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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에 해당되는 글 2

  1. 2010.02.20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2. 2010.02.01 군자(君子)란 어떤 사람인가?
2010. 2. 20. 20:01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20:01

발자국

한계란 명칭은 대개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시작할까 합니다.
즉, ‘자유’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자유란 조금 쉬운 느낌이죠. 새처럼 훨훨~ 나는 것 같습니다.
갇혀있는 새장을 없애버리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요?

자유를 찾음은 갇힌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로든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갇힌 것을 떨쳐버리는 예를 하나 들기로 하겠습니다.

 

담배로부터 자유를 한번 찾아볼까요?
먼저 담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누가 자유롭나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담배를 끊기가 힘들다는 마음을 짐작정도만 할 것 같습니다.
그 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담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담배가 뭔지 모르는 두세살된 아이나, 담배를 접해보지 못한 비문명국의 어른이나,

모두 완벽하게 담배로부터는 자유롭습니다.

 

번뇌로부터는 어떻게 자유를 찾겠습니까?
담배로부터의 자유가 힌트가 될 것입니다.
번뇌를 인식하지 못하면,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이름이 있습니다. 백치하고 비슷합니다.
백치가 되어 인식이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백치하고 붓다는 같은 뜻,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앎을 통해서도 백치가 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본래 함께 있었습니다.
'도(道)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억나시는지요?

 

미쳤다는 의미가 싫어지는 것은
말과 문자의 좋고 나쁨에 갇혀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학이 추구하는 미침을 보겠습니다.
정상인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미치기도 합니다. 배움에 미치기도 합니다.
공자께서 '석달동안 고기맛을 잊었다'는 비유와도 연관됩니다.
순간을 집중하게 마음을 붙드는 것이 생기면(미치게 만들면),
다른 것에는 아무 생각도 미치지 않습니다.

 

유가의 선비들이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이 순간을 지극히 열심히, 집중하여 사는 것,
즉, 현재의 삶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참된 자유로움을 찾아갑니다.
이것이 중용을 실천하고 사는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억지로 가는 길일까요?
대학에 가기 위해 시험문제에 몰두하는 것과 같을까요?

욕구를 계산하는 마음에서 생긴 집중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결코 오래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기쁨에 미쳐,

현재의 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을,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가의 도(道)는 꽉 움켜쥐고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순간을 사랑하면서 평생 나아가는 행위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도(道)라는 한자가 우리말의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주역에서 첫 괘가 하늘(乾)로 시작하는 까닭은 시간과 공간의 우주이치를 말하기 위한 까닭은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시간을 말하고,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간의 도를 말하기 위해서다.
짧은 시간이라고 조급하게 쓸려고 서두르지도 말고, 더 붙잡고 있으려고 미적거리지도 말라는 의미이다.
「소주역」이라는 별칭을 가진 「중용」에서 '군자의 중용은 군자의 시중(時中)이다'고 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리고, 나아가야 할 때는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는 물러나야 한다.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부분은, 점이나 부적 방술과 같은 방법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지 말하는 셋째효의 의미이다. 인간이 주도적 입장이 되어 선택해야 할 시간을 말하고 있다.
기다려야 할 때(잠용), 구해야 할 때(현룡), 나아가야 할 때(비룡), 물러나야 할 때(항룡)를 잘 판단하라는 가르침을 전하지만, 그 때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인사대천명! 오직 사람의 일을 다할 뿐이다.

점쟁이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신이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역은 점에 의지하라고, 신께 기도하라고, 부적에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른 분별력을 가진 군자가 되어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유학에서의 군자는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다.
다만, 그 옳고 그름의 잣대, 진리의 잣대는 '나에게 요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육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를 건강하게 하려 요가를 배우듯이,
정신 건강을 위해서 학문을 배우는 사람도 '자기'를 수양하려 배움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수신이 최선순위에 오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
남에게 요구하기 위한 옳고 그름은 싸움을 낳고 미움을 낳게 되는 해악이 될 뿐이다.
자기의 사상과 종교가 절대적 진리라는 믿음으로 쉬지 않고 다투고 있고,
얼마나 많은 인간이 목숨을 잃게 되어야 했던가?

 

군자는 나를 바로 세우는 사람일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감화된 사람이 저절로 벗이 되려고 찾아오기도 하는 사람이다.
논리와 말로 이겨서 사람을 끌고오려는 승리자, 내세우려는 잘난 이가 군자가 아니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은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부단히 강조한다.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논어 제13편 자로 제23장]

 

군자가 되어 자기를 다듬는다는 이 수신이 결코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가 전해주는 가르침은 '물은 변한게 없었지만 내 마음이 변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은 아닐 것이다.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알고서 구토가 일어났다는 것은 지나간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착하는 경지를 벗어났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자기자신을 깨우친 것도 깨달음의 한 이유였다고 한다. 맛있게 먹었다는 기억을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더러운 물이네 할 것이지, 구토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로서 자기를 착각하지 않고 냉정하고 철저하게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자라서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지혜롭다는 사람도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경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신(나를 닦고) 제가(집안을 바로하고) 치국(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세상을 평화롭게 하는)하는 것이, 순서대로 완성 한 후 나아가는 선후의 단계적 의미는 아니다. 수신이 곧 제가와 다르지 않고 치국과 다르지 않고 평천하와 다르지 않음이다. 즉, 수신(修身)은 평생 수련해야 하는 것이지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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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