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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28. 23:41

하늘의 시간 건(乾)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9. 28. 23:41

맹자가 제나라에 전해오는 말을 소개하였다 [맹자 공손추 상 3.1]

출중한 지혜를 갖는 것보다 유리한 기회를 잡는 것이 낫고,
좋은 농기구를 갖는 것보다 적절한 농사철을 기다리는 것이 낫다.

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다른 경우가 많다.
겨울에 씨를 뿌리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미숙할 때 움직이려 하지 말라’는 잠룡물용(潛龍勿用)과
‘물러나야 할 항룡일 때 물러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긴다’는
항룡유회(亢龍有悔)는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하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참 많이 쓰는 말이 있다. “바빠서 말이지…”
옛날 사람들도 이렇게 바쁘게 느끼며 살아갔을까? 옛날의 노래, 옛날의 춤과 같은 문화적 산물로 유추해보면 일견 오늘날보다는 여유로운 듯도 한데, 옛 글들을 보면 역시 바쁘다는 글이 많다. 장자가 말했다.[장자 제물론]

사람은 만물과 서로 다투기만 하고
말달리듯 지나가면서도 멈추고자 하지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종신토록 허덕여도 성공을 볼 수 없고
고달파 쓰러지면서도 되돌아가야 할 바를 알 지 못하니
참으로 애처롭지 않겠는가!

과거에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오늘날 군대는 천국일거라 여기기도 하지만, 더 좋은 환경 같은데도 여전히 힘들어 하고 자살을 하기도 한다. 옛날의 군대나 오늘날 군대나 옛날의 시간이나 오늘날의 시간이나 힘들고 바쁘기는 마찬가지란 말일까? 조선시대에도 행복하게 살았던 여인들이 있고, 풍족한 오늘날에도 불만 속에 사는 여인들이 있다.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와의 갈등’은 드라마나 소설의 소재로 자주 사용되던 얘깃거리였다.
돈 많지, 잘 생겼지, 마음씨 좋지,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A를 마다하고, B가 좋다는 아이 때문에 부모는 경악한다. 단 하나만 B보다 A가 못한 것을 말해보라며 애원하기도 한다. “완벽한데도 정이 안 가!”     
공자가 말했다.

삼군대장의 권력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일개 보통사람의 그 의지를 빼앗을 수는 없다 [논어 9.26]


사람은 합리적 사고로만 결정하고 느끼는 로봇이 아닌 까닭에,
하늘의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일정하지만, 사람이 만나는 시간의 속도는 일정할 수 없다.
결국 변화(易)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자연의 변화는 저절로 변하는 것이며,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 같은 ‘느끼는 변화’는 바깥이 아니라 자기 마음 내부에서 변화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유명한 광고문구가 있다.
더러운 세상을, 배려심이 없는 남편을, 말 안 듣는 아이에게 변화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易)를 원한다면 자기에게서부터 변화를 찾아가야 한다.
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행복하다고 하며 감동하는 사람도 있으니,
과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같은 세상을 두고,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리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자연의 변화(易)와 바꿀 수 있는 느끼는 변화(易)를 분별하고,
바꿀 수 있는 변화라면, 나로부터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 주역이 말하는 변화(易)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주역은 미숙한 잠룡일 때는 성급히 움직이려 하지 말아야 하고,
물러나야 할 항룔일 때 물러나지 않으면 후회를 남긴다고 가르치는데,
과연 잠룡인지, 항룡인지는 어떻게 안다는 것일까?

본래, 스스로 잠룡인지, 항룡인지를 알면서도 서둘거나 고집하는 경우만을 주역이 상정한 것은 아니다.
남들과 세상은 모두 다 잠룡인 줄 알고, 항룡인 줄 아는데,
자기 스스로는 잠룡이 아니라고 여기고, 항룡이 아니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역시 마음이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당한 시간이 되었다는 것, 밥을 먹어야 할 때인지, 잠을 자야 할 때인지는 본래 스스로 가장 잘 안다.
그러나, 먹지 않고 사는 ‘독립영양인간’이 있다는 뉴스를 본 후 안 먹다가 죽었다는 사람도 있더라.
신이 부르시니 가야 할 때가 되었다며 자살했던 신도들도 있더라.

결국, 주역의 판단은 중용(中庸)의 철학을 향해서 흘러간다.
나를 돌아보지만, 나만 보는 것이 아니다.
너로부터 돌이켜도 보지만 너의 시선에 전적으로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는 중용(中庸)이라는 균형의 기준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적당한 때를 판단해야 하는 것은, 주관(나)에서 시작하여 객관(너)으로 판단하며 내가 감수한다(나)는
[나 → 너 → 나]의 3단 구조를 갖는다.

참고로 이 3단 구조는 유가철학의 큰 근본이다. 논어의 제1편 학이 제1장을 예로 들어본다.

배워서 때때로 익혀보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먼 곳일지라도 찾아주는 벗 생기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리니 어찌 군자이지 않겠는가?

[나의 기쁨→너와 더불어 함께하는 즐거움→자존을 잃지 않는 나]
유가철학의 개념들은 모두 이 [나 → 너 → 나]의 구조로 얘기할 수도 있다.

왜 효도를 하나요? [내가 기쁘기 때문입니다 → 부모님께서 알아주시면 함께 즐겁구요 → 부모님께서 몰라주셔도 여전히 기쁘며 원망이 생길 리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알아주기를 바라고 효도하겠다는 것이 아니니까요... 

【爻辭】


元亨利貞
(시간이 맞아야)
씨앗에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죽게 된다

【初九】

潛龍勿用 잠룡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말라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
【九三】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군자가 되어 종일 최선을 다하고
어두움을 경계한다면 위태로울지라도 허물이 없다
【九四】 或躍在淵 无咎 도약을 신중히 헤아리며 연못 속에 있어야 허물이 없다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하늘을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
【上九】 亢龍有悔 오르려고만 하는 용은 후회가 있다
【用九】 見群龍无首 吉 용의 무리에 우두머리가 없으니 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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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ebi.textcube.com BlogIcon 깨비 2010.10.03 2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젊은애들 버릇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때부터 있었다고 하지요. 오늘도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obbaya.com BlogIcon 오빠야닷컴 2010.10.04 15: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와! 반갑습니다. 깨비님! 안녕하시고, 건강하시죠? 전에 주신 댓글은 너무 늦게 봐서, 인사도 못 드리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__) 시간이 좀 날 것 같아서, 주역의 각 테마를 조금 정리를 해 볼까 했는데, 다른 할 일이 생겨나는 징크스가 있네요 ㅠ.ㅠ. 깨비님께서 읽어주셔서 정말 기쁘고 고맙습니다. 참! 젊은애들 버릇없다는 말이 그리스 때부터 있었다는 가르침도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십시오. 꾸우벅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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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人于野 亨 利涉大川 利 君子 貞
【初九】同人于門 无咎
【六二】同人于宗 吝
【九三】伏戎于莽 升其高陵 三歲不興
【九四】乘其墉 弗克攻 吉
【九五】同人 先號咷而後笑 大師克 相遇
【上九】同人于郊 无悔

  공자께서는 "여러 사람이 종일 모여 의로운 일을 논하지 않고, 작은 꾀를 나누기를 좋아하고 있으니 참으로 곤란하구나"[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7장]라고 하셨다. 사람이 모이면 그 힘이 배가 된다. 강한 힘이 생기면 세상의 도(道)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나아가야지, 그 힘으로 권력을 탐하고 부를 탐하고 모인자들끼리 붕당을 형성한다면 세상은 어지러워 질 것이다. 정당정치도 동전의 양면성이 있다.

 

同人于野 亨 利涉大川 利君子貞
어려움속에서(于野) 모이는 것(同人)은 성장하는 원동력이니(亨) 과감하게 큰 내를 건너면 이로울 것이다(利涉大川). 군자는 끝까지 이로울 것이다(利君子貞).
  평화로울 때의 모임은 사교적인, 즐기기 위한 모임일 것이나, 어려움에 당면해서 사람이 모이는 이유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위한 의미의 모임일 것이다. 함께 뭉쳐서 과단성 있게 끝까지 나아가면 이롭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적인 힘의 행사이기 때문이다.

 

同人于門 无咎
문앞에서 모이는 것(同人于門)은 허물이 없다(无咎).
  문밖으로 나가는 것은 곧 같은 목표를 향해 행동으로 움직이기 위한 것이니, 군자(君子)들이, 대인(大人)들이 더불어 잘 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同人于宗 吝
마루에서 모이는 것(同人于宗)은 어렵다(吝).
  마루에 안주하는 것은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뜻하니, 곧 소인(小人)들이 사회 전체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모이는 것을 뜻한다. 안주하여 지키려는 모임이다.

 

伏戎于莽 升其高陵 三歲不興
우거진 풀숲에(于莽) 병장기를 숨기고(伏戎) 높은 언덕을 오르려 하면(升其高陵) 3세대를 걸쳐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三歲不興).

  당당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풀숲에 숨어 병장기를 숨기고서 높은 언덕을 오르려는 것은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려 모이는 것을 말한다. 기습을 하려고 병장기를 숨기고 있으니, 바르지 못한 목적을 위해 술수를 써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어찌 이로울 것인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적인 모임이 아니라 그 힘으로 부정한 일을 꾀한다면 3세대에 걸쳐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재앙을 받을 만하다.

 

乘其墉 弗克攻 吉
모여서, 그 높은 성벽을(其墉) 오를 수 있는(乘) 힘이 있어도 공격하여 쓰러뜨리지 않는 것(弗克攻)이 길(吉)하다.
  모임은 힘을 배가 시킨다. 그러나 그 모인 힘을 바탕으로 단지 힘을 행사하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현대사회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인정되는 이익집단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 주역의 시각이다. 공자께서도 “군자는 긍지를 가져도 다투려 하지 않고, 어울리기는 하여도 붕당을 만들지는 않는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2장]고 하셨다. 모여서 행사하는 힘은 방어적이어야 하며, 전체의 이익을 위한 힘의 행사여야 한다.

