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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旅 小亨 旅貞 吉
【初六】旅瑣瑣 斯其所取災
【六二】旅即次 懷其資 得童僕 貞
【九三】旅焚其次 喪其童僕 貞 厲
【九四】旅于處 得其資斧 我心不快
【六五】射雉一矢亡 終以譽命
【上九】鳥焚其巢 旅人 先笑後號咷 喪牛于易凶

  여(旅)는 나그네를 뜻한다. 떠도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니 곧, 방황을 의미한다. 요즘은 인생 40을 제2의 방황기라고도 한다. 공자께서는 나이 40을 미혹함이 없는 불혹이라고 하셨고 “나이 40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는다면 끝났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6장]고도 하셨으니 요즘 사람들이 40에 방황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쉽게 예상할 수는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旅 小亨 旅貞 吉
방황(旅)은 성장 초기부터(小亨) 있게 되는 것이다. 방황을 끝내어야(旅貞) 길(吉)하다
.
  방황은 성장의 초창기부터(小亨)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길(吉)하려면 방황을 끝내어야 한다고 한다. 아마도 평생 방황을 끝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필부필부(匹夫匹婦)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방황을 끝내지 못하고 그냥 그냥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기도 하다.

 

旅瑣瑣 斯其所取災
방황은 자질구레하게 하면(旅瑣瑣)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다(斯其所取災).
  쇄쇄(瑣瑣)는 자질구레하게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시시하고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끝맺지 못하고 계속 방황을 이어가는 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한다. 알이 먼저 인지 닭이 먼저 인지, 아이가 먼저 인지 어른이 먼저 인지 어찌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대학에서 “자식 기르는 법을 배우고 나서 시집가는 사람은 없다”[대학 제9장 제가치국]고 하였으니 지나치게 자질구레하게 방황을 계속 이어가지 않아야 한다.

 

旅即次 懷其資 得童僕 貞
방황은 묵을 곳이 있어야 하니(旅即次) 재물이 있고(懷其資) 동복(童僕)을 얻으면(得) 끝난다(貞)

  차(次)는 정착할 곳을 말하니 곧 방황을 끝내고 머무를 수 있는 곳을 말한다. 몸을 정착할 수 있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정착 할 수 있으려면 내 마음을 받아주는 사심 없는 종이 있어야 한다.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더 이상 방황은 없음은 당연하다. 물질가치와 정신가치가 별개가 아니니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旅焚其次 喪其童僕 貞 厲
방황하여 그 묵을 곳을 불태우고(旅焚其次) 그 동복을 잃었으니(喪其童僕) 끝까지(貞) 위태롭다(厲).
  재물(資)은 잃지 않았다. 그 동복을 잃어 결국, 쉴 곳을 잃었지만 재물은 남아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재앙을 자초한다고 하는 자질구레하게 이어지는 방황(旅瑣瑣)과 다르지 않다. 내 몸을 쉬게 만들 수 있는 돈도 중요하고 내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동복도 필요한 것이다. 중용을 벗어나 그 동복을 잃었으니 끝까지 위태롭다.

 

旅于處 得其資斧 我心不快
방황에서 잠시 쉬려다가(旅于處) 재물과 도끼를 얻었으나(得其資斧) 내 마음은 불쾌하다(我心不快).

  처(處)는 정착지를 뜻하는 차(次)와는 달리 잠시 쉬기 위해 머무는 곳이다. 자부(資斧)는 재물과 도끼인데, 곧 돈과 권력을 의미한다. 얻기 위해 애써서 얻은 것이 아니요, 잠시 머무를 생각이었는데 돈과 권력을 취했으니 그야말로 횡재다. 그러나 왜 마음이 불쾌할까? 돈과 권력을 얻었고, 그것도 손쉽게 얻었으나 동복(童僕)이 없기 때문이다.

 

射雉一矢亡 終以譽命
어리석은 꿩을 화살 하나를 잃고 죽이면(射雉一矢亡) 마침내 명예로운 부름을 얻으리라(終以譽命)
  꿩은 다급해지면 풀섶에 머리만 박고 몸뚱이를 돌보지 않는 어리석은 짐승이다. 즉 그 어리석음을 빨리 없애라는 말이니, 돈과 권력을 횡재로 얻고서도 마음이 불쾌한 이유가 무엇인지 빨리 깨우치라는 의미이다.

