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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2. 14:55

즉록무우(即鹿无虞)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4:55

     준(둔)괘 3번째 효사중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즉(即)은 뒤쫒는 것을 말하며, 우(虞)는 사냥할 때 몰이꾼 역할을 하던 관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몰이꾼이 없이 사슴을 쫒아가려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사냥을 하는 경우인데, 몰이꾼이 없기에 길을 잃어 곤경에 처하는 것이 쉽게 예견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대책없이 일을 벌이는 것’을 경고하는 의미로 종종 인용하곤 합니다.

   삼국지에도 이 명언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후한시대에 대장군 하진이 환관을 몰아내기 위해 동탁을 비롯한 전국의 군웅들을 모이라고 합니다. 그 때 하진의 부하였던 진림이 이 즉록무우(即鹿无虞)의 명언을 인용하여 하진을 만류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진림의 충언을 묵살했던 하진은 궁지에 몰린 환관들에게 살해되고, 낙양에 도착한 동탁이 실권을 장악하며 천하대란이 야기 되었습니다. 

   물론 알 수 없는 숲을 과단하게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걸어가는 길이라고 하여 ‘생각없이’ 따라가는 삶은 어쩌면 기계처럼 규격화된 부품이 되어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숲속으로 과단하게 뛰어드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는 ‘신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여기 즉록무우의 명언이 주는 가르침은 나쁜 결과를 경고하는 가르침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숲을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뛰어드는 것’을 경고하는 가르침으로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숲을 빠져 나올 수 없게 될 수 있음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 숲으로 뛰어드는 것은 오히려 응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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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2. 14:34

무성유종(无成有終)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4:34

    곤(坤)괘의 세번째 효사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주역에서 언급할 경우에는 '혹종왕사 무성유종(或從王事 无成有終)'을 함께 인용하여 "신하된 자는 그 공을 취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만을 원하는 것이다”는 의미로 인용하곤 합니다. 공로와 칭송은 왕(王)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며, 왕을 따르는(從) 자는 왕이 원하는 그 결과를 수행했다는 것으로 족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역사적인 성과들을 실제 이루었던 사람보다, 임금의 업적으로 인식되곤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겠지만, 오늘날에도 조직의 구조가 상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줄기세포사건이 부각되지 않았다면 개개 연구원들의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지요...

 

   무성유종(无成有終)이 주역을 떠나서 독자적인 명언으로 단장취의하여 인용할 경우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종종 인용되곤 합니다. "만사는 완성은 없고 마침만 있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완성이 있을 수 있다면 모든 학문은 단 한 권의 책만 남게 될 것입니다. 과연 과학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요? 종래에 꿈이라 여겼던 일들을 목격하고 있는 역사속에 살고 있지만 이 시점의 기술이 완성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 계속되는 한 계속 더 발전하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완성은 없는 채로 말이죠.

   완성의 신념이 지나치면 위험해지기도 합니다. 이상적인 국가를 완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 가야만 할 것이지만, 정치와 사상에 완성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가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께서 몸을 완벽한 근육질로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 관리해주지 않으면 변합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정신적인 완성도 그렇습니다. 배움을 쉬면 역시 변합니다. 그래서 결코 완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최고의 부자에 이를 수는 있어도 최고의 부자를 완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간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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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初九】虞 吉 有他 不燕

【九二】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六三】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六四】月幾望 馬匹 亡 无咎

【九五】有孚攣如 无咎

【上九】翰音 登于天 貞 凶

  이제 주역의 남은 마지막 4괘는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괘이다. 결국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면 중용(中庸)이다. 사서의 하나인 『중용』을 『소(小)주역』’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 철학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역은 시작하는 4괘에서 근본적인 것을 모두 말하였다. 자연스럽고 조화롭고 편안하고 그래서 아름답게 변화하여 마감하는 4가지 진리를 말하였다. 곧 때를 헤아리고(乾) 자리를 잘 잡고(坤) 함께하고(屯) 깨우치는(蒙)것을 말하였다. 첫4괘와 마지막4괘를 제외한 나머지는 첫4괘와 마지막4괘의 이치를 나누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역의 글 역시도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조화를 맞추고 있으니, 중용을 가르치고 중용을 보여줌으로써 끝내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곧은 믿음이(中孚) 돼지와 물고기에 이르니(豚魚) 길(吉)하다. 큰 내를 건너듯 과단성을 가지면 이롭고(利涉大川) 끝까지 이롭다(利貞).

