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

« 2024/4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80

  1. 2010.02.22 즉록무우(即鹿无虞)
  2. 2010.02.22 무성유종(无成有終)
  3. 2010.02.22 리상견빙지(履霜堅氷至)
  4. 2010.02.22 항룡유회(亢龍有悔)
  5. 2010.02.21 신심명(信心銘)
  6. 2010.02.20 좋은 것을 취한다
  7. 2010.02.20 욕구도 성(性) - 자연인성론(自然人性論)
  8. 2010.02.20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9. 2010.02.20 성(性)의 한계 - 자기 특별함의 갇힘
  10. 2010.02.20 성(性)을 보는 눈 - 진실함(誠)
  11. 2010.02.20 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 - 다름의 분별
  12. 2010.02.20 사람의 성(性)과 교육의 필요성
  13. 2010.02.20 생겨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하나가 아니다
  14. 2010.02.20 중용의 실천 - 하늘이 명한 그대로의 성(性)을 따르는 것
  15. 2010.02.20 유학의 상호관계성
  16. 2010.02.01 64. 未濟卦(미제괘) : 채워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다.
  17. 2010.02.01 63. 既濟卦(기제괘) : 가진자는 교만을 경계하라.
  18. 2010.02.01 62. 小過卦(소과괘) : 지나친 것 보다는 모자란 것이 낫다.
  19. 2010.02.01 61. 中孚卦(중부괘) : 주역의 가르침은 중용(中庸)이다.
  20. 2010.02.01 60. 節卦(절괘) : 물러나야 할 때라면 즐겁게 물러나야 한다.
  21. 2010.02.01 59. 渙卦(환괘) :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22. 2010.02.01 58. 兌卦(태괘) : 어떤 이는 성내고 어떤 이는 웃는다.
  23. 2010.02.01 57. 巽卦(손괘) : 1승 무패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99패 1승을 하여라.
  24. 2010.02.01 56. 旅卦(려괘) : 누구나 방황(彷徨)을 한다.
  25. 2010.02.01 55. 豊卦(풍괘) : 은혜를 외면하는 비정함의 말로(末路)
  26. 2010.02.01 54. 歸妹卦(귀매괘) : 시집 보내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며 도리이다.
  27. 2010.02.01 53. 漸卦(점괘) : 하늘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28. 2010.02.01 52. 艮卦(간괘) :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는 아름다운 끝맺음이란?
  29. 2010.02.01 51. 震卦(진괘) :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더 빨리 잡아먹힌다.
  30. 2010.02.01 50. 鼎卦(정괘) : 정당하게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는 방법은?
2010. 2. 22. 14:55

즉록무우(即鹿无虞)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4:55

     준(둔)괘 3번째 효사중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즉(即)은 뒤쫒는 것을 말하며, 우(虞)는 사냥할 때 몰이꾼 역할을 하던 관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몰이꾼이 없이 사슴을 쫒아가려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사냥을 하는 경우인데, 몰이꾼이 없기에 길을 잃어 곤경에 처하는 것이 쉽게 예견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대책없이 일을 벌이는 것’을 경고하는 의미로 종종 인용하곤 합니다.

   삼국지에도 이 명언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후한시대에 대장군 하진이 환관을 몰아내기 위해 동탁을 비롯한 전국의 군웅들을 모이라고 합니다. 그 때 하진의 부하였던 진림이 이 즉록무우(即鹿无虞)의 명언을 인용하여 하진을 만류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진림의 충언을 묵살했던 하진은 궁지에 몰린 환관들에게 살해되고, 낙양에 도착한 동탁이 실권을 장악하며 천하대란이 야기 되었습니다. 

   물론 알 수 없는 숲을 과단하게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걸어가는 길이라고 하여 ‘생각없이’ 따라가는 삶은 어쩌면 기계처럼 규격화된 부품이 되어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숲속으로 과단하게 뛰어드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는 ‘신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여기 즉록무우의 명언이 주는 가르침은 나쁜 결과를 경고하는 가르침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숲을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뛰어드는 것’을 경고하는 가르침으로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숲을 빠져 나올 수 없게 될 수 있음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 숲으로 뛰어드는 것은 오히려 응원하고 싶습니다...

'기타(其他) > 명언(名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운불우(密雲不雨)  (0) 2010.02.22
왕용삼구(王用三驅)  (2) 2010.02.22
무성유종(无成有終)  (0) 2010.02.22
리상견빙지(履霜堅氷至)  (0) 2010.02.22
항룡유회(亢龍有悔)  (0) 2010.02.22
:
Posted by 오빠야닷컴
2010. 2. 22. 14:34

무성유종(无成有終)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4:34

    곤(坤)괘의 세번째 효사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주역에서 언급할 경우에는 '혹종왕사 무성유종(或從王事 无成有終)'을 함께 인용하여 "신하된 자는 그 공을 취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만을 원하는 것이다”는 의미로 인용하곤 합니다. 공로와 칭송은 왕(王)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며, 왕을 따르는(從) 자는 왕이 원하는 그 결과를 수행했다는 것으로 족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역사적인 성과들을 실제 이루었던 사람보다, 임금의 업적으로 인식되곤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겠지만, 오늘날에도 조직의 구조가 상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줄기세포사건이 부각되지 않았다면 개개 연구원들의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지요...

 

   무성유종(无成有終)이 주역을 떠나서 독자적인 명언으로 단장취의하여 인용할 경우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종종 인용되곤 합니다. "만사는 완성은 없고 마침만 있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완성이 있을 수 있다면 모든 학문은 단 한 권의 책만 남게 될 것입니다. 과연 과학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요? 종래에 꿈이라 여겼던 일들을 목격하고 있는 역사속에 살고 있지만 이 시점의 기술이 완성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 계속되는 한 계속 더 발전하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완성은 없는 채로 말이죠.

   완성의 신념이 지나치면 위험해지기도 합니다. 이상적인 국가를 완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 가야만 할 것이지만, 정치와 사상에 완성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가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께서 몸을 완벽한 근육질로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 관리해주지 않으면 변합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정신적인 완성도 그렇습니다. 배움을 쉬면 역시 변합니다. 그래서 결코 완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최고의 부자에 이를 수는 있어도 최고의 부자를 완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간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타(其他) > 명언(名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운불우(密雲不雨)  (0) 2010.02.22
왕용삼구(王用三驅)  (2) 2010.02.22
즉록무우(即鹿无虞)  (0) 2010.02.22
리상견빙지(履霜堅氷至)  (0) 2010.02.22
항룡유회(亢龍有悔)  (0) 2010.02.22
:
Posted by 오빠야닷컴

    곤(坤)괘의 처음효의 효사입니다. '서리를 밟고 얼음이 단단해 질 것에 이른다'는 뜻이며, 이러한 문리적 해석에 큰 논란은 없는 편입니다. 다만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두고, '큰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하고, '모든 일은 반드시 그 조짐이 나타난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하고, ‘나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안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문언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쌓였던 것이다. 일찌기 해결하지 못한 까닭이다. 리상견빙지(履霜堅氷至)는 이러한 뜻이다.'

  인도의 네루가 옥중에서 저술한 「세계사편력」에 보면 프랑스 혁명을 화산폭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화산폭발이 갑자기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지의 심층부에서 오랜 세월에 거쳐 온갖 힘이 작용하여 화력이 모이고 지각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비로소 거대한 화염을 품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혁명의 힘도 사회의 심층부에서 오랫동안 배양되는 것이다.'

 

「중용」제 24장은 미신과 맹신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유학의 가르침과 배치되어 선비들에게 많은 의문을 낳기도 했습니다만, 반드시 조짐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지극한 진실의 경지에 이르면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니, 나라와 집안히 흥하려면 반드시 좋은 조짐이 있고, 나라와 집안이 망하려면 반드시 나쁜 조짐이 있어, 시귀(점치는 도구)에 나타나며 몸동작에 나타난다. 화와 복이 이르려 하면 좋은 일도 틀림없이 먼저 알고 나쁜 일도 틀림없이 먼저 아니, 지극히 진실하면 귀신과 같아진다.  

  사마광은 '성인은 멀리 내다보고 미세한 것도 신중히 대하지만, 대중의 식견은 가까이에만 미치므로 드러난 뒤에 대처하고자 한다'고 해설합니다. 보통의 사람에게 가장 많은 후회는 바로 이 때문에 생길 것 같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평소에 열심히 해 둘 걸’ 하는 후회없이 학창시절을 지나신 분들은 많지 않으시겠죠? 막상 몸이 아프고 나서야 건강에 힘쓰며, 소를 잃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려는 것이 바쁜 현대인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기타(其他) > 명언(名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운불우(密雲不雨)  (0) 2010.02.22
왕용삼구(王用三驅)  (2) 2010.02.22
즉록무우(即鹿无虞)  (0) 2010.02.22
무성유종(无成有終)  (0) 2010.02.22
항룡유회(亢龍有悔)  (0) 2010.02.22
:
Posted by 오빠야닷컴
2010. 2. 22. 13:09

항룡유회(亢龍有悔)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2. 13:09

1. 끝까지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게 된다.

2. 오를려고만 하는 용은 후회가 있게 된다.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명언은 주역 건(乾)괘의 꼭대기효인 상구(上九)의 효사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위의 두 가지 의미로 인용하는 것이 보통인데요. 1번의 의미로 인용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1번의 의미는,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는 내리막길만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남보다 일찍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반드시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다 일찍 물러나야 하는 경우와 같으니까요. 「주자어류」에서 '지극히 융성할 때 그 지나침을 살핀다'고 해설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물러날 줄 모르고 위를 향해서만 나아가려는 것을 경계하는 2번의 뜻으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후진기어를 넣을 줄 모르고 악셀만 밟는 것을 지적하는 경고인데요. 「문언전」에서 '항(亢)은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존재만 알고 없어질 것을 모르고, 얻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은 모른다'는 해설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2등은 3등을 돌아보기보다 1등을 추격하고자 하는 법입니다. 99석의 부자가 100석을 채우려 가난한 자의 1석을 빼앗는다 하였습니다. 자식이 성인으로 독립 할 때가 되었는데, 부모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고 마마보이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 역시 물러나지 않으려는 항룡(亢龍)의 마음일 것입니다.

 

  문장의 일부분을 떼어서 자기 본의로 해석하는 것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합니다. 사서(四書)에도 흔히 시경의 시(時)를 가져와 인용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강조하는데요. 실록에 보면 주역도 단장취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1번이 맞다, 2번이 맞다는 시비를 가리려 하지 마시고, 제3의 의미를 찾아내어 사용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글을 적는 용도로 만들어진 종이라고해서 글만 기록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을 피울 수도 있는 법입니다. 종이의 주인이 되십시오.

'기타(其他) > 명언(名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운불우(密雲不雨)  (0) 2010.02.22
왕용삼구(王用三驅)  (2) 2010.02.22
즉록무우(即鹿无虞)  (0) 2010.02.22
무성유종(无成有終)  (0) 2010.02.22
리상견빙지(履霜堅氷至)  (0) 2010.02.22
:
Posted by 오빠야닷컴
2010. 2. 21. 20:19

신심명(信心銘) 방담(放談)/자료(資料)2010. 2. 21. 20:19

01>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도(道)에 이르기가 어렵지 않으니, (나누어 한 쪽을) 택하려는 마음만 버리면 됩니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나누는) 마음만 없어지면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02>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털끝만치 나누어도 하늘과 땅 만큼 어긋나는 것이니
도가 앞에 나타나길 원한다면 따름과 거스럼을 두지 마십시오.


 

03> 違順相爭 是爲心病 不識玄旨 徒勞念靜  
떨쳐내고 따라가는 것이 서로 다투어, 이것이 마음에 병이 되는데,
현묘한 (도의) 뜻을 알지 못하니 애써 생각만 고요히 하려고 합니다.

 

 

04>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由取捨 所以不如
(도는) 원만함이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데,
취하고 버리는 그 나눔으로 말미암아 같아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05> 莫逐有緣 勿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세간의 인연에도 따라가지 마시고 빈 곳에 살려고도 마십시오. 
한 가지로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도를) 다하게 됩니다.

有緣(유연) : 존재하는 것은 인연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연이라고 한다.
空忍(공인) : 공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공인이라고 한다.

 

06> 止動歸止 止更彌動 唯滯兩邊 寧知一種
(마음) 움직임을 그쳐 멈춤으로 돌아가면 멈춤이 또한 큰 움직임이 됩니다.
그렇게 양변에 매달리면 어떻게 하나임을 알겠습니까!

 

 

07> 一種 不通 兩處失功 遺有沒有 從空背空
하나로 통하지 못하면 양쪽 모두 그 공덕을 잃습니다.
있음을 버리려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려면 공함을 등집니다.


 

08> 多言多慮 轉不相應 絶言絶慮 無處不通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점점 더 상응하지 못하니,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통하지 않는 곳 없습니다.

 

 

09> 歸根得旨 隨照失宗 須臾返照 勝脚前空
근본으로 돌아가 그 뜻을 얻고 비춤을 따라 종지를 잃으니 
잠깐 돌이켜 비춰봄이 공함을 앞세우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10> 前空轉變 皆由妄見 不用求眞 唯須息見
공을 앞세워 바꿔 변하려는 것은 다 망령된 생각 때문이니 
진리를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생각을 쉬십시오.

 

 

11> 二見不住 愼莫追尋 才有是非 紛然失心
나뉘는 생각에 머물지도 말며 삼가하여 쫓아가 찾지 마십시오. 
잠깐의 시비가 일어나도 어지러워 본 마음을 잃습니다.

 

 

12> 二由一有 一亦莫守 一心不生 萬法無咎
둘은 하나가 있는 까닭이니 그 하나마저도 지키지 마십시오. 
하나라는 마음도 생겨나지 않아야 만법이 허물이 없습니다.

 

 

13> 無咎無法 不生不心 能隨境滅 境逐能沈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생기나지 않으면 마음도 없음이니 
주관은 객관과 함께 소멸하고, 객관도 주관과 함께 잠깁니다. 

 

 

14> 境由能境 能由境能 欲知兩段 元是一空
객관은 주관이 있어 객관이며, 주관은 객관이 있어 주관이니 
양단을 알고자 해봐도 본래 하나의 空입니다. 

 

 

15> 一空同兩 齊含萬象 不見精麤 寧有偏黨
하나의 공은 양단을 함께하여 삼라만상을 모두 포함합니다.
세밀하고 거칠음을 볼 수 없으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습니까.

 

 

16> 大道體寬 無易無難 小見狐疑 轉急轉遲
대도는 본체가 넓어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으니 
좁은 생각으로 여우처럼 의심하니 서둘수록 더디어 집니다. 

 

 

17> 執之失度 必入邪路 放之自然 體無去住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버려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놓아 버리면 자연에 따라 본체가 가거나 머무름이 없습니다. 

 

 

18> 任性合道 逍遙絶惱 繫念乖眞 昏沈不好
성에 맡기면 도와 합해지고 한가이 거닐면 번뇌가 끊어지니 
생각에 매이면 진리를 벗어나 어둠속에 빠져 좋을 것이 없습니다. 

 

 

19> 不好勞神 何用疎親 欲趣一乘 勿惡六塵  
정신이 힘든게 좋지 않은데 어찌 가까이 하거나 멀리하고자 하겠습니까?
일승(궁극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인식대상)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20> 六塵不惡 還同正覺 智者無爲 愚人自縛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바른 깨달음과 함께 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하려함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를 묶어둡니다. 

