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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의자가 효에 관해서 묻자 [孟懿子問孝]
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 [無違]
번지가 수레로 모시자 공자 말씀하셨다 [樊遲御 子告之曰:]
-맹의자가 내게 효에 관해서 묻기에 어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번지가 물었다 [樊遲曰:]
-무슨 뜻인지요? [何謂也?]
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살아서는 예로 받들며, 죽어서는 예로 상을 치루고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예로 제사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祭之以禮]

 

   상상해보면 재미난 대화이다. 상황설명을 하자면, 맹의자는 노나라 군주(제후)를 업신여기며 군주(제후)만이 할 수 있는 예(禮)뿐 아니라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예(禮)까지도 행하던 노나라의 실권을 가진 3가중 한 명이었다. 그가 공자를 청해 효(孝)에 관해 물은 것이다. 추측건대, 공자는 더 자세히 물을 줄 알고 압축하여 얘기했는데 맹의자가 알아들은 척 하며 더 얘기를 들어주지 않은 것 같다.

  맹의자의 신하가 되어있던 제자 번지가 공자를 운전해서 바래다 주는데, 맹의자에게 전해주라는 의미로 번지와 대화를 하고 있다. 그냥 바로 얘기하면 될 것을, 굳이 번지가 질문하도록 유도하여 대답을 해 주는 공자가 재미있다. 호기심 많았던 번지도 맹의자처럼 변했을까 확인하려는 의도였는지, 묻기에 답해주는 것으로 체면을 세우고 싶어서였는지 그 속내는 물론 알 수 없다. 번지가 가볍게 질문을 하니, 기다렸다는 듯 열심히 설명해주는 공자는 정감이 가는 캐릭터이다. ^^

  이 장도 논어의 다른 대부분의 응답과 마찬가지로 효(孝)가 무엇이다는 일반원칙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맹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적해주는 눈높이 맞춤식 답변이다. 어쩌면 맹의자에게 ‘당신이 효를 행하고 싶으면, 예부터 바르게 행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번지에게 주군을 그렇게 되도록 모시라는 가르침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논어는 상황을 상상할 수 밖에 없고, 궁금함이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인 것 같다.

  예(禮)는 형식이 아니라 실질[마음]이 근본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차례 언급하였지만, 여기서는 형식을 따르는 것도 중요함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억지로라도 착한 행동을 반복하면 착한 마음이 생길까? 나쁜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나쁜 마음이 생길까? 행위가 마음을 이끌수도 있다는 것이 유학적 사유이다. 그래서 예(禮)는 담고있던 마음이 외부로 표현되는 것임과 동시에, 마음을 조절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논어의 후반부쯤에서 조금 더 깊게 논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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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정책으로 따르게 하고 형벌로서 규제하면 [道之以政 齊之以刑]
백성들은 모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될 것이다 [民免而無恥]
덕으로 따르게 하고 예로서 규제하면 [道之以德 齊之以禮]
부끄러움을 느껴 저절로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有恥且格]


   이 장은 강압적 정치의 단점을 덕치의 장점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형벌을 앞세워 강제하는 통치는 ‘마음의 반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재수없게 법에 걸린 것이지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아니다'고 하게 될 것이며, 법을 잘 피해다니는 것을 지혜로 여기고, 법을 피해갈 줄 모르는 것은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덕성을 찬미한 위정 제1장의 북극성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정치는 오직 덕치주의여야만 한다’고 하는 것도 곤란하다. 덕과 힘이 중용(中庸)의 조화를 이뤄야만 하는데, 공자시대에는 예(禮)라는 완화된 힘(규제)으로도 충분히 조절 가능하다고 판단하셨던 듯 하다.