  중부(中孚)는 미물인 돼지와 물고기 조차 의심할 수 없는 바른 믿음을 뜻하니 신급돈어(信及豚魚)의 줄임말이다. 신급돈어는 돼지나 물고기 등(等) 무심(無心)한 생물(生物)조차 믿어 의심(疑心)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올바른 믿음이라면 과단하게 나아가야 하고 끝까지 이로운 것이다.

 

虞 吉 有他 不燕

깊이 헤아리는 것(虞)이 길(吉)하나 다른 것이 생긴다면(有他) 편안하지 않다(不燕)

  공자께서는 계강자가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하였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이면 충분하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20장]고 말씀하셨다. 계강자가 지나치게 신중하고 생각이 깊었던 까닭인데, 지나치게 헤아리는 것 자체가 중용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주려 한 것이었다. 생각을 한번 더 한다고 늘 이로운 것은 아니다.

 

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어미학이 그늘에서 부르니(鶴鳴在陰) 그 새끼가 화답한다(其子和之) 나에게 좋은 잔이 있으니(我有好爵) 나와 너 함께 더불어 나누리라(吾與爾靡之).

  배움을 새를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익힐 습(習)이란 글자도 어린새가 어미새를 보고 날개짓을 하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어미학이 그늘에서 소리를 내어 그 새끼를 부르고 그 새끼가 화답하는 것처럼 중용의 바른 도리를 먼저 깨우친 자가 미숙한 이를 불러 더불어 잔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습 역시 조화로움을 꾀하는 중용이다.

 

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적을 얻으니(得敵) 두드려보고(成鼓) 멈춰서보고(或罷) 울어도보고(或泣) 노래도 해 본다(或歌).

  적(敵)이란 중용의 도에 대한 의문 즉, 의혹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주희는 대학의 원문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인데, 후대로 전해지면서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그 부분을 보완하여 채워넣었다. 천하의 이치는 깨달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니 그 궁극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 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가는 절차탁마(切磋琢磨)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月幾望 馬匹 亡 无咎

달이 거의 차니(月幾望) 마필이(馬匹) 사라져야(亡) 허물이 없다(无咎)

  달이 거의 찬 것은 학문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마필은 수레에 태워 나를 이끌어 주던 말들이니, 곧 스승을 뜻하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면 하산을 시킨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스승의 역할이 있고 스스로 깨쳐야 할 부분이 있다.

 

有孚攣如 无咎

신념으로(有孚) 붙잡아 매니(攣如) 허물이 없다(无咎).

  공자께서는 “안회는 그 마음을 다해 3개월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는데, 나머지는 하루이틀, 일이개월 그럴 뿐이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7장]라고 하셨다. 배워 알았다고 끝이 아니다. 신념으로 붙들어 매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미 깨우친 공자께서도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면 정신이 굳어진다.

 

翰音 登于天 貞 凶

날 수 없는 닭(翰音)이 하늘로 오르려 하면(登于天) 끝내(貞) 흉(凶)하다.

  한음(翰音)은 닭의 다른 이름이다. 날 수 없는 닭이 날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니 곧 제 수준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게 된다”[논어 제2편 위정 제15장]고 하셨다. 곧 한음(翰音)은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 자를 말함이니 곧 서울에 가 본 적 없으면서 서울에 가 본 사람을 이기려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도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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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萃 亨 王假有廟 利見大人 亨利貞 用大牲 吉 利有攸往
【初六】有孚不終 乃亂乃萃 若號 一握爲笑 勿恤 往 无咎
【六二】引 吉 无咎 孚乃利用禴
【六三】萃如嗟如 无攸利 往 无咎 小吝
【九四】大吉 无咎
【九五】萃有位 无咎 匪孚 元永貞 悔亡
【上六】齎咨涕洟 无咎

  췌(萃)는 사람이 모이는 것을 상징하는 괘이며, 효사는 그 모인 사람들을 조직화하여 이끄는 리더쉽에 관한 얘기들이다. 주역은 수단을 부려서라도 사람을 모으고, 그 모인 무리를 장악하고, 작은 고통은 무시하고, 위계질서를 갖추라고 한다. 그렇게 갖춰진 조직이 다음괘 승(升)괘의 성장하는 반석이 되는 것이다.

 

萃 亨 王假有廟 利見大人 亨利貞 用大牲 吉 利有攸往
사람이 모이는 것(萃)은 성장(亨)의 동력이니 왕이라면 종묘에 나가 제사를 드리고(王假有廟)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 성장하여 결실을 맺고 소멸하려면(亨利貞) 제사에 큰 희생양을 사용하여야(用大牲) 길(吉)하다. 시간이 지나가면 이롭다(利有攸往)
  사람이 모이면 제사를 드리는 공익을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사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제사에 큰 희생양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화려함을 뜻함이니 기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한 기술을 사용했더라도 시간이 지나가면 이롭다.