 

 

21> 法無異法 妄自愛着 將心用心 豈非大錯
법은 다른 법이 없는데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을 가져 
마음을 써서 마음을 가지려니 어찌 큰 그릇됨이 아니겠습니까. 

 

 

22> 迷生寂亂 悟無好惡 一切二邊 良由斟酌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나뉘고 깨치면 좋고 나쁘고가 없으니 
모든 둘로 나뉨은 실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23> 夢幻空華 何勞把捉 得失是非 一時放却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십니까?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리십시오. 

 

 

24> 眼若不睡 諸夢自除 心若不異 萬法一如
눈에 만약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습니다. 

 

 

25> 一如體玄 兀爾忘緣 萬法齊觀 歸復自然
한결 같음은 그 본체가 현묘하여 홀로 인연을 잊으니 
만법을 모두 같게 보면 그 되돌아감이 자연스럽습니다. 

 

 

26> 泯其所以 不可方比 止動無動 動止無止
모든 까닭을 없애버리면 견주어 비교할 바가 없어지니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습니다. 

 

 

27> 兩旣不成 一何有爾 一亦沒處 窮極自知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어찌 하나가 있겠습니까. 
하나마저 없애버리면 궁극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28> 究竟窮極 不存軌則 契心平等 所作俱息
궁극으로 이르는 정한 법칙이 있지 않으니 
마음을 묶어 평등케 하고 짓는 바를 함께 쉴 것입니다. 

 

 

29> 狐疑淨盡 正信調直 一切不留 無可記憶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곧게 어울리니 
일체에 머물지 아니하면 기억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30> 虛明自照 不勞心力 非思量處 識情難測
텅비어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쓰고 마음 쓸 일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감정으론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31> 眞如法界 無他無自 要急相應 唯言不二
진실하고 변함없는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으니 
급히 상응하고자 하거든 오직 둘 아님을 말하겠습니다. 

 

 

32> 不二皆同 無不包容 十方智者 皆入此宗
둘 아님은 모두가 함께하니 포용하지 않음이 없고 
온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모두 이 근원으로 들어옵니다. 

 

 

33> 宗非促廷 一念萬年 無在不在 十方目前
근본은 빠르지도 늦지도 않으니 한 생각이 만년이고,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으니 온 세상이 바로 눈 앞에 있습니다

 

 

34> 極小同大 忘絶境界 極大同小 不見邊表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습니다. 

 

 

35> 有卽是無 無卽是有 若不如此 不心須守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만약 이 같지 않다면 결코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36> 一卽一切 一切卽一 但能如是 何慮不畢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다만 능히 이와 같다면 마치지 못할까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37> 信心不二 不二信心 言語道斷 非去來今
믿는 마음도 둘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언어의 길이 끊기면 떠나고 오고 멈춤이 없습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010. 2. 20. 20:04

좋은 것을 취한다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20:04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로 대표되는 성론(性論)에 대해서는 단순히 설명하기가 불가능하고, 학자가 아니라면 굳이 파고들 이유도 없겠지만,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기에,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앞의 글에서 강조했지만, '중용'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원적인 ‘맞춤형 진리’를 추구합니다. 

어떤 분은 공자께서는 「성삼품설」을 주장하였다며, 논어 제17편 양화 제3장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가장 총명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 바뀌지 않는다

이 가르침의 의미가 성삼품설의 논거라고 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가장 총명하고 가장 어리석은 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가 본래 담고 있는 속 뜻일 것입니다.
「전습록」에 의하면 가장 총명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애공이 정치의 조언을 구하자 공자께서는
'곧고 올바른 사람을 부정직한 사람 윗자리에 두는 것'을 말씀합니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9장]
즉, 부정직한 사람을 축출하거나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변화의 가능성을 잊지 않으려 하며, 함께 잘 되는 것을 도모합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신 성선설을 일반적 진리라는 의미로 해석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장점만을 취한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 문헌들에 나타나는 공자의 제자들을 한번 보겠습니다.
자로는 끝까지 급하고 용감합니다. 그 기질 때문에 결국 살해당해 죽게 됩니다. 
자공은 끝까지 총명하고 활달함을 잃지 않습니다.
증삼은 끝까지 근신하고 느리며, 재아는 날래고 괴팍합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 기질이 바뀐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공자께서는 기질이 지나치지 않도록 경계는 시켰으나 억누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각자의 장점을 더욱 북돋아 주었습니다.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고 나은 점이 있습니다.
공자께서도 안회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점을 언급하십니다.

장점을 취한다는 것은 유학에서 아주 중요시 하는 가르침입니다.
공문자는 태숙질을 이혼시키고 자기딸을 시집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공자께서는 '문(文)'이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자공이 의아하여 그 까닭을 묻습니다. [논어 제5편 공야장 14장]

그는 부지런하며 배움을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로 생각지 않더구나

삼인행(三人行)의 가르침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논어 제7편 술이 제22장]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착함은 따르고, 나쁜점은 바로잡는다.

 

고전을 배우면서 좋은 가르침이 있으면, 그것을 취해 나의 배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배움보다 공자라는 ‘인물’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공자의 그 내심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크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공자의 사람됨에 관계없이, 그 가르침이 깨우쳐 주는바가 있다면 그것을 취할 뿐입니다.
기독교, 불교가 좋고 나쁘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성경과 불경의 가르침이 좋다면 그것은 취해 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움의 중용입니다.  
 

‘사람에게 집착’하여 못나게 만들고 미움의 근거로 삼으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설령 그 말이 이완용에게서 나왔더라도 바른 말이라면 배우는 것이며,
설령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더라도 바르지 않다면 버리는 것입니다.
왕양명의 유명한 말이 그런 뜻입니다.

마음에 구하여 옳지 않다면,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더라도 옳다 할 수 없다

 

『논어』를 읽고 바른 가르침과 지혜를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공자를 흠모하거나, 공자를 미워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의 법어인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 끝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말만 듣고 사람을 받들지 않아야 하며,
사람이 좋지 않다고 그의 바른 말을 버려서도 안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3장]

:
Posted by 오빠야닷컴

살고자 하는 뜻은 풀이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살고자 하는 뜻은 물고기나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모두 하늘이 준 귀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고기를 잡으셨습니다.

공자께서 낚시는 하셨으나 그물로 잡지는 않으셨다. 새를 잡았으나 둥지의 잠자는 새를 쏘지는 않으셨다. [논어 제7편 술이 제27장]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토끼를 보면 연민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토끼보다 나쁜 생명일까요?
호랑이는 제 성(性)을 따르는 것 뿐입니다.

 

성(性)을 따른다는 것은,
하늘이 준 그대로의 자연(自然)스러움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性)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는데 있어서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중용(中庸)'을 이탈하게 합니다.


고상함과 고원함을 추구하여,
인간을 채식동물로 만들려고 하고,
야성을 극도로 추구하여
다른 생명들의 씨를 말려버리려고도 합니다.

 

욕구도 성(性)입니다.
욕구를 아예 없애는 것은 성(性)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중용의 사유는 모자람도 경계하고, 지나침도 경계합니다.

욕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거나 지나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유학은 차별적 사랑도 긍정합니다.
하늘이 준 감정(情)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어미가 제 새끼를 우선 돌보는 것은 자연(自然)스러움입니다.
문제는 '고도의 지능'이 개입하여
다른 새끼를 우선 돌보라고 하거나,
나를 위해 자기 새끼를 죽여도 괜찮다는,
그런, 치우침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합니다.

 

혹시 오해가 생길까 싶어 부연하고 가야겠습니다.

‘중용’의 정신은 보편적 타당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태가 틀렸다’는 일반론으로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 나를 떠나 있는 진리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지극히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의 성(性)을 밝혀

모자라지도 치우치지도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제반 사정을 감안하여 가장 마땅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출발점이며,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가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 기준을 세우는데 있어서 지극히 진실한 마음으로 접근하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남들의 이목, 선입견 등등의 모든 속박을 걷어내고,

나만이 알 수 있는 내면의 울림으로, 진실한 성(性)을 따르는 마음으로,

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로 접근하는 것이 중용입니다.

 

중용 제1장입니다.

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을 삼가고 두려워해야하니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드러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곳은 없고 [莫見乎隱]

나타나지 않는 그 곳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다 [莫顯乎微]

'간상(赶上) > 보충(補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의 시간 건(乾)  (2) 2010.09.28
좋은 것을 취한다  (0) 2010.02.20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0) 2010.02.20
성(性)의 한계 - 자기 특별함의 갇힘  (0) 2010.02.20
성(性)을 보는 눈 - 진실함(誠)  (0) 2010.02.20
:
Posted by 오빠야닷컴
2010. 2. 20. 20:01

성(性)의 한계 - 그 기쁨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20:01

발자국

한계란 명칭은 대개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시작할까 합니다.
즉, ‘자유’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자유란 조금 쉬운 느낌이죠. 새처럼 훨훨~ 나는 것 같습니다.
갇혀있는 새장을 없애버리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요?

자유를 찾음은 갇힌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로든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갇힌 것을 떨쳐버리는 예를 하나 들기로 하겠습니다.

 

담배로부터 자유를 한번 찾아볼까요?
먼저 담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누가 자유롭나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담배를 끊기가 힘들다는 마음을 짐작정도만 할 것 같습니다.
그 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담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담배가 뭔지 모르는 두세살된 아이나, 담배를 접해보지 못한 비문명국의 어른이나,

모두 완벽하게 담배로부터는 자유롭습니다.

 

번뇌로부터는 어떻게 자유를 찾겠습니까?
담배로부터의 자유가 힌트가 될 것입니다.
번뇌를 인식하지 못하면,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이름이 있습니다. 백치하고 비슷합니다.
백치가 되어 인식이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백치하고 붓다는 같은 뜻,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앎을 통해서도 백치가 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본래 함께 있었습니다.
'도(道)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억나시는지요?

 

미쳤다는 의미가 싫어지는 것은
말과 문자의 좋고 나쁨에 갇혀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학이 추구하는 미침을 보겠습니다.
정상인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미치기도 합니다. 배움에 미치기도 합니다.
공자께서 '석달동안 고기맛을 잊었다'는 비유와도 연관됩니다.
순간을 집중하게 마음을 붙드는 것이 생기면(미치게 만들면),
다른 것에는 아무 생각도 미치지 않습니다.

 

유가의 선비들이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이 순간을 지극히 열심히, 집중하여 사는 것,
즉, 현재의 삶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참된 자유로움을 찾아갑니다.
이것이 중용을 실천하고 사는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억지로 가는 길일까요?
대학에 가기 위해 시험문제에 몰두하는 것과 같을까요?

욕구를 계산하는 마음에서 생긴 집중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결코 오래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기쁨에 미쳐,

현재의 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을,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가의 도(道)는 꽉 움켜쥐고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순간을 사랑하면서 평생 나아가는 행위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도(道)라는 한자가 우리말의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문어

눈이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목이 색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귀는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물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이를 포태할 수 없습니다.
말은 완전하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귀도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머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
상상만은 한계가 없습니다.


상상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되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로
중용 제4장에서 앎과 모름을 지적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知者過之]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하구나 [愚者不及也]

그럼, 지나치지도 모자람도 없는 앎이란 무엇입니까?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재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것은 뭐가 무섭습니까?

‘앎의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사실은 더 무섭습니다.

재물은 있는 척 하더라도 금방 들통나지만,

아는 척 하는 것은 금방 들통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말 안다고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일으킵니다.

 

정치인 MB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정치인 KH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속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속에 있는 속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아는척을 합니다. 그리고 타방을 미워합니다.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말 잘하는 사람의 말재주에 걸려들어 냉정한 판단력을 잃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보다 특별하다'는 상상과 결부시킵니다.

나는 특별하고 너는 바보입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시비를 정확히 가립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의도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너는 한심하고 무지합니다.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미워하는 첫번째도 ‘짐작으로 다 안다는 사람’입니다.

자공아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추측하여 다 안다는 사람,

불손함을 용기라 하는 사람,

들추어내는 것만 정직이라 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논어 제17편 양화 제24장]

 

물 속에서 좀 더 오래 잠수할 수는 있어도
물 속에서 물고기처럼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성(性)이 가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성(性)에 의해
물 속에서 더 오래 잠수할 수 있는 차이가 있는 것인지,
나는 물속에서도 물고기처럼 살 수 있는 것인지
그 선을 분명하게 감지해 가는 것이 중용입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poolleaf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성(性)을 따르는 것으로 관점을 돌려보겠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하늘이 준 것을 한번 따져 보겠습니다.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닌 게 무엇입니까?
생명, 사람, 이세상, 남자, 부모님 등은 쉽게 보입니다.
도(道)의 '떨어질 수 없음'을 접목하여 안목을 넓히면,
생명만 준 것이 아니라 죽음이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남성만 준 것이 아니라 여성도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나중에는 사람만 아니라 자연도, 다른 생명도, 다른 사람도 함께 붙여준 것으로 의미를 넓혀가야 합니다만,

지금은 제한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으로 들어와서 생각해 봅니다.
감정도 욕구도 지혜도 모두 하늘이 준 것입니다.

먹기 싫다고 먹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싫다고 자지 않을 수 없고,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정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입니다. 
 

가장 쉽게 정의하면 ‘태생적 한계’가 성(性)에 가깝습니다.

이쯤에서 장자의 설명을 빌려오겠습니다.
나를 엮고 있는 백개의 뼈마디와 아홉개의 구멍 오장육부들 중에서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게 있습니까?
하늘은 우위와 열위로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르게 만들어 역할을 달리하게 해 조화로움을 도모했습니다.

 

태생적 한계가 성(性)이지만,
태생적 한계가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입니다. 
눈과 귀가 똑같이 소중한데,
눈이 들을 수 없다고 속상해 하고,
귀가 볼 수 없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인간이 머리가 중용을 벗어나 만들어낸 것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욕구, 곧 도(道)와
성(性)을 따르지 않는 욕구, 도(道)가 아닌 욕구가 있습니다.

‘자기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인식이 그렇게 만듭니다.
나는 특별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다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예뻐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로또에 당첨될 수 있습니다.

… 
나는 특별해서 새처럼 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와 너는 다를 뿐입니다.
나은 것도 있고, 모자란 것도 있고, 그렇게 다를 뿐입니다.
결국 함께 있습니다.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성(性)을 따르는 것은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예시한 몇 가지가 아니라, 안목을 넓혀 더 많이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중용에서는 거짓과 위선을 걷어낸 순결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중용 제22장에서 말합니다.

오직 세상에서 가장 지극한 진실함(誠)으로서
그 성(性)을 다하게 할 수 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사람답게 살았다고 하는 평가에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다르게 부여받은 천명을 알고, 그 성(性)에 따라 내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고통스런 의무의 길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길입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人莫不飮食也]
맛을 아는 사람이 드물구나 [鮮能知味也]

중용 제4장에 나오는 공자 말씀입니다.

