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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 子曰:]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不患人之不己知]
내가 남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患不知人也]

 

   비슷한 가르침이 논어 제1장부터 시작해 위령공(16), 헌문(32)편 등등 계속 반복되고 있지만, 뒷부분에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이 장에서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말은 본래 내가 남을 제대로 알 수는 있는 것인지 바꾸어 생각해보라는 뜻도 담겨있다.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도 내가 남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앎의 교만에 빠졌기에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드러나고 보여지는 것을 통해 ‘짐작’을 하는 것이지 아는(知) 것이 아닐 것이다. 경험과 정보가 많아지면 짐작이 맞을 확률이 조금 높아진다는 것일 뿐,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남들도 나를 제대로 알아줄 수 없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외로운 존재인가? 사실, 나를 알아주는 완전한 친구가 있다. 내 안의 나’는 나를 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나를 정확히 보고 있으며, 그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으니 정말 완벽히 나의 진면목을 알아주고 있을 것이다. 시인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원했던 그 하늘이 곧 ‘내 안의 나’이기도 할 것이다.

  이치상은 나도 남을 모르고 남도 나를 모르는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아무도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주지 않으면 외롭고 슬픈것이 사람이다. 성인이라 칭송받는 예수께서도, 석가께서도, 공자께서도 세상이 몰라준다고 역시 아쉬워하셨다. 감정조차 없어져야 한다는 뜻, 정(情)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며, 그 감정에 장악당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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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여쭈었다 [子貢曰:]
-  가난하다고 아첨하지 않고 [貧而無諂]
-  부유하다고 교만하지 않으면 어떤가요? [富而無驕 何如?]
공자께서 대답하시길 [子曰:]
-  좋구나 [可也] 그렇지만 가난함을 즐기고 [未若貧而樂]
-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한 것 같구나 [富而好禮者也]
자공이 말하길 [子貢曰:]
-  시경의 절차탁마(切磋琢磨)가 이같은 뜻입니까? [詩云, 如切如磋如琢如磨 其斯之謂與?]
공자 말씀하시길 [子曰:]
-  자공아! 이제 너와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  지난 것을 돌이켜 미래로 나아갈 줄을 아는구나 [告諸往而知來者] 

 

   뜻을 음미해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대화이며 자공의 영민함을 느낄 수도 있다. 자공은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억제하는 단속으로 도달하였다’고 여기고 여쭤보았는데, 공자께서는 ‘즐길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쳐 준 것이다.

  그 말에 자공이 ‘내가 모자라구나’하고 침울하지 않고, 시경의 시를 인용하여 즐겁게 받아들이며 화답을 한다. 이것은 ‘가난한 성취(배움)를 즐기는 태도’ 이니, 곧바로 가르침에 화답하여 실행에 착수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단순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시(詩)를 통해서 즐기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제가 경솔하게 아는 것으로 여겼군요’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절차탁마’를 인용할 수 있는 상황인지를 질문하여, 우회적인 시적인 ‘숨김의 미학’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즐거움의 경지에 이르라는 가르침, 계속적인 발전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좋지만, 스승과 제자간의 정다운 대화라서 또한 더 좋다. 공자의 감탄은 당연한 것 같은데, 공자께서도 지지않고(?) 돌려서 칭찬을 하고 있다. ‘하나(과거)를 알려주면 둘(과거+미래)를 안다’는 것인데, 자공이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써 먹는다. ^^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논어 제5편 제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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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군자는 배부르게 먹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君子食無求飽]
편안하게 거주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居無求安]
일을 부지런히 하고 말을 신중하게 하고 [敏於事而慎於言]
도를 향하여 바르게 행한다면 [就有道而正焉]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可謂好學也已]

 

   이 장도 스스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유가(儒家)에서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호학(好學)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제1장에서부터 강조하였듯이, 아기새가 어미새를 따라서 날개짓을 하는 그 행위에 의의가 있음이니,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다. 

