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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80

  1. 2010.02.01 19. 臨卦(임괘) : 인생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숙명
  2. 2010.02.01 18. 蠱卦(고괘)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3. 2010.02.01 17. 隨卦(수괘) : 생명은 편안하고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려 한다.
  4. 2010.02.01 16. 豫卦(예괘) : 사람에게 임무를 완수하라고 맡긴 천명(天命)이 있다.
  5. 2010.02.01 15. 謙卦(겸괘) : 지극한 겸손은 남을 위해 애쓰는 것이다.
  6. 2010.02.01 14. 大有卦(대유괘) : 가진 자는 부(富)를 명예롭게 사용하라.
  7. 2010.02.01 13. 同人卦(동인괘) : 함께 모여서는 권력이 아니라 도(道)를 추구하라.
  8. 2010.02.01 12. 否卦(비괘) :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9. 2010.02.01 11. 泰卦(태괘) :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10. 2010.02.01 10. 履卦(리괘) : 하고 싶을 때가 아니라, 해야 할 때 말해야 한다.
  11. 2010.02.01 9. 小畜卦(소축괘) : 가정에서의 가장 큰 경사는 자식을 보는 것이다.
  12. 2010.02.01 8. 比卦(비괘) : 경쟁은 자기 자신과의 겨룸이다.
  13. 2010.02.01 7. 師卦(사괘) : 전쟁은 생명을 보살피는 것이 가장 중하다.
  14. 2010.02.01 6. 訟卦(송괘) : 다툼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여야 한다.
  15. 2010.02.01 5. 需卦(수괘) : 바르게 산다면 청하지 않은 세 명의 손님이 찾아온다.
  16. 2010.02.01 4. 蒙卦(몽괘) :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17. 2010.02.01 3. 屯卦(준괘) : 귀인은 때가 되면 찾아올 것이니 서둘지 마라.
  18. 2010.02.01 2. 坤卦(곤괘) : 죽음, 그 피할 수 없는 명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19. 2010.02.01 1. 乾卦(건괘) : 시간, 장소, 사람, 도리를 알아야 순탄하다
  20. 2010.02.01 중(中)과 중용(中庸)의 관념
  21. 2010.02.01 유학의 명분론(名分論)과 정명사상(正名思想)
  22. 2010.02.01 주역용어해설 (3) 왕(往)과 부(孚) 등등
  23. 2010.02.01 주역용어해설 (2) 길(吉)흉(凶) 등등
  24. 2010.02.01 군자(君子)란 어떤 사람인가?
  25. 2010.02.01 주역용어해설 (1) 원형리정(元亨利貞) 1
  26. 2009.10.01 명절이 반갑지 않은 사람들과 참된 예법(禮法)
  27. 2009.09.28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신화 속 오이디푸스
  28. 2009.08.26 효(爻)의 순서와 명칭
  29. 2009.08.20 주역 점치는 방법 (1개 주사위법)
  30. 2009.08.20 주역 64괘 상하괘 도해(圖解)
19

臨 元亨利貞 至于八月 有凶
【初九】咸臨 貞吉
【九二】咸臨 吉 无不利
【六三】甘臨 无攸利 既憂之 无咎
【六四】至臨 无咎
【六五】知臨 大君之宜 吉
【上六】敦臨 吉 无咎

  임(臨)괘는 다스림을 뜻하는 말이지만, 원형리정(元亨利貞)과 관계하는 ‘하늘의 다스림’을 말하니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숙명(宿命)이다. 순탄하게 원형리정의 변화의 과정을 겪으려면 때가 맞아야 하고(乾) 자리가 맞아야 하고(坤) 사람을 만나야 하고(屯) 노력해야 하지만(蒙) 그것만으로 순탄한 원형리정의 변화를 겪을 수는 없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교통사고를 만나기도 하여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를 겪을 수 없게 되기도 하니, 이러한 인간이 장악할 수 없는 우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숙명이라고 한다. 『중용』의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하늘과 땅처럼 위대한 존재에게도 사람들이 서운해 할 일이 있다’[중용 제12장]는 것이다.

 

臨 元亨利貞 至于八月 有凶
숙명(臨) 역시 변화의 순리(元亨利貞)를 좌우한다 그러나 8월에 이르면(至于八月) 흉함이 있다(有凶)
  씨로부터 시작해(元)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사라지게 되는(貞) 순탄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려면 하늘의 뜻이 맞아야 한다. 8월은 더위의 정점(양기의 최고점)을 지나는 시간이다. 즉, 숙명에 대해 극단으로 치우쳐 받아들이면 흉하다. 양의 극단은 분노로 폭발하는 것이며, 음의 극단은 체념하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봉황이 날아오지 않고 황하에 상서로운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구나”[논어 제9편 자한 제9장]라고 아쉬워 하셨고, 은자(隱者)들로부터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는 자’라고 비웃음을 샀지만, 최선을 다해서 사명을 다 하셨다.

 

咸臨 貞吉
마음으로 교감하여 숙명(咸臨)을 맞음은 끝까지 길하다(貞吉).
  유전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나기도 하고, 고아가 되기도 하고,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교통사고가 나기도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숙명을 바라보는 마음은 원망하는 마음이 아니라 교감하는 마음이어야 길하다. 하늘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을 다하여 숙명이라는 손님을 거부하지 않으니 곧 어렵고 힘들어도 주어진 삶을 사랑하는 자세를 견지하라는 말이다.

 

咸臨 吉 无不利
마음을 다하여 숙명(咸臨)을 따름은 길(吉)할 뿐 아니라,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아프리카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미국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조선시대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현세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어 사람마다 어찌할 수 없는 정해진 숙명적인 삶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싫어도 나의 부모가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남자가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흑인이 백인이 될 수는 없다.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한탄하고 원망하여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해진 숙명 속에서의 '나'를 사랑하고 나의 주위를 보듬어야 한다는 주역의 가르침이다. 공자께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아래로 인간사를 배워 위로 천리를 깨달았다”[논어 제14편 헌문 제35장]고 하셨다.