그래서 밥먹는 중용을 한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왜 밥을 먹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배가 고픈 고통을 주어 결국은 먹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에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왜 변을 누어야만 하나요? 그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고통을 주어 결국 화장실로 향하도록 합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칠 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구속하니까요. 울면서 그 구속을 따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남는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입니까? 천도를 따르는 것, 곧 정해준 성(性)을 따르는 것은 기쁨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을 먹어 기쁨을 찾기 위해 훔쳐옵니다. 변을 누어 기쁨을 찾기 위해 화장실에 있는 놈을 끌어냅니다. 왜요? 천도를 따르는 것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성(性)을 따름을 고집함으로써 성(性)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와 너는 다른가요? 도(道)의 정의를 연결시켜보겠습니다. 나와 너는 ‘떨어 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태초이래로 '너'가 없는 '나'만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천도를 따라 기쁘고, 너도 천도를 따라 기쁘고, 그럼으로써 함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논어 첫장의 가르침’을 통해 연결해보시면서 그림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맛을 안다는 것'으로 넘어오겠습니다.

맛이란 것은 주관입니까? 객관입니까?
사람마다 달리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살던 지역, 문화, 먹어왔던 음식 등등에 따라서 모두가 다릅니다. 
나에게도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배가 고플 때, 배가 부를 때, 기분 좋을 때, 오랫만에 먹을 때, 언제나 틀립니다.

 

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람의 갇힌 머리는 맛을 일반화시키려 하고 객관화 시키려 합니다.
내가 맛있다고 느낀 음식을 상대가 맛있다고 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반드시 같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경우가 사실은 너무 많습니다.

‘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똑같이 알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도 없습니다.

더 많이 아는 것도 있고 적게 아는 것도 있고, 사람마다 모두 틀린게 정상입니다.

엄친아(엄마친구의아들) 보다 못한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못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나와 똑같을 수 있는 사람은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잘나고 못난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맛을 안다는 것은 사람마다, 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분별 이후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으로 옮겨와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여 조화를 이룰려고 하는 것이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군주의 도(道)가 우월하고, 남편의 도(道)가 우월하고, 군자의 도(道)가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만든 것은 우위가 아니라 다름입니다.
우위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논어 제11편 선진 제15장을 통해서, 유학의 공경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께서 "유(由)는 어찌하여 내 집에서 비파를 타느냐?"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由)의 성취는 대청에 올랐고, 방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니라”

자로는 공자에 9살 적은 나이 많은 맏형입니다.
그런데도, 한소리 들었다고 까마득한 학생들이 우습게 대하기도 합니다.
보다 못한 공자께서 조정에 나섭니다.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대청에서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려했던 것이니, 너무 그러지들 말라고 합니다.

 

자로가 나이를 내세우며 호통을 치고 복종시켜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공자께서 다른 제자들을 혼내줘야 정상이지 않을까요? 
유학에서의 분별은 '복종'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성별, 지위 등등의 분별은 언제나 '조화'를 향해 지향하고 있습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알깨기

인간도 동물입니다.

‘고도의 지능’이라는 특이한 성(性)을 부여받은 동물입니다.

특이할 뿐인데,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정(情)이라는 것은 인간의 성(性)이 아니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서 정(情)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기계가 되고,

인간에게서 이성(理性)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동물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순환하고 있고,

유학의 발전과정도 그러했습니다.

 

흥에 취하고, 신나하고, 울먹이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단단했고, 한번도 ‘음악’에 대해서 논한적이 없었습니다.

감성과 이성의 중용을 이탈하여, 이성중심으로 흘렀고,

조선조의 선비는 판박이 기계의 모습으로 꽉 막힌 사람들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情)으로 치우치면, 인간은 동물로 접근해 갑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명(命)하여 준 차별화된 성(性)은 ‘고도의 지능’입니다.

이 녀석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참으로 위험합니다.

불가능을 모르고, 한계를 모릅니다.

인간을 기계보다 더 한 기계로 만들 수도 있고,

인간을 동물보다 더 못한 생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유학의 배움은, 하늘이 준 ‘고도의 지능’을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中庸)에 맞추는 것입니다.

 

‘고도의 지능’은 해야할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귀’를 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역할은 짐승과는 다르게, 기계와도 다르게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은 다르지만, 귀가 맛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고도의 지능’은 제 한계를 모릅니다.

이 괴이한 녀석을 그대로 방치해 버리는 것은,

눈이 들을려고 애쓰게 만드는 것과 같고,

귀가 냄새를 맡으려 애쓰게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모든 조화가 깨어지고 부서져 버립니다.

 

그래서 중용 제1장에서 강조합니다.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행하도록 다듬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taeguk

『중용』시작부의 도(道)의 정의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도(道)는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간단히 생각하면 쉬우면서도, 어려운 얘기입니다.

유학경전에서 A = B로 완전하게 정의를 시도한 부분은

이 「도(道)」의 정의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도(道)입니다.

조금 쉽게 다가올까 싶어 ‘아담과 이브’를 등장시킵니다. 태초이래로 생겨난 인간은 한 명일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체가 느껴지는 것 뿐 아니라, 무형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마음조차도 그러합니다.

「사랑」과 「미움」이 별개요, 「고통」과 「쾌락」이 별개일까요?

사랑의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크게 키우면 미움이 보다 선명히 나타납니다. 고통이라는 마음 하나만 생겨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쾌락과 함께 생겨나 있습니다. 고통의 크기를 크게 키우면 함께 있었던 쾌락이 더 선명히 나타납니다.

 

떨어질 수 없다’는 것, ‘관계가 없는 그것 뿐인 것은 없다’는 이 관념이 정립되면, 모든 것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사유로 연결되어 갑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국의 음양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무극에서 생겨난 ‘태극’의 개념과 연결되며, 유가, 도가, 불가의 가르침도 역시 이 개념으로 함께 통(通)합니다. 삶과 죽음도 함께 있고, 깨달음과 무지도 함께 있고, 나와 너도 함께 있고, 선과 악도 함께 있고, 유와 무도 함께 있고, 현재와 비현재도 함께 있습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도(道)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도덕경』의 첫장입니다.

도(道)라는 도(道)는 참된 도가 아니며, [道可道非常道]
이름으로 정해진 것은 진정한 그것만이 아닙니다. [名可名非常名]
천지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은 본래 이름이 없었는데 [無名 天地之始],
이름으로 가두어버림으로써 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有名 萬物之母]

그러기에 가두지 않음으로 그 신비함을 보아야하고 [故常無欲以觀其妙]
가두어져 막혀 있는 것도 보아야 합니다. [常有欲以觀其]

‘갇히지 않음(무욕)’과 ‘갇힘(유욕)’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생긴 것이지만 이름이 다릅니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이 둘도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있으니 혼란합니다 [同謂之玄]
아득하고 또 아득합니다. 모든 신비의 문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중용』에서 말하는 도(道)와 다른가요?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는 중용의 설명에 덧붙여,

도(道)라는 그 개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만 떨어질 수 없다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진정한 그것과 갇혀진 그것, 역시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나무01

교과서『중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도(道)를 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도(道)라는 것은 어떠한 것임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도(道)를 행한다는 것」의 개념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야 할 것은 오직 그대로의 성(性)입니다.
스승도, 부모도, 남편도, 조상도 아닙니다.
책도, 좋은 말도, 인격자도, 지식도 아닙니다.
머리도 아니고, 육체도 아닙니다.
오직 성(性)입니다.

 

순자의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도(道)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의(義)를 따르지,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유가는 공자를 칭송하고 존경하지만, 공자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성(性)'을 따릅니다. 곧 도(道)를 행합니다.

 

오직 성(性)만을 따른다는 것은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에서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텅 비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치우침을 일으키는 것을 비워버리고
성(性)을 진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정반대에 있는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라는 유가의 일신(日新)이나,
날마다 벗어내라는 도가의 일손(日損)이나
가두고 있던 것을 떨쳐내는 유가의 유위(有爲)와
가두고 있던 것을 비워내는 도가의 무위(無爲)는
같은 말, 다른 표현입니다.

 

알아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는 것 모두를 말로 완벽하게 할 수 있습니까?

들어도 모든 것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렇게 말이라는 녀석과 귀라는 녀석은

또한, 눈이라는 녀석과 머리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로

제가 가진 성(性)에 따라 한계가 있습니다.

 

머리로만 만나려는 사람은
그대로의 성(性)도 머리만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다는 맹신에 갇힌 것일지 모릅니다.

 

똑똑한 자공이 말(言)에 갇혀가고 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으려 한다. (중략)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이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나
하늘은 아무 말이 없지 않느냐?" [논어 제17편 양화 제19장]

:
Posted by 오빠야닷컴
2010. 2. 20. 19:11

유학의 상호관계성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19:11

논어 첫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배워서 수시로 따라해보면 어찌 기쁨이 없겠는가? (알아주는 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도 찾아주는 벗 있으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생길리 없으니 또한 군자이지않겠는가?"

 

① 나의 기쁨

② 더불어 나누는 즐거움

③ 자존을 잃지 않는 나

 

인(仁)으로 대입해 보겠습니다. 인(仁)을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더불어 함께 즐거우면 좋지만, 설령 그렇지 못해도 나의 기쁨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의(義)로써 대입해 보겠습니다. 의로움을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알아주면 즐거움을 나누지만, 알아주지 못해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예(禮)로써 대입해 보겠습니다. 예를 행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호응해 주면 함께 즐겁지만, 알아주지 않는다고 고개를 더 숙이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효도, 공경, 남편의 도리, 아내의 도리, 자식의 도리모두모두 같은 구조로 대입하시면 될 것입니다.

 

자식의 도리는 스스로의 기쁨입니다. 신하의 도리도 스스로의 기쁨입니다. 장자의 비유가 부분적으는 참 적절한 것 같습니다.

 

신체의 백개의 뼈마디와 오장육부를 통틀어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열은 없습니다. 다만, 다를 뿐입니다. 다르기에 각자 다른 역할을 합니다.

위가 잘 움직이면 대장이 잘 이어받아 순조롭게 이어주지만, 위가 잘 소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대장은 맡은 역할에 따라 최선으로 움직입니다.

 

그림그리기가 더 어렵네요. ㅠ.ㅠ

회색사람, 검은색 사람, 노란색 사람 세 종류가 있습니다. ㅠ.ㅠ 

:
Posted by 오빠야닷컴

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初六】濡其尾 吝
【九二】曳其輪 貞吉
【六三】未濟 征 凶 利涉大川
【九四】貞吉 悔亡 震用伐鬼方 三年 有賞于大國
【六五】貞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上九】有孚于飲酒 无咎 濡其首 有孚失是

  미제(未濟)괘는 소과(小過)괘 중에서 소(小)를 의미하니 부족한 것이다. 앞의 기제(旣濟)괘는 이미 성취한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서 지나침(過)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래서 덜어내야 한다. 미제(未濟)괘는 반대로 부족한 것이니(小) 채워야 한다. 주역의 후4괘는 모두 중용(中庸)을 말하고 있다. 중용을 강조하며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부족한 자(未濟)는 나아가야 하나(亨) 작은 여우(小狐)가 거의 마른 강을 건너다(汔濟) 그 꼬리를 적시게 되면(濡其尾) 유리함이 없다(无攸利).

  여우는 물을 건널 때 꼬리를 치켜들고 젖지 않도록 한다고 한다. 만일 젖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깊다면 건너지 않고 되돌아 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영리한 여유가 말라서 물이 없는 강을 건너면서 어찌 그 꼬리를 적시게 되는가? 부족한 자가 얻으려고 급히 서둘러 나아가는 까닭이니 조심하고 신중하여야 한다. 조심성이 없으면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여우가 마른 강을 건너다 꼬리를 적시기도 한다.

 

濡其尾 吝
그 꼬리가 젖었으니(濡其尾) 궁색(吝)하다.
  기제(既濟)가 끄는 수레는 이미 성취한 가득찬 수레여서 그 꼬리를 적셔도 허물이 없지만, 미제(未濟)가 끄는 수레는 채운 것이 보잘 것 없는 수레인데 그 꼬리를 적셨으니 참으로 궁색하다. 기제는 이미 성취하였으니 가볍게 털 수 있어야 하고 미제는 성취하지 못했으니 무겁게 붙잡고 신중하고 조심하여야 한다. 가진자는 가진 것을 가벼이 여기고 부족한 자는 가진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이다.

 

曳其輪 貞吉
그 젖은 수레를 끌고가면(曳其輪) 끝이 길하다(貞吉).

  미제자(未濟者)가 그 꼬리까지 적셔진 수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고 가면 마침내 길하다 한다. 설상가상의 상황을 만났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곧 좋은 상황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려움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또한 중용(中庸)이니, 상황은 변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비가 오기도 하고 맑은 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未濟 征 凶 利涉大川
부족한 채로(未濟) 계속 그 상태로 나아감(征)은 흉(凶)하니 큰 내를 건너야 이롭다(利涉大川).

  꼬리까지 적신 수레를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끌고가는 것을 말함이니 그것은 흉하다. 다시 채워넣고 채워서 기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기회가 생긴다면 과감하게 부딪혀야 하니, 큰 내를 건너는 과단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꺾이면 하늘이 부족하다고 채워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중용』에 “잘 심어져 있는 것은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중용 제17장]고 하였으니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하늘조차 외면할 것이다.

 

貞吉 悔亡 震用伐鬼方 三年 有賞于大國
그래야 마침내 길하고(貞吉) 후회가 없어지리니(悔亡) 우뢰와 같은 기상으로 귀방을 정벌하는데 일조하면(震用伐鬼方) 3년이 걸릴 것이나(三年) 대국으로부터 상이 있을 것이다(有賞于大國)

  대국으로부터 상을 받음은 은나라 고종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이니, 곧 미제에서 기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3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디고 과단하게 나아가 수레를 채운 것이다. 미제에서 기제로의 전환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쉬운 일이 아니다. 과단성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내도 필요하다.

 

貞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마침내 길하여(貞吉) 후회가 없으리니(无悔) 군자로서 빛남(君子之光)이여!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有孚) 길(吉)하다.
  단순히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를 따르는 뜻을 갖고 기제를 향해 나아간 것이었으므로 군자로서 빛이 나고 길하게 된 것이다. 반란에 동참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얻는 것을 원하여 은행을 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게 기제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흉할 것이니, 기제를 이루는 길은 바른 길이어야 한다.

 

有孚于飲酒 无咎 濡其首 有孚失是
먹고 마심에 신념이 있으면(有孚于飲酒) 허물은 없으나(无咎) 그 머리를 적시면(濡其首) 신념이 없어지리라(有孚失是)
  기제에서 재물을 가진 은나라가 덕이 높은 주나라에 미치지 못하다고 한 것처럼 미제에서도 물질을 경계하여 주역을 마무리 한다. 먹고 마심에 뜻이 있다면 허물은 없으니 곧 바른 뜻을 갖고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물질적 부유함이 머리를 적셔 정신을 망치면 그 신념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먹고 마셔야 한다는 신념은 나도 그것이 좋지만 다른 사람도 그것이 좋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기제자가 되면 가난한 이에게 베풀려고 하는 것이 먹고 마시는 것에 신념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에 취하여 머리가 적셔지면 99석도 부족하여 100석을 채우려고 할 것이니 베풀기 위해서 모으려고 하였던 그 신념은 없어지게 된다. 더 나아가 베풀지 않는 부자만 미워 보이고, 자기 자신은 항상 부족하게 생각되니 베풀려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을 전하며 주역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공자 말씀하시길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

:
Posted by 오빠야닷컴
63

旣濟 亨 小利貞 初吉 終亂
【初九】曳其輪 濡其尾 无咎
【六二】婦喪其茀 勿逐 七日得
【九三】高宗伐鬼方 三年克之 小人勿用
【六四】繻有衣袽 終日戒
【九五】東鄰殺牛 不如 西鄰之禴祭 實受其福
【上六】濡其首 厲

  기제(旣濟)괘는 이미 성취한 상태를 뜻하는 괘다. 앞의 소과(小過)괘에서 말한 모자람(小)과 지나침(過) 중에서 지나침(過)을 의미한다. 정상에 서면 내려가야 하고, 보름달이 차면 기우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변화의 이치이다.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면 아름답지 못하다. 공자께서도 "노년기에는 기운이 쇠퇴하므로 지키려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논어 제16편 계씨 제7장]고 하셨다. 늙어서 오히려 탐하는게 많아져 노추(老醜)라고 욕을 먹기도 하는데 육순을 뜻하는 이순(耳順)처럼 귀가 순해져야 하니, 곧 기제는 욕심을 버려야 함을 뜻하고 그것이 중용임을 의미한다. 과(過)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小) 채워주는 것이 천도(天道)이다.

