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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군자는 널리 어울려 편애하지 않고 [君子周而不比]
소인은 편애하여 널리 어울리지 못한다 [小人比而不周] 

   본래 유학의 시각에서는 군자와 소인은 우월의 관계는 아니다. 군자와 소인은 서로 잘난 점도 있고 못난 점도 있다. 유가의 중용(中庸)철학은 좋고 나쁘다는 우열의 관계로 떼어놓는 사상이 아니라 ‘다르다는 분별후 조화’를 도모한다. 서로가 조금 낫고 조금 못난 점이 있으며, 때에 따라 가진 특성이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두루 어울릴 수 있는 것’도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중용(中庸)의 사상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두루 어울릴려고 고집하는 것도 ‘좋은사람 컴플렉스’에 걸리는 일이다. 그래서 공자는 ‘가는 길이 다르면 함께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했다.

  반면 편애하는 것도 나쁘다고만 보지 않는다. 어머니가 자식을 우선 챙기는 것은 성(性)의 발현으로 당연하다고 본다. 자기-가족-사회로 확장되는 유가철학은 편애도 무조건 나쁜것으로 보지 않기에, 묵가의 후학들로부터 차별적 사랑이라며 집중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문제는 편애가 아니라 편애가 지나쳐 갈라서고자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유가의 사고이다. 그래서 나와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즐겁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르고 다른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미워하고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로 나아간다. 옛 시대에는 사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나 말과 문자도 하나의 표현방법에 불과할 것이다. 그림과 사진과 영화와 음악은 어찌 철학을 표현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소재를 열심히 관찰하여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미술가의 마음, 곡식의 특성을 열심히 헤아리는 농부의 마음도 역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린다’는 인(仁)의 마음으로 통해 갈 것이다. 

  물론, 공자의 제자들이 군자(정치인, 공무원, 지성인)가 되기를 원하던 까닭에 본래 이 장의 무게감은 군자에게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널리 어울리려 하면서 그 지나침도 경계하지 않으면 소인이 된다고 하는 뜻으로 해석하면 충분하다. 소인을 멸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자극하여 분발하도록 만들기 위해 선택한, 제자들을 헤아리는 학습법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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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군자를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子貢問君子 子曰:]
- 말에 앞서 행하려 하고, 행하려는 바를 좇아서 말해야 한다 [先行其言而後從之] 

 

   자공의 (실천보다) 말을 잘 하는 단점을 일깨워 준 것이라고 한다. 논어는 제자의 특성을 헤아린 맞춤식 답변이 대부분이다. 자공은 말 잘하고, 영민하며, 명랑함이 잘 드러나는 제자였다. 

  유학은 ‘실천행위’에 의의를 두는 학문이다. 그래서 ‘삶이 무엇이냐, 나는 누구인가’의 존재의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보편원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하는 자기의 길을 구하기 위해 나아간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도 말만 번지르한 사람을 미워하고 무시하는데 응용하면 안되며, 스스로에게 요구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유학의 제1조를 자기를 닦는다는 수신(修身)이라고도 했기에.

  유학이 중시하는 행위는 완성되고 갖추어진 행위는 아니다. 본래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는다. 운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의 완성이 있을까? 배움을 쉬면 안된다고 하는 이유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유학에서 의미하는 행위는 ‘완성을 향해 의욕하고 노력하며 나아가는 행위’이다. 그래서 이 장은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는 하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을 말하여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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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군자는 배부르게 먹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君子食無求飽]
편안하게 거주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居無求安]
일을 부지런히 하고 말을 신중하게 하고 [敏於事而慎於言]
도를 향하여 바르게 행한다면 [就有道而正焉]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可謂好學也已]

 

   이 장도 스스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유가(儒家)에서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호학(好學)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제1장에서부터 강조하였듯이, 아기새가 어미새를 따라서 날개짓을 하는 그 행위에 의의가 있음이니,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다. 