 

甘臨 无攸利 既憂之 无咎
달콤한 숙명(甘臨)을 꿈꾸면 유리할 것이 없으나(无攸利) 뉘우치고 근심함이 있다면(既憂之) 허물이 없다(无咎)
  나의 부모가 재벌이라면 나에게 로또가 당첨된다면 하는 달콤한 상상은 현재의 부모님을 원망하게 하고, 하늘을 원망하게 한다. 그러한 달콤한 숙명을 꿈꾸면 유리할 것이 없다. 하지만, 과거에 그러했더라도 깨달음이 있어 뉘우치고 반성을 하였다면 허물이 없다. 주역에서 ‘고치면 그것으로 좋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효사가 참으로 많다. 공자 말씀하시길 "잘못을 하고서도 고치지 않으려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논어 위령공 제15편 제30장]고 하셨으니, 고치지 않고 궁색한 변명을 찾고 잘못을 합리화 시키려는 것이 문제이다.

 

至臨 无咎
최선을 다해서 숙명(至臨)에 순응함은 허물이 없다(无咎).
  인생 일체가 ‘하늘의 뜻'이라고 ‘숙명'이라고 핑계를 삼고 수동적으로 살려고 하는 나약함을 가져서는 안되며, 반대로 좋은 숙명에 처한 이도 거만하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하늘이 그렇게 다스린(臨) 이유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는(至) 것이 지림이니, 원망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 허물이 없다. 가난이 싫다고 가족과 단절하여 뛰쳐 나가고, 병든 부모를 부양하지 않고 버리는 사람이 문제이다.

 

知臨 大君之宜 吉
숙명을 아는 것은(知臨) 임금의 뜻(大君之宜)이므로 길(吉)하다.

  숙명의 진의를 깨달으면 사명(하늘이 맡긴 임무)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주어진 숙명적인 상황을 한탄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 사명을 다하여 조화를 이루는 세상은 임금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니 길하다.

 

敦臨 吉 无咎
절도 있게 숙명을 따르니(敦臨) 길(吉)하고 허물이 없다(无咎).
  세상만사가 모두 숙명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난 신체와 태어난 고향은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삶은 사람의 노력으로 개척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중용』에 “남이 한 번에 그리하면 나는 백 번 할 것이며 남이 열 번에 그리하면 나는 천 번을 하면 된다”[중용 제20장]고 하였으니, 숙명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발전적인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 곧 숙명에 대해서 절도를 지키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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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蠱 元亨 利涉大川 先甲三日 後甲三日

【初六】幹父之蠱 有子 考 无咎 蠣 終吉

【九二】幹母之蠱 不可貞

【九三】幹父之蠱 小有悔 无大咎

【六四】裕父之蠱 往 見吝

【六五】幹父之蠱 用譽

【上九】不事王侯 高尙其事

  고(蠱)는 산 아래에 바람이 부는 괘이다. 인간의 욕망은 양면성이 있다. 긍정적으로는 삶의 동력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는 괴로움의 뿌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노력여하에 따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개개인이 최고의 에너지를 발산하여 발전된 사회가 이루어졌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반면 그 편리해진 만큼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70억에 가깝게 된 세계인구를 따져볼 때 한국인의 생활수준은 상위에 있으며 부족하지 않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라는 녀석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형(荊)에 대해 말씀하시며 “조금의 재산을 갖게 되자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하였고, 조금 더 늘어나니 지극히 갖추어졌다 하였으며, 더 가지게 되자 지나치게 대단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논어 제13편 자로 제8장]고 하시며 칭찬하셨다. 만족할 줄 알면 이미 부자이며, 만족을 모르면 가난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蠱 元亨 利涉大川 先甲三日 後甲三日

욕망(蠱)은 근원적으로 혹은 성장기에 자라나는 것이니(元亨) 휘둘리지 말고 큰 강을 건너듯 과감하게 나아감이 이롭다(利涉大川) 어렵고 고통이 따르나(先甲三日) 절제하여야 한다(後甲三日).

  근원적인 욕망은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의 동물적인 감각적 욕망이며, 성장하면서 생긴 욕망은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 등의 사회적 욕망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고(蠱)는 그릇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이니 욕망이 중용의 선을 넘은 것을 말한다. 갑은 십간 즉,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갑을 말하니, 선갑삼일은 신(辛)이고 후갑삼일은 정(丁)을 말한다. 신(辛)은 고생을 뜻하고 정(丁)은 못처럼 바로 서 있다는 뜻을 나타내며 강하고 굳건한 것을 상징한다. 탐욕에 휘둘리지 말고 큰 강을 건너듯 과단하게 나아가야 하니, 힘들어도 절제를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幹父之蠱 有子 考 无咎 蠣 終吉

아버지의 욕망을 바로함은(幹父之蠱) 자식이 있어(有子) 생각할 수 있다면(考) 허물이 없고(无咎) 위태롭기는 해도(蠣) 마침내 길할 것이다(終吉).

  아버지의 욕망은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이성의 절제력이 본성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본래 부양의 의무감은 남자의 본능이라고도 한다. 처 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있어,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면(考)’ 태생적으로 강한 이성의 힘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幹母之蠱 不可貞

어머니의 욕망을 바로하려는 것은(幹母之蠱) 고집하면 좋지 못하다(不可貞)

  역할분담의 시대에 어머니의 일과 아버지의 일이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욕망은 바깥에서 도적질을 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어머니의 욕망은 가정을 조금 힘들게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요즘처럼 명품중독과 주부도박으로 집밖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없었던 시대였고, 한계가 있었음이니, 억지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아도 시간이 바로잡아 줄 것이다.    

 

幹父之蠱 小有悔 无大咎

아버지의 욕망을 바로함은(幹父之蠱) 작은 후회가 있겠지만(小有悔) 큰 허물은 아니다(无大咎).

  아버지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자식의 마음에 작은 후회를 남기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들어주어 바로하게 된다면 큰 허물이 될 것은 아니다. 

