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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1. 13:32

고양생화(枯楊生華)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3. 1. 13:32

  고양생화(枯楊生華)는 『주역』대과(大過)괘의 5번째 효사에 나옵니다. 직역을 하면 ‘마른 버드나무에 꽃이 핀다’는 말인데, 보편적으로 ‘나이많은 여자가 젊은 남편을 얻는 것’을 빗대어 인용하곤 합니다.

이와 반대로 고양생제(枯楊生稊)는 ‘늙은 홀아비가 젊은 여인을 아내로 맞는 것’을 빗대어 인용합니다. 역시 『주역』대과(大過)괘의 2번째에 나오는 효사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인용되는 까닭은 효사의 내용이 그렇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것은 대과(大過)괘를 참고해 보시길 바라겠습니다.

 

종종 강한 성(性)을 버드나무에 비유하곤 하였습니다. 옛날에 기생을 두고 영업을 하던 것을 버들 류(柳)자를 써서 화류(花柳)라고 하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버드나무는 물을 흡수하는 성질이 강하여, 물가 어디서나 잘 자라며 생명력이 아주 강한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역은 고전에서 거의 만날 수 없는 성(性)에 대해 굉장히 자유로운 관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성행위를 묘사하는 함괘, 간괘를 비롯, 구괘, 대과괘등등이 그렇습니다.

「상전」등의 십익이 후대에 만들어 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는 것이 이런 부분이 나올 경우마다 고상한 척 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상전에서는 이 부분을 해설하기를 ‘늙은 부인이 젊은 남편을 얻었으니 어찌 오래 가겠는가[何可久也]? 또한 수치스런 일이다[亦可醜也]’라고 해설합니다. 원시유학에서는 정(情)에 비중을 두었는데, 송대를 지나면서 고루해지고 고상해졌던 까닭에, 십익은 공자의 저작이 아니라고 의심을 받았으며, 백서발굴 이후에는 십익을 공자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보편화된 인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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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자 하는 뜻은 풀이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살고자 하는 뜻은 물고기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모두 하늘이 준 귀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고기를 잡으셨습니다.

공자께서 낚시는 하셨으나 그물로 잡지는 않으셨다. 새를 잡았으나 둥지의 잠자는 새를 쏘지는 않으셨다. [논어 제7편 술이 제27장]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토끼를 보면 연민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토끼보다 나쁜 생명일까요?
호랑이는 제 성(性)을 따르는 것 뿐입니다.

 

성(性)을 따른다는 것은,
하늘이 준 그대로의 자연(自然)스러움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性)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는데 있어서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중용(中庸)'을 이탈하게 합니다.


고상함과 고원함을 추구하여,
인간을 채식동물로 만들려고 하고,
야성을 극도로 추구하여
다른 생명들의 씨를 말려버리려고도 합니다.

 

욕구도 성(性)입니다.
욕구를 아예 없애는 것은 성(性)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중용의 사유는 모자람도 경계하고, 지나침도 경계합니다.

욕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거나 지나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유학은 차별적 사랑도 긍정합니다.
하늘이 준 감정(情)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어미가 제 새끼를 우선 돌보는 것은 자연(自然)스러움입니다.
문제는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다른 새끼를 우선 돌보라고 하거나,
나를 위해 자기 새끼를 죽여도 괜찮다는,
그런, 치우침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합니다.

 

혹시 오해가 생길까 싶어 부연하고 가야겠습니다.

‘중용’의 정신은 보편적 타당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태가 틀렸다’는 일반론으로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 나를 떠나 있는 진리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지극히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의 성(性)을 밝혀

모자라지도 치우치지도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제반 사정을 감안하여 가장 마땅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출발점이며,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가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 기준을 세우는데 있어서 지극히 진실한 마음으로 접근하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남들의 이목, 선입견 등등의 모든 속박을 걷어내고,

나만이 알 수 있는 내면의 울림으로, 진실한 성(性)을 따르는 마음으로,

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로 접근하는 것이 중용입니다.

 

중용 제1장입니다.

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을 삼가고 두려워해야하니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드러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고 [莫見乎隱]

나타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다 [莫顯乎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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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

눈이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목이 색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귀는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물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이를 포태할 수 없습니다.
말은 완전하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귀도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머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
상상만은 한계가 없습니다.


상상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되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로
중용 제4장에서 앎과 모름을 지적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知者過之]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하구나 [愚者不及也]

그럼, 지나치지도 모자람도 없는 앎이란 무엇입니까?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재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것은 뭐가 무섭습니까?

‘앎의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사실은 더 무섭습니다.

재물은 있는 척 하더라도 금방 들통나지만,

아는 척 하는 것은 금방 들통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말 안다고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일으킵니다.

