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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에 해당되는 글 53

  1. 2013.01.14 제2편 위정(爲政) 제24장 1
  2. 2013.01.13 제2편 위정(爲政) 제21장
  3. 2013.01.04 제2편 위정(爲政) 제15장
  4. 2013.01.04 제2편 위정(爲政) 제12장
  5. 2013.01.04 제2편 위정(爲政) 제11장
  6. 2013.01.04 제2편 위정(爲政) 제9장
  7. 2013.01.04 제2편 위정(爲政) 제3장
  8.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12장
  9. 2010.02.22 항룡유회(亢龍有悔)
  10. 2010.02.20 좋은 것을 취한다
  11. 2010.02.20 욕구도 성(性) - 자연인성론(自然人性論)
  12. 2010.02.20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13. 2010.02.20 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 - 다름의 분별
  14. 2010.02.20 생겨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하나가 아니다
  15. 2010.02.20 중용의 실천 - 하늘이 명한 그대로의 성(性)을 따르는 것
  16. 2010.02.01 64. 未濟卦(미제괘) : 채워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다.
  17. 2010.02.01 62. 小過卦(소과괘) : 지나친 것 보다는 모자란 것이 낫다.
  18. 2010.02.01 61. 中孚卦(중부괘) : 주역의 가르침은 중용(中庸)이다.
  19. 2010.02.01 51. 震卦(진괘) :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더 빨리 잡아먹힌다.
  20. 2010.02.01 43. 夬卦(쾌괘) : 원수도 바름(正)으로 대해야 한다.
  21. 2010.02.01 42. 益卦(익괘) : 앵벌이 하는 사람을 지나쳐야 하나?
  22. 2010.02.01 41. 損卦(손괘) : 하늘은 지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채워준다.
  23. 2010.02.01 40. 解卦(해괘) : 사람에게 구하고 사람에게 나아가야 한다.
  24. 2010.02.01 36. 明夷卦(명이괘) : 천하가 태평하지 않으면 숨어야 한다.
  25. 2010.02.01 34. 大壯卦(대장괘) : 힘을 집중할 수 있어야 성취할 수 있다.
  26. 2010.02.01 33. 遯卦(둔괘) : 버리면 얻는 것을 알아도 버리기가 쉽지는 않다.
  27. 2010.02.01 32. 恒卦(항괘) : 신념은 남에게 강요함이 아니라 자기를 깨우는 것이다.
  28. 2010.02.01 30. 離卦(리괘) : 공든탑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29. 2010.02.01 29. 習坎卦(습감괘) : 함정은 잴 수 있지만, 절망의 깊이는 잴 수 없다.
  30. 2010.02.01 28. 大過卦(대과괘)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2013. 1. 14. 20:32

제2편 위정(爲政) 제24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4. 20:32

공자 말씀하셨네[子曰: ]
- 조상의 귀신이 아닌데 제사하는 것은 아첨이다 [非其鬼而祭之 諂也]
- 의로와야 함에도 멈추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見義不為 無勇也]

 

  귀(鬼)는 육체를, 신(神)은 영혼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귀(鬼)는 흙으로 돌아가고, 신(神)은 하늘로 돌아간다. 같은 의미로 백(魄)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魂)은 하늘로 돌아간다. 그런데 혼백(魂魄)이라고 할 때는 하늘이 앞이고, 귀신(鬼神)이라고 하면 땅이 앞이다. 혼동하기 쉽다.

 

  공자 때문에 제사가 생겨났다는 오해도 있는데, 오히려 공자는 상고시대에 무분별한 제사를 일소해서 없앴다는 평가를 받는다. 감히 왕이 아니면 하늘에 제사지낼 수 없었다. 우리도 조선 초기에는 고급관료가 아니면 부모께만 제사지낼 수 있었다. 주자학이 힘을 얻은 후 3대 제사가 허용되어 환호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안 지내고 싶어하니 재미있는 반전이다.

 

  한편, 유가에서 말하는 용기(勇)는 차원을 달리한다. 맹자는 "칼을 잡고 노려보며 '저 녀석이 나를 당하겠는가' 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용기이므로 겨우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공자가 수신의 세 가지 덕목으로 제시한 지인용(知仁勇) 수준에서의 용(勇)은 지치(知恥) 즉, 부끄러움을 아는 수준이다. 그 뿌리는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가슴속에 살고 있는 성(性)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性)에 부끄럽지 않음이 쌓이고 쌓여 축적된 '호연지기'가 바탕이 되는, 생사조차 건드릴 수 없는 당당하고 굳셈이다.

사람에게는 삶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으며,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다.<맹자 고자 상 11.10>

 

  언뜻 보면 제사와 의로움이라는 이질적인 얘기를 하는 듯하다. 그러나 《중용(中庸)》의 측면에서 보면 잘 어울리는 가르침이다. 예가 지나쳐서 과한 것을 말했고, 용기가 부족하여 모자란 것을 말했다. 그리고 이 둘의 마음이 통(通)한다. 지나치게 빌며 복을 얻으려는 사람은 이득을 얻겠다는 마음, 의로운 일에 소극적인 사람은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결국, 이익을 더 우선하려는 같은 뿌리에서 과한 행동과 모자란 행동이란 가지가 뻗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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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2013. 1. 13. 12:19

제2편 위정(爲政) 제21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3. 12:19

어떤 이가 공자께 말했다.[或謂孔子曰:]
선생께선 왜 정치에 종사하지 않는가요? [子奚不為政]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서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書云:]
효(孝)다. 오직 효다. 형제간 우애있으면 정치에 이르는 것이다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이것이 정치인데 어찌 정치를 따로 하겠습니까? [是亦為政, 奚其為為政]

 

  하지 않는 것을 물으면 피곤한 법이다. "육식을 왜 하지 않지? 주식을 왜 하지 않지?" 취향에 속하는 이런 질문은 그나마 괜찮다. 하지만 "결혼을 왜 하지 않지? 치마를 왜 입지 않지?" 같은 질문은 신중해야 한다. "누군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느냐고" 하면서 부글부글할 수 있으니. 주유천하로 유명한 공자였다. 14년을 천하를 돌며 도덕정치를 구현할 군주를 찾았다. 그러니 어찌 정치에 종사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 글은 어떤 이(或)가 아픈 곳을 찔러도 무시하지 않았다는 예(禮)를 전하고자 함일까? 아니면 만사에 단절이 없다는 도(道)를 설명한 수준 높은 가르침일까? 《서경》까지 인용하는 걸로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늘날에도 유명인의 말이나 글을 빌려 와 수식을 하곤 한다. 조선조는 유교경전과 공자 왈 맹자 왈을 할 수 있어야 지성인이었는데, 요즘은 서구인을 언급해야 더 있어 보인다고 한다. 상표와 간판도 서구어로 넘쳐나니 문화적 경향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어쨌건, 공자께서도 말에 더 신뢰를 얻기 위해 《시경》과 《서경》을 종종 언급 하셨다. 잡설을 이리 늘어놓는 이유는 이어지는 글이 무겁기 때문이다...

  유가의 도(道)는 '분별'에서 출발하기에 난해하다. 그 이론에 곧고 강직했던 선비 이미지가 오버랩되면 엄격하게 맺고 끊는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그러니 이 장처럼 효가 곧 정치요, 우애가 정치라고 하면 어렵다. 나를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이 곧 제가(齊家)요 치국(治國)이요 평천하(平天下)라고 하면 더욱 혼란스럽다. 본래 유가의 철학 중용(中庸)은 분별해서 가르지 않는다. '분별 후 조화'를 도모한다. 가르기 위한 분별이 아니라 붙이기 위한 분별임을 이해해야 한다. 유학은 도(道)를 가장 간명하고 자신있게 설명하는 학문이다.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다 할 수 있다. 본질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不貳 [중용 제26장]


  남녀로 나누고, 형제와 4촌을 나누고, 군주와 신하를 나누어 둘이 되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로 합쳐짐을 지향한다. 분리의 이미지가 없다. 태극기의 태극처럼 떨어진 둘이 아니라 꼭 붙어있는 둘, 그래서 결국은 하나이다. 조금 더 자세히는 <이곳> 설명을 참조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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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學而不思則罔]
-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게 된다 [思而不學則殆]


  계속 반복하며 이어지는 한 쪽으로 모나게 치우지지 말라는 중용(中庸)의 가르침을 전하는 장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판단력이 없어질 것이다. 유가의 후학들은 공자를 존경해도 신(神)으로 여겨 무조건 숭배하지는 않았다. ‘공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논어는 이렇게 가르쳤기에 왕양명은 ‘마음에 비추어 옳지 않다면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어도 옳다 할 수 없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성리학의 시대에는 유학 경전을 해석한 주희가 신(神)이 되기도 했다. 조선중기 이후는 주희의 해석에 따르지 않았다고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죽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였다. 본래 유학은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반면, 배우지 않고 생각으로만 다 통하려고 하는 것도 치우침이다. 옛말에 ‘한양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이 한양에 가본 사람을 이긴다’고 하는 말과도 통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쌓이면서 강해지는 욕구라고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와 마찬가지로 ‘모르겠습니다’를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정자의 잊지 말아야할 배움의 다섯가지가 떠오르는 장이다.

①널리 배우고 ②깊이 묻고 ③신중하게 생각하고 ④분명하게 판단하고 ⑤독실하게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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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君子不器]

 

   이 장은 '공야장'편의 자공과의 문답이 연상되어 웃음짓게 한다.

자공이 여쭈었다 - 저는 어떤가요?
공자 말씀하셨다 – 너는 그릇이지
자공(상한 기분으로)이 여쭈었다 – 어떤 그릇인데요?
공자 말씀하셨다 – 너는 제사에 쓰는 옥그릇이지

  자공을 골려주려고 농담을 한 것인데, 자공이 그릇이라면 어떤 그릇인지 따지듯 되묻는 까닭이 이 장에서 처럼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유학이 추구하는 사회는 역할을 분담하여 조화를 이루는 사회였다. 과거에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살림을 하는 것은 일을 분담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름으로 나누어 할 일이 다르다고 하였으니 곧, 유학에서 말하는 명분론(名分論)이었다. 남편은 남편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그 이름값을 다 하라고 했다. 군자 역시도 군자다워야 한다.

  그런데 이 이름으로 나뉜 역할 분담을 조화를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나는 돈을 벌어오는 기계야?’ ‘나는 살림을 하는 기계야?’라고 불만이 생기게 된다. 그러니 조금 풀어서 ‘군자라는 이름은 도구(부품)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유학은 ‘쉬는 것’과 ‘일하는 것’도 중용(中庸)의 길을 찾아간다. 할 일이 없는 것, 더 이상 누구를 위해 필요없는 존재가 되는 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본다. ‘이제 당신이 필요없어. 당신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아’라고 하면 완전한 해방감을 느껴 새처럼 자유로울까?

  이 장을 다시 말하면 ‘해야 할 (군자)의 도리에 즐거운 사명감을 느껴라’로 바꾸고 싶다. 유학의 실천행위는 남편의 도리를, 부모의 도리를, 자식의 도리를 의무감으로 억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당신의 남편일 수 있어서 고맙고, 내가 너의 부모일 수 있어서 고맙고, 내가 부모님의 자식일 수 있기에 고맙다는 마음으로 즐겁게 가는 길이었다. 맹목적으로 믿게 만들어 공자가 의무를 이행하도록 주입시키려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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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과거를 돌이켜 미래를 알게해야 [溫故而知新]
- 스승이 될 수 있다 [可以為師矣]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이미 고사성어가 된 말로, 과거의 ‘축적된 경험’을 미래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로 흔히 인용한다. 역사와 고전을 배우는 것은 과거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또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유학은 많이 기억하는 지식의 저장 창고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누가했는지 모르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 사람과 그 말을 알아도 ‘너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을 자기에게 응용하지 못하는 배움을 경계한다.

  미래를 아는 지신(知新)은 미래의 세상을 훤히 내다보는 점쟁이처럼 되라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 스스로 자기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고,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스승, 부모, 어른)도 그리 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때로는 많이 경험해보고 완전한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예견된 실패를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언제나 성공만 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작은 실패조차 두렵게 하여 자생력을 잃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끌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해야 하는 중용(中庸)의 기준선을 벗어나면 삶을 풍부하게 살지 못하도록 새장에 가두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아이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리는 인(仁)으로 나아가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스승, 부모, 어른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학생이, 자식이,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서가 아니고, 혀를 차며 걱정할 정도로 요즘 아이들이 어긋나서도 아니고, 다가가서 마음으로 교감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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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내가 안회와 종일 얘기했는데 [吾與回言終日]
다른 의견이 없어 어리석다고 여겼다 [不違如愚]
그 이후에 사생활을 살펴보고 [退而省其私]
도리어 내가 깨우치게 되었으니 [亦足以發]
안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다 [回也不愚]

 

   안회에 대한 공자의 감탄은 여러차례 나온다. 본래 유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길러준다는 관계였다. 중용이 말하는 조화(和)로움의 사고이며, 논어의 첫 장부터 강조하고 있는 더부는 즐거움(樂)의 사고이다. 유학은 본래 단절이 없었고 ‘함께’를 지향했는데, 스승은 가르칠 것만 있는 사람이어야 마땅하고, 학생은 배울 것만 있어야 마땅하다는 권위적 관계로 어긋나 버렸다.