 

裕父之蠱 往 見吝

오히려 아버지의 욕망이 넘침에도(裕父之蠱) 그대로 두면(往) 궁색함을 만나게 된다(見吝)

  공자께서는 "부모님을 모실때는 허물이 있으면 간곡하게 권고한다. 만일 들어주지 않더라도 여전히 존경하면서 거스르지 않으며, 비록 괴롭더라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논어 제4편 이인 제18장]고 하셨다.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효’이고 무조건적으로 나이 많은 이를 섬기는 것이 ‘공경’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맹자께서도 '부모께 아첨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다가 부모를 불의(不義)한 행위에 빠지게 하는 것'을 불효의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幹父之蠱 用譽

아버지의 욕망을 바로하여(幹父之蠱) 명예롭게 사용하도록 하라(用譽).

  겸손을 뜻하는 겸(謙)괘에서 언급하였지만, 공자께서 말씀하신 "자기가 서고자 하는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 서게 하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 도달하게 하는 것"[논어 제6편 옹야 제30장]을 의미하니 곧 휘겸(撝謙)과 다르지 않은 뜻이다. 아버지의 욕망으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헤아려,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이 욕망을 이루도록 애쓰시게 하는 것이 욕망을 명예롭게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무인도에서 배고픔속에 죽어가면서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는 동생을 위로하며, “우리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버려져 죽어가는 고통이 어떠한지 알게 되었으니,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반드시 그러한 가엾은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자”고 하셨던 관세음보살의 전생이야기가 떠 오른다. 나의 고통을 통해 남의 고통을 보며, 나의 욕망을 통해 남의 욕망을 보아야 한다.  

 

不事王侯 高尙其事

왕후의 자리일지언정 버리고(不事王侯) 더 고원한 가치를 추구하여야 하는 것이다(高尙其事)

  백이, 이윤, 공자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맹자께서는 “옳지 않은 일을 한 가지만 저지르거나 죄없는 사람을 한 명만 죽인다면 곧바로 천하를 얻게 해 준다 유혹하더라도 그 분들은 결코 그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맹자 공손추 상]고 말씀하셨다. 이완용이 조선의 최고 갑부가 되고 일본의 귀족이 되었던 반면에 만세(萬世)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달콤한 유혹과 욕망을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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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隨 元亨利貞 无咎
【初九】官有渝 貞吉 出門交 有功
【六二】係小子 失丈夫
【六三】係丈夫 失小子 隨 有求 得 利居貞
【九四】隨 有獲 貞 凶 有孚 在道 以明 何咎
【九五】孚于嘉 吉
【上六】拘係之 乃從維之 王用亨于西山

  신하는 임금을 따르고, 자식은 부모를 따르고, 부인은 남편을 따르라는 그 따름은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소인유(小人儒)들이 그렇게 변질시켜 놓은 것일 뿐이다. 왕이 왕도를 행하지 않으면 왕이란 잘못된 이름을 가진 악한에 불과하니 이름을 바로잡기 위해 엎어버려도 된다고 맹자께서 말씀하셨으니, 마찬가지로 남편이 남편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부모가 부모의 도리를 다 하지 않으면 남편이 아니며 부모가 아니다. 자식을 학대하고 심지어 성 노리개로 삼는 자가 부모라고 해서 자식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순자께서도 “도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지 않으며, 의로움을 따르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셨고, 공자께서도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논어 제12편 안연 제11장]고 하셨으니, 유학은 「정명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수(隨)괘에서 말하는 따름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따름이며 맹목적 복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隨 元亨利貞 无咎
따르는 것(隨)은 순탄하게 변하도록 하니(元亨利貞) 허물이 없다(无咎)

  따름의 도(道)는 따뜻한 곳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따름이다. 주역의 첫 4괘는 원형지정의 순탄한 변화를 맞이하기 위해, 시간을 따르고(乾) 자리를 따르고(坤) 사람을 따르고(屯) 바른 도리를 따르는(蒙) 것을 말했다. 여기서는 그러한 따름의 도(道)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따름이어야 태어나서(元) 자라고(亨) 결실을 맺고(利) 죽는(貞)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를 맞이할 수 있어 허물이 없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 아니라 따스한 봄에 씨를 뿌리고(元) 메마른 모래밭이 아니라 비옥한 땅에 씨를 뿌리고(坤) 밟아 죽이려는 자가 아니라 거름을 주고 보살펴주려는 사람을 만나고(屯) 그늘 속에 있으면 태양을 더 잘 받기 위해서 몸을 비트는(蒙) 그러한 따뜻하고 편안함을 지향하는 따름이어야 한다.

 

官有渝 貞吉 出門交 有功
관직에 변화가 있는 격변의 시기(官有渝)에는 끝까지 길 하려면(貞吉) 문밖으로 나와서 사귐을 가져야(出門交) 이루는 것이 있다(有功)
  관직에 변화가 있는 것은 권력이 부딪히는 격동기이기 때문이다. 주역은 그러한 격동기라면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 밖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격동기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사귐, 곧 사람(人)을 통해 찾아야 한다고 한다. 문밖으로 나와서 사귐을 가지는 것은 두루두루 널리 사귐을 갖는 것을 뜻한다. 따름의 도(道)는 수동적인 웅크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격변의 시기를 따르는 도(道)는 적극적으로 문 밖을 나서는 것이다.

 

係小子 失丈夫
소인과 관계(係小子)하는 사귐은 장부를 잃게 된다.
  문 밖을 나와 두루두루 사귐을 가지더라도 소인배와 교제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소인(小人)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필부필부하는 보통의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의 소자(小子)는 정말로 소인배를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이다. 장부(丈夫)는 사(師)괘에서는 ‘신체가 건장한 남자’로 풀었지만, 여기서는 ‘마음이 건장한 남자’를 의미하니 군자(君者)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소인배와는 함께 어울리고 있으면 장부는 그런 사귐을 가지는 나와도 상종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係丈夫 失小子 隨 有求 得 利居貞
장부와 관계(係丈夫)하여 소인배를 잃는다 해도(失小子) 그러한 사귐을 따르고서야(隨) 구원이 있고(有求) 득이 있게 된다(得) 그렇게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居貞) 이롭다(利)
  두리번거리면서 다른 기회를 찾으려고 잠시 의탁하는 따름이 아니라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지조(志操)있는 따름을 말한다.

