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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初六】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 吝
【九二】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六三】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六四】困蒙吝
【六五】童蒙吉
【上九】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몽(蒙)괘는 몽매함, 어두움을 뜻하는 괘다. 순조롭게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을(貞) 수 있는 원형리정(元亨利貞)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건(乾)괘 구삼(九三)효의 '군자(君子)가 되어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乾乾) 것'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익힐 습(習)자가 어미새의 날개짓을 따라하는 새끼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배움은 날개짓을 보여주는 어미새의 가르침에서 출발을 한다. 그래서 주역의 몽괘는 주로 몽매함을 깨우쳐 주는 입장에서 효사를 서술하고 있다.

  한편, 주역의 첫 4괘가 독립적이고, 순차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배워(蒙) 자신을 닦고, 때가 되어(乾) 사람을 만나고(屯) 사람을 만나 제 자리로 나아가고(坤) 그래서 다시 나아갈 때가 도래하고(乾)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몽매함(蒙)은 성장기(亨)의 일이니 내가 동몽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匪我求童蒙) 동몽이 나에게 요구하여야 한다(童蒙求我)

  몽매함을 깨우쳐야 할 때는 성장기(亨)여야 한다. 배움도 배워야할 시간에 맞아야 한다. 동몽(童蒙)은 몽매한 어린아이이다. 그 어린아이가 자발적으로 몽매함을 깨뜨리려 다가와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어린아이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주입식으로 교육함은 바르지 않다는 뜻이니, 곧 공자께서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9장]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나아가려고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처음 점을 치면 미래를 알려주지만(初筮告) 계속 점을 치면 더럽혀지고(再三瀆) 더럽혀지니 알려주지 않는다(瀆則不告). 그렇게 점을 치려면 그쳐야 이롭다(利貞)
  처음 점을 치는 마음은 곧 호기심과 궁금함일 뿐이다. 그러나 계속 점을 치는 까닭은 의심하고 더 이로운 점괘를 원하는 욕심과 탐욕이 생겨난 때문일 것이다. 즉, 마음이 맑지 못하면 점도 배움도 소용없는 것이니 차라리 그치는 것이 이롭다.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 吝
몽매함을 깨우쳐 주는 것(發蒙)은 형인을 사용하면(用刑人) 이로우나(利) 그 속박을 풀어주어야 하니(用說桎梏) 형벌로만 나아가면(以往) 어렵게(吝) 된다. 
  발몽(發蒙)은 몽매함을 깨우쳐 스스로를 개발하게 하는 것이다. 형인을 사용함은 곧 매를 들어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을 말함인데, 그러한 교육이 본질적으로는 이로우나 그 엄격한 속박을 풀어주기도 해야 하니, 곧 채찍과 당근의 조화로운 교육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질(桎)은 손을 묶고, 곡(梏)은 발을 묶는 형구라고 한다. 지나치게 엄격해도 지나치게 달콤해도 바람직한 교육이 될 수 없다. 중용에 서야 한다.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몽매함을 아울러야(包蒙) 길(吉)하니 부인의 생각을 받아들여야(納婦) 길(吉)하다. 그래야 자식이 집안을 잘 이루게 된다(子克家)
  포몽(包蒙)은 몽매함을 함께 보듬어야 한다는 뜻이니 곧, 남편이 부인 의견도 받아들여서 함께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남자는 여성인 어머니로부터 몽매함을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다. 여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훗날 집안을 조화롭게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여자(女)를 취하려 하지마라(勿用取) 그 여자는 사내를 돈으로만 보아(見金夫) 있어야할 곳을 벗어날(不有躬) 것이니 유리할게 없다(无攸利)
  여자(女)는 몽매(蒙)한 여인을 말한다. 계모가 아니라 친모라도 본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부인(婦)이 될 자격이 없는 여자(女)이다. 있어야 할 곳은 자녀를 교육하는 어머니의 자리를 말한다. 몽매하여 남자의 돈만 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몽매한데, 어찌 자식의 몽매함을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困蒙吝
몽매함이 곤궁하면 소용없다(困蒙吝)

  배움에 뜻이 없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아이들을 말함이니, 그런 아이들에게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공자께서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10장]고 하신 말씀을 떠 올리게 한다.

 

童蒙吉
차라리 동몽(童蒙)이어야 길(吉)하다
  배움에 뜻이 없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곤몽의 아이들은 차라리 동몽으로 남겨두는 것이 길하다는 것이다. 애쓰면 애쓰는 사람도 따라야 하는 사람도 힘들고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다. 이 효사를 ‘어린아이의 순순함을 간직하게 해야 하는 것이 길하다’로 해석하거나, ‘동몽처럼 늘 가르침을 청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하는 것이 길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몽매함 깨뜨리는 것(擊蒙)은 도적이 되는 것은 이롭지 않고(不利爲寇) 도적을 방어하는 것이어야 이롭다(利禦寇)
  격몽(擊蒙)은 율곡 이이 선생의 『격몽요결』의 서문에서 언급한 학문이 나아갈 방향을 의미한다. 도적은 사람의 내면에 잠재한 악(惡)성이다. 악성을 없애는 공부가 아니라면, 배운 지식은 도적질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다. 도적을 방어하는 것은 곧 마음속에 도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함이니, 선성(善性)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유학에서의 배운 선비는 그 배움으로 부족한 자를 도와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 자이다. 그래서,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는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 인을 짐져야 하니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어서야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어찌 멀지 않겠는가?[논어 제8편 태백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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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屯 元亨利貞 勿用 有攸往 利建侯
【初九】磐桓 利居貞 利建侯
【六二】屯如邅如 乘馬班如 匪寇婚媾 女子貞不字 十年乃字
【六三】即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 幾 不如舍 往 吝
【六四】乘馬班如 求婚媾 往 吉 无不利
【九五】屯其膏 小貞吉 大貞凶
【上六】乘馬班如 泣血漣如

  준(屯)괘는 만남을 뜻하는 것으로, 건(乾)괘에서 말한 순조로운 원형리정(元亨利貞)을 위해 대인을 만나는 것(利見大人)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시켜도 무방할 것 같다. 屯을 '둔'으로 읽기도 한다. 주역은 첫 괘에서 시간(하늘)의 이야기를, 두 번째 괘에서 자리(땅)의 이야기를 세 번째 괘에서 만남(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는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고, 커서는 가정과 사회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한자로 풀면 사람(人)은 하나가 하나를 받쳐주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 받쳐주는 근원이 되는 만남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사람은 때가 되면 저절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오직 사람의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이다. 만남의 성질이 음과 양의 만남이기에, 준괘의 효사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을 예로 들고 있을 것이다. 양과 음은 만나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억지로 이룰려고 해서도, 서둘러서도 안된다. 