  다원화된 오늘날에는 예(禮)의 규제보다는 법(法)이 조절작용을 해야할 것 같다. 그렇지만 덕을 지향하는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한다. 사람을 채찍에 움직이는 짐승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人間性)을 회복하여 사람의 길을 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은 블로거 입장에서 저작권법을 생각해보게 한다. 최근에는 TV영상을 몇 장면 캡쳐했다고 문제가 되었다는 글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강력한 단속으로 죄어가는 것이 순서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하는게 순서이지 않을까? 대화하고 조율하고 수긍하는 과정없이 힘을 앞세워 밀어붙이려는 것에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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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為政以德]
북극성으로 비유할 수 있다 [譬如北辰]
가만히 있지만 다른 별들은 그 중심을 돈다 [居其所而衆星共之]


이 장은 덕(德)이 가진 장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북극성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다른 모든 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
즉, 다른 별들이 북극성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이 따뜻함을 따라가는 것으로 비유해도 될 것이다.
후덕함은 분명 저절로 따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상적인 정치는 북극성처럼 덕으로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만, ‘오직 정치는 덕치(德治)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강제적 억제가 조절을 하여 조화를 이뤄야만 하는 것이니, 유가(儒家)의 현실적 모델은 예(禮)의 통제로 받쳐주는 것이었다.

윗 자리에서 따르도록 해야 할 때, 후덕함과 억제의 중용(中庸)의 기준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제 매를 들어야 하고 언제 사탕을 주어야 하나? 상대에 대한 이해가 그 출발선이 된다.
부하직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내 아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보다 적합한 기준을 찾아낼 수 있음이다. 그래서 남과 진정으로 통하고, 남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헤아리는 인(仁)의 관계함이 근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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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예의 작용은 조화로움이 중요하다 [禮之用 和為貴]
선왕의 도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先王之道斯為美]
작고 큰 것이 조화를 이뤄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小大由之 有所不行]
조화를 위한 조화만 알고 [知和而和]
예로써 조절할 줄 모른다면 [不以禮節之]
순조로울 수가 없다(참된 조화가 아니다) [亦不可行也]

 

   이 장이 해석이 분분한 이유는 ‘어떻게 해라’는 선명한 실천행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의 철학인 중용(中庸)을 설명하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禮)는 내면의 실질과 드러난 꾸밈의 조화이다. 마음이 없는 예는 허례이며, 솔직한 마음을 꾸밈없이 다 발산하는 것도 무례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中庸)의 균형선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곧 조화라고 하여 조화만을 추구하려는 꽉막힘도 문제이다.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힘을 사용해 막아야 하는 행위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형식적 예에 어긋나고 부자간의 조화가 깨어지더라도, 근본의 예[실질]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참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장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이고 늘 그러해야 한다는 고정된[죽은] 원칙은 없다는 중용(中庸)의 조화라는 관념이 정립되면 좀 더 선명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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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0. 19:11

유학의 상호관계성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19:11

논어 첫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배워서 수시로 따라해보면 어찌 기쁨이 없겠는가? (알아주는 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도 찾아주는 벗 있으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생길리 없으니 또한 군자이지않겠는가?"

 

① 나의 기쁨

② 더불어 나누는 즐거움

③ 자존을 잃지 않는 나

 

인(仁)으로 대입해 보겠습니다. 인(仁)을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더불어 함께 즐거우면 좋지만, 설령 그렇지 못해도 나의 기쁨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의(義)로써 대입해 보겠습니다. 의로움을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알아주면 즐거움을 나누지만, 알아주지 못해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예(禮)로써 대입해 보겠습니다. 예를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호응해 주면 함께 즐겁지만, 알아주지 않는다고 고개를 더 숙이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효도, 공경, 남편의 도리, 아내의 도리, 자식의 도리모두모두 같은 구조로 대입하시면 될 것입니다.

 

자식의 도리는 스스로의 기쁨입니다. 신하의 도리도 스스로의 기쁨입니다. 장자의 비유가 부분적으는 참 적절한 것 같습니다.

 

신체의 백개의 뼈마디와 오장육부를 통틀어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열은 없습니다. 다만, 다를 뿐입니다. 다르기에 각자 다른 역할을 합니다.