 

隨 有獲 貞 凶 有孚 在道 以明 何咎
따르면서(隨) 사사로이 챙기면(有獲) 끝까지(貞) 흉(凶)하니, 뜻을 가지고(有孚) 도리를 하다고(在道) 숨김이 없으면(以明)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何咎)
  따르면서 사사로운 챙김을 추구하면 어찌 상대도 이로움을 따져서 대하지 않겠는가?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이 개입하면 그 교류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孚于嘉 吉
뜻을 아름다운 것에 두어야(孚于嘉) 길(吉)하다.
  짐승들도 따뜻한 곳을 찾아서 모여든다. 인간도 본능으로 어느 곳이 따뜻한 곳인지 안다. 맹자께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설명하며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 할 때 놀라며 구하려는 것은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며,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 위해서도 아니며, 아이의 울음소리를 싫어해서도 아니고 본능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으니, 보통 사람들은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샘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배워서 영리해져서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 하면 도움을 주러 달려가지 않는다. 천성적으로는 모성(母性)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 영리해져서 낙태를 하고 제 이익을 꾀하곤 한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사람의 천성은 서로 가깝지만, 학습으로 멀어진다"고 하셨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장]. 바른 도리를 들으면 그것이 따뜻한지를 누구나 알지만 ‘그렇게 살면 손해다’라는 영리함을 개입시킴으로써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拘係之 乃從維之 王用亨于西山
구속이 되고 얽매이게 되더라도(拘係之) 사람들이 따르고(乃從) 받쳐주게 될 것이니(維之), 임금이라면 서산에 제사를 드려 물어볼 일이다(王用亨于西山)
  뜻을 아름다운 곳에 두면 사람들이 좋아하여 따르게 될 것이니, 임금이라면 서산에 제사를 드려 확인해 보라는 말이다. 뜻을 아름다운 곳에 두었다면 백성들이 따를 것이요, 뜻이 바르지 못하다면 백성들이 외면하게 될 것이다. 교활하고 아름답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까지도 무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르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어야만 박수를 친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좋은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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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豫 利 建侯行師
【初六】鳴豫 凶
【六二】介于石 不終日 貞吉
【六三】盱豫 悔 遲 有悔
【九四】由豫 大有得 勿疑朋盍簪
【六五】貞疾 恒 不死
【上六】冥豫 成 有渝 无咎

  예(豫)는 코끼리(象)가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무덤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형성문자이다. 일반적으로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을 뜻하지만, 주역에서의 예(豫)괘는 ‘죽을 때와 자리를 아는 것’을 의미하니, 곧 하늘이 생명을 세상으로 보내어 맡긴 임무를 뜻한다. 필부필부(匹夫匹婦)하는 소인의 사명은 만나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먹고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고, 대인의 사명은 전체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하늘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재능을 부여한 이유를 그 재능을 사용해 공공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나 현대에는 뛰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라고 한다.


豫 利 建侯行師
사명(豫)은 결실(利)을 맺는 것이니 제후를 세우거나 군사를 일으키는(建侯行師) 것처럼 큰 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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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나라는 천자가 큰 영토를 각 지역별로 제후를 세워 실질적 통치를 맡기고 조근, 군대파견 등의 구속을 통해 충성을 맹세 받는 형태의 통치체제였는데, 훗날 제후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여하튼 제후를 세우거나 군사를 일으켜 응징하는 일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 큰 일이다. 예(豫)는 제후를 세우는 것처럼 큰 뜻을 이루어 결실(利)을 맺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鳴豫 凶
사명을 떠벌리면(鳴豫) 흉(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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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가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도원결의'를 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뜻을 펼치며, 같은 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같은 날 죽자는 의로운 맹세였다. 그러나 농사꾼 행세를 하기도 하면서 품은 뜻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 유자께서는 “신의는 정의로움에 비추어 이행하는 것이다”[논어 제1편 학이 제13장]고 하셨으니, 곧 정의롭지 않으면 약속을 저버려도 된다는 말씀이셨다.

  유학에서는 꽉 막힌 원칙을 배격했다. 독립투쟁을 하던 의사들께서 동지들을 팔지 않고 “모른다”고 했던 것이 거짓말이라서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명을 숨기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잠용일 때 움직이려 해서는 안되니(潛龍勿用) 때가 도래하기 까지 숨죽이고 숨길 수도 있어야 한다.

 

介于石 不終日 貞吉
돌에 새긴 듯(介于石) 굳고 단단하게 맹세를 하고 종일(終日) 멈추지 않으면(不) 마침내 길하다(貞吉)
  때론 숨기고 때론 어려움을 겪더라도 사명을 돌에 새긴 듯 굳고 단단하게 유지를 하면 끝내 좋은 결실을 얻게 된다. 현실이 어려워도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종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건(乾)괘의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어두움을 경계하는 것(終日乾乾 夕惕若)’과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盱豫 悔 遲 有悔
턱을 치켜 들어야 할 만큼의 분에 넘치는 사명은(盱豫) 뉘우침이 있으리니(悔) 시간만 낭비하며(遲) 후회만 남길 것이다(有悔)
  토끼가 호랑이를 잡아먹으려 해서는 안되니, 하늘이 토끼로 세상에 보내었을 때는 토끼로 살면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자연의 조화에 따르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사람을 분별하여 세상에 보낸 이유도 같은 뜻일 것이니 천명이 다르므로 턱을 치켜들어 분수를 지나치면 후회만 남기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옛 시대는 ‘군주주의’의 시대였고, 그래서 공자께서도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천자의 지위를 탐내지는 않으셨다.