  한편, 군자라고 해서 맛있게 먹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요, 편안히 잠자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지(욕심내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배부름과 편안한 주거를 추구한다면 ‘소인’이라는 하찮은 사람이 된다는 것일까? 그런 뜻도 아니다. 군자는 소인에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위해 봉사’해야하는 다른 사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도 배불리 먹고 편안한 주거를 추구한다면 제 본분을 망각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군자(정치를 하려는 자)가 물욕에 빠지면 큰 도적이 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무겁게 새기도록 경계시킨 것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군자는 불쌍한 사람처럼 보인다. 부지런히 일해야 하고, 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해야 하며, 배불리 먹고자 해서도 안되고, 편안히 거주하고자 해서도 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달픈 삶이 아니라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행복해지는 것에 공자학의 의의가 있다. 

  공자가 쇠뇌시킨 걸까? 종교일까? 도(道)의 안경을 쓰고 보지 않는다면 당장 이해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오지로 가서 열악한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는 의사들의 삶은, 보편적 시각에서는 희생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진심으로 행하는 그 얼굴이 불행한 표정인지를 관찰해보면 뭔가 이상스럽기는 할 것이다. 짐작을 통해 ‘그 길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져봄직 하지 않을까? 
  
  도(道)는 ‘길’로 잘 비유한다. 선명한 길은 사람이 많이 다녀서 잘 드러나는 것 뿐이며, 정해진 도(道)라는 것은 없다. 자기가 ‘이 길이다’고 인식하며 걸어가는 그대로의 삶이 곧 도(道)다. 남들처럼 사는 것도, 특이하게 사는 것도 각자 나름의 길이다. 도를 바르게 한다는 것[道而正]은 가고자 하는 길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뜻이다. 그 길로 가라고 남에게 요구하려는 것도, 그 길로 가지말라고 남에게 요구하려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오직 인간만이 나와 똑같게 만들고 싶어하고, 나의 우상을 똑같이 숭배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다.  하늘은 비슷하게 만들고서 멈춘다. 결코 똑같은 것을 만들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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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 [子曰]:
배우고 때때로 익혀보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먼 곳에서라도 찾아주는 벗 생기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有朋自逺方來 不亦樂乎]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없을지니 어찌 군자이지 않겠는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유가(儒家)에서의 배움[學]은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것과는 다르다. 5개국어에 능통하게 되는 것 같은 기술의 배움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도리를 배우는 것을 말한다. 전문기술의 공부로 실력있는 의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의사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 유가(儒家)의 생각이다.

 

  때때로 익힌다[時習]는 것도 유가(儒家)에서 중요시 한다. ‘베푸는 것이 좋다’는 것을 머리로만 끄덕이며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유학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는 사유가 깔려있다. 힘든사람을 도와줌으로써 느끼는 희열을 직접 맛보아야 하는 것이다. 행할 수 있는 때가 왔을 때, 그것을 행하여 봄으로써 내 것이 되게 하는 것! 익힐 습(習)자는 어미새를 따라해보는 아기새의 날개짓이다. 유학은 그래서 ‘삶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공부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면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공부이다.

 

  기쁨[說]은 스스로부터 생겨나는 ‘성장’의 기쁨이다. 어미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아기새의 감탄이 아니라, 엄마처럼 나도 날게 되었을 때 생겨나는 ‘성장’의 기쁨이다. 비유하면 키가 더 커져있는 나를 만난 것, ‘내가 달라진 나를 만나는 기쁨’이다. 누구 때문에 기쁜것도 아니고, 누가 보아주어 기쁜 것도 아닌 내면의 울림을 말한다.

 
  ’정자’ 의 말처럼, 논어를 읽었는데 논어를 읽기 전과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는 논어를 읽지 않은 사람이다. 감탄하는데서 끝나는 아기새와 마찬가지다. 날개짓을 하며 날아봄으로써 진정한 기쁨의 희열을 맛보라!

 

  멀리서라도 찾아주는 벗[有朋自逺方來]은 나의 성장을 알아주어 먼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오는 사람이다. 내가 알리고 광고하여 끌고오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찾아오라’고 연통을 보내오는 이도 아니다. 먼 길을 찾아오는 고생이 나를 만나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사람이다. 진정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니 친구이며, 먼 길을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니 또한 친구이다. 편할려고 하는 이는 조개가 함께 놓여있는 붕(朋)의 관계일 수 없다.