 

鳥焚其巢 旅人 先笑後號咷 喪牛于易 凶
새가 그 둥지를 불사르니(鳥焚其巢) 나그네는(旅人) 처음에는 웃지만 뒤에는 부르짖으며 슬피 울게 될 것이다(先笑後號咷) 주역의 소를 잃어버리는 것이니(喪牛于易) 흉(凶)하다.
  둥지를 불태우는 새가 쉴 곳을 불태우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을 짓을 하니, 짐승의 일로만 여겨 처음에는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그러나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임을 알게 되어 슬피 울게 될 것이다. 소는 진리와 깨우침을 상징한다. 불교의 '심우도'에서 의미하는 소와 같은 뜻이다. 주역의 소를 읽어버리는 것은 곧 주역의 가르침을 잃어버리는 것이니 흉하다. 새를 가엽고 측은하게 여기는 인(仁)함을 잃었다. 주역이 말하고 있는 모든 변화의 법칙은 하나를 상정한 것이 아니다. 사람 인(人)은 항상 관계(關係)하여 하나가 받쳐주어야 하는 존재이며, 나와 관계없는 삼라만상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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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革 已日 乃孚 元亨利貞 悔亡
【初九】鞏用黃之革
【六二】已日 乃革之 征 吉 无咎
【九三】征 凶 貞厲 革言三就 有孚
【九四】悔亡 有孚 改命 吉
【九五】大人 虎變 未占 有孚
【上六】君子 豹變 小人 革面 征 凶 居貞 吉

  혁명과 반란은 구별하기 힘든 개념이며, 역사의 평가도 일정하지 못하다. 어떤 시대는 혁명이라고 말하고 어떤 시대는 반란으로 말한다. 왕건과 이성계가 만약 실패하였다면 혁명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실패하였지만 전봉준의 농민혁명이라고 한다. '성공'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주역은 성공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라, 혁명이기에 성공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때가 도래하고 바른 뜻이 있고 민심도 따르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라 한다.

 

革 已日 乃孚 元亨利貞 悔亡
혁명(革)은 이미 때가 도래하고(已日) 뜻이 있기에(乃孚) 처음부터 끝까지(元亨利貞) 후회가 없는 것이다(悔亡)
  차면 기우는 것이 주역이 말하는 변화의 법칙이요, 때가 도래하였음은 차서 기우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곧 천명을 얻은 자가 불선(不善)으로 나가가 백성의 신임을 잃어 천명을 잃은 때이다. 대학에서 “위대한 천명을 지키기가 쉽지 않으니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나라를 얻고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된다”[대학 제10장 치국평천하]하였다.

 

鞏用黃之革
황소의 가죽으로 단단히 묶어야 한다(鞏用黃之革)
  개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황소의 가죽처럼 굳세어야 하고, 또한 백성들의 신임을 확고히 얻은 것을 말한다. 어려움을 만나면 곧 포기하거나 현실과 타협하려 하는 약한 마음으로는 개혁을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已日 乃革之 征 吉 无咎
때가 도래하였다면(已日) 개혁하여(乃革之) 나아감(征)은 길(吉)하고 허물이 없다(无咎)
  가장 중요한 것이 개혁은 때가 도래하여야 하는 것이다. 잠용일때 움직이지 마라는 건(乾)괘의 뜻이다. 시기가 맞아야 한다. 일시적인 실정으로 민심이 흔들리는 상태라고 해서 곧 천명이 바뀌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서두는 것은 교만일 따름이다. 개선의 가능성이 없어진 때가 나아가야 할 때이다.

 

征 凶 貞厲 革言三就 有孚
나아감(征)은 일견 흉(凶)하고 끝까지 위태로우니(貞厲) 혁언을 세 번 성취해야만(革言三就) 비로소 신임을 얻는다(有孚)
  혁명이란 곧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난과 쉽게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처음에는 힘과 기상으로 부딪혀 나아갈 수 밖에 없어 흉하고 끝까지 위태로움이 따르는 법이다. 45번째 췌(萃)괘에서 사람을 모을 때는 큰 희생양(大牲)과 호통(號)으로 시작하는 것이 순서라 했다. 그 이후에 신념을 펼치고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개혁으로 나아가는 초기는 신념이 아니라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혁언을 세 번 성취하는 것은 공언한 것을 힘과 기상으로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하늘의 뜻을 받은 것으로 여겨 비로소 신임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悔亡 有孚 改命 吉
후회가 없으리니(悔亡) 신임이 있다면(有孚) 천명을 고쳐도(改命) 길(吉)하다.
  혁언을 세 번 성취하고 신임을 얻었다면 곧 천명(天命)을 얻은 것이다. 군주의 시대에는 군주의 지위도 천명(天命)이라 여겼다. 그러나 천명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혁언을 세 번 성취하고 신임을 얻었다면 천명을 고쳐도 길하다고 한다. 대학에서도 “천명은 일정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선하면 얻게 되고 선하지 않으면 잃게 됨을 말한다.”[대학 제10장 치국평천하]고 하였다.