 

정치인 MB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정치인 KH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속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속에 있는 속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아는척을 합니다. 그리고 타방을 미워합니다.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말 잘하는 사람의 말재주에 걸려들어 냉정한 판단력을 잃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보다 특별하다'는 상상과 결부시킵니다.

나는 특별하고 너는 바보입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시비를 정확히 가립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의도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너는 한심하고 무지합니다.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미워하는 첫번째도 ‘짐작으로 다 안다는 사람’입니다.

자공아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추측하여 다 안다는 사람,

불손함을 용기라 하는 사람,

들추어내는 것만 정직이라 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논어 제17편 양화 제24장]

 

물 속에서 좀 더 오래 잠수할 수는 있어도
물 속에서 물고기처럼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성(性)이 가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성(性)에 의해
물 속에서 더 오래 잠수할 수 있는 차이가 있는 것인지,
나는 물속에서도 물고기처럼 살 수 있는 것인지
그 선을 분명하게 감지해 가는 것이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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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lleaf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성(性)을 따르는 것으로 관점을 돌려보겠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하늘이 준 것을 한번 따져 보겠습니다.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닌 게 무엇입니까?
생명, 사람, 이세상, 남자, 부모님 등은 쉽게 보입니다.
도(道)의 '떨어질 수 없음'을 접목하여 안목을 넓히면,
생명만 준 것이 아니라 죽음이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남성만 준 것이 아니라 여성도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나중에는 사람만 아니라 자연도, 다른 생명도, 다른 사람도 함께 붙여준 것으로 의미를 넓혀가야 합니다만,

지금은 제한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으로 들어와서 생각해 봅니다.
감정도 욕구도 지혜도 모두 하늘이 준 것입니다.

먹기 싫다고 먹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싫다고 자지 않을 수 없고,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정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입니다. 
 

가장 쉽게 정의하면 ‘태생적 한계’가 성(性)에 가깝습니다.

이쯤에서 장자의 설명을 빌려오겠습니다.
나를 엮고 있는 백개의 뼈마디와 아홉개의 구멍 오장육부들 중에서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게 있습니까?
하늘은 우위와 열위로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르게 만들어 역할을 달리하게 해 조화로움을 도모했습니다.

 

태생적 한계가 성(性)이지만,
태생적 한계가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입니다. 
눈과 귀가 똑같이 소중한데,
눈이 들을 수 없다고 속상해 하고,
귀가 볼 수 없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인간이 머리가 중용을 벗어나 만들어낸 것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욕구, 곧 도(道)와
성(性)을 따르지 않는 욕구, 도(道)가 아닌 욕구가 있습니다.

‘자기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인식이 그렇게 만듭니다.
나는 특별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다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예뻐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로또에 당첨될 수 있습니다.

… 
나는 특별해서 새처럼 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와 너는 다를 뿐입니다.
나은 것도 있고, 모자란 것도 있고, 그렇게 다를 뿐입니다.
결국 함께 있습니다.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성(性)을 따르는 것은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예시한 몇 가지가 아니라, 안목을 넓혀 더 많이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중용에서는 거짓과 위선을 걷어낸 순결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중용 제22장에서 말합니다.

오직 세상에서 가장 지극한 진실함(誠)으로서
그 성(性)을 다하게 할 수 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사람답게 살았다고 하는 평가에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다르게 부여받은 천명을 알고, 그 성(性)에 따라 내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고통스런 의무의 길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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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01

교과서『중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도(道)를 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도(道)라는 것은 어떠한 것임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도(道)를 행한다는 것」의 개념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야 할 것은 오직 그대로의 성(性)입니다.
스승도, 부모도, 남편도, 조상도 아닙니다.
책도, 좋은 말도, 인격자도, 지식도 아닙니다.
머리도 아니고, 육체도 아닙니다.
오직 성(性)입니다.

 

순자의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도(道)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의(義)를 따르지,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유가는 공자를 칭송하고 존경하지만, 공자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성(性)'을 따릅니다. 곧 도(道)를 행합니다.

 

오직 성(性)만을 따른다는 것은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에서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텅 비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치우침을 일으키는 것을 비워버리고
성(性)을 진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정반대에 있는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라는 유가의 일신(日新)이나,
날마다 벗어내라는 도가의 일손(日損)이나
가두고 있던 것을 떨쳐내는 유가의 유위(有爲)와
가두고 있던 것을 비워내는 도가의 무위(無爲)는
같은 말, 다른 표현입니다.

 

알아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는 것 모두를 말로 완벽하게 할 수 있습니까?

들어도 모든 것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렇게 말이라는 녀석과 귀라는 녀석은

또한, 눈이라는 녀석과 머리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로

제가 가진 성(性)에 따라 한계가 있습니다.

 

머리로만 만나려는 사람은
그대로의 성(性)도 머리만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다는 맹신에 갇힌 것일지 모릅니다.