 

同人 先號咷而後笑 大師克 相遇
사람이 모이면(同人) 사람들 앞에서는 크게 울부짖고(先號咷) 뒤에서 웃게 되기 마련이니(後笑), 크게 싸우고 대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大師克) 서로간에(相) 화해(遇)를 도모해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가식이 있고 과장이 있게 된다. 사람들 앞에 서면 바른 도리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그 만큼의 인격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이 모이면 당연히 있게 되는 것이 위선이고, 과장이고, 다툼이니 그것을 경계한 말이다.

 

同人于郊 无悔
변방에 모여있는 것(同人于郊)이 허물이 없다(无悔).
  그렇게 싸우고 대립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모임이라면, 나서지 않고 외곽에 있는 것이 허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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否之匪人 不利君子 貞 大往小來
【初六】拔茅茹以其彙 貞 吉 亨
【六二】包承 小人吉 大人否 亨
【六三】包羞
【九四】有命无咎 疇 離祉
【九五】休否 大人 吉 其亡其亡 繫于苞桑
【上九】傾否 先否後喜

비(否)는 ‘막히다’라는 뜻이다. 비괘의 괘상은 하늘과 땅이 서로 강건하여 교합하지 못하고 막히는 괘상이다.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만, 도저히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하늘과 땅이 서로 강건하게 자리하여 가는 길이 다르니, 어울려 소통될 수 없는 만남이다. 서정윤 시인의 싯구가 떠오르는 괘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否之匪人 不利君子 貞 大往小來
헤어짐은 사람의 할 일이 아니라며(否之匪人) 군자가 고집(貞)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不利君子) 큰 것을 보내고 작은 것을 얻는 것(大往小來)이다
.
  앞의 태(泰)괘에서 어울림은 작은 것을 보내고 큰 것이 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비괘에서 어울림을 고집하는 것은 큰 것을 보내고 작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라 한다. 군자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서는 헤어져야 한다. 

 

拔茅茹以其彙 貞 吉 亨
띠풀 하나를 뽑으면 뿌리가 얽힌 여러 포기가 함께 뽑히니(拔茅茹以其彙) 그렇게 사람들과 엮여야 끝까지(貞) 길(吉)하고 형통(亨)한 것이다. 
  앞 편의 태(泰)괘에서 말한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엮여서 더불어 나가야 마땅하며, 진리인 것은 틀림없다.

 

包承 小人吉 大人否 亨
그렇다고 무조건 순종하여(包承) 어울리는 것은 소인에게는 길할 것(小人吉)이나, 대인은 그러한 사귐은 거부하여야(大人否) 발전이 있다
.
  어울리고 함께 하기 위하여 눈을 막고 귀를 막고 무릎을 꿇는 것을 뜻한다. 집안을 가장 중시하는 소인이라면 그렇게라도 억지로라도 어울려야 좋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익(公益)을 도모하는 대인은 그러한 어울림은 거부하여야 형통하다. 공자께서도 "가는 길이 같지 않으면 함께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40장]고 하셨다.

 

包羞
무조건 순종하는 것(包)은 수치스러운(羞) 일이다.
  어울리기 위해서 굽히는 것은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이다. 그러나 소인은 그 수치스러움을 감당하고서라도 어울려 가정을 위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자와 대인은 그런 어울림이라면 거부하여야 한다. 물론 소인보다 군자와 대인이 우월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명과 맡은 역할이 다른 사람일 뿐이다.

 

有命无咎 疇 離祉
사귀지 못함이 운명(有命)이라면 허물이 없다(无咎). 절도를 지키며(疇) 헤어짐이(離) 복(祉)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
  하늘은 똑 같은 생명을 주었지만, 토끼와 호랑이는 어울리지 못하게 하셨다. 천성적으로 어울릴 수 없도록 한 것이 하늘의 명(命)이라면 따라야 한다. 명(命)이 다르다면 헤어지는 것이 오히려 복이다. 떠나야만 하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다. 보내 주어야 한다.

 

休否 大人 吉 其亡其亡 繫于苞桑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休否) 대인에게는(大人) 길(吉)하다. 죽을 듯 죽을 듯 하더라도(其亡其亡) 질긴 뽕나무뿌리에 매어놓아야 한다(繫于苞桑)
 
   대인(大人)은 본시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이별을 해야만 하는데 어찌 가슴이 찟어질 듯 아프지 않겠는가? 시간을 쉬어가는 것이 하나의 지혜다. 마치 죽을 것처럼 아프더라도 단단하게 단도리를 잘 해야 한다. 뽕나무뿌리는 어떤 식물보다 질기고 견고한 뿌리로 알려져 있다.

 

傾否 先否後喜 
막힘이 뒤집힐 것이니(傾否) 헤어짐으로 시작해(先否) 기쁨을 찾는 것이다(後喜).
  지나가는 시간앞에서 모든 것은 변하게 된다. 20살때 죽을 것 같았던 이별이 40때가 되어 생각해 보면, 좀 더 선명히 기억나는 꿈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인생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도 하는 것일게다. 이별이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고, 변화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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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 小往大來 吉 亨
【初九】拔茅茹以其彙 征 吉
【九二】包荒用馮河 不遐遺朋亡 得尚于中行
【九三】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 无咎 勿恤 其孚于食有福
【六四】翩翩 不富 以其鄰 不戒以孚
【六五】帝乙歸妹 以祉 元吉
【上六】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 吝

  태(泰)괘는 어울리는 것을 뜻한다. 어울리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사회를 떠나서 개인은 존재할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는 법이다. 수치상으로는 선진국의 수준에 근접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경제력에 맞는 수준의 교양과 인성을 갖춘 것 같지는 않다. 불명예스럽게도 우리는 세계에 나가면 얼글리 코리안(ugly korean)으로 통한다고 한다. 자공이 공자께 한마디 말로서 일생동안 행할만한 것이 있느냐고 묻자, 공자께서는 서(恕)라고 하셨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4장]. 즉 마음(心)을 같게(如)하는 것을 말함인데, 그것이 어울리는 도(道)이며,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의 길이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은 그 하나의 행동양식이다.

 

泰 小往大來 吉 亨
어울림(泰)은 작은 것을 보내고 큰 것이 오게 하는 것이니(小往大來) 그래야 성장(亨)할 수 있다.
  간혹 무인도에 떨궈 놓아도 잘 살 것 같은 연예인의 순위를 정하고는 한다. 그러나 무인도에 혼자만 떨궈 놓아도 잘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상상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외로움과 고독함이다. 교도소에서 죄수를 독방으로 보내는 것은 징벌이지, 편하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 아니다. 사람은 어울려야 하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

 

拔茅茹以其彙 征 吉
띠풀 하나를 뽑으면 뿌리가 얽힌 여러 포기가 함께 뽑히니(拔茅茹以其彙) 그렇게 사람들과 엮여서 나아가야(征) 길하리라(吉).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맹세가 단순한 호기가 아니다. 지구상의 많은 생명들 중에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동물이 있고 그렇지 않는 동물이 있다. 사람은 무리를 지어 어울려야 하는 생명체다. 단독으로는 호랑이의 힘을 당해낼 수 없고, 치타의 빠르기를 당해낼 수 없어도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까닭은 뭉쳐서 힘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包荒用馮河 不遐遺朋亡 得尚于中行
작은 나룻배로 거친 물살을 건너는(包荒用馮河) 과감한 용기도 중요하지만 친구를 멀리하거나 잃지 않아야(不遐遺朋亡) 바른 길로 나아가는데(于中行)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得尚).
  모두가 NO라고 할 때, YES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소신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 소신을 펼치기 위해 고립되고 고독해지기 보다는 친구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하니, 모두 함께 YES하도록 만들어 어울려 나가는 것이 좋다. 통하지 않는다고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보다는 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또한 현명할 것이다. 사악함이 무리를 흔들 수 있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불가능한 것을 애쓰지 말고 은거하라는 은자의 충고에 아파하며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 사람이 함께 숲에서 어울려 생활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내가 인류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고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논어 제18편 미자 제6장]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 无咎 勿恤 其孚于食有福
비탈지지 않은 평지는 없고(无平不陂) 돌아오지 않는 떠남은 없으니(无往不復) 고난으로 끝나더라도(艱貞) 허물이 없다면(无咎) 걱정하지 말라(勿恤). 신념을 추구했다면(其孚) 그렇게 살았음에(于食) 복이 있음이다(有福).
  허물(咎)은 내적인 것이요, 길흉(吉凶)과 명예는 외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돌아보아 허물이 없다면 그 결과가 신통치 않더라도 상심하지 말라는 말이다. 만사가 의도한대로 되는 것 만은 아니니, 바른 신념을 추구했다면 결과를 따져 근심할 필요는 없다. 과정이 더 중요할 것이다.

 

翩翩 不富 以其鄰 不戒以孚
훨훨 나는(翩翩) 새의 무리는 부유하지 않더라도(不富) 그 이웃과 함께 하니(以其鄰) 신념이 있음으로써(以孚) 두려울 것이 없는 법이다(不戒).
  새는 인간에게 많은 교훈과 감동을 주는 동물이다. 특히 기러기는 그 아름다운 사랑과 가족애 때문에 남자가 조각하여 베필을 맞으려 가져가기도 하였다. 무리를 지어 함께 이동하는 새들은 부유함으로써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차별이 없고 견줌이 없다. 함께 하는 것 그것을 좋아하며 무리를 지어 어울린다.