 

大人 虎變 未占 有孚
대인(大人)이 호랑이처럼 변하면(虎變) 점을 치지 아니하여도(未占) 신임을 얻을 수 있다(有孚)

  대인은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덕으로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니 유순하던 그 사람이 호랑이처럼 변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아래 효의 표범과는 다른 나아감이다. 점을 칠 필요도 없다는 것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절대적으로 신임을 얻고 천명을 받을 것이다.

 

君子 豹變 小人 革面 征 凶 居貞 吉
군자(君子)가 표범처럼 변하여(豹變) 소인(小人)이 두려움에 낯을 바꾸어(革面) 나아가면(征) 흉(凶)하니 끝까지 멈추는 것(居貞)이 길(吉)하다.
  대인은 표범으로는 변할 수는 없기에 대인이며, 군자는 표범으로도 변할 수도 있기에 군자이다. 호랑이는 사람들이 저절로 받들고 따르기에 신임을 얻은 것이지만, 표범은 위협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덕으로 감화시키는 것과 힘으로 굽히게 만드는 것과의 차이이다. 소인들도 두려움으로 그렇게 나아가는 길은 반란을 따르는 것이니 끝까지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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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初九】利用爲大作 元吉 无咎

【六二】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永貞吉 王用享于帝 吉

【六三】益之用凶事 无咎 有孚 中行 告公 用圭

【六四】中行 告公從 利用爲依 遷國

【九五】有孚惠心 勿問 元吉 有孚 惠我德

【上九】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 凶

  보태주는 것(益)은 하늘의 일을 대신 맡은 것이니 무거운 짐을 진 것이다. 공자께서 “나는 군자는 급한 곳을 구제해 주고 부유한 곳에는 보태주지 않는다고 들었다”[논어 제6편 옹야 제4장]고 하셨으나, 제자 염유가 부유한 계씨의 재산을 늘려주자 “나의 제자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울려 성토해도 좋다”[논어 제11편 선진 제17장]고 진노하셨다. 모자라면 보태주고 넘치면 덜어내는 것은 하늘의 도(道)이며, 그 바른 천도(天道)를 따르는 것이 군자의 사명이다.

 

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보탬(益)은 시간이 지나야 결실이 있다(利有攸往) 큰 내를 건너듯(利涉大川)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

  보태주는 것은 단번에 끝맺는 것이 아니라 꾸준함이 필요한 일이다. 마음 또한 재물에 얹어 보태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앞의 손(損)괘에서 말한 거친 베옷을 입은 사람에게 거친 베옷을 입고(曷之用) 다가가는 것이다. 주위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과단성 있게 나아가야 한다.

 

利用爲大作 元吉 无咎

크게 만들어 나가도록 사용해야 이로우니(利用爲大作) 근원적으로 길하고(元吉) 허물이 없다(无咎)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방법으로 현명하게 보태주라는 의미이다. 오직 짐승처럼 먹여주는 방법을 사용하기 보다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방법이 좋고, 쌀을 보태주기 보다는 농사를 짓도록 해 주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다.

 

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永貞吉 王用享于帝 吉

누군가가 보태주는 것은(或益之) 십붕의 비싼 거북점으로도(十朋之龜) 어긋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니(弗克違) 계속 끝까지 길할 것이다(永貞吉). 왕이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도(王用享于帝) 길(吉)할 것이다.

  혹익지(或益之)는 앞의 손(損)괘에서 나온 기적과 같은 횡재를 말한다. 천명(天命)으로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간접적인 베품이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제물을 사용하는 것이기에 사사로이 쓰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益之用凶事 无咎 有孚 中行 告公 用圭

보태주는 것은(益之) 흉한 일에 사용하면(用凶事) 허물이 없다(无咎) 신념을 가지고(有孚) 중용을 따라(中行) 공익을 도모하고(告公) 임금의 뜻이 닿는 곳에 사용하라(用圭).

