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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4 제1편 소요유(逍邀遊 ) - 1
  2. 2013.01.04 도덕경(道德經) 제1장
北冥有魚
其名為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為鳥
其名為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
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摶扶搖 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것을 곤(鯤)이라 부른다.
곤(鯤)의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는 없다.
그 곤(鯤)이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이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붕(鵬)이라는 새가 솟구쳐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같다.
이 붕(鵬)이라는 새는
바다의 출렁임을 따라
남쪽 바다로 나아갈려고 하는데
그 남쪽 바다가 천지(天池)이다

「제해(齊諧)」라는 책은 그 뜻이 괴이하다.
적혀있는 말은 이러하다 :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나아갈 때에는
물결치는 것이 3천리에 이르고
회오리를 타고 9만리를 날아올라
반년이 지나서야 쉰다.'


  존재라는 것은 저 홀로 위대할 수는 없다. 계산으로 측정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곤(鯤)이라고 해도 북명이라는 바다가 길러주어야 하며, 어마어마한 붕(鵬)이라고 해도 남명이라는 바다가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곤은 붕이 된 것이며, 붕이 되면 왜 남명으로 날아가려 하는가? 

  곤이 붕으로 변한 것은 스스로의 뜻이 아니다. 남명으로 날아가야 하기에 하늘이 날개를 준 것이다. 하늘은 제 사명을 다했다. 그리고 선택권은 붕새에게 넘겨졌다. 과연 솟구쳐 날아오를 것인가? 그 길은 어마어마한 물결과 회오리를 동반하여 다시 잠잠해지지까지 6개월이 걸리는 힘든 여정이다.

  사람이 원초적 본성을 찾은 것이 붕새로 변해 날개를 가진 것과 다르지 않다. 솟구쳐 오르는 것은 수행을 의미하며 남명은 초월적인 세상을 상징한다. 곧 남명은 신선계요, 열반이다. 티베트에서는 완전히 자란 모습으로 태어나는 '가루다'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가루다의 새끼는 알 속에 있을 때 이미 완전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알을 깨고 나오기 전에는 결코 날 수가 없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불성의 발현으로 이야기한다. 세세한 차이는 있지만, 붕새의 비유와 닮아있다.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為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里
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掊風
背負青 天而莫之夭閼者
而後乃今將圖南
아지랑이와 먼지는
생물이 불어내는 입김이다.
하늘이 푸르른 것은
저 하늘 본래의 색이던가?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인가?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보아도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대개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한 잔 물을 뜰의 패인 곳에 부으면
지푸라기는 띄워지겠지만
술잔을 띄우면 가라앉고 만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큰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쌓인 것이 깊지 않아도
저 붕새의 큰 날개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구만리는 되어야
바람이 그 밑에 있게 되고
그 후에야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채 걸림없이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붕새가 남명으로 날아가는 여정은 깨달음의 길. 소요유(逍遙遊)! 속된 세상을 초월하여 아무런 걸림없이 참된 자유의 세계에서 노니는 지인(至人)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다. 물이 깊어야 큰 배를 띄울 수 있고, 높이 솟구쳐야 바람을 탈 수 있는 법. 큰 고난과 큰 시련이 동반되는 험난한 길일게다. 불행의 깊이가 깊지 않은 사람은 행복의 깊이도 얕은 법! 구만리를 솟구쳐 깊게 쌓인 바람을 타고 대도(大道)의 세상으로 날아가야 한다.

 

蜩與學鳩笑之曰:
‘我決起而飛 槍榆枋而止
時則不至而控 於地而已矣
奚以這九萬里而南為?’

適莽蒼者
三餐而反 腹猶果然
適百里者 宿舂糧
適千里者 三月聚糧
之二蟲又何知!
매미와 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힘써 날아올라야 느릅나무와 박달나무에 이른다
때로는 그곳조차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지고 마는데,
어찌 9만리를 날아올라 남쪽으로 갈 수 있다는가?”

가까운 들판에 나가는 자는
세끼를 먹지 않아도 배를 유지할 수 있지만
백 리를 가는 자는 밤새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 리를 가는 자는 3개월분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을
이 두 벌레 같은 것이 어찌 알겠는가?