  공자는 전지전능함이 없었기에 신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모자란 것도 있고 나은 점도 있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앉아 걸식하는 걸인이라고 해도, 하는 일 없이 앉아 있기 경쟁을 해 보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유학은 묻는다. 사람이 아는 것이 있어 봐야 얼마나 알 것이며, 사람이 잘난 것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잘날 수 있겠는 지를 묻는다. 유학이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는 분별 후 조화’를 모색하는 사상이다. 우월함, 존귀함 그런 것은 없다. 내가 나은 것으로 보태주려 하고 내가 모자라는 것은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중용(中庸)의 조화로운 어울림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장은 공자께서 안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반성이다. 안회는 스승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있었는데, 공자는 안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회가 공자보다 더 뛰어난가? 안회도 또한 공자보다 나은 점이 있었고, 모자란 점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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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정책으로 따르게 하고 형벌로서 규제하면 [道之以政 齊之以刑]
백성들은 모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될 것이다 [民免而無恥]
덕으로 따르게 하고 예로서 규제하면 [道之以德 齊之以禮]
부끄러움을 느껴 저절로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有恥且格]


   이 장은 강압적 정치의 단점을 덕치의 장점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형벌을 앞세워 강제하는 통치는 ‘마음의 반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재수없게 법에 걸린 것이지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아니다'고 하게 될 것이며, 법을 잘 피해다니는 것을 지혜로 여기고, 법을 피해갈 줄 모르는 것은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덕성을 찬미한 위정 제1장의 북극성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정치는 오직 덕치주의여야만 한다’고 하는 것도 곤란하다. 덕과 힘이 중용(中庸)의 조화를 이뤄야만 하는데, 공자시대에는 예(禮)라는 완화된 힘(규제)으로도 충분히 조절 가능하다고 판단하셨던 듯 하다.

  다원화된 오늘날에는 예(禮)의 규제보다는 법(法)이 조절작용을 해야할 것 같다. 그렇지만 덕을 지향하는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한다. 사람을 채찍에 움직이는 짐승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人間性)을 회복하여 사람의 길을 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은 블로거 입장에서 저작권법을 생각해보게 한다. 최근에는 TV영상을 몇 장면 캡쳐했다고 문제가 되었다는 글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강력한 단속으로 죄어가는 것이 순서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하는게 순서이지 않을까? 대화하고 조율하고 수긍하는 과정없이 힘을 앞세워 밀어붙이려는 것에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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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예의 작용은 조화로움이 중요하다 [禮之用 和為貴]
선왕의 도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先王之道斯為美]
작고 큰 것이 조화를 이뤄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小大由之 有所不行]
조화를 위한 조화만 알고 [知和而和]
예로써 조절할 줄 모른다면 [不以禮節之]
순조로울 수가 없다(참된 조화가 아니다) [亦不可行也]

 

   이 장이 해석이 분분한 이유는 ‘어떻게 해라’는 선명한 실천행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의 철학인 중용(中庸)을 설명하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禮)는 내면의 실질과 드러난 꾸밈의 조화이다. 마음이 없는 예는 허례이며, 솔직한 마음을 꾸밈없이 다 발산하는 것도 무례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中庸)의 균형선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곧 조화라고 하여 조화만을 추구하려는 꽉막힘도 문제이다.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힘을 사용해 막아야 하는 행위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형식적 예에 어긋나고 부자간의 조화가 깨어지더라도, 근본의 예[실질]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참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장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이고 늘 그러해야 한다는 고정된[죽은] 원칙은 없다는 중용(中庸)의 조화라는 관념이 정립되면 좀 더 선명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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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2. 13:09

항룡유회(亢龍有悔)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3:09

1. 끝까지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게 된다.

2. 오를려고만 하는 용은 후회가 있게 된다.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명언은 주역 건(乾)괘의 꼭대기효인 상구(上九)의 효사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위의 두 가지 의미로 인용하는 것이 보통인데요. 1번의 의미로 인용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1번의 의미는,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는 내리막길만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남보다 일찍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반드시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다 일찍 물러나야 하는 경우와 같으니까요. 「주자어류」에서 '지극히 융성할 때 그 지나침을 살핀다'고 해설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물러날 줄 모르고 위를 향해서만 나아가려는 것을 경계하는 2번의 뜻으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후진기어를 넣을 줄 모르고 악셀만 밟는 것을 지적하는 경고인데요. 「문언전」에서 '항(亢)은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존재만 알고 없어질 것을 모르고, 얻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은 모른다'는 해설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2등은 3등을 돌아보기보다 1등을 추격하고자 하는 법입니다. 99석의 부자가 100석을 채우려 가난한 자의 1석을 빼앗는다 하였습니다. 자식이 성인으로 독립 할 때가 되었는데, 부모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고 마마보이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 역시 물러나지 않으려는 항룡(亢龍)의 마음일 것입니다.

 

  문장의 일부분을 떼어서 자기 본의로 해석하는 것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합니다. 사서(四書)에도 흔히 시경의 시(時)를 가져와 인용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강조하는데요. 실록에 보면 주역도 단장취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1번이 맞다, 2번이 맞다는 시비를 가리려 하지 마시고, 제3의 의미를 찾아내어 사용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글을 적는 용도로 만들어진 종이라고해서 글만 기록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을 피울 수도 있는 법입니다. 종이의 주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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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0. 20:04

좋은 것을 취한다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20:04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로 대표되는 성론(性論)에 대해서는 단순히 설명하기가 불가능하고, 학자가 아니라면 굳이 파고들 이유도 없겠지만,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기에,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앞의 글에서 강조했지만, '중용'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원적인 ‘맞춤형 진리’를 추구합니다. 

어떤 분은 공자께서는 「성삼품설」을 주장하였다며, 논어 제17편 양화 제3장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가장 총명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 바뀌지 않는다

이 가르침의 의미가 성삼품설의 논거라고 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가장 총명하고 가장 어리석은 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가 본래 담고 있는 속 뜻일 것입니다.
「전습록」에 의하면 가장 총명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애공이 정치의 조언을 구하자 공자께서는
'곧고 올바른 사람을 부정직한 사람 윗자리에 두는 것'을 말씀합니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9장]
즉, 부정직한 사람을 축출하거나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변화의 가능성을 잊지 않으려 하며, 함께 잘 되는 것을 도모합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신 성선설을 일반적 진리라는 의미로 해석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장점만을 취한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 문헌들에 나타나는 공자의 제자들을 한번 보겠습니다.
자로는 끝까지 급하고 용감합니다. 그 기질 때문에 결국 살해당해 죽게 됩니다. 
자공은 끝까지 총명하고 활달함을 잃지 않습니다.
증삼은 끝까지 근신하고 느리며, 재아는 날래고 괴팍합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 기질이 바뀐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공자께서는 기질이 지나치지 않도록 경계는 시켰으나 억누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각자의 장점을 더욱 북돋아 주었습니다.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고 나은 점이 있습니다.
공자께서도 안회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점을 언급하십니다.

장점을 취한다는 것은 유학에서 아주 중요시 하는 가르침입니다.
공문자는 태숙질을 이혼시키고 자기딸을 시집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공자께서는 '문(文)'이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자공이 의아하여 그 까닭을 묻습니다. [논어 제5편 공야장 14장]

그는 부지런하며 배움을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로 생각지 않더구나

삼인행(三人行)의 가르침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논어 제7편 술이 제22장]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착함은 따르고, 나쁜점은 바로잡는다.

 

고전을 배우면서 좋은 가르침이 있으면, 그것을 취해 나의 배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배움보다 공자라는 ‘인물’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공자의 그 내심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크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공자의 사람됨에 관계없이, 그 가르침이 깨우쳐 주는바가 있다면 그것을 취할 뿐입니다.
기독교, 불교가 좋고 나쁘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성경과 불경의 가르침이 좋다면 그것은 취해 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움의 중용입니다.  
 

‘사람에게 집착’하여 못나게 만들고 미움의 근거로 삼으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설령 그 말이 이완용에게서 나왔더라도 바른 말이라면 배우는 것이며,
설령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더라도 바르지 않다면 버리는 것입니다.
왕양명의 유명한 말이 그런 뜻입니다.

마음에 구하여 옳지 않다면,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더라도 옳다 할 수 없다

 

『논어』를 읽고 바른 가르침과 지혜를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공자를 흠모하거나, 공자를 미워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의 법어인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 끝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말만 듣고 사람을 받들지 않아야 하며,
사람이 좋지 않다고 그의 바른 말을 버려서도 안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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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자 하는 뜻은 풀이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살고자 하는 뜻은 물고기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모두 하늘이 준 귀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고기를 잡으셨습니다.

공자께서 낚시는 하셨으나 그물로 잡지는 않으셨다. 새를 잡았으나 둥지의 잠자는 새를 쏘지는 않으셨다. [논어 제7편 술이 제27장]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토끼를 보면 연민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토끼보다 나쁜 생명일까요?
호랑이는 제 성(性)을 따르는 것 뿐입니다.

 

성(性)을 따른다는 것은,
하늘이 준 그대로의 자연(自然)스러움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性)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는데 있어서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중용(中庸)'을 이탈하게 합니다.


고상함과 고원함을 추구하여,
인간을 채식동물로 만들려고 하고,
야성을 극도로 추구하여
다른 생명들의 씨를 말려버리려고도 합니다.

 

욕구도 성(性)입니다.
욕구를 아예 없애는 것은 성(性)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중용의 사유는 모자람도 경계하고, 지나침도 경계합니다.

욕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거나 지나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유학은 차별적 사랑도 긍정합니다.
하늘이 준 감정(情)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어미가 제 새끼를 우선 돌보는 것은 자연(自然)스러움입니다.
문제는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다른 새끼를 우선 돌보라고 하거나,
나를 위해 자기 새끼를 죽여도 괜찮다는,
그런, 치우침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합니다.

 

혹시 오해가 생길까 싶어 부연하고 가야겠습니다.

‘중용’의 정신은 보편적 타당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태가 틀렸다’는 일반론으로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 나를 떠나 있는 진리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지극히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의 성(性)을 밝혀

모자라지도 치우치지도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제반 사정을 감안하여 가장 마땅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출발점이며,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가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 기준을 세우는데 있어서 지극히 진실한 마음으로 접근하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남들의 이목, 선입견 등등의 모든 속박을 걷어내고,

나만이 알 수 있는 내면의 울림으로, 진실한 성(性)을 따르는 마음으로,

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로 접근하는 것이 중용입니다.

 

중용 제1장입니다.

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을 삼가고 두려워해야하니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드러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고 [莫見乎隱]

나타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다 [莫顯乎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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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0. 20:01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20:01

발자국

한계란 명칭은 대개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시작할까 합니다.
즉, ‘자유’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자유란 조금 쉬운 느낌이죠. 새처럼 훨훨~ 나는 것 같습니다.
갇혀있는 새장을 없애버리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요?

자유를 찾음은 갇힌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로든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갇힌 것을 떨쳐버리는 예를 하나 들기로 하겠습니다.

 

담배로부터 자유를 한번 찾아볼까요?
먼저 담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누가 자유롭나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담배를 끊기가 힘들다는 마음을 짐작정도만 할 것 같습니다.
그 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담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담배가 뭔지 모르는 두세살된 아이나, 담배를 접해보지 못한 비문명국의 어른이나,

모두 완벽하게 담배로부터는 자유롭습니다.

 

번뇌로부터는 어떻게 자유를 찾겠습니까?
담배로부터의 자유가 힌트가 될 것입니다.
번뇌를 인식하지 못하면,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이름이 있습니다. 백치하고 비슷합니다.
백치가 되어 인식이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백치하고 붓다는 같은 뜻,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앎을 통해서도 백치가 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본래 함께 있었습니다.
'도(道)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억나시는지요?

 

미쳤다는 의미가 싫어지는 것은
말과 문자의 좋고 나쁨에 갇혀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학이 추구하는 미침을 보겠습니다.
정상인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미치기도 합니다. 배움에 미치기도 합니다.
공자께서 '석달동안 고기맛을 잊었다'는 비유와도 연관됩니다.
순간을 집중하게 마음을 붙드는 것이 생기면(미치게 만들면),
다른 것에는 아무 생각도 미치지 않습니다.

 

유가의 선비들이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이 순간을 지극히 열심히, 집중하여 사는 것,
즉, 현재의 삶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참된 자유로움을 찾아갑니다.
이것이 중용을 실천하고 사는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억지로 가는 길일까요?
대학에 가기 위해 시험문제에 몰두하는 것과 같을까요?

욕구를 계산하는 마음에서 생긴 집중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결코 오래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기쁨에 미쳐,

현재의 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을,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가의 도(道)는 꽉 움켜쥐고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순간을 사랑하면서 평생 나아가는 행위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도(道)라는 한자가 우리말의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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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人莫不飮食也]
맛을 아는 사람이 드물구나 [鮮能知味也]

중용 제4장에 나오는 공자 말씀입니다.

그래서 밥먹는 중용을 한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왜 밥을 먹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배가 고픈 고통을 주어 결국은 먹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에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왜 변을 누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고통을 주어 결국 화장실로 향하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 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을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을 먹어 기쁨을 찾기 위해 훔쳐옵니다. 변을 누어 기쁨을 찾기 위해 화장실에 있는 놈을 끌어냅니다. 왜요? 천도를 따르는 것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성(性)을 따름을 고집함으로써 성(性)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와 너는 다른가요? 도(道)의 정의를 연결시켜보겠습니다. 나와 너는 ‘떨어 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태초이래로 '너'가 없는 '나'만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천도를 따라 기쁘고, 너도 천도를 따라 기쁘고, 그럼으로써 함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논어 첫장의 가르침’을 통해 연결해보시면서 그림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맛을 안다는 것'으로 넘어오겠습니다.

맛이란 것은 주관입니까? 객관입니까?
사람마다 달리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살던 지역, 문화, 먹어왔던 음식 등등에 따라서 모두가 다릅니다. 
나에게도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배가 고플 때, 배가 부를 때, 기분 좋을 때, 오랫만에 먹을 때, 언제나 틀립니다.

