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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4. 20:15

제2편 위정(爲政) 제22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4. 20:15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사람이 믿음이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큰 수레에 예(輗)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軏)이 없다면 [大車無輗 小車無軏]
어찌 움직일 수 있겠는가 [其何以行之哉]

 

  믿을 신(信)은 하나와 하나를 연결(人)시키는 말(言)이라는 의미다. 악당들조차 믿음이 없다면 그 무리는 해체된다. 좋은 연결이건 나쁜 연결이건, 연결되려면 믿음(信)이라는 연결끈이 있어야 한다. 예(輗)는 소가 끄는 우차에 소를 연결하고, 월(軏)은 마차에 말을 연결하는 기구이다.


  유가에서의 인간의 본성을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으로 분별한다. 분별은 언제나 조화를 지향하는 것. 결국은 성(性)으로 한 덩어리이다. 가슴속(心)에 살아있는(生) 것이 성(性)인데, 유가의 지향점은 이 성(性)을 찾는 것이다.

학문의 도(道)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 [맹자 고자 상 11.11]


  공자는 체득의 영역인 인(仁)은 그저 인(仁)이라며 설명하지 않았지만, 맹자가 보완하고자 설명하면서 부작용이 생겼다. 소위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비유 때문에 "측은지심 = 인(仁)"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후학들이 안과 밖에 있는 것을 가린다고 논쟁했다. 이렇게 다시 설명해보려고 한다.

"가녀린 아이가 불량배에 피가 터지도록 맞고 있다"

  맞고 있는 어린아이가 가여운 마음이 인(仁)이고, 이 폭력을 저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의(義)며, 북량배를 죽여버리지 않으려는 절제가 예(禮)이며, 나서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지 따져봄이 지(知)며, 이 사건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직시하는 것이 신(信)이다.


  끼워맞춰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마음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함께다. 의(義)를 강조했던 맹자 역시 의(義)는 독립되고 붙잡을 수 있는 관념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라고 설명했다.

의(義)를 행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의를 행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에서 잊어서도 안 되지만, 억지로 조장해서도 안 된다. [맹자 공손추 상3.2]


  얘기가 길어진 것 같다. 신(信)은 성(性)의 일면이라는 것. 신(信)이 없음은 한 덩어리로 융화하려는 도(道)에 역행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마무리 해야겠다. 예수를 믿지 못하면 예수와 이어질 수 없고, 붓다를 믿지 못하면 붓다와 이어질 수 없다. 마나님을 믿지 못하면 차려준 음식을 고맙게 먹을 수 없다. 멀어지고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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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