위가 잘 움직이면 대장이 잘 이어받아 순조롭게 이어주지만, 위가 잘 소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대장은 맡은 역할에 따라 최선으로 움직입니다.

 

그림그리기가 더 어렵네요. ㅠ.ㅠ

회색사람, 검은색 사람, 노란색 사람 세 종류가 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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升 元亨 用見大人 勿恤 南征 吉
【初六】允升 大吉
【九二】孚乃利用禴 无咎
【九三】升虛邑
【六四】王用亨于岐山 吉 无咎
【六五】貞吉 升階
【上六】冥升 利于不息之貞

  승(升)괘는 크게 발전하여 올라가는 것을 뜻하는 괘이다. 앞의 췌(萃)괘에서 만들어진 탄탄한 조직으로 뜻을 펼치려 나아가는 것이 승(升)괘이다. 13번째 동인(同人)괘에서 모여서 도(道)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마찬가지로 세상을 도(道)로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升 元亨 用見大人 勿恤 南征 吉
나아감(升)은 근원을 갖추어 성장하는 것이니(元亨) 대인을 만나서 그를 사용하고(用見大人) 근심하지 말고(勿恤) 바른길을 정복하면(南征) 길(吉)하다.
  앞의 췌(萃)괘로서 만들어진 조직이 승(升)의 근원(元)이다. 그 근원을 갖고 성장(亨)해 나가는 것이 곧 승(升)이다. 그 조직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문호가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근심하지 말고 남쪽을 정벌하라는 말은 남쪽은 따뜻한 곳이므로 곧, 바른 도리(道理)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함이다. 그래야 길하다.

 

允升 大吉
속임 없이 나아가야(允升) 크게 길하리라(大吉).
  윤(允)은 진실함이며 신의를 의미한다. 더불어 잘 살자며 남쪽으로 나아갔지만 그 숨겨진 진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흉한 것이다. 속임없는 진실함과 신의와 의로움으로 나아가야 크게 길할 것이다.

 

孚乃利用禴 无咎
신념을 갖고 검소한 제사를 지내면 이로우리니(孚乃利用禴) 허물이 없다(无咎).

  공자께서는 “예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 장례는 장중하게 치르기 보다는 진정으로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논어 제3편 팔일 제3장]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신념이 살아있기에 검소한 제사를 지내도 이롭고 허물이 없는 까닭이다. 췌(萃)괘에서 말한 큰 희생양을 사용하는 방법이 필요한 시기는 지났으며, 조직을 갖추었으니 신념으로 나아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升虛邑
나아가는 것은 비어있는 고을과 같다(升虛邑)
  비어있는 고을이 백성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승(升)의 발전도 백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목적과 목표가 같다는 말이다. 민초들이 저절로 모여들도록 편안하고 따뜻한 세상을 여는 것이 곧 승(升)이 목표하는 결과이다.

 

王用亨于岐山 吉 无咎
왕은 기산에 올라 제사를 지냄으로써(王用亨于岐山) 길(吉)하고 허물이 없다(无咎).
  기산(岐山)은 주나라 문왕의 할아버지였던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정착한 곳이다. 그 기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는 것은 태왕(太王)을 공경하는 마음이며, 지나온 전통을 공경하는 마음이다. 그럼으로써 또한 정통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야 길하고 허물이 없다. 승(升)은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貞吉 升階
끝까지 길하구나(貞吉) 차곡차곡 성장함이여(升階).
  서두르지 않고 계단을 밟아 오르듯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다. 차곡차곡 나아가지 않는 것은 전통을 공경하지 않는 나아감이다. 일의 선후와 본말을 가려서 단계적으로 공든탑을 쌓아가듯 나아가야 한다.