 

帝乙歸妹 以祉 元吉
제을이 딸을 시집보내는 것(帝乙歸妹)은 복(以祉)으로써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제을(帝乙)은 딸을 문왕에게 시집보냈다. 주공과 문왕은 공자께서 흠모하던 공자 이전 시대의 성인들이기도 하다. 혼사로서 문왕과 인연이 맺어져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은 하늘이 맺어준 복이요, 하늘이 맺어준 어울림이다. 아무나 문왕과 혼사로서 어울릴 수는 없을 것이니, 근원적으로 길한 어울림이다.

 

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 吝
마른 도랑으로 인해(于隍) 성이 무너졌어도(城復) 전쟁을 하려 하지말라(勿用師). 고을에 찾아가 엎드려 도움을 청해도(自邑告命) 끝내(貞) 어렵게(吝) 될 것이다.
  성을 쌓고 그 주위로 도랑을 만들고 물을 채우는 이유는 적이 쉽게 성을 오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도랑이 말라있는 이유는 마을 사람들과 성주의 어울림이 각박한 까닭이다. 이웃과 어울려 그 마음을 나누지 못했는데 어떻게 어려울 때 도움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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履虎尾 不咥人 亨
【初九】素履 往 无咎
【九二】履道坦坦 幽人 貞吉
【六三】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 爲于大君
【九四】履虎尾 愬愬 終吉
【九五】夬履 貞 厲
【上九】視履 考祥 其旋 元吉

  리(履)괘는 밟는다는 뜻이니, 아프게 하는 말을 뜻한다. 공자께서는 “말 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교만이라 하고, 말할 때가 되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 하고, 안색과 상황을 살피지 않고서 말하는 것을 맹목이라고 한다”[논어 제16편 계씨 제6장]고 하셨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履虎尾 不咥人 亨
호랑이 꼬리를 밟았으나(履虎尾) 사람을 물지 않으니(不咥人) 성장(亨) 하게 된다
.
  호랑이는 사람을 물어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상징하니, 곧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절대 권력자로 보아도 될 것이다.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것을 묻자 공자께서는 “속이지 말고, 거스를 수도 있어야 한다"[논어 제14편 헌문 제22장]고 하셨다. 절대 복종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꼬리를 밟는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고 충언(忠言)을 하는 것을 말한다. 꼬리를 밟았는데도 물지 않았으니 성장하게 된다. 충심이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종때 조광조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시작해서 바른말로 신임을 받아 대사헌에 이른 것을 연상하게 한다.

 

素履 往 无咎
소탈하게 밟는다면(素履) 계속하여도(往) 허물이 없다(无咎)

  급하거나 거칠게 밟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 ‘말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한다’는 가르침을 새기게 된다. 충분히 기다려주고 부득이할 때 비로소 꼬리를 밟아야 하니, 그렇지 않다면 무시하는 것이며,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履道坦坦 幽人 貞吉
일관되게 밟아야 하니(履道坦坦) 그윽한 사람(幽人)이어야 끝까지 길하다(貞吉).

  일관성이 있는 그윽한 사람은 가치관이 곧게 서 있는 사람을 말한다. 곧기만 한 곧음은 옳지 못하다. 섭공이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고발하였다’며 고을 자랑을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고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기니 진정한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8장]라고 하셨다. 공자는 판박이가 되는 학문을 경계하고 융통성을 강조하였으니, 공자의 직속 제자들은 개성이 모두 살아 있었다.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 爲于大君
한쪽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眇能視) 절름발이도 밟을 수 있지만(跛能履)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면(履虎尾) 사람을 물 것이니(咥人) 흉하다(凶)
.
  조화롭게 보지 못하고, 조화롭게 나아가지 못하니, 곧 안목이 없고 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제 분수를 모르고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을 뜻한다. 호랑이가 물어버릴 것이다. 충심이 없기 때문이다.

 

武人 爲于大君
무인이라면 군주에게(于大君) 속해 있어야(爲) 한다
.
  절대 충성을 해야 하는 지위에 있는 자가 무인이다. 공자께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직분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4장]고 하셨으니, 무인이 꼬리를 밟는 것은 직분을 망각하고 나서는 것이라, 취지는 바르다 할지라도 군주에게는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履虎尾 愬愬 終吉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履虎尾) 놀라고 두려운 마음(愬愬)이어야 끝내 길하다(終吉).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는 것은 예(禮)를 지켜서 충언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 미운 사람이 있는지 묻자 자공은 “추측하여 다 안다는 사람, 불손함을 용기라 하는 사람, 들추어내는 것만 정직이라 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논어 제 17편 양화 제24장]고 하였다. 두려움이 없는 용맹한 사람이 예(禮)와 의(義)를 망각하면 난을 일으키고 도적이 될 뿐이다.

 

夬履 貞 厲
거친 직언(夬履)은 그 끝이(貞) 위태롭다(厲).
 
  바른 말도 기술이 필요하다. 진정한 신하와 친구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욕을 하거나 나무라는 방법은 아니어야 한다. 자유가 말하길 “군주를 섬기면서 간언이 지나치면 부끄러움을 당하고, 친구를 대하면서 충고가 지나치면 소원하게 된다”[논어 제4편 이인 제26장]고 하였다. 시간을 두고 진중히 지켜보다가 그의 능력으로 알지 못하고 있거나, 고치지 못하겠다 싶은 것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권해야 하는 것이다. 훗날 원시유학이 추구했던 이러한 중용의 선을 벗어나 ‘충신은 욕을 당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거나 ‘죽음으로써 간한다’와 같은 거친 방법으로 변질되어 갔다.

  아랫사람에게에게 하는 충고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인격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젊은 사람은 경외해야 하니 어찌 내일의 사람이 오늘의 사람만 못하다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십, 오십세가 되어도 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젊은 사람보다 경외할 필요가 없다”[논어 제9편 자한 제23장]라고 하셨다. 무조건적으로 나이로 들먹이게 된 까닭은 것은 공경(恭敬)의 의미를 잘못 전달해온 소인유(小人儒)들 때문일 것이다.

 

視履 考祥 其旋 元吉
밟는 것을 살펴(視履) 좋고 나쁨을 가려(考祥) 바로잡으면(其旋)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것은 아프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은 아프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바른길로 오도록 도와주려는 뜻이다. 그 도움은 눈높이를 맞추어 다가가야 한다. 시리고상(視履考祥)은 이렇게 밟으니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나고 이렇게 밟으니 군주가 느끼게 되는지를 헤아려 보고 관찰해 보는 것을 뜻한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기술(技術)이 필요한 법이니,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안색과 상황을 살펴서 말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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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小畜 亨 密雲不雨 自我西郊.
【初九】復自道 何其咎 吉
【九二】牽復 吉
【九三】輿說輻 夫妻反目
【六四】有孚 血去惕出 无咎
【九五】有孚 攣如 富以其鄰
【上九】既雨既處 尚德 載 婦貞厲 月幾望 君子 征 凶

  여러 번 언급했지만 소(小)는 가정(家)을 의미한다. 그래서 소인(小人)은 한 가정 꾸리기에 온 힘을 다하는 필부필부(匹夫匹婦)하는 보통의 백성을 가리키는 의미라고 했었다. 소축(小畜)의 괘는 가정에서의 중요한 이룸이니 곧 임신을 뜻한다. 『효경』에서 '신체를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선조의 생명을 건강한 상태로 연속시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맹자』에서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불효'라고 하는 것도 역시 비슷한 의미이다. 과거에 소인유(小人儒)들이 불임의 책임을 여성에게로 떠넘겨 부인을 핍박하고 축첩의 명분으로 삼았던 창피했던 역사가 있었다. 임신은 가족의 축복임과 동시에 또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축복이기도 하다. 주역이 9번째 순서로 소축(小畜)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과거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였기 때문일 것이다.

 

小畜 亨 密雲不雨 自我西郊
임신(小畜)은 성장기(亨) 때의 일이다. 구름이 빽빽하나 비가오지 않는 까닭은(密雲不雨) 스스로(自) 서쪽교외에서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我西郊).
  무슨 일이건 때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 주역의 첫번째 가르침이었다. 자식을 보는 소축(小畜)은 젊었을 때 이뤄야 할 일이다. 반면에 33번째의 사회적 성취를 뜻하는 대축(大畜)은 결실기(利)와 마감기(貞)의 일이다. 삶을 마감할 시점에 자식을 보려고 하는 것은 시간의 도(道)를 어긴 것이니, 마땅히 때에 맞게 힘써야 할 일이 달리 있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으로 곧 어두움, 어려움을 상징하는 방향이다. 구름이 빽빽한데도 비가 오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 하면 비가 오는지 어두워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성교육을 하고 접할 수 있는 정보량이 많지만, 옛날에는 그러하지 못했던 까닭이었을까?

 

復自道 何其咎 吉
스스로 그 도를 깨닫고 돌아오면(復自道)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何其咎)? 길할 것이다(吉)
  본능적으로 음양조화 도(道)를 따라 알게 된 것이다. 즉 어떻게 하면 부부관계를 잘 할 수 있는 지를 스스로 깨닫고 밝은 동쪽으로 돌아왔으니 길하다.

 

牽復 吉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끌려 돌아와도(牽復) 길하다(吉).
  타인의 손에 이끌려 제자리(동쪽)으로 돌아오는 것도 길하다. 묻지도 않고 혼자 끙끙 앓는 것이 가장 좋지 못한 것이니, 부끄러워 하지 말고 타인의 조언과 도움을 구해도 좋으니, 곧 리견대인(利見大人)하라는 뜻이다.

 

輿說輻 夫妻反目
수레바퀴가 틀어지면(輿說輻) 부부가 반목하기 마련이다(夫妻反目).
  수레바퀴가 틀어지는 것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함이다. 스스로 제 자리로 오건, 도움으로 제 자리로 오건 돌아와야 한다. 수레바퀴가 틀어져 있으면 결국 부부가 반목하게 된다.