 

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람의 갇힌 머리는 맛을 일반화시키려 하고 객관화 시키려 합니다.
내가 맛있다고 느낀 음식을 상대가 맛있다고 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반드시 같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경우가 사실은 너무 많습니다.

‘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똑같이 알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도 없습니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있고 적게 아는 것도 있고, 사람마다 모두 틀린게 정상입니다.

엄친아(엄마친구의아들) 보다 못한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못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나와 똑같을 수 있는 사람은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잘나고 못난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맛을 안다는 것은 사람마다, 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분별 이후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으로 옮겨와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여 조화를 이룰려고 하는 것이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군주의 도(道)가 우월하고, 남편의 도(道)가 우월하고, 군자의 도(道)가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만든 것은 우위가 아니라 다름입니다.
우위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논어 제11편 선진 제15장을 통해서, 유학의 공경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께서 "유(由)는 어찌하여 내 집에서 비파를 타느냐?"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由)의 성취는 대청에 올랐고, 방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니라”

자로는 공자에 9살 적은 나이 많은 맏형입니다.
그런데도, 한소리 들었다고 까마득한 학생들이 우습게 대하기도 합니다.
보다 못한 공자께서 조정에 나섭니다.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대청에서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려했던 것이니, 너무 그러지들 말라고 합니다.

 

자로가 나이를 내세우며 호통을 치고 복종시켜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공자께서 다른 제자들을 혼내줘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유학에서의 분별은 '복종'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성별, 지위 등등의 분별은 언제나 '조화'를 향해 지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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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guk

『중용』시작부의 도(道)의 정의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도(道)는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간단히 생각하면 쉬우면서도, 어려운 얘기입니다.

유학경전에서 A = B로 완전하게 정의를 시도한 부분은

이 「도(道)」의 정의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도(道)입니다.

조금 쉽게 다가올까 싶어 ‘아담과 이브’를 등장시킵니다. 태초이래로 생겨난 인간은 한 명일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체가 느껴지는 것 뿐 아니라, 무형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마음조차도 그러합니다.

「사랑」과 「미움」이 별개요, 「고통」과 「쾌락」이 별개일까요?

사랑의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크게 키우면 미움이 보다 선명히 나타납니다. 고통이라는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쾌락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고통의 크기를 크게 키우면 함께 있었던 쾌락이 더 선명히 나타납니다.

 

떨어질 수 없다’는 것, ‘관계가 없는 그것 뿐인 것은 없다’는 이 관념이 정립되면, 모든 것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사유로 연결되어 갑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국의 음양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무극에서 생겨난 ‘태극’의 개념과 연결되며, 유가, 도가, 불가의 가르침도 역시 이 개념으로 함께 통(通)합니다. 삶과 죽음도 함께 있고, 깨달음과 무지도 함께 있고, 나와 너도 함께 있고, 선과 악도 함께 있고, 유와 무도 함께 있고, 현재와 비현재도 함께 있습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도(道)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도덕경』의 첫장입니다.

도(道)라는 도(道)는 참된 도가 아니며, [道可道非常道]
이름으로 정해진 것은 진정한 그것만이 아닙니다. [名可名非常名]
천지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은 본래 이름이 없었는데 [無名 天地之始],
이름으로 가두어버림으로써 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有名 萬物之母]

그러기에 가두지 않음으로 그 신비함을 보아야하고 [故常無欲以觀其妙]
가두어져 막혀 있는 것도 보아야 합니다. [常有欲以觀其]

‘갇히지 않음(무욕)’과 ‘갇힘(유욕)’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생긴 것이지만 이름이 다릅니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이 둘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있으니 혼란합니다 [同謂之玄]
아득하고 또 아득합니다. 모든 신비의 문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중용』에서 말하는 도(道)와 다른가요?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는 중용의 설명에 덧붙여,

도(道)라는 그 개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만 떨어질 수 없다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진정한 그것과 갇혀진 그것, 역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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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01

교과서『중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도(道)를 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도(道)라는 것은 어떠한 것임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도(道)를 행한다는 것」의 개념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야 할 것은 오직 그대로의 성(性)입니다.
스승도, 부모도, 남편도, 조상도 아닙니다.
책도, 좋은 말도, 인격자도, 지식도 아닙니다.
머리도 아니고, 육체도 아닙니다.
오직 성(性)입니다.

 

순자의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도(道)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의(義)를 따르지,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유가는 공자를 칭송하고 존경하지만, 공자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성(性)'을 따릅니다. 곧 도(道)를 행합니다.

 

오직 성(性)만을 따른다는 것은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에서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텅 비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치우침을 일으키는 것을 비워버리고
성(性)을 진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정반대에 있는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라는 유가의 일신(日新)이나,
날마다 벗어내라는 도가의 일손(日損)이나
가두고 있던 것을 떨쳐내는 유가의 유위(有爲)와
가두고 있던 것을 비워내는 도가의 무위(無爲)는
같은 말, 다른 표현입니다.

 

알아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는 것 모두를 말로 완벽하게 할 수 있습니까?

들어도 모든 것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렇게 말이라는 녀석과 귀라는 녀석은

또한, 눈이라는 녀석과 머리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로

제가 가진 성(性)에 따라 한계가 있습니다.

 

머리로만 만나려는 사람은
그대로의 성(性)도 머리만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다는 맹신에 갇힌 것일지 모릅니다.

 

똑똑한 자공이 말(言)에 갇혀가고 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으려 한다. (중략)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이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나
하늘은 아무 말이 없지 않느냐?" [논어 제17편 양화 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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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初六】濡其尾 吝
【九二】曳其輪 貞吉
【六三】未濟 征 凶 利涉大川
【九四】貞吉 悔亡 震用伐鬼方 三年 有賞于大國
【六五】貞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上九】有孚于飲酒 无咎 濡其首 有孚失是

  미제(未濟)괘는 소과(小過)괘 중에서 소(小)를 의미하니 부족한 것이다. 앞의 기제(旣濟)괘는 이미 성취한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서 지나침(過)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래서 덜어내야 한다. 미제(未濟)괘는 반대로 부족한 것이니(小) 채워야 한다. 주역의 후4괘는 모두 중용(中庸)을 말하고 있다. 중용을 강조하며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부족한 자(未濟)는 나아가야 하나(亨) 작은 여우(小狐)가 거의 마른 강을 건너다(汔濟) 그 꼬리를 적시게 되면(濡其尾) 유리함이 없다(无攸利).

  여우는 물을 건널 때 꼬리를 치켜들고 젖지 않도록 한다고 한다. 만일 젖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깊다면 건너지 않고 되돌아 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영리한 여유가 말라서 물이 없는 강을 건너면서 어찌 그 꼬리를 적시게 되는가? 부족한 자가 얻으려고 급히 서둘러 나아가는 까닭이니 조심하고 신중하여야 한다. 조심성이 없으면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여우가 마른 강을 건너다 꼬리를 적시기도 한다.

 

濡其尾 吝
그 꼬리가 젖었으니(濡其尾) 궁색(吝)하다.
  기제(既濟)가 끄는 수레는 이미 성취한 가득찬 수레여서 그 꼬리를 적셔도 허물이 없지만, 미제(未濟)가 끄는 수레는 채운 것이 보잘 것 없는 수레인데 그 꼬리를 적셨으니 참으로 궁색하다. 기제는 이미 성취하였으니 가볍게 털 수 있어야 하고 미제는 성취하지 못했으니 무겁게 붙잡고 신중하고 조심하여야 한다. 가진자는 가진 것을 가벼이 여기고 부족한 자는 가진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이다.

 

曳其輪 貞吉
그 젖은 수레를 끌고가면(曳其輪) 끝이 길하다(貞吉).

  미제자(未濟者)가 그 꼬리까지 적셔진 수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고 가면 마침내 길하다 한다. 설상가상의 상황을 만났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곧 좋은 상황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려움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또한 중용(中庸)이니, 상황은 변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비가 오기도 하고 맑은 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未濟 征 凶 利涉大川
부족한 채로(未濟) 계속 그 상태로 나아감(征)은 흉(凶)하니 큰 내를 건너야 이롭다(利涉大川).

  꼬리까지 적신 수레를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끌고가는 것을 말함이니 그것은 흉하다. 다시 채워넣고 채워서 기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기회가 생긴다면 과감하게 부딪혀야 하니, 큰 내를 건너는 과단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꺾이면 하늘이 부족하다고 채워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중용』에 “잘 심어져 있는 것은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중용 제17장]고 하였으니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하늘조차 외면할 것이다.

 

貞吉 悔亡 震用伐鬼方 三年 有賞于大國
그래야 마침내 길하고(貞吉) 후회가 없어지리니(悔亡) 우뢰와 같은 기상으로 귀방을 정벌하는데 일조하면(震用伐鬼方) 3년이 걸릴 것이나(三年) 대국으로부터 상이 있을 것이다(有賞于大國)

  대국으로부터 상을 받음은 은나라 고종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이니, 곧 미제에서 기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3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디고 과단하게 나아가 수레를 채운 것이다. 미제에서 기제로의 전환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쉬운 일이 아니다. 과단성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내도 필요하다.

 

貞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마침내 길하여(貞吉) 후회가 없으리니(无悔) 군자로서 빛남(君子之光)이여!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有孚) 길(吉)하다.
  단순히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를 따르는 뜻을 갖고 기제를 향해 나아간 것이었으므로 군자로서 빛이 나고 길하게 된 것이다. 반란에 동참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얻는 것을 원하여 은행을 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게 기제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흉할 것이니, 기제를 이루는 길은 바른 길이어야 한다.

 

有孚于飲酒 无咎 濡其首 有孚失是
먹고 마심에 신념이 있으면(有孚于飲酒) 허물은 없으나(无咎) 그 머리를 적시면(濡其首) 신념이 없어지리라(有孚失是)
  기제에서 재물을 가진 은나라가 덕이 높은 주나라에 미치지 못하다고 한 것처럼 미제에서도 물질을 경계하여 주역을 마무리 한다. 먹고 마심에 뜻이 있다면 허물은 없으니 곧 바른 뜻을 갖고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물질적 부유함이 머리를 적셔 정신을 망치면 그 신념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먹고 마셔야 한다는 신념은 나도 그것이 좋지만 다른 사람도 그것이 좋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기제자가 되면 가난한 이에게 베풀려고 하는 것이 먹고 마시는 것에 신념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에 취하여 머리가 적셔지면 99석도 부족하여 100석을 채우려고 할 것이니 베풀기 위해서 모으려고 하였던 그 신념은 없어지게 된다. 더 나아가 베풀지 않는 부자만 미워 보이고, 자기 자신은 항상 부족하게 생각되니 베풀려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을 전하며 주역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공자 말씀하시길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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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過 亨 利 貞 可小事 不可大事 飛鳥遺之音 不宜上 宜下 大吉

【初六】飛鳥 以凶

【六二】過其祖 遇其妣 不及其君 遇其臣 无咎

【九三】弗過防之 從 或戕之 凶

【九四】无咎 弗過 遇之 往 厲 必戒 勿用永貞

【六五】密雲不雨 自我西郊 公 弋取彼在穴

【上六】弗遇過之 飛鳥離之 凶 是謂災眚

  앞의 중부(中孚)는 중용에 바로 서 있는 것이지만, 소과(小過)는 모자라고(小) 지나쳐(過) 중용의 길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28번째 대과(大過)는 시기를 놓쳐 지나간 것을 말하는데 소과(小過)는 문자상으로는 대과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겨지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소과는 모자라거나(小) 지나쳐(過) 중용을 벗어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과(小過)괘는 중부(中孚)괘와 정반대의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小過 亨利貞 可小事 不可大事 飛鳥遺之音 不宜上 宜下 大吉

치우침(小過)은 인식이 있는 시기(亨利貞)에 생긴다. 조금 기울어짐은 괜찮으나(可小事) 크게 기울어짐은 불가하다(不可大事) 높이 나는 새가 그 소리를 남기니(飛鳥遺之音) 올라가면 마땅하지 않고(不宜上) 내려옴이 마땅하니(宜下) 내려온다면 크게 길하리라(大吉).

  중용을 벗어나는 것은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시기중에 형리정(亨利貞)의 시기의 일이라고 한다. 씨앗인(元) 상태에서는 중용을 벗어날 수 없다. 인식이 생김으로써 그 지혜가 지나치거나 모라라서 중용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본성은 가깝지만 학습으로 멀어진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장]고 하셨다. 중용에서 치우치는 것이 약간 기울어진 것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크게 기울어짐은 불가하다. 높이 나는 새가 그 소리를 남기는 것은 한계에 봉착했기에 힘이 부친 까닭이다. 한계를 알았으니 조금 기울어진 것이다. 한계를 느꼈음에도 더 올라가려 한다면 크게 기우는 것이 된다.

 

飛鳥以凶

계속 비상하려고 하니 흉하다(飛鳥以凶)

  계속 비상하려는 것은 욕심이다. 욕심이 과하기 때문이니 중용을 벗어난 것이요, 또한 계속 비상하려는 것은 제 자신의 분수를 모름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으니 제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중용을 벗어나는 이유는 제 자신을 모르고 욕심이 과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過其祖 遇其妣 不及其君 遇其臣 无咎

그 할아버지를 지나쳐(過其祖) 그 할머니를 만나고(遇其妣) 그 임금께 나아가지 못하고(不及其君) 그 신하를 만남은(遇其臣) 조금 지나친 것이지만 허물은 아니다(无咎).

  할아버지를 지나친 것은 과(過)했으나 할머니를 만났으니 그 뜻이 할아버지에게 전달될 것이요, 임금께 나아가지 못한 것은 모자랐으나(小) 그 신하를 만났으니 그 뜻이 임금께 전해질 것이다. 지나치고(過) 부족한(小) 것이지만 정도가 약하기에(小事) 허물은 아니다. 주역은 말하는 것 같다. 중용의 도가 최선이기는 하지만,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도 중용은 아니라고.