 

冥升 利于不息之貞
드러나지 않는 나아감(冥升)이라도 끝까지 쉬지않아야 이롭다(利于不息之貞)
  명승(冥升)은 성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발전을 말한다. 그러나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성장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니 내실을 다져 나가는 나아감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쉬거나 멈추지 말고 끝까지 나아가야 이롭다는 말이다. 승(升)은 바른 도(道)를 따르는 남쪽을 정벌하는 나아감이니,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논어의 첫 장부터 시작해 계속 반복되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원망이 없으리니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논어 제1편 학이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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豫 利 建侯行師
【初六】鳴豫 凶
【六二】介于石 不終日 貞吉
【六三】盱豫 悔 遲 有悔
【九四】由豫 大有得 勿疑朋盍簪
【六五】貞疾 恒 不死
【上六】冥豫 成 有渝 无咎

  예(豫)는 코끼리(象)가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무덤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형성문자이다. 일반적으로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을 뜻하지만, 주역에서의 예(豫)괘는 ‘죽을 때와 자리를 아는 것’을 의미하니, 곧 하늘이 생명을 세상으로 보내어 맡긴 임무를 뜻한다. 필부필부(匹夫匹婦)하는 소인의 사명은 만나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먹고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고, 대인의 사명은 전체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하늘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재능을 부여한 이유를 그 재능을 사용해 공공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나 현대에는 뛰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라고 한다.


豫 利 建侯行師
사명(豫)은 결실(利)을 맺는 것이니 제후를 세우거나 군사를 일으키는(建侯行師) 것처럼 큰 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
  주나라는 천자가 큰 영토를 각 지역별로 제후를 세워 실질적 통치를 맡기고 조근, 군대파견 등의 구속을 통해 충성을 맹세 받는 형태의 통치체제였는데, 훗날 제후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여하튼 제후를 세우거나 군사를 일으켜 응징하는 일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 큰 일이다. 예(豫)는 제후를 세우는 것처럼 큰 뜻을 이루어 결실(利)을 맺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鳴豫 凶
사명을 떠벌리면(鳴豫) 흉(凶)하다
.
  삼국지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가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도원결의'를 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뜻을 펼치며, 같은 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같은 날 죽자는 의로운 맹세였다. 그러나 농사꾼 행세를 하기도 하면서 품은 뜻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 유자께서는 “신의는 정의로움에 비추어 이행하는 것이다”[논어 제1편 학이 제13장]고 하셨으니, 곧 정의롭지 않으면 약속을 저버려도 된다는 말씀이셨다.

  유학에서는 꽉 막힌 원칙을 배격했다. 독립투쟁을 하던 의사들께서 동지들을 팔지 않고 “모른다”고 했던 것이 거짓말이라서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명을 숨기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잠용일 때 움직이려 해서는 안되니(潛龍勿用) 때가 도래하기 까지 숨죽이고 숨길 수도 있어야 한다.

 

介于石 不終日 貞吉
돌에 새긴 듯(介于石) 굳고 단단하게 맹세를 하고 종일(終日) 멈추지 않으면(不) 마침내 길하다(貞吉)
  때론 숨기고 때론 어려움을 겪더라도 사명을 돌에 새긴 듯 굳고 단단하게 유지를 하면 끝내 좋은 결실을 얻게 된다. 현실이 어려워도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종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건(乾)괘의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어두움을 경계하는 것(終日乾乾 夕惕若)’과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盱豫 悔 遲 有悔
턱을 치켜 들어야 할 만큼의 분에 넘치는 사명은(盱豫) 뉘우침이 있으리니(悔) 시간만 낭비하며(遲) 후회만 남길 것이다(有悔)
  토끼가 호랑이를 잡아먹으려 해서는 안되니, 하늘이 토끼로 세상에 보내었을 때는 토끼로 살면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자연의 조화에 따르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사람을 분별하여 세상에 보낸 이유도 같은 뜻일 것이니 천명이 다르므로 턱을 치켜들어 분수를 지나치면 후회만 남기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옛 시대는 ‘군주주의’의 시대였고, 그래서 공자께서도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천자의 지위를 탐내지는 않으셨다.

 

由豫 大有得 勿疑朋盍簪
사명을 다하려 한 까닭에(由豫) 크게 얻는 것이 있었다면(大有得) 도와준 친구를 의심하지 않아야 비녀를 꽂을 수 있다(勿疑朋盍簪).