 

  즐거움[樂]은 나의 기쁨[說]과 너의 기쁨[說]이 함께하며 더 커지는 ‘나눔의 기쁨’이다. 빵 하나를 둘이 나누어 먹는 것이 빵 하나를 내가 다 먹는 것보다 더 좋아지는 감정이 즐거움(樂)이다. 이는 사람(人)이 둘(二)이라는 인(仁)의 관념과도 연결된다. 함께 밥을 먹는 것[즐거움]이 불편하다 착각하지만, 혼자 자유롭게 밥먹는 것[기쁨]과 택일하라면, 함께 밥을 먹는 것을 택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보다 즐거움을 택하려는 본성이 보이면, 내 기쁨을 더 키우기 위해 즐거움을 버리는 어리석은 일은 못하지 않을까?

 

  알아주지 않더라도 원망이 없음[人不知而不慍]은 나의 존엄을 잃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따라 내 마음이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나의 존엄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일은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다. 『논어』를 왜 배우는가? ‘공자’를 알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공자를 알 수는 없다. ‘바른 도리’를 알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바른 도리’는 왜 배우는가? ‘더 사람답게 사는 나를 만나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배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어찌 원망이 생길 수 있을까?

 

  군자[君子]는 곧 유가(儒家)가 목표로 하는 이상적 사람이다. 그는 ‘기쁨’과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다. ‘기쁨’을 알기에 자기에게 요구하며 ‘즐거움’을 알기에 소인을 멸시하지 않는다. 나보다 「못한」 소인에게 자랑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소인과 조화를 맞추어 즐거움을 누릴려는 사람이다. 조화를 도모하여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다. 앞으로 논어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사람이니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논어』의 첫 장을 읽을 때 세가지 상상을 하곤 한다. 날개짓하는 아기새가 되어보는 상상, 우정을 나누는 즐거움에 대한 상상, 휘둘리지 않는 유유한 나를 그려보는 상상.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논어』의 매력이기도 하다.
 

  모든 고전이 그러하지만, 사람에 집중하면 우상[偶像]을 만들고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배워야 할 것은 「공자」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이며, 『논어』는 그것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비유하면 논어는 자전거이다. 자전거로 얻어려는 것은 「건강」인데, 자전거보다 줄넘기가 좋니 나쁘니, 자전거를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런 것에 열심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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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5. 14:21

군자표변(君子豹變)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3. 5. 14:21

  『주역』의 앞 뒤로 연결되어 있는 대인호변(大人虎變)과 소인혁면(小人革面)과 함께 비교하면서 언급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같은 말임에도 그 의미를 180도 다르게 해석하곤 하는 대표적인 명언인데, 직역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군자가 표범처럼 변한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표범으로 변하는 것을 좋은 의미로 해석합니다. 상전의 ‘문채가 아름답다’는 해석을 수용한 까닭인데, 그래서 ‘군자는 표범처럼 바뀔 줄 아는 사람이다’는 의미로 인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표범이 가을에 털갈이를 하여 그 무늬를 드러내는 것처럼, 또한 움직임이 호랑이보다 신속한 것처럼, ‘신속하고 뚜렷하게 변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인용합니다.

 

종종 그 반대의 의미로 변신을 비난하기 위해서도 인용합니다. ‘지조없이 표범처럼 변한다’는 약삭빠른 변화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는 그래서 결코 호랑이처럼 무겁게 움직일 줄 아는 대인(大人)일 수 없다는 비교가 동반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변하는 것이 당연한데 변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것은 꽉 막혀 융통성이 없는 것입니다. 고여서 썩어가는 물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변하는 것은 배신입니다. 나뭇잎처럼 바람에 휩쓸려가는 가벼운 존재입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고자 하는 힘(보수)과 변해야 하는 것을 변하도록 하려는 힘(진보)은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해내지 못하는 얕은 식견이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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夬 揚于王庭 孚號 有厲 告自邑 不利即戎 利有攸往