  한편, 군자라고 해서 맛있게 먹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요, 편안히 잠자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지(욕심내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배부름과 편안한 주거를 추구한다면 ‘소인’이라는 하찮은 사람이 된다는 것일까? 그런 뜻도 아니다. 군자는 소인에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위해 봉사’해야하는 다른 사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도 배불리 먹고 편안한 주거를 추구한다면 제 본분을 망각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군자(정치를 하려는 자)가 물욕에 빠지면 큰 도적이 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무겁게 새기도록 경계시킨 것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군자는 불쌍한 사람처럼 보인다. 부지런히 일해야 하고, 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해야 하며, 배불리 먹고자 해서도 안되고, 편안히 거주하고자 해서도 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달픈 삶이 아니라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행복해지는 것에 공자학의 의의가 있다. 

  공자가 쇠뇌시킨 걸까? 종교일까? 도(道)의 안경을 쓰고 보지 않는다면 당장 이해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오지로 가서 열악한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는 의사들의 삶은, 보편적 시각에서는 희생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진심으로 행하는 그 얼굴이 불행한 표정인지를 관찰해보면 뭔가 이상스럽기는 할 것이다. 짐작을 통해 ‘그 길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져봄직 하지 않을까? 
  
  도(道)는 ‘길’로 잘 비유한다. 선명한 길은 사람이 많이 다녀서 잘 드러나는 것 뿐이며, 정해진 도(道)라는 것은 없다. 자기가 ‘이 길이다’고 인식하며 걸어가는 그대로의 삶이 곧 도(道)다. 남들처럼 사는 것도, 특이하게 사는 것도 각자 나름의 길이다. 도를 바르게 한다는 것[道而正]은 가고자 하는 길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뜻이다. 그 길로 가라고 남에게 요구하려는 것도, 그 길로 가지말라고 남에게 요구하려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오직 인간만이 나와 똑같게 만들고 싶어하고, 나의 우상을 똑같이 숭배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다.  하늘은 비슷하게 만들고서 멈춘다. 결코 똑같은 것을 만들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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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신의는 의로움이 있어야 가까이 하여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며 [信近於義 言可復也]
공손은 예가 있어야 가까이 하여 치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恭近於禮 逺恥辱也]
의지하더라도 친근함을 잃지 않아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역으로 읽어보면, 정의롭지 않은 약속은 지키지 않아야 하며, 예가 없다면 치욕을 당하더라도 공손하지 않아야 하며, 의지한다고 해서 싫어하면 떠나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앞 장에서 ‘조화만을 위한 조화를 찾는’ 꽉 막힌 사고를 지적했는데, 마찬가지로 꽉 막힌 사고를 지적하고 있다. 무조건을 고수하는 것은 맹신과 맹목을 추구하는 것일 따름이다.

  ‘독립투사들께서 거짓말을 하여 동지를 팔지 않은 것’을 거짓말을 했다하여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다. 거만으로 대하는 무례한 사람에게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공손으로 화답할 필요가 없고, 의지한다고 해서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면 떠나야 하는 것이라 한다.

  이 모두는 ‘내면의 자존(自存)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의롭다는 것, 공손하다는 것, 친근하다는 것을 얻기 위해서 본질을 버리지는 말고, 스스로를 버리지는 말라는 의미이다. 자존이 무너지면 삶이 고달파진다. '좋은사람 컴플렉스'라는 말처럼, 좋은 평가를 의식해서 끌려다니지는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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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예의 작용은 조화로움이 중요하다 [禮之用 和為貴]
선왕의 도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先王之道斯為美]
작고 큰 것이 조화를 이뤄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小大由之 有所不行]
조화를 위한 조화만 알고 [知和而和]
예로써 조절할 줄 모른다면 [不以禮節之]
순조로울 수가 없다(참된 조화가 아니다) [亦不可行也]

 

