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

« 2024/12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taeguk

『중용』시작부의 도(道)의 정의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도(道)는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간단히 생각하면 쉬우면서도, 어려운 얘기입니다.

유학경전에서 A = B로 완전하게 정의를 시도한 부분은

이 「도(道)」의 정의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도(道)입니다.

조금 쉽게 다가올까 싶어 ‘아담과 이브’를 등장시킵니다. 태초이래로 생겨난 인간은 한 명일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체가 느껴지는 것 뿐 아니라, 무형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마음조차도 그러합니다.

「사랑」과 「미움」이 별개요, 「고통」과 「쾌락」이 별개일까요?

사랑의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크게 키우면 미움이 보다 선명히 나타납니다. 고통이라는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쾌락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고통의 크기를 크게 키우면 함께 있었던 쾌락이 더 선명히 나타납니다.

 

떨어질 수 없다’는 것, ‘관계가 없는 그것 뿐인 것은 없다’는 이 관념이 정립되면, 모든 것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사유로 연결되어 갑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국의 음양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무극에서 생겨난 ‘태극’의 개념과 연결되며, 유가, 도가, 불가의 가르침도 역시 이 개념으로 함께 통(通)합니다. 삶과 죽음도 함께 있고, 깨달음과 무지도 함께 있고, 나와 너도 함께 있고, 선과 악도 함께 있고, 유와 무도 함께 있고, 현재와 비현재도 함께 있습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도(道)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도덕경』의 첫장입니다.

도(道)라는 도(道)는 참된 도가 아니며, [道可道非常道]
이름으로 정해진 것은 진정한 그것만이 아닙니다. [名可名非常名]
천지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은 본래 이름이 없었는데 [無名 天地之始],
이름으로 가두어버림으로써 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有名 萬物之母]

그러기에 가두지 않음으로 그 신비함을 보아야하고 [故常無欲以觀其妙]
가두어져 막혀 있는 것도 보아야 합니다. [常有欲以觀其]

‘갇히지 않음(무욕)’과 ‘갇힘(유욕)’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생긴 것이지만 이름이 다릅니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이 둘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있으니 혼란합니다 [同謂之玄]
아득하고 또 아득합니다. 모든 신비의 문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중용』에서 말하는 도(道)와 다른가요?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는 중용의 설명에 덧붙여,

도(道)라는 그 개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만 떨어질 수 없다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진정한 그것과 갇혀진 그것, 역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60

節 亨 苦節 不可貞

【初九】不出戶庭 无咎

【九二】不出門庭 凶

【六三】不節若 則嗟若 无咎

【六四】安節 亨

【九五】甘節 吉 往 有尚

【上六】苦節 貞 凶 悔亡

  절(節)괘는 절제를 말함이다. 멈춤을 의미하던 간(艮)괘는 그 멈춤이 혼자의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조화를 맞추어 유종의 미를 거두는 멈춤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반면 절(節)은 중용의 도에 비추어 멈추어야 마땅한 적시(適時)에 멈추는 것을 말한다. 간(艮)은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애당초 시작하지 않는 멈춤, 초창기의 멈춤, 허리까지 나아갔으면 끝을 내고 멈춤, 그러나 절(節)괘에서 말하는 절제는 관계를 고려한 멈춤이 아니라 스스로의 멈춤이다. 그 때는 상대를 배려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중용의 바른 도(道)에 맞추어 끊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는 “노년기에는 기운이 쇠퇴하므로 지키려는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논어 제16편 계씨 제7장]고 하셨다. 오래지 않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시기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잃는 것이 싫어 집착하는 것을 ‘노추’라고 하였으니 곤(坤)괘에서 말한 순한 암말처럼 편안히 순종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節 亨 苦節 不可貞

절제(節)는 성장이니(亨) 고통스런 절제(苦節)는 끝까지 이를 수 없다(不可貞)

  절제를 하는 것은 중용의 치우치지 않는 바른 도(道)를 따르는 것으로서 겉 모습은 끊는 것이지만, 내실은 성장하는(亨) 것이다. 동물들이 따뜻한 곳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것과 같은 길이어야 한다. 고통스런 절제는 추운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니 끝까지 이를 수 없다. 억지로 고통을 감내하면서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멈출 시기임을 편안히 받아들여 멈추는 것이다.

 

不出戶庭 无咎

집안마당을 나가지 않아도(不出戶庭) 허물은 없다(无咎).