 

有孚 血去惕出 无咎
마음이 있고(有孚) 피가 흘러(血去) 부부관계의 두려움이 사라져야(惕出) 허물이 없다(无咎)
  첫 경험이 지난 후라는 의미이거나, 월경을 지나 가임기가 되었을 때라는 의미이거나 모두 해석이 가능하나 어떻게 해석해도 주역의 뜻을 심각하게 해치지는 않을 것 같다. 소축(小畜)을 이루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거시적으로는 젊을 때(亨)여야 하고 미시적으로는 가임기여야 한다.

 

有孚 攣如 富以其鄰
마음으로(有孚) 단단히 묶어두면(攣如) 그 이웃과 더불어 그 부를 나누게 될 것이다(富以其鄰).
  마음 즉, 돈독한 사랑으로 단단히 묶여져 있다면 축복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씨족, 부족단위의 공동체로 이루어졌던 과거에는 임신은 더욱 동네의 경사로 여겨 이웃이 함께 기뻐하고 축복해주었을 것 같다.

 

既雨既處 尚德 載 婦貞厲 月幾望 君子 征 凶
이미 비가 오고 그치기가(既雨既處) 계속되니 자랑할 덕(尚德)이 생긴다. 부인을 업고 기뻐하지만(載) 부인은 아이의 출생까지 염려가 계속된다(婦貞厲) 배가 불러 보름달이 되었는데(月幾望) 군자(君子)가 부부관계로 계속 나아가면(征) 흉하다(凶)
  비가 오고 그치는 것은 부부관계가 계속적으로 원활히 이뤄지고 있음을 말함이다. 당연히 오래지 않아 임신이 될 것이고, 남편은 부인을 업고 기뻐하게 되는데, 오히려 부인은 염려가 계속된다. 아이가 무탈하게 태어날 때까지 근심이 계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게다. 월기망(月幾望)은 보름을 넘긴 것을 말함이니, 곧 배가 불러온 것을 상징한다. 그런데도 군자가 계속 나아가니 흉하다. 현대 의학에서도 태아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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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比 吉 原筮元 永貞无咎 不寧方來 後夫 凶
【初六】有孚 比之无咎 有孚盈缶 終來有它 吉
【六二】比之自內 貞 吉
【六三】比之匪人
【六四】外比之 貞 吉
【九五】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上六】比之无首 凶

경쟁은 사람이 모이면 이뤄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경쟁은 다툼(訟)과는 달리 상대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므로 긍정적인 것이다. 그래서 비(比)는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공자께서도 “군자는 겨루지 않지만 활쏘기는 예외이니 서로 읍하여 예를 갖추고 당에 올라 시합한 후 벌주를 마시는 것이다. 이런 것이 군자의 경쟁인 것이다”[논어 제3편 팔일 제7장]라고 하셨다. 명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남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던 ‘남에게 요구하지 않고 나에게 요구한다’는 취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比 吉 原筮 元永貞 无咎 不寧方來 後夫 凶
경쟁(比)은 길하니(吉) 처음 점을 친(原筮) 마음으로 처음부터(元) 끝까지(貞) 계속되면 허물이 없을 것이나(无咎) 편안하지 않아(不寧) 다시 점을 치려는 마음이면(方來) 그 후에는 장부라도(後夫) 흉할 것(凶)이다.
  주역의 네 번째 몽(蒙)괘에서 말한 처음 점을 치는 마음과 재차 점을 치는 더렵혀진 마음을 빗대어 경쟁의 길흉을 논하고 있다. 처음에 순수한 경쟁으로 시작한 마음이 끝까지 계속되어야지 길하고 허물이 없지만, 그 마음이 바뀌어 승부욕이 생긴 이후라면 흉하다고 한다. 성리학이 리(理)와 기(氣)의 관계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던 것과 같이 ‘행동이 마음을 이끌 수 있는가’는 쉽게 답하기 힘든 논제일 것이다. 일례로, ‘착한 행동을 의식 없이 하다 보면 착한 마음이 생기는가’의 문제인데, 어쨋건 주역은 행위가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처음에는 훈육하는 마음으로 뺨을 한대 때렸다가 자기도 모르게 동물적 폭력성이 발동하여 아이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한 교사의 동영상이 유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경쟁이란 행위를 시작하여도 그 행위에 내재한 승부욕에 굴복하지 말고 처음의 순수성을 끝까지 지켜야 길하다고 한다.

 

有孚 比之无咎 有孚盈缶 終來有它 吉
신념을 가진(有孚) 경쟁이어야 허물이 없다(比之无咎) 신념을 질그릇을 넘치게 할 정도로(有孚盈缶) 돈독히 하면 경쟁이 끝나도 상대가 남아있게 될 것이니(終來有它) 길하다(吉).
  신념이 있는 경쟁이란 승부욕이 배제된 예컨대, 함께 지혜를 모아 찾아가는 그러한 경쟁이다. 질그릇을 넘치게 할 정도로 넉넉한 마음이 아니라면, 모르는 것도 아는 것으로 둔갑시키고 한양을 못 가본 이가 한양을 가 본 이를 이기려 하니 곧, 경쟁이 아니라 다툼(訟)이 되어버린다. 점을 재차 치는 더럽혀진 마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공자께서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라고 하셨다.

 

比之自內 貞 吉
경쟁이라는 것은(比之) 자기 내면(自內)과의 승부라면 끝까지(貞) 길하다(吉).
  경쟁의 본질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찾지 않고 그 탓을 남에게 돌리면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 이미 여러번 언급하였지만, 공자께서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比之匪人
경쟁이라는 것은(比之) 사람이 우열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匪人).

  실력이 절대적으로 이기는 것이라면 아마도 스포츠 경기는 재미가 없어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브라질이 늘 월드컵에서 우승하지는 못하는 이유는 반드시 전력으로만 우열이 가려지지는 않고 "승운"이라는 알 수 없는 힘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사람이 장악할 수 없는 것이 또한 경쟁의 결과이다.

 

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사냥 같은 큰 경쟁에 있어서도(顯比) 임금은 세 방향만 막고(王用三驅) 한 곳은 남겨두는 법이다. 설령 사냥감을 놓쳐도(失前禽)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배려이니(邑人不誡) 이런 경쟁이 길하다(吉)
  세 방향을 막고 한 곳을 남겨두는 것은 그 책임을 자기에게서 찾으려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사냥감을 놓친 백성탓이 아니라 한방향을 막지 않도록 한 임금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자 한 까닭이다. 경쟁에서 뒤쳐진 자가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 길하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학생들의 시험은 싸움이 아니라 경쟁이다. 그런데, 경쟁에서 뒤쳐지면 두려워 해야 한다. 승자독식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比之无首 凶
그러나 경쟁에서 우열을 정하지 않는 것(比之无首)은 흉하다(凶)

  우열을 정해주지 않으면 경쟁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역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순조로운 변화를 말한다. 그러나 경쟁이 시작되어 우열을 정하지 않는다면 끝맺음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니 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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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訟 有孚 窒惕 中 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初六】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九二】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六三】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九四】不克訟 復即命 渝 安貞吉
【九五】訟元吉
【上九】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송(訟)괘는 다툼을 의미한다. 싸움은 필요악이다. 공자께서도 "좋구나 좋구나를 연발하는 사람은 덕을 해치는 사람이다"[논어 제17편 양화 제13장]고 하셨으니,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그러나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우고, 싸움이 지나쳐서 문제가 된다. 본래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군자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자기에게 요구하며,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여 억지로 끌고 오려는 이는 아니다. 감화되어 저절로 따라오면 함께 벗이되어 즐겁고, 따라오지 못하면 보살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즐거운 자이다. 그런데도 왜 싸워야 할 때가 생기는가?

  강도가 약자들의 재물을 뺏고 죽이려 할 때는 맞설 힘이 있다면 맛서야 한다. 강도에게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강요하여 강도와 싸우려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해를 당하게 될 사람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행위만이 죽이는 것이 아니다. 우물에 빠질려는 아이를 방치하는 방관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과 남에게 맞서는 것이 모순은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에 간섭하려고 싸울려는 것인지, 물리쳐야 할 해악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분별력에 있을 것이다.  

 

訟 有孚 窒惕 中 吉 終凶
다툼(訟)은 추구하는 가치가 있어야(有孚) 하는 것이니, 사사로운 이익을 배척하여(窒惕) 중용의 도(中)를 지키면 길하나(吉) 패자가 생기면 흉하다(終凶)
  어떤 신념을 위해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미워서 사람을 누르고 패배 시키기 위한 그러한 다툼은 좋지 못하다. 공자께서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있다”[논어 제4편 이인 제3장]고 하셨다. 사사로운 감정에 의거하여 나와 같으면 좋고, 나와 다르면 미워하는 그러한 호악을 경계한 까닭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의 바른 말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3장]는 것처럼 사사로움을 배척하여 중용의 도를 지켜야 길하다고 한다. 종흉(終凶)이란 마침(終) 곧, 끝장나는 자가 생기는 것을 말함이니 그것은 흉(凶)하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승자가 쓰러진 자를 내버려 두고 승리만 돌아보는 것이니, 마땅히 쓰러진 자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어야 하는 다툼이어야 한다. 모두 함께 잘 되기 위해 신념을 다툴 수는 있겠지만, ‘나 살고 너 죽어라’는 다툼은 곤란한 것이다.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대인을 만나봄이 이로우니(利見大人) 큰 강의 건너듯 과단성을 가지고 밀어부침은 이롭지 못하다(不利涉大川).
  신념도 그것이 아집일 수 있으니 자문을 구해보기도 하고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공자께서는 “무의무필무고무아(毋意毋必毋固毋我)”하셨다고 하는데 즉, ‘맘대로 해석하는 것, 반드시 하려는 것,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 자신만 옳다고 하는 것’ 이 네 가지를 결코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논어 제9편 자한 제4장]

 

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다툼은 오래 지속하지 않으면(不永所事) 소소한 말은 들을지라도(小有言) 마침내 길하다(終吉).
  질질 끌어서 가장 좋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다툼일 것이다.

