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0

« 2024/10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58

兌 亨利貞
【初九】和兌 吉
【九二】孚兌 吉 悔亡
【六三】來兌 凶
【九四】商兌 未寧 介疾 有喜
【九五】孚于剝 有厲
【上六】引兌

  태(兌)괘는 즐거움을 뜻하는 괘이다. 태(兌)괘는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한 것은 아니다. 즐거움을 느끼는 유형을 제시하고 그 각 유형들에 대해서 바람직한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兌 亨利貞
즐거움(兌)은 성장(亨), 결실(利) 마침(貞)기의 일이다.

  즐거움은 원형리정의 단계에서 원(元)의 시기를 제외한 일이니 즉, 의식이 있는 상태에의 인식이다. 즐거움을 따르는 것은 동물이 따뜻한 곳으로 찾아가는 것과 같다. 힘들어 보이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듯 여겨지는 수도승(修道僧)도 결국은 고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천도(天道)이며 인도(人道)이다.

 

和兌 吉
조화로워 즐거우니(和兌) 길(吉)하다.

  자연(自然)처럼 조화롭기 때문에 즐거운 것을 말한다. 아름다운 강산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조화롭고 평화롭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시경에서 “처자(妻子)와 잘 화합하는 것이 금(琴)과 슬(瑟)의 연주와 같으니 형제가 화목하여 조화롭고 즐겁구나(和樂). 네 집안 제대로 다스리려면 네 처자식 즐겁게 하라”[시경 소아.상체편]고 하였다. 악마는 고통스럽고 눈물이 흐르고 피가 흐르고 파괴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며 웃는다고 하였다. 조화롭지 않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흉하다.

 

孚兌 吉 悔亡
신념이 있어 즐거우니(孚兌) 길(吉)하고 후회가 없다(悔亡)
  유학의 최고 경전이라 말하는 『논어』는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자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의 도를 배우고 체득해가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알아주는 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생길 리 없으니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논어 제1편 학이 제1장]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이러한 즐거움이 신념이 있어 즐거운 것이다. 공자께서는 안회를 칭찬하며 “거친 밥과 한 바가지 물로 누추한 거리를 살아도 그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참으로 현명하도다 안회여!”[논어 제6편 옹야 제11장]라고도 말씀하셨다. 이러한 즐거움은 물질의 부귀나 지위의 귀천에 전혀 구애되지 않는 즐거움이다.

 

來兌 凶
오는 것이 있어 즐거우니(來兌) 흉(凶)하다.

  오는 것(來)이 있어 즐거운 것은 오직 얻어서 즐거운 것을 말한다. 잃는 것 없이 얻어서 그것을 즐거워 하는 것을 말한다. 뒤에 이어지는 상태(商兌)와 달리 제 것은 하나도 내 놓지 않고 받기만 하려는 이기적 즐거움이니, 술값 계산할 때 항상 숨어버리고 얻어 먹은 것을 즐거워 하는 그런 부류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商兌 未寧 介疾 有喜
거래하여 즐거우나(商兌) 편안한 것은 아니니(未寧) 병이 되는 것을 막아야(介疾) 기쁨이 있다(有喜)

  상태(商兌)는 거래를 하여 즐거움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즉 주고받는 GIVE AND TAKE의 즐거움이다. 래태(來兌)는 내 것은 하나 내 놓는 것 없이 오직 이익만 실속만 차리려는 즐거움이라면, 상태(商兌)는 주고받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래태(來兌)는 흉하다고 했지만 상태(商兌)는 병이되는 것이 아니면 괜찮다고 한다. 주역과 논어의 입장은 정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병이 되는 수준에 이르지는 말아야 한다고 하니, 돈이 안되는 일은 애초에 하려고 하지 않는 생각을 나무라는 것이다. 공자께서도 “먼저 일하고 뒤에 그 대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1장]라고 하셨으니, 이미 선사후득(先事後得)은 고사성어가 되었다.

 

孚于剝 有厲
파괴에 신념을 두면(孚于剝) 위태로움이 있다(有厲)

  파괴에 신념을 두는 것은 사람의 길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곧 기인(奇人)의 행세를 하는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궁벽한 이치를 찾고 괴이한 일을 하는 것을 후세에 칭송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중용 제11장]고 하셨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이 도를 행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길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중용 제13장]고 하셨다. 화태(和兌)처럼 조화로움이 즐거움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가르침이 중국에서 불교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없었던 이유일 지도 모른다. 머리를 깎고, 고기를 먹지 않고,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수도승을 유별나게 유난을 떠는 것으로 생각했음직도 하다. 마음으로 관통할 수 있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유별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성인 석가모니의 잘못이 아니라 따르는 자들이 구속하고 막아놓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引兌
이끄니 즐겁다(引兌)
  화태(和兌) 부태(孚兌) 래태(來兌) 상태(商兌)와 달리 인태(引兌)는 주역에서 길흉, 여타의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 이끌고 오니 즐거운 것은 소위 조종하는 즐거움이다. 이끄는 즐거움에 대해서 주역이 판단하지 않은 이유는 중용을 벗어나면 흉(凶)할 것이요, 중용을 지키면 길(吉)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조종 하려고 하는 마음은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덕이 높은 현자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이끌고 오는데 즐거움을 느낀다면 길하겠지만, 마마보이의 어머니가 자식을 이끌고 와야 즐거운 것은 흉할 것이기 때문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18