  집안마당을 나가지 않는 것은 가정을 도탑게 하여 사는 것을 말한다. 가정에 충실하여 처자와 금술이 좋고 형제와 화목하며 어른을 공경하면서 그렇게 사는 삶도 허물은 없다. 군자의 사명을 받은 이가 그 명(命)을 벗어나 집 안에 머물면 흉할지는 몰라도 허물은 없을 것이다. 길흉(吉凶)은 외부적인 시각이요, 허물(咎)은 내면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不出門庭 凶

집앞마당에서 나가지 않으면(不出門庭) 흉(凶)하다.

  집을 나서서 그 집 앞의 마당으로 나아갔는데 더 나아가지 않고 있으니 흉하다. 간(艮)괘에서 말하는 허리에서 멈추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집앞마당은 소인도 군자도 멈추어야 하는 곳이 아니다. 소인은 집안으로 돌아가야 하니 지나친 것이요, 군자는 나아가야 하는 곳이니 모자란 곳이다. 절제가 필요하지 않음에도 절제하고 있는 것을 말하니 흉하다.

 

不節若 則嗟若 无咎

절제를 하지 못한 고통으로(不節若) 곧 탄식이 있다면(則嗟若) 허물은 없다(无咎)

  소인이 절제하지 못하고 집 문을 나섰지만 빨리 그 잘못을 깨닫고 탄식하게 된다면 허물은 없다는 말이다. 탄식을 하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탄식이 있음은 과했다는 깨우침이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 크게 지나치지 않았으니 집안으로 돌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安節 亨

편안하게 절도를 지키면(安節) 형통(亨)하다.

  과했다는 깨우침을 얻어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그러한 부산한 과정을 겪어서 절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편안하게 절제를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甘節 吉 往 有尚

기쁘게 절제해야(甘節) 길(吉)하고 그렇게 나아가야(往) 자랑이 있다(有尚).

  달콤한 절제(甘節)는 곧 탄식하여 깨닫고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멈추는 것이다. 멈추어야 할 때임을 깨닫고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멈추는 것이니 그런 멈춤이어야 한다.

 

苦節 貞 凶 悔亡

고통스런 절제(苦節)는 끝까지(貞) 흉(凶)하나 후회는 없다(悔亡)

  억지로 절제함은 마음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기에 끝까지 흉하지만 멈춰야만 하는 곳에서 억지로라도 멈추었으니 그 결과는 나쁘지 않은 것이다. 그러하기에 후회를 남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길흉(吉凶)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찡그리며 멈추는데 흉하지 않을 수는 없다. 반면 후회(悔)는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의 아쉬움이며 결과를 고려한 외면적 시각이다. 그래서 흉하지만 후회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흉(凶)과 회(悔)에 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8

兌 亨利貞
【初九】和兌 吉
【九二】孚兌 吉 悔亡
【六三】來兌 凶
【九四】商兌 未寧 介疾 有喜
【九五】孚于剝 有厲
【上六】引兌

  태(兌)괘는 즐거움을 뜻하는 괘이다. 태(兌)괘는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한 것은 아니다. 즐거움을 느끼는 유형을 제시하고 그 각 유형들에 대해서 바람직한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兌 亨利貞
즐거움(兌)은 성장(亨), 결실(利) 마침(貞)기의 일이다.

  즐거움은 원형리정의 단계에서 원(元)의 시기를 제외한 일이니 즉, 의식이 있는 상태에의 인식이다. 즐거움을 따르는 것은 동물이 따뜻한 곳으로 찾아가는 것과 같다. 힘들어 보이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듯 여겨지는 수도승(修道僧)도 결국은 고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천도(天道)이며 인도(人道)이다.

 

和兌 吉
조화로워 즐거우니(和兌) 길(吉)하다.

  자연(自然)처럼 조화롭기 때문에 즐거운 것을 말한다. 아름다운 강산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조화롭고 평화롭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시경에서 “처자(妻子)와 잘 화합하는 것이 금(琴)과 슬(瑟)의 연주와 같으니 형제가 화목하여 조화롭고 즐겁구나(和樂). 네 집안 제대로 다스리려면 네 처자식 즐겁게 하라”[시경 소아.상체편]고 하였다. 악마는 고통스럽고 눈물이 흐르고 피가 흐르고 파괴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며 웃는다고 하였다. 조화롭지 않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흉하다.