   이 장이 해석이 분분한 이유는 ‘어떻게 해라’는 선명한 실천행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의 철학인 중용(中庸)을 설명하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禮)는 내면의 실질과 드러난 꾸밈의 조화이다. 마음이 없는 예는 허례이며, 솔직한 마음을 꾸밈없이 다 발산하는 것도 무례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中庸)의 균형선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곧 조화라고 하여 조화만을 추구하려는 꽉막힘도 문제이다.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힘을 사용해 막아야 하는 행위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형식적 예에 어긋나고 부자간의 조화가 깨어지더라도, 근본의 예[실질]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참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장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이고 늘 그러해야 한다는 고정된[죽은] 원칙은 없다는 중용(中庸)의 조화라는 관념이 정립되면 좀 더 선명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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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적에는 뜻을 살펴보고 [父在 觀其志]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지나온 행적을 살펴보고 [父沒 觀其行]
3년동안은 바꾸지 않아야 효라고 할 수 있다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이 장의 핵심은 ‘진실한 마음은 가벼울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삼(三)은 '오래다'는 의미로 고래부터 사용한 하나의 상징과도 같으니, 반드시 숫자적 3년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라는 선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칼릴 지브란과 메리 헤스켈의 러브레터와 일기, 작품등에서 발췌하였다고 하는데, 이 책의 제목은 마치 명언처럼 유명해져 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작고 드러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부모님의 생각과 뜻을 쉽게 바꾸려는 것은 부모님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는 마음일 지 모른다. 생각이 달라도 살아서는 부모의 뜻을 꺾으려 하지 않고 지켜 보는 것,  돌아가신 후에는 지난 행적을 신중히 관찰해 보는 것, 그리고 단번에 바꾸지 않고 깊이 심사숙고 해보는 것은 모두 부모님의 일생의 뜻을 가볍게 여기고 경시하지 않는 것이기에 효(孝)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효(孝)는 마음이 실질이기에, 드러나는 외형적 행위에 집착하라는 뜻이 아니다. 반드시 3년을 그리해야 한다고 못박아 버리면 맹신적인 종교가 된다. 지켜야만 하는 법률 같은 효(孝)가 되어버린다. 한편, 그 시대에는 아버지의 역할이 주도적이기 때문에 부(父)라고 하고 있겠지만, 오늘날에는 부모님을 통칭하는 의미로 읽으면 될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뜻이 남녀차별이 아니므로 그런 것에 민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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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금(子禽)이 자공(子貢)에게 묻기를 [子禽問於子貢曰:]
선생님께서는 어느 나라에 가시던지 정사에 관해 들으려 하시는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말해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군주의 요청을 받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求之與? 抑與之與?]
- 자공이 말하기를 [子貢曰:]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시기에
정사에 관해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말해 달라 하시지만 [夫子之求之也]
다른 사람이 (벼슬을 탐하여) 그러는 것과는 다릅니다 [其諸異乎人之求之與]

 

   공자께서는 섬길 군주를 찾아다니며 14년의 주유천하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여씨춘추』에 의하면 약 80여명의 군주를 만났다고 한다. 두 제자가 주고 받고 있는 대화는 그의 정치욕(?)에 관한 의문으로, 자금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 역시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소심(?)해서인지 예(禮)가 아니라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승께 직접 여쭈지 못하고 공자와 절친한(?) 제자 자공에게 대신 물어보고 있다. 

  자금(子禽)의 질문은 '먼저 원한 사람이 누구인가'가 주된 의문이 아니라, ‘공자께서 먼저 요구했다’는 답변을 기다려 ‘권력을 얻고 싶어하는 탐욕 때문이 아닌가’를 재차 묻고자 하였으리라 추측되는데, 명석했다는 자공이기에 한 번에 대답을 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자공의 말을 요약하면 첫째, 정치에 대해 먼저 말해달라 했더라도, 강요하는 것도, 난처하게 한 것도, 잘난체 하려는 것도 아니었기에, 군주들이 말해주고 싶어서 말하게 된 것과 다를 것 없다는 말이며 둘째, 대부분의 사람이 정치에 대한 말을 들으려는 것은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벼슬을 탐하는 것이 실제의 본심이지만, 공자께서는 군주를 도와 궁극적으로 백성들을 돕고자 하는 것이 본심이라는 말이다.