 

弗過防之 從 或戕之 凶

지나치지 않았을 때(弗過) 그것을 방지해야 하지만(防之) 지나침을 따르면(從) 혹 그것이 끝장날 수도 있으니(或戕之) 흉(凶)하다.

  모자란 것(小)은 다시 채울 수 있지만 지나친 것(過)은 그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끝장날 수도 있음이니 곧 “모자란 물은 채울 수 있지만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을 말함이다. 공자께서는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말씀하셨으나, 그 같다는 것은 중용의 도를 벗어난 것이 같다는 말씀이셨으며, 지나침과 모자람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모자란 것이 낫다고 하실 것 같다.

 

无咎 弗過 遇之 往 厲 必戒 勿用永貞

허물이 없이(无咎) 지나치지 않았는데(弗過) 점점 지나치게 되면(遇之) 그대로 나아가면(往) 위태롭다(厲) 반드시 경계해야 하니(必戒) 끝까지 계속하려고 하지 마라(勿用永貞).

  딱 한번만 더 하고 멈춘다고, 딱 한번만 더 하고 멈춘다고 하다가 그 선을 넘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을 경계한 말이다. 예를 들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술 한잔인 것 같다. 딱 한번만 더, 딱 한잔만 더 하면서 끝맺음을 하지 못하니 중용을 벗어나는 위태로운 것이다.

 

密雲不雨 自我西郊 公 弋取彼在穴

구름이 일어도 비가오지 않음은(密雲不雨) 나 스스로 어두운 서방에 있기 때문인데(自我西郊) 무왕(公)이 구멍에 피해있는 새를 활로 쏘아 잡았다(弋取彼在穴) 다소 모자랐다.

  옛 성현들이 제후의 신분으로 천자의 신하였었던 무왕이 천자인 주왕을 정벌한 것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칭송하지는 않았다. 공자께서도 마찬가지셨다. 상나라가 이미 덕을 잃어 주왕이 구멍에 피해있는 신세와 마찬가지였는데도 힘으로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왕을 참살하였기 때문이다. 중용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주역은 과(過)한 것이 아니라 조금 모자란 것(小)이라고 하고 있다. 주나라를 태동시킨 무왕을 변명하는 까닭인 듯 하기도 하다.

 

弗遇過之 飛鳥離之 凶 是謂災眚

만나지 아니하고 지나치니(弗遇過之) 새가 날아 이별하게 되니(飛鳥離之) 흉(凶)하다. 이것을 말하여 재앙(是謂災眚)이라고 한다.

  요(堯)임금이 아들에게 지위를 넘긴 것이 아니라, 덕이 있던 순(舜)임금에게 천자의 지위를 넘긴 것처럼, 상나라 주왕이 무왕을 만나 그 지위를 넘겼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니, 곧 한계에 다다른 새가 더 높이 날기 위해 비상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주역은 상나라의 멸망의 책임은 조금 부족했던(小) 무왕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과했던(過) 주왕 때문이라고 탓을 하니, 무왕의 정벌을 변명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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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初九】虞 吉 有他 不燕

【九二】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六三】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六四】月幾望 馬匹 亡 无咎

【九五】有孚攣如 无咎

【上九】翰音 登于天 貞 凶

  이제 주역의 남은 마지막 4괘는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괘이다. 결국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면 중용(中庸)이다. 사서의 하나인 『중용』을 『소(小)주역』’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 철학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역은 시작하는 4괘에서 근본적인 것을 모두 말하였다. 자연스럽고 조화롭고 편안하고 그래서 아름답게 변화하여 마감하는 4가지 진리를 말하였다. 곧 때를 헤아리고(乾) 자리를 잘 잡고(坤) 함께하고(屯) 깨우치는(蒙)것을 말하였다. 첫4괘와 마지막4괘를 제외한 나머지는 첫4괘와 마지막4괘의 이치를 나누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역의 글 역시도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조화를 맞추고 있으니, 중용을 가르치고 중용을 보여줌으로써 끝내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곧은 믿음이(中孚) 돼지와 물고기에 이르니(豚魚) 길(吉)하다. 큰 내를 건너듯 과단성을 가지면 이롭고(利涉大川) 끝까지 이롭다(利貞).

  중부(中孚)는 미물인 돼지와 물고기 조차 의심할 수 없는 바른 믿음을 뜻하니 신급돈어(信及豚魚)의 줄임말이다. 신급돈어는 돼지나 물고기 등(等) 무심(無心)한 생물(生物)조차 믿어 의심(疑心)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올바른 믿음이라면 과단하게 나아가야 하고 끝까지 이로운 것이다.

 

虞 吉 有他 不燕

깊이 헤아리는 것(虞)이 길(吉)하나 다른 것이 생긴다면(有他) 편안하지 않다(不燕)

  공자께서는 계강자가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하였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이면 충분하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20장]고 말씀하셨다. 계강자가 지나치게 신중하고 생각이 깊었던 까닭인데, 지나치게 헤아리는 것 자체가 중용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주려 한 것이었다. 생각을 한번 더 한다고 늘 이로운 것은 아니다.

 

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어미학이 그늘에서 부르니(鶴鳴在陰) 그 새끼가 화답한다(其子和之) 나에게 좋은 잔이 있으니(我有好爵) 나와 너 함께 더불어 나누리라(吾與爾靡之).

  배움을 새를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익힐 습(習)이란 글자도 어린새가 어미새를 보고 날개짓을 하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어미학이 그늘에서 소리를 내어 그 새끼를 부르고 그 새끼가 화답하는 것처럼 중용의 바른 도리를 먼저 깨우친 자가 미숙한 이를 불러 더불어 잔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습 역시 조화로움을 꾀하는 중용이다.

 

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적을 얻으니(得敵) 두드려보고(成鼓) 멈춰서보고(或罷) 울어도보고(或泣) 노래도 해 본다(或歌).

  적(敵)이란 중용의 도에 대한 의문 즉, 의혹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주희는 대학의 원문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인데, 후대로 전해지면서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그 부분을 보완하여 채워넣었다. 천하의 이치는 깨달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니 그 궁극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 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가는 절차탁마(切磋琢磨)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月幾望 馬匹 亡 无咎

달이 거의 차니(月幾望) 마필이(馬匹) 사라져야(亡) 허물이 없다(无咎)

  달이 거의 찬 것은 학문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마필은 수레에 태워 나를 이끌어 주던 말들이니, 곧 스승을 뜻하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면 하산을 시킨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스승의 역할이 있고 스스로 깨쳐야 할 부분이 있다.

 

有孚攣如 无咎

신념으로(有孚) 붙잡아 매니(攣如) 허물이 없다(无咎).

  공자께서는 “안회는 그 마음을 다해 3개월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는데, 나머지는 하루이틀, 일이개월 그럴 뿐이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7장]라고 하셨다. 배워 알았다고 끝이 아니다. 신념으로 붙들어 매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미 깨우친 공자께서도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면 정신이 굳어진다.

 

翰音 登于天 貞 凶

날 수 없는 닭(翰音)이 하늘로 오르려 하면(登于天) 끝내(貞) 흉(凶)하다.

  한음(翰音)은 닭의 다른 이름이다. 날 수 없는 닭이 날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니 곧 제 수준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게 된다”[논어 제2편 위정 제15장]고 하셨다. 곧 한음(翰音)은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 자를 말함이니 곧 서울에 가 본 적 없으면서 서울에 가 본 사람을 이기려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도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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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 亨 震來虩虩 笑言啞啞 震驚百里 不喪七鬯
【初九】震來虩虩 後 笑言啞啞 吉
【六二】震來厲 億喪貝 躋于九陵 勿逐 七日得
【六三】震蘇蘇 震行 无眚
【九四】震遂泥
【六五】震往來 厲 意 无喪有事
【上六】震索索 視矍矍 征 凶 震不于其躬 于其鄰 无咎 婚媾 有言

  진(震)괘는 우레, 벼락을 말한다. 하늘이 사람에게 주는 경고이자 가르침이다.

 

震 亨 震來虩虩 笑言啞啞 震驚百里 不喪匕鬯
우레(震)는 힘차다(亨) 우레가 거침없이 오니 무섭고 두려워(震來虩虩) 웃음과 말소리도 잦아든다(笑言啞啞) 우레가 백리를 놀라게 해도(震驚百里) 숟가락과 창주그릇은 떨어뜨리지 마라(不喪匕鬯)
  숟가락(匕)과 창주그릇(鬯)은 모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제사를 지낼 때의 엄숙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아무리 큰 일이 벌어져도 사람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러나 죽는 것은 천명이니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면서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니 곧 중용에서 말한 '도끼자루를 잡고 도끼자루를 만들려고 나무를 자르면서 어떤 규격으로 잘라야 하는지를 멀리서 찾으려는 것'[중용 제13장]과 같은 것이다. 단순한 사상(死傷)에 대한 두려움만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震來虩虩 後 笑言啞啞 吉
우레가 와서 무섭고 두려운(震來虩虩) 후(後)에도 웃음과 말을 조신하게 해야(笑言啞啞) 길(吉)하다.
  우레가 끝난 후 아무 일도 없듯 웃고 떠들지 말고, 하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라는 말이다. 단순한 사상(死傷)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라고 말한다. 중용에 “사람의 도리(道理)를 알고자 한다면 하늘의 이치를 알지 않을 수가 없다”[중용 제20장]고 하였다. 고래로부터 바른 길을 가지 않으면 천벌을 받고, 벼락을 맞는다고 하여 ‘벼락맞을 놈’이라는 욕설이 있다.

 

震來厲 億喪貝 躋于九陵 勿逐 七日得
우레가 와서 위태로우니(震來厲) 재물을 잃을까 걱정되어(億喪貝) 구릉으로 올라도(躋于九陵) 이미 잃은 것을 좆지는 말라(勿逐) 이레면 얻는다(七日得)
  재화는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7일은 음양오행의 순리에 따라 한번 순환하는 것으로 한번 순환하면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한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소탐대실 즉, 작은 것을 탐하여 큰 것을 잃지마라는 의미이다. 우레는 보통 많은 비가 동반된다. 그래서 비가 없는 ‘날벼락’이란 말이 생겼을 것이다. 우레의 강한 전기가 물을 타고 흐르기 때문에 젖고 물이 차기 쉬운 낮은 땅보다 높은 구릉으로 올라가야 안전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높은 곳이 더 위험하다고 한다.

 

震蘇蘇 震行 无眚
우레가 소소해도(震蘇蘇) 우레가 다 지나가야(震行) 재앙이 없을 것이다(无眚)
  소소(蘇蘇)하다는 말은 끝났는가 싶었는데 다시 살아나고 끝났는가 싶었는데 다시 살아나고 하는 것이다. 완전히 지나가야(行) 재앙이 끝난 것이니,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다. 조급한 마음이 화를 부르니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震遂泥
우레는 진흙을 따라 사라지는 법이다(震遂泥)
  벼락은 높은 물체를 향해 떨어지고 난 후 그 전류가 진흙을 타고 퍼진다고 한다. 그래서 젖은 땅에 누우면 더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비가 반드시 지금 와야 하는 지는 몰라도 비는 아래로 내리는 법칙에 어긋나지 않으며, 우레가 반드시 지금 와야 하는지는 몰라도 우레가 진흙으로 퍼져 사라지는 자연법칙을 거스르지는 않는다. 시작은 몰라도 끝은 알 수 있으니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왜 지금의 세상에 태어났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죽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알 수 있다.

 

震往來 厲 意 无喪有事
우레가 지나가더라도 다시 오는 것이니(震往來) 두려워하고(厲) 헤아려보라(意) 잃지 않으려면 할 일이 있다(无喪有事)
  우레가 한번 오고 평생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헤아려 마땅히 대비해야 한다. 요즘세상에서처럼 건물에 피뢰침을 설치하는 것을 뜻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하늘이 사람을 두렵게 한 뜻은 스스로 천리를 거스르지 않고 바르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해 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벼락맞을 짓을 하지는 않아야겠다는 그 바른 도(道)를 잃지 말라는 뜻이다.

 

震索索 視矍矍 征 凶 震不于其躬 于其鄰 无咎 婚媾 有言
우레가 색색할 때(震索索) 눈을 두리번거리며(視矍矍) 나아가는 것은(征) 흉(凶)하다. 우레가 몸에 떨어지지 않았고(震不于其躬) 그 옆에 떨어졌으니(于其鄰) 허물은 없겠지만(无咎) 혼인을 청한다면(婚媾) 말들이 있을 것이다(有言).
  색색(索索)한 것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멈춘듯한 상태를 말한다. 우레가 거의 멈추었을때 눈을 두리번거리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기회를 포착해 뭔가 이득을 챙기려는 조급함을 보이는 사람이다. 곧 날랜 기회주의자를 말함이다. 이 사람에게 벼락이 직접 떨어지지 않고 옆에 떨어졌으니 사람이 다치지는 않아서 허물은 없다. 그러나 "모진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다"고 했는데 그가 혼인을 청함은 곧 모진놈 옆으로 오라는 것이므로 여러 말들이 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우레가 멈춘 것이 아닌 색색(索索)한 시기이며 하늘의 경고가 끝나지 않은 시기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지만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더 빨리 잡아 먹힌다. ‘아 좋은말이구나’ 하고서는 금방 지나쳐 잊어버리는 그러한 찰나성과 가벼움을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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夬 揚于王庭 孚號 有厲 告自邑 不利即戎 利有攸往

【初九】壯于前趾 往 不勝 爲咎

【九二】惕號 莫夜有戎 勿恤

【九三】壯于頄 有凶 君子夬夬獨行 遇雨若濡 有慍 无咎

【九四】臀无膚 其行次且 牽羊 悔亡 聞言不信

【九五】莧陸夬夬 中行 无咎

【上六】无號 終有凶

  쾌(夬)괘는 악(惡)에 공정함(正)으로 맞서는 것을 말하며 의로움을 추구하는 결단이다. 공자께 은혜로 원수를 대하면 어떠한지 여쭈니, 공자께서는 “그러면 은인은 어떻게 대할 것인가? 공정하게 원수를 대하고 은덕으로 은인을 대해야 한다” [논어 제14편 헌문 제34장]고 하셨다. 공자께서는 동해보복(동일한 해로움으로 복수)으로 원수를 대하는 것 즉, 원수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바름(正)으로 대해야 한다고 하셨다. 바름 곧, 의(義)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쾌(夬)이다.