 

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다툼에 굴복하여(不克訟) 돌아가 숨으면(歸而逋) 그 고을사람 3백호가 편안해지니(其邑人三百戶) 재앙이 없어진다(无眚)
  다툼에서 도망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주변사람 모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도망치는 자가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일 수 있다. 공자께서는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논어 제14편 헌문 제28장]고 하셨다. 결국 용기도 내면적 정서이니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참 용기가 아닌 것이다. 단속해야 할 것은 『중용』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내면의 마음의 움직임’일 뿐이다. 사람을 향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늘(자기양심)을 향한 부끄러움이 없어야 그 자가 용자(勇者)이다.

 

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다투고자 하는 본성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食舊德) 끝까지 극복하기 어려운 성향이지만(貞厲) 끝낼 수 있어야 길하니(終吉) 왕의 일을 맡는 큰일을 담당하여도(或從王事) 왕이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无成)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께서도 ‘본연지성’은 선하지만 태어나면서 받은 ‘기질지성’이 달라 선악의 가능성이 공존한다고 하셨으니, 태어난 사람마다 품성의 차이가 있음은 인정하신 것 같다. 유전적으로 강한 호전성을 물려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전적인 호전적 성향은 끝내어야 길하다고 한다. 그래야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무성(无成) 유종(有終) 할 수 있다고 한다. 곤(坤)괘에서 나온 것처럼 ‘왕의 일을 대신하여 공로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결과만을 원한다’는 뜻이다. 공자께서는 “군자가 용감하면서 의로움이 없으면 난리를 일으키게 되고, 소인이 용감하면서 의로움이 없으면 도둑이 된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3장]고 하셨으니, 호전성을 의로움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왕이 되려 할 것이다.

 

不克訟 復即命 渝 安貞吉
다툼에서 패하더라도(不克訟)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아(復即命) 승복(渝)하면 끝까지 편안하고(安貞) 길(吉)하다
  패자의 깨끗한 승복은 계속 다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다툼은 악을 물리치고, 신념을 펼치기 위한 것이어야지 서로 원수로 갈라서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툼의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것은 용기를 의로움으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장남이었던 정진은 아버지를 역적으로 내몰아 죽였던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고 훗날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정진의 진심을 속단 할 수는 없지만, 호랑이가 토끼를 낳지는 않는 법이니, 구차하게 살고자 한 까닭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訟元吉
다툼(訟)은 근원적(元)으로는 길한 것(吉)이다.
  다툼은 필요악이다.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우고, 싸움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유전적인 용감함도 근원적으로 좋은 것이다. 다만, 의로움으로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호전성이 지나치면 왕으로부터 큰 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或錫之鞶帶) 마침내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그 상을 세 번 빼앗기게 될 것이다(終朝三褫之).
  왕의 마음을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세 번이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까닭은 호전성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거침없는 용기는 근원적으로는 길하고 왕에게 큰 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자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툼 이후에는 왕을 비롯하여 세상 모두가 평화롭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전적 호전성을 억누르지 못하기에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상을 세 번이나 빼앗기게 되는 것이니, 용감함을 의(義)로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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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初九】需于郊 利用恒 无咎
【九二】需于沙 小有言 終吉
【九三】需于泥 致寇至
【六四】需于血 出自穴
【九五】需于酒食 貞吉
【上六】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 來敬之 終吉

  주역은 첫 괘에서 ‘잠용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마라’고 충고하면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때가 언제일까? 그에 대한 답이 되는 괘가 수(需)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청하지 않은 세 명의 손님이 찾아오면 때가 도래하였다고 하였으니, 곧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때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아 움직인다. 그러나 사막에 사는 동물도 있고 북극에 사는 동물도 있다. 스스로가 따뜻하다면 따뜻함을 좋아하는 사람(귀인)이 찾아올 것이요, 스스로가 차갑다면 추위를 좋아하는 사람(악인)이 찾아올 것이다. 결국 바르게 살면 그 바름(따뜻함)에 이끌려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공자께서는 “덕은 외로울 수가 없으니 반드시 이웃이 생긴다”[논어 제4편 이인 제25장]고 하셨다.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기다림(需)은 뜻이 있어야(有孚) 크게 형통하니(光亨) 끝까지 길하다(貞吉). 큰 강을 건너는 과단성을 가져야 이롭다(利涉大川)
  부(孚)는 주역에서 정말 자주 만나게 되는 단어다. 새가 알을 품는 것을 뜻하는 글자인데, 믿음, 신념, 마음, 사상 등등 적당하게 번역하기가 어렵다. 어쨋건, ‘생각 없는 것’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뜻을 추구하기 위한 기다림이어야지 생각 없이 시간만 보내는 것을 경계한 뜻으로 새기면 될 것이다.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리섭대천(利涉大川) 또한 주역 전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말이다. 큰 강은 ‘소통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것이니, 잘 소통되지 않더라도 건너라는 과단성을 의미하고 있다. 『맹자』의 "부유하고 귀한 것이 흔들 수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것이 바꾸게 할 수 없고 위협과 무력이 굽히게 할 수 없다"는 구절이 떠올려진다.  
 

需于郊 利用恒 无咎
장소를 벗어난 기다림(需于郊)이라면 뜻을 잃지않고 확고히 하여야 이롭고(利用恒) 허물이 없다(无咎)
  유비가 때를 기다리며 농사꾼으로 지내기도 했고, 흥선대원군이 바보 행세를 하며 세도가의 가랑이를 기어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러나 가슴에 품은 뜻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恒). 힘겨우면 쉽게 현실과의 타협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需于沙 小有言 終吉
모래밭에서 기다림(需于沙)은 소소한 비난은 있을지언정(小有言) 끝내 길하다(終吉)
  모래밭에서 기다리는 것은 쉽게 장소를 옮길 수 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교수를 꿈꾸던 사람이 잠시 곤궁을 벗어나려고 학원강사가 되었다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학원강사로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껴 ‘정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찾아간 것일 것이다. 모래밭과 진흙밭은 ‘강물’이라는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모래밭), 근접하여 있는(진흙밭) 거리의 차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需于泥 致寇至
진흙밭에서 기다림(需于泥)은 도적을 불러들이는 일이다(致寇至)
  진흙밭에서 기다리는 것은 쉽게 장소를 옮길 수 없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빠져 나오기 힘든 곳에 있는 것이니, 그런 장소로 나아가 기다리는 것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훔쳐가고 있는 도적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需于血 出自穴
피가 흐르게 되면(需于血) 스스로 굴 밖으로 나와야 한다(出自穴)
  혈(血)은 신변에 위협이 되는 위험이 닥친 것으로, 주역은 기다림을 고집하지 말고 굴 밖으로 나오라고 충고한다. 그 곳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으로 합리화 시키면서 고집을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 것일게다. 기다림은 수동적으로 웅크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어야 한다. 위험을 방관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需于酒食 貞吉
경제적 기반 속에서 기다려야(需于酒食) 끝까지 길하다(貞吉)
  술과 음식은 생계에 대한 걱정은 없는 것을 말한다. 과거 선비들이 산림에 묻혀서 처사형 학자로서 일생을 살 수 있었던 까닭은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공자께서 왜 다재다능한지를 질문 받고 “젊어서 곤궁했기 때문에 잡다한 기술을 배웠다”고 하셨다[논어 제9편 자한 제6장]. 성인께서도 뜻을 펼치기 이전에 생계를 먼저 돌아보신 것이다.  『상전』은 길한 까닭을 ‘중정(中正)하기 때문이다’고 해설한다. 유가(儒家)는 이로움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행복이 물질과 완전한 별개로 떨어져 있다고 보지도 않는 것이 유학의 시선이다. 때를 기다림도 최소한의 물질적 기반은 갖추어야 길할 것이다. 

 

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 來敬之 終吉
목적지로 나아감은(入于穴) 청하지 않은 세 명의 손님이 찾아오는 때이니(有不速之客三人) 그들을 공경으로 받들면(來敬之) 마침내 길하다(終吉)
  세 사람의 손님은 천지인(天地人)이다. 궁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람 즉, 귀인이라고 부르는 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세 명의 손님을 공경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하니, 하늘과 땅과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라는 주역의 당부도 담겨있다. 입우혈(入于穴)을 피냄새가 진동하여 빠져나왔던 그 위험한(血) 곳으로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삼인(三人)을 많은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해도 통(通)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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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初六】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 吝
【九二】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六三】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六四】困蒙吝
【六五】童蒙吉
【上九】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몽(蒙)괘는 몽매함, 어두움을 뜻하는 괘다. 순조롭게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을(貞) 수 있는 원형리정(元亨利貞)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건(乾)괘 구삼(九三)효의 '군자(君子)가 되어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乾乾) 것'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익힐 습(習)자가 어미새의 날개짓을 따라하는 새끼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배움은 날개짓을 보여주는 어미새의 가르침에서 출발을 한다. 그래서 주역의 몽괘는 주로 몽매함을 깨우쳐 주는 입장에서 효사를 서술하고 있다.

