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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에 해당되는 글 96

  1. 2010.02.28 호시탐탐(虎視眈眈)
  2. 2010.02.28 동우지곡(童牛之牿)
  3. 2010.02.27 무망지재(無妄之災)
  4. 2010.02.26 석과불식(碩果不食)
  5. 2010.02.25 사차이도(舍車以徒)
  6. 2010.02.25 관이불천(盥而不薦)
  7. 2010.02.24 수유구득(隨有求得)
  8. 2010.02.23 무왕불복(无往不復)
  9. 2010.02.23 태극기의 상징과 주역 64괘 도해
  10. 2010.02.22 밀운불우(密雲不雨)
  11. 2010.02.22 왕용삼구(王用三驅) (2)
  12. 2010.02.22 즉록무우(即鹿无虞)
  13. 2010.02.22 무성유종(无成有終)
  14. 2010.02.22 리상견빙지(履霜堅氷至)
  15. 2010.02.22 항룡유회(亢龍有悔)
  16. 2010.02.21 신심명(信心銘)
  17. 2010.02.20 좋은 것을 취한다
  18. 2010.02.20 욕구도 성(性) - 자연인성론(自然人性論)
  19. 2010.02.20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20. 2010.02.20 성(性)의 한계 - 자기 특별함의 갇힘
  21. 2010.02.20 성(性)을 보는 눈 - 진실함(誠)
  22. 2010.02.20 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 - 다름의 분별
  23. 2010.02.20 사람의 성(性)과 교육의 필요성
  24. 2010.02.20 생겨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하나가 아니다
  25. 2010.02.20 중용의 실천 - 하늘이 명한 그대로의 성(性)을 따르는 것
  26. 2010.02.20 유학의 상호관계성
  27. 2010.02.01 64. 未濟卦(미제괘) : 채워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다.
  28. 2010.02.01 63. 既濟卦(기제괘) : 가진자는 교만을 경계하라.
  29. 2010.02.01 62. 小過卦(소과괘) : 지나친 것 보다는 모자란 것이 낫다.
  30. 2010.02.01 61. 中孚卦(중부괘) : 주역의 가르침은 중용(中庸)이다.
2010. 2. 28. 12:00

호시탐탐(虎視眈眈)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8. 12:00

  호시탐탐(虎視眈眈)이란 너무도 유명한 명언이라 더 부연하여 설명하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명언의 출처가 『주역』이(頥)괘의 4번째 효사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탐탐(眈眈)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호랑이는 토끼 한마리를 잡을 때에도 전심전력을 다한다고 알려져 있죠. 그래서 호랑이처럼 ‘신중하게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 백호해를 맞이하여, 호랑이 얘기나 좀 해 볼까 합니다. 그리스신화는 이야기가 죽 이어지는데, 우리나라의 신화는 연결성이 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단군신화에서 도망간 호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오는 「단군신화」에 따라서 웅녀가 승리자이고 호랑이는 패배자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지만, 설암이 지은 『묘향산지』의 「단군신화」는 호랑이가 승리자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환웅이 백호(白虎)와 교통하여 아들 단군을 낳았고, 그가 요임금과 같은 해에 나라를 세워 우리 동방의 군장이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신화의 수수께끼 상세보기

이왕 책을 소개하였으니 추천평을 덧붙일까 합니다. 풀 컬러의 자료사진을 풍부하게 담고 있고, 읽을거리가 참 풍성합니다. 우리 신화들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했었다는 반성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이처럼 재미난 소재라면, 더 재미있게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입담이 좀 부족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임을 감안하시고, 재미를 떠나서, 내실이 있는 훌륭한 책이라 생각하여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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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8. 11:55

동우지곡(童牛之牿)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8. 11:55

  동우지곡(童牛之牿)은 『주역』대축(大畜)괘의 네번째 효사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곡(牿)을 소의 뿔 위에 대어놓는 가로목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잘 매어놓는 것 혹은 우리(외양간)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석해도, 그 의미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습니다.

송아지는 뿔이나기 시작하면 아무곳이나 막 들이받고 다니므로 사람을 위해서나 송아지 자신을 위해서나 가로목(횡목)을 대어놓습니다. 혹은 잘 묶어 놓는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미연에 잘 방비를 해둔다’는 의미로 인용합니다.

 

종종 그 의미를 확장하여 ‘혈기만 앞선 이는 큰 일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힘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스포츠, 예를 들어 씨름같은 경기를 보면, 힘으로는 앞설지 몰라도 노장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노련함을 당해내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동물뿐 아니라 사람의 기운도 나이에 따라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논어』의 계씨편 제3장에서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젊었을 때는 혈기가 불안하므로 색(色)을 경계해야 하며, 장년기에는 혈기가 왕성하므로 싸우려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기가 되면 혈기가 쇠약해지므로 얻으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노년기는 기운이 쇠약해 지기 때문에 잃는 것이 점점 더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반대로 얻으려고 집착을 더 하곤 합니다. 그래서 ‘노추(老醜)’라는 의미가 단순히 외적인 늙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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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망지재(無妄之災)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7. 20:22

  고사성어에 ‘무망지화(毋望之禍)’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뜻하지 않게 화(禍)가 닥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 『주역』의 25번째 괘인 무망(无妄)괘의 세번째 효사의 ‘무망지재(無妄之災)’와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은 아닙니다.

『주역』의 무망(无妄)괘의 세번째 효사를 살펴보면, ‘无妄之災(무망지재) 或繫之牛(혹계지우) 行人之得(행인지득) 邑人之災(읍인지재)’로 되어 있습니다.

 

즉, 무망의 재앙(无妄之災)이란 누군가가 소를 매어두었는데(或繫之牛) 지나가던 사람이 가져가 버리니(行人之得) 마을사람들이 의심을 사게 된다(邑人之災)는 말로 연결됩니다.

나쁜 놈(?)은 소를 가져간 지나가던 행인입니다. 그런데 그 불똥이 고을사람들에게 튀니 억울하게 감수해야만 합니다. 즉, ‘어이없는 재앙’을 만나게 된 것을 빗대어 무망지재(无妄之災)라는 주역의 명언을 인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살다보면, 나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생기는 재앙이 적지 않습니다. 하늘이 가뭄이나 홍수를 내리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애써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는 화가 나기도 합니다. 술취한 취객에게 행패를 당하거나, 음주운전에 뺑소니를 당하거나 하는 것은 재수없는 일, 똥 밟은 일이라 하며 넘길 수도 있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한 것이 인생입니다.

 

내 책임이라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무망지재(无妄之災)의 재앙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늘을 원망하여야 할까요? 사람을 원망해야 할까요? 하늘이 의미없는 재앙을 내린다면 어찌 태초부터 사람들이 받들어 오던 하늘일 수 있겠습니까? 가슴이 무너지는 억울한 고통이 생길지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고래로부터 성현들이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은 쓸모없는 것은 만들지 않고, 의미없는 일은 벌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원망으로 가득찰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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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6. 21:19

석과불식(碩果不食)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6. 21:19

  『주역』의 많은 명언중에서 손꼽히는 명언이 아닐까 합니다. 왠만한 국어사전에도 다 소개되어 있을 정도니까요. 이 명언의 출처가 『주역』의 23번째 괘인 박(剝)괘의 마지막 효사에 있습니다.

석과(碩果)의 의미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① 큰 과실 ② 씨과실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① 큰 과실은 다 먹히지 않는다 ② 씨과실은 먹지 않아야 한다는 크게 두가지 의미로 해석하는 편입니다.

 

제가 가진 국어사전을 다 찾아보니,

큰 과실을 다 먹지 아니하고 남긴다는 뜻으로, 자기만의 욕심을 버리고 자손에게 복을 줌을 이르는 말

이라는 해석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주역 해설가들은 오히려 ‘씨 과실은 먹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합니다. 주역 박(剝)괘의 전체를 해석할 경우에 그렇게 해석해야 더 부드럽게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씨 과실을 ‘종자’라고 표현하면 더 쉽게 느껴질까요?  배가 고파도 종자까지 다 먹어버리면 종자가 싹을 틔워 번영을 이루는 내일의 희망이 사라집니다. ‘도박의 고수는 결코 종자돈을 걸지 않는다’는 말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이왕 버린 몸이라고, 갈데까지 가 보려는 것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누라까지 팔아먹는 노름쟁이는 조무래기 도박사이지 않을까요?

 

큰 과실은 다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로 인용할 경우는 ‘큰 과실을 갉아 먹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없애지는 못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뛰어난 인물일수록 모함을 많이 받기 마련입니다. 위대할수록 비난이 거세기 마련입니다. 이기고 싶은 인간의 탐욕때문이겠지요. 그래도 결코 그를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자’라는 인물의 사상은 약 2500년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를 폄하하기 위해 온갖 비난이 난무했고, 때로는 그 이름에 편승하여 위작도 많이 만들어 졌지만 결코 공자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석과(碩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그를 조롱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만, 저는 감히 장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백년이 흐르면 공자의 이름은 남아 있게 될지라도, 그를 조롱하며 세치혀를 놀렸던 사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지나간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종종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의미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씨과실까지 없애버리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늘은 의미없는 생명은 낳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과도 연결됩니다. 하늘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종자를 없애지는 않지만, 사람은 종자를 없앨 수 있습니다. 즉, 포기하는 것을 경고하는 가르침으로 연결됩니다. 하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국어사전의 해설을 보니,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어집니다. 물질만능주의의 오늘날에는 가진 재물을 다 쓰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 부모의 마지막 도리라는 말이 떠 오릅니다. 자손에게 재물을 남겨놓는 것은 자손들을 다투게 하고 미운 감정을 생기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시대가 어찌하여 그리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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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5. 21:08

사차이도(舍車以徒)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5. 21:08

  사차이도(舍車以徒)는 『주역』 비(賁)괘의 첫번째 효사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직역하면 ‘수레를 버리고 걸어간다’는 의미가 됩니다.