蠱 元亨 利涉大川 先甲三日 後甲三日

【初六】幹父之蠱 有子 考 无咎 蠣 終吉

【九二】幹母之蠱 不可貞

【九三】幹父之蠱 小有悔 无大咎

【六四】裕父之蠱 往 見吝

【六五】幹父之蠱 用譽

【上九】不事王侯 高尙其事

  고(蠱)는 산 아래에 바람이 부는 괘이다. 인간의 욕망은 양면성이 있다. 긍정적으로는 삶의 동력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는 괴로움의 뿌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노력여하에 따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개개인이 최고의 에너지를 발산하여 발전된 사회가 이루어졌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반면 그 편리해진 만큼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70억에 가깝게 된 세계인구를 따져볼 때 한국인의 생활수준은 상위에 있으며 부족하지 않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라는 녀석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형(荊)에 대해 말씀하시며 “조금의 재산을 갖게 되자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하였고, 조금 더 늘어나니 지극히 갖추어졌다 하였으며, 더 가지게 되자 지나치게 대단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논어 제13편 자로 제8장]고 하시며 칭찬하셨다. 만족할 줄 알면 이미 부자이며, 만족을 모르면 가난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蠱 元亨 利涉大川 先甲三日 後甲三日

욕망(蠱)은 근원적으로 혹은 성장기에 자라나는 것이니(元亨) 휘둘리지 말고 큰 강을 건너듯 과감하게 나아감이 이롭다(利涉大川) 어렵고 고통이 따르나(先甲三日) 절제하여야 한다(後甲三日).

  근원적인 욕망은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의 동물적인 감각적 욕망이며, 성장하면서 생긴 욕망은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 등의 사회적 욕망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고(蠱)는 그릇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이니 욕망이 중용의 선을 넘은 것을 말한다. 갑은 십간 즉,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갑을 말하니, 선갑삼일은 신(辛)이고 후갑삼일은 정(丁)을 말한다. 신(辛)은 고생을 뜻하고 정(丁)은 못처럼 바로 서 있다는 뜻을 나타내며 강하고 굳건한 것을 상징한다. 탐욕에 휘둘리지 말고 큰 강을 건너듯 과단하게 나아가야 하니, 힘들어도 절제를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幹父之蠱 有子 考 无咎 蠣 終吉

아버지의 욕망을 바로함은(幹父之蠱) 자식이 있어(有子) 생각할 수 있다면(考) 허물이 없고(无咎) 위태롭기는 해도(蠣) 마침내 길할 것이다(終吉).

  아버지의 욕망은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이성의 절제력이 본성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본래 부양의 의무감은 남자의 본능이라고도 한다. 처 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있어,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면(考)’ 태생적으로 강한 이성의 힘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幹母之蠱 不可貞

어머니의 욕망을 바로하려는 것은(幹母之蠱) 고집하면 좋지 못하다(不可貞)

  역할분담의 시대에 어머니의 일과 아버지의 일이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욕망은 바깥에서 도적질을 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어머니의 욕망은 가정을 조금 힘들게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요즘처럼 명품중독과 주부도박으로 집밖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없었던 시대였고, 한계가 있었음이니, 억지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아도 시간이 바로잡아 줄 것이다.    

 

幹父之蠱 小有悔 无大咎

아버지의 욕망을 바로함은(幹父之蠱) 작은 후회가 있겠지만(小有悔) 큰 허물은 아니다(无大咎).

  아버지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자식의 마음에 작은 후회를 남기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들어주어 바로하게 된다면 큰 허물이 될 것은 아니다. 

 

裕父之蠱 往 見吝

오히려 아버지의 욕망이 넘침에도(裕父之蠱) 그대로 두면(往) 궁색함을 만나게 된다(見吝)

  공자께서는 "부모님을 모실때는 허물이 있으면 간곡하게 권고한다. 만일 들어주지 않더라도 여전히 존경하면서 거스르지 않으며, 비록 괴롭더라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논어 제4편 이인 제18장]고 하셨다.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효’이고 무조건적으로 나이 많은 이를 섬기는 것이 ‘공경’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맹자께서도 '부모께 아첨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다가 부모를 불의(不義)한 행위에 빠지게 하는 것'을 불효의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幹父之蠱 用譽

아버지의 욕망을 바로하여(幹父之蠱) 명예롭게 사용하도록 하라(用譽).

  겸손을 뜻하는 겸(謙)괘에서 언급하였지만, 공자께서 말씀하신 "자기가 서고자 하는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 서게 하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 도달하게 하는 것"[논어 제6편 옹야 제30장]을 의미하니 곧 휘겸(撝謙)과 다르지 않은 뜻이다. 아버지의 욕망으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헤아려,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이 욕망을 이루도록 애쓰시게 하는 것이 욕망을 명예롭게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무인도에서 배고픔속에 죽어가면서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는 동생을 위로하며, “우리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버려져 죽어가는 고통이 어떠한지 알게 되었으니,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반드시 그러한 가엾은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자”고 하셨던 관세음보살의 전생이야기가 떠 오른다. 나의 고통을 통해 남의 고통을 보며, 나의 욕망을 통해 남의 욕망을 보아야 한다.  

 

不事王侯 高尙其事

왕후의 자리일지언정 버리고(不事王侯) 더 고원한 가치를 추구하여야 하는 것이다(高尙其事)

  백이, 이윤, 공자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맹자께서는 “옳지 않은 일을 한 가지만 저지르거나 죄없는 사람을 한 명만 죽인다면 곧바로 천하를 얻게 해 준다 유혹하더라도 그 분들은 결코 그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맹자 공손추 상]고 말씀하셨다. 이완용이 조선의 최고 갑부가 되고 일본의 귀족이 되었던 반면에 만세(萬世)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달콤한 유혹과 욕망을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