  매미와 비둘기도 날개가 있다. 그러나 날개가 있다고 다 남명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낮은 식견에 붕새의 날개를 제 가진 날개인 양 생각한다. 노자도, 공자도 조롱을 받았다. 예수는 죽임을 당했다. 본래 바둑고수는 하수를 조롱하고 비웃지 않는다. 하수를 조롱하고 훈수를 두는 것은 작은 날개를 달고 있는 급수들이다. 장자가 일갈한다. 벌레같은 것들이 무엇을 안다고 까부느냐!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奚以知其然也?
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
此小年也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為春 五百歲為秋
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為春 八千歲為秋
此大年也


而彭祖
乃今以久特聞
眾人匹之
不亦悲乎!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게 산 것은 오래 산 것에 미치지 못한다
어떤 것이 소년(小年)과 대년(大年)인지 아는가?
아침만 사는 버섯이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하니
이런 것들이 소년(小年)한 것이다.


초(楚)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 불리는 거북이 있었는데
5백년을 봄으로 삼고 5백년을 가을로 삼고 살았다
오랜 옛날에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8천년을 봄으로 삼고 8천년을 가을로 삼고 살았다.
이런 것들이 대년(大年)한 것이다. 


그럼에도 8백년을 살았다는 팽조(彭祖) 따위를
오늘날까지 오래 살았다며
사람들이 그와 같아지고자 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장자는 말한다. "까불지 말거라. 적어도 3만년을 넘게 산 대춘정도는 되어야 오래 살았다고 할만하지, 고작 8백년을 산 팽조따위를 오래살았다고 하느냐!" 참고로 장자가 오래 사는 것을 높인다고 오해하여 '불로장생'사상이 도교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장자도 백년을 못 넘겼다. 많아야 80이라고 추정한다. 

 

湯之問棘也是已.
湯問棘曰 :
’上下四方有極乎?’
棘曰 : 
‘無極之外 復無極也
窮髮之北有冥海者
天池也
有魚焉 其廣數千里
未有知其脩者
其名為鯤
有鳥焉 其名為鵬
背若泰山
翼若垂天之雲
摶扶搖羊角而上者九萬里
絕雲氣
負青天 然後圖南
且適南冥也’

 

斥鴳笑之 曰 :
’彼且奚適也?
我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翱翔蓬蒿之
此亦飛之至也間
而彼且奚適也’


此小大之辯也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鄉
德合一君
而徵一國者
其自視也亦若此矣 

탕왕(湯王)이 신하 극(棘)에게 물은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탕왕(湯王)이 극(棘)에게 물어 말하기를
”상하사방이 끝이 있는가?”
극(棘)이 말하기를
”끝없음의 바깥에 다시 끝없음은 없습니다.
궁발(窮髮)의 북쪽에 명해(溟海)라는 바다가 있는데
천지(天池)라고 합니다.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크기가 수 천리나 되어
그 길이를 아는 자가 없는데
곤(鯤)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거기에 새도 있는데 붕(鵬)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등은 태산만 하고

날개는 하늘에 뒤덮은 구름과 같은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솟구쳐
구름을 벗어나
푸른 하늘을 등진 후 남쪽을 향하여
남쪽 바다로 간다고 합니다.”

 

메추리가 이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것들은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내가 힘껏 뛰어올라 보았더니
몇 길 못 오르고 내려와
쑥대밭 속에서 펄떡거려야 했는데
이까지가 최고로 오를 수 있는 것이던데
저것들은 어디까지 오른다고 저 짓이냐.”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다.
그러기에 무릇 지혜가 한 관직 정도 맡을만하고
행실이 한 고을 사람들이 알아줄 정도이고
덕은 한 임금의 마음만 만족케 할 정도이고
능력은 한 나라에 쓸모 있을 정도임에도
스스로 뽐내는 것은 이 메추리와 같은 것이다.


  같은 얘기의 반복이다.

 

而宋榮子猶然笑之
且舉世而譽之而不加勸
舉世而非之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竟
斯已矣
彼其於世未數數然也
雖然 猶有未樹也

夫列子御風而行
泠然善也 旬有五日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
彼且惡乎待哉!