 

가장 흔히 인용하는 경우는 ‘사서 고생한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경우입니다. 수레가 없는 것도 아니고, 수레가 있는데도 그 수레를 타지 않고 괜한  고생을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역의 효사는 비기지(賁其趾)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발을 꾸몄기에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수레를 버리고 걷는다’는 의미가 되는데, 참 잘 어울리는 예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짓을 했기에 벌을 받는다’는 의미를 표현가기 위해서도 곧잘 인용합니다. 수레를 버렸으니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조강지처를 버린 지아비의 경우처럼, 그 소중함과 고마움을 모르고 이미 떠나버린 후에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고 한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본시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까닭일까요? 

 

종종,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인용합니다. 상전의 ‘의를 따르기에 타지 않는 것이다[義弗乘也]’라는 해설에 근거합니다. 재물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걸어가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힘든것이 더 불편하기 때문이겠지요.

 

요즘처럼 자가용이 필수가 되어버린 시대에서 보니, 주역의 명언들이 참 재미 있습니다. 그 오랜 옛날에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걷는 것을 싫어했나 싶기도 하구요. 그러고 보면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심리라는 것이 있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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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5. 21:08

관이불천(盥而不薦)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5. 21:08

  관이불천(盥而不薦)은 『주역』관(觀)괘의 괘사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주희는 관(盥)을 ‘제사지내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관(盥)은 고대 중국에서 ‘귀신을 부르기 위해 땅에다 술을 뿌리는 제사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술을 뿌려 귀신을 부른 후, 음식(제물)을 올렸다고 하는데요. 어찌되었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손을 씻거나 술을 부은 후에 ‘제물을 올리고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가장 흔히 이 명언이 인용되는 상황은 ‘시작을 해 놓고 진행하지 않음’을 지적하는 경우입니다. 제사를 지금 바로 지내지 않으려면 술을 뿌리지나 말지 왜 술은 뿌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는 것이죠.

 

종종 ‘시작할 때의 경건한 마음을 잃지마라’는 의미로도 인용합니다. 손을 씻거나 술을 부은 상태에서는 경건한 마음이지만, 제물을 올린 후라면 마음이 풀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관이불천은 손을 씻거나 술을 붓고 제물을 올리는 시간까지의 가장 경건한 초기시간을 의미합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못한다는 속담과도 연결되는것 같습니다.

 

근본을 보아라’는 의미로도 인용합니다.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모든 예법은 내면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예는 사치스럽기보다 검소해야 하며, 상을 당하면 형식을 잘 따르기보다 진정으로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논어 팔일 제4장]고 하셨습니다.

관이불천의 상태는 그 마음(실질)을 알 수 있는 시간이며, 제물을 올리는 천(薦)의 시간으로 넘어가면 그 형식을 잘 따르는지가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명언을 제사의 근본을 알 수 있는 시간으로 규정하여, ‘근본을 보아라’는 의미로 인용합니다.

 

  위의 설명과 연결되는 말이지만, ‘마음을 고맙게 받겠다’는 의미로도 인용합니다. 제물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제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을 깨끗이 하여 마음으로만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상황을 한번 만들어 볼까요? 돈이 없는데 어머님의 생신이 되었습니다. ‘남들처럼 선물을 못해 드려 죄송해요. 그러나 어머니 너무 감사하고,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어머니께서 “그런소리 말거라. 주역에 관이불천이라 하지 않았느냐?”라는 식으로 인용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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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4. 18:58

수유구득(隨有求得)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4. 18:58

수유구득(隨有求得)은 『주역』 수(隨)괘 셋째효의 효사에 있는 명언입니다. 해석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따라가야 얻을 것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 가르침과 유사한 속담도 많고, 명언도 많습니다. ‘기회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 등등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경우에 흔히 인용되는 명언입니다.

 

사실, 알면서도 실행하기 어려운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잠재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 한번 걸어보지 못하고 짝사랑으로 애만 태우는 경우, 미리 짐작하여 이력서 조차 내 보지 않는 경우 등등,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IMF로 인해 취업이 어렵던 시절, 한 신문기사에서 취업성공기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지방대를 보통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토익점수도 낮은 사람이었는데, 어느회사 사장님 집을 찾아가 만나 달라고 여러번 소란을 피웠답니다. 횟수가 거듭되자 특채가 되었다는데요, 그런 적극적인 행동력이면 어떤 일을 맡겨도 능히 해 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이었다고 합니다.

 

종종, 타방을 따라오게 할려고 유혹하는 때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약장사의 멘트가 생각나네요. “일단 한번 잡숴봐~” 어릴때는 유괴로부터 시작해 세상은 온갖 유혹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적극적인 것은 좋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세는 중용(中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좇아가는 것에 중점을 둔 가르침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가르침으로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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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3. 19:43

무왕불복(无往不復)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3. 19:43

   무왕불복(无往不復)은 주역 태(泰)괘의 셋째 효사에 나오는데, 주희가 대학장구 서문에 '천운순환((天運循環)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한 이래로, 이 명언은 주역의 명언이 아닌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주역의 효사는 ‘무평불피(无平不陂) 무왕불복(无往不復)’으로 시작됩니다. 주희는 ‘하늘의 운행은 순환하는 것이니 가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며, 주역은 ‘비탈지지 않는 평지가 없고, 돌아오지 않는 떠남은 없다’는 것입니다만, 무왕불복(無往不復)의 의미가 다르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无는 無의 고어(古語)입니다. 불교에도 유사한 명언이 있습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즉, 떠난 사람은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연(緣)을 따라 윤회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왕불복(无往不復)의 심오한 뜻은, 도(道)에 관한 얘기가 선행되어야 하며, 본래 떠남은 만남과 함께 생겨나는 방생(方生) 사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만, 그 어려운 얘기가 궁금하시면 <이곳>을 참고하시길 바라며, 어떤 경우에 흔히 인용되는지를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갈까 합니다.

 

  그 심오한 뜻과는 달리 인용하는 경우는 오히려 단순합니다. 주로 삶의 굴곡을 얘기하기 위해 인용합니다. 항상 좋을 수도 없고, 항상 나쁠 수도 없고 파도가 치듯 왔다 갔다 변하는 것이 인생이기도 합니다. 종종 이 세상에서의 이별을 위로할 때 인용하기도 합니다. 애인간의 헤어짐, 재물을 잃음, 지위에서 물러나는 등등의 경우입니다. 또한 저 세상으로의 이별을 위로할 때 인용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을 더이상 함께 할 수 없게된 경우가 대표적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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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가장 단순하게 얘기하면 태극은 무극에서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뤄 상대성을 가지게 되는 움직임이며, 그 기운에 의해 하늘(건)과 땅(곤) 물(감)과 불(리)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천지창조를 얘기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주역64괘 상하괘 도해.pdf

주역64괘 상하괘 도해.zip


어쨌건, 태극을 감싸는 혹은, 태극에서 생겨난 4괘는 주역의 8괘에 속하는데,

8괘 혹은 64괘 중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정도만이라도 알면 좋지 않을까요?

기존에 그려둔 것이 있었지만 주역 64괘를 다시 한번 그려보았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때, 한문선생님께서 태극의 상징성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한반도라는 교량적 위치에 정착한 것 역시 조화를 도모하는 태극의 성향때문이라고 하셨는데요.

태극의 정신을 근본부터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일 수 밖에 없다고 하셨지만,

요즘 세상을 보면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생각이 나서 한 번 그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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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2. 16:48

밀운불우(密雲不雨)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6:48

  밀운불우(密雲不雨)는 『주역』 9번째 소축괘의 괘사로서, 직역하면 ‘먹구름이 자욱한데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역에서 자주 인용되는 고사성어중 하나입니다. 자주 인용되는 만큼 다양한 의미로 인용합니다.

 

  가장 흔히 인용되는 상황은 ‘모든 것이 다 갖춰진 것 같은데도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경우입니다. 스스로 인용하는 경우에는 무엇때문에 그런지 도움을 달라는 뜻을 함께 담고 있기도 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인용하는 경우에는 답답하다는 뜻을 함께 담고 있기도 합니다.

 

  종종 ‘윗자리의 무리들만 넘치게 누리고 땅으로 혜택을 고루 나누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합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윗대가리들만 다 해 먹는다’는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조급하게 굴지말고 조금만 더 참고 견뎌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도 인용합니다. 이미 축적한 것이 넘칠 정도가 되었으니 무슨 걱정이냐는 의미입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반드시 비가 쏟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도 인용하곤 합니다. 분명히 실력이 앞서지만 반드시 1등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프로바둑에서 전성기의 이창호씨가 모든 바둑을 이기고 승률 100%이지는 못했습니다. 구름이 빽빽하게 모였지만 비가 내리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도 생길 수 있는 변수를 가진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먹구름이 자욱하다고 반드시 비가 올 것을 누구나 확신할 수 있다면 그것도 참 재미없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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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2. 15:00

왕용삼구(王用三驅)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5:00

    비괘의 다섯번째 효사중에 나오는 명언으로 '왕은 사냥을 할 때 세 방향만 막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짐승'이 달아날 길을 남겨두는 관용을 의미한다고 해석 할 수도 있겠으나, 마을사람들을 꾸짖지 않는다(邑人不誡)는 내용으로 이어지니, 세 방향만 막는 행위는 실수를 한 사람이 변명할 수 있게 배려해 두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즉, 짐승이 아니라 ‘사람’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명언은 왕과 같은 지위의 강자(强者)는 엄격함도 필요하겠지만, ‘너그러운 관용의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하려고 할 때 종종 언급되곤 합니다. 힘을 가진자는 냉혹하고 가혹해지기 쉽지만, 그 때문에 약자를 벌벌 떨게만 한다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올 지 모릅니다.