  한편, 주역의 첫 4괘가 독립적이고, 순차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배워(蒙) 자신을 닦고, 때가 되어(乾) 사람을 만나고(屯) 사람을 만나 제 자리로 나아가고(坤) 그래서 다시 나아갈 때가 도래하고(乾)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몽매함(蒙)은 성장기(亨)의 일이니 내가 동몽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匪我求童蒙) 동몽이 나에게 요구하여야 한다(童蒙求我)

  몽매함을 깨우쳐야 할 때는 성장기(亨)여야 한다. 배움도 배워야할 시간에 맞아야 한다. 동몽(童蒙)은 몽매한 어린아이이다. 그 어린아이가 자발적으로 몽매함을 깨뜨리려 다가와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어린아이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주입식으로 교육함은 바르지 않다는 뜻이니, 곧 공자께서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9장]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나아가려고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처음 점을 치면 미래를 알려주지만(初筮告) 계속 점을 치면 더럽혀지고(再三瀆) 더럽혀지니 알려주지 않는다(瀆則不告). 그렇게 점을 치려면 그쳐야 이롭다(利貞)
  처음 점을 치는 마음은 곧 호기심과 궁금함일 뿐이다. 그러나 계속 점을 치는 까닭은 의심하고 더 이로운 점괘를 원하는 욕심과 탐욕이 생겨난 때문일 것이다. 즉, 마음이 맑지 못하면 점도 배움도 소용없는 것이니 차라리 그치는 것이 이롭다.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 吝
몽매함을 깨우쳐 주는 것(發蒙)은 형인을 사용하면(用刑人) 이로우나(利) 그 속박을 풀어주어야 하니(用說桎梏) 형벌로만 나아가면(以往) 어렵게(吝) 된다. 
  발몽(發蒙)은 몽매함을 깨우쳐 스스로를 개발하게 하는 것이다. 형인을 사용함은 곧 매를 들어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을 말함인데, 그러한 교육이 본질적으로는 이로우나 그 엄격한 속박을 풀어주기도 해야 하니, 곧 채찍과 당근의 조화로운 교육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질(桎)은 손을 묶고, 곡(梏)은 발을 묶는 형구라고 한다. 지나치게 엄격해도 지나치게 달콤해도 바람직한 교육이 될 수 없다. 중용에 서야 한다.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몽매함을 아울러야(包蒙) 길(吉)하니 부인의 생각을 받아들여야(納婦) 길(吉)하다. 그래야 자식이 집안을 잘 이루게 된다(子克家)
  포몽(包蒙)은 몽매함을 함께 보듬어야 한다는 뜻이니 곧, 남편이 부인 의견도 받아들여서 함께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남자는 여성인 어머니로부터 몽매함을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다. 여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훗날 집안을 조화롭게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여자(女)를 취하려 하지마라(勿用取) 그 여자는 사내를 돈으로만 보아(見金夫) 있어야할 곳을 벗어날(不有躬) 것이니 유리할게 없다(无攸利)
  여자(女)는 몽매(蒙)한 여인을 말한다. 계모가 아니라 친모라도 본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부인(婦)이 될 자격이 없는 여자(女)이다. 있어야 할 곳은 자녀를 교육하는 어머니의 자리를 말한다. 몽매하여 남자의 돈만 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몽매한데, 어찌 자식의 몽매함을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困蒙吝
몽매함이 곤궁하면 소용없다(困蒙吝)

  배움에 뜻이 없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아이들을 말함이니, 그런 아이들에게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공자께서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10장]고 하신 말씀을 떠 올리게 한다.

 

童蒙吉
차라리 동몽(童蒙)이어야 길(吉)하다
  배움에 뜻이 없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곤몽의 아이들은 차라리 동몽으로 남겨두는 것이 길하다는 것이다. 애쓰면 애쓰는 사람도 따라야 하는 사람도 힘들고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다. 이 효사를 ‘어린아이의 순순함을 간직하게 해야 하는 것이 길하다’로 해석하거나, ‘동몽처럼 늘 가르침을 청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하는 것이 길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몽매함 깨뜨리는 것(擊蒙)은 도적이 되는 것은 이롭지 않고(不利爲寇) 도적을 방어하는 것이어야 이롭다(利禦寇)
  격몽(擊蒙)은 율곡 이이 선생의 『격몽요결』의 서문에서 언급한 학문이 나아갈 방향을 의미한다. 도적은 사람의 내면에 잠재한 악(惡)성이다. 악성을 없애는 공부가 아니라면, 배운 지식은 도적질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다. 도적을 방어하는 것은 곧 마음속에 도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함이니, 선성(善性)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유학에서의 배운 선비는 그 배움으로 부족한 자를 도와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 자이다. 그래서,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는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 인을 짐져야 하니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어서야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어찌 멀지 않겠는가?[논어 제8편 태백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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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屯 元亨利貞 勿用 有攸往 利建侯
【初九】磐桓 利居貞 利建侯
【六二】屯如邅如 乘馬班如 匪寇婚媾 女子貞不字 十年乃字
【六三】即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 幾 不如舍 往 吝
【六四】乘馬班如 求婚媾 往 吉 无不利
【九五】屯其膏 小貞吉 大貞凶
【上六】乘馬班如 泣血漣如

  준(屯)괘는 만남을 뜻하는 것으로, 건(乾)괘에서 말한 순조로운 원형리정(元亨利貞)을 위해 대인을 만나는 것(利見大人)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시켜도 무방할 것 같다. 屯을 '둔'으로 읽기도 한다. 주역은 첫 괘에서 시간(하늘)의 이야기를, 두 번째 괘에서 자리(땅)의 이야기를 세 번째 괘에서 만남(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는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고, 커서는 가정과 사회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한자로 풀면 사람(人)은 하나가 하나를 받쳐주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 받쳐주는 근원이 되는 만남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사람은 때가 되면 저절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오직 사람의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이다. 만남의 성질이 음과 양의 만남이기에, 준괘의 효사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을 예로 들고 있을 것이다. 양과 음은 만나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억지로 이룰려고 해서도, 서둘러서도 안된다. 

 

屯 元亨利貞 勿用 有攸往 利建侯
만남(屯)이 있어야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貞) 된다. 그러나 애쓰지 마라(勿用) 시간이 흐르면(有攸往) 자연스레 이뤄지는 것이니, 그보다 제후를 세우는 큰 뜻(建侯)을 펼치는 것이 이롭다(利)
  부모의 만남도 연인의 만남도 자식의 만남도 친구의 만남도 모두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 곧 인연(因緣)이 있어서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애쓰지 말라고 한다. 엄밀히 구분하면 혈연적인 만남은 한계지어진 곤(坤)괘의 뜻이며, 연인과 친구와의 만남이 준괘과 의미하는 만남일 것이다.

  고대 중국은 천자가 모든 천하를 지배하여 다스릴 수 없기에 각 지역에 제후를 세워 정치를 맡겨 관리하던 봉건체제로 운영되었다. 제후는 그 지역의 왕이었지만 천자에게는 신하였다. 과거 조공을 받치던 우리나라를 중국의 제후국이었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이러한 중국의 전통적 지배체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어쨌건 제후를 세운다는 것은 천자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제후를 세우듯, 큰 뜻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만남에 애쓰지 말고 큰 뜻을 펼치는데 애쓰라는 말이다.

 

磐桓 利居貞 利建侯
큰 돌을 놓아(磐桓) 멈추어야 이롭고(利居貞) 제후를 세우는 큰 뜻을 펼치는 것이 이롭다(利建侯)
  반환(磐桓)은 큰 돌을 상징하니, 고인돌을 반환이라고도 했다. 꼼작할 수 없게 큰 돌로 막아 멈추라는 말은 사랑에 방황하고 흔들리지 말라는 말이다. 과거에도 사랑의 방황은 고인돌만큼 크고 무거운 돌을 쌓지 않으면 막기 힘든 것이었나 보다. 큰 뜻을 펼치는데 진력하라는 가르침을 첫 효사부터 다시 강조하고 있다.

 

屯如邅如 乘馬班如 匪寇 婚媾 女子貞不字 十年乃字
사랑(屯如)에 혼란하여(邅如) 말을 타고 따라가면(乘馬班如) 도둑이 아닌데도(匪寇) 혼인을 청하는데(婚媾) 여자가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다(女子貞不字). 10년은 지나야 허락을 하게 된다(十年乃字)
  말을 타고 따라가는(班) 것은 지나치게 빨리 서두는 것을 말한다. 도둑이 아님은 나쁜 사람이 아님을 말한다. 사람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급하게 서두는 까닭과 억지로 이루려는 까닭에 여자의 허락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10년은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것을 말하니,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시간이다. 주역은 지나치게 서둘러 나아갔어도 또한 억지로 이루려고 나아갔어도 10년이란 세월을 인내할 수 있다면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공자께서는 “어질지 않은 사람이라면 궁핍한 가난을 오래 견딜 수 없고, 풍요를 오래 누릴 수도 없다[논어 제4편 이인 제2장]”고 하셨으니, 10년으로 상징되는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음은 이미 성취를 이룬(제후를 세운)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即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 幾 不如舍 往 吝
사슴을 잡으러(即鹿) 몰이꾼이 없이(无虞) 숲으로 들어가면(惟入于林中) 군자라도(君子) 한번 그러면(幾) 숲을 나오지 못하는 법이니(不如舍) 가면(往) 어렵게 된다(吝)
  우(虞)는 사냥할 때 새와 짐승을 좇는 몰이꾼 역할을 하던 관리를 말한다. 사슴이란 여인을 상징한다. 10년을 기다리는 것이 정석이 아니라, 준비를 충분히 하고 사슴(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 정석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사람(사슴)을 얻기 위해서도 사람(몰이꾼)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만남을 두 사람의 의지로만 유지시킬 수도 없는 까닭이다. 대표적인 예가 집안 내의 갈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乘馬班如 求婚媾 往 吉 无不利
말을 타고 따라가면서(乘馬班如) 사랑을 얻으려 했더라도 혼인을 허락 받으면(求婚媾) 나아감이(往) 길하고(吉)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여인을 얻으려고 말을 타고 서둘렀지만 10년을 기다렸으니(十年乃字) 혼인을 허락 받게 된 것이다. 시간을 서둘렀지만 곧 시간을 기다릴 줄 알았으니 길하고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공자께서 "잘못을 하고서도 고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30장]고 하셨으니, 고치면 그것으로 좋다.