 

孚兌 吉 悔亡
신념이 있어 즐거우니(孚兌) 길(吉)하고 후회가 없다(悔亡)
  유학의 최고 경전이라 말하는 『논어』는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자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의 도를 배우고 체득해가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알아주는 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생길 리 없으니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논어 제1편 학이 제1장]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이러한 즐거움이 신념이 있어 즐거운 것이다. 공자께서는 안회를 칭찬하며 “거친 밥과 한 바가지 물로 누추한 거리를 살아도 그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참으로 현명하도다 안회여!”[논어 제6편 옹야 제11장]라고도 말씀하셨다. 이러한 즐거움은 물질의 부귀나 지위의 귀천에 전혀 구애되지 않는 즐거움이다.

 

來兌 凶
오는 것이 있어 즐거우니(來兌) 흉(凶)하다.

  오는 것(來)이 있어 즐거운 것은 오직 얻어서 즐거운 것을 말한다. 잃는 것 없이 얻어서 그것을 즐거워 하는 것을 말한다. 뒤에 이어지는 상태(商兌)와 달리 제 것은 하나도 내 놓지 않고 받기만 하려는 이기적 즐거움이니, 술값 계산할 때 항상 숨어버리고 얻어 먹은 것을 즐거워 하는 그런 부류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商兌 未寧 介疾 有喜
거래하여 즐거우나(商兌) 편안한 것은 아니니(未寧) 병이 되는 것을 막아야(介疾) 기쁨이 있다(有喜)

  상태(商兌)는 거래를 하여 즐거움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즉 주고받는 GIVE AND TAKE의 즐거움이다. 래태(來兌)는 내 것은 하나 내 놓는 것 없이 오직 이익만 실속만 차리려는 즐거움이라면, 상태(商兌)는 주고받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래태(來兌)는 흉하다고 했지만 상태(商兌)는 병이되는 것이 아니면 괜찮다고 한다. 주역과 논어의 입장은 정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병이 되는 수준에 이르지는 말아야 한다고 하니, 돈이 안되는 일은 애초에 하려고 하지 않는 생각을 나무라는 것이다. 공자께서도 “먼저 일하고 뒤에 그 대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1장]라고 하셨으니, 이미 선사후득(先事後得)은 고사성어가 되었다.

 

孚于剝 有厲
파괴에 신념을 두면(孚于剝) 위태로움이 있다(有厲)

  파괴에 신념을 두는 것은 사람의 길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곧 기인(奇人)의 행세를 하는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궁벽한 이치를 찾고 괴이한 일을 하는 것을 후세에 칭송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중용 제11장]고 하셨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이 도를 행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길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중용 제13장]고 하셨다. 화태(和兌)처럼 조화로움이 즐거움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가르침이 중국에서 불교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없었던 이유일 지도 모른다. 머리를 깎고, 고기를 먹지 않고,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수도승을 유별나게 유난을 떠는 것으로 생각했음직도 하다. 마음으로 관통할 수 있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유별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성인 석가모니의 잘못이 아니라 따르는 자들이 구속하고 막아놓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引兌
이끄니 즐겁다(引兌)
  화태(和兌) 부태(孚兌) 래태(來兌) 상태(商兌)와 달리 인태(引兌)는 주역에서 길흉, 여타의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 이끌고 오니 즐거운 것은 소위 조종하는 즐거움이다. 이끄는 즐거움에 대해서 주역이 판단하지 않은 이유는 중용을 벗어나면 흉(凶)할 것이요, 중용을 지키면 길(吉)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조종 하려고 하는 마음은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덕이 높은 현자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이끌고 오는데 즐거움을 느낀다면 길하겠지만, 마마보이의 어머니가 자식을 이끌고 와야 즐거운 것은 흉할 것이기 때문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2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初六】艮其趾 无咎 利永貞
【六二】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
【九三】艮其限 列其夤 厲 薰心
【六四】艮其身 无咎
【六五】艮其輔 言有序 悔亡
【上九】敦艮 吉