 

   비단, 왕과 신하, 왕과 백성과의 관계에서만 통하는 가르침은 아닐 것입니다. 아이를 교육하는 부모님, 선생님, 부하직원을 거느린 직장의 상급자 등등 두루두루 통할 수 있겠지요.

   두 방향이 아니라 세 방향을 막도록 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2:2의 수학적 비율로 엄격함과 너그러움의 중간을 지키는 단순한 산술적 중용(中庸)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굳이 비율을 정하기 보다는, 사탕이 필요한지 매가 필요한지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지요.

 

   사실, 우리 문화는 엄격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문화는 아니었는지 생각을 해 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 ‘여자랑 북어는 삼일마다 패야한다’는 속담을 남성우월주의의 관점에서 종종 언급하는 분들이 아직도 계십니다. 암탉의 속담은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분별한 시대에, 각자 본분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요즘은 ‘암탉이 울어야 집안이 흥한다’로 얘기하죠. 그 보다 ‘여자와 북어는 삼일마다 패야한다’는 속담을 여자는 때려패야 순종한다는 의미로 오해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속 뜻은 ‘북어를 연하게 만들듯, 여자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액면 그대로 두들겨 패서 부드럽게 만들겠다는 간 큼 남자분은 없으시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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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anwon.tistory.com BlogIcon 엄마만원만 2010.03.02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글 잘 배웁니다.
    왕용삼구 이 네 글자에 생각해볼 부분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2. Favicon of https://obbaya.com BlogIcon 오빠야닷컴 2010.03.02 2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생각하시는 계기가 되셨다니 기쁘네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역명언이 어떤 것일까 늘 궁금했었는데, 참고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셔요 (__)

2010. 2. 22. 14:55

즉록무우(即鹿无虞)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4:55

     준(둔)괘 3번째 효사중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즉(即)은 뒤쫒는 것을 말하며, 우(虞)는 사냥할 때 몰이꾼 역할을 하던 관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몰이꾼이 없이 사슴을 쫒아가려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사냥을 하는 경우인데, 몰이꾼이 없기에 길을 잃어 곤경에 처하는 것이 쉽게 예견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대책없이 일을 벌이는 것’을 경고하는 의미로 종종 인용하곤 합니다.

   삼국지에도 이 명언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후한시대에 대장군 하진이 환관을 몰아내기 위해 동탁을 비롯한 전국의 군웅들을 모이라고 합니다. 그 때 하진의 부하였던 진림이 이 즉록무우(即鹿无虞)의 명언을 인용하여 하진을 만류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진림의 충언을 묵살했던 하진은 궁지에 몰린 환관들에게 살해되고, 낙양에 도착한 동탁이 실권을 장악하며 천하대란이 야기 되었습니다. 

   물론 알 수 없는 숲을 과단하게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걸어가는 길이라고 하여 ‘생각없이’ 따라가는 삶은 어쩌면 기계처럼 규격화된 부품이 되어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숲속으로 과단하게 뛰어드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는 ‘신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여기 즉록무우의 명언이 주는 가르침은 나쁜 결과를 경고하는 가르침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숲을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뛰어드는 것’을 경고하는 가르침으로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숲을 빠져 나올 수 없게 될 수 있음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 숲으로 뛰어드는 것은 오히려 응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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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2. 14:34

무성유종(无成有終)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4:34

    곤(坤)괘의 세번째 효사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주역에서 언급할 경우에는 '혹종왕사 무성유종(或從王事 无成有終)'을 함께 인용하여 "신하된 자는 그 공을 취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만을 원하는 것이다”는 의미로 인용하곤 합니다. 공로와 칭송은 왕(王)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며, 왕을 따르는(從) 자는 왕이 원하는 그 결과를 수행했다는 것으로 족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역사적인 성과들을 실제 이루었던 사람보다, 임금의 업적으로 인식되곤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겠지만, 오늘날에도 조직의 구조가 상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줄기세포사건이 부각되지 않았다면 개개 연구원들의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지요...

 

   무성유종(无成有終)이 주역을 떠나서 독자적인 명언으로 단장취의하여 인용할 경우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종종 인용되곤 합니다. "만사는 완성은 없고 마침만 있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완성이 있을 수 있다면 모든 학문은 단 한 권의 책만 남게 될 것입니다. 과연 과학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요? 종래에 꿈이라 여겼던 일들을 목격하고 있는 역사속에 살고 있지만 이 시점의 기술이 완성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 계속되는 한 계속 더 발전하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완성은 없는 채로 말이죠.

   완성의 신념이 지나치면 위험해지기도 합니다. 이상적인 국가를 완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 가야만 할 것이지만, 정치와 사상에 완성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가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께서 몸을 완벽한 근육질로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 관리해주지 않으면 변합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정신적인 완성도 그렇습니다. 배움을 쉬면 역시 변합니다. 그래서 결코 완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최고의 부자에 이를 수는 있어도 최고의 부자를 완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간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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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坤)괘의 처음효의 효사입니다. '서리를 밟고 얼음이 단단해 질 것에 이른다'는 뜻이며, 이러한 문리적 해석에 큰 논란은 없는 편입니다. 다만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두고, '큰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하고, '모든 일은 반드시 그 조짐이 나타난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하고, ‘나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안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문언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쌓였던 것이다. 일찌기 해결하지 못한 까닭이다. 리상견빙지(履霜堅氷至)는 이러한 뜻이다.'

  인도의 네루가 옥중에서 저술한 「세계사편력」에 보면 프랑스 혁명을 화산폭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화산폭발이 갑자기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지의 심층부에서 오랜 세월에 거쳐 온갖 힘이 작용하여 화력이 모이고 지각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비로소 거대한 화염을 품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혁명의 힘도 사회의 심층부에서 오랫동안 배양되는 것이다.'

 

「중용」제 24장은 미신과 맹신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유학의 가르침과 배치되어 선비들에게 많은 의문을 낳기도 했습니다만, 반드시 조짐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지극한 진실의 경지에 이르면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니, 나라와 집안히 흥하려면 반드시 좋은 조짐이 있고, 나라와 집안이 망하려면 반드시 나쁜 조짐이 있어, 시귀(점치는 도구)에 나타나며 몸동작에 나타난다. 화와 복이 이르려 하면 좋은 일도 틀림없이 먼저 알고 나쁜 일도 틀림없이 먼저 아니, 지극히 진실하면 귀신과 같아진다.  

  사마광은 '성인은 멀리 내다보고 미세한 것도 신중히 대하지만, 대중의 식견은 가까이에만 미치므로 드러난 뒤에 대처하고자 한다'고 해설합니다. 보통의 사람에게 가장 많은 후회는 바로 이 때문에 생길 것 같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평소에 열심히 해 둘 걸’ 하는 후회없이 학창시절을 지나신 분들은 많지 않으시겠죠? 막상 몸이 아프고 나서야 건강에 힘쓰며, 소를 잃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려는 것이 바쁜 현대인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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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2. 13:09

항룡유회(亢龍有悔)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3:09

1. 끝까지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게 된다.

2. 오를려고만 하는 용은 후회가 있게 된다.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명언은 주역 건(乾)괘의 꼭대기효인 상구(上九)의 효사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위의 두 가지 의미로 인용하는 것이 보통인데요. 1번의 의미로 인용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1번의 의미는,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는 내리막길만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남보다 일찍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반드시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다 일찍 물러나야 하는 경우와 같으니까요. 「주자어류」에서 '지극히 융성할 때 그 지나침을 살핀다'고 해설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물러날 줄 모르고 위를 향해서만 나아가려는 것을 경계하는 2번의 뜻으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후진기어를 넣을 줄 모르고 악셀만 밟는 것을 지적하는 경고인데요. 「문언전」에서 '항(亢)은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존재만 알고 없어질 것을 모르고, 얻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은 모른다'는 해설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2등은 3등을 돌아보기보다 1등을 추격하고자 하는 법입니다. 99석의 부자가 100석을 채우려 가난한 자의 1석을 빼앗는다 하였습니다. 자식이 성인으로 독립 할 때가 되었는데, 부모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고 마마보이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 역시 물러나지 않으려는 항룡(亢龍)의 마음일 것입니다.

 

  문장의 일부분을 떼어서 자기 본의로 해석하는 것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합니다. 사서(四書)에도 흔히 시경의 시(時)를 가져와 인용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강조하는데요. 실록에 보면 주역도 단장취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1번이 맞다, 2번이 맞다는 시비를 가리려 하지 마시고, 제3의 의미를 찾아내어 사용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글을 적는 용도로 만들어진 종이라고해서 글만 기록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을 피울 수도 있는 법입니다. 종이의 주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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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1. 20:19

신심명(信心銘) 방담(放談)/자료(資料)2010. 2. 21. 20:19

01>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도(道)에 이르기가 어렵지 않으니, (나누어 한 쪽을) 택하려는 마음만 버리면 됩니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나누는) 마음만 없어지면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02>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털끝만치 나누어도 하늘과 땅 만큼 어긋나는 것이니
도가 앞에 나타나길 원한다면 따름과 거스럼을 두지 마십시오.


 

03> 違順相爭 是爲心病 不識玄旨 徒勞念靜  
떨쳐내고 따라가는 것이 서로 다투어, 이것이 마음에 병이 되는데,
현묘한 (도의) 뜻을 알지 못하니 애써 생각만 고요히 하려고 합니다.

 

 

04>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由取捨 所以不如
(도는) 원만함이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데,
취하고 버리는 그 나눔으로 말미암아 같아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05> 莫逐有緣 勿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세간의 인연에도 따라가지 마시고 빈 곳에 살려고도 마십시오. 
한 가지로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도를) 다하게 됩니다.

有緣(유연) : 존재하는 것은 인연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연이라고 한다.
空忍(공인) : 공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공인이라고 한다.