 

夬 揚于王庭 孚號 有厲 告自邑 不利即戎 利有攸往

결단(夬)은 왕정에 알리는 것(揚于王庭)이며 신념을 부르짖는 것(孚號)이니 위태로움은 있겠지만(有厲) 고을에 숨어 외치면(告自邑) 적이 되어 맞서는 것이니 이로울 것이 없다(不利即戎) 시간이 지나가면 이롭다(利有攸往)

  악(惡)을 보고 방관하는 것은 악(惡)을 부흥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 마땅히 의롭게 나서야 한다. 비겁하게 숨어서 외치면 그것은 충언이 아니라 대항하는 것이 되니 결실이 없다. 위태롭더라도 왕정에 올라 외쳐야 한다. 시간이 지나가면 이로우리니 결국은 정의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壯于前趾 往 不勝 爲咎

크고 강한 기운이 발 앞에 모여있어(壯于前趾) 그렇게 나아가면(往) 이길 수 없고(不勝) 허물만 남는다(爲咎)

  행동하기 위해 기운이 발에 모여있으니 혈기만 가지고 서두는 것이다. 용맹이 지나쳐 과격한 것을 말하니, 의로움을 펼치는 것이 무모함이 되지 않으려면 냉철해야 하고 냉정해야 한다.

 

惕號 莫夜有戎 勿恤

두려워서 호소하면(惕號) 밤을 틈타 급습을 할 것이니(莫夜有戎) 두려워하지 말라(勿恤)

  지나친 용맹과 반대로 지나치게 두려워서 부르짖는 것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 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도적이 들었는데 두려워 울부짖으면 재물만 잃고 말 것을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생기는 법이다. 발 앞에 모여있는 과격한 용기도 모자라는 용기도 악(惡)을 바로잡을 수 없다.

 

壯于頄 有凶 君子夬夬獨行 遇雨若濡 有慍 无咎

큰 기운이 광대뼈에 있다면(壯于頄) 흉함이 있지만(有凶) 군자라면 결연히 홀로 가다가(君子夬夬獨行) 비를 만나게 되어도(遇雨若濡) 온기를 뺏기지는 않을 것이니(有慍) 허물이 없다(无咎)

  큰 기운이 광대뼈에 있는 것은 안색을 숨길 수 없어 의욕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견제를 받아 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군자라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허물이 없을 것이다. 군자는 의로움을 따르는 자이니, 오히려 드러난 의욕을 보고 바른 사람들이 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드러난다고 해치려는 자만 모이는 것이 아니기에 온기를 완전히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臀无膚 其行次且 牽羊 悔亡 聞言不信

엉덩이에 살이 없으니(臀无膚)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其行次且) 백성들을 이끌면(牽羊) 후회는 없겠지만(悔亡) 말은 들어주더라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聞言不信)

  분수에 맞지 않는 지위에 앉아있으니 자리가 편하지 않아 엉덩이에 살이 없게 된 것이다. 백성들을 이끌 지위에 위치하고는 있지만 그 지위에 걸맞는 능력은 없는 사람이다. 내적으로 후회는 없을지라도 신임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고 한다.

 

莧陸夬夬 中行 无咎

뭍에서 뛰어 노는 산양이 큰 결단을 내릴 때는(莧陸夬夬) 중용의 길을 가야(中行) 허물이 없다(无咎)

  뭍에서 뛰어 노는 산양은 민초들을 뜻한다. 위에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중용의 길을 가면 혁명이 되고, 중용을 벗어나면 반란이 될 것이다.

 

无號 終有凶

부르짖지 않으면(无號) 끝내 흉함이 있다(終有凶)

  의로운 줄 알면서 의로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는 “안으로 살펴서 부끄러움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논어 제12편 안연 제4장]라고 하셨다. 생사(生死)는 천명(天命)이니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의로운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나약한 마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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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初九】利用爲大作 元吉 无咎

【六二】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永貞吉 王用享于帝 吉

【六三】益之用凶事 无咎 有孚 中行 告公 用圭

【六四】中行 告公從 利用爲依 遷國

【九五】有孚惠心 勿問 元吉 有孚 惠我德

【上九】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 凶

  보태주는 것(益)은 하늘의 일을 대신 맡은 것이니 무거운 짐을 진 것이다. 공자께서 “나는 군자는 급한 곳을 구제해 주고 부유한 곳에는 보태주지 않는다고 들었다”[논어 제6편 옹야 제4장]고 하셨으나, 제자 염유가 부유한 계씨의 재산을 늘려주자 “나의 제자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울려 성토해도 좋다”[논어 제11편 선진 제17장]고 진노하셨다. 모자라면 보태주고 넘치면 덜어내는 것은 하늘의 도(道)이며, 그 바른 천도(天道)를 따르는 것이 군자의 사명이다.

 

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보탬(益)은 시간이 지나야 결실이 있다(利有攸往) 큰 내를 건너듯(利涉大川)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

  보태주는 것은 단번에 끝맺는 것이 아니라 꾸준함이 필요한 일이다. 마음 또한 재물에 얹어 보태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앞의 손(損)괘에서 말한 거친 베옷을 입은 사람에게 거친 베옷을 입고(曷之用) 다가가는 것이다. 주위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과단성 있게 나아가야 한다.

 

利用爲大作 元吉 无咎

크게 만들어 나가도록 사용해야 이로우니(利用爲大作) 근원적으로 길하고(元吉) 허물이 없다(无咎)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방법으로 현명하게 보태주라는 의미이다. 오직 짐승처럼 먹여주는 방법을 사용하기 보다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방법이 좋고, 쌀을 보태주기 보다는 농사를 짓도록 해 주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다.

 

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永貞吉 王用享于帝 吉

누군가가 보태주는 것은(或益之) 십붕의 비싼 거북점으로도(十朋之龜) 어긋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니(弗克違) 계속 끝까지 길할 것이다(永貞吉). 왕이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도(王用享于帝) 길(吉)할 것이다.

  혹익지(或益之)는 앞의 손(損)괘에서 나온 기적과 같은 횡재를 말한다. 천명(天命)으로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간접적인 베품이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제물을 사용하는 것이기에 사사로이 쓰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益之用凶事 无咎 有孚 中行 告公 用圭

보태주는 것은(益之) 흉한 일에 사용하면(用凶事) 허물이 없다(无咎) 신념을 가지고(有孚) 중용을 따라(中行) 공익을 도모하고(告公) 임금의 뜻이 닿는 곳에 사용하라(用圭).

  모자라면 채워주고 과하면 덜어내는 중용의 도를 따라야 한다. 나에게 넘치는 재물을 흉한 일을 당한 이웃을 도와주는 것으로 사용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임금의 뜻은 빈부의 지나친 치우침이 없이 백성이 고루 부유하고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中行 告公從 利用爲依 遷國

중용을 행하고(中行) 공익을 따라(告公從) 의지해야 하는 곳에 사용하면 이로우니(利用爲依) 나라를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遷國).

  대학의 “한마디 말이 대사를 그르치기도 하고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한다”[대학 제9장 제국치가]는 가르침이 연상되는 효이다. 나의 얼마되지 않는 기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라를 변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먼 길은 가까운 길부터 시작해 나아가며, 높은 산도 낮은 곳부터 올라가야 한다.

 

有孚惠心 勿問 元吉 有孚 惠我德

베푸는 마음에 신념이 있다면(有孚惠心) 묻지도 말라(勿問)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신념이 있다면(有孚) 나의 덕을 보태는 것(惠我德)이다.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속셈을 갖고 베푸는 경우도 있다. 사건을 무마하고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 위해 재산을 내 놓는 대기업 총수도 있으나, 그러한 보태줌이 아니라 마음으로 즐거워 베푸는 것은 어디에 물을 필요도 없이 길한 것이라고 한다.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덕을 보태는 것이라고 한다.

 

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 凶

보태주는 것이 막히거나(莫益之) 누군가 공격하면(或擊之) 마음을 세우되 방법을 고집하려 하지마라(立心勿恒) 흉(凶)하다.

  베푸는 선한 일이 방해 받는 경우가 있다. 장애인을 내세워 뒤에서 그것을 착취하는 소위 ‘앵벌이’의 경우처럼 나의 베품이 이용당하게 되는 것을 알았다면, 마음은 변함없이 세워놓되 그 방법을 고집하려 하면 흉하다고 한다. 결국 악을 돕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보태주는 것은 크게 만들어나가도록(用爲大作) 현명하게 보태주어야 하고 이용당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보태주어야 하니, 그래서 하늘은 그 임무를 맡길 만한 사람을 골라서 사명을 맡기는 것일 것이다. 현명한 방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보탬을 주라는 것이지 외면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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損 有孚 元吉 无咎 可貞 利有攸往 曷之用 二簋 可用享

【初九】已事 遄往 无咎 酌損之

【九二】利貞 征 凶 弗損益之

【六三】三人行 則損一人 一人行 則得其友

【六四】損其疾 使遄 有喜 无咎

【六五】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元吉

【上九】弗損益之 无咎 貞吉 利有攸往 得臣无家

  손(損)괘와 다음에 이어지는 익(益)괘는 중용(中庸)을 뜻하는 괘이다. 손(損)괘는 과하기 때문에 덜어내고, 익(益)괘는 모자라기 때문에 보태주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도(道)이다. 부족하면 채워주고 지나치면 덜어내는 것이 순리이니, 지나치게 그 손익에 집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하늘이 덜어내기 전에 뜻 있는 곳에 스스로 덜어내는 것은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니 근원적으로 길할 것이다.

 

損 有孚 元吉 无咎 可貞 利有攸往 曷之用 二簋 可用享

덜어냄(損)은 뜻이 있어야(有孚) 근원적으로 길하고(元吉) 허물이 없으니(无咎) 신념을 끝까지 유지하면(可貞) 시간이 지나가면 이롭다(利有攸往) 거친 베옷을 입어야 이롭고(曷之用) 두 그릇의 밥을 베풀어(二簋) 제사를 지내도록 도와주면 이롭다(可用享)

  부(孚)는 생각이 없는 것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 없이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가치 있게 덜어내는 것을 말한다. 뜻 있게 사용하면 다시 돌아오게 되니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면 이로운 것이다. 거친 베옷은 서민들이 입는 옷이다. 서민들에게 서민으로 다가가는 것을 뜻한다. 덜어내더라도 면 옷을 입고 교만을 부리지 말해야 하며, 생계만 유지할 수 있게 각박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제사까지 지낼 수 있도록 넉넉히 베풀라고 한다.

 

已事 遄往 无咎 酌損之

이미 지난일(已事)은 속히 보내버려야(遄往) 허물이 없을지니(无咎) 그 덜어냄을 생각해 보라(酌損之)

  29번째 감(坎)괘에서 구덩이에 빠지고 다시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흉하다고 했으니, 물리적인 구덩이에 빠졌다고 정신적인 구덩이(절망)에 빠지지는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미 지나간 손해가 있었다고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은 재차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로 덜어내야 할 것은 지나간 일에 대한 집착이다.

 

利貞 征 凶 弗損益之

그래야 끝까지 이로울 것이니(利貞) 정벌하려 하면(征) 흉(凶)하다. 덜어내었다고 보태주지는 않을 것이다(弗損益之)

  정벌(征)은 본전생각이 나서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본전생각을 하면 결국 있는 것 모두를 덜어내게 되는 대표적인 것이 도박이다. 안목이 단지 물질적인 손익만 생각할 줄 아는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의 도(道)는 모자란 것은 채워주고 넘치는 것은 덜어주어 중용(中庸)의 도리를 지킨다. 그러나 하늘이 도박하여 덜어내는 것까지 보태주지는 않을 것이니, 오히려 물질을 더욱 덜어냄으로써 마음의 모자람을 채워주려 할 지도 모른다.

 

三人行 則損一人 一人行 則得其友

세 명이 나아가면(三人行) 한명을 잃게 되고(則損一人) 한명이 나아가면(一人行) 친구를 얻게 된다(則得其友)

  실제 만남 사람은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이 만나면서 한 사람을 더 끼워들이면 관계가 깨어질 것이니, 없는 한 사람을 더 끌여들여 비교하는 것을 3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완벽한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일 것이다. 한명이 나아가는 것은 있는 자신을 덜어내고(損)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것이다. 그래야 친구가 되어 소통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중용의 도(道)이다.

