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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 亨利貞
【初九】和兌 吉
【九二】孚兌 吉 悔亡
【六三】來兌 凶
【九四】商兌 未寧 介疾 有喜
【九五】孚于剝 有厲
【上六】引兌

  태(兌)괘는 즐거움을 뜻하는 괘이다. 태(兌)괘는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한 것은 아니다. 즐거움을 느끼는 유형을 제시하고 그 각 유형들에 대해서 바람직한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兌 亨利貞
즐거움(兌)은 성장(亨), 결실(利) 마침(貞)기의 일이다.

  즐거움은 원형리정의 단계에서 원(元)의 시기를 제외한 일이니 즉, 의식이 있는 상태에의 인식이다. 즐거움을 따르는 것은 동물이 따뜻한 곳으로 찾아가는 것과 같다. 힘들어 보이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듯 여겨지는 수도승(修道僧)도 결국은 고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천도(天道)이며 인도(人道)이다.

 

和兌 吉
조화로워 즐거우니(和兌) 길(吉)하다.

  자연(自然)처럼 조화롭기 때문에 즐거운 것을 말한다. 아름다운 강산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조화롭고 평화롭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시경에서 “처자(妻子)와 잘 화합하는 것이 금(琴)과 슬(瑟)의 연주와 같으니 형제가 화목하여 조화롭고 즐겁구나(和樂). 네 집안 제대로 다스리려면 네 처자식 즐겁게 하라”[시경 소아.상체편]고 하였다. 악마는 고통스럽고 눈물이 흐르고 피가 흐르고 파괴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며 웃는다고 하였다. 조화롭지 않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흉하다.

 

孚兌 吉 悔亡
신념이 있어 즐거우니(孚兌) 길(吉)하고 후회가 없다(悔亡)
  유학의 최고 경전이라 말하는 『논어』는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자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의 도를 배우고 체득해가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알아주는 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생길 리 없으니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논어 제1편 학이 제1장]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이러한 즐거움이 신념이 있어 즐거운 것이다. 공자께서는 안회를 칭찬하며 “거친 밥과 한 바가지 물로 누추한 거리를 살아도 그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참으로 현명하도다 안회여!”[논어 제6편 옹야 제11장]라고도 말씀하셨다. 이러한 즐거움은 물질의 부귀나 지위의 귀천에 전혀 구애되지 않는 즐거움이다.

 

來兌 凶
오는 것이 있어 즐거우니(來兌) 흉(凶)하다.

  오는 것(來)이 있어 즐거운 것은 오직 얻어서 즐거운 것을 말한다. 잃는 것 없이 얻어서 그것을 즐거워 하는 것을 말한다. 뒤에 이어지는 상태(商兌)와 달리 제 것은 하나도 내 놓지 않고 받기만 하려는 이기적 즐거움이니, 술값 계산할 때 항상 숨어버리고 얻어 먹은 것을 즐거워 하는 그런 부류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商兌 未寧 介疾 有喜
거래하여 즐거우나(商兌) 편안한 것은 아니니(未寧) 병이 되는 것을 막아야(介疾) 기쁨이 있다(有喜)

  상태(商兌)는 거래를 하여 즐거움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즉 주고받는 GIVE AND TAKE의 즐거움이다. 래태(來兌)는 내 것은 하나 내 놓는 것 없이 오직 이익만 실속만 차리려는 즐거움이라면, 상태(商兌)는 주고받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래태(來兌)는 흉하다고 했지만 상태(商兌)는 병이되는 것이 아니면 괜찮다고 한다. 주역과 논어의 입장은 정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병이 되는 수준에 이르지는 말아야 한다고 하니, 돈이 안되는 일은 애초에 하려고 하지 않는 생각을 나무라는 것이다. 공자께서도 “먼저 일하고 뒤에 그 대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1장]라고 하셨으니, 이미 선사후득(先事後得)은 고사성어가 되었다.

 

孚于剝 有厲
파괴에 신념을 두면(孚于剝) 위태로움이 있다(有厲)

  파괴에 신념을 두는 것은 사람의 길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곧 기인(奇人)의 행세를 하는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궁벽한 이치를 찾고 괴이한 일을 하는 것을 후세에 칭송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중용 제11장]고 하셨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이 도를 행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길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중용 제13장]고 하셨다. 화태(和兌)처럼 조화로움이 즐거움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가르침이 중국에서 불교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없었던 이유일 지도 모른다. 머리를 깎고, 고기를 먹지 않고,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수도승을 유별나게 유난을 떠는 것으로 생각했음직도 하다. 마음으로 관통할 수 있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유별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성인 석가모니의 잘못이 아니라 따르는 자들이 구속하고 막아놓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引兌
이끄니 즐겁다(引兌)
  화태(和兌) 부태(孚兌) 래태(來兌) 상태(商兌)와 달리 인태(引兌)는 주역에서 길흉, 여타의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 이끌고 오니 즐거운 것은 소위 조종하는 즐거움이다. 이끄는 즐거움에 대해서 주역이 판단하지 않은 이유는 중용을 벗어나면 흉(凶)할 것이요, 중용을 지키면 길(吉)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조종 하려고 하는 마음은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덕이 높은 현자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이끌고 오는데 즐거움을 느낀다면 길하겠지만, 마마보이의 어머니가 자식을 이끌고 와야 즐거운 것은 흉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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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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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 小往大來 吉 亨
【初九】拔茅茹以其彙 征 吉
【九二】包荒用馮河 不遐遺朋亡 得尚于中行
【九三】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 无咎 勿恤 其孚于食有福
【六四】翩翩 不富 以其鄰 不戒以孚
【六五】帝乙歸妹 以祉 元吉
【上六】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 吝

