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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乾 元亨利貞
【初九】潛龍勿用
【九二】見龍在田 利見大人
【九三】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九四】或躍在淵 无咎
【九五】飛龍在天 利見大人
【上九】亢龍有悔
【用九】見群龍无首 吉

  하늘 아래의 모든 생명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씨(元)로부터 시작해, 꽃을 피우고(亨), 열매를 맺고(利), 소멸하게(貞) 하였다. 모든 생물(生物)이 이 변화의 법칙을 순리대로 따를 수 있을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싹이 텄으나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있고, 꽃이 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논어 제9편 자한 제22장]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열매를 거둬야 할 때가 있다. 겨울에 씨를 뿌리면 소용이 없으니,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시간만 맞추면 순조로울까? 비옥하지 않은 모래밭에 씨를 뿌리면 역시 소용없다. 무슨 일이든 무슨 생명이든 마땅한 장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때가 맞고 자리가 맞으면 모든 것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가? 봄에(시간) 비옥한 땅에(장소) 씨를 뿌려도 가뭄이 들면 소용이 없다. 하늘이 보살펴야 한다. 동물은 자존능력을 갖출 때까지는 어미가 젖을 먹이고 지켜주어야 한다. 시간, 공간 , 보살핌(사랑), 그것으로 완전할까? 사고(事故)가 없어야 한다. 토끼 새끼가 호랑이의 먹이가 되고, 호랑이 새끼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럼 그러한 사고는 어찌하여 생길까? 『중용』의 "하늘은 만물을 살리심을 그 재질에 따라 두터이 하시니, 바르게 심어져 있으면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중용 제17장]는 가르침을 언급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바른 길을 가도록 애쓰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乾 元亨利貞
시간(乾) 아래의 인간은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貞) 된다
  시간은 영원불변하며 완전하다. 시간은 변치 않고 영원히 흐르지만, 그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 생물은 영원한 것이 없다. 영원한 하늘의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이치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순탄하게 그 변화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선 시간에 맞추어 씨를 뿌려야 한다. 원형리정(元亨利貞)은 주역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며, 해석여하에 따라 전체의 의미를 다르게 하는 부분이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潛龍勿用
잠용(潛龍)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마라(勿用)
  물에 잠겨있는 용(潛龍)은 아직 나아가야 할 때를 만나지 못한 용이다. 용(用)은 동(動)의 뜻으로 해석한다. 잠용은 나아갈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새기면 될 것이다. 즉,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 때를 말한다.

 

見龍在田 利見大人
나타난 용이(見龍) 밭에 있으니(見龍在田)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밭은 용이 있어야 할 제 자리가 아니다. 용은 하늘을 날아야 한다. 씨를 뿌릴 시간이 도래하였어도 모래에 뿌리면 소용이 없다.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대인(大人)은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말한다. 즉, 현룡은 도움을 받아야 할 때를 말하고 있다.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군자(君子)가 되어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乾乾) 어두움(夕)을 경계한다면(惕) 위태로울지라도(厲) 허물이 없다(无咎)
  때를 만나고(天), 바른 자리를 잡고(地), 사람을 도움을 얻은(人)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이 이루어졌다고 만사 순탄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였다. 힘써 배워야 할 때를 말한다. 한편, 주역에서 말하는 군자(君子)는 어떠한 사람일가?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或躍在淵 无咎
연못에서 과단하게 비상해야(或躍在淵) 허물이 없다(无咎) 
  혹(或)을 문언전의 해석대로 ‘의심하다’는 의미의 혹(惑)으로 해석하면, 만반의 준비가 완료 되었더라도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한편, 혹(或)은 ‘갑작스럽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과단성있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지금은 나아가야 할 때다. 신중해야 하는가, 과단해야 하는가? 여기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자기로부터 찾아야 할 해답일 것이다. 과단성이 부족한 나는 후자의 의미로 새기며 읽는다.