【初九】壯于前趾 往 不勝 爲咎

【九二】惕號 莫夜有戎 勿恤

【九三】壯于頄 有凶 君子夬夬獨行 遇雨若濡 有慍 无咎

【九四】臀无膚 其行次且 牽羊 悔亡 聞言不信

【九五】莧陸夬夬 中行 无咎

【上六】无號 終有凶

  쾌(夬)괘는 악(惡)에 공정함(正)으로 맞서는 것을 말하며 의로움을 추구하는 결단이다. 공자께 은혜로 원수를 대하면 어떠한지 여쭈니, 공자께서는 “그러면 은인은 어떻게 대할 것인가? 공정하게 원수를 대하고 은덕으로 은인을 대해야 한다” [논어 제14편 헌문 제34장]고 하셨다. 공자께서는 동해보복(동일한 해로움으로 복수)으로 원수를 대하는 것 즉, 원수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바름(正)으로 대해야 한다고 하셨다. 바름 곧, 의(義)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쾌(夬)이다.

 

夬 揚于王庭 孚號 有厲 告自邑 不利即戎 利有攸往

결단(夬)은 왕정에 알리는 것(揚于王庭)이며 신념을 부르짖는 것(孚號)이니 위태로움은 있겠지만(有厲) 고을에 숨어 외치면(告自邑) 적이 되어 맞서는 것이니 이로울 것이 없다(不利即戎) 시간이 지나가면 이롭다(利有攸往)

  악(惡)을 보고 방관하는 것은 악(惡)을 부흥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 마땅히 의롭게 나서야 한다. 비겁하게 숨어서 외치면 그것은 충언이 아니라 대항하는 것이 되니 결실이 없다. 위태롭더라도 왕정에 올라 외쳐야 한다. 시간이 지나가면 이로우리니 결국은 정의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壯于前趾 往 不勝 爲咎

크고 강한 기운이 발 앞에 모여있어(壯于前趾) 그렇게 나아가면(往) 이길 수 없고(不勝) 허물만 남는다(爲咎)

  행동하기 위해 기운이 발에 모여있으니 혈기만 가지고 서두는 것이다. 용맹이 지나쳐 과격한 것을 말하니, 의로움을 펼치는 것이 무모함이 되지 않으려면 냉철해야 하고 냉정해야 한다.

 

惕號 莫夜有戎 勿恤

두려워서 호소하면(惕號) 밤을 틈타 급습을 할 것이니(莫夜有戎) 두려워하지 말라(勿恤)

  지나친 용맹과 반대로 지나치게 두려워서 부르짖는 것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 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도적이 들었는데 두려워 울부짖으면 재물만 잃고 말 것을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생기는 법이다. 발 앞에 모여있는 과격한 용기도 모자라는 용기도 악(惡)을 바로잡을 수 없다.

 

壯于頄 有凶 君子夬夬獨行 遇雨若濡 有慍 无咎

큰 기운이 광대뼈에 있다면(壯于頄) 흉함이 있지만(有凶) 군자라면 결연히 홀로 가다가(君子夬夬獨行) 비를 만나게 되어도(遇雨若濡) 온기를 뺏기지는 않을 것이니(有慍) 허물이 없다(无咎)

  큰 기운이 광대뼈에 있는 것은 안색을 숨길 수 없어 의욕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견제를 받아 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군자라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허물이 없을 것이다. 군자는 의로움을 따르는 자이니, 오히려 드러난 의욕을 보고 바른 사람들이 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드러난다고 해치려는 자만 모이는 것이 아니기에 온기를 완전히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臀无膚 其行次且 牽羊 悔亡 聞言不信

엉덩이에 살이 없으니(臀无膚)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其行次且) 백성들을 이끌면(牽羊) 후회는 없겠지만(悔亡) 말은 들어주더라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聞言不信)

  분수에 맞지 않는 지위에 앉아있으니 자리가 편하지 않아 엉덩이에 살이 없게 된 것이다. 백성들을 이끌 지위에 위치하고는 있지만 그 지위에 걸맞는 능력은 없는 사람이다. 내적으로 후회는 없을지라도 신임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고 한다.

 

莧陸夬夬 中行 无咎

뭍에서 뛰어 노는 산양이 큰 결단을 내릴 때는(莧陸夬夬) 중용의 길을 가야(中行) 허물이 없다(无咎)

  뭍에서 뛰어 노는 산양은 민초들을 뜻한다. 위에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중용의 길을 가면 혁명이 되고, 중용을 벗어나면 반란이 될 것이다.