 

屯其膏 小貞吉 大貞凶 
이득을 만나는 것(屯其膏)은 과하지 않다면 괜찮을 것이나(小貞吉) 지나치다면 흉할 것이다(大貞凶)
  고(膏)는 살찌고 기름진 고기를 뜻한다. 만남은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며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조력자를 만나는 것이지, 독고동락(즐거움은 나눌 수 있어도 고통은 너 혼자해라)의 만남이 아니어야 한다. 심지어 독고독락(고통은 너 혼자, 즐거움은 나 혼자)의 만남을 꿈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득(고기)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고통을 나누는 정도의 작은 이득을 꾀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지나치게 큰 고기를 만나려고 한다면 끝내 흉할 것이다.


乘馬班如 泣血漣如
말을 타고 따라가는 것(乘馬班如)은 피눈물을 줄줄 흘리게 될 것이다
  말을 타고 급하고 격정적으로 따라간 것이 사랑이었고, 인연이었다면 10년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기에 혼인을 허락 받을 수 있어 길할 것이다.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 실체가 사랑이 아닌 이득(고기)를 만나러 한 것이기에 10년을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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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坤 元亨利 牝馬之貞 君子 有攸往 先迷後得主 利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初六】履霜 堅冰至
【六二】直方大 不習 无不利
【六三】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六四】括囊 无咎 无譽
【六五】黃裳 元吉
【上六】龍戰于野 其血玄黃
【用六】利永貞

  곤(坤)괘는 자리를 말하며 한계를 말한다. 건(乾)괘의 시간을 대하는 사람은 그 시간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기다릴 때, 나아갈 때, 물러날 때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곤(坤)괘의 자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부자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선진국에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나고,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지금 시대에 태어나고 등등, 이미 선택되고 정해진 것도 있는 법이다. 남자로 살기 싫어서 여자로 살려고 하는 것은 주역의 시각에서 보면, 자리의 도를 거스르는 잘못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대표적인 인간의 한계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일 것이다. 그럼 이러한 유한성을 인간은 어찌 대해야 하는가? 한탄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은 곧 하늘이 나에게 맡긴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왜 그런 한계를 주었는지에 대한 자리의 도(道)을 헤아리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찾았을 때, 즉 제 자리에 앉았을 때 비로소 삶을 가치 있게 이끌 수 있을 것이다.

 

坤 元亨利 牝馬之貞 
제 자리(坤)라야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순한암말처럼 죽게(牝馬之貞)된다 
  시간(하늘)만이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씨는 변화의 순리에 따르지 못하고 싹이 트지도 못하고 죽어버린다. 장소(坤) 역시 생성, 성장, 성숙(元亨利)의 변화의 법칙과 관계하게 되지만, 순한 암말처럼 마감 하는 것(牝馬之貞)이 특징적이다. 암말을 뜻하는 빈마(牝馬)는 유순함을 상징한다. 소리를 내거나 과시하지 않는 유순한 성질 때문에 마차를 끄는 말은 어미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순한 암말처럼 죽는 것은, 이어지는 효사에서 용의 전쟁으로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천수(天壽)를 다하고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君子 有攸往 先迷後得主 利
군자(君子)로써 시간이 지나면(有攸往) 처음에는 미혹하였어도 후에 주인을 얻게 될 것이니(先迷後得主) 이롭다(利)
  주인을 얻는 것(得主)은 곧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는 것을 말함이니, 군자(君子)가 되어 시간이 흐르면(有攸往) 처음에는 미혹하였어도(先迷) 곧 자리(사명)을 깨닫게 될 것(後得主)라는 뜻이다.

  『순자』「대략」에 다음과 같은 자공과 공자의 문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자공은 ‘할 일이 많아 힘드니, 군주를 섬기는 것 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어버이를 섬기는 것 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처자를 부양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친구와 관계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논밭을 경작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차례로 공자께 여쭈었다. 공자께서는 쉬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한탄하며 "그렇다면 저는 조금도 쉴 수 없는 것입니까?"하고 공자께 하소연을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저 들을 보아라. 흰 듯, 찬 듯, 막힌 듯하지 않느냐? 저 곳이 네가 쉴 곳이다" 자공이 감탄하며 말했다. "위대하구나 죽음이여! 군자도 쉬고 소인도 쉴 수 있도록 해 주는구나!" 하늘이 시간을 주어 세상에 보낸 이유는 할 일을 시키려 보낸 것이다. 쉬도록 해 주려 하였다면 죽음의 공간 속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유유왕(有攸往)은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풀었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서남이면 벗을 얻을 것이요(利西南得朋) 동북이면 벗을 잃으니(東北喪朋) 편안한 마감이어야(安貞) 길(吉)하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으로 밝은 곳을 상징하니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반대로 서쪽은 해가 지는 어두운 곳이니 쉽게 갈 수 없는 힘든 곳이다. 남쪽은 따뜻한 곳으로 올바른 곳을 상징하며, 북쪽은 추운 곳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곳을 상징한다. 그래서 힘들어도 옳은 곳(西南)으로 움직이면 친구를 얻고(得朋), 쉽지만 바르지 못한 곳(東北)으로 움직이면 친구를 잃을 것(喪朋)이라고 하니, 힘들어도 옳은 곳을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친구는 자리를 찾아 사명을 다하고 편안하게 죽는 것, 순한 암말처럼 죽음(貞)에 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履霜 堅冰至
서리를 밟게 되어서야(履霜) 단단한 얼음에 도달할 것을 안다(堅冰至)
  늙음을 빗대어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흰 머리가 나고 흰 수염이 나는 까닭은 이제 마감을 할 얼음(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하늘의 신호이다. 얼음이 어는 겨울이 올 것임을 방관하고 살다가, 서리를 밟게 되어서야 비로소 생의 무상함에 안타까워 하는 것이 바쁜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노랫말처럼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가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좀 더 일찍 해 보면 좋지 않을까?

 

直方大 不習 无不利
대지(直方大)의 도는 의욕하지 않으니(不習)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직방대(直方大)는 광활한 대지의 덕성을 묘사하고 있다. 땅은 모든 것을 차별없이 포용한다. 대추씨가 들어오건 사과씨가 들어오건 차별하지 않고 양분을 주고 키워준다. 사람의 자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주어진 한계를 의욕(習)하여 바꾸려고 하지 않아야 하니, 남자가 여자됨을 의욕하지는 않아야 한다. 배우고 힘써 의욕해야 하는 것은 자리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지처럼 이롭게 해 주는 역할[사명]을 다 하는 것에 두어야 할 것이다.

  유학의 명분론에 대한 의미와도 연결되는데, 명분론(名分論)이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계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기에 조금 보충하고자 한다. <여기를 참조> 하시기 바란다.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한계를 아는 현자(含章可貞)는 왕의 일을 따르게 되면(或從王事) 완성없이(无成) 마치려 한다(有終)
  함장(含章)은 바름을 머금은 것이며 가정(可貞)은 정해진 한계를 수용하는 것이니, 곧 자리를 알고 사명을 아는 바른 현자를 말한다. 왕의 일이란 만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려 바른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완성이 없다는 것(无成)은 그 공로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마침이 있다(有終)는 뜻은 올바른 결과만을 얻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세종실록』에 충녕대군을 잘 단속하라는 원경왕후의 말에 충녕대군 부인이었던 소헌왕후가 주역의 이 효사를 인용하여 대답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곧 충녕대군이 애쓰는 일은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무성유종(无成有終)하기 위함이라는 뜻이었으니, 공로를 탐내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 바른 결과만을 원하다는 뜻이었다. 

 

括囊 无咎 无譽
돈주머니를 묶어놓는 것은(括囊) 허물은 아닐 것(无咎)이나 명예롭지도 않을 것이다(无譽)

  돈주머니를 묶는 것은 혹종왕사(或從王事)하지 않고 재능을 쓰지 않는 것을 뜻한다. 혹종왕사하여 유성(有成)하려고 하면 제 자리를 모르는 지나친 것이며, 혹종왕사조차 하지 않는 것은 모자라는 것이니, 모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자공이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상자에 잘 보관하겠는지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팔 것인지를 여쭈니 공자께서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도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논어 제9편 자한 제13장]고 하셨다. 쓰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주역에서 말하는 허물은 내(內)적인 시각이며 길흉(吉凶)과 명예(譽)는 외(外)적인 시각이라고 했었다<여기를 참조>. 돈 주머니를 풀지 않는 것은 안으로, 자기 내적으로 허물은 아니어도 외적으로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고 한다.

 

黃裳 元吉
황색치마(黃裳)가 근원적으로는 길하다(元吉)
  황색치마(黃裳)는 황제가 입는 치마를 말하는 것이니, 곧 현자가 왕의 일을 대신맡아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것 보다는 왕이 왕으로서의 일을 해야 근원적으로 길하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충녕대군이 혹종왕사(或從王事)하기보다 양녕대군이 왕사(王事)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길하다는 뜻이다. 양녕대군이 자리의 도리(坤)를 잊고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 충녕대군이 자리를 옮겨 조화를 맞추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양녕대군이 제 자리에 앉고 충녕대군도 제 자리에 있는 것이 근원적으로 길한 것이다.

 

龍戰于野 其血玄黃
용들이 들판에서 싸우면(龍戰于野) 그 피가 검고 누르게 된다(其血玄黃)
  검고 누른 것(玄黃)은 천자문에도 나오는 하늘과 땅(天地)이 검고 누른것(玄黃)이니 곧, 온 세상을 말한다. 들판에 있는 용 또한 건(乾)괘의 현룡처럼 제자리를 잡지 못한 용이니, 그들이 잘못된 자리에서 다투면 온 세상이 피로 물든다는 말이다. 제 자리[사명]를 모르는 용들이 세상을 혼란으로 이끄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장래희망, 꿈, 사명에 대한 생각을 접고, 오로지 돈을 많이 벌고 부러워하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물질만능주의가 심각한 듯 하다. 천지에는 풀도 있고 토끼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곰도 있어 셀수 없는 다른 생명체가 다른 역할을 하며 생태계의 조화를 이룬다. 사람도 모두 공평하고 소중한 생명이지만, 인간 세상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사람마다 맡은 역할은 다르다고 하였으니, 각기 다른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공자께서도 세상을 바른 도리로 세우고자 하였어도 천자의 지위를 얻고자 하지는 않으셨다.