 

有孚不終 乃亂乃萃 若號 一握爲笑 勿恤 往 无咎
신념이 있으나(有孚) 확립되지 않았다면(不終) 모인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것이나(乃亂乃萃) 호통으로(若號) 한 손에 쥐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니(一握爲笑) 근심하지 말고(勿恤) 나아가면(往) 허물이 없다(无咎).

  뜻이 있어도 확고하지 않다면 모인 사람들을 이끌어감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모인 군중들을 초기에 이끄는 힘은 확립된 바른 뜻이 아니라 강한 기운이다. 한번의 호통 즉, 굳센 기운으로 군중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화려함과 기운으로 모임을 형성하고 장악하는 것은 일종의 지혜일 수도 있을 것이다.

 

引 吉 无咎 孚乃利用禴
군중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면(引) 길(吉)하고 허물이 없으니(无咎) 신념을 펼치면(孚) 검소한 제사를 이용해도 이로울 것이다(孚乃利用禴)
  지혜로운 기술을 통해 사람들을 모았으니 이제는 그 모인 군중을 제대로 이끌어 가야 하는 단계가 된 것이다. 그 군중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은 신념(孚)이다. 군중들의 신임을 얻었으니 제사를 검소하게 지내도 이롭다. 화려함으로 모임을 장악해야 하는 단계에서는 화려함으로 이끌고, 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단계에서는 신념으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萃如嗟如 无攸利 往 无咎 小吝
모인 사람들이 탄식을 하게 되면(萃如嗟如) 유리할 것이 없으나(无攸利) 탄식을 무시하고 나아가야(往) 허물이 없으니(无咎) 작은 고통은 있게 마련이다(小吝)
  모임은 당연히 소소한 불만이 표출되기 마련이다. 유리할 것은 없으나 아무 탄식도 없는 모임을 만들 수는 없으니 때로는 무시하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탄식을 다 받아주어 와해의 불씨를 남겨두기 보다는 그 불씨를 미리 꺼 버리고, 보다 탄탄한 내실을 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초창기에는 감수해야 하는 작은 고통일 뿐이다.

 

大吉 无咎
탄식은 크게 길한 것이고(大吉) 허물이 없는 것이다(无咎) 
  아무 탄식도 없는 모임이 아니라 오히려 탄식이 나오는 것이 크게 길하다고 까지 한다. 더 무서운 것은 드러나지 않아 썩어 들어가는 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탄식이 나오는 것이 크게 길하다고 하는 까닭이다.

 

萃有位 无咎 匪孚 元永貞 悔亡
무리는 위계질서가 있어야(萃有位) 허물이 없다(无咎) 신념이 없더라도(匪孚)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될 수 있으니(元永貞) 후회가 없다(悔亡).
  탄식을 도려내고 탄탄한 무리가 형성이 되었다면 이제는 위계질서를 갖추어야 할 때다. 위계질서를 갖추면 앞으로는 설령 신념과 가치를 일시적으로 잃더라도 끝까지 유지될 수 있으니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기둥을 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齎咨涕洟 无咎
탄식과 한숨 눈물과 콧물이 있더라도(齎咨涕洟) 허물이 없다(无咎)

  탄식뿐 아니라 한숨과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리는 것은 불만이 더욱 심하게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탄식과 한숨과 눈물 콧물이 늘어나게 되니, 그것은 모임이 가진 속성이다. 하지만 위계질서를 갖추었기 때문에 탄식과 한숨 눈물이 있어도 와해되지 않을 것이니 허물은 없다. 21번째 서합(噬嗑)괘에서 주역은 유가의 예(禮)보다는 법가의 법치주의(法)에 더 가까운 듯 하다고 했다. 췌(萃)괘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직의 질서를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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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初九】利用爲大作 元吉 无咎

【六二】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永貞吉 王用享于帝 吉

【六三】益之用凶事 无咎 有孚 中行 告公 用圭

【六四】中行 告公從 利用爲依 遷國

【九五】有孚惠心 勿問 元吉 有孚 惠我德

【上九】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 凶

  보태주는 것(益)은 하늘의 일을 대신 맡은 것이니 무거운 짐을 진 것이다. 공자께서 “나는 군자는 급한 곳을 구제해 주고 부유한 곳에는 보태주지 않는다고 들었다”[논어 제6편 옹야 제4장]고 하셨으나, 제자 염유가 부유한 계씨의 재산을 늘려주자 “나의 제자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울려 성토해도 좋다”[논어 제11편 선진 제17장]고 진노하셨다. 모자라면 보태주고 넘치면 덜어내는 것은 하늘의 도(道)이며, 그 바른 천도(天道)를 따르는 것이 군자의 사명이다.