  간(艮)괘는 멈춤을 뜻하는 괘다. 멈추지 않고 쇠퇴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성장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멈추지만 간(艮)괘는 그러한 자연적인 멈춤이 아닌 사람의 멈춤을 말한다. 앞의 진(震)괘가 하늘의 도(道)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간(艮)괘는 그 하늘의 도(道)를 본받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너무 일찍 멈추어도 늦게 멈추지도 않아야 하며 단번에 멈추지도 말아야 한다. 성장이 언제 멈추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완만한 경사를 타고 내려가듯이 하여야 한다. 그래서 간 괘는 31번째 함(咸)괘처럼 부부관계를 예로 들어 멈춤의 도(道)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멈춤이 나 혼자만의 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면 그 조화로움을 찾아 편안하게 유종의 미를 거두는 멈춤이어야 할 것이다.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그 등에서 멈추고(艮其背) 그 몸을 붙잡지 않았기에(不獲其身) 그 뜰을 지나도(行其庭) 그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으니(不見其人) 허물이 없다(无咎)
  등에서 멈추고 그 몸을 붙잡아 뒤돌아보게 하지도 않았으니 서로가 일면식도 없는 것이다. 그 뜰을 지나도 그 사람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애초에 아무런 나아감이 없는 멈춤이었으니 그런 멈춤이라면 아무런 허물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멈춤은 근원적(元)인 멈춤이며 혼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멈춤이다. 만남이 없으면 이별이 생길 여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시당초 멈출 생각이었다면 시작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艮其趾 无咎 利永貞
그 발에서 멈추니(艮其趾) 허물이 없고(无咎) 이로움이 끝까지 지속된다(利永貞).
  함(咸)괘에서 부부관계를 통한 교감은 엄지발가락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 발에서 멈추는 것은 아주 초창기에 멈추는 것을 말한다. 아주 초기에 멈춘 것이므로 내적으로 허물도 없고 그 이로움이 끝까지 지속된다. 시작은 하였지만 시작하지 않는 것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
그 종아리에서 멈추니(艮其腓) 그 따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不拯其隨) 불쾌하다(其心不快).

  그 종아리에서 멈추니 이미 반쯤 나아가다 멈춘 것이다. 내가 멈춤으로써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 단계가 되었으니 이미 멈춤이 나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이 불쾌한 것은 당연하다. 이제는 조화로운 멈춤을 찾아야 한다. 함(咸)괘에서는 종아리에서 멈추는 것은 길하다고 했는데, 함괘에서 말하는 멈춤은 단순히 종아리의 애무를 멈추는 것을 말하고, 여기서의 멈춤은 전체적인 부부관계를 멈추는 것을 말한다.

 

艮其限 列其夤 厲 薰心
그 허리에서 멈추니(艮其限) 등살을 찢는 고통이고(列其夤) 위태롭고(厲) 애가 탄다(薰心)

  종아리에서 멈추는 것은 멈추어야 할 단계를 지나친 것이지만 그 허리에서 멈추는 것은 멈추지 말아야 할 단계까지 와서는 멈추는 것이다. 등살을 찢는 고통이며, 위태로움이며, 애태움이다. 전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조화로움 없는 멈춤이다. 자연은 거칠지가 않다. 산이 갑자기 우뚝 서 있지도 않으며 대낮이 끝나도 사람들이 놀랄 만큼 거칠게 멈추어 어둠을 두렵게 하지는 않는다. 조화의 법도는 거친 것을 거부하고 상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艮其身 无咎
그 몸을 붙잡고 멈추니(艮其身) 허물은 없다(无咎).
  허리까지 진행이 되었다면 관계를 끝내고 그 몸을 안아주며 멈추어야 하니 그래야 허물이 없다. 함(咸)괘에서 ‘관계가 끝난 후 등살을 애무함으로써(咸其脢) 후회가 없다(无悔)’고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예 시작을 하지 않던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초창기에 멈추어야지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단계를 넘어섰다면 그 일은 마무리를 하고 멈추어야 한다. 배려심을 멈추지는 말아야 하는 까닭이다.

 

艮其輔 言有序 悔亡
그 뺨에서 멈추어(艮其輔) 입술을 조리있게 움직이니(言有序) 후회가 없다(悔亡).

  함(咸)괘에서 뺨과 혀를 애무함으로써 끝내는 부부관계의 마지막을 설명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여성은 반복적으로도 다시 흥분을 느낄 수 있어 남성처럼 곧 몸과 마음도 허무감으로 돌아가지는 않기에 나의 기준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으로 마감을 하는 것이다. 완만한 경사로 평지와 이어지는 편안한 조화로움이다.

 

敦艮 吉
도탑게 멈추니(敦艮) 길(吉)하다.
  함(咸)괘에서 말했듯이 성(性)은 단순한 욕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교감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가벼운 입맞춤으로 도탑게 마무리를 하고 멈추어야 길(吉)한 것이다. 그래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