멈춰서보고(或罷) 울어도보고(或泣) 노래도 해 본다(或歌).

  적(敵)이란 중용의 도에 대한 의문 즉, 의혹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주희는 대학의 원문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인데, 후대로 전해지면서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그 부분을 보완하여 채워넣었다. 천하의 이치는 깨달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니 그 궁극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 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가는 절차탁마(切磋琢磨)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月幾望 馬匹 亡 无咎

달이 거의 차니(月幾望) 마필이(馬匹) 사라져야(亡) 허물이 없다(无咎)

  달이 거의 찬 것은 학문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마필은 수레에 태워 나를 이끌어 주던 말들이니, 곧 스승을 뜻하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면 하산을 시킨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스승의 역할이 있고 스스로 깨쳐야 할 부분이 있다.

 

有孚攣如 无咎

신념으로(有孚) 붙잡아 매니(攣如) 허물이 없다(无咎).

  공자께서는 “안회는 그 마음을 다해 3개월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는데, 나머지는 하루이틀, 일이개월 그럴 뿐이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7장]라고 하셨다. 배워 알았다고 끝이 아니다. 신념으로 붙들어 매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미 깨우친 공자께서도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면 정신이 굳어진다.

 

翰音 登于天 貞 凶

날 수 없는 닭(翰音)이 하늘로 오르려 하면(登于天) 끝내(貞) 흉(凶)하다.

  한음(翰音)은 닭의 다른 이름이다. 날 수 없는 닭이 날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니 곧 제 수준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게 된다”[논어 제2편 위정 제15장]고 하셨다. 곧 한음(翰音)은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 자를 말함이니 곧 서울에 가 본 적 없으면서 서울에 가 본 사람을 이기려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도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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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過 棟 撓 利有攸往 亨

【初六】藉用白茅 无咎

【九二】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九三】棟橈 凶

【九四】棟隆 吉 有它 吝

【九五】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上六】過涉滅頂 凶 无咎

  대과(大過)는 심하게 지나간 것이니, 시기가 너무 늦었음을 말한다. 주역의 첫 가르침,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야 하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순리(乾)를 따르지 않았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시들고 메마른 버드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니 법이라고 한다. 대과(大過)괘의 효사는 시기를 놓친 남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기가 어긋나 있어도 기운이 조화를 이룰 수도 있는 법이니, 사람마다 기운이 일정하지 않고 일찍 열매를 맺을 수도 늦게 열매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도(道)가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완전한 법칙은 아니라는 말이다.

 

大過 棟撓 利有攸往 亨

혼기를 놓쳤으니(大過) 용마루가 굽을 것이지만(棟撓) 시간이 지나면 이로울 것이니(利有攸往) 발전해 나갈 것이다(亨)

  용마루가 굽은 이유는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을,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용마루로 비유한 것이다.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것이니 시간이 지나도 이로움이 없을 것이나,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늦은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게 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높았던 눈이 낮춰지고 분수를 알게 되어 과거에는 부족하다고 외면했던 짝이라도 충분하다 여겨지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치마만 두르면 되는 것이다.

 

藉用白茅 无咎

흰 띠로 자리를 짜서 사용하듯(藉用白茅) 순박한 마음이면 허물이 없다(无咎)

  자용백모(藉用白茅)는 제사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는 흰 돗자리를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마음 즉, 때 묻지 않은 맑고 경건한 마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도 약탈혼이 빈번하였다고 알려진다. 주역에서 혼인을 언급할 때 말(馬)을 등장시키는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나라는 문화가 성숙되고 도(道)과 예(禮)에 대한 관념이 자리잡아 힘을 숭상하는 관념이 약해지고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순간에 약탈혼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니, 순박한 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대과(大過) 하였다고 힘으로 취하려는 것을 경계한 의미일 것 같다.

 

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시든 버드나무에(枯楊)도 싹이 돋는 법이니(生稊) 나이든 지아비가(老夫) 어린부인을 맞으면(得其女妻)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나이든 홀아비는 양기가 쇠하고 어린 여자는 음기가 성장하고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기운이 음양조화에 어긋나여 궁합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시든 버드나무에는 새싹이 돋는다. 버드나무는 물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매우 강해서 아무리 메말라도 좀처럼 죽지 않기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 그래서 강한 성(性)을 상징하기도 하는 나무이다. 버드나무의 이런 성질 때문에, 창기(娼妓)를 두고 영업을 하던 술집을 버들 류(柳)자를 써서 화류(花柳)라고도 불렀다.

 

棟橈 凶

용마루가 굽으면(棟橈) 흉하다(凶).

  초육에서 말한 것과 같은 뜻이다.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 무게에 억눌려 있으면 흉(凶)하다는 말이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도 어렵고 시든 버드나무에 싹을 틔울 수도 없을 것이니, 늙음을 의식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棟隆 吉 有它 吝

단단하고 곧은 나무여야(棟隆) 길(吉)하지만 뱀처럼 힘이 없다면(有它) 어려워진다(吝)

  용마루가 굽은 것은 마음에 장애가 생긴 것을 말하지만, 뱀(它)은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뜻한다. 나무처럼 곧고 단단하지 못하고 뱀처럼 물렁거리고 휘어지는 성기라면 어려워진다. 그러나 흉(凶)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교감을 이루지 못하는 용마루가 휜 것이 흉(凶)하다고 하였으니, 신체가 따르지 못함보다 마음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 보다 큰 문제이다.

 

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시든 버드나무라도(枯楊) 꽃이 피는 법이니(生華) 나이든 부인이(老婦) 젊은 지아비를 얻어도(得其士夫) 허물이 없다(无咎) 그러나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无譽).

  버드나무는 강한 성(性)을 상징한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그래서 여인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허물은 없어도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니, 그것이 옛 시대의 관념인 듯 하다. 늙은 사내가 어린 처녀와 조화를 이루면 자랑하려고 하지만, 늙은 여인이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루면 음탕하다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적인 시각에서 보면 허물(咎)은 아니다.

 

過涉滅頂 凶 无咎

지나친 부부관계는 기력을 소진시켜(過涉滅頂) 보기에 흉(凶)하나 허물은 없다(无咎)

  지나치게 관계하여(過涉) 정점까지 이르러 끝을 본다면(滅頂) 흉측하지만 허물은 아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허물(咎)은 내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며, 길흉(吉凶)과 명예(譽)는 외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대과(大過)하여 조화가 맞지 않는 외양을 가진 한 쌍의 남녀가 부부관계를 과하게 가지면 외면적인 시각에서는 흉(凶)측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고 하건 당사자들에게는 허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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