 

利永貞
열매를 맺으려는 것(利)은 끝까지 계속(永貞)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가 맡은 사명을 알고 자기 자리를 찾아 역할분담을 하여 열매를 맺어야 세상이 조화롭게 된다. 열매를 맺으려는 것은 천성(天性)이라 끝까지 지속되는 것인데, 어긋난 자리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기에 세상의 조화가 파괴되어 피로 물들게 되는 것이다. 즉, 용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세상이 피로 물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자리를 잡고서 그 곳에서 열매를 맺으려 하는 천성 때문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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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 元亨利貞
【初九】潛龍勿用
【九二】見龍在田 利見大人
【九三】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九四】或躍在淵 无咎
【九五】飛龍在天 利見大人
【上九】亢龍有悔
【用九】見群龍无首 吉

  하늘 아래의 모든 생명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씨(元)로부터 시작해, 꽃을 피우고(亨), 열매를 맺고(利), 소멸하게(貞) 하였다. 모든 생물(生物)이 이 변화의 법칙을 순리대로 따를 수 있을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싹이 텄으나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있고, 꽃이 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논어 제9편 자한 제22장]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열매를 거둬야 할 때가 있다. 겨울에 씨를 뿌리면 소용이 없으니,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시간만 맞추면 순조로울까? 비옥하지 않은 모래밭에 씨를 뿌리면 역시 소용없다. 무슨 일이든 무슨 생명이든 마땅한 장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때가 맞고 자리가 맞으면 모든 것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가? 봄에(시간) 비옥한 땅에(장소) 씨를 뿌려도 가뭄이 들면 소용이 없다. 하늘이 보살펴야 한다. 동물은 자존능력을 갖출 때까지는 어미가 젖을 먹이고 지켜주어야 한다. 시간, 공간 , 보살핌(사랑), 그것으로 완전할까? 사고(事故)가 없어야 한다. 토끼 새끼가 호랑이의 먹이가 되고, 호랑이 새끼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럼 그러한 사고는 어찌하여 생길까? 『중용』의 "하늘은 만물을 살리심을 그 재질에 따라 두터이 하시니, 바르게 심어져 있으면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중용 제17장]는 가르침을 언급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바른 길을 가도록 애쓰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乾 元亨利貞
시간(乾) 아래의 인간은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貞) 된다
  시간은 영원불변하며 완전하다. 시간은 변치 않고 영원히 흐르지만, 그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 생물은 영원한 것이 없다. 영원한 하늘의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이치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순탄하게 그 변화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선 시간에 맞추어 씨를 뿌려야 한다. 원형리정(元亨利貞)은 주역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며, 해석여하에 따라 전체의 의미를 다르게 하는 부분이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潛龍勿用
잠용(潛龍)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마라(勿用)
  물에 잠겨있는 용(潛龍)은 아직 나아가야 할 때를 만나지 못한 용이다. 용(用)은 동(動)의 뜻으로 해석한다. 잠용은 나아갈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새기면 될 것이다. 즉,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 때를 말한다.

 

見龍在田 利見大人
나타난 용이(見龍) 밭에 있으니(見龍在田)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밭은 용이 있어야 할 제 자리가 아니다. 용은 하늘을 날아야 한다. 씨를 뿌릴 시간이 도래하였어도 모래에 뿌리면 소용이 없다.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대인(大人)은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말한다. 즉, 현룡은 도움을 받아야 할 때를 말하고 있다.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군자(君子)가 되어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乾乾) 어두움(夕)을 경계한다면(惕) 위태로울지라도(厲) 허물이 없다(无咎)
  때를 만나고(天), 바른 자리를 잡고(地), 사람을 도움을 얻은(人)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이 이루어졌다고 만사 순탄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였다. 힘써 배워야 할 때를 말한다. 한편, 주역에서 말하는 군자(君子)는 어떠한 사람일가?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或躍在淵 无咎
연못에서 과단하게 비상해야(或躍在淵) 허물이 없다(无咎) 
  혹(或)을 문언전의 해석대로 ‘의심하다’는 의미의 혹(惑)으로 해석하면, 만반의 준비가 완료 되었더라도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한편, 혹(或)은 ‘갑작스럽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과단성있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지금은 나아가야 할 때다. 신중해야 하는가, 과단해야 하는가? 여기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자기로부터 찾아야 할 해답일 것이다. 과단성이 부족한 나는 후자의 의미로 새기며 읽는다.

  

飛龍在天 利見大人
하늘을 날고 있으니(飛龍在天)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거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전성기이다. 열매를 맺은 시기(利)이다. 그렇지만 도와준 대인(大人)을 만나야 이롭다고 한다. 전성기가 도래하였으니 그 복을 내가 누리는 것에만 써야 할까? 사람은 하늘(시간)과 땅(자리)에게 성취한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는 없지만,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는 내가 이룬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 있다. 은혜를 잊지 말라는 말이다. 재아가 3년상을 1년상으로 바꾸겠다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식으로 태어나 최소한 3년은 되어야 보살핌이 없어도 살 수 있게 된다. 재아도 부모에게 최소한 3년의 보살핌은 받지 않았더냐?"[논어 제17편 양화 제21장]. 이미 갖춰지면 고마움을 쉬이 잊어버리기도 한다. 비룡은 베풀어야 할 때를 말한다. 

 

亢龍有悔 
오를려고만 하는 용(亢龍)은 후회가 있다(有悔)
 
  문언전은 항(亢)을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나는 것을 알 지 못하며, 존재만 알고 없어질 것을 모르고, 얻는 것만 알고 내 놓을 줄을 모른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며,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러날 때가 되었다면 놓아야 한다. 때가 되면 부모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부모의 역할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면, 자식은 독립하지 못하고 마마보이가 되어버린다. 사람은 본시 영원을 갈망한다. 영원한 삶을 꿈꾸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영원한 안락을 꿈꾸곤 한다. 그렇지만,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은 흐른다」는 하늘의 법칙 밖에 없다. 그 하늘아래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법칙에 따라서.변한다. 항룡은 물러나야 할 때다.

 

見群龍无首 吉
용의 무리에(見群龍) 우두머리가 없으니(无首) 길(吉)하다
  세상에는 잠룡(潛龍)만 있지도 않고, 현룡(見龍)만 있지도 않고, 비룡(飛龍)만 있지도 않고, 항룡(亢龍)만 있지도 않다. 모두 함께 더불어 세상을 이룬다. 그 차이는 때와 때의 선택에 따라 다른 모습에 불과할 뿐, 모두가 같은 용이다. 우주의 시간에서 볼 때는 불꽃처럼 사라지는 찰나의 시간만 가진 별 다를 것 없는 생물이다. 그러니 나 잘났다고 머리를 내밀지 마라는 뜻이다.

  공자께서 소인을 하찮게 여기라고 소인과 군자를 구별한 것은 아니었다. “군자는 의로움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로움을 생각한다”고 하시고는 그러니 "소인을 우선 이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소인을 멸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자께서는 「사랑」을 말한 것이었지 「미움」을 말한 것이 아니셨다. 번지가 인(仁)을 여쭈자 공자 말씀하시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지(知)에 대해 여쭈자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知人)"라고 하셨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2장]

 

oon

  첫괘, 건(乾)괘의 효사에서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용어가 제법 있다. 길(吉)한 것과 흉(凶)한 것, 이로운 것(利), 허물이 없는 것(无咎), 후회가 있는 것(有悔),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厲) 등등, 구분히 모호한 한자어가 등장한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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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往)이 독자적으로 쓰일 경우에는 ‘나아가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장소를 뜻하는 유(攸)와 결합하면, 유유왕(有攸往)은 '나아갈 곳이 있다면'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나는 왕(往)이 언제나 나아가는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 "내 보낸다"는 뉘앙스를 가진다고 생각되는 곳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에서 왕(往)은 래(來)와 결합하여 곧 잘 사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大往小來(대왕소래)"는 큰 것을 내 보내고 작은 것을 받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유유왕(有攸往)은 ‘시간을 내 보내는 것’으로 풀었다.
일반적으로 유(攸)는 장소를 뜻하지만, '시간이 오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해석을 시도했냐고 하면,
대부분은 그렇게 해석해야 전체적으로 문맥과 더 어울려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리유유왕(利有攸往)'갈 곳이 있으면 이롭다'해석하는 것과
'시간이 지나가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해석이 되어버린다.
그 점을 감안하면서 주역을 보시길 바란다.

 

나아감을 뜻하는 말은 정(征)과 행(行)도 있다. 왕(往)은 길을 모르고 나아가는 것이라면,
정(征)은 바르다는 내적 확신을 하고 힘차게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행(行)은 피동적인 뉘앙스로 ‘따라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쁠 부(孚)에 대해서 그 의미에 큰 논란은 없다.
새가 그 다리를 바꿔가며 알을 품어주어, 그 알을 깨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인데,
특히 유부(有孚)라는 결합어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신념’이요, ‘믿음’이요, ‘생각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는 어렵지 않으나 문맥상 적당히 번역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이 없어 곤란한 면이 있다.
생각없이 하는 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을 갖고 하는 것'이란 뉘앙스로 해석했으면 한다.

 

이상, 주요한 용어에 대한 간단한 원론적인 설명을 마친다. 이러한 용어풀이가 모든 주역에 통용되는 주역 사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변화를 거쳐서 괘효사가 추가, 삭제, 수정되는 과정에서 전체를 통괄하는 완벽한 통일성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이러한 상식을 갖고 문맥에 가장 어울리게 해석하는 융통성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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