  예상대로 자공은 스승을 잘 변호하고 있다. 우리같은 독자는 ‘공자는 어떤 인물인가’를 알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를 배우고자 읽는 것이니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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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 말씀하셨네 [曾子曰:]
마음을 다해 장례를 치르고 [慎終]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면 [追逺]
백성들의 덕성도 후덕하게 될 것이다 [民德歸厚矣]

 

   사람들에게 후덕하게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행위를 잘 하는 것 만으로 저절로 사람들은 후덕해 진다고 한다. 유학의 배움은 언제나 나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나를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이 유가(儒家)의 제1조이다. 

  신종[慎終]이란 분에 넘치는 장례가 아니라, 마음을 극진히 하여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말하며,
  추원[追逺]이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 두가지는 논어 제3편 팔일 제3장에서 말하는 근본을 잃지 않은 예를 말한다.

예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 검소하게 하는 것이며,
장례는 형식을 잘 갖추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즉, 예(禮)는 거절할 수 없는 내면의 마음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이다. 장례와 제사는 왜 효(孝)의 연장인가?
효(孝)는 "내가 받은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며, 고마움을 아는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건 살아계시건 그런 객관적 사정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 마음이 잊을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고마움이기 때문이다. 고마움을 아는 것에서 인간관계가 후덕하게 된다. 당연하다’는 인식과 ‘고맙다’는 인식의 차이가 될 것이다.

  당신은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하는 인식은 개인적이다. 개인주의 대표격인 영어권에서 조차도 "Thank you"라고 인사하지 않는가?

  한편,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면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은 유가에서 말하는 도(道)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다. 짝사랑하던 여인이 나에게 사랑을 고백해 오기를 기대하는 것, 권위적인 남편이 갑자기 변하여 다정다감해지기를 기대하는 것, 그렇게 나는 결코 변하지 않으면서 타방이 변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내가 변해야 타방이 변한다'는 것이 유가의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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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군자라도 무겁게 대하지 않으면 흔들리는 것이니 [君子不重則不威]
배웠더라도 붙잡지 못하게 된다 [學則不固]
지극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니 [主忠信]
자기만 못한 이를 벗삼으러 하지 말고 [無友不如己者]
허물이 보이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過則勿憚改]

 

  이 장은 오랜동안 '자기보다 못한 이를 친구로 삼지 마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다 유학의 철학이 분별하여 멸시하는 사상이 아니라는 본질에 주목한 학자들이 새로운 해석을 개진하고 있다. ‘자기만 못한 사람은 본래 없는 법이며, 스스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삼으려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벗을 대하려 하지마라' 는 의미로 해석하는 추세이다. 

  ‘자기만을 향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벗이라 하면서도 나만 못하게 여기려는 것이며, ‘자기만을 향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자기의 잘못은 이해하고 숨기고 덮고 꾸미려 한다는 의미이다.

  역으로 말하면, 나만을 진정으로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로 보기에, 남은 나보다는 보잘것 없는 존재임이 당연한 것이고, 나의 허물은 누구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소한 것이 되어야 마땅하고, 남의 잘못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이, 무게감(重)이 없이 흔들리는 경망함(不威)이다. ‘위엄이 서지 않는다’로 번역하면 남에게 보여주는 위엄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논어 제1장에서부터 강조하듯 ‘남이 알아주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군자이기에  위엄, 체통과의 의미가 다르다. 나의 입장에서만 헤아리고, 남의 입장에서 헤아리지를 못하니, 나의 저울로는 1KG이라 측정하고, 남의 저울로는 1g이라 측정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소중하다는 인식으로, 남도 스스로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인식하고, 남의 허물이 보이는 것처럼 나의 허물도 보아야 하는 것이니, 숨기려 하지 말고 고치려고 해야 한다. 변명을 찾고, 허물을 덮고 감추려는 것은, 남의 이목에 의해 나의 자존(自存)이 흔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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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 말씀하셨네 [子夏曰:]
미모를 좋아하는 것처럼 덕을 좋아하고 [賢賢易色]
부모를 섬김에 힘을 다 하고 [事父母能竭其力]
임금을 모심에 몸을 아끼지 않으며 [事君能致其身]
벗과 사귀며 나누는 말에 신의를 다한다면 [與朋友交言而有信]
그가 배우지 못한 자라 말해도 [雖曰未學]
나는 그가 배운사람이라고 분명히 말하리라 [吾必謂之學矣]