 

旣濟 亨 小利貞 初吉 終亂
가진자(旣濟)가 더 성장(亨)하려 하면 좋은 결실을 맺고 마감을 하기가 어렵다(小利貞) 처음은 길할 수 있어도(初吉) 마침내 어지럽게 된다(終亂).
  기제자(旣濟者)는 이미 충분히 가진 자를 말함이다. 그런데 더 성장(亨)하고자 하는 것은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까닭이다. 중용의 도에서 보면 과(過)한 것이니 좋은 결실을 맺고 마감할 수가 없다. 곧 은나라 주왕이 만족을 모르고 욕심을 부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曳其輪 濡其尾 无咎
그 바퀴를 끌다가(曳其輪) 그 꼬리를 적셔도(濡其尾) 허물이 아니다(无咎)
  이미 이룬 것을 수레에 담아 옮기고 있다. 그 꼬리정도를 적시는 것은 허물이 없다. 이미 충분하기에 그 꼬리 정도를 적시어 조금 잃는 것은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99석을 가진 부자가 없는 자의 1석을 빼앗아 100석을 채우려고 한다고 하였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커지는 것이 욕심이니 그것은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婦喪其茀 勿逐 七日得
부인이 그 머리띠를 잃어도(婦喪其茀) 쫒지마라(勿逐) 이레면 얻는다(七日得).

  머리띠(茀)는 머리(草)를 꾸미는 장식품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미 가진 본래의 미모(旣濟)가 있으니 그 장식품은 수레의 꼬리와 같은 소소한 것이니 탐하여 좆지 말라는 말이다. 7일은 음양오행이 한번 순환하는 것을 말함이니, 곧 시간이 흐르면 치장하지 않은 모습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다는 뜻이다.

 

高宗伐鬼方 三年克之 小人勿用
고종의 귀방 정벌이(高宗伐鬼方) 삼년이 걸렸다(三年克之) 소인은 정벌하려 하지 마라(小人勿用).
  은(상)나라를 가장 부흥시킨 성군이었던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은(殷)나라는 이미 천하를 지배하였고 고종은 이미 천자였으나 귀방을 정벌하려 하였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큰 희생이 따른 것이었다. 이미 가진 기제자(旣濟者)였지만 욕심을 부린 것이니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 성취는 하였으니 지나쳤어도 화를 당하지 않은 것은 대인(大人)이었던 고종의 높은 덕성 때문이었다. 그러니 소인은 그러한 지나침은 따르려 하지 말아야 한다.

 

繻有衣袽 終日戒
비단옷에 헝겊으로 기워 쓴 흔적이 있다면(繻有衣袽) 종일 경계를 하라(終日戒).

  이미 성취하고 이미 가진 기제자(旣濟者)가 가장 경계해야 할 자는 비단옷에 헝겁으로 기워쓴 흔적이 있는 사람이다. 즉, 분수를 넘어 허세를 부리는 사람인데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벤츠를 살 형편은 안되지만 낡은 중고 벤츠를 구입해 타고 다니는 사람을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욕심과 욕망이 넘치니 경계하라는 말이다. 기제자의 가진 것을 다 뺏으려 할 것이다. 가진 것이 많으면 도적을 만나기가 쉽다.

 

東鄰殺牛 不如 西鄰之禴祭 實受其福
동쪽 이웃나라의 소를 잡아 지내는 제사(東鄰殺牛)가 서쪽 이웃나라의 간소한 제사로 받는 복(西鄰之禴祭 實受其福)만 같지 못하다(不如).

  동쪽 이웃은 주나라를 말하고 서쪽 이웃은 은나라를 말한다. 동쪽 이웃은 덕을 이미 성취한 기제(旣濟)의 나라이고, 서쪽 이웃은 물질을 이미 성취한 기제(旣濟)의 나라이다. 그래서 동쪽 이웃은 물질로 제사를 지내고, 서쪽 이웃은 간소하게 제사를 지내나 주역은 서쪽이웃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재물을 이루는 것보다 덕을 이루는 기제(旣濟)가 더 좋다는 말이다.

 

濡其首 厲
꼬리가 아니라 그 머리를 적시면(濡其首) 위태롭다(厲).

  수레바퀴를 끌다가 그 꼬리를 적시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를 적시는 것이다. 이미 성취하였다고 그 머리를 적시는 것은 교만하여 방탕하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내리막길을 만나 내려가더라도 내려가는 도(道)가 있는 법이다. 내리막길을 뛰어서 내려가다가는 굴러 떨어지는 법이다. 이미 가진 기제자(旣濟者)가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은 흉하지만 그렇다고 방탕하게 구는 것도 중용을 벗어난 것이라 위태롭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62

小過 亨 利 貞 可小事 不可大事 飛鳥遺之音 不宜上 宜下 大吉

【初六】飛鳥 以凶

【六二】過其祖 遇其妣 不及其君 遇其臣 无咎

【九三】弗過防之 從 或戕之 凶

【九四】无咎 弗過 遇之 往 厲 必戒 勿用永貞

【六五】密雲不雨 自我西郊 公 弋取彼在穴

【上六】弗遇過之 飛鳥離之 凶 是謂災眚

  앞의 중부(中孚)는 중용에 바로 서 있는 것이지만, 소과(小過)는 모자라고(小) 지나쳐(過) 중용의 길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28번째 대과(大過)는 시기를 놓쳐 지나간 것을 말하는데 소과(小過)는 문자상으로는 대과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겨지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소과는 모자라거나(小) 지나쳐(過) 중용을 벗어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과(小過)괘는 중부(中孚)괘와 정반대의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小過 亨利貞 可小事 不可大事 飛鳥遺之音 不宜上 宜下 大吉

치우침(小過)은 인식이 있는 시기(亨利貞)에 생긴다. 조금 기울어짐은 괜찮으나(可小事) 크게 기울어짐은 불가하다(不可大事) 높이 나는 새가 그 소리를 남기니(飛鳥遺之音) 올라가면 마땅하지 않고(不宜上) 내려옴이 마땅하니(宜下) 내려온다면 크게 길하리라(大吉).

  중용을 벗어나는 것은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시기중에 형리정(亨利貞)의 시기의 일이라고 한다. 씨앗인(元) 상태에서는 중용을 벗어날 수 없다. 인식이 생김으로써 그 지혜가 지나치거나 모라라서 중용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본성은 가깝지만 학습으로 멀어진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장]고 하셨다. 중용에서 치우치는 것이 약간 기울어진 것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크게 기울어짐은 불가하다. 높이 나는 새가 그 소리를 남기는 것은 한계에 봉착했기에 힘이 부친 까닭이다. 한계를 알았으니 조금 기울어진 것이다. 한계를 느꼈음에도 더 올라가려 한다면 크게 기우는 것이 된다.

 

飛鳥以凶

계속 비상하려고 하니 흉하다(飛鳥以凶)

  계속 비상하려는 것은 욕심이다. 욕심이 과하기 때문이니 중용을 벗어난 것이요, 또한 계속 비상하려는 것은 제 자신의 분수를 모름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으니 제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중용을 벗어나는 이유는 제 자신을 모르고 욕심이 과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過其祖 遇其妣 不及其君 遇其臣 无咎

그 할아버지를 지나쳐(過其祖) 그 할머니를 만나고(遇其妣) 그 임금께 나아가지 못하고(不及其君) 그 신하를 만남은(遇其臣) 조금 지나친 것이지만 허물은 아니다(无咎).

  할아버지를 지나친 것은 과(過)했으나 할머니를 만났으니 그 뜻이 할아버지에게 전달될 것이요, 임금께 나아가지 못한 것은 모자랐으나(小) 그 신하를 만났으니 그 뜻이 임금께 전해질 것이다. 지나치고(過) 부족한(小) 것이지만 정도가 약하기에(小事) 허물은 아니다. 주역은 말하는 것 같다. 중용의 도가 최선이기는 하지만,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도 중용은 아니라고.

 

弗過防之 從 或戕之 凶

지나치지 않았을 때(弗過) 그것을 방지해야 하지만(防之) 지나침을 따르면(從) 혹 그것이 끝장날 수도 있으니(或戕之) 흉(凶)하다.

  모자란 것(小)은 다시 채울 수 있지만 지나친 것(過)은 그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끝장날 수도 있음이니 곧 “모자란 물은 채울 수 있지만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을 말함이다. 공자께서는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말씀하셨으나, 그 같다는 것은 중용의 도를 벗어난 것이 같다는 말씀이셨으며, 지나침과 모자람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모자란 것이 낫다고 하실 것 같다.

 

无咎 弗過 遇之 往 厲 必戒 勿用永貞

허물이 없이(无咎) 지나치지 않았는데(弗過) 점점 지나치게 되면(遇之) 그대로 나아가면(往) 위태롭다(厲) 반드시 경계해야 하니(必戒) 끝까지 계속하려고 하지 마라(勿用永貞).

  딱 한번만 더 하고 멈춘다고, 딱 한번만 더 하고 멈춘다고 하다가 그 선을 넘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을 경계한 말이다. 예를 들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술 한잔인 것 같다. 딱 한번만 더, 딱 한잔만 더 하면서 끝맺음을 하지 못하니 중용을 벗어나는 위태로운 것이다.

 

密雲不雨 自我西郊 公 弋取彼在穴

구름이 일어도 비가오지 않음은(密雲不雨) 나 스스로 어두운 서방에 있기 때문인데(自我西郊) 무왕(公)이 구멍에 피해있는 새를 활로 쏘아 잡았다(弋取彼在穴) 다소 모자랐다.

  옛 성현들이 제후의 신분으로 천자의 신하였었던 무왕이 천자인 주왕을 정벌한 것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칭송하지는 않았다. 공자께서도 마찬가지셨다. 상나라가 이미 덕을 잃어 주왕이 구멍에 피해있는 신세와 마찬가지였는데도 힘으로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왕을 참살하였기 때문이다. 중용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주역은 과(過)한 것이 아니라 조금 모자란 것(小)이라고 하고 있다. 주나라를 태동시킨 무왕을 변명하는 까닭인 듯 하기도 하다.

 

弗遇過之 飛鳥離之 凶 是謂災眚

만나지 아니하고 지나치니(弗遇過之) 새가 날아 이별하게 되니(飛鳥離之) 흉(凶)하다. 이것을 말하여 재앙(是謂災眚)이라고 한다.

  요(堯)임금이 아들에게 지위를 넘긴 것이 아니라, 덕이 있던 순(舜)임금에게 천자의 지위를 넘긴 것처럼, 상나라 주왕이 무왕을 만나 그 지위를 넘겼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니, 곧 한계에 다다른 새가 더 높이 날기 위해 비상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주역은 상나라의 멸망의 책임은 조금 부족했던(小) 무왕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과했던(過) 주왕 때문이라고 탓을 하니, 무왕의 정벌을 변명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61

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初九】虞 吉 有他 不燕

【九二】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六三】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六四】月幾望 馬匹 亡 无咎

【九五】有孚攣如 无咎

【上九】翰音 登于天 貞 凶

  이제 주역의 남은 마지막 4괘는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괘이다. 결국 주역의 가르침을 정리하면 중용(中庸)이다. 사서의 하나인 『중용』을 『소(小)주역』’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 철학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역은 시작하는 4괘에서 근본적인 것을 모두 말하였다. 자연스럽고 조화롭고 편안하고 그래서 아름답게 변화하여 마감하는 4가지 진리를 말하였다. 곧 때를 헤아리고(乾) 자리를 잘 잡고(坤) 함께하고(屯) 깨우치는(蒙)것을 말하였다. 첫4괘와 마지막4괘를 제외한 나머지는 첫4괘와 마지막4괘의 이치를 나누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역의 글 역시도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조화를 맞추고 있으니, 중용을 가르치고 중용을 보여줌으로써 끝내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곧은 믿음이(中孚) 돼지와 물고기에 이르니(豚魚) 길(吉)하다. 큰 내를 건너듯 과단성을 가지면 이롭고(利涉大川) 끝까지 이롭다(利貞).

  중부(中孚)는 미물인 돼지와 물고기 조차 의심할 수 없는 바른 믿음을 뜻하니 신급돈어(信及豚魚)의 줄임말이다. 신급돈어는 돼지나 물고기 등(等) 무심(無心)한 생물(生物)조차 믿어 의심(疑心)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올바른 믿음이라면 과단하게 나아가야 하고 끝까지 이로운 것이다.

 

虞 吉 有他 不燕

깊이 헤아리는 것(虞)이 길(吉)하나 다른 것이 생긴다면(有他) 편안하지 않다(不燕)

  공자께서는 계강자가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하였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이면 충분하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20장]고 말씀하셨다. 계강자가 지나치게 신중하고 생각이 깊었던 까닭인데, 지나치게 헤아리는 것 자체가 중용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주려 한 것이었다. 생각을 한번 더 한다고 늘 이로운 것은 아니다.

 

鶴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어미학이 그늘에서 부르니(鶴鳴在陰) 그 새끼가 화답한다(其子和之) 나에게 좋은 잔이 있으니(我有好爵) 나와 너 함께 더불어 나누리라(吾與爾靡之).

  배움을 새를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익힐 습(習)이란 글자도 어린새가 어미새를 보고 날개짓을 하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어미학이 그늘에서 소리를 내어 그 새끼를 부르고 그 새끼가 화답하는 것처럼 중용의 바른 도리를 먼저 깨우친 자가 미숙한 이를 불러 더불어 잔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습 역시 조화로움을 꾀하는 중용이다.

 

得敵 成鼓 或罷 或泣 或歌

적을 얻으니(得敵) 두드려보고(成鼓) 멈춰서보고(或罷) 울어도보고(或泣) 노래도 해 본다(或歌).

  적(敵)이란 중용의 도에 대한 의문 즉, 의혹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주희는 대학의 원문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인데, 후대로 전해지면서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그 부분을 보완하여 채워넣었다. 천하의 이치는 깨달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니 그 궁극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 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가는 절차탁마(切磋琢磨)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月幾望 馬匹 亡 无咎

달이 거의 차니(月幾望) 마필이(馬匹) 사라져야(亡) 허물이 없다(无咎)

  달이 거의 찬 것은 학문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마필은 수레에 태워 나를 이끌어 주던 말들이니, 곧 스승을 뜻하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의 성취가 보름달에 이르면 하산을 시킨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스승의 역할이 있고 스스로 깨쳐야 할 부분이 있다.