 

06> 止動歸止 止更彌動 唯滯兩邊 寧知一種
(마음) 움직임을 그쳐 멈춤으로 돌아가면 멈춤이 또한 큰 움직임이 됩니다.
그렇게 양변에 매달리면 어떻게 하나임을 알겠습니까!

 

 

07> 一種 不通 兩處失功 遺有沒有 從空背空
하나로 통하지 못하면 양쪽 모두 그 공덕을 잃습니다.
있음을 버리려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려면 공함을 등집니다.


 

08> 多言多慮 轉不相應 絶言絶慮 無處不通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점점 더 상응하지 못하니,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통하지 않는 곳 없습니다.

 

 

09> 歸根得旨 隨照失宗 須臾返照 勝脚前空
근본으로 돌아가 그 뜻을 얻고 비춤을 따라 종지를 잃으니 
잠깐 돌이켜 비춰봄이 공함을 앞세우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10> 前空轉變 皆由妄見 不用求眞 唯須息見
공을 앞세워 바꿔 변하려는 것은 다 망령된 생각 때문이니 
진리를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생각을 쉬십시오.

 

 

11> 二見不住 愼莫追尋 才有是非 紛然失心
나뉘는 생각에 머물지도 말며 삼가하여 쫓아가 찾지 마십시오. 
잠깐의 시비가 일어나도 어지러워 본 마음을 잃습니다.

 

 

12> 二由一有 一亦莫守 一心不生 萬法無咎
둘은 하나가 있는 까닭이니 그 하나마저도 지키지 마십시오. 
하나라는 마음도 생겨나지 않아야 만법이 허물이 없습니다.

 

 

13> 無咎無法 不生不心 能隨境滅 境逐能沈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생기나지 않으면 마음도 없음이니 
주관은 객관과 함께 소멸하고, 객관도 주관과 함께 잠깁니다. 

 

 

14> 境由能境 能由境能 欲知兩段 元是一空
객관은 주관이 있어 객관이며, 주관은 객관이 있어 주관이니 
양단을 알고자 해봐도 본래 하나의 空입니다. 

 

 

15> 一空同兩 齊含萬象 不見精麤 寧有偏黨
하나의 공은 양단을 함께하여 삼라만상을 모두 포함합니다.
세밀하고 거칠음을 볼 수 없으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습니까.

 

 

16> 大道體寬 無易無難 小見狐疑 轉急轉遲
대도는 본체가 넓어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으니 
좁은 생각으로 여우처럼 의심하니 서둘수록 더디어 집니다. 

 

 

17> 執之失度 必入邪路 放之自然 體無去住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버려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놓아 버리면 자연에 따라 본체가 가거나 머무름이 없습니다. 

 

 

18> 任性合道 逍遙絶惱 繫念乖眞 昏沈不好
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지고 한가이 거닐면 번뇌가 끊어지니 
생각에 매이면 진리를 벗어나 어둠속에 빠져 좋을 것이 없습니다. 

 

 

19> 不好勞神 何用疎親 欲趣一乘 勿惡六塵  
정신이 힘든게 좋지 않은데 어찌 가까이 하거나 멀리하고자 하겠습니까?
일승(궁극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인식대상)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20> 六塵不惡 還同正覺 智者無爲 愚人自縛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바른 깨달음과 함께 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하려함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를 묶어둡니다. 

 

 

21> 法無異法 妄自愛着 將心用心 豈非大錯
법은 다른 법이 없는데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을 가져 
마음을 써서 마음을 가지려니 어찌 큰 그릇됨이 아니겠습니까. 

 

 

22> 迷生寂亂 悟無好惡 一切二邊 良由斟酌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나뉘고 깨치면 좋고 나쁘고가 없으니 
모든 둘로 나뉨은 실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23> 夢幻空華 何勞把捉 得失是非 一時放却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십니까?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리십시오. 

 

 

24> 眼若不睡 諸夢自除 心若不異 萬法一如
눈에 만약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습니다. 

 

 

25> 一如體玄 兀爾忘緣 萬法齊觀 歸復自然
한결 같음은 그 본체가 현묘하여 홀로 인연을 잊으니 
만법을 모두 같게 보면 그 되돌아감이 자연스럽습니다. 

 

 

26> 泯其所以 不可方比 止動無動 動止無止
모든 까닭을 없애버리면 견주어 비교할 바가 없어지니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습니다. 

 

 

27> 兩旣不成 一何有爾 一亦沒處 窮極自知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어찌 하나가 있겠습니까. 
하나마저 없애버리면 궁극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28> 究竟窮極 不存軌則 契心平等 所作俱息
궁극으로 이르는 정한 법칙이 있지 않으니 
마음을 묶어 평등케 하고 짓는 바를 함께 쉴 것입니다. 

 

 

29> 狐疑淨盡 正信調直 一切不留 無可記憶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곧게 어울리니 
일체에 머물지 아니하면 기억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30> 虛明自照 不勞心力 非思量處 識情難測
텅비어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쓰고 마음 쓸 일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감정으론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31> 眞如法界 無他無自 要急相應 唯言不二
진실하고 변함없는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으니 
급히 상응하고자 하거든 오직 둘 아님을 말하겠습니다. 

 

 

32> 不二皆同 無不包容 十方智者 皆入此宗
둘 아님은 모두가 함께하니 포용하지 않음이 없고 
온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모두 이 근원으로 들어옵니다. 

 

 

33> 宗非促廷 一念萬年 無在不在 十方目前
근본은 빠르지도 늦지도 않으니 한 생각이 만년이고,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으니 온 세상이 바로 눈 앞에 있습니다

 

 

34> 極小同大 忘絶境界 極大同小 不見邊表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습니다. 

 

 

35> 有卽是無 無卽是有 若不如此 不心須守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만약 이 같지 않다면 결코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36> 一卽一切 一切卽一 但能如是 何慮不畢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다만 능히 이와 같다면 마치지 못할까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37> 信心不二 不二信心 言語道斷 非去來今
믿는 마음도 둘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언어의 길이 끊기면 떠나고 오고 멈춤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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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0. 20:04

좋은 것을 취한다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20:04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로 대표되는 성론(性論)에 대해서는 단순히 설명하기가 불가능하고, 학자가 아니라면 굳이 파고들 이유도 없겠지만,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기에,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앞의 글에서 강조했지만, '중용'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원적인 ‘맞춤형 진리’를 추구합니다. 

어떤 분은 공자께서는 「성삼품설」을 주장하였다며, 논어 제17편 양화 제3장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가장 총명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 바뀌지 않는다

이 가르침의 의미가 성삼품설의 논거라고 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가장 총명하고 가장 어리석은 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가 본래 담고 있는 속 뜻일 것입니다.
「전습록」에 의하면 가장 총명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애공이 정치의 조언을 구하자 공자께서는
'곧고 올바른 사람을 부정직한 사람 윗자리에 두는 것'을 말씀합니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9장]
즉, 부정직한 사람을 축출하거나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변화의 가능성을 잊지 않으려 하며, 함께 잘 되는 것을 도모합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신 성선설을 일반적 진리라는 의미로 해석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장점만을 취한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 문헌들에 나타나는 공자의 제자들을 한번 보겠습니다.
자로는 끝까지 급하고 용감합니다. 그 기질 때문에 결국 살해당해 죽게 됩니다. 
자공은 끝까지 총명하고 활달함을 잃지 않습니다.
증삼은 끝까지 근신하고 느리며, 재아는 날래고 괴팍합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 기질이 바뀐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공자께서는 기질이 지나치지 않도록 경계는 시켰으나 억누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각자의 장점을 더욱 북돋아 주었습니다.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고 나은 점이 있습니다.
공자께서도 안회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점을 언급하십니다.

장점을 취한다는 것은 유학에서 아주 중요시 하는 가르침입니다.
공문자는 태숙질을 이혼시키고 자기딸을 시집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공자께서는 '문(文)'이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자공이 의아하여 그 까닭을 묻습니다. [논어 제5편 공야장 14장]

그는 부지런하며 배움을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로 생각지 않더구나

삼인행(三人行)의 가르침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논어 제7편 술이 제22장]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착함은 따르고, 나쁜점은 바로잡는다.

 

고전을 배우면서 좋은 가르침이 있으면, 그것을 취해 나의 배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배움보다 공자라는 ‘인물’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공자의 그 내심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크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공자의 사람됨에 관계없이, 그 가르침이 깨우쳐 주는바가 있다면 그것을 취할 뿐입니다.
기독교, 불교가 좋고 나쁘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성경과 불경의 가르침이 좋다면 그것은 취해 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움의 중용입니다.  
 

‘사람에게 집착’하여 못나게 만들고 미움의 근거로 삼으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설령 그 말이 이완용에게서 나왔더라도 바른 말이라면 배우는 것이며,
설령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더라도 바르지 않다면 버리는 것입니다.
왕양명의 유명한 말이 그런 뜻입니다.

마음에 구하여 옳지 않다면,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더라도 옳다 할 수 없다

 

『논어』를 읽고 바른 가르침과 지혜를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공자를 흠모하거나, 공자를 미워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의 법어인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 끝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말만 듣고 사람을 받들지 않아야 하며,
사람이 좋지 않다고 그의 바른 말을 버려서도 안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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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자 하는 뜻은 풀이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살고자 하는 뜻은 물고기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모두 하늘이 준 귀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고기를 잡으셨습니다.

공자께서 낚시는 하셨으나 그물로 잡지는 않으셨다. 새를 잡았으나 둥지의 잠자는 새를 쏘지는 않으셨다. [논어 제7편 술이 제27장]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토끼를 보면 연민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토끼보다 나쁜 생명일까요?
호랑이는 제 성(性)을 따르는 것 뿐입니다.

 

성(性)을 따른다는 것은,
하늘이 준 그대로의 자연(自然)스러움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性)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는데 있어서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중용(中庸)'을 이탈하게 합니다.