 

屯 元亨利貞 勿用 有攸往 利建侯
만남(屯)이 있어야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貞) 된다. 그러나 애쓰지 마라(勿用) 시간이 흐르면(有攸往) 자연스레 이뤄지는 것이니, 그보다 제후를 세우는 큰 뜻(建侯)을 펼치는 것이 이롭다(利)
  부모의 만남도 연인의 만남도 자식의 만남도 친구의 만남도 모두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 곧 인연(因緣)이 있어서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애쓰지 말라고 한다. 엄밀히 구분하면 혈연적인 만남은 한계지어진 곤(坤)괘의 뜻이며, 연인과 친구와의 만남이 준괘과 의미하는 만남일 것이다.

  고대 중국은 천자가 모든 천하를 지배하여 다스릴 수 없기에 각 지역에 제후를 세워 정치를 맡겨 관리하던 봉건체제로 운영되었다. 제후는 그 지역의 왕이었지만 천자에게는 신하였다. 과거 조공을 받치던 우리나라를 중국의 제후국이었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이러한 중국의 전통적 지배체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어쨌건 제후를 세운다는 것은 천자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제후를 세우듯, 큰 뜻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만남에 애쓰지 말고 큰 뜻을 펼치는데 애쓰라는 말이다.

 

磐桓 利居貞 利建侯
큰 돌을 놓아(磐桓) 멈추어야 이롭고(利居貞) 제후를 세우는 큰 뜻을 펼치는 것이 이롭다(利建侯)
  반환(磐桓)은 큰 돌을 상징하니, 고인돌을 반환이라고도 했다. 꼼작할 수 없게 큰 돌로 막아 멈추라는 말은 사랑에 방황하고 흔들리지 말라는 말이다. 과거에도 사랑의 방황은 고인돌만큼 크고 무거운 돌을 쌓지 않으면 막기 힘든 것이었나 보다. 큰 뜻을 펼치는데 진력하라는 가르침을 첫 효사부터 다시 강조하고 있다.

 

屯如邅如 乘馬班如 匪寇 婚媾 女子貞不字 十年乃字
사랑(屯如)에 혼란하여(邅如) 말을 타고 따라가면(乘馬班如) 도둑이 아닌데도(匪寇) 혼인을 청하는데(婚媾) 여자가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다(女子貞不字). 10년은 지나야 허락을 하게 된다(十年乃字)
  말을 타고 따라가는(班) 것은 지나치게 빨리 서두는 것을 말한다. 도둑이 아님은 나쁜 사람이 아님을 말한다. 사람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급하게 서두는 까닭과 억지로 이루려는 까닭에 여자의 허락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10년은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것을 말하니,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시간이다. 주역은 지나치게 서둘러 나아갔어도 또한 억지로 이루려고 나아갔어도 10년이란 세월을 인내할 수 있다면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공자께서는 “어질지 않은 사람이라면 궁핍한 가난을 오래 견딜 수 없고, 풍요를 오래 누릴 수도 없다[논어 제4편 이인 제2장]”고 하셨으니, 10년으로 상징되는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음은 이미 성취를 이룬(제후를 세운)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即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 幾 不如舍 往 吝
사슴을 잡으러(即鹿) 몰이꾼이 없이(无虞) 숲으로 들어가면(惟入于林中) 군자라도(君子) 한번 그러면(幾) 숲을 나오지 못하는 법이니(不如舍) 가면(往) 어렵게 된다(吝)
  우(虞)는 사냥할 때 새와 짐승을 좇는 몰이꾼 역할을 하던 관리를 말한다. 사슴이란 여인을 상징한다. 10년을 기다리는 것이 정석이 아니라, 준비를 충분히 하고 사슴(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 정석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사람(사슴)을 얻기 위해서도 사람(몰이꾼)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만남을 두 사람의 의지로만 유지시킬 수도 없는 까닭이다. 대표적인 예가 집안 내의 갈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乘馬班如 求婚媾 往 吉 无不利
말을 타고 따라가면서(乘馬班如) 사랑을 얻으려 했더라도 혼인을 허락 받으면(求婚媾) 나아감이(往) 길하고(吉)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여인을 얻으려고 말을 타고 서둘렀지만 10년을 기다렸으니(十年乃字) 혼인을 허락 받게 된 것이다. 시간을 서둘렀지만 곧 시간을 기다릴 줄 알았으니 길하고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공자께서 "잘못을 하고서도 고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30장]고 하셨으니, 고치면 그것으로 좋다.

 

屯其膏 小貞吉 大貞凶 
이득을 만나는 것(屯其膏)은 과하지 않다면 괜찮을 것이나(小貞吉) 지나치다면 흉할 것이다(大貞凶)
  고(膏)는 살찌고 기름진 고기를 뜻한다. 만남은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며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조력자를 만나는 것이지, 독고동락(즐거움은 나눌 수 있어도 고통은 너 혼자해라)의 만남이 아니어야 한다. 심지어 독고독락(고통은 너 혼자, 즐거움은 나 혼자)의 만남을 꿈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득(고기)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고통을 나누는 정도의 작은 이득을 꾀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지나치게 큰 고기를 만나려고 한다면 끝내 흉할 것이다.