 

   자하(子夏)는 공자보다 44살 적은 제자로, 문학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옛날 중국에서 ‘글을 배웠다’는 것, ‘글을 읽을 줄 알았다는 것’은 큰 자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 조상들에게서도 부의 욕구보다 배움의 욕구가 더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배우는데 소비하는 재물을 아까워 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논밭을 팔아 공부시킨 집안보다는, 배움에 열의가 없어 논밭을 팔지 않았던 집안이 더 거부가 되어 부러움을 사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돌고 도는 세상이라 더 재미도 있고...   
    
  이 장 또한 마지막 구절에 무게감이 있다. ‘나는 배운 것 없는 무지랭이래요’라고 하는 사람에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많이 배운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실천하고 행동할 수 없는 지식이라면 죽은 지식이며, 이미 행하고 있다면 배울 필요조차도 없는 까닭이다. 책상에 앉아서 공자왈 맹자왈 하는 샌님이 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색(色)을 좋아하는 만큼(易=如) 어짊을 좋아하라는 뜻도 주목해야 한다. 유학이 경계한 것은 언제나 ‘치우침’이다. 물질이 정신보다 덜 가치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치우친 생각이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란 본래 없다. 그런 분별은 인간만이 하는 것이다.

『장자』에 나오는 말이지만, 인체를 이루는 백개의 뼈마디, 아홉개의 구멍, 여섯개의 장기 등등을 분리해내어 무엇이 더 중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법이다. “물질을 비롯한 쉽게 보이는 색(色)”을 전부인양 지나치게 높이는 것이 문제이지, 그것이 덜 가치롭다는 사고는 아니다. 유학이 경계한 것은 언제나 한 쪽으로 ‘치우쳐 모난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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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젊은이들은 집에서는 효도하고 [弟子入則孝]
밖에서는 어른을 공경하고 [出則悌]
행동은 신의로우며 [謹而信]
널리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汎愛衆]
인(仁)으로 다가가야 한다 [而親仁]
그리 행하고 힘이 남는다면 [行有餘力]
글을 배우는 것이다 [則以學文]

 

  마지막 구절에 무게를 싣고 있다. 행동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고, 글을 읽는 것은 가장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는 의미이니, 『논어』를 독서하는 가치를 낮추어 버리는 말씀이기도 하다.

  
  내용이 훌륭한 책보다 잘 팔릴 책을 우선 출판하는 이 시대에는 이런 글이 초반부에 배치된다면 출판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따져보면 참 이치에 맞는 말씀이다.

 

  오늘날의 우리 시대는 글을 모르기에 도리(道理)를 모르고 있는 시대인가? 글을 알고 도리(道理)를 알아도 '그렇게 실천하지는 못하겠다'는 시대인가? 아는 것과 실제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요, 유학은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이다.

 

  한편, 널리[汎] 사랑한다는 의미는 잘난사람 못난사람, 빈부귀천을 떠나서,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월급이 얼마요, 직업이 무엇이요, 학벌이 어떠한지 등등 그러한 외부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는 사랑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만으로 함께하는 진실된 사랑이다. 

  그러한 '참된 사랑으로 교감’하는 것이 인(仁)으로 가깝게 다가가, 인(仁)과 친해지는[親仁]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난해하게 인(仁)을 설명하지 않고 ‘인(仁)=진실한 사랑’으로 단순하게 정의하는 학자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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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천승지국을 다스리는 방법은 [道千乘之國]
일을 신중히 하여 신임을 얻는 것이니 [敬事而信]
알뜰히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을 사랑하고 [節用而愛人]
시기를 고려하여 백성들을 부려야 한다 [使民以時]

 

  천승지국은 전쟁을 치룰 때 천대의 수레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 즉, 제후국을 말한다. 과거 유가(儒家)의 배움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주요한 이상으로 삼았기에 정치가로서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 직장에서 지위가 높아졌을 때, 가정에서 부모로서 위치 등등 에서도 그 의미는 통한다.  