 

有孚攣如 无咎

신념으로(有孚) 붙잡아 매니(攣如) 허물이 없다(无咎).

  공자께서는 “안회는 그 마음을 다해 3개월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는데, 나머지는 하루이틀, 일이개월 그럴 뿐이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7장]라고 하셨다. 배워 알았다고 끝이 아니다. 신념으로 붙들어 매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미 깨우친 공자께서도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면 정신이 굳어진다.

 

翰音 登于天 貞 凶

날 수 없는 닭(翰音)이 하늘로 오르려 하면(登于天) 끝내(貞) 흉(凶)하다.

  한음(翰音)은 닭의 다른 이름이다. 날 수 없는 닭이 날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니 곧 제 수준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게 된다”[논어 제2편 위정 제15장]고 하셨다. 곧 한음(翰音)은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 자를 말함이니 곧 서울에 가 본 적 없으면서 서울에 가 본 사람을 이기려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도 참 많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60

節 亨 苦節 不可貞

【初九】不出戶庭 无咎

【九二】不出門庭 凶

【六三】不節若 則嗟若 无咎

【六四】安節 亨

【九五】甘節 吉 往 有尚

【上六】苦節 貞 凶 悔亡

  절(節)괘는 절제를 말함이다. 멈춤을 의미하던 간(艮)괘는 그 멈춤이 혼자의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조화를 맞추어 유종의 미를 거두는 멈춤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반면 절(節)은 중용의 도에 비추어 멈추어야 마땅한 적시(適時)에 멈추는 것을 말한다. 간(艮)은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애당초 시작하지 않는 멈춤, 초창기의 멈춤, 허리까지 나아갔으면 끝을 내고 멈춤, 그러나 절(節)괘에서 말하는 절제는 관계를 고려한 멈춤이 아니라 스스로의 멈춤이다. 그 때는 상대를 배려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중용의 바른 도(道)에 맞추어 끊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는 “노년기에는 기운이 쇠퇴하므로 지키려는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논어 제16편 계씨 제7장]고 하셨다. 오래지 않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시기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잃는 것이 싫어 집착하는 것을 ‘노추’라고 하였으니 곤(坤)괘에서 말한 순한 암말처럼 편안히 순종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節 亨 苦節 不可貞

절제(節)는 성장이니(亨) 고통스런 절제(苦節)는 끝까지 이를 수 없다(不可貞)

  절제를 하는 것은 중용의 치우치지 않는 바른 도(道)를 따르는 것으로서 겉 모습은 끊는 것이지만, 내실은 성장하는(亨) 것이다. 동물들이 따뜻한 곳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것과 같은 길이어야 한다. 고통스런 절제는 추운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니 끝까지 이를 수 없다. 억지로 고통을 감내하면서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멈출 시기임을 편안히 받아들여 멈추는 것이다.

 

不出戶庭 无咎

집안마당을 나가지 않아도(不出戶庭) 허물은 없다(无咎).

  집안마당을 나가지 않는 것은 가정을 도탑게 하여 사는 것을 말한다. 가정에 충실하여 처자와 금술이 좋고 형제와 화목하며 어른을 공경하면서 그렇게 사는 삶도 허물은 없다. 군자의 사명을 받은 이가 그 명(命)을 벗어나 집 안에 머물면 흉할지는 몰라도 허물은 없을 것이다. 길흉(吉凶)은 외부적인 시각이요, 허물(咎)은 내면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不出門庭 凶

집앞마당에서 나가지 않으면(不出門庭) 흉(凶)하다.

  집을 나서서 그 집 앞의 마당으로 나아갔는데 더 나아가지 않고 있으니 흉하다. 간(艮)괘에서 말하는 허리에서 멈추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집앞마당은 소인도 군자도 멈추어야 하는 곳이 아니다. 소인은 집안으로 돌아가야 하니 지나친 것이요, 군자는 나아가야 하는 곳이니 모자란 곳이다. 절제가 필요하지 않음에도 절제하고 있는 것을 말하니 흉하다.

 

不節若 則嗟若 无咎

절제를 하지 못한 고통으로(不節若) 곧 탄식이 있다면(則嗟若) 허물은 없다(无咎)

  소인이 절제하지 못하고 집 문을 나섰지만 빨리 그 잘못을 깨닫고 탄식하게 된다면 허물은 없다는 말이다. 탄식을 하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탄식이 있음은 과했다는 깨우침이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 크게 지나치지 않았으니 집안으로 돌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安節 亨

편안하게 절도를 지키면(安節) 형통(亨)하다.

  과했다는 깨우침을 얻어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그러한 부산한 과정을 겪어서 절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편안하게 절제를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甘節 吉 往 有尚

기쁘게 절제해야(甘節) 길(吉)하고 그렇게 나아가야(往) 자랑이 있다(有尚).

  달콤한 절제(甘節)는 곧 탄식하여 깨닫고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멈추는 것이다. 멈추어야 할 때임을 깨닫고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멈추는 것이니 그런 멈춤이어야 한다.

 

苦節 貞 凶 悔亡

고통스런 절제(苦節)는 끝까지(貞) 흉(凶)하나 후회는 없다(悔亡)

  억지로 절제함은 마음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기에 끝까지 흉하지만 멈춰야만 하는 곳에서 억지로라도 멈추었으니 그 결과는 나쁘지 않은 것이다. 그러하기에 후회를 남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길흉(吉凶)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찡그리며 멈추는데 흉하지 않을 수는 없다. 반면 후회(悔)는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의 아쉬움이며 결과를 고려한 외면적 시각이다. 그래서 흉하지만 후회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흉(凶)과 회(悔)에 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9

渙 亨 王假有廟 利涉大川 利貞
【初六】用拯馬壯 吉
【九二】渙 奔其机 悔亡
【六三】渙其躬 无悔
【六四】渙其群 元吉 渙 有丘 匪夷所思
【九五】渙 汗其大號 渙 王居 无咎
【上九】渙其血 去 逖出 无咎

  환(渙)괘는 물이 거침없이 흘러감이니, 막힌 것이 풀어지는 것, 물꼬가 트임을 의미한다. 막히는 시기가 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이 막아놓은 것이니 곧 도리가 없어진 세상 36번째의 명이(明夷)의 세상을 만나 막혀있었던 것이다. 도가 무너진 명이(明夷)의 세상에는 은둔하여 자기수양을 하고 있으라고 하였다. 언젠가는 비가 그치는 법이니 반드시 맑은 날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환(渙)괘는 명이의 세상이 끝나고 거침없이 바른 도가 흘러넘치는 세상을 만나게 된 것을 의미한다.

 

渙 亨 王假有廟 利涉大川 利貞
트여서(渙)는 형통하니(亨) 왕이 가서 제사 지낼 종묘가 있으면(王假有廟) 과감히 큰 강을 건너면 이로우리니(利涉大川) 끝까지 이롭다(利貞)

  꽉 막혀 있던 것이 트이는 것은 씨(元)로부터 바야흐로 싹이 트는 것이니 성장(亨)을 시작한 것이다. 왕이 제사 지낼 종묘가 있다는 말은 곧 전통이 있다는 말이니, 곧 씨(元)가 좋았다는 말이다. 좋은 씨가 비로소 싹을 틔운 것이니 좋은 결실을 얻을 것은 자명하다. 과단하게 강을 건너도 이롭다. 좋은 결실을 맺고(利) 마감(貞)할 수 있다.

 

用拯馬壯 吉
기운이 강한 말의 도움을 구하면(用拯馬壯) 길(吉)하다.
  용증마장(用拯馬壯)은 36번째 명이(明夷)괘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도가 무너진 명이의 시절에 왼쪽 허벅지에 활을 맞은 사람이 기운 센 말을 만나서 구원을 얻었다. 그 뜻은 도망가야 할 때는 센 기운으로 도망가라는 뜻도 담겨있다. 이제 술술 풀리는 환(渙)의 시기에도 기운센 말의 도움을 받아야 길하니, 도망을 가야 할 때도 나아가야 할 때도 기운이 왕성한 말처럼 힘차게 내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渙 奔其机 悔亡
트였으니(渙) 그 궤로 빨리 내달려야(奔其机) 후회가 없다(悔亡)
  말의 힘찬 기운으로 나아가야지,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는 뜻이다. 궤(机)는 베틀이니 곧장 근본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물고기보다 낚시대가 중하며, 삼베보다 베틀이 중하다. 기운이 강한 말을 타고 빨리 내달려 베틀을 차지하라는 말이다. 엉뚱한 길로 빠지지 말고 근본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渙其躬 无悔
그 몸이 거침없어야(渙其躬) 후회가 없다(无悔)
  그 몸이 거침이 없는 것은 꽉 막혔을 때 풀리는 시기를 대비하여 자기관리를 잘 해 둔 것을 말한다. 군자는 은둔하더라도 몸과 정신을 잘 가꾸어 풀리는 시기를 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몸을 망치고 정신을 망치는 사람은 때가 바뀌어 술술 풀리는 시기가 도래하였어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渙其群 元吉 渙 有丘 匪夷所思
무리를 이루어 거침없이 나아가야(渙其群)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거침없이(渙) 언덕으로 모이는 것을(有丘) 오랑캐들은 생각하지 못한다(匪夷所思)
  오랑캐(夷)는 도가 무너진 명이(明夷)의 시기였기에 힘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집단을 뜻한다. 그래서 덕보다 힘을 숭상하는 무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 힘이 통했던 까닭은 힘이 정답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시기가 명이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즉 힘을 숭상하는 오랑캐들은 힘이 전부인 줄 알 것이니 덕이 힘을 꺾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꼬가 트여 거침없는 때에도 혼자서는 도모할 수 없다. 무리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渙 汗其大號 渙 王居 无咎
막힌 것이 트이니(渙) 오랑캐들은 땀을 흘리며 크게 울부짖지만(汗其大號) 트였어도(渙) 왕이 자리를 지켜야(王居) 허물이 없다(无咎)
  힘만 숭상하던 오랑캐들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크게 울부짖고 후회를 하니, 때가 도래하였지만 왕이 제 자리에 위치하여 이끌어야 허물이 없다. 왕이 냉정을 잃고 선두에 서서 공격을 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말이다. 소위 두고보자는 식으로 가슴앓이를 하다가 트이니 냉정을 잃고 나아가는 것을 말함이다. 왕은 흔들리지 말고 흥분하지 말고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

 

渙其血 去 逖出 无咎
그 피가 거침없이 흐르며(渙其血) 지나가더라도(去) 멀리 멀어지면(逖出) 허물이 없다(无咎).
  오랑캐들이 죽어 그 피가 거침없이 흐르게 되니, 힘을 숭상하던 오랑캐들이라 큰 희생이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생명의 다침은 참으로 안타까우나 시간이 멀리 지나가 먼 옛날 이야기가 되면 허물은 없어진다고 한다. 정의가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며 천명(天命)인 까닭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8

兌 亨利貞
【初九】和兌 吉
【九二】孚兌 吉 悔亡
【六三】來兌 凶
【九四】商兌 未寧 介疾 有喜
【九五】孚于剝 有厲
【上六】引兌

  태(兌)괘는 즐거움을 뜻하는 괘이다. 태(兌)괘는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한 것은 아니다. 즐거움을 느끼는 유형을 제시하고 그 각 유형들에 대해서 바람직한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兌 亨利貞
즐거움(兌)은 성장(亨), 결실(利) 마침(貞)기의 일이다.

  즐거움은 원형리정의 단계에서 원(元)의 시기를 제외한 일이니 즉, 의식이 있는 상태에의 인식이다. 즐거움을 따르는 것은 동물이 따뜻한 곳으로 찾아가는 것과 같다. 힘들어 보이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듯 여겨지는 수도승(修道僧)도 결국은 고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천도(天道)이며 인도(人道)이다.

 

和兌 吉
조화로워 즐거우니(和兌) 길(吉)하다.

  자연(自然)처럼 조화롭기 때문에 즐거운 것을 말한다. 아름다운 강산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조화롭고 평화롭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시경에서 “처자(妻子)와 잘 화합하는 것이 금(琴)과 슬(瑟)의 연주와 같으니 형제가 화목하여 조화롭고 즐겁구나(和樂). 네 집안 제대로 다스리려면 네 처자식 즐겁게 하라”[시경 소아.상체편]고 하였다. 악마는 고통스럽고 눈물이 흐르고 피가 흐르고 파괴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며 웃는다고 하였다. 조화롭지 않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흉하다.

 

孚兌 吉 悔亡
신념이 있어 즐거우니(孚兌) 길(吉)하고 후회가 없다(悔亡)
  유학의 최고 경전이라 말하는 『논어』는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자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의 도를 배우고 체득해가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알아주는 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이 생길 리 없으니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논어 제1편 학이 제1장]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이러한 즐거움이 신념이 있어 즐거운 것이다. 공자께서는 안회를 칭찬하며 “거친 밥과 한 바가지 물로 누추한 거리를 살아도 그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참으로 현명하도다 안회여!”[논어 제6편 옹야 제11장]라고도 말씀하셨다. 이러한 즐거움은 물질의 부귀나 지위의 귀천에 전혀 구애되지 않는 즐거움이다.

 

來兌 凶
오는 것이 있어 즐거우니(來兌) 흉(凶)하다.

  오는 것(來)이 있어 즐거운 것은 오직 얻어서 즐거운 것을 말한다. 잃는 것 없이 얻어서 그것을 즐거워 하는 것을 말한다. 뒤에 이어지는 상태(商兌)와 달리 제 것은 하나도 내 놓지 않고 받기만 하려는 이기적 즐거움이니, 술값 계산할 때 항상 숨어버리고 얻어 먹은 것을 즐거워 하는 그런 부류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商兌 未寧 介疾 有喜
거래하여 즐거우나(商兌) 편안한 것은 아니니(未寧) 병이 되는 것을 막아야(介疾) 기쁨이 있다(有喜)

  상태(商兌)는 거래를 하여 즐거움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즉 주고받는 GIVE AND TAKE의 즐거움이다. 래태(來兌)는 내 것은 하나 내 놓는 것 없이 오직 이익만 실속만 차리려는 즐거움이라면, 상태(商兌)는 주고받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래태(來兌)는 흉하다고 했지만 상태(商兌)는 병이되는 것이 아니면 괜찮다고 한다. 주역과 논어의 입장은 정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병이 되는 수준에 이르지는 말아야 한다고 하니, 돈이 안되는 일은 애초에 하려고 하지 않는 생각을 나무라는 것이다. 공자께서도 “먼저 일하고 뒤에 그 대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1장]라고 하셨으니, 이미 선사후득(先事後得)은 고사성어가 되었다.