乘馬班如 泣血漣如
말을 타고 따라가는 것(乘馬班如)은 피눈물을 줄줄 흘리게 될 것이다
  말을 타고 급하고 격정적으로 따라간 것이 사랑이었고, 인연이었다면 10년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기에 혼인을 허락 받을 수 있어 길할 것이다.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 실체가 사랑이 아닌 이득(고기)를 만나러 한 것이기에 10년을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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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坤 元亨利 牝馬之貞 君子 有攸往 先迷後得主 利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初六】履霜 堅冰至
【六二】直方大 不習 无不利
【六三】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六四】括囊 无咎 无譽
【六五】黃裳 元吉
【上六】龍戰于野 其血玄黃
【用六】利永貞

  곤(坤)괘는 자리를 말하며 한계를 말한다. 건(乾)괘의 시간을 대하는 사람은 그 시간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기다릴 때, 나아갈 때, 물러날 때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곤(坤)괘의 자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부자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선진국에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나고,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지금 시대에 태어나고 등등, 이미 선택되고 정해진 것도 있는 법이다. 남자로 살기 싫어서 여자로 살려고 하는 것은 주역의 시각에서 보면, 자리의 도를 거스르는 잘못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대표적인 인간의 한계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일 것이다. 그럼 이러한 유한성을 인간은 어찌 대해야 하는가? 한탄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은 곧 하늘이 나에게 맡긴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왜 그런 한계를 주었는지에 대한 자리의 도(道)을 헤아리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찾았을 때, 즉 제 자리에 앉았을 때 비로소 삶을 가치 있게 이끌 수 있을 것이다.

 

坤 元亨利 牝馬之貞 
제 자리(坤)라야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순한암말처럼 죽게(牝馬之貞)된다 
  시간(하늘)만이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씨는 변화의 순리에 따르지 못하고 싹이 트지도 못하고 죽어버린다. 장소(坤) 역시 생성, 성장, 성숙(元亨利)의 변화의 법칙과 관계하게 되지만, 순한 암말처럼 마감 하는 것(牝馬之貞)이 특징적이다. 암말을 뜻하는 빈마(牝馬)는 유순함을 상징한다. 소리를 내거나 과시하지 않는 유순한 성질 때문에 마차를 끄는 말은 어미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순한 암말처럼 죽는 것은, 이어지는 효사에서 용의 전쟁으로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천수(天壽)를 다하고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君子 有攸往 先迷後得主 利
군자(君子)로써 시간이 지나면(有攸往) 처음에는 미혹하였어도 후에 주인을 얻게 될 것이니(先迷後得主) 이롭다(利)
  주인을 얻는 것(得主)은 곧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는 것을 말함이니, 군자(君子)가 되어 시간이 흐르면(有攸往) 처음에는 미혹하였어도(先迷) 곧 자리(사명)을 깨닫게 될 것(後得主)라는 뜻이다.

  『순자』「대략」에 다음과 같은 자공과 공자의 문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자공은 ‘할 일이 많아 힘드니, 군주를 섬기는 것 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어버이를 섬기는 것 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처자를 부양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친구와 관계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논밭을 경작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차례로 공자께 여쭈었다. 공자께서는 쉬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한탄하며 "그렇다면 저는 조금도 쉴 수 없는 것입니까?"하고 공자께 하소연을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저 들을 보아라. 흰 듯, 찬 듯, 막힌 듯하지 않느냐? 저 곳이 네가 쉴 곳이다" 자공이 감탄하며 말했다. "위대하구나 죽음이여! 군자도 쉬고 소인도 쉴 수 있도록 해 주는구나!" 하늘이 시간을 주어 세상에 보낸 이유는 할 일을 시키려 보낸 것이다. 쉬도록 해 주려 하였다면 죽음의 공간 속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유유왕(有攸往)은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풀었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서남이면 벗을 얻을 것이요(利西南得朋) 동북이면 벗을 잃으니(東北喪朋) 편안한 마감이어야(安貞) 길(吉)하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으로 밝은 곳을 상징하니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반대로 서쪽은 해가 지는 어두운 곳이니 쉽게 갈 수 없는 힘든 곳이다. 남쪽은 따뜻한 곳으로 올바른 곳을 상징하며, 북쪽은 추운 곳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곳을 상징한다. 그래서 힘들어도 옳은 곳(西南)으로 움직이면 친구를 얻고(得朋), 쉽지만 바르지 못한 곳(東北)으로 움직이면 친구를 잃을 것(喪朋)이라고 하니, 힘들어도 옳은 곳을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친구는 자리를 찾아 사명을 다하고 편안하게 죽는 것, 순한 암말처럼 죽음(貞)에 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履霜 堅冰至
서리를 밟게 되어서야(履霜) 단단한 얼음에 도달할 것을 안다(堅冰至)
  늙음을 빗대어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흰 머리가 나고 흰 수염이 나는 까닭은 이제 마감을 할 얼음(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하늘의 신호이다. 얼음이 어는 겨울이 올 것임을 방관하고 살다가, 서리를 밟게 되어서야 비로소 생의 무상함에 안타까워 하는 것이 바쁜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노랫말처럼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가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좀 더 일찍 해 보면 좋지 않을까?

 

直方大 不習 无不利
대지(直方大)의 도는 의욕하지 않으니(不習)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직방대(直方大)는 광활한 대지의 덕성을 묘사하고 있다. 땅은 모든 것을 차별없이 포용한다. 대추씨가 들어오건 사과씨가 들어오건 차별하지 않고 양분을 주고 키워준다. 사람의 자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주어진 한계를 의욕(習)하여 바꾸려고 하지 않아야 하니, 남자가 여자됨을 의욕하지는 않아야 한다. 배우고 힘써 의욕해야 하는 것은 자리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지처럼 이롭게 해 주는 역할[사명]을 다 하는 것에 두어야 할 것이다.

  유학의 명분론에 대한 의미와도 연결되는데, 명분론(名分論)이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계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기에 조금 보충하고자 한다. <여기를 참조> 하시기 바란다.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한계를 아는 현자(含章可貞)는 왕의 일을 따르게 되면(或從王事) 완성없이(无成) 마치려 한다(有終)
  함장(含章)은 바름을 머금은 것이며 가정(可貞)은 정해진 한계를 수용하는 것이니, 곧 자리를 알고 사명을 아는 바른 현자를 말한다. 왕의 일이란 만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려 바른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완성이 없다는 것(无成)은 그 공로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마침이 있다(有終)는 뜻은 올바른 결과만을 얻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세종실록』에 충녕대군을 잘 단속하라는 원경왕후의 말에 충녕대군 부인이었던 소헌왕후가 주역의 이 효사를 인용하여 대답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곧 충녕대군이 애쓰는 일은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무성유종(无成有終)하기 위함이라는 뜻이었으니, 공로를 탐내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 바른 결과만을 원하다는 뜻이었다. 