  모자라면 채워주고 과하면 덜어내는 중용의 도를 따라야 한다. 나에게 넘치는 재물을 흉한 일을 당한 이웃을 도와주는 것으로 사용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임금의 뜻은 빈부의 지나친 치우침이 없이 백성이 고루 부유하고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中行 告公從 利用爲依 遷國

중용을 행하고(中行) 공익을 따라(告公從) 의지해야 하는 곳에 사용하면 이로우니(利用爲依) 나라를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遷國).

  대학의 “한마디 말이 대사를 그르치기도 하고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한다”[대학 제9장 제국치가]는 가르침이 연상되는 효이다. 나의 얼마되지 않는 기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라를 변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먼 길은 가까운 길부터 시작해 나아가며, 높은 산도 낮은 곳부터 올라가야 한다.

 

有孚惠心 勿問 元吉 有孚 惠我德

베푸는 마음에 신념이 있다면(有孚惠心) 묻지도 말라(勿問)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신념이 있다면(有孚) 나의 덕을 보태는 것(惠我德)이다.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속셈을 갖고 베푸는 경우도 있다. 사건을 무마하고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 위해 재산을 내 놓는 대기업 총수도 있으나, 그러한 보태줌이 아니라 마음으로 즐거워 베푸는 것은 어디에 물을 필요도 없이 길한 것이라고 한다.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덕을 보태는 것이라고 한다.

 

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 凶

보태주는 것이 막히거나(莫益之) 누군가 공격하면(或擊之) 마음을 세우되 방법을 고집하려 하지마라(立心勿恒) 흉(凶)하다.

  베푸는 선한 일이 방해 받는 경우가 있다. 장애인을 내세워 뒤에서 그것을 착취하는 소위 ‘앵벌이’의 경우처럼 나의 베품이 이용당하게 되는 것을 알았다면, 마음은 변함없이 세워놓되 그 방법을 고집하려 하면 흉하다고 한다. 결국 악을 돕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보태주는 것은 크게 만들어나가도록(用爲大作) 현명하게 보태주어야 하고 이용당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보태주어야 하니, 그래서 하늘은 그 임무를 맡길 만한 사람을 골라서 사명을 맡기는 것일 것이다. 현명한 방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보탬을 주라는 것이지 외면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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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大壯 利 貞
【初九】壯于趾 征 凶 有孚
【九二】貞 吉
【九三】小人用壯 君子用罔 貞 厲 羝羊觸藩 羸其角
【九四】貞 吉 悔亡 藩決不羸 壯于大輿之輹
【六五】喪羊于易 无悔
【上六】羝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无攸利 艱則吉

  주역뿐 아니라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담긴 글에 나타나는 소(小)와 대(大)는 가정과 사사로움을 도모하는 의미의 소(小)와 나라와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의미의 대(大)로 나누어 구분한 것이다. 그래서 소인(小人)은 가정을 가장 중시하는 곧 필부필부(匹夫匹婦)하면서 사는 일반 백성들을 의미하고, 대인(小人)은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사명을 다하는 사회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대장(大壯)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대(大)에 중점을 둔 왕성한 힘이며(壯)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힘이니 이어지는 진(晉)괘의 권력을 이루기 위한 힘을 의미한다.

 

大壯 利貞
왕성한 기운(大壯)은 결실을 맺고(利) 마감하기(貞) 위해 쓰이는 기운이다.
  대장(大壯)은 결실을 맺고 마감을 하기 위한 기운의 발산이니, 대축(大畜)괘에서 말한 대축리정(大畜 利貞)과 같은 의미이다. 소축(小畜)은 성장기(亨)에 의욕 해야 하는 일이며, 대축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해서(利貞) 이뤄야 하는 일이라고 했었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기 위한 사용해야 할 소장(小壯)의 기운이라면 성장기(亨)이겠지만 사회를 위한 기운의 발산이므로 리정(利貞)인 것이다.

 

壯于趾 征 凶 有孚
기운이 발에 모여 있을 때(壯于趾) 나아감(征)은 흉(凶)하다. 뜻이 있어야 한다(有孚)
  기운이 발에 있음은 행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육체적 힘에 치우쳐 있는 것을 말한다. 발(육체적 힘)과 머리(정신적 힘)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강한 물리적 힘으로 나아가는 것은 흉하니 정신가치가 뒷받침되지 않는 권력찬탈에 불과한 쿠테타가 오래갈 수 없는 까닭이다.

