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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에 해당되는 글 3

  1. 2013.01.07 제2편 위정(爲政) 제16장 4
  2. 2013.01.04 제2편 위정(爲政) 제13장
  3. 2010.02.01 군자(君子)란 어떤 사람인가?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이단이라며 공격하려 하면 해롭다[攻乎異端,斯害也已]



  이 장은 해설이 분분한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이단이라며 공격하면 해롭다 ② 이단은 공격해서 그 위험을 없애야 한다 ③ 이단을 공부하면 해로울 뿐이다.

  이단(異端)이란 극과 극이 되어 결코 통(通)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종교에서 더 자주 쓰는 용어로 보이는데, 근본 교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근본을 잠식할 위험이 있는 것을 이단이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종북'이라 칭하는 쪽을 이단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북한의 모든 가치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면 어떻게 대해야 하나? 그 답을 공자께서 해 주셨다.


  그런데 공자의 답을 모두 다르게 해석해서 더 혼란스러워졌다. 종북주의자의 생각을 경청하면 안된다는 것이 3번이다. 종북주의자를 교도소에 구금하여 억압해야 한다는 것이 2번이다. 종북으로 구별하지 말라는 것이 1번이다. ㅠ.ㅠ


  이단(異端)은 사악(邪惡)한 것이 아니라, 단지 끝에서 끝에 위치한 상대적 관념이다. 우리의 기준에서는 종북이 이단이지만, 북한의 기준에서 보면 종북이 정통이고 우리가 이단이다. 기독교의 기준에서 보면 타종교가 이단이지만, 타종교에서 보면 기독교가 이단이다. 이단(異端)이라는 개념은 상대적 관념이다. 그러니 진리의 입장에서 따져나가면 부정해야 할 이단(異端)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


  유학의 제1조가 무엇인가? 수신(修身)이다. 남을 탓하고 남을 나무라고 남의 험을 보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직 나를 바르게 세울 뿐이다. 수신(修身)! 그것을 이루면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저절로 따르게 된다. 즉, 이단(異端)이 보이는 것은 수신(修身)에 이르지 못했기에 생겨나는 마음 작용이다. 남을 보고 있기에, 남에게 요구하려 하기에 생겨난다. 그래서 공자는 이단(異端)으로 규정하여 공격하려는 자기 내면의 마음자리를 돌아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장의 가르침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까?

이단을 찾아내어 공격하려 하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하거라.

 

  한편, 이단(異端)을 '진리에 비추어' 악(惡)이라 한다면 유학의 입장은 어떨까? 의(義)를 따라야 하는데, 의(義)로움의 칼은 죽이기 위한 칼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방어를 위한) 칼이다. 추후에 더 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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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자공이 군자를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子貢問君子 子曰:]
- 말에 앞서 행하려 하고, 행하려는 바를 좇아서 말해야 한다 [先行其言而後從之] 

 

   자공의 (실천보다) 말을 잘 하는 단점을 일깨워 준 것이라고 한다. 논어는 제자의 특성을 헤아린 맞춤식 답변이 대부분이다. 자공은 말 잘하고, 영민하며, 명랑함이 잘 드러나는 제자였다. 

  유학은 ‘실천행위’에 의의를 두는 학문이다. 그래서 ‘삶이 무엇이냐, 나는 누구인가’의 존재의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보편원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하는 자기의 길을 구하기 위해 나아간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도 말만 번지르한 사람을 미워하고 무시하는데 응용하면 안되며, 스스로에게 요구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유학의 제1조를 자기를 닦는다는 수신(修身)이라고도 했기에.

  유학이 중시하는 행위는 완성되고 갖추어진 행위는 아니다. 본래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는다. 운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의 완성이 있을까? 배움을 쉬면 안된다고 하는 이유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유학에서 의미하는 행위는 ‘완성을 향해 의욕하고 노력하며 나아가는 행위’이다. 그래서 이 장은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는 하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을 말하여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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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주역에서 첫 괘가 하늘(乾)로 시작하는 까닭은 시간과 공간의 우주이치를 말하기 위한 까닭은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시간을 말하고,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간의 도를 말하기 위해서다.
짧은 시간이라고 조급하게 쓸려고 서두르지도 말고, 더 붙잡고 있으려고 미적거리지도 말라는 의미이다.
「소주역」이라는 별칭을 가진 「중용」에서 '군자의 중용은 군자의 시중(時中)이다'고 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리고, 나아가야 할 때는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는 물러나야 한다.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부분은, 점이나 부적 방술과 같은 방법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지 말하는 셋째효의 의미이다. 인간이 주도적 입장이 되어 선택해야 할 시간을 말하고 있다.
기다려야 할 때(잠용), 구해야 할 때(현룡), 나아가야 할 때(비룡), 물러나야 할 때(항룡)를 잘 판단하라는 가르침을 전하지만, 그 때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인사대천명! 오직 사람의 일을 다할 뿐이다.

점쟁이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신이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역은 점에 의지하라고, 신께 기도하라고, 부적에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른 분별력을 가진 군자가 되어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유학에서의 군자는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다.
다만, 그 옳고 그름의 잣대, 진리의 잣대는 '나에게 요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육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를 건강하게 하려 요가를 배우듯이,
정신 건강을 위해서 학문을 배우는 사람도 '자기'를 수양하려 배움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수신이 최선순위에 오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
남에게 요구하기 위한 옳고 그름은 싸움을 낳고 미움을 낳게 되는 해악이 될 뿐이다.
자기의 사상과 종교가 절대적 진리라는 믿음으로 쉬지 않고 다투고 있고,
얼마나 많은 인간이 목숨을 잃게 되어야 했던가?

 

군자는 나를 바로 세우는 사람일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감화된 사람이 저절로 벗이 되려고 찾아오기도 하는 사람이다.
논리와 말로 이겨서 사람을 끌고오려는 승리자, 내세우려는 잘난 이가 군자가 아니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은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부단히 강조한다.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논어 제13편 자로 제23장]

 

군자가 되어 자기를 다듬는다는 이 수신이 결코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가 전해주는 가르침은 '물은 변한게 없었지만 내 마음이 변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은 아닐 것이다.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알고서 구토가 일어났다는 것은 지나간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착하는 경지를 벗어났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자기자신을 깨우친 것도 깨달음의 한 이유였다고 한다. 맛있게 먹었다는 기억을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더러운 물이네 할 것이지, 구토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로서 자기를 착각하지 않고 냉정하고 철저하게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자라서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지혜롭다는 사람도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경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신(나를 닦고) 제가(집안을 바로하고) 치국(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세상을 평화롭게 하는)하는 것이, 순서대로 완성 한 후 나아가는 선후의 단계적 의미는 아니다. 수신이 곧 제가와 다르지 않고 치국과 다르지 않고 평천하와 다르지 않음이다. 즉, 수신(修身)은 평생 수련해야 하는 것이지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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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