 

由豫 大有得 勿疑朋盍簪
사명을 다하려 한 까닭에(由豫) 크게 얻는 것이 있었다면(大有得) 도와준 친구를 의심하지 않아야 비녀를 꽂을 수 있다(勿疑朋盍簪).

  여인의 치장은 비녀를 꽂음으로써 완성이 되는 것이니, 도와준 친구를 의심하지 않아야 비로소 정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얻으려 근심하고 잃을까 근심한다”[논어 제17편 양화 제15장]는 의미이니, 얻고 나서 잃을까 근심하여 도와준 친구까지도 의심하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다. 건(乾)괘에서 용이 비상하는 전성기가 되었다고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고 마땅히 은인과 함께 그 전성기를 누리라고 하는 것에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貞疾 恒 不死
마지막에 친구를 의심하게 되는 병이 생기면(貞疾) 계속되어(恒) 그 병통을 죽여 없애지 못하게 된다(不死).
  적과 동지가 하루 아침에 뒤바뀌는 경우를 역사에서 많이 목격하게 된다. 믿음이 사라지면, 부리던 자는 자신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고, 따르던 자는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는 주인에게 삶아 먹힌다는 '토사구팽'을 염려하여 두려움에 떨기 마련이니, 그 병통을 없애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貞)은 죽음을 뜻하고 곧음을 뜻하고 완성을 뜻하고 끝을 뜻하기도 하니, 모두 죽음처럼 더 이상 변화의 여지가 없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녀를 꽂는 마지막(貞)에 생기는 친구에 대한 의심의 본질은 두려움일 것이다. 그렇게 정점에 이르러 생겨난 두려움은 없던 상태로 되돌아 가지 않는 이상 절대로 없앨 수 없는 “잃을까 근심하는 두려움"일 것이다. 

 

冥豫 成 有渝 无咎
어두운 사명(冥豫)이 성공할 수도 있으나(成) 변신을 해야(有渝) 허물이 없다(无咎).

  쿠테타도 때로는 성공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사로운 이익과 영화를 위해 추구한 쿠테타(권력찬탈)라면 성공하여도 잠시일 뿐일 것이다. 공자께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곧아야 할 것인데, 곧지 않은 사람은 요행히 재난을 면하고 있을 따름이다”[논어 제6편 옹야 제19장]고 하셨다. 바르지 못한 것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니, 정의가 결국은 승리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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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 亨 君子 有終

【初六】謙謙 君子 用涉大川 吉

【六二】鳴謙貞吉

【九三】勞謙 君子有終 吉

【六四】无不利 撝謙

【六五】不富以其鄰 利用侵伐 无不利

【上六】鳴謙 利用行師 征邑國

  고전은 용어에 대한 의미를 단번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독서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논어에서 겸손을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과 같은 단계에서 언급한 곳은, 공자께서 “군자는 의로움을 바탕으로 삼고, 예로써 행하고, 겸손으로 표현하며 신의로써 완성한다(義以爲質,禮以行之,孫以出之,信以成之)”[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7장]고 하신 부분이다. 마땅히 낮추어야 할 때 즉, 어른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예(禮)이지 겸(謙)이 아니다. 겸손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임에도 자신을 낮추는 것을 뜻하는 반면, 오히려 자기에게는 더 엄격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자기를 나무람을 엄격히 하고 남을 나무람을 가볍게 하면 자연히 원망이 멀어질 것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5장]고 하셨다. 자기에게 더 엄격하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게 되고 남에게 더 관대하게 된다. 자랑하지 않아야 겠다고 낮추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낮추게 되는 것이다. 주역은 자신을 낮추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남을 높여주는데 애쓰는 적극적인 겸손까지 강조하고 있다.

 

謙 亨 君子 有終

겸손(謙)의 덕을 성장기(亨)에 익히면 군자로서(君子) 마침이 있다(有終)

  주역에서 언급하는 변화의 순리 원(元) 형(亨) 리(利) 정(貞)에서 유독, 형(亨)의 시기에 대해서 많은 언급이 되고 있는 이유는 근본(元)을 바꾸기는 힘들지만, 성장(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떤 결실(利)을 맺고 죽는지(貞)가 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키를 더 키우기 위해서 애쓸 수 있는 시간은 성장기이다. 겸손은 사람이 성장기(亨)에 잘 익혀야 쉬이 변치 않으므로 군자로써 생을 마칠 수 있게 된다. 성장기에 얻은 품성이 평생을 가는 것이다.

 

謙謙 君子 用涉大川 吉

겸손의 덕이 넘치는(謙謙) 군자는(君子) 큰 내를 건너는(用涉大川) 과단성을 갖추기만 하면 길하다(吉)

  겸손의 덕이 넘치는 군자는 겸손이 지나침을 말한다.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지나치게 되면 과단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길로 나가가려면 과단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鳴謙貞吉

사람들의 명성을 얻은 겸손은(鳴謙) 끝까지 길하다(貞吉).

  명겸(鳴謙)은 세상이 널리 알아주는 겸손을 말한다. 겸손한 척하는 사람이라면 명성을 탐하겠지만,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라면 명성을 탐하지 않을 것이니, 그런 사람이 얻은 명성이라면 비단 위에 꽃을 더한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勞謙 君子有終 吉

노력하여 겸손을 이루어도(勞謙) 군자로서 마침이 있을 것(君子有終)이니 길(吉)하다.

  성장기(亨)에 겸손의 덕성은 쌓아야 함은 끝까지 바뀌지 않아 군자로서 마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를 지나 거만하고 타인을 업신여기던 사람이 늦은 나이에 개과천선하면 어떻게 되는가? 마찬가지로 군자로서 마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공자께서 “사람이 개과천선하여 진보하고자 하면 마땅히 현재의 깨끗함을 용납해야 하니, 이것은 과거를 감싸주자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7편 술이 제29장]고 하셨다. 고치면 그것으로 좋고 과거를 허물 삼을 필요가 없다.

 

无不利 撝謙

이롭지 않음이 없구나(无不利) 나보다 남을 높이는 겸손(撝謙)이여!