 

貞 吉
마지막(貞)이 되어야 길(吉)하다.

  대장(大壯)괘에서 말하는 강한 기운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한 리정(利貞)의 힘이니, 곧 정점에서 가장 강력하게 터트리는 힘의 발산이다. 힘을 집중하여 남김없이 발산하여야 길하다. 배수의 진을 친 군대를 이기기가 힘든 까닭은 남김없이 힘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小人用壯 君子用罔 貞 厲 羝羊觸藩 羸其角
소인은 육체적 힘만 사용하려 하고(小人用壯) 군자는 그물만 사용하려 하면(君子用罔) 끝까지(貞) 위태롭다(厲) 새끼양이(羝羊) 울타리를 들이받고(觸藩) 그 뿔이 처량하게 된다(羸其角)
  열매를 맺고 마감하는 강한 힘의 집중은 혼자서 애쓰는 힘이 아니며 함께 뭉쳐서 행사하여야 할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소인과 대인이 따로따로 분산된 힘을 발산하고 있으니 위태로운 것이다. 양은 제사에서 희생양으로 삼는 동물인데, 힘없는 민초(백성)를 말함이다. 소인과 군자가 힘을 조화롭게 뭉치지 못하면, 애꿎은 백성들의 희생만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貞 吉 悔亡 藩決不羸 壯于大輿之輹
마침내(貞) 길(吉)해지고 후회가 없게 되려면(悔亡) 울타리가 터져서(藩決) 처량함이 없어지고(不羸) 큰 수레를 타고 큰 기운이 터져나가게(壯于大輿之輹) 해야 한다.
  음과 양의 조화로움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있는 벽이 곧 울타리이다. 그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음양의 조화가 이뤄지면 거침없이 큰 기운이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상호간에 조화를 도모하여 중용(中庸)의 도를 지켜야 한다.

 

喪羊于易 无悔
길 잃은 양은 돌아오게 해야(喪羊于易) 허물이 없다(无悔)
  큰 기운이 퍼져 나가기 위한 음양조화를 위해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요, 뜻하지 않은 희생 역시 있었을 것이다. 길 잃은 양은 두려워 도망친 백성을 말함이니 다시 제자리로 데려와 보살펴주어야 허물이 없다. 어떻게 데려와야 하는가? 자공이 정치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면 멀리서도 저절로 모여들 것입니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6장]라고 하셨다. 길 잃은 양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바른 정치로 도(道)를 밝히는 것이다.

 

羝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无攸利 艱則吉
새끼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아(羝羊觸藩) 물러나지 못하고(不能退) 나아갈 수도 없다면(不能遂) 유리할 게 없지만(无攸利) 그 어려움이 있음으로(艱則) 길(吉)하다.
  길 잃은 양이라면 어디서 헤매고 있는지 몰라서 구해주러 찾아 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하니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진퇴양난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양이라면 길 잃은 양을 찾는 것 보다는 쉽게 구할 수가 있다. 길 잃은 양은 속박되지는 않았으나 구해주기 어려운 양이며, 오도가도 못하게 된 양은 속박되어 보다 어려움에 처한 양이지만, 큰 기운이 터져나가 성취가 된 후에는 가장 먼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려움이 있는 것이 오히려 길(吉)한 까닭이다. 그래서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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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遯 亨 小利貞
【初六】遯尾 厲 勿用有攸往
【六二】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九三】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九四】好遯 君子吉 小人否
【九五】嘉遯 貞吉
【上九】肥遯 无不利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것이 바른 도(道)이다. 둔(遯)괘는 숨는다는 뜻이나 비겁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용기있게 물러나는 것이다. 둔(遯)은 집에서 기르던 돼지(豚)가 우리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공자께서 “함부로 위험한 나라에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 거처하지 않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살아있으면 나와 일해야 하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숨어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3장]고 하셨으니, 외형은 물러남이지만 결과는 바른 곳으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둔(遯)괘이다.

 

遯 亨 小利貞
물러나야(遯) 할 때는 성장기(亨)여야 하고 결실기와 마감기(利貞)에는 득이 적다(小)
  물러나는 것도 때를 놓치면 어렵게 된다. 일을 시작하여 성장하는 단계에서 물러나는 것이어야지 이미 결실기와 마감기로 접어드는 때 물러나는 것은 발을 너무 깊게 담근 상태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초창기에 과단하게 발을 빼야 한다. 시기가 늦으면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배신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遯尾 厲 勿用有攸往
미련을 남겨두면(遯尾) 위태로우니(厲) 시간이 지나가도록 기다리지 말라(勿用有攸往)
  많은 경우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기다리는 것은 좋지 못하다. 물러나야 할 때라면 미련을 두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과단하게 물러나야 한다.

