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巽 小亨 利有攸往 利見大人
【初六】進退 利武人之貞
【九二】巽在床下 用史巫紛若 吉 无咎
【九三】頻巽 吝
【六四】悔亡 田獲三品
【九五】貞吉 悔亡 无不利 无初有終 先庚三日 後庚三日 吉
【上九】巽在床下 喪其資斧 貞凶

  손(巽)괘는 바람을 뜻하는 괘이니, 곧 마음이 바람처럼 흔들리는 것을 뜻한다. 우유부단하여 좀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주역은 그 우유부단함의 원인을 마음에서 찾고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기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실패의 확률을 줄이려면 역사를 살펴보기를 권하고 그도 아니면 차라리 점을 치고서 나아가라고 말한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다가는 앉아서 다 잃게 될 것이니 그게 제일 흉한 것이라고 한다. 지나간 일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 근원적 문제이니 후회를 남기는 마음을 없애야 길(吉)하다고 한다.

 

巽 小亨 利有攸往 利見大人
갈등(巽)은 성장 초기부터 있으나(小亨)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다(利有攸往)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
  갈등도 앞의 려(旅)괘와 마찬가지로 성장 초기부터(小亨) 있게 되는 것이다. 려(旅)괘의 방황은 쉽게 끌 낼 수 없던 것으로 본 반면에, 갈등(巽)은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식견이 높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더 빨리 끝내고 싶으면 대인(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고 한다.

 

進退 利武人之貞
나아갈 줄 알고 물러날 줄 아는(進退) 무인은 끝까지 이롭다(利武人之貞)
  무인은 진퇴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는 식견이 있어야 한다. 무인의 갈등은 저 혼자만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巽在床下 用史巫紛若 吉 无咎
평상 아래에서 갈등 한다면(巽在床下) 역사와 무속을 사용하면(用史巫紛若)이 길(吉)하고 허물이 업다(无咎).
  평상아래에서의 갈등은 보통사람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심한 갈등을 의미하며, 너무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를 사용하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라는 말이다. 공자께서는 "옛 것을 돌이켜 미래를 살필 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논어 제2편 위정 제11장]고 하셨다. 그도 아니면 무속 곧, 점을 사용하라고 한다. 점이 맞다는 말이 아니라 갈등을 끝내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공자께서는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치셨지만 계문자에게는 “두 번이면 충분하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20장]고 하셨다.

 

頻巽 吝
찡그리고 갈등만 하고 있다면(頻巽) 어려워진다(吝)
  찡그리고 갈등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것이니 정말 어려워진다. 공자께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라고 하며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도 참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6장]고 하셨다.

 

悔亡 田獲三品
후회가 없으면(悔亡) 밭에서 세가지 물건을 얻으리라(田獲三品).
  3품은 천(天)지(地)인(人)을 비유하는 것이다. 천지인의 합일은 결국 마음으로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에 상관없이 후회하고 탄식하지 않는다면 언제 나아가건(天), 어디로 나아가건(地), 누구(人)에게로 나아가건 아무 문제가 없다. 천지인의 합일을 기다리는 것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후회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貞吉 悔亡 无不利 无初有終 先庚三日 後庚三日 吉
끝까지 길하구나(貞吉) 후회하지 않음이여(悔亡)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시작은 몰라도 끝은 있으니(无初有終) 신중하게 하고(先庚三日) 잘 헤아리면(後庚三日) 길(吉)하리라.
  즉, 시작할 때 확신은 없어도 끝나면 결과는 있는 법이다. 후회가 없는 것이 중하다. 선경삼일은 십간 즉,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경으로부터 앞선 3일인 정(丁)이며, 후경삼일은 계(癸)를 말하는데, 신중(丁)하였고 잘 헤아렸다면(癸) 그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로 길한 것이다.

 

巽在床下 喪其資斧 貞凶
평상 아래에서 갈등한다면(巽在床下) 재물과 도끼까지 잃을 것이니(喪其資斧) 끝까지 흉하다(貞凶)

  평상아래에서의 갈등은 보통사람에도 미치지 못하는 심한 갈등이니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을 잃음은 물론이요, 재물과 권력도 잃을 것이니 끝까지 흉하다. 한번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앉아서 잃는 것이니 끝까지 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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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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履虎尾 不咥人 亨
【初九】素履 往 无咎
【九二】履道坦坦 幽人 貞吉
【六三】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 爲于大君
【九四】履虎尾 愬愬 終吉
【九五】夬履 貞 厲
【上九】視履 考祥 其旋 元吉

  리(履)괘는 밟는다는 뜻이니, 아프게 하는 말을 뜻한다. 공자께서는 “말 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교만이라 하고, 말할 때가 되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 하고, 안색과 상황을 살피지 않고서 말하는 것을 맹목이라고 한다”[논어 제16편 계씨 제6장]고 하셨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履虎尾 不咥人 亨
호랑이 꼬리를 밟았으나(履虎尾) 사람을 물지 않으니(不咥人) 성장(亨) 하게 된다
.
  호랑이는 사람을 물어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상징하니, 곧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절대 권력자로 보아도 될 것이다.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것을 묻자 공자께서는 “속이지 말고, 거스를 수도 있어야 한다"[논어 제14편 헌문 제22장]고 하셨다. 절대 복종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꼬리를 밟는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고 충언(忠言)을 하는 것을 말한다. 꼬리를 밟았는데도 물지 않았으니 성장하게 된다. 충심이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종때 조광조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시작해서 바른말로 신임을 받아 대사헌에 이른 것을 연상하게 한다.