  여인의 치장은 비녀를 꽂음으로써 완성이 되는 것이니, 도와준 친구를 의심하지 않아야 비로소 정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얻으려 근심하고 잃을까 근심한다”[논어 제17편 양화 제15장]는 의미이니, 얻고 나서 잃을까 근심하여 도와준 친구까지도 의심하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다. 건(乾)괘에서 용이 비상하는 전성기가 되었다고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고 마땅히 은인과 함께 그 전성기를 누리라고 하는 것에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貞疾 恒 不死
마지막에 친구를 의심하게 되는 병이 생기면(貞疾) 계속되어(恒) 그 병통을 죽여 없애지 못하게 된다(不死).
  적과 동지가 하루 아침에 뒤바뀌는 경우를 역사에서 많이 목격하게 된다. 믿음이 사라지면, 부리던 자는 자신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고, 따르던 자는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는 주인에게 삶아 먹힌다는 '토사구팽'을 염려하여 두려움에 떨기 마련이니, 그 병통을 없애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貞)은 죽음을 뜻하고 곧음을 뜻하고 완성을 뜻하고 끝을 뜻하기도 하니, 모두 죽음처럼 더 이상 변화의 여지가 없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녀를 꽂는 마지막(貞)에 생기는 친구에 대한 의심의 본질은 두려움일 것이다. 그렇게 정점에 이르러 생겨난 두려움은 없던 상태로 되돌아 가지 않는 이상 절대로 없앨 수 없는 “잃을까 근심하는 두려움"일 것이다. 

 

冥豫 成 有渝 无咎
어두운 사명(冥豫)이 성공할 수도 있으나(成) 변신을 해야(有渝) 허물이 없다(无咎).

  쿠테타도 때로는 성공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사로운 이익과 영화를 위해 추구한 쿠테타(권력찬탈)라면 성공하여도 잠시일 뿐일 것이다. 공자께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곧아야 할 것인데, 곧지 않은 사람은 요행히 재난을 면하고 있을 따름이다”[논어 제6편 옹야 제19장]고 하셨다. 바르지 못한 것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니, 정의가 결국은 승리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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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 亨 君子 有終

【初六】謙謙 君子 用涉大川 吉

【六二】鳴謙貞吉

【九三】勞謙 君子有終 吉

【六四】无不利 撝謙

【六五】不富以其鄰 利用侵伐 无不利

【上六】鳴謙 利用行師 征邑國

  고전은 용어에 대한 의미를 단번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독서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논어에서 겸손을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과 같은 단계에서 언급한 곳은, 공자께서 “군자는 의로움을 바탕으로 삼고, 예로써 행하고, 겸손으로 표현하며 신의로써 완성한다(義以爲質,禮以行之,孫以出之,信以成之)”[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7장]고 하신 부분이다. 마땅히 낮추어야 할 때 즉, 어른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예(禮)이지 겸(謙)이 아니다. 겸손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임에도 자신을 낮추는 것을 뜻하는 반면, 오히려 자기에게는 더 엄격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자기를 나무람을 엄격히 하고 남을 나무람을 가볍게 하면 자연히 원망이 멀어질 것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5장]고 하셨다. 자기에게 더 엄격하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게 되고 남에게 더 관대하게 된다. 자랑하지 않아야 겠다고 낮추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낮추게 되는 것이다. 주역은 자신을 낮추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남을 높여주는데 애쓰는 적극적인 겸손까지 강조하고 있다.

 

謙 亨 君子 有終

겸손(謙)의 덕을 성장기(亨)에 익히면 군자로서(君子) 마침이 있다(有終)

  주역에서 언급하는 변화의 순리 원(元) 형(亨) 리(利) 정(貞)에서 유독, 형(亨)의 시기에 대해서 많은 언급이 되고 있는 이유는 근본(元)을 바꾸기는 힘들지만, 성장(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떤 결실(利)을 맺고 죽는지(貞)가 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키를 더 키우기 위해서 애쓸 수 있는 시간은 성장기이다. 겸손은 사람이 성장기(亨)에 잘 익혀야 쉬이 변치 않으므로 군자로써 생을 마칠 수 있게 된다. 성장기에 얻은 품성이 평생을 가는 것이다.