 

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황소의 가죽처럼 굳세고 질기게 물러나야 하니(執之用黃牛之革)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물러나겠다는 말을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莫之勝說)
  미련을 남기지 말고 황소의 가죽처럼 단호하게 물러나야 한다.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여 혼란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맹자』의 ‘부유하고 귀한 것이 흔들 수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것이 바꾸게 할 수 없고 위협과 무력이 굽히게 할 수 없다’는 말처럼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물러나야 할 때라면 과단성 있게 물러나야 한다.

 

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물러남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係遯) 병통이 있고(有疾) 위태로울 수도 있다(厲) 대비하여 신첩을 길러야(畜臣妾) 길(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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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러나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어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물러나기가 어렵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다섯번째 괘 수(需)괘에서 말한 발을 빼기 쉬운 모래밭에 있는 것(需于沙)이 아닌 발을 빼기 힘든 진흙밭에 있는 것(需于泥)이다. 진흙밭에 거주해야 한다면, 만약을 대비하여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신첩의 신(臣)은 남자종 첩(妾)은 여자종을 의미한다.

 

好遯 君子吉 小人否
즐겁게 물러나는(好遯) 군자는 길하나(君子吉) 소인은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小人否)
  즐거운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는 이유는 밀려나는 것이 아니요,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요,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니 곧, 바른 길(道)을 따르는 것이기에 즐겁고 그 결과도 길(吉)할 것이다. 중용에 “군자가 중용을 행하는 것은 군자로서 때와 상황을 헤아려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인이라면 오직 ‘물러난다’는 사실만 아프게 직시하여 즐거울 수 없을 지 모른다.

 

嘉遯 貞吉
칭찬속에 물러나니(嘉遯) 끝까지 길하다(貞吉)
  물러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고 아름답게 여기니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물러나는 마음을 알아주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구나. 달아날 때 홀로 뒤쳐져 있다가 성문을 들어올 때 말을 채찍으로 때리며 뒤를 지킨 것이 아니라 말이 빨리 달리지 않았다고 하는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15장]라고 칭찬하셨다.

 

肥遯 无不利
물러나더라도 풍족하다면(肥遯)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풍족은 단지 물질적 풍족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니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던 은자(隱者)들처럼 탐심을 없애니 오히려 더 커진 마음의 풍족함이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지으신 ‘도산잡영(陶山雜詠)’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돌우물이 맛있고 시원하니 진실로 풍족하게 물러날 수 있는 장소를 베풀어 주셨도다(石井甘冽 允宣肥遯之所)’라는 표현에서 이 비둔(肥遯)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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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初六】浚恒 貞 凶 无攸利

【九二】悔亡

【九三】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九四】田无禽

【六五】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上六】振恒 凶

  항(恒)괘는 변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곧 신념을 뜻한다. 지나치게 강한 신념은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지만, 신념이 없으면 자기 생과 삶을 개척해 나가지 못하고 이목에 이끌려 피동적으로 따라다니는 삶을 살게 만든다. 신념은 맹목과 맹신이 아니다. 귀를 닫고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귀를 더 열고 눈을 더 크게 떠야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의무필무고무아(毋意毋必毋固毋我)'하셨다고 하니, "맘대로 짐작하는 것, 반드시 하려는 것,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 자신만 옳다고 하는 것" 이 네 가지 병통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논어 제9편 자한 제4장]

 

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신념(恒)을 세우는 것은 성장기여야(亨) 허물이 없고(无咎) 성숙기와 마감기로(利貞) 시간이 지나가면 결실을 맺게 된다(利有攸往)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모범의 틀에 갇혀있으면 1등을 할 수는 있겠지만 수동적인 틀에 박힌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공자께서는 "함께 배운다고 반드시 같은 길을 가지는 않으며, 같은 길을 간다고 반드시 같은 성취가 있는 것이 아니며, 같은 성취가 있다고 반드시 같은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9편 자한 제30장]고 하셨다. 사람은 기계부품처럼 같을 수 없으니 젊을 때 자아를 확립하고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을 때의 확립된 자아와 신념은 식견이 부족하여 냉정하고 정확할 수는 없을 것이나 허물은 아니다. 성숙기 마감기를 향해 시간이 지나가면, 식견이 높아지고 그 신념이 바르게 확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浚恒 貞 凶 无攸利

