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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6. 21:19

석과불식(碩果不食)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6. 21:19

  『주역』의 많은 명언중에서 손꼽히는 명언이 아닐까 합니다. 왠만한 국어사전에도 다 소개되어 있을 정도니까요. 이 명언의 출처가 『주역』의 23번째 괘인 박(剝)괘의 마지막 효사에 있습니다.

석과(碩果)의 의미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① 큰 과실 ② 씨과실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① 큰 과실은 다 먹히지 않는다 ② 씨과실은 먹지 않아야 한다는 크게 두가지 의미로 해석하는 편입니다.

 

제가 가진 국어사전을 다 찾아보니,

큰 과실을 다 먹지 아니하고 남긴다는 뜻으로, 자기만의 욕심을 버리고 자손에게 복을 줌을 이르는 말

이라는 해석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주역 해설가들은 오히려 ‘씨 과실은 먹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합니다. 주역 박(剝)괘의 전체를 해석할 경우에 그렇게 해석해야 더 부드럽게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씨 과실을 ‘종자’라고 표현하면 더 쉽게 느껴질까요?  배가 고파도 종자까지 다 먹어버리면 종자가 싹을 틔워 번영을 이루는 내일의 희망이 사라집니다. ‘도박의 고수는 결코 종자돈을 걸지 않는다’는 말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이왕 버린 몸이라고, 갈데까지 가 보려는 것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누라까지 팔아먹는 노름쟁이는 조무래기 도박사이지 않을까요?

 

큰 과실은 다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로 인용할 경우는 ‘큰 과실을 갉아 먹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없애지는 못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뛰어난 인물일수록 모함을 많이 받기 마련입니다. 위대할수록 비난이 거세기 마련입니다. 이기고 싶은 인간의 탐욕때문이겠지요. 그래도 결코 그를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자’라는 인물의 사상은 약 2500년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를 폄하하기 위해 온갖 비난이 난무했고, 때로는 그 이름에 편승하여 위작도 많이 만들어 졌지만 결코 공자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석과(碩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그를 조롱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만, 저는 감히 장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백년이 흐르면 공자의 이름은 남아 있게 될지라도, 그를 조롱하며 세치혀를 놀렸던 사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지나간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종종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의미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씨과실까지 없애버리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늘은 의미없는 생명은 낳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과도 연결됩니다. 하늘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종자를 없애지는 않지만, 사람은 종자를 없앨 수 있습니다. 즉, 포기하는 것을 경고하는 가르침으로 연결됩니다. 하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국어사전의 해설을 보니,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어집니다. 물질만능주의의 오늘날에는 가진 재물을 다 쓰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 부모의 마지막 도리라는 말이 떠 오릅니다. 자손에게 재물을 남겨놓는 것은 자손들을 다투게 하고 미운 감정을 생기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시대가 어찌하여 그리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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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2010. 2. 20. 19:11

유학의 상호관계성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19:11

논어 첫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배워서 수시로 따라해보면 어찌 기쁨이 없겠는가? (알아주는 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도 찾아주는 벗 있으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생길리 없으니 또한 군자이지않겠는가?"

 

① 나의 기쁨

② 더불어 나누는 즐거움

③ 자존을 잃지 않는 나

 

인(仁)으로 대입해 보겠습니다. 인(仁)을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더불어 함께 즐거우면 좋지만, 설령 그렇지 못해도 나의 기쁨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의(義)로써 대입해 보겠습니다. 의로움을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알아주면 즐거움을 나누지만, 알아주지 못해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예(禮)로써 대입해 보겠습니다. 예를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호응해 주면 함께 즐겁지만, 알아주지 않는다고 고개를 더 숙이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효도, 공경, 남편의 도리, 아내의 도리, 자식의 도리모두모두 같은 구조로 대입하시면 될 것입니다.

 

자식의 도리는 스스로의 기쁨입니다. 신하의 도리도 스스로의 기쁨입니다. 장자의 비유가 부분적으는 참 적절한 것 같습니다.

 

신체의 백개의 뼈마디와 오장육부를 통틀어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열은 없습니다. 다만, 다를 뿐입니다. 다르기에 각자 다른 역할을 합니다.