 

損其疾 使遄 有喜 无咎

덜어내고 병을 얻으면(損其疾) 빨리 그 병통을 고쳐야(使遄) 기쁨이 있고(有喜) 허물이 없다(无咎)

  덜어내고 병을 얻는 것은, 잃은 것이 아까워 얻게 된 마음의 병이다. 물리적인 질병보다도 그러한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다. 부족하면 하늘이 다시 채워주는 것이 하늘의 법도인데 이미 근심(병)으로 그 비어짐이 다 차 버렸으니 채워줄 그릇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元吉

누군가가 보태주는 것은(或益之) 십붕의 비싼 거북점으로도(十朋之龜) 조정 할 수 없는 것이니(弗克違)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붕(朋)은 옛적에 화폐로 사용하던 조개껍질이다. 물질적 손익은 우연성이 많이 개입되기도 한다. 요즘으로 치면 로또에 당첨되는 것 같은 우연히 횡재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그러한 횡재는 아무리 비싼 거북점을 쳐도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내린 복으로 근원적으로 길하다. 주역점은 거북의 등껍질을 태워 그 갈라지는 것을 통해 점을 치는 것이 시초였고, 산가지(대나무)로 점을 치는 방법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弗損益之 无咎 貞吉 利有攸往 得臣无家

덜어냄으로써 보태주는 것이 아니니(弗損益之) 허물이 없고(无咎) 끝까지 길하여(貞吉)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으리니(利有攸往) 가정이 없는 신하를 얻으리라(得臣无家)

  하늘이 우연히 보태주는 것은 반드시 부족하다고 보태주는 것이 아니니 숙명이다. 자하는 “죽음과 삶에는 명이 있고 부유함과 귀함은 하늘에 달려있다(死生有命 富貴在天)”고 배웠다고 하였다.[논어 제12편 안연 제5장] 하늘이 준 복이니 근원적으로 길한 것이요,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복을 하늘이 왜 주었는지 알게 될 것이니, 곁을 떠나지 않는 충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가정이 없는 신하는 충복을 상징하며, 이 충복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모자란 곳을 찾아 채워주는 하늘의 일을 대신하도록 사명을 맡긴 것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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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 利西南 无所往 其來復 吉 有攸往 夙 吉
【初六】无咎
【九二】田獲三狐 得黃矢 貞吉
【六三】負且乘 致寇至 貞 吝
【九四】解而拇 朋至 斯孚
【六五】君子 維有解 吉 有孚于小人
【上六】公用射隼于高墉之上 獲之 无不利

  해(解)괘는 술술 풀리는 것이다. 우레가 진동하고 비가 쏟아지는 괘상이니 곧 메마른 세상이 촉촉하게 적셔지고 있는 것이다. 앞의 건(蹇)괘는 시간이 주는 시련이며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시련이라고 했었다. 이제 시간이 도래하여 반대의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니 그것이 곧 해(解)이다. 건(乾)괘에서의 용이 비상하여 하늘을 날고 있는 것(飛龍在天)과도 같다. 건(乾)괘에서 그러한 전성기가 도래하면 마땅히 도와준 사람에게로 나아가야한다(利見大人)고 하였는데, 마찬가지로 해(解)의 시기에도 사람에게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解 利西南 无所往 其來復 吉 有攸往 夙 吉
술술 풀릴 때(解)도 힘들지만 바른길이 이롭다(利西南) 갈 곳이 없다면(无所往) 되돌아와도(其來復) 길(吉)하다 시간이 지나면(有攸往) 곧(夙) 길(吉)해 진다.
  어려웠던 시기 건(蹇)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풀리는 해(解)의 시기에도 역시 힘들더라도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한다. 바른 길을 가는 것은 상황과 환경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갈 곳이 없다면 그 이유는 어려웠던 시절부터 바른 곳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解)의 시기의 시작은 우레가 진동하고 비가 쏟아지는 것에서 시작을 한다. 상황이 반대로 꺾이는 것은 반드시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벼락이 치고 비가 쏟아지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우레와 비가 그치고 세상이 촉촉해질 것이니 시간을 기다리면 곧 길하게 된다.

 

无咎
술술 풀릴 때는 허물 될 것이 없다(无咎)

  시간이 지나 우레와 비가 그치고 대지가 촉촉히 적셔진 상황을 말한다. 아무런 허물 될 것이 없다.

 

田獲三狐 得黃矢 貞吉
사냥을 하면 여우 세마리를 얻고(田獲三狐) 황금 화살촉도 얻게 될 것이니(得黃矢) 끝까지 길하다(貞吉)
  여우는 영리한 짐승이라 한 마리를 잡기도 힘드는데, 세 마리를 잡은 것만해도 큰 성취이지만 그 몸 속에 박혀있는 황금 화살촉까지 얻었으니 정말로 술술 풀리는 시기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술술 풀리는 시기라도 가만히 기다린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사냥을 나가야 그러한 성취를 얻을 수 있다.

 

負且乘 致寇至 貞 吝
짐지고 수레를 타면(負且乘) 도적을 불러들여(致寇至) 끝까지(貞) 어려워진다(吝).

  잡은 여우와 황금 화살촉을 빼앗길까 두려워 짐을 수레에 내려놓지 못하고 몸에 짐지고 수레를 타는 것이니, 반드시 도적을 불러들이게 된다. 독차지하려는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만나는 도적(근심)이다. 공자께서 "없으면 얻으려고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근심하니, 잃을까 근심하면 못할 짓이 없게 된다"[논어 제17편 양화 제15장]고 하셨다. 잃을까 걱정하는 근심만 늘어난 것이니 곧 도적을 만나 끝까지 어려워지게 되는 까닭이다.

 

解而拇 朋至 斯孚
풀려도(解而) 엄지발가락으로 시작해야(拇) 벗이 찾아와(朋至) 뜻을 함께 한다(斯孚).
  엄지발가락으로 시작함은 함(咸)괘에서 부부관계로 마음을 교감하려 할 때 엄지발가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즉 매사에는 순서가 있고 원형리정의 순차적인 변화를 겪어 열매가 맺히는 법이니, 풀리기 시작했다고 조급하게 바로 열매를 맺으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히 순서를 밟아 나가라는 가르침이다. 먼 곳을 가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부터 출발해야 한다.

 

君子 維有解 吉 有孚于小人
군자(君子)는 풀릴 때를 지탱할 수 있어야(維有解) 길(吉)하니 소인에게 뜻을 두어야 한다(有孚于小人)
  군자는 소인을 위해서 그 풀리는 기운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군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술술 풀린다고 자기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인들을 부유해지도록 도와야 한다. 공자께서 "군자는 의로움에 기뻐하고 소인은 이로움에 기뻐한다"[논어 제4편 이인 제16장]고 하셨으니 마땅히 군자는 소인을 이롭게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군자가 의로움을 추구하여 기쁨을 얻는 것이다.

 

公用射隼于高墉之上 獲之 无不利
공개적으로(公) 높은 성벽위의 독수리를 쏘아도(用射隼于高墉之上) 그것을 잡을지니(獲之)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높은 성벽위에 있는 독수리는 지위가 높은 흉수이다. 그 독수리에게 쏘겠다는 공개를 하고 쏘아도 잡을 수 있는 까닭은 군자로서 의로움을 추구하여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고, 흉수는 피할 곳이 없어진다. 술술 풀리는 시기는 사람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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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夷 利艱貞
【初九】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六二】明夷 夷于左股 用拯馬壯 吉
【九三】明夷于南狩 得其大首 不可疾貞
【六四】入于左腹 獲明夷之心 于出門庭
【六五】箕子之明夷 利貞
【上六】不明 晦 初登于天 後入于地

  명이(明夷) 괘는 밝음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공자께서 한탄했던 도가 무너진 세상을 의미한다. 공자께서는 “천하에 도가 살아있으면 나와서 일해야 하고 천하가 태평하지 않으면 숨어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13장]고 하셨다. 물론 산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갈고 닦으며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明夷 利艱貞
세상의 도가 무너지면(明夷) 성숙기와 말년사이가 어렵다(利艱貞)
  열매를 맺고 마감을 해야 하는 짧은 시간 속에서 도가 무너졌으니 뜻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으니 시절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명이(明夷)의 시절에 전성기가 지나가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해 결실을 맺고 마감을 할 수 없다면 그것도 천명(天命)일 지 모른다.

 

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도가 무너지면(明夷于飛) 날아야 할 때 그 날개를 접어야 한다(垂其翼) 군자의 길을 가면(君子于行) 3일 동안 먹을 수 없게 되고(三日不食) 시간이 지나가도(有攸往) 주인의 꾸지람만 듣게 된다(主人有言)
  도가 무너진 세상에서 오히려 군자의 길을 가면 배고픔이 있다고 한다. 좋은 소리를 들을수도 없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하게 될 것이요, 명예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해야 하는가? 주역은 날아야 할 때 그 날개를 접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변신하여 현실과 타협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나아가려고 애쓰지 말라는 뜻이다.

 

明夷 夷于左股 用拯馬壯 吉
도가 무너져서(明夷) 왼쪽 허벅지에 화살을 맞더라도(夷于左股) 구조에 사용할 말의 힘이 세면(用拯馬壯) 길(吉)하다.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왼쪽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으니 바르지 못함에 당한 것이다. 그러나 왼쪽 허벅지는 치명적이지 않은 신체의 부분이다. 치명타를 입지는 않았고 도와주는 센 힘이 있다면 큰 걱정이 아니다. 길(吉)한 이유는 날개를 접지 못하고 있는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날개를 억지로 접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明夷于南狩 得其大首 不可疾貞
도가 무너졌을 때 남쪽으로 사냥을 떠나서(明夷于南狩) 그 적의 수괴를 사로잡았다 하더라도(得其大首) 끝까지 서둘지 마라(不可疾貞)
  따뜻한 남쪽은 바른 도리를 상징한다. 그 곳에서 우두머리를 얻었으니 곧 세상을 밝은 도리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끝까지 서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도가 무너져 있으므로 급하게 세상을 변하도록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성왕이 나타나더라도 한 세대가 지나야만 세상을 어질게 만들 수 있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2장]고 하셨다. 세상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入于左腹 獲明夷之心 于出門庭
왼쪽 뱃속에 들어가(入于左腹) 도가 무너져있는 마음을 알았다면(獲明夷之心) 속해있던 집단에서 나와야 한다(于出門庭).

  왼쪽 뱃속이란 곧 심장이 위치한 곳을 말한다. 옛 사람들은 사람의 생각이 살고 있는 장소는 뇌가 아니라 가슴으로 여겼다 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고 생각하였고, 전통적으로 사람의 사망을 심장이 정지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근래에 뇌사를 인간의 사망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이 강하고 아마도 곧 그렇게 바뀌게 될 것 같기는 하다. 여하튼 그 마음을 통찰하여 도가 무너져 있음을 알았다면 속히 그 집단으로부터 나와야 현명하다고 한다.

 

箕子之明夷 利貞
도가 무너졌음을 알고 있는 현자(箕子之明夷)는 끝까지 이롭다(利貞)

  도가 무너졌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도 안목이 없다면 판단하기 힘든 일이다. 명이(明夷)의 세상에는 교묘한 말이 진실을 속이고, 사이비가 진짜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도가 무너진 세상은 말재주가 좋은 사람과 화려하게 꾸밀 줄 아는 사람이 존중 받는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난무하는 세상이라면 바른 도가 무너져 있는 세상일 것이다.

 

不明 晦 初登于天 後入于地
도가 무너졌음을 알지 못하는(不明) 어두움(晦)이라면 처음에는 하늘에 올라도(初登于天) 곧 땅으로 추락함으로써(後入于地) 마감을 하게 될 것이다.
  도가 무너졌음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안목을 가졌다면 처음에는 하늘에 오르는 것으로 착각하여도 후에 그 곳이 땅으로 추락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바른 도(道)가 무너졌음을 왜 알지 못할까? 도(道)에 마음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 지 못한다”[대학 제7장 정심수신]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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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壯 利 貞
【初九】壯于趾 征 凶 有孚
【九二】貞 吉
【九三】小人用壯 君子用罔 貞 厲 羝羊觸藩 羸其角
【九四】貞 吉 悔亡 藩決不羸 壯于大輿之輹
【六五】喪羊于易 无悔
【上六】羝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无攸利 艱則吉

  주역뿐 아니라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담긴 글에 나타나는 소(小)와 대(大)는 가정과 사사로움을 도모하는 의미의 소(小)와 나라와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의미의 대(大)로 나누어 구분한 것이다. 그래서 소인(小人)은 가정을 가장 중시하는 곧 필부필부(匹夫匹婦)하면서 사는 일반 백성들을 의미하고, 대인(小人)은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사명을 다하는 사회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대장(大壯)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대(大)에 중점을 둔 왕성한 힘이며(壯)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힘이니 이어지는 진(晉)괘의 권력을 이루기 위한 힘을 의미한다.

 

大壯 利貞
왕성한 기운(大壯)은 결실을 맺고(利) 마감하기(貞) 위해 쓰이는 기운이다.
  대장(大壯)은 결실을 맺고 마감을 하기 위한 기운의 발산이니, 대축(大畜)괘에서 말한 대축리정(大畜 利貞)과 같은 의미이다. 소축(小畜)은 성장기(亨)에 의욕 해야 하는 일이며, 대축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해서(利貞) 이뤄야 하는 일이라고 했었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기 위한 사용해야 할 소장(小壯)의 기운이라면 성장기(亨)이겠지만 사회를 위한 기운의 발산이므로 리정(利貞)인 것이다.

 

壯于趾 征 凶 有孚
기운이 발에 모여 있을 때(壯于趾) 나아감(征)은 흉(凶)하다. 뜻이 있어야 한다(有孚)
  기운이 발에 있음은 행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육체적 힘에 치우쳐 있는 것을 말한다. 발(육체적 힘)과 머리(정신적 힘)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강한 물리적 힘으로 나아가는 것은 흉하니 정신가치가 뒷받침되지 않는 권력찬탈에 불과한 쿠테타가 오래갈 수 없는 까닭이다.

 

貞 吉
마지막(貞)이 되어야 길(吉)하다.