 

謙謙 君子 用涉大川 吉

겸손의 덕이 넘치는(謙謙) 군자는(君子) 큰 내를 건너는(用涉大川) 과단성을 갖추기만 하면 길하다(吉)

  겸손의 덕이 넘치는 군자는 겸손이 지나침을 말한다.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지나치게 되면 과단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길로 나가가려면 과단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鳴謙貞吉

사람들의 명성을 얻은 겸손은(鳴謙) 끝까지 길하다(貞吉).

  명겸(鳴謙)은 세상이 널리 알아주는 겸손을 말한다. 겸손한 척하는 사람이라면 명성을 탐하겠지만,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라면 명성을 탐하지 않을 것이니, 그런 사람이 얻은 명성이라면 비단 위에 꽃을 더한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勞謙 君子有終 吉

노력하여 겸손을 이루어도(勞謙) 군자로서 마침이 있을 것(君子有終)이니 길(吉)하다.

  성장기(亨)에 겸손의 덕성은 쌓아야 함은 끝까지 바뀌지 않아 군자로서 마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를 지나 거만하고 타인을 업신여기던 사람이 늦은 나이에 개과천선하면 어떻게 되는가? 마찬가지로 군자로서 마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공자께서 “사람이 개과천선하여 진보하고자 하면 마땅히 현재의 깨끗함을 용납해야 하니, 이것은 과거를 감싸주자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7편 술이 제29장]고 하셨다. 고치면 그것으로 좋고 과거를 허물 삼을 필요가 없다.

 

无不利 撝謙

이롭지 않음이 없구나(无不利) 나보다 남을 높이는 겸손(撝謙)이여!

  휘겸(撝謙)이란 자신을 낮추는 수준을 넘어서 힘써서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겸손을 말한다. 공자께서는 ‘자기가 서고자 하는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 서게 하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 도달하게 만드는 것’은 인(仁)의 한 모습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논어 제6편 옹야 30장] 그래서 공숙문자가 자신의 가신이었던 선을 천거하여 자기와 동일한 관직으로 오르게 애쓴 것을 두고 “참으로 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논어 제14편 헌문 제18장]라고 감탄하시며 칭송하셨다.

 

不富以其鄰 利用侵伐 无不利

부유함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에(不富以其鄰) 침략하여 응징해도(利用侵伐)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부유함이 아니라 겸손의 덕으로써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므로, 해를 끼치는 잘못된 자를 응징하여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침략하여 응징함은 남을 위해 애쓰는 휘겸(撝謙)의 뜻을 실천하는 자기 희생이요, 자기 낮춤이기 때문이다.

 

鳴謙 利用行師征邑國

명성을 얻은 겸손(鳴謙)은 군사를 일으켜 이웃나라를 정벌해도 이롭다(利用行師征邑國)