위가 잘 움직이면 대장이 잘 이어받아 순조롭게 이어주지만, 위가 잘 소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대장은 맡은 역할에 따라 최선으로 움직입니다.

 

그림그리기가 더 어렵네요. ㅠ.ㅠ

회색사람, 검은색 사람, 노란색 사람 세 종류가 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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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初六】濡其尾 吝
【九二】曳其輪 貞吉
【六三】未濟 征 凶 利涉大川
【九四】貞吉 悔亡 震用伐鬼方 三年 有賞于大國
【六五】貞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上九】有孚于飲酒 无咎 濡其首 有孚失是

  미제(未濟)괘는 소과(小過)괘 중에서 소(小)를 의미하니 부족한 것이다. 앞의 기제(旣濟)괘는 이미 성취한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서 지나침(過)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래서 덜어내야 한다. 미제(未濟)괘는 반대로 부족한 것이니(小) 채워야 한다. 주역의 후4괘는 모두 중용(中庸)을 말하고 있다. 중용을 강조하며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부족한 자(未濟)는 나아가야 하나(亨) 작은 여우(小狐)가 거의 마른 강을 건너다(汔濟) 그 꼬리를 적시게 되면(濡其尾) 유리함이 없다(无攸利).

  여우는 물을 건널 때 꼬리를 치켜들고 젖지 않도록 한다고 한다. 만일 젖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깊다면 건너지 않고 되돌아 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영리한 여유가 말라서 물이 없는 강을 건너면서 어찌 그 꼬리를 적시게 되는가? 부족한 자가 얻으려고 급히 서둘러 나아가는 까닭이니 조심하고 신중하여야 한다. 조심성이 없으면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여우가 마른 강을 건너다 꼬리를 적시기도 한다.

 

濡其尾 吝
그 꼬리가 젖었으니(濡其尾) 궁색(吝)하다.
  기제(既濟)가 끄는 수레는 이미 성취한 가득찬 수레여서 그 꼬리를 적셔도 허물이 없지만, 미제(未濟)가 끄는 수레는 채운 것이 보잘 것 없는 수레인데 그 꼬리를 적셨으니 참으로 궁색하다. 기제는 이미 성취하였으니 가볍게 털 수 있어야 하고 미제는 성취하지 못했으니 무겁게 붙잡고 신중하고 조심하여야 한다. 가진자는 가진 것을 가벼이 여기고 부족한 자는 가진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이다.

 

曳其輪 貞吉
그 젖은 수레를 끌고가면(曳其輪) 끝이 길하다(貞吉).

  미제자(未濟者)가 그 꼬리까지 적셔진 수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고 가면 마침내 길하다 한다. 설상가상의 상황을 만났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곧 좋은 상황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려움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또한 중용(中庸)이니, 상황은 변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비가 오기도 하고 맑은 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未濟 征 凶 利涉大川
부족한 채로(未濟) 계속 그 상태로 나아감(征)은 흉(凶)하니 큰 내를 건너야 이롭다(利涉大川).

  꼬리까지 적신 수레를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끌고가는 것을 말함이니 그것은 흉하다. 다시 채워넣고 채워서 기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기회가 생긴다면 과감하게 부딪혀야 하니, 큰 내를 건너는 과단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꺾이면 하늘이 부족하다고 채워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중용』에 “잘 심어져 있는 것은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중용 제17장]고 하였으니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하늘조차 외면할 것이다.

 

貞吉 悔亡 震用伐鬼方 三年 有賞于大國
그래야 마침내 길하고(貞吉) 후회가 없어지리니(悔亡) 우뢰와 같은 기상으로 귀방을 정벌하는데 일조하면(震用伐鬼方) 3년이 걸릴 것이나(三年) 대국으로부터 상이 있을 것이다(有賞于大國)

  대국으로부터 상을 받음은 은나라 고종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이니, 곧 미제에서 기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3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디고 과단하게 나아가 수레를 채운 것이다. 미제에서 기제로의 전환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쉬운 일이 아니다. 과단성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내도 필요하다.