  대장(大壯)괘에서 말하는 강한 기운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한 리정(利貞)의 힘이니, 곧 정점에서 가장 강력하게 터트리는 힘의 발산이다. 힘을 집중하여 남김없이 발산하여야 길하다. 배수의 진을 친 군대를 이기기가 힘든 까닭은 남김없이 힘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小人用壯 君子用罔 貞 厲 羝羊觸藩 羸其角
소인은 육체적 힘만 사용하려 하고(小人用壯) 군자는 그물만 사용하려 하면(君子用罔) 끝까지(貞) 위태롭다(厲) 새끼양이(羝羊) 울타리를 들이받고(觸藩) 그 뿔이 처량하게 된다(羸其角)
  열매를 맺고 마감하는 강한 힘의 집중은 혼자서 애쓰는 힘이 아니며 함께 뭉쳐서 행사하여야 할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소인과 대인이 따로따로 분산된 힘을 발산하고 있으니 위태로운 것이다. 양은 제사에서 희생양으로 삼는 동물인데, 힘없는 민초(백성)를 말함이다. 소인과 군자가 힘을 조화롭게 뭉치지 못하면, 애꿎은 백성들의 희생만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貞 吉 悔亡 藩決不羸 壯于大輿之輹
마침내(貞) 길(吉)해지고 후회가 없게 되려면(悔亡) 울타리가 터져서(藩決) 처량함이 없어지고(不羸) 큰 수레를 타고 큰 기운이 터져나가게(壯于大輿之輹) 해야 한다.
  음과 양의 조화로움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있는 벽이 곧 울타리이다. 그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음양의 조화가 이뤄지면 거침없이 큰 기운이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상호간에 조화를 도모하여 중용(中庸)의 도를 지켜야 한다.

 

喪羊于易 无悔
길 잃은 양은 돌아오게 해야(喪羊于易) 허물이 없다(无悔)
  큰 기운이 퍼져 나가기 위한 음양조화를 위해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요, 뜻하지 않은 희생 역시 있었을 것이다. 길 잃은 양은 두려워 도망친 백성을 말함이니 다시 제자리로 데려와 보살펴주어야 허물이 없다. 어떻게 데려와야 하는가? 자공이 정치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면 멀리서도 저절로 모여들 것입니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6장]라고 하셨다. 길 잃은 양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바른 정치로 도(道)를 밝히는 것이다.

 

羝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无攸利 艱則吉
새끼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아(羝羊觸藩) 물러나지 못하고(不能退) 나아갈 수도 없다면(不能遂) 유리할 게 없지만(无攸利) 그 어려움이 있음으로(艱則) 길(吉)하다.
  길 잃은 양이라면 어디서 헤매고 있는지 몰라서 구해주러 찾아 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하니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진퇴양난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양이라면 길 잃은 양을 찾는 것 보다는 쉽게 구할 수가 있다. 길 잃은 양은 속박되지는 않았으나 구해주기 어려운 양이며, 오도가도 못하게 된 양은 속박되어 보다 어려움에 처한 양이지만, 큰 기운이 터져나가 성취가 된 후에는 가장 먼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려움이 있는 것이 오히려 길(吉)한 까닭이다. 그래서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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遯 亨 小利貞
【初六】遯尾 厲 勿用有攸往
【六二】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九三】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九四】好遯 君子吉 小人否
【九五】嘉遯 貞吉
【上九】肥遯 无不利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것이 바른 도(道)이다. 둔(遯)괘는 숨는다는 뜻이나 비겁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용기있게 물러나는 것이다. 둔(遯)은 집에서 기르던 돼지(豚)가 우리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공자께서 “함부로 위험한 나라에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 거처하지 않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살아있으면 나와 일해야 하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숨어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3장]고 하셨으니, 외형은 물러남이지만 결과는 바른 곳으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둔(遯)괘이다.

 

遯 亨 小利貞
물러나야(遯) 할 때는 성장기(亨)여야 하고 결실기와 마감기(利貞)에는 득이 적다(小)
  물러나는 것도 때를 놓치면 어렵게 된다. 일을 시작하여 성장하는 단계에서 물러나는 것이어야지 이미 결실기와 마감기로 접어드는 때 물러나는 것은 발을 너무 깊게 담근 상태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초창기에 과단하게 발을 빼야 한다. 시기가 늦으면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배신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遯尾 厲 勿用有攸往
미련을 남겨두면(遯尾) 위태로우니(厲) 시간이 지나가도록 기다리지 말라(勿用有攸往)
  많은 경우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기다리는 것은 좋지 못하다. 물러나야 할 때라면 미련을 두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과단하게 물러나야 한다.

 

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황소의 가죽처럼 굳세고 질기게 물러나야 하니(執之用黃牛之革)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물러나겠다는 말을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莫之勝說)
  미련을 남기지 말고 황소의 가죽처럼 단호하게 물러나야 한다.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여 혼란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맹자』의 ‘부유하고 귀한 것이 흔들 수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것이 바꾸게 할 수 없고 위협과 무력이 굽히게 할 수 없다’는 말처럼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물러나야 할 때라면 과단성 있게 물러나야 한다.

 

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물러남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係遯) 병통이 있고(有疾) 위태로울 수도 있다(厲) 대비하여 신첩을 길러야(畜臣妾) 길(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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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러나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어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물러나기가 어렵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다섯번째 괘 수(需)괘에서 말한 발을 빼기 쉬운 모래밭에 있는 것(需于沙)이 아닌 발을 빼기 힘든 진흙밭에 있는 것(需于泥)이다. 진흙밭에 거주해야 한다면, 만약을 대비하여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신첩의 신(臣)은 남자종 첩(妾)은 여자종을 의미한다.

 

好遯 君子吉 小人否
즐겁게 물러나는(好遯) 군자는 길하나(君子吉) 소인은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小人否)
  즐거운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는 이유는 밀려나는 것이 아니요,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요,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니 곧, 바른 길(道)을 따르는 것이기에 즐겁고 그 결과도 길(吉)할 것이다. 중용에 “군자가 중용을 행하는 것은 군자로서 때와 상황을 헤아려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인이라면 오직 ‘물러난다’는 사실만 아프게 직시하여 즐거울 수 없을 지 모른다.

 

嘉遯 貞吉
칭찬속에 물러나니(嘉遯) 끝까지 길하다(貞吉)
  물러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고 아름답게 여기니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물러나는 마음을 알아주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구나. 달아날 때 홀로 뒤쳐져 있다가 성문을 들어올 때 말을 채찍으로 때리며 뒤를 지킨 것이 아니라 말이 빨리 달리지 않았다고 하는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15장]라고 칭찬하셨다.

 

肥遯 无不利
물러나더라도 풍족하다면(肥遯)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풍족은 단지 물질적 풍족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니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던 은자(隱者)들처럼 탐심을 없애니 오히려 더 커진 마음의 풍족함이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지으신 ‘도산잡영(陶山雜詠)’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돌우물이 맛있고 시원하니 진실로 풍족하게 물러날 수 있는 장소를 베풀어 주셨도다(石井甘冽 允宣肥遯之所)’라는 표현에서 이 비둔(肥遯)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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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初六】浚恒 貞 凶 无攸利

【九二】悔亡

【九三】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九四】田无禽

【六五】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上六】振恒 凶

  항(恒)괘는 변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곧 신념을 뜻한다. 지나치게 강한 신념은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지만, 신념이 없으면 자기 생과 삶을 개척해 나가지 못하고 이목에 이끌려 피동적으로 따라다니는 삶을 살게 만든다. 신념은 맹목과 맹신이 아니다. 귀를 닫고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귀를 더 열고 눈을 더 크게 떠야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의무필무고무아(毋意毋必毋固毋我)'하셨다고 하니, "맘대로 짐작하는 것, 반드시 하려는 것,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 자신만 옳다고 하는 것" 이 네 가지 병통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논어 제9편 자한 제4장]

 

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신념(恒)을 세우는 것은 성장기여야(亨) 허물이 없고(无咎) 성숙기와 마감기로(利貞) 시간이 지나가면 결실을 맺게 된다(利有攸往)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모범의 틀에 갇혀있으면 1등을 할 수는 있겠지만 수동적인 틀에 박힌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공자께서는 "함께 배운다고 반드시 같은 길을 가지는 않으며, 같은 길을 간다고 반드시 같은 성취가 있는 것이 아니며, 같은 성취가 있다고 반드시 같은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9편 자한 제30장]고 하셨다. 사람은 기계부품처럼 같을 수 없으니 젊을 때 자아를 확립하고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을 때의 확립된 자아와 신념은 식견이 부족하여 냉정하고 정확할 수는 없을 것이나 허물은 아니다. 성숙기 마감기를 향해 시간이 지나가면, 식견이 높아지고 그 신념이 바르게 확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浚恒 貞 凶 无攸利

지나치게 고집하면(浚恒) 끝(貞)이 흉(凶)하니 유리할 것이 없다(无攸利)

  준항(浚恒)은 조금의 융통성도 용납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고집스러움을 뜻한다. 논어에 “큰 절개는 엄격해야 하지만, 작은 절개는 때론 들고 날 수가 있다”[논어 제19편 자장 제11장]고 하였다. 제자 안회가 죽자 공자께서도 지나치게 슬퍼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상심하였느냐? 그러나 이런 사람을 위해서 지나치게 상심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서 지나치게 하겠느냐?”[논어 제11장 선진 제9장]고 하셨다. 조선조의 유학은 작은 절개가 들쑥날쑥하면 마음이 방종해져 큰 절개를 해친다고 주장하며 엄격한 원칙론을 고수하였으니, 주역에서 말하는 준항(浚恒)이 아니었는가 싶다.

 

悔亡

그러나 후회는 없을 것이다(悔亡).

  지나친 원리원칙주의자는 외적으로는 흉하나 내적으로 후회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맞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옳다고 믿기 때문에 고수하는 것이기 때문인 까닭이다.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신념 없이 순종하는(不恒其德) 것이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하고(或承之羞) 끝내(貞) 어려움을 당하게 한다(吝)

  신념이 있는 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자아가 확립되고,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신념 없이 순종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고 끝내 어려움을 당하니, 생각이 없어 갈대처럼 휘둘리는 사람보다는 지나쳐 융통성이 없을지라도 신념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田无禽

사냥을 해도(田) 잡은 짐승이 없을 수는 있다(无禽)

  신념으로 인해 먹는 문제 즉, 경제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는 있다. 순종하는 사람과 지나치게 고집하는 사람 모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신념 없이 순종하면 수치스럽게 되니 곧 정신적인 아픔을 당하고, 지나치게 신념을 고집하면 고고함은 지킬 수 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런 심리적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신장은 욕심이 많은데 어떻게 굳셀 수 있겠는가?”[논어 제5편 공야장 제11장]라고 하셨다.

 

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그 덕이 한결같아(恒其德) 끝까지(貞) 변치 않으면 부인은 길하겠지만(婦人吉) 남편은 흉하다(夫子凶).

  그래서 부인의 뜻을 꺾기가 더 어려울 지도 모른다. 남편은 집안과 가정을 위해서 그 뜻을 쉽게 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양의 의무감은 남자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역의 손(損)괘에서는 가정이 없는 충복(得臣无家)을 얻는다는 효사가 등장한다. 가정이 있으면 완전한 충복이 되기가 어렵다. 가정의 생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인의 덕은 가정을 단속하는 것이기에 변치 않아야 길하고, 남편의 덕은 소축기(가정), 대축기(사회)를 거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변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결같으면 흉하다라는 해석도 좋은 것 같다.  

 

振恒 凶

신념을 흔드는 것(振恒)은 흉(凶)하다.

  신념은 내면적인 자존이다. 외부에서 영향을 주어 신념을 가지도록 하거나 신념을 굽히도록 강제하는 것은 흉할 뿐이다.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삼군대장의 권력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일개 보통사람이라도 그 의지를 빼앗을 수는 없다”[논어 제9편 자한 제26장]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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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 利貞 亨 畜牝牛 吉
【初九】履錯然 敬之 无咎
【六二】黃離 元吉
【九三】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九四】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六五】出涕沱若 戚嗟若 吉
【上九】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리(離)괘는 아래 위로 해가 두 개인 괘이다. 이미 해가 있으면 다시 해를 만들지 않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리(離)괘는 해가 있음에도 하나의 해를 더 만드는 것이니, 곧 바람직하지 않은 힘의 행사이다. 새로운 해는 기존의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세상에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저물어 없어지고 난 후에 나서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 시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옳지 못한 침략을 상징한다.

 

離 利貞亨 畜牝牛 吉
침략(離)은 결실을 얻고 끝을 낸 후에(利貞) 성장시키겠다는 것이나(亨) 순한 암소를 기르듯(畜牝牛) 순응해야 길(吉)하다.
  주역이 말하는 순탄한 변화의 법칙은 씨(元)가 자라서(亨) 열매를 맺고(利) 소멸하는(貞)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침략은 엎어버린 후에(利貞) 성장(亨)을 도모하는 것을 말함이니 천도(天道)를 벗어난 것이며 섭리에 따르지 않는 조급함이다. 곧 해가 있는데 해가 나서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긋남을 도모하지 말고 순한 암소를 기르듯 해야만 길할 것이다. 암소는 곤(坤)괘의 암말과 마찬가지로 유순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유순하지 못하면 전쟁이 있고 파괴가 있고 이별이 있게 된다.


履錯然 敬之 无咎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면(履錯然) 그것을 공경해야(敬之) 허물이 없다(无咎)

  이착연(履錯然)은 발소리가 어지럽다는 말이다. 어지러운 발소리는 군사들이 훈련을 하는 소리이다. 급박하게 뒤섞인 발소리를 들으면, 보지 않아도 군사의 훈련임을 안다. 비가 오기 전에는 청개구리가 울고, 제비가 낮게 나는 등등의 비의 징조가 있고, 태풍이 불기 전에는 별이 지나치게 맑거나 해륙풍이 무너지는 징조가 나타난다. 중용에도 “나라와 집안이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고, 나라와 집안이 망하려 하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조짐이 있다”[중용 24장]고 하였다. 어지러운 군사의 발소리는 침략의 징조이다.

