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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유야, 내가 안다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다 [由, 誨女知之乎]
-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知之為知之]
-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 [不知為不知]
- 그것이 진실로 아는 것이다 [是知也]


  유(由)는 자로이다. 힘을 숭상하고 다혈질에 직설적이며 참을성이 부족한 캐릭터다. 공자의 직계제자 중에 가장 소인다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여러 차례 공자에 맞서곤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공자를 너무 존경한 것이 아니었을까? 장수가 더 어울리는 그였지만,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로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고, 공자는 통곡하며 절인 고기를 더 이상 먹지 않았다는 게 기록이다.


  어쨌건, 이 장에서 공자는 절제력이 부족했던 유(由)에게 지(知)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으로 구분하곤 하는 공자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자로가 모르면서 아는 척 까불거리다가 혼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공자학은 스스로를 갈고 닦는 수신(修身)과 스스로를 이겨내는 극기(克己)에서 출발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뿌리가 신독(愼獨)과 무자기(毋自欺)다. 자신을 아무도 볼 수 없고,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자리로 옮겨놓으라 한다. 그 지점에서 울려나오는 참된 소리를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이 신독(愼獨)이다. 그 소리를 듣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 무자기(毋自欺)다. 


  논어에는 공자가 하늘을 날아다녔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모른다는 고백,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심지어 부족해서 배운다는 걸 자랑하기까지 한다. '나보다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모자라고 모르고 배워야 했던 공자를 성인이라 칭하며 존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로가 공자에게 죽음에 대해서 물었다. [제11편 선진 제11장]

삶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 [未知生 焉知死]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면 크게 두 가지 병폐에 빠진다. 첫째,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도 배우려 하지 않기에 성장이 멈춘다. 둘째, 가르치려고만 하게 된다. 맹자의 표현을 빌리면 '내 밭은 버려두고 남의 밭만 김매려고 애쓴다'는 그 늪에 빠지게 된다.  


  유학만 그런가? 노장도 지(知)에 대해 마찬가지로 가르치고 있다. [도덕경 제71장]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다[知不知上]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不知知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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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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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6:37

도덕경(道德經) 제1장 간상(赶上)/노자(老子)2013. 1. 4. 16:37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無名 天地之始 (무명 천지지시)
有名 萬物之母 (유명 만물지모)

故 常無 欲以觀其妙 (고 상무 욕이관기묘)
常有 欲以觀其徼 (상유 욕이관기요)

此兩者 同出而異名 (차량자 동출이이명)
同謂之玄 (동위지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 常(상) ≒ 영원한. 불변의.


▣ 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로 끊어 해석하면, '무욕으로서 묘(妙)를 보고 유욕으로 요(徼)를 본다'

▣ 觀(관) ≒ 꿰뚫어 봄.
▣ 妙(묘) ≒ 말하기 어려운 오묘함.
▣ 徼(요) ≒ 현상으로 나타남

▣ 玄(현) ≒ 아득한 심오함 

도(道)를 도(道)라 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도(道)일 수 없고,
무엇을 이름으로 부를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이름일 수 없습니다.

이름없음에서 천지가 시작 되고,
이름있음에서 만물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참된 무(無)로서 그 신묘함을 보고자 하며,
참된 유(有)로서 그 나타남을 보고자 합니다.

이 무(無)와 유(有)도 함께 생겨나 이름이 다른 것입니다.
함께라고 하니 아득합니다.
아득하고 아득함이 모든 신묘함의 문입니다.

 

  영원불변의 도(道)가 도(道)라는 이름을 갖는 순간 그것은 진정한 도(道)가 아니게 됩니다. 진정한 도(道)는 명칭과 형상이 끊어져 말로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시작은 이렇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내(노자)가 도(道)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완전한 도(道)일 수 없음을 참작하고 들으세요."

  귀로 듣지 말고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통(通)하라는 당부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금강경의 상(相)에 관한 개념으로 대체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도(道)라는 상(相)에 사로잡히면 진리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죠.

무릇 모든 상(相)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

  노자는 무(無)로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무(無)라고 이름 한 것일 뿐, 불교의 공(空)이나 다른 종교의 신(神)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모두 가리키고 있는 곳은 마찬가지니까요. 가리키는 손가락만 다를 뿐.

 

  무(無)로부터 나온 천지라는 이름이 하나를 낳고 둘을 낳고 만물을 낳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입니다. 도덕경 제42장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슬픈 현실이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이름입니다. 나타나는 것은 다 그러합니다. 만나고 헤어집니다. 생겨나서 소멸합니다. 드러나는 현상의 측면은 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노자는 무(無)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노자는 말합니다. 무(無)와 유(有)를 함께 일통하여 하나임을 보자고 합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나지만, 그 무(無)는 유(有)가 있어야만 무(無)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서로가 서로를 이루고 있음을 보자는 말입니다. 무(無)와 유(有)가 서로서로 이루고 있음을 보는 것이 모든 신묘함을 풀어줄 열쇠라고 합니다.

  앞에 언급한 금강경 사구계와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상(相)을 유(有)로 바꾸어 볼까요? '유(有)가 유(有)가 아님을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 여래(如來)는 진리, 도(道), 불(佛) 무엇으로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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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guk

『중용』시작부의 도(道)의 정의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도(道)는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간단히 생각하면 쉬우면서도, 어려운 얘기입니다.

유학경전에서 A = B로 완전하게 정의를 시도한 부분은

이 「도(道)」의 정의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도(道)입니다.

조금 쉽게 다가올까 싶어 ‘아담과 이브’를 등장시킵니다. 태초이래로 생겨난 인간은 한 명일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체가 느껴지는 것 뿐 아니라, 무형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마음조차도 그러합니다.

「사랑」과 「미움」이 별개요, 「고통」과 「쾌락」이 별개일까요?

사랑의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크게 키우면 미움이 보다 선명히 나타납니다. 고통이라는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쾌락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고통의 크기를 크게 키우면 함께 있었던 쾌락이 더 선명히 나타납니다.

 

떨어질 수 없다’는 것, ‘관계가 없는 그것 뿐인 것은 없다’는 이 관념이 정립되면, 모든 것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사유로 연결되어 갑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국의 음양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무극에서 생겨난 ‘태극’의 개념과 연결되며, 유가, 도가, 불가의 가르침도 역시 이 개념으로 함께 통(通)합니다. 삶과 죽음도 함께 있고, 깨달음과 무지도 함께 있고, 나와 너도 함께 있고, 선과 악도 함께 있고, 유와 무도 함께 있고, 현재와 비현재도 함께 있습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도(道)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도덕경』의 첫장입니다.

도(道)라는 도(道)는 참된 도가 아니며, [道可道非常道]
이름으로 정해진 것은 진정한 그것만이 아닙니다. [名可名非常名]
천지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은 본래 이름이 없었는데 [無名 天地之始],
이름으로 가두어버림으로써 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有名 萬物之母]

그러기에 가두지 않음으로 그 신비함을 보아야하고 [故常無欲以觀其妙]
가두어져 막혀 있는 것도 보아야 합니다. [常有欲以觀其]

‘갇히지 않음(무욕)’과 ‘갇힘(유욕)’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생긴 것이지만 이름이 다릅니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이 둘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있으니 혼란합니다 [同謂之玄]
아득하고 또 아득합니다. 모든 신비의 문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중용』에서 말하는 도(道)와 다른가요?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는 중용의 설명에 덧붙여,

도(道)라는 그 개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만 떨어질 수 없다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진정한 그것과 갇혀진 그것, 역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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