 

无號 終有凶

부르짖지 않으면(无號) 끝내 흉함이 있다(終有凶)

  의로운 줄 알면서 의로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는 “안으로 살펴서 부끄러움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논어 제12편 안연 제4장]라고 하셨다. 생사(生死)는 천명(天命)이니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의로운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나약한 마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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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 盥而不薦 有孚顒若
【初六】童觀 小人无咎 君子吝
【六二】闚觀 利女貞
【六三】觀我生 進退
【六四】觀國之光 利用賓于王
【九五】觀我生 君子无咎
【上九】觀其生 君子无咎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운명을 믿고, 자기의 생활과 앞 길을 지배하는 주재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여 신에게 기도하여 구하려 하고, 점을 쳐서 복을 구하려 하고 재난을 면하려 한다. 아무런 혜안이 없는 나에게 누군가가 미래를 알려달라고 찾아와도 자신 있게 답해 줄 수 있는 미래가 있다. 당신은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여 말할 수 있다. 비가 내리고 있으면 정확히 언제 그칠지는 몰라도 분명히 그친다는 것은 알며, 찜통 같은 더위가 계속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추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 올 것을 장담할 수 있다. 공자께서 “과거를 돌이켜 미래를 살필 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논어 제2편 위정 제11장]고 하셨다. 유학은 신비한 능력으로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觀 盥而不薦 有孚顒若
통찰(觀)은 몸을 씻고(盥而) 마음을 정갈히 하여(不薦) 믿음으로서(有孚) 공경을 다하여야 한다(顒若).
  관(盥)은 제사를 시작하기 전에 몸과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을 말하며, 천(薦)은 제사 때 제물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깨끗이 하지만 제사를 드리는 중이라면 마음이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관이불천(盥而不薦)은 초심을 잃지 않는 깨끗한 마음을 의미한다. 불가에서는 수행으로 마음이 맑아지면 일반적이지 않은 6가지 신통한 능력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반면, 공자께서는 평범을 벗어난 궁벽한 이치를 찾고 괴이한 일을 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바른 마음으로 보다 넓은 안목을 가지게 될 수는 있어도 전생과 내생까지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에는 반대하셨을 것 같다. 어느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공통분모는 ‘마음이 맑아지면’ 안목이 넓어진다는 것 일게다.

 

童觀 小人无咎 君子吝
아이의 어리석음으로 바라보는 것은(童觀)은 소인에게는 허물이 없으나(小人无咎) 군자라면 어려워진다(君子吝).
  소인은 사사로움을 도모하고 제 한 가정을 잘 꾸리기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는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손해를 입지 않는가 하는 그런 정도의 어리석은 혜안이니 소인에게는 허물이 없다. 그러나 군자는 혜안을 그러한 사사로움을 도모하는데 쓰려는 사람이 아니니, 동관(童觀)을 도모하는 것은 어렵게 된다. 군자로서 맡은 바 사명을 잊지 말고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말라는 뜻이다.

 

闚觀 利女貞
엿보는 통찰(闚觀)은 여자에게는 끝까지 이롭다(利女貞).
  요즘 시대에 '예기'에 나오는 여성의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언급한다면 무척이나 강심장이라고 할 것이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르라'는 뜻처럼 여인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삶을 엿보면서 보살펴주는 ‘땅의 덕성’으로 살라는 뜻을 담은 것이 이 효이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구분한 것도 하늘이 성별을 가려 세상에 낸 이유가 있으니, 그 역할을 다하여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다. 이른바 조선조의 소인유(小人儒)들이 세상을 현혹시켜 여성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멸시하고 복종을 강요하였으나, 옛 성현의 진실한 뜻은 음과 양이 조화로움을 이루는 ‘중용’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觀我生 進退
자기의 생을 통찰하여(觀我生)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그 말이 의미하는 뜻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라는 것을 아는가를 지식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객관식용 시험에 맞추어진 교육의 폐단이다.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늘이 더 크게 쓰려고 시련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 하기에(하늘이 맡긴 사명을 거스르기 때문에) 힘들고 성과는 없는 것인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통찰력(觀國之光)을 가졌다면 임금으로부터 손님으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니 이롭다(利用賓于王).
  이름난 지자(知者)들은 천기를 헤아려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고 하는데, 주역에서도 그런 인물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나라의 영광까지를 내다볼 줄 아는 통찰력을 가졌다면 유비가 제갈공명을 삼고초려로 모시었듯 그렇게 귀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觀我生 君子 无咎
자기를 통찰할 수 있는(觀我生) 군자는 허물이 없다(君子无咎).