  알뜰히 사용하는 것은 왜 백성들을 사랑하는 일일까? 재정을 낭비하면,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경영자가 알뜰히 경영하면, 직원들과 더 나눌 수 있어 좋을 것이다. 물론 쓰는 것을 무작정 삼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낭비되는 것이 없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기에 맞게 백성들을 부리는 것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농한기를 택하여 부역을 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군역'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 청년들은 가장 소중하고 바쁜 시간을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러니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비리들이 생겨나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다. 모병제와 대체복무등 다원화된 사회에 발맞추어 제도개선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이 장에서 가르침도 본질은 인(仁)이다. 재정의 필요없는 낭비를 줄이고 농한기에 백성을 부리는 것은 ‘내 마음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세금을 내는 백성들의 마음과 진정으로 함께하는, 군역을 이행하는 백성들의 마음과 진정으로 함께하는, 그 마음이 곧 사람(人)이 진정으로 만나는(二) 것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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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 말씀하셨네 : [曾子曰:]
나는 날마다 세가지로 내 스스로를 반성한다 [吾日三省吾身]
남을 위해 힘씀에 최선을 다하였던가 [為人謀而不忠乎]?
벗과 더불어 사귐에 신의를 다하였던가 [與朋友交而不信乎]?
전해준 것이 익히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가 [傳不習乎]?

 

『논어』에서 공자와 함께 「선생님」을 뜻하는 자(子)라는 호칭을 유자(有子)와 증자(曾子)에 사용하므로, 『논어』는 유자와 증자 문하에서 편찬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쨌건 증자(曾子) 곧, 증 선생님이 말한 것은 ‘너희들은 이렇게 세가지로 반성해라’가 아니고, ‘내가 이렇게 반성한다’이다. 이 화법은 숨겨진 뜻이 있다. 비교적 쉽게 보이는 것은 ‘나에게 요구한다’는 유학의 '자기 실천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한편, 증자 자신도 어떨 때는 대충 힘쓰기도 하며, 어떨 때는 친구를 의심하기도 하며, 어떨 때는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전하기도 한다는 반성이 숨겨져 있다. 이미 그러지 않는 경지에 올랐다면, 날마다 자기를 돌아보며 반성할 까닭이 없으니, 이 장은 증자가 선생인 자기도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학이 요구하는 사람인 군자는 ‘완전한 성자’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치려고 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말로 잘못은 지나간 잘못이 아니라, ‘잘못을 숨기고 감추려고 애쓰는 꾸밈’이라고 했다.

  내용으로 돌아와보면, 증자의 세가지 반성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내면의 진실성’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할 때 자기를 더 내세우고 싶은 욕구가 이는 것이 사람이다. 이것을 ‘이중인격’이라고 비난해 버린다면, 이 세상에 이중인격자가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될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식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더 진실된 ‘나’를 이루라고 다그쳐야 한다. 그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는 나무랄 것이 아니라, 그런 욕구가 있음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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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 [子曰:]
듣기 좋은 말과 [巧言]
잘 꾸며서 보이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令色]
인(仁)을 찾기는 힘들다 [鮮矣仁]


이미 고사성어로 유명한 '교언영색'은 논어 제17편 양화 제17장에서 거듭 반복하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말을 잘 꾸며서 호감을 얻으려는 사람,
외모를 잘 꾸며서 호감을 얻으려는 사람은
오직 자기를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람에게서 남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찾기는 힘들다고 한다.

 

인(仁)은 "진실된 사랑"이 하나의 특성이다.
인(仁)은 사람(人)이 만나는(二) 마음이며,
하나(一)가 하나(一)와 더불어 두(二) 사람(人)이 합쳐지는(仁) 마음이다.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듣기 좋은 말을 잘 하는 사람,
외양을 잘 꾸미는 사람이어야 성공으로 가기 쉽다.
언뜻보면, 현대사회의 처세의 지혜와는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장의 가르침이,
듣기 좋은 말을 잘 하고, 잘 꾸미고 다니는 사람을
멸시하라는 뜻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꾸미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듣기 좋은 언변, 잘 꾸미는 외양에만 신경쓰지 말고,
실질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늘 경계하라는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가르침이며, 
속았다고 원망하지 말고, 꾸밈을 감안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라는 가르침이다.  