  휘겸(撝謙)이란 자신을 낮추는 수준을 넘어서 힘써서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겸손을 말한다. 공자께서는 ‘자기가 서고자 하는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 서게 하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 도달하게 만드는 것’은 인(仁)의 한 모습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논어 제6편 옹야 30장] 그래서 공숙문자가 자신의 가신이었던 선을 천거하여 자기와 동일한 관직으로 오르게 애쓴 것을 두고 “참으로 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논어 제14편 헌문 제18장]라고 감탄하시며 칭송하셨다.

 

不富以其鄰 利用侵伐 无不利

부유함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에(不富以其鄰) 침략하여 응징해도(利用侵伐)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부유함이 아니라 겸손의 덕으로써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므로, 해를 끼치는 잘못된 자를 응징하여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침략하여 응징함은 남을 위해 애쓰는 휘겸(撝謙)의 뜻을 실천하는 자기 희생이요, 자기 낮춤이기 때문이다.

 

鳴謙 利用行師征邑國

명성을 얻은 겸손(鳴謙)은 군사를 일으켜 이웃나라를 정벌해도 이롭다(利用行師征邑國)

  휘겸(撝謙)의 군자가 명성까지 얻었다면 이웃나라를 정벌해도 이롭다고 한다. 『맹자: 양혜왕 하편』에서 맹자께서는 ‘천하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었으므로 동쪽으로 향하면 서쪽에서 원망하고 남쪽으로 향하면 북쪽에서 원망하며 어찌 우리나라의 정벌을 뒤로 미루시는가?’하였다며 『서경』을 인용하여 해방전쟁을 말씀하셨다. 남을 높여주기 위해 애쓰는 휘겸(撝謙)의 군자가 이웃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정복전쟁이 아니라, 이웃 백성들을 삶을 높여주기 위해서 해방전쟁으로 나가는 것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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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九】无交害 匪咎 艱則 无咎
【九二】大車以載 有攸往 无咎
【九三】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
【九四】匪其彭 无咎
【六五】厥孚 交如 威如 吉
【上九】自天祐之 吉 无不利

  많은 것은 어쨋건 좋은 것이다. 하지만 부(富)가 행복으로 가기 위한 절대요건은 아닐 것이다. 자식이 많다고 자식복이 있는 것이 아니듯, 재산이 많다고 재복이 있는 것도 아니요, 일이 많다고 일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식으로 인해 근심이 없는 것, 재물로 인한 근심이 없는 것, 일로 인해 근심이 없어야 하는 것, 그것이 자식복, 재복, 일복이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갈망하던 모든걸 가졌던 석가모니께서는 행복하지 않다는 고민에 빠져서 길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결국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아 얽매이지 않는 것이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되셨다는데, 자유주의라고 규정된 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날개는 돈에 묶이고, 남의 눈에 묶여 자유롭게 날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大有 元亨
많이 가진 것(大有)은 태어나(元) 성장(亨)하기데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이 나이 40을 기준으로 선천운과 후천운을 구별하기도 한다. 나이 40까지는 부모의 영향을 받는 다는 뜻인데, 링컨도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으니, 링컨이 동양사상과 교감이 있었던 것 같아 흥미롭기도 하다. 자식은 싫건 좋건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외모와 체질을 물려받고 가진 재물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모든 것은 변하니 그 영향력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성장(亨)하기까지는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고 한다.


无交害 匪咎 艱則 无咎
사귐에 해로움이 없어야(无交害) 허물이 없다(匪咎). 어려운 것(艱)이지만 그래야(則) 허물이 없다(无咎).
  주역은 서두의 ‘건(乾)곤(坤)준(屯)몽(蒙)’괘를 통해, 시기를 알고, 자리를 알고, 사람을 알고, 노력해야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순조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결국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다. 자기(노력)와 타인(만남)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맹자께서는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보다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 사이의 화합보다 못하다”[맹자 공손추 하]고 하셨다. 많이 가진 대유자는 오히려 사람을 얻기가 더 어렵다. 가진 것이 많은 자 주위에는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진 것이 많으면 도적을 만나기 쉽고, 가진 것이 없으면 친구를 만나기 쉽다’고 하였다. 마음으로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우니 대유자는 사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大車以載 有攸往 无咎
큰 수레에(大車) 짐을 가득 실어두고(以載) 시간을 보내도(有攸往) 허물이 없다(无咎)
  많이 가진 것을 수레에 실어 잘 비축해 두는 것이다. 가진 것을 쓰지 않으려는 것은 없는 것과 같고, 시기(乾)와 자리(坤)에 맞지 않게 함부로 사용해서도 안되니, 때를 기다려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 “사람이 멀리 내다보고 고민해보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날 근심이 생길 것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2장]고 하신 것도 그러한 대비를 말씀하신 것이다.

 

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
공공의 일에 참여하여(公用) 천자를 위해 베푸는 향연(亨于天子)은 소인이라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小人弗克)
  천자를 위해 제후들이 베푸는 향연은 천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자를 비롯, 공곡의 복을 도모하고, 또 음식과 가무를 모인 사람들이 함께 먹고 즐기는 전체를 위한 행사였다. 그런데 이 공익적인 소비를 위해 돈을 내 놓아야 한다면 소인이라면 아까워 견디지 못한다는 뜻이다. 소인(小人)은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사사로움을 가장 중히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匪其彭 无咎
군자라도 요란하게 하지 않아야(匪其彭) 허물이 없다(无咎).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가진 것을 사용할 줄 아는 군자라도 요란하게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좋은 집을 장만하고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여 자기를 챙기는 것이 소인의 요란스러움이라면, 베푸는 것이기는 하지만 크게 이름을 광고하여 기부를 하는 것 같은 것이 군자의 요란스러움이다. 논어의 첫 장부터 언급되어 가장 많이 반복되고 있는 가르침이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말라’는 말이다.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며 요란하게 내 놓지는 말아야 한다.