  태(泰)괘는 어울리는 것을 뜻한다. 어울리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사회를 떠나서 개인은 존재할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는 법이다. 수치상으로는 선진국의 수준에 근접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경제력에 맞는 수준의 교양과 인성을 갖춘 것 같지는 않다. 불명예스럽게도 우리는 세계에 나가면 얼글리 코리안(ugly korean)으로 통한다고 한다. 자공이 공자께 한마디 말로서 일생동안 행할만한 것이 있느냐고 묻자, 공자께서는 서(恕)라고 하셨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4장]. 즉 마음(心)을 같게(如)하는 것을 말함인데, 그것이 어울리는 도(道)이며,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의 길이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은 그 하나의 행동양식이다.

 

泰 小往大來 吉 亨
어울림(泰)은 작은 것을 보내고 큰 것이 오게 하는 것이니(小往大來) 그래야 성장(亨)할 수 있다.
  간혹 무인도에 떨궈 놓아도 잘 살 것 같은 연예인의 순위를 정하고는 한다. 그러나 무인도에 혼자만 떨궈 놓아도 잘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상상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외로움과 고독함이다. 교도소에서 죄수를 독방으로 보내는 것은 징벌이지, 편하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 아니다. 사람은 어울려야 하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

 

拔茅茹以其彙 征 吉
띠풀 하나를 뽑으면 뿌리가 얽힌 여러 포기가 함께 뽑히니(拔茅茹以其彙) 그렇게 사람들과 엮여서 나아가야(征) 길하리라(吉).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맹세가 단순한 호기가 아니다. 지구상의 많은 생명들 중에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동물이 있고 그렇지 않는 동물이 있다. 사람은 무리를 지어 어울려야 하는 생명체다. 단독으로는 호랑이의 힘을 당해낼 수 없고, 치타의 빠르기를 당해낼 수 없어도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까닭은 뭉쳐서 힘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包荒用馮河 不遐遺朋亡 得尚于中行
작은 나룻배로 거친 물살을 건너는(包荒用馮河) 과감한 용기도 중요하지만 친구를 멀리하거나 잃지 않아야(不遐遺朋亡) 바른 길로 나아가는데(于中行)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得尚).
  모두가 NO라고 할 때, YES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소신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 소신을 펼치기 위해 고립되고 고독해지기 보다는 친구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하니, 모두 함께 YES하도록 만들어 어울려 나가는 것이 좋다. 통하지 않는다고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보다는 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또한 현명할 것이다. 사악함이 무리를 흔들 수 있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불가능한 것을 애쓰지 말고 은거하라는 은자의 충고에 아파하며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 사람이 함께 숲에서 어울려 생활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내가 인류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고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논어 제18편 미자 제6장]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 无咎 勿恤 其孚于食有福
비탈지지 않은 평지는 없고(无平不陂) 돌아오지 않는 떠남은 없으니(无往不復) 고난으로 끝나더라도(艱貞) 허물이 없다면(无咎) 걱정하지 말라(勿恤). 신념을 추구했다면(其孚) 그렇게 살았음에(于食) 복이 있음이다(有福).
  허물(咎)은 내적인 것이요, 길흉(吉凶)과 명예는 외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돌아보아 허물이 없다면 그 결과가 신통치 않더라도 상심하지 말라는 말이다. 만사가 의도한대로 되는 것 만은 아니니, 바른 신념을 추구했다면 결과를 따져 근심할 필요는 없다. 과정이 더 중요할 것이다.

 

翩翩 不富 以其鄰 不戒以孚
훨훨 나는(翩翩) 새의 무리는 부유하지 않더라도(不富) 그 이웃과 함께 하니(以其鄰) 신념이 있음으로써(以孚) 두려울 것이 없는 법이다(不戒).
  새는 인간에게 많은 교훈과 감동을 주는 동물이다. 특히 기러기는 그 아름다운 사랑과 가족애 때문에 남자가 조각하여 베필을 맞으려 가져가기도 하였다. 무리를 지어 함께 이동하는 새들은 부유함으로써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차별이 없고 견줌이 없다. 함께 하는 것 그것을 좋아하며 무리를 지어 어울린다.

 

帝乙歸妹 以祉 元吉
제을이 딸을 시집보내는 것(帝乙歸妹)은 복(以祉)으로써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제을(帝乙)은 딸을 문왕에게 시집보냈다. 주공과 문왕은 공자께서 흠모하던 공자 이전 시대의 성인들이기도 하다. 혼사로서 문왕과 인연이 맺어져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은 하늘이 맺어준 복이요, 하늘이 맺어준 어울림이다. 아무나 문왕과 혼사로서 어울릴 수는 없을 것이니, 근원적으로 길한 어울림이다.

 

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 吝
마른 도랑으로 인해(于隍) 성이 무너졌어도(城復) 전쟁을 하려 하지말라(勿用師). 고을에 찾아가 엎드려 도움을 청해도(自邑告命) 끝내(貞) 어렵게(吝) 될 것이다.
  성을 쌓고 그 주위로 도랑을 만들고 물을 채우는 이유는 적이 쉽게 성을 오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도랑이 말라있는 이유는 마을 사람들과 성주의 어울림이 각박한 까닭이다. 이웃과 어울려 그 마음을 나누지 못했는데 어떻게 어려울 때 도움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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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