  휘겸(撝謙)의 군자가 명성까지 얻었다면 이웃나라를 정벌해도 이롭다고 한다. 『맹자: 양혜왕 하편』에서 맹자께서는 ‘천하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었으므로 동쪽으로 향하면 서쪽에서 원망하고 남쪽으로 향하면 북쪽에서 원망하며 어찌 우리나라의 정벌을 뒤로 미루시는가?’하였다며 『서경』을 인용하여 해방전쟁을 말씀하셨다. 남을 높여주기 위해 애쓰는 휘겸(撝謙)의 군자가 이웃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정복전쟁이 아니라, 이웃 백성들을 삶을 높여주기 위해서 해방전쟁으로 나가는 것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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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吉)은 길(吉), 대길(大吉), 원길(元吉), 종길(終吉) 등등으로 주역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며 ‘좋다’는 의미이다. 흉(凶)은 흉(凶), 유흉(有凶), 종흉(終凶), 흉사(凶事) 등등으로 역시 주역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며 ‘나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좋다는 늬앙스를 가진 것은 허물이 없다는 무구(无咎), 후회가 없다는 무회(无悔), 형통하다는 형(亨), 이롭다는 이(利) 명예롭다는 예(譽)와 같이 여러가지 다른 표현들이 있다. 흉(凶)도 마찬가지이다. 뉘우침이 있다는 회(悔), 어렵다는 린(吝), 위태롭다는 려(厲), 허물이 있다는 구(咎) 등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보통은 좋고 나쁘고의 정도의 차이로 해석하여, 길흉은 아주 좋거나 나쁘고, 나머지는 그 보다 아래단계라고 해석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만 바라보기에는 해석이 난해해지는 부분들이 많이 생긴다. 예컨대, 대과(大過)괘의 상육(꼭대기 효)효의 효사는 '過涉滅頂 凶 无咎(과섭멸정 흉 무구)'이다. "흉한데, 허물은 없다"고 한다.


정교하게 좋고 나쁘다는 여러 표현들을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내 생각에 따라서 그 기준을 나누어 해석을 시도했다. 첫째, 길흉(吉凶)은 외면(外面)적인 시각에서의 판단이며 내부적으로는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허물(咎)은 내면(內面)적인 시각에서의 판단이며 외부적으로는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대재벌이 되는 것은 길(吉)한 것이지만, 오히려 내심은 불편하고 그 위치에 서고 싶지 않으면 길(吉)하여도 허물이 있는 것(有咎)이고, 흥선대원군이 세도가의 바지가랭이를 기어다니는 것은 흉(凶)하지만, 그 내심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멋지게 속이고 있는 것이니, 오히려 쾌재를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라면 흉(凶)하지만 허물이 없을(无咎)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후회(悔)는 원하던 결과를 염두해 둔 내면(內面)적 판단이다. 회(悔)는 결과가 좋으면 바뀔 수 있는 내면의 마음이다. 예컨대, 술잔과 물잔이 있었는데, 마음은 술을 먹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물잔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으니 허물(咎)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술잔에는 독이 들어 있어서 술을 먹은 사람은 죽고, 물은 먹은 자신은 살았으니 회(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셋째, 명예(譽)는 길흉과 같은 외면((外面)적인 시선이지만, 길(吉)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도 있는 성취임에 비하여, 예(譽)는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벌이 되는 것은 길(吉)한 것으로서 존경을 받을 수도 부러움을 받을 수도 있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능력에 따른 당연한 성취로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외면(外面)적으로 판단되는 사람이 그만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 곧 명예(譽)이다.

 

넷째, 형(亨)은 계속적으로 상승되어가는 좋음을 말하며, 리(利)는 그 양의 대소에 관계없이 얻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어렵다는 린(吝)은 실패의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며, 위태롭다는 려(厲)는 고생스럽고 힘들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것을 기본으로 하여 해석을 시도했다. 그러나 100%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으며,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현재의 주역은 1인이 논리를 가지고 통일되게 기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역의 괘효사는 오랜시간을 통하여 수정, 첨가, 삭제가 되어 전해져 온 것이기에 그 과정을 거치면서 혼용되기도 했고, 다른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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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 생각에 우울증, 피로, 위장장애, 어지러움 같은 스트레스로 인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주로 주부들이 겪는 문제로 생각했으나, 최근에는 남편, 미취업자, 미혼자, 시어머니 등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산업화 이후 전통적 가족 문화에서 개인주의 문화로 변화화면서 생겨난 문화 갈등이 이유일 것이다.

 주부들에게 명절이 반갑지 않는 까닭은 시댁에 가서 차례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 요즘에는 차례 음식을 주문하여 사용한다고도 하고, 제사와 차례 때문에 기독교 신자가 된다고도 하는데, 나는 시대적 생명이 다한 예법(禮法)은 바뀌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차례상
차례상 by queenck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조선초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부모께만 제사를 지냈다.