 

括囊 无咎 无譽
돈주머니를 묶어놓는 것은(括囊) 허물은 아닐 것(无咎)이나 명예롭지도 않을 것이다(无譽)

  돈주머니를 묶는 것은 혹종왕사(或從王事)하지 않고 재능을 쓰지 않는 것을 뜻한다. 혹종왕사하여 유성(有成)하려고 하면 제 자리를 모르는 지나친 것이며, 혹종왕사조차 하지 않는 것은 모자라는 것이니, 모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자공이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상자에 잘 보관하겠는지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팔 것인지를 여쭈니 공자께서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도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논어 제9편 자한 제13장]고 하셨다. 쓰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주역에서 말하는 허물은 내(內)적인 시각이며 길흉(吉凶)과 명예(譽)는 외(外)적인 시각이라고 했었다<여기를 참조>. 돈 주머니를 풀지 않는 것은 안으로, 자기 내적으로 허물은 아니어도 외적으로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고 한다.

 

黃裳 元吉
황색치마(黃裳)가 근원적으로는 길하다(元吉)
  황색치마(黃裳)는 황제가 입는 치마를 말하는 것이니, 곧 현자가 왕의 일을 대신맡아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것 보다는 왕이 왕으로서의 일을 해야 근원적으로 길하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충녕대군이 혹종왕사(或從王事)하기보다 양녕대군이 왕사(王事)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길하다는 뜻이다. 양녕대군이 자리의 도리(坤)를 잊고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 충녕대군이 자리를 옮겨 조화를 맞추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양녕대군이 제 자리에 앉고 충녕대군도 제 자리에 있는 것이 근원적으로 길한 것이다.

 

龍戰于野 其血玄黃
용들이 들판에서 싸우면(龍戰于野) 그 피가 검고 누르게 된다(其血玄黃)
  검고 누른 것(玄黃)은 천자문에도 나오는 하늘과 땅(天地)이 검고 누른것(玄黃)이니 곧, 온 세상을 말한다. 들판에 있는 용 또한 건(乾)괘의 현룡처럼 제자리를 잡지 못한 용이니, 그들이 잘못된 자리에서 다투면 온 세상이 피로 물든다는 말이다. 제 자리[사명]를 모르는 용들이 세상을 혼란으로 이끄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장래희망, 꿈, 사명에 대한 생각을 접고, 오로지 돈을 많이 벌고 부러워하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물질만능주의가 심각한 듯 하다. 천지에는 풀도 있고 토끼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곰도 있어 셀수 없는 다른 생명체가 다른 역할을 하며 생태계의 조화를 이룬다. 사람도 모두 공평하고 소중한 생명이지만, 인간 세상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사람마다 맡은 역할은 다르다고 하였으니, 각기 다른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공자께서도 세상을 바른 도리로 세우고자 하였어도 천자의 지위를 얻고자 하지는 않으셨다.

 

利永貞
열매를 맺으려는 것(利)은 끝까지 계속(永貞)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가 맡은 사명을 알고 자기 자리를 찾아 역할분담을 하여 열매를 맺어야 세상이 조화롭게 된다. 열매를 맺으려는 것은 천성(天性)이라 끝까지 지속되는 것인데, 어긋난 자리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기에 세상의 조화가 파괴되어 피로 물들게 되는 것이다. 즉, 용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세상이 피로 물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자리를 잡고서 그 곳에서 열매를 맺으려 하는 천성 때문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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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 元亨利貞
【初九】潛龍勿用
【九二】見龍在田 利見大人
【九三】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九四】或躍在淵 无咎
【九五】飛龍在天 利見大人
【上九】亢龍有悔
【用九】見群龍无首 吉

  하늘 아래의 모든 생명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씨(元)로부터 시작해, 꽃을 피우고(亨), 열매를 맺고(利), 소멸하게(貞) 하였다. 모든 생물(生物)이 이 변화의 법칙을 순리대로 따를 수 있을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싹이 텄으나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있고, 꽃이 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논어 제9편 자한 제22장]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열매를 거둬야 할 때가 있다. 겨울에 씨를 뿌리면 소용이 없으니,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시간만 맞추면 순조로울까? 비옥하지 않은 모래밭에 씨를 뿌리면 역시 소용없다. 무슨 일이든 무슨 생명이든 마땅한 장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때가 맞고 자리가 맞으면 모든 것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가? 봄에(시간) 비옥한 땅에(장소) 씨를 뿌려도 가뭄이 들면 소용이 없다. 하늘이 보살펴야 한다. 동물은 자존능력을 갖출 때까지는 어미가 젖을 먹이고 지켜주어야 한다. 시간, 공간 , 보살핌(사랑), 그것으로 완전할까? 사고(事故)가 없어야 한다. 토끼 새끼가 호랑이의 먹이가 되고, 호랑이 새끼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럼 그러한 사고는 어찌하여 생길까? 『중용』의 "하늘은 만물을 살리심을 그 재질에 따라 두터이 하시니, 바르게 심어져 있으면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중용 제17장]는 가르침을 언급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바른 길을 가도록 애쓰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乾 元亨利貞
시간(乾) 아래의 인간은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貞) 된다
  시간은 영원불변하며 완전하다. 시간은 변치 않고 영원히 흐르지만, 그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 생물은 영원한 것이 없다. 영원한 하늘의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이치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순탄하게 그 변화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선 시간에 맞추어 씨를 뿌려야 한다. 원형리정(元亨利貞)은 주역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며, 해석여하에 따라 전체의 의미를 다르게 하는 부분이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潛龍勿用
잠용(潛龍)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마라(勿用)
  물에 잠겨있는 용(潛龍)은 아직 나아가야 할 때를 만나지 못한 용이다. 용(用)은 동(動)의 뜻으로 해석한다. 잠용은 나아갈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새기면 될 것이다. 즉,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 때를 말한다.