 

孚于剝 有厲
파괴에 신념을 두면(孚于剝) 위태로움이 있다(有厲)

  파괴에 신념을 두는 것은 사람의 길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곧 기인(奇人)의 행세를 하는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궁벽한 이치를 찾고 괴이한 일을 하는 것을 후세에 칭송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중용 제11장]고 하셨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이 도를 행하고자 하면서 사람의 길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중용 제13장]고 하셨다. 화태(和兌)처럼 조화로움이 즐거움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가르침이 중국에서 불교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없었던 이유일 지도 모른다. 머리를 깎고, 고기를 먹지 않고,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수도승을 유별나게 유난을 떠는 것으로 생각했음직도 하다. 마음으로 관통할 수 있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유별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성인 석가모니의 잘못이 아니라 따르는 자들이 구속하고 막아놓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引兌
이끄니 즐겁다(引兌)
  화태(和兌) 부태(孚兌) 래태(來兌) 상태(商兌)와 달리 인태(引兌)는 주역에서 길흉, 여타의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 이끌고 오니 즐거운 것은 소위 조종하는 즐거움이다. 이끄는 즐거움에 대해서 주역이 판단하지 않은 이유는 중용을 벗어나면 흉(凶)할 것이요, 중용을 지키면 길(吉)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조종 하려고 하는 마음은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덕이 높은 현자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이끌고 오는데 즐거움을 느낀다면 길하겠지만, 마마보이의 어머니가 자식을 이끌고 와야 즐거운 것은 흉할 것이기 때문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7

巽 小亨 利有攸往 利見大人
【初六】進退 利武人之貞
【九二】巽在床下 用史巫紛若 吉 无咎
【九三】頻巽 吝
【六四】悔亡 田獲三品
【九五】貞吉 悔亡 无不利 无初有終 先庚三日 後庚三日 吉
【上九】巽在床下 喪其資斧 貞凶

  손(巽)괘는 바람을 뜻하는 괘이니, 곧 마음이 바람처럼 흔들리는 것을 뜻한다. 우유부단하여 좀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주역은 그 우유부단함의 원인을 마음에서 찾고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기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실패의 확률을 줄이려면 역사를 살펴보기를 권하고 그도 아니면 차라리 점을 치고서 나아가라고 말한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다가는 앉아서 다 잃게 될 것이니 그게 제일 흉한 것이라고 한다. 지나간 일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 근원적 문제이니 후회를 남기는 마음을 없애야 길(吉)하다고 한다.

 

巽 小亨 利有攸往 利見大人
갈등(巽)은 성장 초기부터 있으나(小亨)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다(利有攸往)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
  갈등도 앞의 려(旅)괘와 마찬가지로 성장 초기부터(小亨) 있게 되는 것이다. 려(旅)괘의 방황은 쉽게 끌 낼 수 없던 것으로 본 반면에, 갈등(巽)은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식견이 높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더 빨리 끝내고 싶으면 대인(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고 한다.

 

進退 利武人之貞
나아갈 줄 알고 물러날 줄 아는(進退) 무인은 끝까지 이롭다(利武人之貞)
  무인은 진퇴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는 식견이 있어야 한다. 무인의 갈등은 저 혼자만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巽在床下 用史巫紛若 吉 无咎
평상 아래에서 갈등 한다면(巽在床下) 역사와 무속을 사용하면(用史巫紛若)이 길(吉)하고 허물이 업다(无咎).
  평상아래에서의 갈등은 보통사람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심한 갈등을 의미하며, 너무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를 사용하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라는 말이다. 공자께서는 "옛 것을 돌이켜 미래를 살필 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논어 제2편 위정 제11장]고 하셨다. 그도 아니면 무속 곧, 점을 사용하라고 한다. 점이 맞다는 말이 아니라 갈등을 끝내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공자께서는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치셨지만 계문자에게는 “두 번이면 충분하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20장]고 하셨다.

 

頻巽 吝
찡그리고 갈등만 하고 있다면(頻巽) 어려워진다(吝)
  찡그리고 갈등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것이니 정말 어려워진다. 공자께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라고 하며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도 참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6장]고 하셨다.

 

悔亡 田獲三品
후회가 없으면(悔亡) 밭에서 세가지 물건을 얻으리라(田獲三品).
  3품은 천(天)지(地)인(人)을 비유하는 것이다. 천지인의 합일은 결국 마음으로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에 상관없이 후회하고 탄식하지 않는다면 언제 나아가건(天), 어디로 나아가건(地), 누구(人)에게로 나아가건 아무 문제가 없다. 천지인의 합일을 기다리는 것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후회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貞吉 悔亡 无不利 无初有終 先庚三日 後庚三日 吉
끝까지 길하구나(貞吉) 후회하지 않음이여(悔亡)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시작은 몰라도 끝은 있으니(无初有終) 신중하게 하고(先庚三日) 잘 헤아리면(後庚三日) 길(吉)하리라.
  즉, 시작할 때 확신은 없어도 끝나면 결과는 있는 법이다. 후회가 없는 것이 중하다. 선경삼일은 십간 즉,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경으로부터 앞선 3일인 정(丁)이며, 후경삼일은 계(癸)를 말하는데, 신중(丁)하였고 잘 헤아렸다면(癸) 그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로 길한 것이다.

 

巽在床下 喪其資斧 貞凶
평상 아래에서 갈등한다면(巽在床下) 재물과 도끼까지 잃을 것이니(喪其資斧) 끝까지 흉하다(貞凶)

  평상아래에서의 갈등은 보통사람에도 미치지 못하는 심한 갈등이니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을 잃음은 물론이요, 재물과 권력도 잃을 것이니 끝까지 흉하다. 한번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앉아서 잃는 것이니 끝까지 흉한 것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6

旅 小亨 旅貞 吉
【初六】旅瑣瑣 斯其所取災
【六二】旅即次 懷其資 得童僕 貞
【九三】旅焚其次 喪其童僕 貞 厲
【九四】旅于處 得其資斧 我心不快
【六五】射雉一矢亡 終以譽命
【上九】鳥焚其巢 旅人 先笑後號咷 喪牛于易凶

  여(旅)는 나그네를 뜻한다. 떠도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니 곧, 방황을 의미한다. 요즘은 인생 40을 제2의 방황기라고도 한다. 공자께서는 나이 40을 미혹함이 없는 불혹이라고 하셨고 “나이 40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는다면 끝났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6장]고도 하셨으니 요즘 사람들이 40에 방황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쉽게 예상할 수는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旅 小亨 旅貞 吉
방황(旅)은 성장 초기부터(小亨) 있게 되는 것이다. 방황을 끝내어야(旅貞) 길(吉)하다
.
  방황은 성장의 초창기부터(小亨)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길(吉)하려면 방황을 끝내어야 한다고 한다. 아마도 평생 방황을 끝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필부필부(匹夫匹婦)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방황을 끝내지 못하고 그냥 그냥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기도 하다.

 

旅瑣瑣 斯其所取災
방황은 자질구레하게 하면(旅瑣瑣)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다(斯其所取災).
  쇄쇄(瑣瑣)는 자질구레하게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시시하고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끝맺지 못하고 계속 방황을 이어가는 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한다. 알이 먼저 인지 닭이 먼저 인지, 아이가 먼저 인지 어른이 먼저 인지 어찌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대학에서 “자식 기르는 법을 배우고 나서 시집가는 사람은 없다”[대학 제9장 제가치국]고 하였으니 지나치게 자질구레하게 방황을 계속 이어가지 않아야 한다.

 

旅即次 懷其資 得童僕 貞
방황은 묵을 곳이 있어야 하니(旅即次) 재물이 있고(懷其資) 동복(童僕)을 얻으면(得) 끝난다(貞)

  차(次)는 정착할 곳을 말하니 곧 방황을 끝내고 머무를 수 있는 곳을 말한다. 몸을 정착할 수 있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정착 할 수 있으려면 내 마음을 받아주는 사심 없는 종이 있어야 한다.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더 이상 방황은 없음은 당연하다. 물질가치와 정신가치가 별개가 아니니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旅焚其次 喪其童僕 貞 厲
방황하여 그 묵을 곳을 불태우고(旅焚其次) 그 동복을 잃었으니(喪其童僕) 끝까지(貞) 위태롭다(厲).
  재물(資)은 잃지 않았다. 그 동복을 잃어 결국, 쉴 곳을 잃었지만 재물은 남아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재앙을 자초한다고 하는 자질구레하게 이어지는 방황(旅瑣瑣)과 다르지 않다. 내 몸을 쉬게 만들 수 있는 돈도 중요하고 내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동복도 필요한 것이다. 중용을 벗어나 그 동복을 잃었으니 끝까지 위태롭다.

 

旅于處 得其資斧 我心不快
방황에서 잠시 쉬려다가(旅于處) 재물과 도끼를 얻었으나(得其資斧) 내 마음은 불쾌하다(我心不快).

  처(處)는 정착지를 뜻하는 차(次)와는 달리 잠시 쉬기 위해 머무는 곳이다. 자부(資斧)는 재물과 도끼인데, 곧 돈과 권력을 의미한다. 얻기 위해 애써서 얻은 것이 아니요, 잠시 머무를 생각이었는데 돈과 권력을 취했으니 그야말로 횡재다. 그러나 왜 마음이 불쾌할까? 돈과 권력을 얻었고, 그것도 손쉽게 얻었으나 동복(童僕)이 없기 때문이다.

 

射雉一矢亡 終以譽命
어리석은 꿩을 화살 하나를 잃고 죽이면(射雉一矢亡) 마침내 명예로운 부름을 얻으리라(終以譽命)
  꿩은 다급해지면 풀섶에 머리만 박고 몸뚱이를 돌보지 않는 어리석은 짐승이다. 즉 그 어리석음을 빨리 없애라는 말이니, 돈과 권력을 횡재로 얻고서도 마음이 불쾌한 이유가 무엇인지 빨리 깨우치라는 의미이다.

 

鳥焚其巢 旅人 先笑後號咷 喪牛于易 凶
새가 그 둥지를 불사르니(鳥焚其巢) 나그네는(旅人) 처음에는 웃지만 뒤에는 부르짖으며 슬피 울게 될 것이다(先笑後號咷) 주역의 소를 잃어버리는 것이니(喪牛于易) 흉(凶)하다.
  둥지를 불태우는 새가 쉴 곳을 불태우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을 짓을 하니, 짐승의 일로만 여겨 처음에는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그러나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임을 알게 되어 슬피 울게 될 것이다. 소는 진리와 깨우침을 상징한다. 불교의 '심우도'에서 의미하는 소와 같은 뜻이다. 주역의 소를 읽어버리는 것은 곧 주역의 가르침을 잃어버리는 것이니 흉하다. 새를 가엽고 측은하게 여기는 인(仁)함을 잃었다. 주역이 말하고 있는 모든 변화의 법칙은 하나를 상정한 것이 아니다. 사람 인(人)은 항상 관계(關係)하여 하나가 받쳐주어야 하는 존재이며, 나와 관계없는 삼라만상은 아무것도 없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5

豊 亨 王假之 勿憂 宜日中
【初九】遇其配主 雖旬 无咎 往 有尚
【六二】豊其蔀 日中見斗 往 得疑疾 有孚發若 吉
【九三】豊其沛 日中見沬 折其右肱 无咎
【九四】豊其蔀 日中見斗 遇其夷主 吉
【六五】來章 有慶譽 吉
【上六】豊其屋 蔀其家 闚其戶 闃其无人 三歲不覿 凶

  풍(豊)은 풍성함을 상징하는 괘다. 곧 결실(利)이 풍성한 것을 말한다. 주역은 풍성한 결실을 이루기 위한 조건을 바른 통치자에게서 찾고 있다. 고래(古來)로부터 풍흉은 왕의 책임이라고 하였고 왕이 바르면 풍년을 만나고 왕이 바르지 않으면 흉년을 만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역은 왕이 바르게 중천에 있음에도 풍년을 만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바른 신하들이 왕을 받쳐주어야 한다.

 

豊 亨 王假之 勿憂 宜日中
풍요(豊)는 성장기(亨)에 결정된다. 왕이 그것을 이르게 할 것이니(王假之) 근심하지 말라(勿憂) 알맞게 해가 중천에 있기 때문이다(宜日中)
  풍요는 곧 좋은 결실(利)을 맺는 것이므로 성장(亨)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가뭄과 홍수 등의 재앙이 없기 위해서는 왕이 덕으로 세상을 잘 다스려야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전」의 기록에 의하면 그 해의 농사가 흉년이 들면 왕에게 책임을 물어 왕을 죽이거나 교체했다고 전해지는데, 왕권이 약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풍흉은 왕의 책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중천에 있는 것은 왕이 덕으로써 정치를 잘 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遇其配主 雖旬 无咎 往 有尚
하늘과 짝이 되는 바른 주인을 만나야 하니(遇其配主) 시간이 걸려도(雖旬) 허물이 없고(无咎) 만나러 나가면(往) 자랑이 있다(有尚)

  시경에서 “은나라가 백성들을 잃지 않았을 때엔 상제(上帝)와 짝할 수 있었도다”[시경 대아.문왕편]라고 하였으니 바른 주인이란 백성들이 저절로 모여들게 만드는 덕 있는 군주일 것이다. 10년(旬)은 주역에서 정성을 뜻하는 시간으로 여러 번 등장하였다. 간절히 원하면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수동적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간절한 만남을 성사시키려 해도 자랑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공자께서 ‘임을 사모하지만 집이 멀어 안타깝다'는 고시(古詩)를 접하시고는 “진실로 간절히 사모하지 않는 까닭이다. 어찌 멀겠느냐?”[논어 제9편 자한 제31장]고 하셨다. 진정으로 간절하면 멀리 있는 것은 없다.

 

豊其蔀 日中見斗 往 得疑疾 有孚發若 吉
풍요의 기운이 막히니(豊其蔀) 해가 중천에 있음에도 북두칠성이 보인다(日中見斗) 나아가면(往) 의심병만 생기게 될 것이니(得疑疾) 신념을 고양한 후가 되어야(有孚發若) 길(吉)하다
.
  해가 중천에 있음에도 북두칠성이 보이는 까닭은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다. 작은 별이 보일 정도는 아니니 암흑의 상태는 아닌 수준이다. 북두칠성은 곧 바른 신하를 의미한다. 왕의 눈과 귀를 막고 세상을 어둡게 하는 간신들이 득세하고 있는 세상이나 바른 신하들도 빛을 내고 있어 다행스러운 상황이다. 그래도 여전히 어두우니 백성들의 신임을 완전히 얻을 수는 없어 의심이 있을 것이다. 백성들의 신임을 얻은 후에 나아가야 길하다고 한다.

 

豊其沛 日中見沬 折其右肱 无咎
풍요의 기운이 장막에 가려(豊其沛) 해가 중천에 있으나 작은 별이 보인다(日中見沬) 오른팔이 꺾여야(折其右肱) 허물이 없다(无咎)

  작은 별이 보일 정도이니 해는 중천에 있어도 암흑천지가 된 것이다. 작은 별, 즉 소인유(小人儒)정도만 되어도 빛나 보일 정도이니 간신들이 세상을 어둠으로 장악해 버린 것이다. 오른팔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간신배의 수괴를 상징한다. 그 오른팔을 꺾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 아무리 바른 왕이라도 안동 김씨의 세도기처럼 세상이 암흑으로 변한 시기에는 어떤 힘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豊其蔀 日中見斗 遇其夷主 吉
풍요의 기운이 막혀(豊其蔀) 해가 중천에 있음에도 북두칠성이 보인다(日中見斗) 가짜 군주를 만나면(遇其夷主) 길(吉)하다.
  이주(夷主)는 문자 그대로는 오랑캐의 임금이나, 여기서는 가짜 군주라는 의미이다. 나쁜 뜻이 아니라 천자의 지위를 탐내는 자가 아니고 세상을 바르게 하려는 이를 뜻한다. 군주가 되고도 능히 남을만한 인덕을 가졌으나 외곽에 있는 현자이니 예컨대, 공자 같은 분도 이 이주(夷主)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주(夷主)가 힘을 쓸 수 있는 것도 북두칠성이 빛나는 세상이어야 한다. 작은 별이 빛나는 세상이라면 어렵다. 공자께서도 “만일 나를 써 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일년은 지나야 어느 정도 토대를 갖추고 삼년은 지나야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0장]고 하셨다. 수치상 3년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의미하니 한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바로잡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來章 有慶譽 吉
와서 빛내면(來章) 경사와 명예가 있으리니(有慶譽) 길(吉)하다.