 

똑똑한 자공이 말(言)에 갇혀가고 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으려 한다. (중략)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이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나
하늘은 아무 말이 없지 않느냐?" [논어 제17편 양화 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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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 亨利貞 取女 吉
【初六】咸其拇
【六二】咸其腓 凶 居 吉
【九三】咸其股 執其隨 往 吝
【九四】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九五】咸其脢 无悔
【上六】咸其輔頰舌

  “군자의 도는 부부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극함에 이르면 하늘과 땅에 밝게 드러난다”[중용 제12장]고 하였으니, 부부만큼 중요한 관계도 없을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인(仁)은 사람(人)이 둘(二)이라는 것이며, 공자께서 말씀하신 서(恕)는 마음(心)을 같게(如) 한다는 뜻이다. 나와 너가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곧 도(道)는 부부관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咸 亨利貞 取女 吉
관계(咸)는 성장기부터 시작해 생의 끝까지 이어지니(亨利貞) 관계를 갖는것이(取女)이 길(吉)하다.
  불교는 성관계를 혐오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교의 교리가 부부관계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수도승의 경우에 욕(慾)이 생겨 수행을 방해하므로 금하기도 하는데, 처자를 거느리고 수행하는 대처승도 있으며, 원효대사께서도 환속하셨다. 지나침은 모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용을 벗어난 치우침이다. 성도 과하거나 모자라는 것이 문제이지 부부관계를 하지 않아야 바른 것이 아니다. 한편, 괘사가 생의 끝까지 성관계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젊었을 때는 성관계가 대표적인 한 방법이겠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손을 한번 잡아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교감을 끊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咸其拇
엄지발가락을 애무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咸其拇).

  부부관계도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의 과정을 겪어서 시작과 끝이 있어야 길하다. 단번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교감하기 위한 준비와 과정이 필요하다. 중용에 "먼 곳을 가기 위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야 하며,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중용 제15장]고 하였으니, 엄지발가락부터 시작해야 한다.

 

咸其腓 凶 居 吉
그 종아리를 애무하고 있으니(咸其腓) 흉(凶)하다. 멈추는 것이(居) 길(吉)하다
.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종아리는 성감대가 아닌 까닭일 것이다. 보통은 자극에 예민하고 신경이 많이 모여있는 신체적 부분을 통해 교감을 시도하고 진도를 나아가야 한다. 멈춤의 도(道)를 뜻하는 간(艮)괘에서는 종아리에서 멈추는 것은 마음을 불괘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 그것은 전체적인 부부관계를 멈추는 것을 말하고, 여기서의 거(居)는 단순히 종아리의 애무를 멈추는 것을 말한다. 발가락을 애무함으로써 생긴 흥분 또한 사라질 것이니 쓸데없는 종아리의 애무는 멈추는 것이 길하다.

 

咸其股 執其隨 往 吝
그 허벅지를 애무하고 있으나(咸其股) 반응하는 대로 급하게 따라잡으려 하면(執其隨) 나아가더라도(往) 어렵다(吝).
  허벅지를 애무하는 것은 흥분이 절정에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마음의 속도와 몸의 속도가 같지는 않다. 고통없이 관계를 가질 수 있으려면, 윤활액이 충분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급하게 나아가는 것은 어렵다.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마침내 길해지며 후회가 없게 되니(貞吉悔亡) 끊임없이 왕래해도(憧憧往來) 몸이 생각을 따를 것이다(朋從爾思).

  마침내 길해지는 것은 몸도 준비가 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왕래하는 것은 반복운동을 말하며, 붕종이사(朋從爾思)는 직역하면 벗이 너의 생각을 따른다는 것이니, 몸이 생각을 따른다거나 상대와 잘 호흡을 맞춘다거나, 어떻게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없는 것 같다.

 

咸其脢 无悔
관계가 끝난 후 등살을 애무해야(咸其脢) 후회가 없다(无悔)
  관계가 끝났다고 바로 일어서는 것은 배려심이 없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신체와 마음이 동일하지 않은 이성(異性)이다. 남성은 오르가슴이 있은 후 일정 기간 흥분을 느끼게 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여성은 반복적으로도 다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남자처럼 즉시 긴장이 풀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배려가 필요하다. 욕정의 해소로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咸其輔頰舌
뺨과 혀를 애무함으로써(咸其輔頰舌) 마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뺨과 혀를 애무함으로써 부부관계의 순탄한 원형리정(元亨利貞)의 단계를 마쳐야 한다. 주나라 시대의 주역이 이렇게 부부관계의 도(道)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다. 성(性)은 단순한 욕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교감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얼굴을 부비며 가벼운 입맞춤으로 도탑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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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過 棟 撓 利有攸往 亨

【初六】藉用白茅 无咎

【九二】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九三】棟橈 凶

【九四】棟隆 吉 有它 吝

【九五】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上六】過涉滅頂 凶 无咎

  대과(大過)는 심하게 지나간 것이니, 시기가 너무 늦었음을 말한다. 주역의 첫 가르침,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야 하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순리(乾)를 따르지 않았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시들고 메마른 버드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니 법이라고 한다. 대과(大過)괘의 효사는 시기를 놓친 남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기가 어긋나 있어도 기운이 조화를 이룰 수도 있는 법이니, 사람마다 기운이 일정하지 않고 일찍 열매를 맺을 수도 늦게 열매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도(道)가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완전한 법칙은 아니라는 말이다.