 

貞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마침내 길하여(貞吉) 후회가 없으리니(无悔) 군자로서 빛남(君子之光)이여!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有孚) 길(吉)하다.
  단순히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를 따르는 뜻을 갖고 기제를 향해 나아간 것이었으므로 군자로서 빛이 나고 길하게 된 것이다. 반란에 동참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얻는 것을 원하여 은행을 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게 기제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흉할 것이니, 기제를 이루는 길은 바른 길이어야 한다.

 

有孚于飲酒 无咎 濡其首 有孚失是
먹고 마심에 신념이 있으면(有孚于飲酒) 허물은 없으나(无咎) 그 머리를 적시면(濡其首) 신념이 없어지리라(有孚失是)
  기제에서 재물을 가진 은나라가 덕이 높은 주나라에 미치지 못하다고 한 것처럼 미제에서도 물질을 경계하여 주역을 마무리 한다. 먹고 마심에 뜻이 있다면 허물은 없으니 곧 바른 뜻을 갖고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물질적 부유함이 머리를 적셔 정신을 망치면 그 신념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먹고 마셔야 한다는 신념은 나도 그것이 좋지만 다른 사람도 그것이 좋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기제자가 되면 가난한 이에게 베풀려고 하는 것이 먹고 마시는 것에 신념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에 취하여 머리가 적셔지면 99석도 부족하여 100석을 채우려고 할 것이니 베풀기 위해서 모으려고 하였던 그 신념은 없어지게 된다. 더 나아가 베풀지 않는 부자만 미워 보이고, 자기 자신은 항상 부족하게 생각되니 베풀려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을 전하며 주역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공자 말씀하시길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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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歸妹 征 凶 无攸利
【初九】歸妹以娣 跛能履 征 吉
【九二】眇能視 利幽人之貞
【六三】歸妹以須 反歸以娣
【九四】歸妹愆期 遲歸有時
【六五】帝乙歸妹 其君之袂 不如其娣之袂良 月幾望吉
【上六】女 承筐无實 士 刲羊无血 无攸利

  귀매(歸妹)도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지만 앞의 점(漸)괘가 시집을 가는 여인의 입장인 것과는 달리 귀매(歸妹)는 시집을 보내는 입장이다. 매(妹)는 일반적으로는 누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여식을 의미한다. 매(妹)는 여자(女)와 작은 나뭇가지(未)가 합쳐진 문자인데, 남자 형제의 입장에서 보면 누이가 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여식이 되기 때문이다. 혹은, 고대의 결혼풍습이 자매를 함께 시집보냈기에 귀매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하여간 시집을 보내는 것은 본성적으로 눈물을 흐르게 만들지만, 그래야만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기도 하다.

 

歸妹 征 凶 无攸利
여식을 시집 보내야 하나(歸妹) 강제로 나아가면(征) 흉(凶)하고 유리함이 없다(无攸利).

  여식이 혼기가 차서 시집을 보내야 하지만 사랑으로 금슬이 좋은 기러기 한 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시집을 보내는 것이니 흉하고 유리함이 없는 것이다. 짝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역은 3번째 준(屯)괘에서 만남에 애쓰지 마라고 하였고, 5번째 수(需)괘에서 귀인은 찾아온다고 하였다. 제 인연이 있는 것이다.

 

歸妹以娣 跛能履 征 吉
시집을 보내면 여동생을 딸려 보내야 한다(歸妹以娣) 절름발이가 잘 걸을 수 있음이니(跛能履) 그렇게 나아가야(征) 길(吉)하다.