 

素履 往 无咎
소탈하게 밟는다면(素履) 계속하여도(往) 허물이 없다(无咎)

  급하거나 거칠게 밟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 ‘말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한다’는 가르침을 새기게 된다. 충분히 기다려주고 부득이할 때 비로소 꼬리를 밟아야 하니, 그렇지 않다면 무시하는 것이며,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履道坦坦 幽人 貞吉
일관되게 밟아야 하니(履道坦坦) 그윽한 사람(幽人)이어야 끝까지 길하다(貞吉).

  일관성이 있는 그윽한 사람은 가치관이 곧게 서 있는 사람을 말한다. 곧기만 한 곧음은 옳지 못하다. 섭공이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고발하였다’며 고을 자랑을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고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기니 진정한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8장]라고 하셨다. 공자는 판박이가 되는 학문을 경계하고 융통성을 강조하였으니, 공자의 직속 제자들은 개성이 모두 살아 있었다.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 爲于大君
한쪽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眇能視) 절름발이도 밟을 수 있지만(跛能履)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면(履虎尾) 사람을 물 것이니(咥人) 흉하다(凶)
.
  조화롭게 보지 못하고, 조화롭게 나아가지 못하니, 곧 안목이 없고 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제 분수를 모르고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을 뜻한다. 호랑이가 물어버릴 것이다. 충심이 없기 때문이다.

 

武人 爲于大君
무인이라면 군주에게(于大君) 속해 있어야(爲) 한다
.
  절대 충성을 해야 하는 지위에 있는 자가 무인이다. 공자께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직분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4장]고 하셨으니, 무인이 꼬리를 밟는 것은 직분을 망각하고 나서는 것이라, 취지는 바르다 할지라도 군주에게는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履虎尾 愬愬 終吉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履虎尾) 놀라고 두려운 마음(愬愬)이어야 끝내 길하다(終吉).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는 것은 예(禮)를 지켜서 충언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 미운 사람이 있는지 묻자 자공은 “추측하여 다 안다는 사람, 불손함을 용기라 하는 사람, 들추어내는 것만 정직이라 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논어 제 17편 양화 제24장]고 하였다. 두려움이 없는 용맹한 사람이 예(禮)와 의(義)를 망각하면 난을 일으키고 도적이 될 뿐이다.

 

夬履 貞 厲
거친 직언(夬履)은 그 끝이(貞) 위태롭다(厲).
 
  바른 말도 기술이 필요하다. 진정한 신하와 친구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욕을 하거나 나무라는 방법은 아니어야 한다. 자유가 말하길 “군주를 섬기면서 간언이 지나치면 부끄러움을 당하고, 친구를 대하면서 충고가 지나치면 소원하게 된다”[논어 제4편 이인 제26장]고 하였다. 시간을 두고 진중히 지켜보다가 그의 능력으로 알지 못하고 있거나, 고치지 못하겠다 싶은 것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권해야 하는 것이다. 훗날 원시유학이 추구했던 이러한 중용의 선을 벗어나 ‘충신은 욕을 당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거나 ‘죽음으로써 간한다’와 같은 거친 방법으로 변질되어 갔다.

  아랫사람에게에게 하는 충고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인격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젊은 사람은 경외해야 하니 어찌 내일의 사람이 오늘의 사람만 못하다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십, 오십세가 되어도 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젊은 사람보다 경외할 필요가 없다”[논어 제9편 자한 제23장]라고 하셨다. 무조건적으로 나이로 들먹이게 된 까닭은 것은 공경(恭敬)의 의미를 잘못 전달해온 소인유(小人儒)들 때문일 것이다.

 

視履 考祥 其旋 元吉
밟는 것을 살펴(視履) 좋고 나쁨을 가려(考祥) 바로잡으면(其旋)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것은 아프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은 아프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바른길로 오도록 도와주려는 뜻이다. 그 도움은 눈높이를 맞추어 다가가야 한다. 시리고상(視履考祥)은 이렇게 밟으니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나고 이렇게 밟으니 군주가 느끼게 되는지를 헤아려 보고 관찰해 보는 것을 뜻한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기술(技術)이 필요한 법이니,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안색과 상황을 살펴서 말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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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