  임금의 지위를 탐내지 않고 그 역할을 탐내는 자가 이주(夷主)이니, 임금을 대신하여 세상을 밝게 하고 바른 도를 세워나갈 것이다. 2번째 곤(坤)괘에서 ‘왕의 일을 따르면서 공로를 탐내지 않고 바른 결과만을 원한다(或從王事 无成有終)’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왕이 할 일을 대신하고 그 공로를 차지하지는 못해도 그 바른 결과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진력하는 것'이니, 이주가 와서 빛내는 것이 곧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무성유종(无成有終)하고자 하는 것이다.

 

豊其屋 蔀其家 闚其戶 闃其无人 三歲不覿 凶
그 집이 풍요롭게 되니(豊其屋) 그 집을 막아버렸다(蔀其家). 그 집을 엿보니(闚其戶) 인기척도 사람도 없다(闃其无人) 오래 돌아보지 않을 것이니(三歲不覿) 흉(凶)하다.
 
  이주(夷主)의 덕으로 풍요롭게 되었다. 그러자 나누지도 뺏기지도 않으려고 문을 닫아버린 것이니 곧 이주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각박하고 은혜를 모르는 집이라면 사람이 남아 있을 리 없고, 또한 오랫동안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니 흉하다. 대학에서 “백성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백성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대학 제10장 치국평천하]고 하였으니 일시적인 물질적 풍요는 얻었지만 오랜 시간 백성들을 잃게 되었다. 이것은 풍(豊)이 아니라 흉(凶)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4

歸妹 征 凶 无攸利
【初九】歸妹以娣 跛能履 征 吉
【九二】眇能視 利幽人之貞
【六三】歸妹以須 反歸以娣
【九四】歸妹愆期 遲歸有時
【六五】帝乙歸妹 其君之袂 不如其娣之袂良 月幾望吉
【上六】女 承筐无實 士 刲羊无血 无攸利

  귀매(歸妹)도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지만 앞의 점(漸)괘가 시집을 가는 여인의 입장인 것과는 달리 귀매(歸妹)는 시집을 보내는 입장이다. 매(妹)는 일반적으로는 누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여식을 의미한다. 매(妹)는 여자(女)와 작은 나뭇가지(未)가 합쳐진 문자인데, 남자 형제의 입장에서 보면 누이가 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여식이 되기 때문이다. 혹은, 고대의 결혼풍습이 자매를 함께 시집보냈기에 귀매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하여간 시집을 보내는 것은 본성적으로 눈물을 흐르게 만들지만, 그래야만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기도 하다.

 

歸妹 征 凶 无攸利
여식을 시집 보내야 하나(歸妹) 강제로 나아가면(征) 흉(凶)하고 유리함이 없다(无攸利).

  여식이 혼기가 차서 시집을 보내야 하지만 사랑으로 금슬이 좋은 기러기 한 쌍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시집을 보내는 것이니 흉하고 유리함이 없는 것이다. 짝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역은 3번째 준(屯)괘에서 만남에 애쓰지 마라고 하였고, 5번째 수(需)괘에서 귀인은 찾아온다고 하였다. 제 인연이 있는 것이다.

 

歸妹以娣 跛能履 征 吉
시집을 보내면 여동생을 딸려 보내야 한다(歸妹以娣) 절름발이가 잘 걸을 수 있음이니(跛能履) 그렇게 나아가야(征) 길(吉)하다.

  당시의 귀족들은 딸을 시집 보내면서 흔히 그 여동생이나 몸종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나이 어린 질녀나 여동생이나 몸종과 함께 시집을 보냈다고 하는데 이를 잉첩(媵妾)이라고 하였다. 낯선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니 의지할 벗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순임금도 요임금으로부터 두 딸을 함께 얻었고 고대 중국사회에서는 잉첩이 흔한 일이였다. 아마도 정복시대에 남녀의 성비가 불균형을 이뤘던 까닭에 생겨났던 문화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眇能視 利幽人之貞
애꾸눈이 잘 보려는 욕심이면(眇能視) 끝까지 가두어두는 것이 이롭다(利幽人之貞).
  시집을 가려는 딸이 소위 '눈이 삔 것'이라서 말려야만 하는 결혼이다. 애꾸눈임에도 완벽하게 보고 있다고 과신을 하니 차라리 가두어두어야 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지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결혼도 있는 법이다. 고독해지고 적적해지는 것이 싫어 혼사를 막는 것이 아니다. 여식의 행복을 위해서 막는 것이니, 시집을 보내는 마음과 다르지 않는 마음이다.

 

歸妹以須 反歸以娣
시집 보내고 합방을 기다리게 하면(歸妹以須) 그 손아래가 될 것이다(反歸以娣).
  시집을 보내었는데 합방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딸려 보낸 여동생과 위치가 바뀌어 여동생의 손아래가 되어버릴 것이니 곧 하늘이 정해준 자매간의 지위가 인간의 맺음에 의하여 역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늘의 도를 거스르는 잘못은 합방을 기다리게 하였기 때문이다. 시집을 갔으면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

 

歸妹愆期 遲歸有時
혼기를 놓쳐 시집보내야 하니(歸妹愆期) 지체가 되었지만 그 때가 있으니(遲歸有時) 서둘지 마라.
  혼기를 놓쳤다고 조급하여 아무 곳에나 시집 보내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늘은 늦게 맺는 열매도 일찍 맺는 열매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조급하게 서둔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니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하늘의 뜻이고 사람의 힘으로 강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帝乙歸妹 其君之袂 不如其娣之袂良 月幾望 吉
제을이 딸아이를 시집보내니(帝乙歸妹) 그 딸의 소매가(其君之袂) 그 여동생의 소매만 같지 못하다면(不如其娣之袂良) 임신이 되어야(月幾望) 길(吉)하다.

  군(君)은 여기서는 왕의 부인을 칭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제을이 문왕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을 말한다. 소매는 미색을 상징한다. 제을이 딸아이를 시집 보내는데 여동생보다 행색이 초라했다. 월기망(月幾望)은 9번째소축(小畜)괘와 마찬가지로 임신을 상징한다. 여동생과 함께 가는 시집은 때로는 절름발이가 잘 걸을 수 있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손아래가 바뀌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女 承筐无實 士 刲羊无血 无攸利
여인(女)이 알맹이가 없는 바구니로 받들고(承筐无實) 총각(士)이 양을 찔렀으나 피가 없으니(刲羊无血) 유리할 것이 없다(无攸利)
  옛 중국의 귀족들은 혼인시 종묘에 제물을 바치는 예를 행하였는데, 여자는 과일이 든 대바구니를 바쳤고, 남자는 칼로 양을 찔러 그 피를 바쳤다. 모두 자식을 바라는 의식이었다. 알맹이가 없는 바구니는 난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여인을 상징하고 총각이 피를 내지 못함은 정자를 생산하지 못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결혼을 하였으나 자식을 볼 수 없는 그런 혼사를 말한다.

  요즘은 의술이 발달하여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그 비용이 엄청나게 든다. 더 낳기 싫어하는 부모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어 마음을 변하게 하려는 정책보다는, 정말 아이를 간절히 갖고 싶어하는데도 비용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들에게 도움을 주는건 어떨까? 재정이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든걸까?

:
Posted by 오빠야닷컴
53

漸 女歸 吉 利貞
【初六】鴻漸于干 小子 厲 有言 无咎
【六二】鴻漸于磐 飲食衎衎 吉
【九三】鴻漸于陸 夫征不復 婦孕不育 凶 利禦寇
【六四】鴻漸于木 或得其桷 无咎
【九五】鴻漸于陵 婦 三歲不孕 終莫之勝 吉
【上九】鴻漸于陸 其羽 可用爲儀 吉

  기러기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사람이 질투할 만큼 금슬이 좋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남자가 장성하여 혼기가 되면 박달나무를 직접 깎아 기러기를 조각하여 그 교훈을 가슴깊이 새기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 깎은 기러기 한 쌍을 들고 신부 집을 찾아가 혼인을 청하는 예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기러기는 짝을 찾으면 죽을 때까지 다른 짝짓기를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새끼가 있으면 새끼를 키우며 살고 새끼가 없으면 따라 죽는다고 한다. 수컷 기러기는 아무리 먼 거리라도 날아가서 먹이를 구해오므로 멀리 떨어져 부양을 하는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요즘 같은 이혼이 빈번하고 불륜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새이기도 하다. 주역에서 말하는 점(漸)괘는 여인의 나아감을 뜻한다.

 

漸 女歸 吉 利貞
나아감(漸)은 여인이 시집가는 것(女歸)이니 길(吉)하고 끝까지 이롭다(利貞).
  주역은 여인은 시집을 가야 길하다고 한다. 사람의 상상력은 기발하기에 '처녀귀신'이 생겼던 것 같다. 죽어서 보니 가장 원통한 여인은 시집가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하는 가정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여인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까닭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요즘시대에는 이혼한 사람들도 많고 독신자들도 많다.

 

鴻漸于干 小子 厲 有言 无咎
기러기가 물가로 나아가니(鴻漸于干) 어린자녀(小子)가 위태로워(厲) 말들이 있겠지만(有言) 허물은 없다(无咎).
  기러기는 사랑으로 맺어진 혼사를 하러 시집가는 여인을 뜻한다. 정략결혼이 아니기에 사랑을 상징하는 기러기인 것이다. 그런데 물가로 나아가는 것은 자신도 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간 것이다. 자연히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가정 일에 소홀해질 수 있어 어린자녀가 위태롭고 말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허물은 아니다. 사랑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鴻漸于磐 飲食衎衎 吉
기러기가 반석으로 나아가니(鴻漸于磐) 마시고 먹는 것이 풍족하여(飲食衎衎) 길(吉)하다.
  시집가는 여인이 경제적인 걱정을 전혀 할 필요 없는 부유한 곳으로 시집을 간 것이니 길하다. 부유한 곳으로 시집간 것 때문에 길한 것이 아니라, 금슬 좋은 기러기 한 쌍인데 부수적으로 경제적인 근심까지 없으니 길한 것이다.

 

鴻漸于陸 夫征不復 婦孕不育 凶 利禦寇
기러기가 뭍으로 나아가니(鴻漸于陸) 남편이 멀리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고(夫征不復) 부인은 임신해도 키우기 어려워(婦孕不育) 흉(凶)하다. 궁핍해도 도적을 막아야 이롭다(利禦寇).
  여인이 사랑의 마음으로 힘들고 곤궁한 곳으로 시집을 간 것이다. 기러기는 암컷이 알을 품는 동안 수컷은 주위를 경계하여 지키는 새이다. 그러나 암컷을 지켜주고 있기에는 경제적 형편이 되지 못하고 물고기를 잡아올 곳은 멀리 있어 쉽게 돌아오지 못하니 곧, 벌이도 시원찮은 것이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곳으로 시집을 간 것이어서 외부에서 보기에는 흉(凶)하지만 궁핍할지라도 도적을 막으면 이롭게 된다. 도적은 바른 마음을 훔쳐가는 내면에 잠재한 악마이다. 미움이 생겨 원망하여 사랑의 마음을 잃는 것을 말한다. 그런 도적을 막아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결국은 이롭게 된다.

 

鴻漸于木 或得其桷 无咎
기러기가 나무로 나아가니(鴻漸于木) 혹 그 가지를 얻는다면(或得其桷) 허물이 없다(无咎).

  나무로 나아간 것은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주거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시작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무로 나아갔으니 그 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그 가지를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간 것이니 허물이 없다. 시작부터 지나치게 반석으로 나아간 기러기나 시작이 너무 초라한 뭍의 기러기보다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결합일 것 같다.

 

鴻漸于陵 婦 三歲不孕 終莫之勝 吉
기러기가 왕실로 나아갔으나(鴻漸于陵) 부인(婦)이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했다(三歲不孕) 그러나 끝내는 이기지 못할 것이니(終莫之勝) 길(吉)하다. 
  손을 보는 것이 귀한 왕실같은 엄청난 집안으로 시집갔으나 오랫동안 임신을 못하고 있다. 기러기는 강조한대로 금슬이 좋은 부부를 상징하니, 금슬이 좋기에 결국은 임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금슬이 좋은 부부는 하늘이 시샘해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鴻漸于陸 其羽 可用爲儀 吉
기러기가 뭍으로 나아가나(鴻漸于陸) 그 날개짓을(其羽) 본보기로 삼을 만하니(可用爲儀) 길(吉)하다.

  위의 기러기 중에서 가장 가엾어 보이는 기러기는 뭍으로 나아간 기러기이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곳으로 시집을 갔어도 그 어려움으로 인해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고(도적을 받아들이지 않고) 힘차게 날개짓을 하니 가히 그 사랑의 힘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정도에 이르렀다. 곧 남편이 벌이가 힘들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힘찬 날개짓을 하겠다는 여인의 사랑이니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고 한다. 좋은 일만 함께 하겠다는 사랑이 아니라 굳은 일도 함께 하겠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2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初六】艮其趾 无咎 利永貞
【六二】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
【九三】艮其限 列其夤 厲 薰心
【六四】艮其身 无咎
【六五】艮其輔 言有序 悔亡
【上九】敦艮 吉

  간(艮)괘는 멈춤을 뜻하는 괘다. 멈추지 않고 쇠퇴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성장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멈추지만 간(艮)괘는 그러한 자연적인 멈춤이 아닌 사람의 멈춤을 말한다. 앞의 진(震)괘가 하늘의 도(道)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간(艮)괘는 그 하늘의 도(道)를 본받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너무 일찍 멈추어도 늦게 멈추지도 않아야 하며 단번에 멈추지도 말아야 한다. 성장이 언제 멈추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완만한 경사를 타고 내려가듯이 하여야 한다. 그래서 간 괘는 31번째 함(咸)괘처럼 부부관계를 예로 들어 멈춤의 도(道)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멈춤이 나 혼자만의 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면 그 조화로움을 찾아 편안하게 유종의 미를 거두는 멈춤이어야 할 것이다.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그 등에서 멈추고(艮其背) 그 몸을 붙잡지 않았기에(不獲其身) 그 뜰을 지나도(行其庭) 그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으니(不見其人) 허물이 없다(无咎)
  등에서 멈추고 그 몸을 붙잡아 뒤돌아보게 하지도 않았으니 서로가 일면식도 없는 것이다. 그 뜰을 지나도 그 사람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애초에 아무런 나아감이 없는 멈춤이었으니 그런 멈춤이라면 아무런 허물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멈춤은 근원적(元)인 멈춤이며 혼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멈춤이다. 만남이 없으면 이별이 생길 여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시당초 멈출 생각이었다면 시작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艮其趾 无咎 利永貞
그 발에서 멈추니(艮其趾) 허물이 없고(无咎) 이로움이 끝까지 지속된다(利永貞).
  함(咸)괘에서 부부관계를 통한 교감은 엄지발가락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 발에서 멈추는 것은 아주 초창기에 멈추는 것을 말한다. 아주 초기에 멈춘 것이므로 내적으로 허물도 없고 그 이로움이 끝까지 지속된다. 시작은 하였지만 시작하지 않는 것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
그 종아리에서 멈추니(艮其腓) 그 따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不拯其隨) 불쾌하다(其心不快).