  당시의 귀족들은 딸을 시집 보내면서 흔히 그 여동생이나 몸종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나이 어린 질녀나 여동생이나 몸종과 함께 시집을 보냈다고 하는데 이를 잉첩(媵妾)이라고 하였다. 낯선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니 의지할 벗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순임금도 요임금으로부터 두 딸을 함께 얻었고 고대 중국사회에서는 잉첩이 흔한 일이였다. 아마도 정복시대에 남녀의 성비가 불균형을 이뤘던 까닭에 생겨났던 문화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眇能視 利幽人之貞
애꾸눈이 잘 보려는 욕심이면(眇能視) 끝까지 가두어두는 것이 이롭다(利幽人之貞).
  시집을 가려는 딸이 소위 '눈이 삔 것'이라서 말려야만 하는 결혼이다. 애꾸눈임에도 완벽하게 보고 있다고 과신을 하니 차라리 가두어두어야 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지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결혼도 있는 법이다. 고독해지고 적적해지는 것이 싫어 혼사를 막는 것이 아니다. 여식의 행복을 위해서 막는 것이니, 시집을 보내는 마음과 다르지 않는 마음이다.

 

歸妹以須 反歸以娣
시집 보내고 합방을 기다리게 하면(歸妹以須) 그 손아래가 될 것이다(反歸以娣).
  시집을 보내었는데 합방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딸려 보낸 여동생과 위치가 바뀌어 여동생의 손아래가 되어버릴 것이니 곧 하늘이 정해준 자매간의 지위가 인간의 맺음에 의하여 역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늘의 도를 거스르는 잘못은 합방을 기다리게 하였기 때문이다. 시집을 갔으면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

 

歸妹愆期 遲歸有時
혼기를 놓쳐 시집보내야 하니(歸妹愆期) 지체가 되었지만 그 때가 있으니(遲歸有時) 서둘지 마라.
  혼기를 놓쳤다고 조급하여 아무 곳에나 시집 보내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늘은 늦게 맺는 열매도 일찍 맺는 열매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조급하게 서둔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니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하늘의 뜻이고 사람의 힘으로 강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帝乙歸妹 其君之袂 不如其娣之袂良 月幾望 吉
제을이 딸아이를 시집보내니(帝乙歸妹) 그 딸의 소매가(其君之袂) 그 여동생의 소매만 같지 못하다면(不如其娣之袂良) 임신이 되어야(月幾望) 길(吉)하다.

  군(君)은 여기서는 왕의 부인을 칭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제을이 문왕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을 말한다. 소매는 미색을 상징한다. 제을이 딸아이를 시집 보내는데 여동생보다 행색이 초라했다. 월기망(月幾望)은 9번째소축(小畜)괘와 마찬가지로 임신을 상징한다. 여동생과 함께 가는 시집은 때로는 절름발이가 잘 걸을 수 있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손아래가 바뀌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女 承筐无實 士 刲羊无血 无攸利
여인(女)이 알맹이가 없는 바구니로 받들고(承筐无實) 총각(士)이 양을 찔렀으나 피가 없으니(刲羊无血) 유리할 것이 없다(无攸利)
  옛 중국의 귀족들은 혼인시 종묘에 제물을 바치는 예를 행하였는데, 여자는 과일이 든 대바구니를 바쳤고, 남자는 칼로 양을 찔러 그 피를 바쳤다. 모두 자식을 바라는 의식이었다. 알맹이가 없는 바구니는 난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여인을 상징하고 총각이 피를 내지 못함은 정자를 생산하지 못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결혼을 하였으나 자식을 볼 수 없는 그런 혼사를 말한다.

  요즘은 의술이 발달하여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그 비용이 엄청나게 든다. 더 낳기 싫어하는 부모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어 마음을 변하게 하려는 정책보다는, 정말 아이를 간절히 갖고 싶어하는데도 비용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들에게 도움을 주는건 어떨까? 재정이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든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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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坤 元亨利 牝馬之貞 君子 有攸往 先迷後得主 利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初六】履霜 堅冰至
【六二】直方大 不習 无不利
【六三】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六四】括囊 无咎 无譽
【六五】黃裳 元吉
【上六】龍戰于野 其血玄黃
【用六】利永貞

  곤(坤)괘는 자리를 말하며 한계를 말한다. 건(乾)괘의 시간을 대하는 사람은 그 시간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기다릴 때, 나아갈 때, 물러날 때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곤(坤)괘의 자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부자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선진국에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나고,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지금 시대에 태어나고 등등, 이미 선택되고 정해진 것도 있는 법이다. 남자로 살기 싫어서 여자로 살려고 하는 것은 주역의 시각에서 보면, 자리의 도를 거스르는 잘못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대표적인 인간의 한계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일 것이다. 그럼 이러한 유한성을 인간은 어찌 대해야 하는가? 한탄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은 곧 하늘이 나에게 맡긴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왜 그런 한계를 주었는지에 대한 자리의 도(道)을 헤아리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찾았을 때, 즉 제 자리에 앉았을 때 비로소 삶을 가치 있게 이끌 수 있을 것이다.