  군자와 소인의 사명은 다르다고 하였다. 소인은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고 군자는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 자기를 통찰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소인이 아니라, 자기를 통찰하여 공공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군자여야 혜안을 가져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

 

觀其生 君子 无咎
타인과 다른 사물을 통찰하는 것(觀其生)도 군자라야 허물이 없다((君子无咎).
  바르지 못한 이가 혜안을 가진다면 세상은 더 어렵게 된다. 알려진 역사의 진실과 평가를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한명회에 대한 평가가 맞다면, 한명회가 혜안을 가짐으로써 세조가 권력을 찬탈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희생되었다. 자기 자신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과 미래의 세상을 보는 혜안을 가졌더라도 군자로서 바른 도를 추구하는데 사용하여야만 허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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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서 첫 괘가 하늘(乾)로 시작하는 까닭은 시간과 공간의 우주이치를 말하기 위한 까닭은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시간을 말하고,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간의 도를 말하기 위해서다.
짧은 시간이라고 조급하게 쓸려고 서두르지도 말고, 더 붙잡고 있으려고 미적거리지도 말라는 의미이다.
「소주역」이라는 별칭을 가진 「중용」에서 '군자의 중용은 군자의 시중(時中)이다'고 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리고, 나아가야 할 때는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는 물러나야 한다.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부분은, 점이나 부적 방술과 같은 방법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지 말하는 셋째효의 의미이다. 인간이 주도적 입장이 되어 선택해야 할 시간을 말하고 있다.
기다려야 할 때(잠용), 구해야 할 때(현룡), 나아가야 할 때(비룡), 물러나야 할 때(항룡)를 잘 판단하라는 가르침을 전하지만, 그 때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인사대천명! 오직 사람의 일을 다할 뿐이다.

점쟁이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신이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역은 점에 의지하라고, 신께 기도하라고, 부적에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른 분별력을 가진 군자가 되어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유학에서의 군자는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다.
다만, 그 옳고 그름의 잣대, 진리의 잣대는 '나에게 요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육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를 건강하게 하려 요가를 배우듯이,
정신 건강을 위해서 학문을 배우는 사람도 '자기'를 수양하려 배움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수신이 최선순위에 오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
남에게 요구하기 위한 옳고 그름은 싸움을 낳고 미움을 낳게 되는 해악이 될 뿐이다.
자기의 사상과 종교가 절대적 진리라는 믿음으로 쉬지 않고 다투고 있고,
얼마나 많은 인간이 목숨을 잃게 되어야 했던가?

 

군자는 나를 바로 세우는 사람일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감화된 사람이 저절로 벗이 되려고 찾아오기도 하는 사람이다.
논리와 말로 이겨서 사람을 끌고오려는 승리자, 내세우려는 잘난 이가 군자가 아니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은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부단히 강조한다.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논어 제13편 자로 제23장]

 

군자가 되어 자기를 다듬는다는 이 수신이 결코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가 전해주는 가르침은 '물은 변한게 없었지만 내 마음이 변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은 아닐 것이다.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알고서 구토가 일어났다는 것은 지나간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착하는 경지를 벗어났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자기자신을 깨우친 것도 깨달음의 한 이유였다고 한다. 맛있게 먹었다는 기억을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더러운 물이네 할 것이지, 구토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로서 자기를 착각하지 않고 냉정하고 철저하게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자라서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지혜롭다는 사람도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경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신(나를 닦고) 제가(집안을 바로하고) 치국(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세상을 평화롭게 하는)하는 것이, 순서대로 완성 한 후 나아가는 선후의 단계적 의미는 아니다. 수신이 곧 제가와 다르지 않고 치국과 다르지 않고 평천하와 다르지 않음이다. 즉, 수신(修身)은 평생 수련해야 하는 것이지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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