 

大過 棟撓 利有攸往 亨

혼기를 놓쳤으니(大過) 용마루가 굽을 것이지만(棟撓) 시간이 지나면 이로울 것이니(利有攸往) 발전해 나갈 것이다(亨)

  용마루가 굽은 이유는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을,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용마루로 비유한 것이다.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것이니 시간이 지나도 이로움이 없을 것이나,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늦은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게 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높았던 눈이 낮춰지고 분수를 알게 되어 과거에는 부족하다고 외면했던 짝이라도 충분하다 여겨지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치마만 두르면 되는 것이다.

 

藉用白茅 无咎

흰 띠로 자리를 짜서 사용하듯(藉用白茅) 순박한 마음이면 허물이 없다(无咎)

  자용백모(藉用白茅)는 제사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는 흰 돗자리를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마음 즉, 때 묻지 않은 맑고 경건한 마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도 약탈혼이 빈번하였다고 알려진다. 주역에서 혼인을 언급할 때 말(馬)을 등장시키는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나라는 문화가 성숙되고 도(道)과 예(禮)에 대한 관념이 자리잡아 힘을 숭상하는 관념이 약해지고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순간에 약탈혼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니, 순박한 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대과(大過) 하였다고 힘으로 취하려는 것을 경계한 의미일 것 같다.

 

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시든 버드나무에(枯楊)도 싹이 돋는 법이니(生稊) 나이든 지아비가(老夫) 어린부인을 맞으면(得其女妻)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나이든 홀아비는 양기가 쇠하고 어린 여자는 음기가 성장하고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기운이 음양조화에 어긋나여 궁합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시든 버드나무에는 새싹이 돋는다. 버드나무는 물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매우 강해서 아무리 메말라도 좀처럼 죽지 않기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 그래서 강한 성(性)을 상징하기도 하는 나무이다. 버드나무의 이런 성질 때문에, 창기(娼妓)를 두고 영업을 하던 술집을 버들 류(柳)자를 써서 화류(花柳)라고도 불렀다.

 

棟橈 凶

용마루가 굽으면(棟橈) 흉하다(凶).

  초육에서 말한 것과 같은 뜻이다.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 무게에 억눌려 있으면 흉(凶)하다는 말이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도 어렵고 시든 버드나무에 싹을 틔울 수도 없을 것이니, 늙음을 의식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棟隆 吉 有它 吝

단단하고 곧은 나무여야(棟隆) 길(吉)하지만 뱀처럼 힘이 없다면(有它) 어려워진다(吝)

  용마루가 굽은 것은 마음에 장애가 생긴 것을 말하지만, 뱀(它)은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뜻한다. 나무처럼 곧고 단단하지 못하고 뱀처럼 물렁거리고 휘어지는 성기라면 어려워진다. 그러나 흉(凶)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교감을 이루지 못하는 용마루가 휜 것이 흉(凶)하다고 하였으니, 신체가 따르지 못함보다 마음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 보다 큰 문제이다.

 

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시든 버드나무라도(枯楊) 꽃이 피는 법이니(生華) 나이든 부인이(老婦) 젊은 지아비를 얻어도(得其士夫) 허물이 없다(无咎) 그러나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无譽).

  버드나무는 강한 성(性)을 상징한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그래서 여인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허물은 없어도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니, 그것이 옛 시대의 관념인 듯 하다. 늙은 사내가 어린 처녀와 조화를 이루면 자랑하려고 하지만, 늙은 여인이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루면 음탕하다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적인 시각에서 보면 허물(咎)은 아니다.

 

過涉滅頂 凶 无咎

지나친 부부관계는 기력을 소진시켜(過涉滅頂) 보기에 흉(凶)하나 허물은 없다(无咎)

  지나치게 관계하여(過涉) 정점까지 이르러 끝을 본다면(滅頂) 흉측하지만 허물은 아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허물(咎)은 내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며, 길흉(吉凶)과 명예(譽)는 외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대과(大過)하여 조화가 맞지 않는 외양을 가진 한 쌍의 남녀가 부부관계를 과하게 가지면 외면적인 시각에서는 흉(凶)측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고 하건 당사자들에게는 허물은 아닌 것이다.

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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