 

坤 元亨利 牝馬之貞 
제 자리(坤)라야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순한암말처럼 죽게(牝馬之貞)된다 
  시간(하늘)만이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씨는 변화의 순리에 따르지 못하고 싹이 트지도 못하고 죽어버린다. 장소(坤) 역시 생성, 성장, 성숙(元亨利)의 변화의 법칙과 관계하게 되지만, 순한 암말처럼 마감 하는 것(牝馬之貞)이 특징적이다. 암말을 뜻하는 빈마(牝馬)는 유순함을 상징한다. 소리를 내거나 과시하지 않는 유순한 성질 때문에 마차를 끄는 말은 어미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순한 암말처럼 죽는 것은, 이어지는 효사에서 용의 전쟁으로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천수(天壽)를 다하고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君子 有攸往 先迷後得主 利
군자(君子)로써 시간이 지나면(有攸往) 처음에는 미혹하였어도 후에 주인을 얻게 될 것이니(先迷後得主) 이롭다(利)
  주인을 얻는 것(得主)은 곧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는 것을 말함이니, 군자(君子)가 되어 시간이 흐르면(有攸往) 처음에는 미혹하였어도(先迷) 곧 자리(사명)을 깨닫게 될 것(後得主)라는 뜻이다.

  『순자』「대략」에 다음과 같은 자공과 공자의 문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자공은 ‘할 일이 많아 힘드니, 군주를 섬기는 것 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어버이를 섬기는 것 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처자를 부양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친구와 관계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논밭을 경작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차례로 공자께 여쭈었다. 공자께서는 쉬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한탄하며 "그렇다면 저는 조금도 쉴 수 없는 것입니까?"하고 공자께 하소연을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저 들을 보아라. 흰 듯, 찬 듯, 막힌 듯하지 않느냐? 저 곳이 네가 쉴 곳이다" 자공이 감탄하며 말했다. "위대하구나 죽음이여! 군자도 쉬고 소인도 쉴 수 있도록 해 주는구나!" 하늘이 시간을 주어 세상에 보낸 이유는 할 일을 시키려 보낸 것이다. 쉬도록 해 주려 하였다면 죽음의 공간 속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유유왕(有攸往)은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풀었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서남이면 벗을 얻을 것이요(利西南得朋) 동북이면 벗을 잃으니(東北喪朋) 편안한 마감이어야(安貞) 길(吉)하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으로 밝은 곳을 상징하니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반대로 서쪽은 해가 지는 어두운 곳이니 쉽게 갈 수 없는 힘든 곳이다. 남쪽은 따뜻한 곳으로 올바른 곳을 상징하며, 북쪽은 추운 곳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곳을 상징한다. 그래서 힘들어도 옳은 곳(西南)으로 움직이면 친구를 얻고(得朋), 쉽지만 바르지 못한 곳(東北)으로 움직이면 친구를 잃을 것(喪朋)이라고 하니, 힘들어도 옳은 곳을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친구는 자리를 찾아 사명을 다하고 편안하게 죽는 것, 순한 암말처럼 죽음(貞)에 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履霜 堅冰至
서리를 밟게 되어서야(履霜) 단단한 얼음에 도달할 것을 안다(堅冰至)
  늙음을 빗대어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흰 머리가 나고 흰 수염이 나는 까닭은 이제 마감을 할 얼음(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하늘의 신호이다. 얼음이 어는 겨울이 올 것임을 방관하고 살다가, 서리를 밟게 되어서야 비로소 생의 무상함에 안타까워 하는 것이 바쁜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노랫말처럼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가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좀 더 일찍 해 보면 좋지 않을까?