  『경국대전』「예전(禮典)」「봉사조(奉祀條)」에는 문무관 6품 이상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3대를 제사하고, 7품 이하는 부모, 조부모의 2대를 제사하고, 서인은 돌아가신 부모만을 제사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예기』「제의(祭義)」에 강조한 것처럼, 절차로 인해 실질인 '공경'을 잃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祭不欲數(제불욕삭) 數則煩(삭즉번) 煩則不敬(번칙불경)

제사는 많지 않아야 한다. 많으면 번잡해지고, 번잡해지면 공경함이 없어진다.

예는 마음이 근본이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다.

예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 장례는 장중하게 치르기 보다는 진정으로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 『논어 제3편 팔일』「제3장」

 

  공자께서는 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셨을까?

  효(孝)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없는 내면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시건, 부모님이 돌아가시건 그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효(孝)의 마음이 변하지 않음을 표현하는 의식인 것이다. 그래서 제사는 효의 연장이라고 하셨다.

돌아가신 조상을 살아 계신 듯 섬기는 것효에 이르는 것이다 -『중용(中庸)』「제19장」

제사는 봉양하는 것을 좇아서 효도를 계속하는 것이다-『예기』「제통(祭統)」

  즉, 부모님의 고마움을 잊지 않도록 제사라는 행위를 통해 기억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우리는 조선중기를 기점으로 신분제의 동요가 심했고, 10% 정도에 불과하던 사족(士族)이 편법으로 계속 늘어만 갔다. 공명첩, 납속책, 족보위조 등을 통해서 사족으로 둔갑하여 현재는 대부분이 모두 사족의 혈통이 되었다.

  새로이 사족이 된 계층이 사족처럼 제사를 지내려 하면서 제사가 혼란스러워 졌고, 권위를 지키려고 한 사족 계층이 또 방어를 하면서 형식적으로 치우치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이이 선생께서는 각 가정마다 다른 제사의식을 문제 삼으셨다.

지금 세속의 대다수가 예를 알지 못하여 제사 지내는 의식이 집집마다 같이 않으니 심히 웃을 만하다(今俗 多不識禮 其行祭之儀 家家不同 甚可笑也) [격몽요결 제7장 제례]

  그러나 이이 선생께서 제사의식을 문제삼은 것은 '형식에 치우친 예'를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기득권자(사족)의 입장에서 방어하고자 한 까닭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널리 알려진 속담처럼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러니 '조율이시'니 '홍동백서'니 하는 것이 중요한 바가 아니다. 『예기』「제의(祭義)」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를 잊지 않으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제사를 지내면서 ①부모님께서 거처하셨던 곳을 생각해보고 ②부모님이 웃음소리와 말소리를 생각해보고 ③부모님께서 뜻하셨던 바를 생각해보고 ④부모님이 즐거워 하는 바를 생각해보고 ⑤부모님께서 좋아하실 음식을 생각해 본다.

 

  예(禮)를 행한다고 하면서 지나치게 형식에 치우쳐 실질을 잃어버리고 있는 듯 하다.

공자께서는 서(恕)로 일관하셨다고 하셨으니, 마땅히 조상님께서 살아계셨다면 무엇을 좋아하셨을 지, 마음으로 통(通)해야 할 것이다.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하라는 ‘사망여사존(事亡如事存)’도 그러한 뜻이리라.

 

  손주가 좋아하는 '피자'를 상에 놓으면 좋아하실 수 있으며, 간소하게 차림으로써 며느리와 아들이 화목하다면 더 좋아하실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께서 생전에 드시지 않던 술을 올리는 것이 과연 예(禮)일까? 경조사에 축하와 위로의 마음 없이 주고받는 돈으로 셈하고자 함이 과연 예(禮)일까? 오늘날 예(禮)는 지나치게 형식에 치우쳐 있는 듯 보인다. 마땅히 변해야 할 것은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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