이 장 뿐 아니라

논어의 모든 가르침은 자기와 대화를 시도하며 읽어야 한다.

남에게 가르치려는 마음, 남을 비난하려는 마음으로 읽는다면 얻는게 별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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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말씀하셨네 : [有子曰: ]
그 사람됨이 효성과 공경이 있는데 [其為人也孝弟]
윗사람을 범(犯)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더라 [而好犯上者 鮮矣]
윗사람을 범(犯)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不好犯上]
난리를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而好作亂者]
아직 없었다 [未之有也]
군자는 근본에 힘써야 하며 [君子務本]
근본이 바로서야 도(道)가 생겨난다 [本立而道生]
효성과 공경이라는 것 [孝弟也者]
그것이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다 [其為仁之本與]


효(孝)는 부모를 공경으로 대하는 것이며,
제(弟)는 집안어른을 공경으로 대하는 것이다.
부모에 무조건 '복종'하고, 집안 어른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고마운 마음을 거부할 수 없어 저절로 그리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해 준게 뭐가 있어? 순이 엄마는 X도 해 주고 Y도 해 주는데'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다. 고 김수환추기경께서 생전에 '내 탓이요'라는 운동을 하셨던 적이 있다. 세상이 '원망'으로 채워져 가는 것을 그저 두고 보실 수 없으셨던 까닭이었을까?

 

이미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는 것이 인생의 한 단면이기도 하기에,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따져보면 세상은 한없이 감사해야 할 것으로 가득가득 채워져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자신을 살려주고 있는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부터 가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운 시대이다. 

만약, 어느 순간 자연이 공기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을 욕해야 할까? 
'이 XX 자연아! 당연히 니가 공기를 줘야지, 왜 안주냐?' 하고 욕해야 옳은 걸까?

현대인들이 가장 잘못 사용하는 말이 '고맙습니다'를 '당연하지'로 바꾸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니깐 당연히 그래야지...

 

산다는 것은, 내 의지로만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젖을 먹여 살수 있게 도와 주었고,
자연이 햇살과 공기와 물을 주고
하늘이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어
나를 살려주고도 있다.
 

사람은 일체의 도움이 없어도, 저절로 살 수 있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 인(人) 이라는 한자어는 하나(I)가 하나(I)를 받쳐주는 모습이다.

효(孝)와 제(弟)를 아는 마음은,
내가 나 저절로 잘나서 내가 아니라
나의 생(生)을 도와주었고 도와주고 있음을 아는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다.

'남'을 다 죽이면 나는 살 수 있을까?
'자연'을 다 없애면 나는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진정으로 효(孝)와 제(弟)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의 아들에서 단절될 수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삼촌의 조카에서 떨어질 수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남'으로 부터 떨어질 수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그런 일련에 구속된 '나'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연결되어 있어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다.

'더불어 하나'임을 아는 사람이
나만 보고 남을 범(犯)하려 하고,
나만 보고 난리(亂)를 피우려 하겠는가?

 

유자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움을 참으로 아는 것이 인(仁)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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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 [子曰]:
배우고 때때로 익혀보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먼 곳에서라도 찾아주는 벗 생기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有朋自逺方來 不亦樂乎]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없을지니 어찌 군자이지 않겠는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유가(儒家)에서의 배움[學]은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것과는 다르다. 5개국어에 능통하게 되는 것 같은 기술의 배움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도리를 배우는 것을 말한다. 전문기술의 공부로 실력있는 의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의사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 유가(儒家)의 생각이다.