 

直方大 不習 无不利
대지(直方大)의 도는 의욕하지 않으니(不習)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직방대(直方大)는 광활한 대지의 덕성을 묘사하고 있다. 땅은 모든 것을 차별없이 포용한다. 대추씨가 들어오건 사과씨가 들어오건 차별하지 않고 양분을 주고 키워준다. 사람의 자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주어진 한계를 의욕(習)하여 바꾸려고 하지 않아야 하니, 남자가 여자됨을 의욕하지는 않아야 한다. 배우고 힘써 의욕해야 하는 것은 자리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지처럼 이롭게 해 주는 역할[사명]을 다 하는 것에 두어야 할 것이다.

  유학의 명분론에 대한 의미와도 연결되는데, 명분론(名分論)이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계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기에 조금 보충하고자 한다. <여기를 참조> 하시기 바란다.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한계를 아는 현자(含章可貞)는 왕의 일을 따르게 되면(或從王事) 완성없이(无成) 마치려 한다(有終)
  함장(含章)은 바름을 머금은 것이며 가정(可貞)은 정해진 한계를 수용하는 것이니, 곧 자리를 알고 사명을 아는 바른 현자를 말한다. 왕의 일이란 만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려 바른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완성이 없다는 것(无成)은 그 공로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마침이 있다(有終)는 뜻은 올바른 결과만을 얻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세종실록』에 충녕대군을 잘 단속하라는 원경왕후의 말에 충녕대군 부인이었던 소헌왕후가 주역의 이 효사를 인용하여 대답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곧 충녕대군이 애쓰는 일은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무성유종(无成有終)하기 위함이라는 뜻이었으니, 공로를 탐내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 바른 결과만을 원하다는 뜻이었다. 

 

括囊 无咎 无譽
돈주머니를 묶어놓는 것은(括囊) 허물은 아닐 것(无咎)이나 명예롭지도 않을 것이다(无譽)

  돈주머니를 묶는 것은 혹종왕사(或從王事)하지 않고 재능을 쓰지 않는 것을 뜻한다. 혹종왕사하여 유성(有成)하려고 하면 제 자리를 모르는 지나친 것이며, 혹종왕사조차 하지 않는 것은 모자라는 것이니, 모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자공이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상자에 잘 보관하겠는지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팔 것인지를 여쭈니 공자께서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도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논어 제9편 자한 제13장]고 하셨다. 쓰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주역에서 말하는 허물은 내(內)적인 시각이며 길흉(吉凶)과 명예(譽)는 외(外)적인 시각이라고 했었다<여기를 참조>. 돈 주머니를 풀지 않는 것은 안으로, 자기 내적으로 허물은 아니어도 외적으로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고 한다.

 

黃裳 元吉
황색치마(黃裳)가 근원적으로는 길하다(元吉)
  황색치마(黃裳)는 황제가 입는 치마를 말하는 것이니, 곧 현자가 왕의 일을 대신맡아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것 보다는 왕이 왕으로서의 일을 해야 근원적으로 길하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충녕대군이 혹종왕사(或從王事)하기보다 양녕대군이 왕사(王事)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길하다는 뜻이다. 양녕대군이 자리의 도리(坤)를 잊고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 충녕대군이 자리를 옮겨 조화를 맞추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양녕대군이 제 자리에 앉고 충녕대군도 제 자리에 있는 것이 근원적으로 길한 것이다.

 

龍戰于野 其血玄黃
용들이 들판에서 싸우면(龍戰于野) 그 피가 검고 누르게 된다(其血玄黃)
  검고 누른 것(玄黃)은 천자문에도 나오는 하늘과 땅(天地)이 검고 누른것(玄黃)이니 곧, 온 세상을 말한다. 들판에 있는 용 또한 건(乾)괘의 현룡처럼 제자리를 잡지 못한 용이니, 그들이 잘못된 자리에서 다투면 온 세상이 피로 물든다는 말이다. 제 자리[사명]를 모르는 용들이 세상을 혼란으로 이끄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장래희망, 꿈, 사명에 대한 생각을 접고, 오로지 돈을 많이 벌고 부러워하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물질만능주의가 심각한 듯 하다. 천지에는 풀도 있고 토끼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곰도 있어 셀수 없는 다른 생명체가 다른 역할을 하며 생태계의 조화를 이룬다. 사람도 모두 공평하고 소중한 생명이지만, 인간 세상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사람마다 맡은 역할은 다르다고 하였으니, 각기 다른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공자께서도 세상을 바른 도리로 세우고자 하였어도 천자의 지위를 얻고자 하지는 않으셨다.