 

見龍在田 利見大人
나타난 용이(見龍) 밭에 있으니(見龍在田)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밭은 용이 있어야 할 제 자리가 아니다. 용은 하늘을 날아야 한다. 씨를 뿌릴 시간이 도래하였어도 모래에 뿌리면 소용이 없다.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대인(大人)은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말한다. 즉, 현룡은 도움을 받아야 할 때를 말하고 있다.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군자(君子)가 되어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乾乾) 어두움(夕)을 경계한다면(惕) 위태로울지라도(厲) 허물이 없다(无咎)
  때를 만나고(天), 바른 자리를 잡고(地), 사람을 도움을 얻은(人)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이 이루어졌다고 만사 순탄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였다. 힘써 배워야 할 때를 말한다. 한편, 주역에서 말하는 군자(君子)는 어떠한 사람일가?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或躍在淵 无咎
연못에서 과단하게 비상해야(或躍在淵) 허물이 없다(无咎) 
  혹(或)을 문언전의 해석대로 ‘의심하다’는 의미의 혹(惑)으로 해석하면, 만반의 준비가 완료 되었더라도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한편, 혹(或)은 ‘갑작스럽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과단성있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지금은 나아가야 할 때다. 신중해야 하는가, 과단해야 하는가? 여기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자기로부터 찾아야 할 해답일 것이다. 과단성이 부족한 나는 후자의 의미로 새기며 읽는다.

  

飛龍在天 利見大人
하늘을 날고 있으니(飛龍在天)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거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전성기이다. 열매를 맺은 시기(利)이다. 그렇지만 도와준 대인(大人)을 만나야 이롭다고 한다. 전성기가 도래하였으니 그 복을 내가 누리는 것에만 써야 할까? 사람은 하늘(시간)과 땅(자리)에게 성취한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는 없지만,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는 내가 이룬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 있다. 은혜를 잊지 말라는 말이다. 재아가 3년상을 1년상으로 바꾸겠다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식으로 태어나 최소한 3년은 되어야 보살핌이 없어도 살 수 있게 된다. 재아도 부모에게 최소한 3년의 보살핌은 받지 않았더냐?"[논어 제17편 양화 제21장]. 이미 갖춰지면 고마움을 쉬이 잊어버리기도 한다. 비룡은 베풀어야 할 때를 말한다. 

 

亢龍有悔 
오를려고만 하는 용(亢龍)은 후회가 있다(有悔)
 
  문언전은 항(亢)을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나는 것을 알 지 못하며, 존재만 알고 없어질 것을 모르고, 얻는 것만 알고 내 놓을 줄을 모른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며,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러날 때가 되었다면 놓아야 한다. 때가 되면 부모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부모의 역할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면, 자식은 독립하지 못하고 마마보이가 되어버린다. 사람은 본시 영원을 갈망한다. 영원한 삶을 꿈꾸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영원한 안락을 꿈꾸곤 한다. 그렇지만,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은 흐른다」는 하늘의 법칙 밖에 없다. 그 하늘아래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법칙에 따라서.변한다. 항룡은 물러나야 할 때다.

 

見群龍无首 吉
용의 무리에(見群龍) 우두머리가 없으니(无首) 길(吉)하다
  세상에는 잠룡(潛龍)만 있지도 않고, 현룡(見龍)만 있지도 않고, 비룡(飛龍)만 있지도 않고, 항룡(亢龍)만 있지도 않다. 모두 함께 더불어 세상을 이룬다. 그 차이는 때와 때의 선택에 따라 다른 모습에 불과할 뿐, 모두가 같은 용이다. 우주의 시간에서 볼 때는 불꽃처럼 사라지는 찰나의 시간만 가진 별 다를 것 없는 생물이다. 그러니 나 잘났다고 머리를 내밀지 마라는 뜻이다.

  공자께서 소인을 하찮게 여기라고 소인과 군자를 구별한 것은 아니었다. “군자는 의로움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로움을 생각한다”고 하시고는 그러니 "소인을 우선 이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소인을 멸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자께서는 「사랑」을 말한 것이었지 「미움」을 말한 것이 아니셨다. 번지가 인(仁)을 여쭈자 공자 말씀하시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지(知)에 대해 여쭈자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知人)"라고 하셨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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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괘, 건(乾)괘의 효사에서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용어가 제법 있다. 길(吉)한 것과 흉(凶)한 것, 이로운 것(利), 허물이 없는 것(无咎), 후회가 있는 것(有悔),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厲) 등등, 구분히 모호한 한자어가 등장한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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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을 때 극복하지 않으면 길을 헤메는 관문이 있다.
중(中)의 관념이 서지 않으면 혼돈으로 빠져든다.
중(中)에서의 직선은 가둠을 관통하는 있는 것을 말한다.
갇힌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통(通)하여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엇으로 그 가둠을 관통하고 있을까?

공자께서 "증삼아 내가 말하는 도는 하나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자 증삼은 "그렇습니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이 "뭔 말이야?"라고 묻자, 증삼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지극한 서(恕)야" 라고 하였다. [논어 제4편 이인 제15장]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을 동(同)하여 관통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중(中)은 가둠의 안과 밖을 마음으로 일관하여(恕) 관통하는 「진리」이다.

원효대사께서 마신 해골에 담긴 물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다.

사물은 변한 것이 없는데 (해골에 담겨있던 물은 똑 같은 물이었지만)
눈으로 보고나니 마음이 변하더라.

이 일화를 「일체유심(一切唯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대학』 역시 마음(心)을 강조한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대학 제7장 정심수신]


중(中)은 마음으로 통(通)하여야 알 수 있는 「진리」이므로
노엽고, 두렵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걱정스러우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공자의 말씀도, 석가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모두 머리에서 지워내어야 할 것이다.

 

용(庸)은 이러한 중(中)의 진리」에 조화롭게 맞추어 대응하는 「응답이다.
정이의 "바뀌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라는 설명은 오해를 일으키기 딱 좋다. 주희의 "일상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묶어 설명하려고 하니, 진순처럼 "오곡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은 만고의 일상이라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갈수록 이해하기만 어렵게 하였다.

