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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0 성(性)의 한계 - 자기 특별함의 갇힘
  2. 2010.02.20 성(性)을 보는 눈 - 진실함(誠)
문어

눈이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목이 색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귀는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물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이를 포태할 수 없습니다.
말은 완전하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귀도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머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
상상만은 한계가 없습니다.


상상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되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로
중용 제4장에서 앎과 모름을 지적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知者過之]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하구나 [愚者不及也]

그럼, 지나치지도 모자람도 없는 앎이란 무엇입니까?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재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것은 뭐가 무섭습니까?

‘앎의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사실은 더 무섭습니다.

재물은 있는 척 하더라도 금방 들통나지만,

아는 척 하는 것은 금방 들통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말 안다고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일으킵니다.

 

정치인 MB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정치인 KH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속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속에 있는 속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아는척을 합니다. 그리고 타방을 미워합니다.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말 잘하는 사람의 말재주에 걸려들어 냉정한 판단력을 잃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보다 특별하다'는 상상과 결부시킵니다.

나는 특별하고 너는 바보입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시비를 정확히 가립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의도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너는 한심하고 무지합니다.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미워하는 첫번째도 ‘짐작으로 다 안다는 사람’입니다.

자공아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추측하여 다 안다는 사람,

불손함을 용기라 하는 사람,

들추어내는 것만 정직이라 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논어 제17편 양화 제24장]

 

물 속에서 좀 더 오래 잠수할 수는 있어도
물 속에서 물고기처럼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성(性)이 가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성(性)에 의해
물 속에서 더 오래 잠수할 수 있는 차이가 있는 것인지,
나는 물속에서도 물고기처럼 살 수 있는 것인지
그 선을 분명하게 감지해 가는 것이 중용입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poolleaf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성(性)을 따르는 것으로 관점을 돌려보겠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하늘이 준 것을 한번 따져 보겠습니다.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닌 게 무엇입니까?
생명, 사람, 이세상, 남자, 부모님 등은 쉽게 보입니다.
도(道)의 '떨어질 수 없음'을 접목하여 안목을 넓히면,
생명만 준 것이 아니라 죽음이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남성만 준 것이 아니라 여성도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나중에는 사람만 아니라 자연도, 다른 생명도, 다른 사람도 함께 붙여준 것으로 의미를 넓혀가야 합니다만,

지금은 제한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으로 들어와서 생각해 봅니다.
감정도 욕구도 지혜도 모두 하늘이 준 것입니다.

먹기 싫다고 먹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싫다고 자지 않을 수 없고,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정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입니다. 
 

가장 쉽게 정의하면 ‘태생적 한계’가 성(性)에 가깝습니다.

이쯤에서 장자의 설명을 빌려오겠습니다.
나를 엮고 있는 백개의 뼈마디와 아홉개의 구멍 오장육부들 중에서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게 있습니까?
하늘은 우위와 열위로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르게 만들어 역할을 달리하게 해 조화로움을 도모했습니다.

 

태생적 한계가 성(性)이지만,
태생적 한계가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입니다. 
눈과 귀가 똑같이 소중한데,
눈이 들을 수 없다고 속상해 하고,
귀가 볼 수 없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인간이 머리가 중용을 벗어나 만들어낸 것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욕구, 곧 도(道)와
성(性)을 따르지 않는 욕구, 도(道)가 아닌 욕구가 있습니다.

‘자기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인식이 그렇게 만듭니다.
나는 특별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다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예뻐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로또에 당첨될 수 있습니다.

… 
나는 특별해서 새처럼 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와 너는 다를 뿐입니다.
나은 것도 있고, 모자란 것도 있고, 그렇게 다를 뿐입니다.
결국 함께 있습니다.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성(性)을 따르는 것은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예시한 몇 가지가 아니라, 안목을 넓혀 더 많이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중용에서는 거짓과 위선을 걷어낸 순결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중용 제22장에서 말합니다.

오직 세상에서 가장 지극한 진실함(誠)으로서
그 성(性)을 다하게 할 수 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사람답게 살았다고 하는 평가에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다르게 부여받은 천명을 알고, 그 성(性)에 따라 내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고통스런 의무의 길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길입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