 

利永貞
열매를 맺으려는 것(利)은 끝까지 계속(永貞)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가 맡은 사명을 알고 자기 자리를 찾아 역할분담을 하여 열매를 맺어야 세상이 조화롭게 된다. 열매를 맺으려는 것은 천성(天性)이라 끝까지 지속되는 것인데, 어긋난 자리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기에 세상의 조화가 파괴되어 피로 물들게 되는 것이다. 즉, 용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세상이 피로 물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자리를 잡고서 그 곳에서 열매를 맺으려 하는 천성 때문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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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 元亨利貞
【初九】潛龍勿用
【九二】見龍在田 利見大人
【九三】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九四】或躍在淵 无咎
【九五】飛龍在天 利見大人
【上九】亢龍有悔
【用九】見群龍无首 吉

  하늘 아래의 모든 생명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씨(元)로부터 시작해, 꽃을 피우고(亨), 열매를 맺고(利), 소멸하게(貞) 하였다. 모든 생물(生物)이 이 변화의 법칙을 순리대로 따를 수 있을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싹이 텄으나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있고, 꽃이 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논어 제9편 자한 제22장]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열매를 거둬야 할 때가 있다. 겨울에 씨를 뿌리면 소용이 없으니,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시간만 맞추면 순조로울까? 비옥하지 않은 모래밭에 씨를 뿌리면 역시 소용없다. 무슨 일이든 무슨 생명이든 마땅한 장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때가 맞고 자리가 맞으면 모든 것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가? 봄에(시간) 비옥한 땅에(장소) 씨를 뿌려도 가뭄이 들면 소용이 없다. 하늘이 보살펴야 한다. 동물은 자존능력을 갖출 때까지는 어미가 젖을 먹이고 지켜주어야 한다. 시간, 공간 , 보살핌(사랑), 그것으로 완전할까? 사고(事故)가 없어야 한다. 토끼 새끼가 호랑이의 먹이가 되고, 호랑이 새끼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럼 그러한 사고는 어찌하여 생길까? 『중용』의 "하늘은 만물을 살리심을 그 재질에 따라 두터이 하시니, 바르게 심어져 있으면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중용 제17장]는 가르침을 언급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바른 길을 가도록 애쓰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乾 元亨利貞
시간(乾) 아래의 인간은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貞) 된다
  시간은 영원불변하며 완전하다. 시간은 변치 않고 영원히 흐르지만, 그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 생물은 영원한 것이 없다. 영원한 하늘의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이치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순탄하게 그 변화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선 시간에 맞추어 씨를 뿌려야 한다. 원형리정(元亨利貞)은 주역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며, 해석여하에 따라 전체의 의미를 다르게 하는 부분이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潛龍勿用
잠용(潛龍)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마라(勿用)
  물에 잠겨있는 용(潛龍)은 아직 나아가야 할 때를 만나지 못한 용이다. 용(用)은 동(動)의 뜻으로 해석한다. 잠용은 나아갈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새기면 될 것이다. 즉,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 때를 말한다.