 

위 속에 음식이 알맞게 차 있도록 유지시키는 것이 중용(中庸)은 아니다.
그러려면 그 중간을 맞추기 위해 하루종일 조금조금 먹고만 있어야 한다.
밥을 많이 먹고, 다시 많이 부족해지면 다시 과하게 채우는 것이 밥먹는 중용이다.
그래서 배가 부를 때를 만나고, 적당히 좋을 때를 만나고, 배가 고플 때를 만난다.
각 시기(時)에 알맞는 응답은 모두 다르다. 100년치 밥을 한꺼번에 먹고 한꺼번에 배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중용의 응답은 시공(時空)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즉, 용(庸)은 일반적 인식으로는 바뀌는 것으로 설명해야 오해가 덜하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지능도 모두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10대, 20대, 30대가 다르다.
이러한 다름을 분별(分別)하여 가장 적합하게 맞추어 조화롭게 응답하는 것이 중용이다.
병(病)을 기준으로 똑같은 약을 쓰는게 아니라,
각 사람의 특성을 기준으로 다른 처방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동양의학이었고,
역시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 제자들마다 그 다른 특성을 감안하여 다르게 가르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한 마디는 그 한마디 말과 글에만 갇혀서 이해하려면 오해가 생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무엇을 위해서 그러한 대화를 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증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대화는 상상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중(中)의 사유는 안과 밖을 통(通)하는 것이며,
중용(中庸)의 사유는 분별(分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어리석은 중생아 개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왜 모르느냐고 한다.
그렇지만 개와 사람이 교감하기 위한 육체사랑을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는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기도 하다는 중(中)이며,
진리에 반응하는 응답은 개와 사람이 다르다는 분별(庸-용)이다.

현상계가 만들어 내는 거짓에 갇혀있는 중생들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현상계가 만들어내는 것은 허상이라는 깨달음에 갇혀서,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무지(無知)도 생각을 가두고, 지(知)도 생각을 가둔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지(知)도 중용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까닭을 알겠구나. 지자(知者)는 과(過)하고 우자(愚者)는 부족하구나” [중용 제4장]


결국 유가의 진리는 세속과 초월의 한 쪽이 아니라 통(通)하는 것이기에,
속세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높고 원대한 이론으로 나아가 고원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로 돌아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것이 곧 도(道)이기도 하다.
현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도(道)이기는 하여도, 중용의 도리에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자기와 남은 별개의 분별(分別)된 개체이면서 또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에
개인(個人)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옷을 벗고 싶어도 아무곳에서나 나체로 있으면 안되며 예(禮)를 지켜야 한다.
물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중용에 따라 그 적합한 응답은 변한다.

그런데,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이 중용의 생기발랄함과 융통성이 없어져 버렸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말하였다 “큰 덕은 한계를 지켜야 하지만, 작은 덕은 들고 나는 것이다 [논어 제19편 미자 제11장]

송대 이후의 학자들이 이 장을 비난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작은 덕이 어찌 들고 날 수 있겠는가? 작은 덕이라고 해서 들쑥날쑥한다면, 곧 마음이 방종해져서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는 등등의 실랄한 비난을 받았다. 아마도 자하의 말이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 같다. 그러나 자하가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송대이후의 학자들도 고원함과 깨끗함을 추구할 수록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고원함은 사람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송대 이후의 학자들은 소인은 멸시하여 멀리하고, 선비라는 자들끼리만 어울리는 계급과 권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단발령이 일제의 강제라고 해서 선비들이 반발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의 명령이라고 해도 따를 수 없었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정절을 유린당한 여인처럼 실성하여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 목을 매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어찌 유학만 고여서 막히고 가두어 졌겠는가? 사찰과 교회도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과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가두고 막아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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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乾)괘가 '군자'가 되어 스스로 노력하는 주동적인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곤(坤)괘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성찰은 죽음이 다가오는 서리가 내릴 즈음에 더 진지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리가 내리면[늙으면] 비로소 꽁꽁 얼음이 어는 시기[죽음]이 있음을 절감한다는
때 늦은 통찰을 언급하며 곤괘는 시작을 한다.
곤괘의 가르침을 짧게 정리하면 한계를 이해하는 것 즉, '정해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계와 정해짐은 자연의 뜻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자리에도 있는가?
유학에서는 인간이 만든 자리도 그 자리를 거스러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대신에 누르고 억압하고 부려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우월적인 자리가 아닐 것을 요구한다.

 

윗자리에 있다하여 아랫사람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며,
아랫자리에 있다 하여 윗사람에게 매달리라는 것이 아니니
오직 나를 바르게 할 뿐, 남에게서 구하지 않는다
.[중용 제 14장]

 

유가의 신하는 군주에게 굽신거리는 이가 아니었다.
신하의 지위에 있으므로 신하의 도리를 다 하면서, 군주에게는 군주의 도리를 다 하도록 도와주려던 이였다.
폭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군주의 잘못된 이름을 가진 악한에 불과하니 엎어 버려도 되는 것이었으니,
이름에 앞서, 이름에 맞는 제 도리를 다 하는가 하는 이른바, 정명사상(正名思想)을 중요시했다.
임금에 복종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주인에게 복종하고, 양반에게 복종하는
무조건적 ‘복종’만을 강조하기 위해 이 명분론을 이용했던 것은 변질된 유학의 잔재였을 따름이다.

 

사람은 자유롭고 싶어한다.

때로는 아버지라는 자리, 남편이라는 자리, 자식이라는 자리, 엄마라는 자리에서 벗어남을 꿈꾼다.
그러나 자리를 벗어나 욕구가 이끄는대로 제약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그 자리를 속박이라고 여기지 않는 편안함에 도달하는 것이 유학에서 추구하는 자유이다.
자식으로서는 자식의 도리를, 아버지로서의 아버지의 도리를, 남편이 되어서는 남편의 도리를 다 한다.
그 도리를 다 함은 의무감으로 따르는 길이 아니라 마음이 이끌기에 가고 싶은 행복한 길이다.