송영자(宋榮子)는 이런 자들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는 세상이 그를 칭찬한다고 해서 열심히 하려 하지 않았고
세상이 그를 비난한다고 해서 그만두려 하지 않았으니
안팎의 구분을 정할 수 있었고
영예와 굴욕의 경계를 구분하였으니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직 흔치 않지만
비록 그렇다 해도 자라지 못한 나무와 같다.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원함이 좋아서 보름이 지나서야 돌아오곤 했다.
그처럼 복을 받은 사람이
여전히 흔하지는 않다
그러나 비록 걷는 것을 면했다 하여도
여전히 의지할 바람이 있어야 한다.


만약 저 천지의 바른 기운을 타고
천지의 대기운인 육기(六氣)의 변화에 맡겨
무궁에 노니는 자라면
그는 기댈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천지의 대기운인 육기의 변화에 맡겨 무궁에 노니는 자라면 그는 기댈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그러기에 말하였다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신인(神人)은 이룸이 없고,
성인(聖人)은 이름이 없다.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이룸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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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소요유(逍邀遊 ) - 2  (0) 2013.01.06
:
Posted by 오빠야닷컴
2013. 1. 4. 16:37

도덕경(道德經) 제1장 간상(赶上)/노자(老子)2013. 1. 4. 16:37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無名 天地之始 (무명 천지지시)
有名 萬物之母 (유명 만물지모)

故 常無 欲以觀其妙 (고 상무 욕이관기묘)
常有 欲以觀其徼 (상유 욕이관기요)

此兩者 同出而異名 (차량자 동출이이명)
同謂之玄 (동위지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 常(상) ≒ 영원한. 불변의.


▣ 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로 끊어 해석하면, '무욕으로서 묘(妙)를 보고 유욕으로 요(徼)를 본다'

▣ 觀(관) ≒ 꿰뚫어 봄.
▣ 妙(묘) ≒ 말하기 어려운 오묘함.
▣ 徼(요) ≒ 현상으로 나타남

▣ 玄(현) ≒ 아득한 심오함 

도(道)를 도(道)라 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도(道)일 수 없고,
무엇을 이름으로 부를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이름일 수 없습니다.

이름없음에서 천지가 시작 되고,
이름있음에서 만물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참된 무(無)로서 그 신묘함을 보고자 하며,
참된 유(有)로서 그 나타남을 보고자 합니다.

이 무(無)와 유(有)도 함께 생겨나 이름이 다른 것입니다.
함께라고 하니 아득합니다.
아득하고 아득함이 모든 신묘함의 문입니다.

 

  영원불변의 도(道)가 도(道)라는 이름을 갖는 순간 그것은 진정한 도(道)가 아니게 됩니다. 진정한 도(道)는 명칭과 형상이 끊어져 말로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시작은 이렇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내(노자)가 도(道)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완전한 도(道)일 수 없음을 참작하고 들으세요."

  귀로 듣지 말고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통(通)하라는 당부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금강경의 상(相)에 관한 개념으로 대체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도(道)라는 상(相)에 사로잡히면 진리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죠.

무릇 모든 상(相)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

  노자는 무(無)로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무(無)라고 이름 한 것일 뿐, 불교의 공(空)이나 다른 종교의 신(神)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모두 가리키고 있는 곳은 마찬가지니까요. 가리키는 손가락만 다를 뿐.

 

  무(無)로부터 나온 천지라는 이름이 하나를 낳고 둘을 낳고 만물을 낳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입니다. 도덕경 제42장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슬픈 현실이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이름입니다. 나타나는 것은 다 그러합니다. 만나고 헤어집니다. 생겨나서 소멸합니다. 드러나는 현상의 측면은 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노자는 무(無)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노자는 말합니다. 무(無)와 유(有)를 함께 일통하여 하나임을 보자고 합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나지만, 그 무(無)는 유(有)가 있어야만 무(無)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서로가 서로를 이루고 있음을 보자는 말입니다. 무(無)와 유(有)가 서로서로 이루고 있음을 보는 것이 모든 신묘함을 풀어줄 열쇠라고 합니다.

  앞에 언급한 금강경 사구계와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상(相)을 유(有)로 바꾸어 볼까요? '유(有)가 유(有)가 아님을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 여래(如來)는 진리, 도(道), 불(佛) 무엇으로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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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