 

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보탬(益)은 시간이 지나야 결실이 있다(利有攸往) 큰 내를 건너듯(利涉大川)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

  보태주는 것은 단번에 끝맺는 것이 아니라 꾸준함이 필요한 일이다. 마음 또한 재물에 얹어 보태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앞의 손(損)괘에서 말한 거친 베옷을 입은 사람에게 거친 베옷을 입고(曷之用) 다가가는 것이다. 주위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과단성 있게 나아가야 한다.

 

利用爲大作 元吉 无咎

크게 만들어 나가도록 사용해야 이로우니(利用爲大作) 근원적으로 길하고(元吉) 허물이 없다(无咎)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방법으로 현명하게 보태주라는 의미이다. 오직 짐승처럼 먹여주는 방법을 사용하기 보다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방법이 좋고, 쌀을 보태주기 보다는 농사를 짓도록 해 주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다.

 

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永貞吉 王用享于帝 吉

누군가가 보태주는 것은(或益之) 십붕의 비싼 거북점으로도(十朋之龜) 어긋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니(弗克違) 계속 끝까지 길할 것이다(永貞吉). 왕이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도(王用享于帝) 길(吉)할 것이다.

  혹익지(或益之)는 앞의 손(損)괘에서 나온 기적과 같은 횡재를 말한다. 천명(天命)으로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간접적인 베품이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제물을 사용하는 것이기에 사사로이 쓰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益之用凶事 无咎 有孚 中行 告公 用圭

보태주는 것은(益之) 흉한 일에 사용하면(用凶事) 허물이 없다(无咎) 신념을 가지고(有孚) 중용을 따라(中行) 공익을 도모하고(告公) 임금의 뜻이 닿는 곳에 사용하라(用圭).

  모자라면 채워주고 과하면 덜어내는 중용의 도를 따라야 한다. 나에게 넘치는 재물을 흉한 일을 당한 이웃을 도와주는 것으로 사용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임금의 뜻은 빈부의 지나친 치우침이 없이 백성이 고루 부유하고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中行 告公從 利用爲依 遷國

중용을 행하고(中行) 공익을 따라(告公從) 의지해야 하는 곳에 사용하면 이로우니(利用爲依) 나라를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遷國).

  대학의 “한마디 말이 대사를 그르치기도 하고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한다”[대학 제9장 제국치가]는 가르침이 연상되는 효이다. 나의 얼마되지 않는 기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라를 변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먼 길은 가까운 길부터 시작해 나아가며, 높은 산도 낮은 곳부터 올라가야 한다.

 

有孚惠心 勿問 元吉 有孚 惠我德

베푸는 마음에 신념이 있다면(有孚惠心) 묻지도 말라(勿問)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신념이 있다면(有孚) 나의 덕을 보태는 것(惠我德)이다.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속셈을 갖고 베푸는 경우도 있다. 사건을 무마하고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 위해 재산을 내 놓는 대기업 총수도 있으나, 그러한 보태줌이 아니라 마음으로 즐거워 베푸는 것은 어디에 물을 필요도 없이 길한 것이라고 한다.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덕을 보태는 것이라고 한다.

 

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 凶

보태주는 것이 막히거나(莫益之) 누군가 공격하면(或擊之) 마음을 세우되 방법을 고집하려 하지마라(立心勿恒) 흉(凶)하다.

  베푸는 선한 일이 방해 받는 경우가 있다. 장애인을 내세워 뒤에서 그것을 착취하는 소위 ‘앵벌이’의 경우처럼 나의 베품이 이용당하게 되는 것을 알았다면, 마음은 변함없이 세워놓되 그 방법을 고집하려 하면 흉하다고 한다. 결국 악을 돕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보태주는 것은 크게 만들어나가도록(用爲大作) 현명하게 보태주어야 하고 이용당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보태주어야 하니, 그래서 하늘은 그 임무를 맡길 만한 사람을 골라서 사명을 맡기는 것일 것이다. 현명한 방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보탬을 주라는 것이지 외면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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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初六】浚恒 貞 凶 无攸利