 

見龍在田 利見大人
나타난 용이(見龍) 밭에 있으니(見龍在田)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밭은 용이 있어야 할 제 자리가 아니다. 용은 하늘을 날아야 한다. 씨를 뿌릴 시간이 도래하였어도 모래에 뿌리면 소용이 없다.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대인(大人)은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말한다. 즉, 현룡은 도움을 받아야 할 때를 말하고 있다.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군자(君子)가 되어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乾乾) 어두움(夕)을 경계한다면(惕) 위태로울지라도(厲) 허물이 없다(无咎)
  때를 만나고(天), 바른 자리를 잡고(地), 사람을 도움을 얻은(人)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이 이루어졌다고 만사 순탄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였다. 힘써 배워야 할 때를 말한다. 한편, 주역에서 말하는 군자(君子)는 어떠한 사람일가?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或躍在淵 无咎
연못에서 과단하게 비상해야(或躍在淵) 허물이 없다(无咎) 
  혹(或)을 문언전의 해석대로 ‘의심하다’는 의미의 혹(惑)으로 해석하면, 만반의 준비가 완료 되었더라도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한편, 혹(或)은 ‘갑작스럽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과단성있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지금은 나아가야 할 때다. 신중해야 하는가, 과단해야 하는가? 여기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자기로부터 찾아야 할 해답일 것이다. 과단성이 부족한 나는 후자의 의미로 새기며 읽는다.

  

飛龍在天 利見大人
하늘을 날고 있으니(飛龍在天)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거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전성기이다. 열매를 맺은 시기(利)이다. 그렇지만 도와준 대인(大人)을 만나야 이롭다고 한다. 전성기가 도래하였으니 그 복을 내가 누리는 것에만 써야 할까? 사람은 하늘(시간)과 땅(자리)에게 성취한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는 없지만,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는 내가 이룬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 있다. 은혜를 잊지 말라는 말이다. 재아가 3년상을 1년상으로 바꾸겠다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식으로 태어나 최소한 3년은 되어야 보살핌이 없어도 살 수 있게 된다. 재아도 부모에게 최소한 3년의 보살핌은 받지 않았더냐?"[논어 제17편 양화 제21장]. 이미 갖춰지면 고마움을 쉬이 잊어버리기도 한다. 비룡은 베풀어야 할 때를 말한다. 

 

亢龍有悔 
오를려고만 하는 용(亢龍)은 후회가 있다(有悔)
 
  문언전은 항(亢)을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나는 것을 알 지 못하며, 존재만 알고 없어질 것을 모르고, 얻는 것만 알고 내 놓을 줄을 모른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며,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러날 때가 되었다면 놓아야 한다. 때가 되면 부모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부모의 역할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면, 자식은 독립하지 못하고 마마보이가 되어버린다. 사람은 본시 영원을 갈망한다. 영원한 삶을 꿈꾸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영원한 안락을 꿈꾸곤 한다. 그렇지만,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은 흐른다」는 하늘의 법칙 밖에 없다. 그 하늘아래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법칙에 따라서.변한다. 항룡은 물러나야 할 때다.

 

見群龍无首 吉
용의 무리에(見群龍) 우두머리가 없으니(无首) 길(吉)하다
  세상에는 잠룡(潛龍)만 있지도 않고, 현룡(見龍)만 있지도 않고, 비룡(飛龍)만 있지도 않고, 항룡(亢龍)만 있지도 않다. 모두 함께 더불어 세상을 이룬다. 그 차이는 때와 때의 선택에 따라 다른 모습에 불과할 뿐, 모두가 같은 용이다. 우주의 시간에서 볼 때는 불꽃처럼 사라지는 찰나의 시간만 가진 별 다를 것 없는 생물이다. 그러니 나 잘났다고 머리를 내밀지 마라는 뜻이다.

  공자께서 소인을 하찮게 여기라고 소인과 군자를 구별한 것은 아니었다. “군자는 의로움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로움을 생각한다”고 하시고는 그러니 "소인을 우선 이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소인을 멸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자께서는 「사랑」을 말한 것이었지 「미움」을 말한 것이 아니셨다. 번지가 인(仁)을 여쭈자 공자 말씀하시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지(知)에 대해 여쭈자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知人)"라고 하셨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2장]

 

oon

  첫괘, 건(乾)괘의 효사에서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용어가 제법 있다. 길(吉)한 것과 흉(凶)한 것, 이로운 것(利), 허물이 없는 것(无咎), 후회가 있는 것(有悔),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厲) 등등, 구분히 모호한 한자어가 등장한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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