 

厥孚 交如 威如 吉
마음으로(厥孚) 사귀어(交如) 위엄을 세워야(威如) 길(吉)하다.
  대유자는 참된 사귐을 가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가진 것으로 사귀려고 해서도 안 된다. 마음과 신념으로 함께 하는 사귐이 되어야 한다. 자공이 공자께 벗과의 사귐을 여쭈자 “그를 충심으로 권고하고 선으로 인도하다가 만일 들어주지 않으면 곧 그쳐서 모욕을 받지 않아야 한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3장]고 하셨다. 허물을 말해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도 하지만, 지나치면 강요며 교만일 따름이다. 충분한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또 나의 행위를 통해 깨닫게 배려하고 도저히 스스로 고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조심스런 마음으로 충고해 주어야 한다. 위엄을 세운다는 뜻은 이러한 친구지간의 도리(道理)와 예(禮)를 지키는 사귐을 말한다.

 

自天祐之 吉 无不利
하늘이 스스로(自天) 그를 도운 것이니(祐之) 길(吉)하고 불리할 것이 없다(无不利)

  자하는 '죽음과 삶에는 명이 있고 부유함과 귀함은 하늘에 달려있다(死生有命 富貴在天)'고 배웠다고 한다.[논어 제12편 안연 제5장] 자본주의는 노력여하에 따라 성공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배우지만, 평생을 연구한 이름난 경제학자보다 배움에 일천한 부자들도 많다. 많이 배우고 많이 노력한다고 부가 찾아오는 것이 절대진리는 아니니, 그래서 부(富)를 인간이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지만, 완전한 숙명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또한 공자께서도 부(富)를 나쁜 것으로는 보지 않으셨다. 오히려 공자는 자공을 칭찬하기까지 하셨다. "자공은 운명의 안배를 뛰어넘어 크게 재산을 불렸고 언제나 적중하였다"[논어 제11편 선진 제18장] 공자께서 염유가 주군의 재산을 불려준 것을 나무라면서도, 반대로 자공의 재산불림을 칭찬한 까닭은 무엇일까? 자공이 불린 재산을 홀로 누리는데 소비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학에서의 부유함은 하늘의 명을 내려 사람들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라고 임무를 맡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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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同人于野 亨 利涉大川 利 君子 貞
【初九】同人于門 无咎
【六二】同人于宗 吝
【九三】伏戎于莽 升其高陵 三歲不興
【九四】乘其墉 弗克攻 吉
【九五】同人 先號咷而後笑 大師克 相遇
【上九】同人于郊 无悔

  공자께서는 "여러 사람이 종일 모여 의로운 일을 논하지 않고, 작은 꾀를 나누기를 좋아하고 있으니 참으로 곤란하구나"[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7장]라고 하셨다. 사람이 모이면 그 힘이 배가 된다. 강한 힘이 생기면 세상의 도(道)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나아가야지, 그 힘으로 권력을 탐하고 부를 탐하고 모인자들끼리 붕당을 형성한다면 세상은 어지러워 질 것이다. 정당정치도 동전의 양면성이 있다.

 

同人于野 亨 利涉大川 利君子貞
어려움속에서(于野) 모이는 것(同人)은 성장하는 원동력이니(亨) 과감하게 큰 내를 건너면 이로울 것이다(利涉大川). 군자는 끝까지 이로울 것이다(利君子貞).
  평화로울 때의 모임은 사교적인, 즐기기 위한 모임일 것이나, 어려움에 당면해서 사람이 모이는 이유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위한 의미의 모임일 것이다. 함께 뭉쳐서 과단성 있게 끝까지 나아가면 이롭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적인 힘의 행사이기 때문이다.

 

同人于門 无咎
문앞에서 모이는 것(同人于門)은 허물이 없다(无咎).
  문밖으로 나가는 것은 곧 같은 목표를 향해 행동으로 움직이기 위한 것이니, 군자(君子)들이, 대인(大人)들이 더불어 잘 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同人于宗 吝
마루에서 모이는 것(同人于宗)은 어렵다(吝).
  마루에 안주하는 것은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뜻하니, 곧 소인(小人)들이 사회 전체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모이는 것을 뜻한다. 안주하여 지키려는 모임이다.

 

伏戎于莽 升其高陵 三歲不興
우거진 풀숲에(于莽) 병장기를 숨기고(伏戎) 높은 언덕을 오르려 하면(升其高陵) 3세대를 걸쳐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三歲不興).

  당당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풀숲에 숨어 병장기를 숨기고서 높은 언덕을 오르려는 것은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려 모이는 것을 말한다. 기습을 하려고 병장기를 숨기고 있으니, 바르지 못한 목적을 위해 술수를 써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어찌 이로울 것인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적인 모임이 아니라 그 힘으로 부정한 일을 꾀한다면 3세대에 걸쳐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재앙을 받을 만하다.

 

乘其墉 弗克攻 吉
모여서, 그 높은 성벽을(其墉) 오를 수 있는(乘) 힘이 있어도 공격하여 쓰러뜨리지 않는 것(弗克攻)이 길(吉)하다.
  모임은 힘을 배가 시킨다. 그러나 그 모인 힘을 바탕으로 단지 힘을 행사하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현대사회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인정되는 이익집단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 주역의 시각이다. 공자께서도 “군자는 긍지를 가져도 다투려 하지 않고, 어울리기는 하여도 붕당을 만들지는 않는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2장]고 하셨다. 모여서 행사하는 힘은 방어적이어야 하며, 전체의 이익을 위한 힘의 행사여야 한다.

 

同人 先號咷而後笑 大師克 相遇
사람이 모이면(同人) 사람들 앞에서는 크게 울부짖고(先號咷) 뒤에서 웃게 되기 마련이니(後笑), 크게 싸우고 대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大師克) 서로간에(相) 화해(遇)를 도모해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가식이 있고 과장이 있게 된다. 사람들 앞에 서면 바른 도리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그 만큼의 인격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이 모이면 당연히 있게 되는 것이 위선이고, 과장이고, 다툼이니 그것을 경계한 말이다.