 

자리는 하늘이 잡아 놓기도 했고, 유학에 의하면 사람이 잡아 놓기도 했다.
사람이 잡아 놓은 그 자리 역시 명분(名分)에 맞아야 한다. 그러려면 '문화'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군주주의 시대에는 그 문화로 정해진 자리가, 민주주의 시대에는 그 문화에 맞는 자리가 다를 것이다.

 

공자께서 새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머물러야 할 곳이 숲인 줄 아니, 사람이 새보다 못해서 되겠는가?" [대학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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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往)이 독자적으로 쓰일 경우에는 ‘나아가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장소를 뜻하는 유(攸)와 결합하면, 유유왕(有攸往)은 '나아갈 곳이 있다면'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나는 왕(往)이 언제나 나아가는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 "내 보낸다"는 뉘앙스를 가진다고 생각되는 곳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에서 왕(往)은 래(來)와 결합하여 곧 잘 사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大往小來(대왕소래)"는 큰 것을 내 보내고 작은 것을 받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유유왕(有攸往)은 ‘시간을 내 보내는 것’으로 풀었다.
일반적으로 유(攸)는 장소를 뜻하지만, '시간이 오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해석을 시도했냐고 하면,
대부분은 그렇게 해석해야 전체적으로 문맥과 더 어울려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리유유왕(利有攸往)'갈 곳이 있으면 이롭다'해석하는 것과
'시간이 지나가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해석이 되어버린다.
그 점을 감안하면서 주역을 보시길 바란다.

 

나아감을 뜻하는 말은 정(征)과 행(行)도 있다. 왕(往)은 길을 모르고 나아가는 것이라면,
정(征)은 바르다는 내적 확신을 하고 힘차게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행(行)은 피동적인 뉘앙스로 ‘따라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쁠 부(孚)에 대해서 그 의미에 큰 논란은 없다.
새가 그 다리를 바꿔가며 알을 품어주어, 그 알을 깨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인데,
특히 유부(有孚)라는 결합어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신념’이요, ‘믿음’이요, ‘생각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는 어렵지 않으나 문맥상 적당히 번역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이 없어 곤란한 면이 있다.
생각없이 하는 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을 갖고 하는 것'이란 뉘앙스로 해석했으면 한다.

 

이상, 주요한 용어에 대한 간단한 원론적인 설명을 마친다. 이러한 용어풀이가 모든 주역에 통용되는 주역 사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변화를 거쳐서 괘효사가 추가, 삭제, 수정되는 과정에서 전체를 통괄하는 완벽한 통일성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이러한 상식을 갖고 문맥에 가장 어울리게 해석하는 융통성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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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吉)은 길(吉), 대길(大吉), 원길(元吉), 종길(終吉) 등등으로 주역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며 ‘좋다’는 의미이다. 흉(凶)은 흉(凶), 유흉(有凶), 종흉(終凶), 흉사(凶事) 등등으로 역시 주역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며 ‘나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좋다는 늬앙스를 가진 것은 허물이 없다는 무구(无咎), 후회가 없다는 무회(无悔), 형통하다는 형(亨), 이롭다는 이(利) 명예롭다는 예(譽)와 같이 여러가지 다른 표현들이 있다. 흉(凶)도 마찬가지이다. 뉘우침이 있다는 회(悔), 어렵다는 린(吝), 위태롭다는 려(厲), 허물이 있다는 구(咎) 등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보통은 좋고 나쁘고의 정도의 차이로 해석하여, 길흉은 아주 좋거나 나쁘고, 나머지는 그 보다 아래단계라고 해석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만 바라보기에는 해석이 난해해지는 부분들이 많이 생긴다. 예컨대, 대과(大過)괘의 상육(꼭대기 효)효의 효사는 '過涉滅頂 凶 无咎(과섭멸정 흉 무구)'이다. "흉한데, 허물은 없다"고 한다.


정교하게 좋고 나쁘다는 여러 표현들을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내 생각에 따라서 그 기준을 나누어 해석을 시도했다. 첫째, 길흉(吉凶)은 외면(外面)적인 시각에서의 판단이며 내부적으로는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허물(咎)은 내면(內面)적인 시각에서의 판단이며 외부적으로는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대재벌이 되는 것은 길(吉)한 것이지만, 오히려 내심은 불편하고 그 위치에 서고 싶지 않으면 길(吉)하여도 허물이 있는 것(有咎)이고, 흥선대원군이 세도가의 바지가랭이를 기어다니는 것은 흉(凶)하지만, 그 내심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멋지게 속이고 있는 것이니, 오히려 쾌재를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라면 흉(凶)하지만 허물이 없을(无咎)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후회(悔)는 원하던 결과를 염두해 둔 내면(內面)적 판단이다. 회(悔)는 결과가 좋으면 바뀔 수 있는 내면의 마음이다. 예컨대, 술잔과 물잔이 있었는데, 마음은 술을 먹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물잔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으니 허물(咎)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술잔에는 독이 들어 있어서 술을 먹은 사람은 죽고, 물은 먹은 자신은 살았으니 회(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셋째, 명예(譽)는 길흉과 같은 외면((外面)적인 시선이지만, 길(吉)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도 있는 성취임에 비하여, 예(譽)는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벌이 되는 것은 길(吉)한 것으로서 존경을 받을 수도 부러움을 받을 수도 있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능력에 따른 당연한 성취로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외면(外面)적으로 판단되는 사람이 그만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 곧 명예(譽)이다.