지나치게 고집하면(浚恒) 끝(貞)이 흉(凶)하니 유리할 것이 없다(无攸利)

  준항(浚恒)은 조금의 융통성도 용납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고집스러움을 뜻한다. 논어에 “큰 절개는 엄격해야 하지만, 작은 절개는 때론 들고 날 수가 있다”[논어 제19편 자장 제11장]고 하였다. 제자 안회가 죽자 공자께서도 지나치게 슬퍼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상심하였느냐? 그러나 이런 사람을 위해서 지나치게 상심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서 지나치게 하겠느냐?”[논어 제11장 선진 제9장]고 하셨다. 조선조의 유학은 작은 절개가 들쑥날쑥하면 마음이 방종해져 큰 절개를 해친다고 주장하며 엄격한 원칙론을 고수하였으니, 주역에서 말하는 준항(浚恒)이 아니었는가 싶다.

 

悔亡

그러나 후회는 없을 것이다(悔亡).

  지나친 원리원칙주의자는 외적으로는 흉하나 내적으로 후회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맞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옳다고 믿기 때문에 고수하는 것이기 때문인 까닭이다.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신념 없이 순종하는(不恒其德) 것이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하고(或承之羞) 끝내(貞) 어려움을 당하게 한다(吝)

  신념이 있는 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자아가 확립되고,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신념 없이 순종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고 끝내 어려움을 당하니, 생각이 없어 갈대처럼 휘둘리는 사람보다는 지나쳐 융통성이 없을지라도 신념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田无禽

사냥을 해도(田) 잡은 짐승이 없을 수는 있다(无禽)

  신념으로 인해 먹는 문제 즉, 경제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는 있다. 순종하는 사람과 지나치게 고집하는 사람 모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신념 없이 순종하면 수치스럽게 되니 곧 정신적인 아픔을 당하고, 지나치게 신념을 고집하면 고고함은 지킬 수 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런 심리적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신장은 욕심이 많은데 어떻게 굳셀 수 있겠는가?”[논어 제5편 공야장 제11장]라고 하셨다.

 

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그 덕이 한결같아(恒其德) 끝까지(貞) 변치 않으면 부인은 길하겠지만(婦人吉) 남편은 흉하다(夫子凶).

  그래서 부인의 뜻을 꺾기가 더 어려울 지도 모른다. 남편은 집안과 가정을 위해서 그 뜻을 쉽게 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양의 의무감은 남자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역의 손(損)괘에서는 가정이 없는 충복(得臣无家)을 얻는다는 효사가 등장한다. 가정이 있으면 완전한 충복이 되기가 어렵다. 가정의 생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인의 덕은 가정을 단속하는 것이기에 변치 않아야 길하고, 남편의 덕은 소축기(가정), 대축기(사회)를 거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변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결같으면 흉하다라는 해석도 좋은 것 같다.  

 

振恒 凶

신념을 흔드는 것(振恒)은 흉(凶)하다.

  신념은 내면적인 자존이다. 외부에서 영향을 주어 신념을 가지도록 하거나 신념을 굽히도록 강제하는 것은 흉할 뿐이다.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삼군대장의 권력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일개 보통사람이라도 그 의지를 빼앗을 수는 없다”[논어 제9편 자한 제26장]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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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

고전을 읽을 때 극복하지 않으면 길을 헤메는 관문이 있다.
중(中)의 관념이 서지 않으면 혼돈으로 빠져든다.
중(中)에서의 직선은 가둠을 관통하는 있는 것을 말한다.
갇힌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통(通)하여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엇으로 그 가둠을 관통하고 있을까?

공자께서 "증삼아 내가 말하는 도는 하나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자 증삼은 "그렇습니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이 "뭔 말이야?"라고 묻자, 증삼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지극한 서(恕)야" 라고 하였다. [논어 제4편 이인 제15장]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을 동(同)하여 관통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중(中)은 가둠의 안과 밖을 마음으로 일관하여(恕) 관통하는 「진리」이다.

원효대사께서 마신 해골에 담긴 물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다.

사물은 변한 것이 없는데 (해골에 담겨있던 물은 똑 같은 물이었지만)
눈으로 보고나니 마음이 변하더라.

