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无妄 元亨利貞 其匪正 有眚 不利有攸往
【初九】无妄 往 吉
【六二】不耕 穫 不菑畬 則利有攸往
【六三】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九四】可貞 无咎
【九五】无妄之疾 勿藥 有喜
【上九】无妄 行 有眚 无攸利

  사람에게 고기를 주기 위한 것으로 명이 바뀐 동물이 있고, 사람의 치장을 위해, 사람의 건강을 위해 멸종에 이르는 동물도 있고, 인간 거주의 편의를 위해 없어지는 산과 강이 있다. 주역은 인간의 탐욕으로 자연(自然)이 파괴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자연 곧 천도(天道)가 무너지면 인간 역시 생존하지 못한다. 무망(无妄)은 하늘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니,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것을 뜻한다.

 

无妄 元亨利貞 其匪正 有眚 不利有攸往
천도에 순응(无妄)하여야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순탄한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천도에 순응하는 그 바름을 따르지 않는다면(其匪正) 재앙이 있으리니(有眚) 천도를 거스르며 시간을 보낸다면 이로울 것이 없다(不利有攸往)

  씨앗이(元) 자라서(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 되는(貞) 순탄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려면 시간과 공간과 사람과 노력 등등이 필요하지만, 또 하나 필요한 것이 무망(无妄)이다. 주역은 하늘(시간)외에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인류도 언젠가는 종말을 맞게 될 것 같다. 인간에게 주어진 지능으로 인해서 오히려 멸할 수 있는 위험이 있으니, 뛰어난 지능으로 인해 하늘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태어나서 죽게 되는 것은 하늘이 주관하는 일이지만, 고기를 먹기 위해 생명을 만들고 생명을 죽이고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버리니 다른 생명이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도록 하면서 스스로는 천수(天壽)를 누릴려는 중용을 벗어난 모순을 꿈꾸는 것이다. 공자께서 “사랑하는 이는 살기를 바라면서 미워하는 이는 죽기를 바란다면 살리기를 원하면서 죽이기를 원하니 이것은 모순인 것이다”[논어 제12장 안연 제10장]라고 하셨다. 사람이 인위(人爲)로 천수(天壽)를 주관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천수(天壽)를 끊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无妄 往 吉
천리에 순응하여(无妄) 나아가야(往) 길(吉)하다.
  누구나 보전된 자연(自然)을 보면 아름답게 여기고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자기의 이익과 관련되면 곧 그 자연(自然)이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곧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탐욕이다. 공자께서 “멀리 내다보고 고민해 보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이 가까운 날 생길 것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2장]라고 하셨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하며, 하늘을 두려워 해야 한다.

 

不耕 穫 不菑 畬 則利有攸往
밭을 갈지 않아도(不耕) 얻을 수 있고(穫) 개간하지 않아도(不菑) 경작할 수 있으니(畬)  그렇게(則)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이로움이 있다(利有攸往).
  주역은 인간이 조작하지 않아도 자연이 배려한 자연 생산물로 살 수가 있다고 한다. 생태계가 그러한 조화를 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도가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랑이는 배가 부르면 토끼를 잡아먹지 않는다. 만약 호랑이에게 인간의 머리를 주었다면 호랑이는 두고두고 먹으려고 토끼를 잡아 비축해 두고자 경쟁했을 것이기에 벌써 생태계의 조화가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무망의 재앙은(无妄之災) 누군가가 매어둔 소를(或繫之牛) 지나가는 행인이 가져가서(行人之得) 고을 사람들이 의심을 받게 되는 재앙(邑人之災)이다.
  천리에 순응하지 않으면 결국은 하늘이 재앙을 부른다고 한다. 하늘의 재앙은 자연을 망친 자에게 직접적으로 향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말이다. 운이 나쁜 사람이 벼락을 맞는다고 하였다. 누군가가 매어둔 소를 도적질한 것은 지나가는 행인이었지만, 의심을 받는 것은 고을 사람들이니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 하늘과 땅처럼 위대한 존재에게도 사람들은 서운해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중용 12장]라고 하셨나 보다. 자연을 파괴한 이들은 선진문명국이지만, 가뭄과 재앙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오히려 더 발생하고 있다.

 

可貞 无咎
끝까지 순리를 지키면(可貞) 허물이 없다(无咎)
  무망을 따르지 않는 재앙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 것'과 같은 억울한 결과가 생긴다고 해서 곧 변신하여 천도(天道)를 어기려 하지 마라는 말이다. 허물(咎)은 길흉(吉凶)과는 다른 내적인 시각이다. 무망을 따른다는 것이 손해와 이익을 견주어 이해관계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바른 길이기에 무망의 길을 가고 천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无妄之疾 勿藥 有喜
자연적인 병통(无妄之疾)은 약을 쓰려 하지말고(勿藥) 기쁨으로 받아들여라(有喜).
  천리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병, 즉 노환으로 천수를 다하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약이 개발이 되어도 불로초가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무의미한 연명을 위한 치료가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병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천리에의 순응이 아니라, 천수(天壽)가 다 하여 찾아오는 병을 거부하고 삶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삶의 집착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남는다고 하였다.