 

  때때로 익힌다[時習]는 것도 유가(儒家)에서 중요시 한다. ‘베푸는 것이 좋다’는 것을 머리로만 끄덕이며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유학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는 사유가 깔려있다. 힘든사람을 도와줌으로써 느끼는 희열을 직접 맛보아야 하는 것이다. 행할 수 있는 때가 왔을 때, 그것을 행하여 봄으로써 내 것이 되게 하는 것! 익힐 습(習)자는 어미새를 따라해보는 아기새의 날개짓이다. 유학은 그래서 ‘삶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공부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면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공부이다.

 

  기쁨[說]은 스스로부터 생겨나는 ‘성장’의 기쁨이다. 어미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아기새의 감탄이 아니라, 엄마처럼 나도 날게 되었을 때 생겨나는 ‘성장’의 기쁨이다. 비유하면 키가 더 커져있는 나를 만난 것, ‘내가 달라진 나를 만나는 기쁨’이다. 누구 때문에 기쁜것도 아니고, 누가 보아주어 기쁜 것도 아닌 내면의 울림을 말한다.

 
  ’정자’ 의 말처럼, 논어를 읽었는데 논어를 읽기 전과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는 논어를 읽지 않은 사람이다. 감탄하는데서 끝나는 아기새와 마찬가지다. 날개짓을 하며 날아봄으로써 진정한 기쁨의 희열을 맛보라!

 

  멀리서라도 찾아주는 벗[有朋自逺方來]은 나의 성장을 알아주어 먼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오는 사람이다. 내가 알리고 광고하여 끌고오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찾아오라’고 연통을 보내오는 이도 아니다. 먼 길을 찾아오는 고생이 나를 만나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사람이다. 진정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니 친구이며, 먼 길을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니 또한 친구이다. 편할려고 하는 이는 조개가 함께 놓여있는 붕(朋)의 관계일 수 없다.

 

  즐거움[樂]은 나의 기쁨[說]과 너의 기쁨[說]이 함께하며 더 커지는 ‘나눔의 기쁨’이다. 빵 하나를 둘이 나누어 먹는 것이 빵 하나를 내가 다 먹는 것보다 더 좋아지는 감정이 즐거움(樂)이다. 이는 사람(人)이 둘(二)이라는 인(仁)의 관념과도 연결된다. 함께 밥을 먹는 것[즐거움]이 불편하다 착각하지만, 혼자 자유롭게 밥먹는 것[기쁨]과 택일하라면, 함께 밥을 먹는 것을 택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보다 즐거움을 택하려는 본성이 보이면, 내 기쁨을 더 키우기 위해 즐거움을 버리는 어리석은 일은 못하지 않을까?

 

  알아주지 않더라도 원망이 없음[人不知而不慍]은 나의 존엄을 잃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따라 내 마음이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나의 존엄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일은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다. 『논어』를 왜 배우는가? ‘공자’를 알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공자를 알 수는 없다. ‘바른 도리’를 알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바른 도리’는 왜 배우는가? ‘더 사람답게 사는 나를 만나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배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어찌 원망이 생길 수 있을까?

 

  군자[君子]는 곧 유가(儒家)가 목표로 하는 이상적 사람이다. 그는 ‘기쁨’과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다. ‘기쁨’을 알기에 자기에게 요구하며 ‘즐거움’을 알기에 소인을 멸시하지 않는다. 나보다 「못한」 소인에게 자랑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소인과 조화를 맞추어 즐거움을 누릴려는 사람이다. 조화를 도모하여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다. 앞으로 논어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사람이니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논어』의 첫 장을 읽을 때 세가지 상상을 하곤 한다. 날개짓하는 아기새가 되어보는 상상, 우정을 나누는 즐거움에 대한 상상, 휘둘리지 않는 유유한 나를 그려보는 상상.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논어』의 매력이기도 하다.
 

  모든 고전이 그러하지만, 사람에 집중하면 우상[偶像]을 만들고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배워야 할 것은 「공자」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이며, 『논어』는 그것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비유하면 논어는 자전거이다. 자전거로 얻어려는 것은 「건강」인데, 자전거보다 줄넘기가 좋니 나쁘니, 자전거를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런 것에 열심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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