고상함과 고원함을 추구하여,
인간을 채식동물로 만들려고 하고,
야성을 극도로 추구하여
다른 생명들의 씨를 말려버리려고도 합니다.

 

욕구도 성(性)입니다.
욕구를 아예 없애는 것은 성(性)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중용의 사유는 모자람도 경계하고, 지나침도 경계합니다.

욕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거나 지나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유학은 차별적 사랑도 긍정합니다.
하늘이 준 감정(情)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어미가 제 새끼를 우선 돌보는 것은 자연(自然)스러움입니다.
문제는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다른 새끼를 우선 돌보라고 하거나,
나를 위해 자기 새끼를 죽여도 괜찮다는,
그런, 치우침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합니다.

 

혹시 오해가 생길까 싶어 부연하고 가야겠습니다.

‘중용’의 정신은 보편적 타당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태가 틀렸다’는 일반론으로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 나를 떠나 있는 진리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지극히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의 성(性)을 밝혀

모자라지도 치우치지도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제반 사정을 감안하여 가장 마땅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출발점이며,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가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 기준을 세우는데 있어서 지극히 진실한 마음으로 접근하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남들의 이목, 선입견 등등의 모든 속박을 걷어내고,

나만이 알 수 있는 내면의 울림으로, 진실한 성(性)을 따르는 마음으로,

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로 접근하는 것이 중용입니다.

 

중용 제1장입니다.

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을 삼가고 두려워해야하니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드러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고 [莫見乎隱]

나타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다 [莫顯乎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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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0. 20:01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20:01

발자국

한계란 명칭은 대개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시작할까 합니다.
즉, ‘자유’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자유란 조금 쉬운 느낌이죠. 새처럼 훨훨~ 나는 것 같습니다.
갇혀있는 새장을 없애버리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요?

자유를 찾음은 갇힌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로든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갇힌 것을 떨쳐버리는 예를 하나 들기로 하겠습니다.

 

담배로부터 자유를 한번 찾아볼까요?
먼저 담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누가 자유롭나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담배를 끊기가 힘들다는 마음을 짐작정도만 할 것 같습니다.
그 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담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담배가 뭔지 모르는 두세살된 아이나, 담배를 접해보지 못한 비문명국의 어른이나,

모두 완벽하게 담배로부터는 자유롭습니다.

 

번뇌로부터는 어떻게 자유를 찾겠습니까?
담배로부터의 자유가 힌트가 될 것입니다.
번뇌를 인식하지 못하면,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이름이 있습니다. 백치하고 비슷합니다.
백치가 되어 인식이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백치하고 붓다는 같은 뜻,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앎을 통해서도 백치가 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본래 함께 있었습니다.
'도(道)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억나시는지요?

 

미쳤다는 의미가 싫어지는 것은
말과 문자의 좋고 나쁨에 갇혀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학이 추구하는 미침을 보겠습니다.
정상인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미치기도 합니다. 배움에 미치기도 합니다.
공자께서 '석달동안 고기맛을 잊었다'는 비유와도 연관됩니다.
순간을 집중하게 마음을 붙드는 것이 생기면(미치게 만들면),
다른 것에는 아무 생각도 미치지 않습니다.

 

유가의 선비들이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이 순간을 지극히 열심히, 집중하여 사는 것,
즉, 현재의 삶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참된 자유로움을 찾아갑니다.
이것이 중용을 실천하고 사는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억지로 가는 길일까요?
대학에 가기 위해 시험문제에 몰두하는 것과 같을까요?

욕구를 계산하는 마음에서 생긴 집중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결코 오래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기쁨에 미쳐,

현재의 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을,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가의 도(道)는 꽉 움켜쥐고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순간을 사랑하면서 평생 나아가는 행위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도(道)라는 한자가 우리말의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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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

눈이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목이 색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귀는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물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이를 포태할 수 없습니다.
말은 완전하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귀도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머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
상상만은 한계가 없습니다.


상상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되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로
중용 제4장에서 앎과 모름을 지적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知者過之]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하구나 [愚者不及也]

그럼, 지나치지도 모자람도 없는 앎이란 무엇입니까?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재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것은 뭐가 무섭습니까?

‘앎의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사실은 더 무섭습니다.

재물은 있는 척 하더라도 금방 들통나지만,

아는 척 하는 것은 금방 들통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말 안다고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일으킵니다.

 

정치인 MB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정치인 KH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속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속에 있는 속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아는척을 합니다. 그리고 타방을 미워합니다.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말 잘하는 사람의 말재주에 걸려들어 냉정한 판단력을 잃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보다 특별하다'는 상상과 결부시킵니다.

나는 특별하고 너는 바보입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시비를 정확히 가립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의도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너는 한심하고 무지합니다.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미워하는 첫번째도 ‘짐작으로 다 안다는 사람’입니다.

자공아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추측하여 다 안다는 사람,

불손함을 용기라 하는 사람,

들추어내는 것만 정직이라 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논어 제17편 양화 제24장]

 

물 속에서 좀 더 오래 잠수할 수는 있어도
물 속에서 물고기처럼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성(性)이 가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성(性)에 의해
물 속에서 더 오래 잠수할 수 있는 차이가 있는 것인지,
나는 물속에서도 물고기처럼 살 수 있는 것인지
그 선을 분명하게 감지해 가는 것이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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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lleaf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성(性)을 따르는 것으로 관점을 돌려보겠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하늘이 준 것을 한번 따져 보겠습니다.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닌 게 무엇입니까?
생명, 사람, 이세상, 남자, 부모님 등은 쉽게 보입니다.
도(道)의 '떨어질 수 없음'을 접목하여 안목을 넓히면,
생명만 준 것이 아니라 죽음이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남성만 준 것이 아니라 여성도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나중에는 사람만 아니라 자연도, 다른 생명도, 다른 사람도 함께 붙여준 것으로 의미를 넓혀가야 합니다만,

지금은 제한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으로 들어와서 생각해 봅니다.
감정도 욕구도 지혜도 모두 하늘이 준 것입니다.

먹기 싫다고 먹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싫다고 자지 않을 수 없고,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정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입니다. 
 

가장 쉽게 정의하면 ‘태생적 한계’가 성(性)에 가깝습니다.

이쯤에서 장자의 설명을 빌려오겠습니다.
나를 엮고 있는 백개의 뼈마디와 아홉개의 구멍 오장육부들 중에서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게 있습니까?
하늘은 우위와 열위로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르게 만들어 역할을 달리하게 해 조화로움을 도모했습니다.

 

태생적 한계가 성(性)이지만,
태생적 한계가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입니다. 
눈과 귀가 똑같이 소중한데,
눈이 들을 수 없다고 속상해 하고,
귀가 볼 수 없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인간이 머리가 중용을 벗어나 만들어낸 것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욕구, 곧 도(道)와
성(性)을 따르지 않는 욕구, 도(道)가 아닌 욕구가 있습니다.

‘자기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인식이 그렇게 만듭니다.
나는 특별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다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예뻐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로또에 당첨될 수 있습니다.

… 
나는 특별해서 새처럼 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와 너는 다를 뿐입니다.
나은 것도 있고, 모자란 것도 있고, 그렇게 다를 뿐입니다.
결국 함께 있습니다.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성(性)을 따르는 것은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예시한 몇 가지가 아니라, 안목을 넓혀 더 많이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중용에서는 거짓과 위선을 걷어낸 순결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중용 제22장에서 말합니다.

오직 세상에서 가장 지극한 진실함(誠)으로서
그 성(性)을 다하게 할 수 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사람답게 살았다고 하는 평가에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다르게 부여받은 천명을 알고, 그 성(性)에 따라 내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고통스런 의무의 길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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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人莫不飮食也]
맛을 아는 사람이 드물구나 [鮮能知味也]

중용 제4장에 나오는 공자 말씀입니다.

그래서 밥먹는 중용을 한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왜 밥을 먹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배가 고픈 고통을 주어 결국은 먹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에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왜 변을 누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고통을 주어 결국 화장실로 향하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 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을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을 먹어 기쁨을 찾기 위해 훔쳐옵니다. 변을 누어 기쁨을 찾기 위해 화장실에 있는 놈을 끌어냅니다. 왜요? 천도를 따르는 것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성(性)을 따름을 고집함으로써 성(性)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와 너는 다른가요? 도(道)의 정의를 연결시켜보겠습니다. 나와 너는 ‘떨어 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태초이래로 '너'가 없는 '나'만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천도를 따라 기쁘고, 너도 천도를 따라 기쁘고, 그럼으로써 함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논어 첫장의 가르침’을 통해 연결해보시면서 그림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맛을 안다는 것'으로 넘어오겠습니다.

맛이란 것은 주관입니까? 객관입니까?
사람마다 달리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살던 지역, 문화, 먹어왔던 음식 등등에 따라서 모두가 다릅니다. 
나에게도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배가 고플 때, 배가 부를 때, 기분 좋을 때, 오랫만에 먹을 때, 언제나 틀립니다.

 

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람의 갇힌 머리는 맛을 일반화시키려 하고 객관화 시키려 합니다.
내가 맛있다고 느낀 음식을 상대가 맛있다고 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반드시 같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경우가 사실은 너무 많습니다.

‘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똑같이 알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도 없습니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있고 적게 아는 것도 있고, 사람마다 모두 틀린게 정상입니다.

엄친아(엄마친구의아들) 보다 못한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못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나와 똑같을 수 있는 사람은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잘나고 못난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맛을 안다는 것은 사람마다, 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분별 이후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으로 옮겨와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여 조화를 이룰려고 하는 것이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군주의 도(道)가 우월하고, 남편의 도(道)가 우월하고, 군자의 도(道)가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만든 것은 우위가 아니라 다름입니다.
우위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논어 제11편 선진 제15장을 통해서, 유학의 공경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께서 "유(由)는 어찌하여 내 집에서 비파를 타느냐?"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由)의 성취는 대청에 올랐고, 방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니라”

자로는 공자에 9살 적은 나이 많은 맏형입니다.
그런데도, 한소리 들었다고 까마득한 학생들이 우습게 대하기도 합니다.
보다 못한 공자께서 조정에 나섭니다.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대청에서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려했던 것이니, 너무 그러지들 말라고 합니다.