 

无妄 行 有眚 无攸利
천리에 순응(无妄)하는 것을, 억지로 행하려고 하면(行) 재앙이 있고(有眚) 유리함이 없다(无攸利)
  행(行)하려는 것은 의욕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역시 자연스러움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위(人爲)적인 것이다. 무망(无妄) 괘는 인간이 인위(人爲)로 만들려고 하는 탐욕에 의해서 천도(天道)가 무너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데, 천도를 따르는 것 조차 억지로 인위로 하려고 하니 더 모순적인 일이다. 재앙만 있을 뿐이며 유리할 것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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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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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 亨 出入无疾 朋來无咎 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初九】不遠復 无祇悔 元吉
【六二】休復 吉
【六三】頻復 厲 无咎
【六四】中行 獨復
【六五】敦復 无悔
【上六】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 以其國 君 凶 至于十年 不克征

  복(復)괘는 본래 자기 자리로 되돌아 오는 것을 말한다. 가야 할 길이지만 쉽게 갈 수 있도록 해 놓지 않았으며, 가지 말아야 할 길인데도 쉽게 갈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 하늘이 정해 놓은 길(道)이다. 땀 흘려 곡식을 얻기는 어렵고 도박과 투기로 재물을 불리기는 쉬워 보인다. 그러나 땀 흘려 일군 곡식은 해롭게 하고 얻은 것이 아니지만, 도박과 투기로 불린 재산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가져온 것이다. 어렵더라도 바른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도전을 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로또 복권을 긁는 기이한 일을 도모하는 것도 아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편안하고 일상적인 도를 따르는 것이니, 곧 송충이가 솔잎을 먹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

 

復 亨 出入无疾 朋來无咎 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복귀(復)는 성장기(亨)여야 한다. 들고 남에 병통이 없고(出入无疾) 벗이 찾아오는 것이니 허물이 없다(朋來无咎). 진정으로 복귀하는데(反復其道) 7일이 걸릴 것이나(七日來復) 그 시간이 지나가야 이롭다(利有攸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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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긋난 길로 들어섰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성장하는(亨) 시기여야 한다. 이미 때가 지나 어긋난 열매(利)를 맺어 버리면 늦으니,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미 회복불능의 시간을 지나지 않은 형(亨)의 시기라면 들고 나는 시행착오가 반복되어도 병통이 되지 않는다. 벗(깨우침)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히려 배움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7일은 음양오행을 말한다. 음양오행의 변화를 한번 거쳐야 진정으로 복귀가 가능한 까닭은 미련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어긋난 길의 끝으로 한번 가 보아야 미련을 두지 않고 “이 길이 아니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不遠復 无祇悔 元吉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오면(不遠復) 뉘우침도 늦춰지지 않을 것이니(无祇悔)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주역은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라고 본다. 그래서 첫 괘가 건(乾)괘로 시작한다. 오래지 않아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오면 시간을 그만큼 아낀 것이니 근원적으로 길하다.

 

休復 吉
여유로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休復)이 길(吉)하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돌아오는 길은 시간을 잃어버리고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급하게 돌아와 잃은 시간을 만회하려 급하게 서둘지 않아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다.

 

頻復 厲 无咎
절박한 복귀(頻復)는 위태롭기는 해도(厲) 허물은 없다(无咎)
  급하게 돌아오는 빈복(頻復)은 휴복(休復)이 아니라서 길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허물은 없다. 제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고집을 부리고 돌아오지 않으려는 것이 가장 흉(凶)하다. 그래서 “소인이 잘못을 범하면 허물을 덮으려고만 한다”[논어 제19편 자장 제8장]는 가르침처럼, 고치지 않으려는 것을 더 큰 잘못으로 본다.

 

中行 獨復
중용의 도를 따라(中行) 외롭더라도 돌아와야 한다(獨復)
  ‘모두가 YES 할 때 NO라고 하고 모두가 NO 하는데 YES’라고 하던 광고가 있었다. 아무런 신념이 없이 그렇게 한다면 소위 왕따가 될 뿐이다. 중(中)은 좌로 치우치지도 않고 우로 치우치지도 않은 곧음이니, 지극히 곧은 것을 말한다. 곧 중용의 도를 기준으로 삼아 옳다면 설령 외롭게 되더라도 돌아와야 한다. 바른길임을 알았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선택이 아닐 것이다.

 

敦復 无悔
후덕한 마음으로 돌아와야(敦復)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无悔)
  돌아오는 길은 실패를 하고 돌아오는 까닭에 원망을 담고 올 위험이 있다. 잃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왜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느냐는 등의 원망하는 마음이 갖지 않고 내 탓으로 여겨 자기를 책하는 반성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돈복(敦復)이다. 그래야 후회를 남기지 않고 좋은 경험이자 배움이었다는 감사한 마음일 수 있다.

 

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 以其國 君 凶 至于十年 不克征
혼미한 상태로의 복귀(迷復)는 흉(凶)하니 재앙이 있을 것이며(有災眚)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면(用行師) 마침내 크게 패할 것이다(終有大敗) 그 나라의(以其國) 임금(君) 역시 흉(凶)하게 될 것이니, 설령 10년이 된다 하더라도(至于十年) 이기지 못할 것이다(不克征)
  ‘이 길이 아니구나’하는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돌아오지 못하여 미련이 남은 까닭이다. 이렇게 미련을 남기고 돌아오면 다시 그 잘못된 길이 바른 길인지 혼란하여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흉하여 재앙이 따를 것이다. 전쟁에 나간 장군처럼 높은 지위의 사람이 혼미한 상태로 돌아와 착각 속에 오판하고 있으면 자기만 흉한 것이 아니라 결국 군사를 죽이게 만들고 그 임금까지도 해롭게 만들 것이니 흉하다. 10년의 시간은 준(屯)괘에서 말한 10년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안되는 것이지만 결국 통하게 만드는 지극한 정성을 의미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상황이 군사를 사용하는 전쟁이라면 지극한 정성으로도 통하지 않는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장수는 모두를 해롭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장군이 전 조선수군을 궤멸되었던 아픈 역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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