【九二】悔亡

【九三】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九四】田无禽

【六五】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上六】振恒 凶

  항(恒)괘는 변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곧 신념을 뜻한다. 지나치게 강한 신념은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지만, 신념이 없으면 자기 생과 삶을 개척해 나가지 못하고 이목에 이끌려 피동적으로 따라다니는 삶을 살게 만든다. 신념은 맹목과 맹신이 아니다. 귀를 닫고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귀를 더 열고 눈을 더 크게 떠야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의무필무고무아(毋意毋必毋固毋我)'하셨다고 하니, "맘대로 짐작하는 것, 반드시 하려는 것,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 자신만 옳다고 하는 것" 이 네 가지 병통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논어 제9편 자한 제4장]

 

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신념(恒)을 세우는 것은 성장기여야(亨) 허물이 없고(无咎) 성숙기와 마감기로(利貞) 시간이 지나가면 결실을 맺게 된다(利有攸往)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모범의 틀에 갇혀있으면 1등을 할 수는 있겠지만 수동적인 틀에 박힌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공자께서는 "함께 배운다고 반드시 같은 길을 가지는 않으며, 같은 길을 간다고 반드시 같은 성취가 있는 것이 아니며, 같은 성취가 있다고 반드시 같은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9편 자한 제30장]고 하셨다. 사람은 기계부품처럼 같을 수 없으니 젊을 때 자아를 확립하고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을 때의 확립된 자아와 신념은 식견이 부족하여 냉정하고 정확할 수는 없을 것이나 허물은 아니다. 성숙기 마감기를 향해 시간이 지나가면, 식견이 높아지고 그 신념이 바르게 확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浚恒 貞 凶 无攸利

지나치게 고집하면(浚恒) 끝(貞)이 흉(凶)하니 유리할 것이 없다(无攸利)

  준항(浚恒)은 조금의 융통성도 용납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고집스러움을 뜻한다. 논어에 “큰 절개는 엄격해야 하지만, 작은 절개는 때론 들고 날 수가 있다”[논어 제19편 자장 제11장]고 하였다. 제자 안회가 죽자 공자께서도 지나치게 슬퍼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상심하였느냐? 그러나 이런 사람을 위해서 지나치게 상심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서 지나치게 하겠느냐?”[논어 제11장 선진 제9장]고 하셨다. 조선조의 유학은 작은 절개가 들쑥날쑥하면 마음이 방종해져 큰 절개를 해친다고 주장하며 엄격한 원칙론을 고수하였으니, 주역에서 말하는 준항(浚恒)이 아니었는가 싶다.

 

悔亡

그러나 후회는 없을 것이다(悔亡).

  지나친 원리원칙주의자는 외적으로는 흉하나 내적으로 후회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맞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옳다고 믿기 때문에 고수하는 것이기 때문인 까닭이다.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신념 없이 순종하는(不恒其德) 것이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하고(或承之羞) 끝내(貞) 어려움을 당하게 한다(吝)

  신념이 있는 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자아가 확립되고,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신념 없이 순종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고 끝내 어려움을 당하니, 생각이 없어 갈대처럼 휘둘리는 사람보다는 지나쳐 융통성이 없을지라도 신념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田无禽

사냥을 해도(田) 잡은 짐승이 없을 수는 있다(无禽)

  신념으로 인해 먹는 문제 즉, 경제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는 있다. 순종하는 사람과 지나치게 고집하는 사람 모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신념 없이 순종하면 수치스럽게 되니 곧 정신적인 아픔을 당하고, 지나치게 신념을 고집하면 고고함은 지킬 수 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런 심리적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신장은 욕심이 많은데 어떻게 굳셀 수 있겠는가?”[논어 제5편 공야장 제11장]라고 하셨다.

 

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그 덕이 한결같아(恒其德) 끝까지(貞) 변치 않으면 부인은 길하겠지만(婦人吉) 남편은 흉하다(夫子凶).

  그래서 부인의 뜻을 꺾기가 더 어려울 지도 모른다. 남편은 집안과 가정을 위해서 그 뜻을 쉽게 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양의 의무감은 남자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역의 손(損)괘에서는 가정이 없는 충복(得臣无家)을 얻는다는 효사가 등장한다. 가정이 있으면 완전한 충복이 되기가 어렵다. 가정의 생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인의 덕은 가정을 단속하는 것이기에 변치 않아야 길하고, 남편의 덕은 소축기(가정), 대축기(사회)를 거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변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결같으면 흉하다라는 해석도 좋은 것 같다.  

 

振恒 凶

신념을 흔드는 것(振恒)은 흉(凶)하다.

  신념은 내면적인 자존이다. 외부에서 영향을 주어 신념을 가지도록 하거나 신념을 굽히도록 강제하는 것은 흉할 뿐이다.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삼군대장의 권력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일개 보통사람이라도 그 의지를 빼앗을 수는 없다”[논어 제9편 자한 제26장]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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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