 

자로가 나이를 내세우며 호통을 치고 복종시켜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공자께서 다른 제자들을 혼내줘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유학에서의 분별은 '복종'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성별, 지위 등등의 분별은 언제나 '조화'를 향해 지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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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깨기

인간도 동물입니다.

‘고도의 지능’이라는 특이한 성(性)을 부여받은 동물입니다.

특이할 뿐인데,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정(情)이라는 것은 인간의 성(性)이 아니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서 정(情)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기계가 되고,

인간에게서 이성(理性)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동물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순환하고 있고,

유학의 발전과정도 그러했습니다.

 

흥에 취하고, 신나하고, 울먹이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단단했고, 한번도 ‘음악’에 대해서 논한적이 없었습니다.

감성과 이성의 중용을 이탈하여, 이성중심으로 흘렀고,

조선조의 선비는 판박이 기계의 모습으로 꽉 막힌 사람들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情)으로 치우치면, 인간은 동물로 접근해 갑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명(命)하여 준 차별화된 성(性)은 ‘고도의 지능’입니다.

이 녀석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참으로 위험합니다.

불가능을 모르고, 한계를 모릅니다.

인간을 기계보다 더 한 기계로 만들 수도 있고,

인간을 동물보다 더 못한 생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유학의 배움은, 하늘이 준 ‘고도의 지능’을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中庸)에 맞추는 것입니다.

 

‘고도의 지능’은 해야할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귀’를 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역할은 짐승과는 다르게, 기계와도 다르게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은 다르지만, 귀가 맛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고도의 지능’은 제 한계를 모릅니다.

이 괴이한 녀석을 그대로 방치해 버리는 것은,

눈이 들을려고 애쓰게 만드는 것과 같고,

귀가 냄새를 맡으려 애쓰게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모든 조화가 깨어지고 부서져 버립니다.

 

그래서 중용 제1장에서 강조합니다.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행하도록 다듬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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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guk

『중용』시작부의 도(道)의 정의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도(道)는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간단히 생각하면 쉬우면서도, 어려운 얘기입니다.

유학경전에서 A = B로 완전하게 정의를 시도한 부분은

이 「도(道)」의 정의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도(道)입니다.

조금 쉽게 다가올까 싶어 ‘아담과 이브’를 등장시킵니다. 태초이래로 생겨난 인간은 한 명일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체가 느껴지는 것 뿐 아니라, 무형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마음조차도 그러합니다.

「사랑」과 「미움」이 별개요, 「고통」과 「쾌락」이 별개일까요?

사랑의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크게 키우면 미움이 보다 선명히 나타납니다. 고통이라는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쾌락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고통의 크기를 크게 키우면 함께 있었던 쾌락이 더 선명히 나타납니다.

 

떨어질 수 없다’는 것, ‘관계가 없는 그것 뿐인 것은 없다’는 이 관념이 정립되면, 모든 것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사유로 연결되어 갑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국의 음양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무극에서 생겨난 ‘태극’의 개념과 연결되며, 유가, 도가, 불가의 가르침도 역시 이 개념으로 함께 통(通)합니다. 삶과 죽음도 함께 있고, 깨달음과 무지도 함께 있고, 나와 너도 함께 있고, 선과 악도 함께 있고, 유와 무도 함께 있고, 현재와 비현재도 함께 있습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도(道)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도덕경』의 첫장입니다.

도(道)라는 도(道)는 참된 도가 아니며, [道可道非常道]
이름으로 정해진 것은 진정한 그것만이 아닙니다. [名可名非常名]
천지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은 본래 이름이 없었는데 [無名 天地之始],
이름으로 가두어버림으로써 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有名 萬物之母]

그러기에 가두지 않음으로 그 신비함을 보아야하고 [故常無欲以觀其妙]
가두어져 막혀 있는 것도 보아야 합니다. [常有欲以觀其]

‘갇히지 않음(무욕)’과 ‘갇힘(유욕)’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생긴 것이지만 이름이 다릅니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이 둘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있으니 혼란합니다 [同謂之玄]
아득하고 또 아득합니다. 모든 신비의 문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중용』에서 말하는 도(道)와 다른가요?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는 중용의 설명에 덧붙여,

도(道)라는 그 개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만 떨어질 수 없다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진정한 그것과 갇혀진 그것, 역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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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01

교과서『중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도(道)를 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도(道)라는 것은 어떠한 것임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도(道)를 행한다는 것」의 개념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야 할 것은 오직 그대로의 성(性)입니다.
스승도, 부모도, 남편도, 조상도 아닙니다.
책도, 좋은 말도, 인격자도, 지식도 아닙니다.
머리도 아니고, 육체도 아닙니다.
오직 성(性)입니다.

 

순자의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도(道)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의(義)를 따르지,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유가는 공자를 칭송하고 존경하지만, 공자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성(性)'을 따릅니다. 곧 도(道)를 행합니다.

 

오직 성(性)만을 따른다는 것은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에서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텅 비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치우침을 일으키는 것을 비워버리고
성(性)을 진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정반대에 있는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라는 유가의 일신(日新)이나,
날마다 벗어내라는 도가의 일손(日損)이나
가두고 있던 것을 떨쳐내는 유가의 유위(有爲)와
가두고 있던 것을 비워내는 도가의 무위(無爲)는
같은 말, 다른 표현입니다.

 

알아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는 것 모두를 말로 완벽하게 할 수 있습니까?

들어도 모든 것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렇게 말이라는 녀석과 귀라는 녀석은

또한, 눈이라는 녀석과 머리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로

제가 가진 성(性)에 따라 한계가 있습니다.

 

머리로만 만나려는 사람은
그대로의 성(性)도 머리만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다는 맹신에 갇힌 것일지 모릅니다.

 

똑똑한 자공이 말(言)에 갇혀가고 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으려 한다. (중략)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이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나
하늘은 아무 말이 없지 않느냐?" [논어 제17편 양화 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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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0. 19:11

유학의 상호관계성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19:11

논어 첫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배워서 수시로 따라해보면 어찌 기쁨이 없겠는가? (알아주는 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도 찾아주는 벗 있으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생길리 없으니 또한 군자이지않겠는가?"

 

① 나의 기쁨

② 더불어 나누는 즐거움

③ 자존을 잃지 않는 나

 

인(仁)으로 대입해 보겠습니다. 인(仁)을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더불어 함께 즐거우면 좋지만, 설령 그렇지 못해도 나의 기쁨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의(義)로써 대입해 보겠습니다. 의로움을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알아주면 즐거움을 나누지만, 알아주지 못해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예(禮)로써 대입해 보겠습니다. 예를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호응해 주면 함께 즐겁지만, 알아주지 않는다고 고개를 더 숙이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효도, 공경, 남편의 도리, 아내의 도리, 자식의 도리모두모두 같은 구조로 대입하시면 될 것입니다.

 

자식의 도리는 스스로의 기쁨입니다. 신하의 도리도 스스로의 기쁨입니다. 장자의 비유가 부분적으는 참 적절한 것 같습니다.

 

신체의 백개의 뼈마디와 오장육부를 통틀어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열은 없습니다. 다만, 다를 뿐입니다. 다르기에 각자 다른 역할을 합니다.

위가 잘 움직이면 대장이 잘 이어받아 순조롭게 이어주지만, 위가 잘 소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대장은 맡은 역할에 따라 최선으로 움직입니다.

 

그림그리기가 더 어렵네요. ㅠ.ㅠ

회색사람, 검은색 사람, 노란색 사람 세 종류가 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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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初六】濡其尾 吝
【九二】曳其輪 貞吉
【六三】未濟 征 凶 利涉大川
【九四】貞吉 悔亡 震用伐鬼方 三年 有賞于大國
【六五】貞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上九】有孚于飲酒 无咎 濡其首 有孚失是

  미제(未濟)괘는 소과(小過)괘 중에서 소(小)를 의미하니 부족한 것이다. 앞의 기제(旣濟)괘는 이미 성취한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서 지나침(過)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래서 덜어내야 한다. 미제(未濟)괘는 반대로 부족한 것이니(小) 채워야 한다. 주역의 후4괘는 모두 중용(中庸)을 말하고 있다. 중용을 강조하며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부족한 자(未濟)는 나아가야 하나(亨) 작은 여우(小狐)가 거의 마른 강을 건너다(汔濟) 그 꼬리를 적시게 되면(濡其尾) 유리함이 없다(无攸利).

  여우는 물을 건널 때 꼬리를 치켜들고 젖지 않도록 한다고 한다. 만일 젖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깊다면 건너지 않고 되돌아 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영리한 여유가 말라서 물이 없는 강을 건너면서 어찌 그 꼬리를 적시게 되는가? 부족한 자가 얻으려고 급히 서둘러 나아가는 까닭이니 조심하고 신중하여야 한다. 조심성이 없으면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여우가 마른 강을 건너다 꼬리를 적시기도 한다.

 

濡其尾 吝
그 꼬리가 젖었으니(濡其尾) 궁색(吝)하다.
  기제(既濟)가 끄는 수레는 이미 성취한 가득찬 수레여서 그 꼬리를 적셔도 허물이 없지만, 미제(未濟)가 끄는 수레는 채운 것이 보잘 것 없는 수레인데 그 꼬리를 적셨으니 참으로 궁색하다. 기제는 이미 성취하였으니 가볍게 털 수 있어야 하고 미제는 성취하지 못했으니 무겁게 붙잡고 신중하고 조심하여야 한다. 가진자는 가진 것을 가벼이 여기고 부족한 자는 가진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이다.