 

넷째, 형(亨)은 계속적으로 상승되어가는 좋음을 말하며, 리(利)는 그 양의 대소에 관계없이 얻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어렵다는 린(吝)은 실패의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며, 위태롭다는 려(厲)는 고생스럽고 힘들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것을 기본으로 하여 해석을 시도했다. 그러나 100%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으며,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현재의 주역은 1인이 논리를 가지고 통일되게 기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역의 괘효사는 오랜시간을 통하여 수정, 첨가, 삭제가 되어 전해져 온 것이기에 그 과정을 거치면서 혼용되기도 했고, 다른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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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서 첫 괘가 하늘(乾)로 시작하는 까닭은 시간과 공간의 우주이치를 말하기 위한 까닭은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시간을 말하고,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간의 도를 말하기 위해서다.
짧은 시간이라고 조급하게 쓸려고 서두르지도 말고, 더 붙잡고 있으려고 미적거리지도 말라는 의미이다.
「소주역」이라는 별칭을 가진 「중용」에서 '군자의 중용은 군자의 시중(時中)이다'고 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리고, 나아가야 할 때는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는 물러나야 한다.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부분은, 점이나 부적 방술과 같은 방법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지 말하는 셋째효의 의미이다. 인간이 주도적 입장이 되어 선택해야 할 시간을 말하고 있다.
기다려야 할 때(잠용), 구해야 할 때(현룡), 나아가야 할 때(비룡), 물러나야 할 때(항룡)를 잘 판단하라는 가르침을 전하지만, 그 때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인사대천명! 오직 사람의 일을 다할 뿐이다.

점쟁이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신이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역은 점에 의지하라고, 신께 기도하라고, 부적에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른 분별력을 가진 군자가 되어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유학에서의 군자는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다.
다만, 그 옳고 그름의 잣대, 진리의 잣대는 '나에게 요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육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를 건강하게 하려 요가를 배우듯이,
정신 건강을 위해서 학문을 배우는 사람도 '자기'를 수양하려 배움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수신이 최선순위에 오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
남에게 요구하기 위한 옳고 그름은 싸움을 낳고 미움을 낳게 되는 해악이 될 뿐이다.
자기의 사상과 종교가 절대적 진리라는 믿음으로 쉬지 않고 다투고 있고,
얼마나 많은 인간이 목숨을 잃게 되어야 했던가?

 

군자는 나를 바로 세우는 사람일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감화된 사람이 저절로 벗이 되려고 찾아오기도 하는 사람이다.
논리와 말로 이겨서 사람을 끌고오려는 승리자, 내세우려는 잘난 이가 군자가 아니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은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부단히 강조한다.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논어 제13편 자로 제23장]

 

군자가 되어 자기를 다듬는다는 이 수신이 결코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가 전해주는 가르침은 '물은 변한게 없었지만 내 마음이 변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은 아닐 것이다.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알고서 구토가 일어났다는 것은 지나간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착하는 경지를 벗어났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자기자신을 깨우친 것도 깨달음의 한 이유였다고 한다. 맛있게 먹었다는 기억을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더러운 물이네 할 것이지, 구토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로서 자기를 착각하지 않고 냉정하고 철저하게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자라서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지혜롭다는 사람도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경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신(나를 닦고) 제가(집안을 바로하고) 치국(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세상을 평화롭게 하는)하는 것이, 순서대로 완성 한 후 나아가는 선후의 단계적 의미는 아니다. 수신이 곧 제가와 다르지 않고 치국과 다르지 않고 평천하와 다르지 않음이다. 즉, 수신(修身)은 평생 수련해야 하는 것이지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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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리정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다. 주요한 해석을 간추려보면,

1. 크게(元) 형통하리니(亨) 끝까지(貞) 이롭다(利).
2. 크게(元) 형통하려면(亨) 곧아야(貞) 이롭다(利).
3. 크게(元) 형통하리니(亨) 이롭다는(利) 점괘이다(貞)
4. 크고(元) 형통하고(亨) 이롭고(利) 곧다(貞)
5. 시작되고(元) 자라나고(亨) 이루어지고(利) 완성(貞)된다.
6. 태어나(元) 자라고(亨) 열매맺고(利) 소멸한다(貞)

으뜸 원(元)은 ①첫째 ②시작 ③크다 ④근본, 근원 등으로 사용되는 글자이다.
주역 전체에서 원(元)은 보조적으로 쓰이기에, 원(元)은 형(亨)을 수식하는 말로 풀이하여
'원형/리정'을 분리하는 입장이 위 1,2,3번의 해석이다.
원(元)은 "원길(元吉)"처럼 다른말과 결합하여 쓰이는 것이며,
이로울 리(利)는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다'는 리견대인(利見大人)처럼
주역의 다양한 효사에서 다른 말과 결합하여 사용된다.
그래서 리정(利貞) 역시 함께 붙어서 의미를 가지는 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貞) 역시 "정길(貞吉)"처럼 떨어져 쓰이지는 않는다는 것도 '원형/리정'을 나누는 근거로 든다.

 

반면, 괘사(卦辭)는 문왕이 만들었고 효사(爻辭)는 주공이 만들었기에,
괘사와 효사가 문법적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고 단정할 수 없고,
괘사와 효사는 후대에 첨삭, 수정, 가공되었던 부분도 많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성과 통일성을 갖추고 있을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문맥에 맞게 적절하게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며,
원형리정(元亨利貞)은 괘사(卦辭)의 나오는 경우에는
독자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조화스럽고 어울린다고 한다.
위의 4,5,6번의 해석은 '원/형/리/정'을 각각 독자성을 가진 의미로 풀이하는 입장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위 5,6번의 해석론을 기준으로 풀었다.
일반적으로는 각각 독립적이고 평등한 레벨로 본다.

예컨대, 원(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견으로는 원(元)은 단지 근원(根原)이며, 정(貞)도 단지 마침(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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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견으로는 원(元)과 정(貞)은 고정이고 변함이 없기에,
주역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성장 즉, 형(亨)에 집중하여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성장(亨)하는가에 따라 결실(利)이 다르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존경하는 공자께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현재의 사람도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알 수가 없는데,
수천년전의 사람을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으며 장담할 수 있을까?
진실은 공자는 나쁜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꾸미고 각색한 사람이라고 해도,

속았다며 공자를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의 이미지를 존경하는 것이지, 공자의 행적이 진실이라고 확신해서 존경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존경할 만 하다면 소설 속의 인물도 존경할 수 있다.

 

주역은 점 치는 책은 아닌가? 점 치는 책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점만 치는 책은 아닌 것 같다.
점을 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하여, 점을 쳐서 묻는 일을 줄이게 만드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어 소중히 생각하는 책이며, 그래서 내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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