  

飛龍在天 利見大人
하늘을 날고 있으니(飛龍在天)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거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전성기이다. 열매를 맺은 시기(利)이다. 그렇지만 도와준 대인(大人)을 만나야 이롭다고 한다. 전성기가 도래하였으니 그 복을 내가 누리는 것에만 써야 할까? 사람은 하늘(시간)과 땅(자리)에게 성취한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는 없지만,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는 내가 이룬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 있다. 은혜를 잊지 말라는 말이다. 재아가 3년상을 1년상으로 바꾸겠다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식으로 태어나 최소한 3년은 되어야 보살핌이 없어도 살 수 있게 된다. 재아도 부모에게 최소한 3년의 보살핌은 받지 않았더냐?"[논어 제17편 양화 제21장]. 이미 갖춰지면 고마움을 쉬이 잊어버리기도 한다. 비룡은 베풀어야 할 때를 말한다. 

 

亢龍有悔 
오를려고만 하는 용(亢龍)은 후회가 있다(有悔)
 
  문언전은 항(亢)을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나는 것을 알 지 못하며, 존재만 알고 없어질 것을 모르고, 얻는 것만 알고 내 놓을 줄을 모른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며,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러날 때가 되었다면 놓아야 한다. 때가 되면 부모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부모의 역할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면, 자식은 독립하지 못하고 마마보이가 되어버린다. 사람은 본시 영원을 갈망한다. 영원한 삶을 꿈꾸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영원한 안락을 꿈꾸곤 한다. 그렇지만,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은 흐른다」는 하늘의 법칙 밖에 없다. 그 하늘아래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법칙에 따라서.변한다. 항룡은 물러나야 할 때다.

 

見群龍无首 吉
용의 무리에(見群龍) 우두머리가 없으니(无首) 길(吉)하다
  세상에는 잠룡(潛龍)만 있지도 않고, 현룡(見龍)만 있지도 않고, 비룡(飛龍)만 있지도 않고, 항룡(亢龍)만 있지도 않다. 모두 함께 더불어 세상을 이룬다. 그 차이는 때와 때의 선택에 따라 다른 모습에 불과할 뿐, 모두가 같은 용이다. 우주의 시간에서 볼 때는 불꽃처럼 사라지는 찰나의 시간만 가진 별 다를 것 없는 생물이다. 그러니 나 잘났다고 머리를 내밀지 마라는 뜻이다.

  공자께서 소인을 하찮게 여기라고 소인과 군자를 구별한 것은 아니었다. “군자는 의로움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로움을 생각한다”고 하시고는 그러니 "소인을 우선 이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소인을 멸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자께서는 「사랑」을 말한 것이었지 「미움」을 말한 것이 아니셨다. 번지가 인(仁)을 여쭈자 공자 말씀하시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지(知)에 대해 여쭈자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知人)"라고 하셨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2장]

 

oon

  첫괘, 건(乾)괘의 효사에서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용어가 제법 있다. 길(吉)한 것과 흉(凶)한 것, 이로운 것(利), 허물이 없는 것(无咎), 후회가 있는 것(有悔),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厲) 등등, 구분히 모호한 한자어가 등장한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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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jung

고전을 읽을 때 극복하지 않으면 길을 헤메는 관문이 있다.
중(中)의 관념이 서지 않으면 혼돈으로 빠져든다.
중(中)에서의 직선은 가둠을 관통하는 있는 것을 말한다.
갇힌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통(通)하여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엇으로 그 가둠을 관통하고 있을까?

공자께서 "증삼아 내가 말하는 도는 하나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자 증삼은 "그렇습니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이 "뭔 말이야?"라고 묻자, 증삼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지극한 서(恕)야" 라고 하였다. [논어 제4편 이인 제15장]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을 동(同)하여 관통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중(中)은 가둠의 안과 밖을 마음으로 일관하여(恕) 관통하는 「진리」이다.

원효대사께서 마신 해골에 담긴 물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다.

사물은 변한 것이 없는데 (해골에 담겨있던 물은 똑 같은 물이었지만)
눈으로 보고나니 마음이 변하더라.

이 일화를 「일체유심(一切唯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대학』 역시 마음(心)을 강조한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대학 제7장 정심수신]


중(中)은 마음으로 통(通)하여야 알 수 있는 「진리」이므로
노엽고, 두렵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걱정스러우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공자의 말씀도, 석가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모두 머리에서 지워내어야 할 것이다.

