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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0 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 - 다름의 분별
  2. 2010.02.20 사람의 성(性)과 교육의 필요성

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人莫不飮食也]
맛을 아는 사람이 드물구나 [鮮能知味也]

중용 제4장에 나오는 공자 말씀입니다.

그래서 밥먹는 중용을 한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왜 밥을 먹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배가 고픈 고통을 주어 결국은 먹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에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왜 변을 누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고통을 주어 결국 화장실로 향하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 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을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을 먹어 기쁨을 찾기 위해 훔쳐옵니다. 변을 누어 기쁨을 찾기 위해 화장실에 있는 놈을 끌어냅니다. 왜요? 천도를 따르는 것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성(性)을 따름을 고집함으로써 성(性)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와 너는 다른가요? 도(道)의 정의를 연결시켜보겠습니다. 나와 너는 ‘떨어 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태초이래로 '너'가 없는 '나'만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천도를 따라 기쁘고, 너도 천도를 따라 기쁘고, 그럼으로써 함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논어 첫장의 가르침’을 통해 연결해보시면서 그림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맛을 안다는 것'으로 넘어오겠습니다.

맛이란 것은 주관입니까? 객관입니까?
사람마다 달리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살던 지역, 문화, 먹어왔던 음식 등등에 따라서 모두가 다릅니다. 
나에게도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배가 고플 때, 배가 부를 때, 기분 좋을 때, 오랫만에 먹을 때, 언제나 틀립니다.

 

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람의 갇힌 머리는 맛을 일반화시키려 하고 객관화 시키려 합니다.
내가 맛있다고 느낀 음식을 상대가 맛있다고 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반드시 같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경우가 사실은 너무 많습니다.

‘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똑같이 알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도 없습니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있고 적게 아는 것도 있고, 사람마다 모두 틀린게 정상입니다.

엄친아(엄마친구의아들) 보다 못한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못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나와 똑같을 수 있는 사람은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잘나고 못난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맛을 안다는 것은 사람마다, 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분별 이후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으로 옮겨와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여 조화를 이룰려고 하는 것이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군주의 도(道)가 우월하고, 남편의 도(道)가 우월하고, 군자의 도(道)가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만든 것은 우위가 아니라 다름입니다.
우위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논어 제11편 선진 제15장을 통해서, 유학의 공경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께서 "유(由)는 어찌하여 내 집에서 비파를 타느냐?"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由)의 성취는 대청에 올랐고, 방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니라”

자로는 공자에 9살 적은 나이 많은 맏형입니다.
그런데도, 한소리 들었다고 까마득한 학생들이 우습게 대하기도 합니다.
보다 못한 공자께서 조정에 나섭니다.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대청에서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려했던 것이니, 너무 그러지들 말라고 합니다.

 

자로가 나이를 내세우며 호통을 치고 복종시켜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공자께서 다른 제자들을 혼내줘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유학에서의 분별은 '복종'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성별, 지위 등등의 분별은 언제나 '조화'를 향해 지향하고 있습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알깨기

인간도 동물입니다.

‘고도의 지능’이라는 특이한 성(性)을 부여받은 동물입니다.

특이할 뿐인데,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정(情)이라는 것은 인간의 성(性)이 아니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서 정(情)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기계가 되고,

인간에게서 이성(理性)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동물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순환하고 있고,

유학의 발전과정도 그러했습니다.

 

흥에 취하고, 신나하고, 울먹이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단단했고, 한번도 ‘음악’에 대해서 논한적이 없었습니다.

감성과 이성의 중용을 이탈하여, 이성중심으로 흘렀고,

조선조의 선비는 판박이 기계의 모습으로 꽉 막힌 사람들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情)으로 치우치면, 인간은 동물로 접근해 갑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명(命)하여 준 차별화된 성(性)은 ‘고도의 지능’입니다.

이 녀석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참으로 위험합니다.

불가능을 모르고, 한계를 모릅니다.

인간을 기계보다 더 한 기계로 만들 수도 있고,

인간을 동물보다 더 못한 생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유학의 배움은, 하늘이 준 ‘고도의 지능’을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中庸)에 맞추는 것입니다.

 

‘고도의 지능’은 해야할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귀’를 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역할은 짐승과는 다르게, 기계와도 다르게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은 다르지만, 귀가 맛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고도의 지능’은 제 한계를 모릅니다.

이 괴이한 녀석을 그대로 방치해 버리는 것은,

눈이 들을려고 애쓰게 만드는 것과 같고,

귀가 냄새를 맡으려 애쓰게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모든 조화가 깨어지고 부서져 버립니다.

 

그래서 중용 제1장에서 강조합니다.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행하도록 다듬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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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