이 일화를 「일체유심(一切唯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대학』 역시 마음(心)을 강조한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대학 제7장 정심수신]


중(中)은 마음으로 통(通)하여야 알 수 있는 「진리」이므로
노엽고, 두렵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걱정스러우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공자의 말씀도, 석가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모두 머리에서 지워내어야 할 것이다.

 

용(庸)은 이러한 중(中)의 진리」에 조화롭게 맞추어 대응하는 「응답이다.
정이의 "바뀌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라는 설명은 오해를 일으키기 딱 좋다. 주희의 "일상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묶어 설명하려고 하니, 진순처럼 "오곡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은 만고의 일상이라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갈수록 이해하기만 어렵게 하였다.

 

위 속에 음식이 알맞게 차 있도록 유지시키는 것이 중용(中庸)은 아니다.
그러려면 그 중간을 맞추기 위해 하루종일 조금조금 먹고만 있어야 한다.
밥을 많이 먹고, 다시 많이 부족해지면 다시 과하게 채우는 것이 밥먹는 중용이다.
그래서 배가 부를 때를 만나고, 적당히 좋을 때를 만나고, 배가 고플 때를 만난다.
각 시기(時)에 알맞는 응답은 모두 다르다. 100년치 밥을 한꺼번에 먹고 한꺼번에 배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중용의 응답은 시공(時空)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즉, 용(庸)은 일반적 인식으로는 바뀌는 것으로 설명해야 오해가 덜하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지능도 모두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10대, 20대, 30대가 다르다.
이러한 다름을 분별(分別)하여 가장 적합하게 맞추어 조화롭게 응답하는 것이 중용이다.
병(病)을 기준으로 똑같은 약을 쓰는게 아니라,
각 사람의 특성을 기준으로 다른 처방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동양의학이었고,
역시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 제자들마다 그 다른 특성을 감안하여 다르게 가르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한 마디는 그 한마디 말과 글에만 갇혀서 이해하려면 오해가 생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무엇을 위해서 그러한 대화를 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증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대화는 상상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중(中)의 사유는 안과 밖을 통(通)하는 것이며,
중용(中庸)의 사유는 분별(分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어리석은 중생아 개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왜 모르느냐고 한다.
그렇지만 개와 사람이 교감하기 위한 육체사랑을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는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기도 하다는 중(中)이며,
진리에 반응하는 응답은 개와 사람이 다르다는 분별(庸-용)이다.

현상계가 만들어 내는 거짓에 갇혀있는 중생들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현상계가 만들어내는 것은 허상이라는 깨달음에 갇혀서,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무지(無知)도 생각을 가두고, 지(知)도 생각을 가둔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지(知)도 중용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까닭을 알겠구나. 지자(知者)는 과(過)하고 우자(愚者)는 부족하구나” [중용 제4장]


결국 유가의 진리는 세속과 초월의 한 쪽이 아니라 통(通)하는 것이기에,
속세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높고 원대한 이론으로 나아가 고원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로 돌아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것이 곧 도(道)이기도 하다.
현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도(道)이기는 하여도, 중용의 도리에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자기와 남은 별개의 분별(分別)된 개체이면서 또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에
개인(個人)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옷을 벗고 싶어도 아무곳에서나 나체로 있으면 안되며 예(禮)를 지켜야 한다.
물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중용에 따라 그 적합한 응답은 변한다.

그런데,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이 중용의 생기발랄함과 융통성이 없어져 버렸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말하였다 “큰 덕은 한계를 지켜야 하지만, 작은 덕은 들고 나는 것이다 [논어 제19편 미자 제11장]

송대 이후의 학자들이 이 장을 비난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작은 덕이 어찌 들고 날 수 있겠는가? 작은 덕이라고 해서 들쑥날쑥한다면, 곧 마음이 방종해져서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는 등등의 실랄한 비난을 받았다. 아마도 자하의 말이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 같다. 그러나 자하가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송대이후의 학자들도 고원함과 깨끗함을 추구할 수록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고원함은 사람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송대 이후의 학자들은 소인은 멸시하여 멀리하고, 선비라는 자들끼리만 어울리는 계급과 권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단발령이 일제의 강제라고 해서 선비들이 반발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의 명령이라고 해도 따를 수 없었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정절을 유린당한 여인처럼 실성하여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 목을 매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어찌 유학만 고여서 막히고 가두어 졌겠는가? 사찰과 교회도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과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가두고 막아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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