  그 종아리에서 멈추니 이미 반쯤 나아가다 멈춘 것이다. 내가 멈춤으로써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 단계가 되었으니 이미 멈춤이 나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이 불쾌한 것은 당연하다. 이제는 조화로운 멈춤을 찾아야 한다. 함(咸)괘에서는 종아리에서 멈추는 것은 길하다고 했는데, 함괘에서 말하는 멈춤은 단순히 종아리의 애무를 멈추는 것을 말하고, 여기서의 멈춤은 전체적인 부부관계를 멈추는 것을 말한다.

 

艮其限 列其夤 厲 薰心
그 허리에서 멈추니(艮其限) 등살을 찢는 고통이고(列其夤) 위태롭고(厲) 애가 탄다(薰心)

  종아리에서 멈추는 것은 멈추어야 할 단계를 지나친 것이지만 그 허리에서 멈추는 것은 멈추지 말아야 할 단계까지 와서는 멈추는 것이다. 등살을 찢는 고통이며, 위태로움이며, 애태움이다. 전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조화로움 없는 멈춤이다. 자연은 거칠지가 않다. 산이 갑자기 우뚝 서 있지도 않으며 대낮이 끝나도 사람들이 놀랄 만큼 거칠게 멈추어 어둠을 두렵게 하지는 않는다. 조화의 법도는 거친 것을 거부하고 상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艮其身 无咎
그 몸을 붙잡고 멈추니(艮其身) 허물은 없다(无咎).
  허리까지 진행이 되었다면 관계를 끝내고 그 몸을 안아주며 멈추어야 하니 그래야 허물이 없다. 함(咸)괘에서 ‘관계가 끝난 후 등살을 애무함으로써(咸其脢) 후회가 없다(无悔)’고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예 시작을 하지 않던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초창기에 멈추어야지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단계를 넘어섰다면 그 일은 마무리를 하고 멈추어야 한다. 배려심을 멈추지는 말아야 하는 까닭이다.

 

艮其輔 言有序 悔亡
그 뺨에서 멈추어(艮其輔) 입술을 조리있게 움직이니(言有序) 후회가 없다(悔亡).

  함(咸)괘에서 뺨과 혀를 애무함으로써 끝내는 부부관계의 마지막을 설명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여성은 반복적으로도 다시 흥분을 느낄 수 있어 남성처럼 곧 몸과 마음도 허무감으로 돌아가지는 않기에 나의 기준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으로 마감을 하는 것이다. 완만한 경사로 평지와 이어지는 편안한 조화로움이다.

 

敦艮 吉
도탑게 멈추니(敦艮) 길(吉)하다.
  함(咸)괘에서 말했듯이 성(性)은 단순한 욕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교감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가벼운 입맞춤으로 도탑게 마무리를 하고 멈추어야 길(吉)한 것이다. 그래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1

震 亨 震來虩虩 笑言啞啞 震驚百里 不喪七鬯
【初九】震來虩虩 後 笑言啞啞 吉
【六二】震來厲 億喪貝 躋于九陵 勿逐 七日得
【六三】震蘇蘇 震行 无眚
【九四】震遂泥
【六五】震往來 厲 意 无喪有事
【上六】震索索 視矍矍 征 凶 震不于其躬 于其鄰 无咎 婚媾 有言

  진(震)괘는 우레, 벼락을 말한다. 하늘이 사람에게 주는 경고이자 가르침이다.

 

震 亨 震來虩虩 笑言啞啞 震驚百里 不喪匕鬯
우레(震)는 힘차다(亨) 우레가 거침없이 오니 무섭고 두려워(震來虩虩) 웃음과 말소리도 잦아든다(笑言啞啞) 우레가 백리를 놀라게 해도(震驚百里) 숟가락과 창주그릇은 떨어뜨리지 마라(不喪匕鬯)
  숟가락(匕)과 창주그릇(鬯)은 모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제사를 지낼 때의 엄숙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아무리 큰 일이 벌어져도 사람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러나 죽는 것은 천명이니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면서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니 곧 중용에서 말한 '도끼자루를 잡고 도끼자루를 만들려고 나무를 자르면서 어떤 규격으로 잘라야 하는지를 멀리서 찾으려는 것'[중용 제13장]과 같은 것이다. 단순한 사상(死傷)에 대한 두려움만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震來虩虩 後 笑言啞啞 吉
우레가 와서 무섭고 두려운(震來虩虩) 후(後)에도 웃음과 말을 조신하게 해야(笑言啞啞) 길(吉)하다.
  우레가 끝난 후 아무 일도 없듯 웃고 떠들지 말고, 하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라는 말이다. 단순한 사상(死傷)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라고 말한다. 중용에 “사람의 도리(道理)를 알고자 한다면 하늘의 이치를 알지 않을 수가 없다”[중용 제20장]고 하였다. 고래로부터 바른 길을 가지 않으면 천벌을 받고, 벼락을 맞는다고 하여 ‘벼락맞을 놈’이라는 욕설이 있다.

 

震來厲 億喪貝 躋于九陵 勿逐 七日得
우레가 와서 위태로우니(震來厲) 재물을 잃을까 걱정되어(億喪貝) 구릉으로 올라도(躋于九陵) 이미 잃은 것을 좆지는 말라(勿逐) 이레면 얻는다(七日得)
  재화는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7일은 음양오행의 순리에 따라 한번 순환하는 것으로 한번 순환하면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한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소탐대실 즉, 작은 것을 탐하여 큰 것을 잃지마라는 의미이다. 우레는 보통 많은 비가 동반된다. 그래서 비가 없는 ‘날벼락’이란 말이 생겼을 것이다. 우레의 강한 전기가 물을 타고 흐르기 때문에 젖고 물이 차기 쉬운 낮은 땅보다 높은 구릉으로 올라가야 안전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높은 곳이 더 위험하다고 한다.

 

震蘇蘇 震行 无眚
우레가 소소해도(震蘇蘇) 우레가 다 지나가야(震行) 재앙이 없을 것이다(无眚)
  소소(蘇蘇)하다는 말은 끝났는가 싶었는데 다시 살아나고 끝났는가 싶었는데 다시 살아나고 하는 것이다. 완전히 지나가야(行) 재앙이 끝난 것이니,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다. 조급한 마음이 화를 부르니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震遂泥
우레는 진흙을 따라 사라지는 법이다(震遂泥)
  벼락은 높은 물체를 향해 떨어지고 난 후 그 전류가 진흙을 타고 퍼진다고 한다. 그래서 젖은 땅에 누우면 더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비가 반드시 지금 와야 하는 지는 몰라도 비는 아래로 내리는 법칙에 어긋나지 않으며, 우레가 반드시 지금 와야 하는지는 몰라도 우레가 진흙으로 퍼져 사라지는 자연법칙을 거스르지는 않는다. 시작은 몰라도 끝은 알 수 있으니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왜 지금의 세상에 태어났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죽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알 수 있다.

 

震往來 厲 意 无喪有事
우레가 지나가더라도 다시 오는 것이니(震往來) 두려워하고(厲) 헤아려보라(意) 잃지 않으려면 할 일이 있다(无喪有事)
  우레가 한번 오고 평생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헤아려 마땅히 대비해야 한다. 요즘세상에서처럼 건물에 피뢰침을 설치하는 것을 뜻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하늘이 사람을 두렵게 한 뜻은 스스로 천리를 거스르지 않고 바르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해 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벼락맞을 짓을 하지는 않아야겠다는 그 바른 도(道)를 잃지 말라는 뜻이다.

 

震索索 視矍矍 征 凶 震不于其躬 于其鄰 无咎 婚媾 有言
우레가 색색할 때(震索索) 눈을 두리번거리며(視矍矍) 나아가는 것은(征) 흉(凶)하다. 우레가 몸에 떨어지지 않았고(震不于其躬) 그 옆에 떨어졌으니(于其鄰) 허물은 없겠지만(无咎) 혼인을 청한다면(婚媾) 말들이 있을 것이다(有言).
  색색(索索)한 것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멈춘듯한 상태를 말한다. 우레가 거의 멈추었을때 눈을 두리번거리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기회를 포착해 뭔가 이득을 챙기려는 조급함을 보이는 사람이다. 곧 날랜 기회주의자를 말함이다. 이 사람에게 벼락이 직접 떨어지지 않고 옆에 떨어졌으니 사람이 다치지는 않아서 허물은 없다. 그러나 "모진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다"고 했는데 그가 혼인을 청함은 곧 모진놈 옆으로 오라는 것이므로 여러 말들이 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우레가 멈춘 것이 아닌 색색(索索)한 시기이며 하늘의 경고가 끝나지 않은 시기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지만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더 빨리 잡아 먹힌다. ‘아 좋은말이구나’ 하고서는 금방 지나쳐 잊어버리는 그러한 찰나성과 가벼움을 경고하고 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50

鼎 元吉亨
【初六】鼎顛趾 利出否 得妾 以其子 无咎
【九二】鼎有實 我仇 有疾 不我能 即 吉
【九三】鼎耳革 其行 塞 雉膏不食 方雨虧悔 終吉
【九四】鼎折足 覆公餗 其形渥 凶
【六五】鼎黃耳金鉉 利貞
【上九】鼎玉鉉 大吉 无不利

  고래로부터 정(鼎)은 권력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하곤 했다. 중국 후한말의 위촉오의 대립기를 삼국정립(三國鼎立)의 시대라고 하고, 원나라 무종이 어머니와 동생과 권력을 나누었던 시대를 삼궁정립(三宮鼎立)의 시대라고도 한다. 정(鼎)이라는 물건에 새왕조가 주창하는 법률을 새겨넣기도 했다.

  정(鼎)은 솥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솥은 각종의 재료를 넣어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니, 곧 세금과 역(役)등의 제도를 통해 사회전체가 이로움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앞의 혁(革)괘가 천명을 바꾸는 혁명이었기에 혁명 이후에는 백성들과 그 권리의무관계를 새로이 해야 하는 것이다. 조세와 역(役)의 목적은 지배층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잘 요리해서 나누어 먹는 음식처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잘 관리되고 사용되어야 한다.

 

鼎 元吉亨
제도(鼎)는 초창기에 완비되어야 길하다(元吉亨)
  솥은 조세와 역(役)등의 의무를 위한 제도를 말하는데, 원(元)과 형(亨)사이에 있어야 길하다고 한다. 나라가 새로이 세워지면(元) 곧 세금, 노역 등의 제도를 완비하여 성장(亨)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鼎顛趾 利出否 得妾 以其子 无咎
발이 뒤집혀진 솥단지(鼎顛趾)는 나가는 것이 없어서 이롭다(利出否) 남는 돈과 힘으로 첩을 얻으면(得妾) 그 자식을 보게 될 것이니(以其子) 허물이 없다(无咎)
  거꾸로 뒤집혀 있는 솥단지는 혁명을 이루고 난 뒤의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기까지의 공백기간이다. 솥단지가 거꾸로 있으니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세금도 노동력도 징발하지 않는 것이니 그 남는 돈과 힘으로 첩을 얻어 자식을 보면 허물이 없다고 한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예전에는 남는 돈으로 얻고자 하였던 것은 첩을 두는 것이었기 때문일 지 모른다. 민초들은 당면한 현실에 민감하나 그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허물은 아닐 것이다.

 

鼎有實 我仇 有疾 不我能 即 吉
재료가 풍족한 솥단지(鼎有實)를 두고 나의 원수(我仇)가 병이 있다(有疾). 능히 내가 취할 수 있어도 하지 않으니(不我能) 그래야(即) 길(吉)하다.
  제도가 정비되고 이제 그 징수관이 재료를 잘 모아 담았는데,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거두어가는 그 징수관은 원수와도 같은 반갑지 않는 사람이다. 그 징수관이 병이 있어 내가 능히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역(役)의 의무를 적게 할 수 있고, 모아놓은 재료도 나의 이익으로 가져올 수 있는 편법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납세의 의무와 군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대로부터 변함없는 마음인 까닭이다. 그러나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아야 길하니, 세금과 역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역은 정당하게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는 방법은 누구나 제대로 세금을 내고 잘 관리 집행하면 결국은 적게 거둬도 충분할 것이니 궁극적으로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다고 본다.

 

鼎耳革 其行 塞 雉膏不食 方雨虧悔 終吉
솥단지의 귀가 뜨거워져(鼎耳革) 옮기는 것이(其行) 옹색해져(塞) 맛있는 살찐 꿩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으나(雉膏不食) 비가와서 후회를 없앨 것이니(方雨虧悔) 마침내 길하게 될 것이다(終吉).
  솥단지의 귀가 뜨거워져 옮길 수 없게 되었으니 모인 사람들이 살찐 꿩고기를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즉 모인 세금과 모인 노동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분배를 하지 못하는 집행의 문제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이 그대로 두지 않고 비를 내려서 뜨거워진 솥단지의 귀를 식혀주어 쉽게 옮겨서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니 끝이 길하다고 한다. 주역은 전체를 이롭게 하고자 하는 바른 일은 하늘이 도와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鼎折足 覆公餗 其形渥 凶
솥의 다리가 부러진다면(鼎折足) 공속이 뒤집혀 쏟아지고(覆公餗) 그 몸이 젖어버릴 것이니(其形渥) 흉(凶)하다.
  솥의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재료를 담았으니 곧,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고 지나치게 노동력을 징발한 것을 말한다. 공속(公餗)은 공공이 함께 먹어야 할 음식인데, 뒤집혀 쏟아지고 옮기던 사람의 몸이 데일 것이니 흉하다. 탐관오리의 횡포에 화가 난 민중들이 창고를 불태워버리는 것이 연상되는 효이다. 아무도 요리를 먹지 못한다.

 

鼎黃耳金鉉 利貞
솥단지는 황금손잡이와 쇠고리를 달면(鼎黃耳金鉉) 끝까지 이롭다(利貞)
  황금손잡이는 훌륭한 군주를 뜻하고 쇠고리는 잘 따르는 신하를 말한다. 즉, 훌륭한 군주가 신하를 잘 부려서 재정을 잘 관리하고 분배하면 끝까지 이롭다.

 

鼎玉鉉 大吉 无不利
솥에 옥고리를 달면(鼎玉鉉) 크게 길하니(大吉)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쇠고리는 군주의 명을 잘 따르는 신하를 말하지만, 군주의 지휘를 받아야만 하는 신하이다. 그러나 옥고리는 스스로 잘 관리하고 집행할 수 있는 능력있는 신하를 말한다. 바르고 재능도 있는 훌륭한 재정전문가가 더 대길하다고 하니, 우리역사로 비유하자면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보다는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더 선호한 듯 하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