 

용(庸)은 이러한 중(中)의 진리」에 조화롭게 맞추어 대응하는 「응답이다.
정이의 "바뀌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라는 설명은 오해를 일으키기 딱 좋다. 주희의 "일상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묶어 설명하려고 하니, 진순처럼 "오곡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은 만고의 일상이라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갈수록 이해하기만 어렵게 하였다.

 

위 속에 음식이 알맞게 차 있도록 유지시키는 것이 중용(中庸)은 아니다.
그러려면 그 중간을 맞추기 위해 하루종일 조금조금 먹고만 있어야 한다.
밥을 많이 먹고, 다시 많이 부족해지면 다시 과하게 채우는 것이 밥먹는 중용이다.
그래서 배가 부를 때를 만나고, 적당히 좋을 때를 만나고, 배가 고플 때를 만난다.
각 시기(時)에 알맞는 응답은 모두 다르다. 100년치 밥을 한꺼번에 먹고 한꺼번에 배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중용의 응답은 시공(時空)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즉, 용(庸)은 일반적 인식으로는 바뀌는 것으로 설명해야 오해가 덜하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지능도 모두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10대, 20대, 30대가 다르다.
이러한 다름을 분별(分別)하여 가장 적합하게 맞추어 조화롭게 응답하는 것이 중용이다.
병(病)을 기준으로 똑같은 약을 쓰는게 아니라,
각 사람의 특성을 기준으로 다른 처방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동양의학이었고,
역시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 제자들마다 그 다른 특성을 감안하여 다르게 가르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한 마디는 그 한마디 말과 글에만 갇혀서 이해하려면 오해가 생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무엇을 위해서 그러한 대화를 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증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대화는 상상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중(中)의 사유는 안과 밖을 통(通)하는 것이며,
중용(中庸)의 사유는 분별(分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어리석은 중생아 개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왜 모르느냐고 한다.
그렇지만 개와 사람이 교감하기 위한 육체사랑을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는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기도 하다는 중(中)이며,
진리에 반응하는 응답은 개와 사람이 다르다는 분별(庸-용)이다.

현상계가 만들어 내는 거짓에 갇혀있는 중생들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현상계가 만들어내는 것은 허상이라는 깨달음에 갇혀서,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무지(無知)도 생각을 가두고, 지(知)도 생각을 가둔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지(知)도 중용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까닭을 알겠구나. 지자(知者)는 과(過)하고 우자(愚者)는 부족하구나” [중용 제4장]


결국 유가의 진리는 세속과 초월의 한 쪽이 아니라 통(通)하는 것이기에,
속세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높고 원대한 이론으로 나아가 고원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로 돌아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것이 곧 도(道)이기도 하다.
현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도(道)이기는 하여도, 중용의 도리에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자기와 남은 별개의 분별(分別)된 개체이면서 또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에
개인(個人)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옷을 벗고 싶어도 아무곳에서나 나체로 있으면 안되며 예(禮)를 지켜야 한다.
물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중용에 따라 그 적합한 응답은 변한다.

그런데,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이 중용의 생기발랄함과 융통성이 없어져 버렸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말하였다 “큰 덕은 한계를 지켜야 하지만, 작은 덕은 들고 나는 것이다 [논어 제19편 미자 제11장]

송대 이후의 학자들이 이 장을 비난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작은 덕이 어찌 들고 날 수 있겠는가? 작은 덕이라고 해서 들쑥날쑥한다면, 곧 마음이 방종해져서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는 등등의 실랄한 비난을 받았다. 아마도 자하의 말이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 같다. 그러나 자하가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송대이후의 학자들도 고원함과 깨끗함을 추구할 수록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고원함은 사람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송대 이후의 학자들은 소인은 멸시하여 멀리하고, 선비라는 자들끼리만 어울리는 계급과 권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단발령이 일제의 강제라고 해서 선비들이 반발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의 명령이라고 해도 따를 수 없었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정절을 유린당한 여인처럼 실성하여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 목을 매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어찌 유학만 고여서 막히고 가두어 졌겠는가? 사찰과 교회도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과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가두고 막아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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