 

曳其輪 貞吉
그 젖은 수레를 끌고가면(曳其輪) 끝이 길하다(貞吉).

  미제자(未濟者)가 그 꼬리까지 적셔진 수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고 가면 마침내 길하다 한다. 설상가상의 상황을 만났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곧 좋은 상황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려움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또한 중용(中庸)이니, 상황은 변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비가 오기도 하고 맑은 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未濟 征 凶 利涉大川
부족한 채로(未濟) 계속 그 상태로 나아감(征)은 흉(凶)하니 큰 내를 건너야 이롭다(利涉大川).

  꼬리까지 적신 수레를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끌고가는 것을 말함이니 그것은 흉하다. 다시 채워넣고 채워서 기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기회가 생긴다면 과감하게 부딪혀야 하니, 큰 내를 건너는 과단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꺾이면 하늘이 부족하다고 채워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중용』에 “잘 심어져 있는 것은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중용 제17장]고 하였으니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하늘조차 외면할 것이다.

 

貞吉 悔亡 震用伐鬼方 三年 有賞于大國
그래야 마침내 길하고(貞吉) 후회가 없어지리니(悔亡) 우뢰와 같은 기상으로 귀방을 정벌하는데 일조하면(震用伐鬼方) 3년이 걸릴 것이나(三年) 대국으로부터 상이 있을 것이다(有賞于大國)

  대국으로부터 상을 받음은 은나라 고종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이니, 곧 미제에서 기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3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디고 과단하게 나아가 수레를 채운 것이다. 미제에서 기제로의 전환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쉬운 일이 아니다. 과단성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내도 필요하다.

 

貞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마침내 길하여(貞吉) 후회가 없으리니(无悔) 군자로서 빛남(君子之光)이여!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有孚) 길(吉)하다.
  단순히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를 따르는 뜻을 갖고 기제를 향해 나아간 것이었으므로 군자로서 빛이 나고 길하게 된 것이다. 반란에 동참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얻는 것을 원하여 은행을 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게 기제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흉할 것이니, 기제를 이루는 길은 바른 길이어야 한다.

 

有孚于飲酒 无咎 濡其首 有孚失是
먹고 마심에 신념이 있으면(有孚于飲酒) 허물은 없으나(无咎) 그 머리를 적시면(濡其首) 신념이 없어지리라(有孚失是)
  기제에서 재물을 가진 은나라가 덕이 높은 주나라에 미치지 못하다고 한 것처럼 미제에서도 물질을 경계하여 주역을 마무리 한다. 먹고 마심에 뜻이 있다면 허물은 없으니 곧 바른 뜻을 갖고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물질적 부유함이 머리를 적셔 정신을 망치면 그 신념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먹고 마셔야 한다는 신념은 나도 그것이 좋지만 다른 사람도 그것이 좋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기제자가 되면 가난한 이에게 베풀려고 하는 것이 먹고 마시는 것에 신념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에 취하여 머리가 적셔지면 99석도 부족하여 100석을 채우려고 할 것이니 베풀기 위해서 모으려고 하였던 그 신념은 없어지게 된다. 더 나아가 베풀지 않는 부자만 미워 보이고, 자기 자신은 항상 부족하게 생각되니 베풀려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을 전하며 주역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공자 말씀하시길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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旣濟 亨 小利貞 初吉 終亂
【初九】曳其輪 濡其尾 无咎
【六二】婦喪其茀 勿逐 七日得
【九三】高宗伐鬼方 三年克之 小人勿用
【六四】繻有衣袽 終日戒
【九五】東鄰殺牛 不如 西鄰之禴祭 實受其福
【上六】濡其首 厲

  기제(旣濟)괘는 이미 성취한 상태를 뜻하는 괘다. 앞의 소과(小過)괘에서 말한 모자람(小)과 지나침(過) 중에서 지나침(過)을 의미한다. 정상에 서면 내려가야 하고, 보름달이 차면 기우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변화의 이치이다.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면 아름답지 못하다. 공자께서도 "노년기에는 기운이 쇠퇴하므로 지키려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논어 제16편 계씨 제7장]고 하셨다. 늙어서 오히려 탐하는게 많아져 노추(老醜)라고 욕을 먹기도 하는데 육순을 뜻하는 이순(耳順)처럼 귀가 순해져야 하니, 곧 기제는 욕심을 버려야 함을 뜻하고 그것이 중용임을 의미한다. 과(過)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小) 채워주는 것이 천도(天道)이다.

 

旣濟 亨 小利貞 初吉 終亂
가진자(旣濟)가 더 성장(亨)하려 하면 좋은 결실을 맺고 마감을 하기가 어렵다(小利貞) 처음은 길할 수 있어도(初吉) 마침내 어지럽게 된다(終亂).
  기제자(旣濟者)는 이미 충분히 가진 자를 말함이다. 그런데 더 성장(亨)하고자 하는 것은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까닭이다. 중용의 도에서 보면 과(過)한 것이니 좋은 결실을 맺고 마감할 수가 없다. 곧 은나라 주왕이 만족을 모르고 욕심을 부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曳其輪 濡其尾 无咎
그 바퀴를 끌다가(曳其輪) 그 꼬리를 적셔도(濡其尾) 허물이 아니다(无咎)
  이미 이룬 것을 수레에 담아 옮기고 있다. 그 꼬리정도를 적시는 것은 허물이 없다. 이미 충분하기에 그 꼬리 정도를 적시어 조금 잃는 것은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99석을 가진 부자가 없는 자의 1석을 빼앗아 100석을 채우려고 한다고 하였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커지는 것이 욕심이니 그것은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婦喪其茀 勿逐 七日得
부인이 그 머리띠를 잃어도(婦喪其茀) 쫒지마라(勿逐) 이레면 얻는다(七日得).

  머리띠(茀)는 머리(草)를 꾸미는 장식품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미 가진 본래의 미모(旣濟)가 있으니 그 장식품은 수레의 꼬리와 같은 소소한 것이니 탐하여 좆지 말라는 말이다. 7일은 음양오행이 한번 순환하는 것을 말함이니, 곧 시간이 흐르면 치장하지 않은 모습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다는 뜻이다.

 

高宗伐鬼方 三年克之 小人勿用
고종의 귀방 정벌이(高宗伐鬼方) 삼년이 걸렸다(三年克之) 소인은 정벌하려 하지 마라(小人勿用).
  은(상)나라를 가장 부흥시킨 성군이었던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은(殷)나라는 이미 천하를 지배하였고 고종은 이미 천자였으나 귀방을 정벌하려 하였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큰 희생이 따른 것이었다. 이미 가진 기제자(旣濟者)였지만 욕심을 부린 것이니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 성취는 하였으니 지나쳤어도 화를 당하지 않은 것은 대인(大人)이었던 고종의 높은 덕성 때문이었다. 그러니 소인은 그러한 지나침은 따르려 하지 말아야 한다.

 

繻有衣袽 終日戒
비단옷에 헝겊으로 기워 쓴 흔적이 있다면(繻有衣袽) 종일 경계를 하라(終日戒).

  이미 성취하고 이미 가진 기제자(旣濟者)가 가장 경계해야 할 자는 비단옷에 헝겁으로 기워쓴 흔적이 있는 사람이다. 즉, 분수를 넘어 허세를 부리는 사람인데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벤츠를 살 형편은 안되지만 낡은 중고 벤츠를 구입해 타고 다니는 사람을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욕심과 욕망이 넘치니 경계하라는 말이다. 기제자의 가진 것을 다 뺏으려 할 것이다. 가진 것이 많으면 도적을 만나기가 쉽다.

 

東鄰殺牛 不如 西鄰之禴祭 實受其福
동쪽 이웃나라의 소를 잡아 지내는 제사(東鄰殺牛)가 서쪽 이웃나라의 간소한 제사로 받는 복(西鄰之禴祭 實受其福)만 같지 못하다(不如).

  동쪽 이웃은 주나라를 말하고 서쪽 이웃은 은나라를 말한다. 동쪽 이웃은 덕을 이미 성취한 기제(旣濟)의 나라이고, 서쪽 이웃은 물질을 이미 성취한 기제(旣濟)의 나라이다. 그래서 동쪽 이웃은 물질로 제사를 지내고, 서쪽 이웃은 간소하게 제사를 지내나 주역은 서쪽이웃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재물을 이루는 것보다 덕을 이루는 기제(旣濟)가 더 좋다는 말이다.

 

濡其首 厲
꼬리가 아니라 그 머리를 적시면(濡其首) 위태롭다(厲).

  수레바퀴를 끌다가 그 꼬리를 적시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를 적시는 것이다. 이미 성취하였다고 그 머리를 적시는 것은 교만하여 방탕하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내리막길을 만나 내려가더라도 내려가는 도(道)가 있는 법이다. 내리막길을 뛰어서 내려가다가는 굴러 떨어지는 법이다. 이미 가진 기제자(旣濟者)가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은 흉하지만 그렇다고 방탕하게 구는 것도 중용을 벗어난 것이라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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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過 亨 利 貞 可小事 不可大事 飛鳥遺之音 不宜上 宜下 大吉

【初六】飛鳥 以凶

【六二】過其祖 遇其妣 不及其君 遇其臣 无咎

【九三】弗過防之 從 或戕之 凶

【九四】无咎 弗過 遇之 往 厲 必戒 勿用永貞

【六五】密雲不雨 自我西郊 公 弋取彼在穴

【上六】弗遇過之 飛鳥離之 凶 是謂災眚

  앞의 중부(中孚)는 중용에 바로 서 있는 것이지만, 소과(小過)는 모자라고(小) 지나쳐(過) 중용의 길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28번째 대과(大過)는 시기를 놓쳐 지나간 것을 말하는데 소과(小過)는 문자상으로는 대과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겨지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소과는 모자라거나(小) 지나쳐(過) 중용을 벗어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과(小過)괘는 중부(中孚)괘와 정반대의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小過 亨利貞 可小事 不可大事 飛鳥遺之音 不宜上 宜下 大吉

치우침(小過)은 인식이 있는 시기(亨利貞)에 생긴다. 조금 기울어짐은 괜찮으나(可小事) 크게 기울어짐은 불가하다(不可大事) 높이 나는 새가 그 소리를 남기니(飛鳥遺之音) 올라가면 마땅하지 않고(不宜上) 내려옴이 마땅하니(宜下) 내려온다면 크게 길하리라(大吉).