 

黃離 元吉
중용의 덕으로 침략을 대하면(黃離)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문종이 김종서에게 ‘중정(中正)’에 관해서 물으니, "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으며 지나침도 없고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을 뜻합니다. 정(正)이란 것은 지극히 공평하여 조금도 사심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정(正) 또한 중(中)입니다" 즉,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의 중간이 아니라, 바른 것이 중(中)이라는 말이다. 중은 또한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中)으로 침략을 대하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해가 중천에 있는데 다른 해를 만들려는 것이라면 응징해야 하고, 이미 기운 해라면 물러나는 것이 곧 중(中)을 따르는 것일 게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나라가 희망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고려에게 나라를 바쳤으니, 그 또한 중용으로 침략을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해가 기울면 침략을 대비해야 하는데(日昃之離) 북을 쳐서 경계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니(不鼓缶而歌) 경험 많고 혜안이 있는 노인네가 탄식하게 되어(則大耋之嗟) 흉(凶)하다.
  해가 차서 기울고, 기존의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등장하게 되는 변화가 이어지게 하는 것이 하늘의 섭리이다. 해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해가 떠 오르는 순조로운 순환이 이뤄지면 좋겠지만,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급하게 그 틈을 노리는 침략의 위험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침략을 대비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만 하고 있으니 경험 많은 노인네가 어찌 탄식이 없겠는가? 공자께서 “사람이 멀리 내다보고 고민하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이 가까운 날 생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2장]고 하셨다.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침략은 갑작스레 이뤄져(突如其來如) 불태워버리고(焚如) 죽여버리고(死如) 내다버리고(棄如) 한다.

  평화롭던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것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와 힘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공든 탑은 오랜 시간이지만 그 무너지는 것은 일순간이다. 급작스럽게 불타고 죽고 버려지게 된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出涕沱若 戚嗟若 吉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出涕沱若) 탄식이 쏟아져 나오니(戚嗟若) 길(吉)하다
.
  눈물이 비오듯 하고  탄식소리가 끊임없는 까닭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니 길하다. 불타고 죽고 버려져도 끝장이 난 것이 아니니, 침략자가 순리를 따르지 않은 까닭이다. 해가 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해를 만들려고 한 침략세력의 과욕 때문이니 천명(天命)이 침략자들에게 있지 않은 까닭이다.

 

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왕이 출정하여(王用出征) 기쁨을 줄 것이다(有嘉). 우두머리는 참수(折首)해도 그 부하들은 죽이지 않아야(獲匪其醜) 허물이 없다(无咎).
  왕이 출정을 하는 것은 바른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이다. 왕이 사람들을 모아 반격을 하여 승전할 것이나 다만 우두머리는 참수해도 그 부하들은 죽이지 않아야 한다. 주역의 이 가르침에 의하면 일본의 위정자들은 미워해도 일본 국민을 미워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된다. 백성들은 모두 같은 힘없고 가엾은 생명일 뿐이다. 참수하고 미워해야 할 이는 그들을 이용한 우두머리 계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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習坎 有孚 維心亨 行 有尚

【初六】習坎 入于坎窞 凶

【九二】坎 有險 求 小得

【六三】來之坎坎 險 且枕 入于坎窞 勿用

【六四】樽酒 簋貳 用缶 納約自牖 終 无咎

【九五】坎不盈 祗既平 无咎

【上六】係用黴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

  인생은 함정의 연속이기도 하다. 사람의 교활함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만 그물을 펼치고 함정을 만들지는 않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한 적은 인간이라고 하였다. 공자께서는 "사람마다 모두 자신이 지혜롭다고 과신하지만 그물과 덫이나 함정으로 몰아넣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중용 제7장]고 안타까워 하셨다. 습감(習坎)괘는 함정에 빠짐을 의미하는 괘이다. 습(習)은 잘못 들어간 글자로 보아, 감(坎)괘라고 하기도 한다.

 

習坎 有孚 維心亨 行 有尚

함정에 빠져도(習坎) 신념을 잃지 말고(有孚) 마음을 붙들어야(維心) 발전(亨)이 있다. 그렇게 나아가야(行) 복이 생긴다(有尚)

  영특한 제자였던 제아가 공자에게 "어진 사람이 있는데 우물에 사람이 떨어졌다고 하면 그는 구하려 내려갈까요?"라고 여쭈었다. 말하자면 어진 자를 속이고 이용해 먹기는 쉽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공자께서는 "어진 사람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를 우롱할 수는 없을 것이다"[논어 제6편 옹야 제26장]고 답을 하셨다. 인자(仁者)를 속일 수도 있으니 그를 함정에 빠뜨릴 수는 있다. 하지만 속임을 당했다고 속인자를 미워하거나 어질었기에 당했음을 한탄하여 어질지 않은 길을 가도록 변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셨다. 그 뜻은 유학에서 말하는 ‘신독’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 즉 자신만이 아는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니, 물리적 함정보다 더 위험한 것은 정신적 함정이다.

 

習坎 入于坎窞 凶

구덩이에 빠지고(習坎) 다시 구덩이에 빠지면(入于坎窞) 흉(凶)하다.

  처음의 구덩이는 물리적인 함정이지만, 또 다시 빠지게 되는 구덩이는 자기 내면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함이니, 곧 마음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함정에 빠졌다고 뜻을 저버리는 것은 재차 함정에 빠지는 것이니, 공자께서 "군자는 어쩔 수 없는 때에도 원칙을 벗어나지 않지만, 소인은 어쩔 수 없게 되면 곧 함부로 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장]고 하신 말씀이 연상되는 효사이다.

 

坎 有險 求 小得

구덩이에(坎) 위험이 있을지라도(有險) 절망하지 않고 방도를 구하면(求) 적게라도 얻음이 있을 것이다(小得)

  외적인 함정은 벗어날 수도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였고,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하였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은 마음의 함정이며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來之坎 坎 險 且枕 入于坎窞 勿用

구덩이로 와서(來之坎) 빠지지는 않았으나 구덩이(坎)가 위험하다고(險) 잠자듯 나아가지 못한다면(且枕) 그 역시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같으니(入于坎窞) 그렇게 잠자듯 하지 말아야 한다(勿用)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재물이 아까워 쓰지 못하고 묻어두는 부자는 재물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자와 다를 것이 없다. 구덩이에 빠질까 두려워 나아가지 못함은 구덩이에 빠져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樽酒 簋貳 用缶 納約自牖 終 无咎

술을 정성스레 마련하고(樽酒) 두 그릇의 기장밥을 준비하는 마음으로(簋貳) 소박하게 하여(用缶) 창을 통해 들이고 받으며(納約自牖) 제사를 지내면 마침내(終) 허물이 없을 것이다(无咎).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는 까닭은 바른길을 가게 해 주십사, 세상을 바르게 해 주십사 비는 것이다. 혜택을 비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움을 비는 것이며, 나를 위해 비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비는 것이다. 공자께서 병이 들었을 때 자로가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러 가려고 하였다. 공자께서 그런 선례가 있는지를 물으니 자로는 자신 있게 '너를 위해서 천지신령께 기도한다'는 고대의 문헌을 근거로 내 세웠다. 그러자 공자께서는 그 문헌에서 말하는 기도는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 길을 가게 해 주십사 하는 기도이니, “그런 기도라면 내가 행한지 오래되었다”고 하셨다.[논어 제7편 술이 제35장] 함점에 빠졌어도 내가 아닌 전체를 둘러봐야 허물이 없다.

 

坎不盈 祗既平 无咎

구덩이가 아직 차지 않았을 때(坎不盈) 세상이 바른 기운으로 돌아온다면(祗既平) 허물이 없다(无咎).

  함정은 악을 가두기 위해 마련한 감옥이 아니라, 바르지 못한 자가 바른 자를 해치기 위하여 준비한 함정이다. 세상이 바르게 돌아온다면 바르지 못한 자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구덩이가 차지 않았다면 곧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 또한, 함정에 빠진 바른이가 그 곳에서 빠져나오는 것 보다 세상이 바로잡히는 것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허물이 없다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係用黴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

팔다리가 단단히 묶여서(係用黴纆) 빽빽하게 심겨진 가시나무속에 갇히게 되었다면(寘于叢棘) 삼년이 지나도 풀려날 수 없음이니(三歲不得) 흉(凶)하다.

  팔다리를 단단히 묶여야 하는 까닭은 그가 강자이기 때문이다. 강자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함정을 헤어나기 어렵게 된다. 강자가 함정에 빠진 이유는 강한 힘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 때 드러냈기 때문이다. “뛰어난 재주를 어리석음으로 감추고, 지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명철함을 지키고, 청렴함을 혼탁 속에 가려두고, 굽힘으로써 몸을 펴는 것, 이런 처세가 험난한 세상을 건너는 배를 타는 것이며, 몸을 보호하는 방편이다”[채근담 제1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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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過 棟 撓 利有攸往 亨

【初六】藉用白茅 无咎

【九二】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九三】棟橈 凶

【九四】棟隆 吉 有它 吝

【九五】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上六】過涉滅頂 凶 无咎

  대과(大過)는 심하게 지나간 것이니, 시기가 너무 늦었음을 말한다. 주역의 첫 가르침,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야 하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순리(乾)를 따르지 않았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시들고 메마른 버드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니 법이라고 한다. 대과(大過)괘의 효사는 시기를 놓친 남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기가 어긋나 있어도 기운이 조화를 이룰 수도 있는 법이니, 사람마다 기운이 일정하지 않고 일찍 열매를 맺을 수도 늦게 열매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도(道)가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완전한 법칙은 아니라는 말이다.

 

大過 棟撓 利有攸往 亨

혼기를 놓쳤으니(大過) 용마루가 굽을 것이지만(棟撓) 시간이 지나면 이로울 것이니(利有攸往) 발전해 나갈 것이다(亨)

  용마루가 굽은 이유는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을,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용마루로 비유한 것이다.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것이니 시간이 지나도 이로움이 없을 것이나,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늦은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게 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높았던 눈이 낮춰지고 분수를 알게 되어 과거에는 부족하다고 외면했던 짝이라도 충분하다 여겨지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치마만 두르면 되는 것이다.

 

藉用白茅 无咎

흰 띠로 자리를 짜서 사용하듯(藉用白茅) 순박한 마음이면 허물이 없다(无咎)

  자용백모(藉用白茅)는 제사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는 흰 돗자리를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마음 즉, 때 묻지 않은 맑고 경건한 마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도 약탈혼이 빈번하였다고 알려진다. 주역에서 혼인을 언급할 때 말(馬)을 등장시키는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나라는 문화가 성숙되고 도(道)과 예(禮)에 대한 관념이 자리잡아 힘을 숭상하는 관념이 약해지고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순간에 약탈혼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니, 순박한 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대과(大過) 하였다고 힘으로 취하려는 것을 경계한 의미일 것 같다.

 

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시든 버드나무에(枯楊)도 싹이 돋는 법이니(生稊) 나이든 지아비가(老夫) 어린부인을 맞으면(得其女妻)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나이든 홀아비는 양기가 쇠하고 어린 여자는 음기가 성장하고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기운이 음양조화에 어긋나여 궁합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시든 버드나무에는 새싹이 돋는다. 버드나무는 물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매우 강해서 아무리 메말라도 좀처럼 죽지 않기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 그래서 강한 성(性)을 상징하기도 하는 나무이다. 버드나무의 이런 성질 때문에, 창기(娼妓)를 두고 영업을 하던 술집을 버들 류(柳)자를 써서 화류(花柳)라고도 불렀다.

 

棟橈 凶

용마루가 굽으면(棟橈) 흉하다(凶).

  초육에서 말한 것과 같은 뜻이다.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 무게에 억눌려 있으면 흉(凶)하다는 말이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도 어렵고 시든 버드나무에 싹을 틔울 수도 없을 것이니, 늙음을 의식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棟隆 吉 有它 吝

단단하고 곧은 나무여야(棟隆) 길(吉)하지만 뱀처럼 힘이 없다면(有它) 어려워진다(吝)

  용마루가 굽은 것은 마음에 장애가 생긴 것을 말하지만, 뱀(它)은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뜻한다. 나무처럼 곧고 단단하지 못하고 뱀처럼 물렁거리고 휘어지는 성기라면 어려워진다. 그러나 흉(凶)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교감을 이루지 못하는 용마루가 휜 것이 흉(凶)하다고 하였으니, 신체가 따르지 못함보다 마음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 보다 큰 문제이다.

 

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시든 버드나무라도(枯楊) 꽃이 피는 법이니(生華) 나이든 부인이(老婦) 젊은 지아비를 얻어도(得其士夫) 허물이 없다(无咎) 그러나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无譽).

  버드나무는 강한 성(性)을 상징한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그래서 여인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허물은 없어도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니, 그것이 옛 시대의 관념인 듯 하다. 늙은 사내가 어린 처녀와 조화를 이루면 자랑하려고 하지만, 늙은 여인이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루면 음탕하다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적인 시각에서 보면 허물(咎)은 아니다.

 

過涉滅頂 凶 无咎

지나친 부부관계는 기력을 소진시켜(過涉滅頂) 보기에 흉(凶)하나 허물은 없다(无咎)

  지나치게 관계하여(過涉) 정점까지 이르러 끝을 본다면(滅頂) 흉측하지만 허물은 아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허물(咎)은 내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며, 길흉(吉凶)과 명예(譽)는 외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대과(大過)하여 조화가 맞지 않는 외양을 가진 한 쌍의 남녀가 부부관계를 과하게 가지면 외면적인 시각에서는 흉(凶)측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고 하건 당사자들에게는 허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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