  중용을 벗어나는 것은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시기중에 형리정(亨利貞)의 시기의 일이라고 한다. 씨앗인(元) 상태에서는 중용을 벗어날 수 없다. 인식이 생김으로써 그 지혜가 지나치거나 모라라서 중용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본성은 가깝지만 학습으로 멀어진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장]고 하셨다. 중용에서 치우치는 것이 약간 기울어진 것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크게 기울어짐은 불가하다. 높이 나는 새가 그 소리를 남기는 것은 한계에 봉착했기에 힘이 부친 까닭이다. 한계를 알았으니 조금 기울어진 것이다. 한계를 느꼈음에도 더 올라가려 한다면 크게 기우는 것이 된다.

 

飛鳥以凶

계속 비상하려고 하니 흉하다(飛鳥以凶)

  계속 비상하려는 것은 욕심이다. 욕심이 과하기 때문이니 중용을 벗어난 것이요, 또한 계속 비상하려는 것은 제 자신의 분수를 모름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으니 제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중용을 벗어나는 이유는 제 자신을 모르고 욕심이 과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過其祖 遇其妣 不及其君 遇其臣 无咎

그 할아버지를 지나쳐(過其祖) 그 할머니를 만나고(遇其妣) 그 임금께 나아가지 못하고(不及其君) 그 신하를 만남은(遇其臣) 조금 지나친 것이지만 허물은 아니다(无咎).

  할아버지를 지나친 것은 과(過)했으나 할머니를 만났으니 그 뜻이 할아버지에게 전달될 것이요, 임금께 나아가지 못한 것은 모자랐으나(小) 그 신하를 만났으니 그 뜻이 임금께 전해질 것이다. 지나치고(過) 부족한(小) 것이지만 정도가 약하기에(小事) 허물은 아니다. 주역은 말하는 것 같다. 중용의 도가 최선이기는 하지만,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도 중용은 아니라고.

 

弗過防之 從 或戕之 凶

지나치지 않았을 때(弗過) 그것을 방지해야 하지만(防之) 지나침을 따르면(從) 혹 그것이 끝장날 수도 있으니(或戕之) 흉(凶)하다.

  모자란 것(小)은 다시 채울 수 있지만 지나친 것(過)은 그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끝장날 수도 있음이니 곧 “모자란 물은 채울 수 있지만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을 말함이다. 공자께서는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말씀하셨으나, 그 같다는 것은 중용의 도를 벗어난 것이 같다는 말씀이셨으며, 지나침과 모자람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모자란 것이 낫다고 하실 것 같다.

 

无咎 弗過 遇之 往 厲 必戒 勿用永貞

허물이 없이(无咎) 지나치지 않았는데(弗過) 점점 지나치게 되면(遇之) 그대로 나아가면(往) 위태롭다(厲) 반드시 경계해야 하니(必戒) 끝까지 계속하려고 하지 마라(勿用永貞).

  딱 한번만 더 하고 멈춘다고, 딱 한번만 더 하고 멈춘다고 하다가 그 선을 넘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을 경계한 말이다. 예를 들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술 한잔인 것 같다. 딱 한번만 더, 딱 한잔만 더 하면서 끝맺음을 하지 못하니 중용을 벗어나는 위태로운 것이다.

 

密雲不雨 自我西郊 公 弋取彼在穴

구름이 일어도 비가오지 않음은(密雲不雨) 나 스스로 어두운 서방에 있기 때문인데(自我西郊) 무왕(公)이 구멍에 피해있는 새를 활로 쏘아 잡았다(弋取彼在穴) 다소 모자랐다.

  옛 성현들이 제후의 신분으로 천자의 신하였었던 무왕이 천자인 주왕을 정벌한 것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칭송하지는 않았다. 공자께서도 마찬가지셨다. 상나라가 이미 덕을 잃어 주왕이 구멍에 피해있는 신세와 마찬가지였는데도 힘으로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왕을 참살하였기 때문이다. 중용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주역은 과(過)한 것이 아니라 조금 모자란 것(小)이라고 하고 있다. 주나라를 태동시킨 무왕을 변명하는 까닭인 듯 하기도 하다.

 

弗遇過之 飛鳥離之 凶 是謂災眚

만나지 아니하고 지나치니(弗遇過之) 새가 날아 이별하게 되니(飛鳥離之) 흉(凶)하다. 이것을 말하여 재앙(是謂災眚)이라고 한다.

  요(堯)임금이 아들에게 지위를 넘긴 것이 아니라, 덕이 있던 순(舜)임금에게 천자의 지위를 넘긴 것처럼, 상나라 주왕이 무왕을 만나 그 지위를 넘겼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니, 곧 한계에 다다른 새가 더 높이 날기 위해 비상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주역은 상나라의 멸망의 책임은 조금 부족했던(小) 무왕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과했던(過) 주왕 때문이라고 탓을 하니, 무왕의 정벌을 변명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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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初九】虞 吉 有他 不燕

【九二】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六三】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六四】月幾望 馬匹 亡 无咎

【九五】有孚攣如 无咎

【上九】翰音 登于天 貞 凶

  이제 주역의 남은 마지막 4괘는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괘이다. 결국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면 중용(中庸)이다. 사서의 하나인 『중용』을 『소(小)주역』’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 철학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역은 시작하는 4괘에서 근본적인 것을 모두 말하였다. 자연스럽고 조화롭고 편안하고 그래서 아름답게 변화하여 마감하는 4가지 진리를 말하였다. 곧 때를 헤아리고(乾) 자리를 잘 잡고(坤) 함께하고(屯) 깨우치는(蒙)것을 말하였다. 첫4괘와 마지막4괘를 제외한 나머지는 첫4괘와 마지막4괘의 이치를 나누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역의 글 역시도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조화를 맞추고 있으니, 중용을 가르치고 중용을 보여줌으로써 끝내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곧은 믿음이(中孚) 돼지와 물고기에 이르니(豚魚) 길(吉)하다. 큰 내를 건너듯 과단성을 가지면 이롭고(利涉大川) 끝까지 이롭다(利貞).

  중부(中孚)는 미물인 돼지와 물고기 조차 의심할 수 없는 바른 믿음을 뜻하니 신급돈어(信及豚魚)의 줄임말이다. 신급돈어는 돼지나 물고기 등(等) 무심(無心)한 생물(生物)조차 믿어 의심(疑心)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올바른 믿음이라면 과단하게 나아가야 하고 끝까지 이로운 것이다.

 

虞 吉 有他 不燕

깊이 헤아리는 것(虞)이 길(吉)하나 다른 것이 생긴다면(有他) 편안하지 않다(不燕)

  공자께서는 계강자가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하였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이면 충분하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20장]고 말씀하셨다. 계강자가 지나치게 신중하고 생각이 깊었던 까닭인데, 지나치게 헤아리는 것 자체가 중용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주려 한 것이었다. 생각을 한번 더 한다고 늘 이로운 것은 아니다.

 

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어미학이 그늘에서 부르니(鶴鳴在陰) 그 새끼가 화답한다(其子和之) 나에게 좋은 잔이 있으니(我有好爵) 나와 너 함께 더불어 나누리라(吾與爾靡之).

  배움을 새를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익힐 습(習)이란 글자도 어린새가 어미새를 보고 날개짓을 하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어미학이 그늘에서 소리를 내어 그 새끼를 부르고 그 새끼가 화답하는 것처럼 중용의 바른 도리를 먼저 깨우친 자가 미숙한 이를 불러 더불어 잔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습 역시 조화로움을 꾀하는 중용이다.

 

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적을 얻으니(得敵) 두드려보고(成鼓) 멈춰서보고(或罷) 울어도보고(或泣) 노래도 해 본다(或歌).

  적(敵)이란 중용의 도에 대한 의문 즉, 의혹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주희는 대학의 원문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인데, 후대로 전해지면서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그 부분을 보완하여 채워넣었다. 천하의 이치는 깨달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니 그 궁극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 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가는 절차탁마(切磋琢磨)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月幾望 馬匹 亡 无咎

달이 거의 차니(月幾望) 마필이(馬匹) 사라져야(亡) 허물이 없다(无咎)

  달이 거의 찬 것은 학문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마필은 수레에 태워 나를 이끌어 주던 말들이니, 곧 스승을 뜻하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면 하산을 시킨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스승의 역할이 있고 스스로 깨쳐야 할 부분이 있다.

 

有孚攣如 无咎

신념으로(有孚) 붙잡아 매니(攣如) 허물이 없다(无咎).

  공자께서는 “안회는 그 마음을 다해 3개월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는데, 나머지는 하루이틀, 일이개월 그럴 뿐이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7장]라고 하셨다. 배워 알았다고 끝이 아니다. 신념으로 붙들어 매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미 깨우친 공자께서도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면 정신이 굳어진다.

 

翰音 登于天 貞 凶

날 수 없는 닭(翰音)이 하늘로 오르려 하면(登于天) 끝내(貞) 흉(凶)하다.

  한음(翰音)은 닭의 다른 이름이다. 날 수 없는 닭이 날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니 곧 제 수준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게 된다”[논어 제2편 위정 제15장]고 하셨다. 곧 한음(翰音)은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 자를 말함이니 곧 서울에 가 본 적 없으면서 서울에 가 본 사람을 이기려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도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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