 

同人于郊 无悔
변방에 모여있는 것(同人于郊)이 허물이 없다(无悔).
  그렇게 싸우고 대립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모임이라면, 나서지 않고 외곽에 있는 것이 허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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否之匪人 不利君子 貞 大往小來
【初六】拔茅茹以其彙 貞 吉 亨
【六二】包承 小人吉 大人否 亨
【六三】包羞
【九四】有命无咎 疇 離祉
【九五】休否 大人 吉 其亡其亡 繫于苞桑
【上九】傾否 先否後喜

비(否)는 ‘막히다’라는 뜻이다. 비괘의 괘상은 하늘과 땅이 서로 강건하여 교합하지 못하고 막히는 괘상이다.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만, 도저히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하늘과 땅이 서로 강건하게 자리하여 가는 길이 다르니, 어울려 소통될 수 없는 만남이다. 서정윤 시인의 싯구가 떠오르는 괘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否之匪人 不利君子 貞 大往小來
헤어짐은 사람의 할 일이 아니라며(否之匪人) 군자가 고집(貞)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不利君子) 큰 것을 보내고 작은 것을 얻는 것(大往小來)이다
.
  앞의 태(泰)괘에서 어울림은 작은 것을 보내고 큰 것이 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비괘에서 어울림을 고집하는 것은 큰 것을 보내고 작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라 한다. 군자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서는 헤어져야 한다. 

 

拔茅茹以其彙 貞 吉 亨
띠풀 하나를 뽑으면 뿌리가 얽힌 여러 포기가 함께 뽑히니(拔茅茹以其彙) 그렇게 사람들과 엮여야 끝까지(貞) 길(吉)하고 형통(亨)한 것이다. 
  앞 편의 태(泰)괘에서 말한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엮여서 더불어 나가야 마땅하며, 진리인 것은 틀림없다.

 

包承 小人吉 大人否 亨
그렇다고 무조건 순종하여(包承) 어울리는 것은 소인에게는 길할 것(小人吉)이나, 대인은 그러한 사귐은 거부하여야(大人否) 발전이 있다
.
  어울리고 함께 하기 위하여 눈을 막고 귀를 막고 무릎을 꿇는 것을 뜻한다. 집안을 가장 중시하는 소인이라면 그렇게라도 억지로라도 어울려야 좋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익(公益)을 도모하는 대인은 그러한 어울림은 거부하여야 형통하다. 공자께서도 "가는 길이 같지 않으면 함께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40장]고 하셨다.

 

包羞
무조건 순종하는 것(包)은 수치스러운(羞) 일이다.
  어울리기 위해서 굽히는 것은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이다. 그러나 소인은 그 수치스러움을 감당하고서라도 어울려 가정을 위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자와 대인은 그런 어울림이라면 거부하여야 한다. 물론 소인보다 군자와 대인이 우월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명과 맡은 역할이 다른 사람일 뿐이다.

 

有命无咎 疇 離祉
사귀지 못함이 운명(有命)이라면 허물이 없다(无咎). 절도를 지키며(疇) 헤어짐이(離) 복(祉)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
  하늘은 똑 같은 생명을 주었지만, 토끼와 호랑이는 어울리지 못하게 하셨다. 천성적으로 어울릴 수 없도록 한 것이 하늘의 명(命)이라면 따라야 한다. 명(命)이 다르다면 헤어지는 것이 오히려 복이다. 떠나야만 하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다. 보내 주어야 한다.

 

休否 大人 吉 其亡其亡 繫于苞桑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休否) 대인에게는(大人) 길(吉)하다. 죽을 듯 죽을 듯 하더라도(其亡其亡) 질긴 뽕나무뿌리에 매어놓아야 한다(繫于苞桑)
 
   대인(大人)은 본시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이별을 해야만 하는데 어찌 가슴이 찟어질 듯 아프지 않겠는가? 시간을 쉬어가는 것이 하나의 지혜다. 마치 죽을 것처럼 아프더라도 단단하게 단도리를 잘 해야 한다. 뽕나무뿌리는 어떤 식물보다 질기고 견고한 뿌리로 알려져 있다.

 

傾否 先否後喜 
막힘이 뒤집힐 것이니(傾否) 헤어짐으로 시작해(先否) 기쁨을 찾는 것이다(後喜).
  지나가는 시간앞에서 모든 것은 변하게 된다. 20살때 죽을 것 같았던 이별이 40때가 되어 생각해 보면, 좀 더 선명히 기억나는 꿈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인생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도 하는 것일게다. 이별이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고, 변화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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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 小往大來 吉 亨
【初九】拔茅茹以其彙 征 吉
【九二】包荒用馮河 不遐遺朋亡 得尚于中行
【九三】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 无咎 勿恤 其孚于食有福
【六四】翩翩 不富 以其鄰 不戒以孚
【六五】帝乙歸妹 以祉 元吉
【上六】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 吝

  태(泰)괘는 어울리는 것을 뜻한다. 어울리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사회를 떠나서 개인은 존재할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는 법이다. 수치상으로는 선진국의 수준에 근접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경제력에 맞는 수준의 교양과 인성을 갖춘 것 같지는 않다. 불명예스럽게도 우리는 세계에 나가면 얼글리 코리안(ugly korean)으로 통한다고 한다. 자공이 공자께 한마디 말로서 일생동안 행할만한 것이 있느냐고 묻자, 공자께서는 서(恕)라고 하셨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4장]. 즉 마음(心)을 같게(如)하는 것을 말함인데, 그것이 어울리는 도(道)이며,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의 길이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은 그 하나의 행동양식이다.

 

泰 小往大來 吉 亨
어울림(泰)은 작은 것을 보내고 큰 것이 오게 하는 것이니(小往大來) 그래야 성장(亨)할 수 있다.
  간혹 무인도에 떨궈 놓아도 잘 살 것 같은 연예인의 순위를 정하고는 한다. 그러나 무인도에 혼자만 떨궈 놓아도 잘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상상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외로움과 고독함이다. 교도소에서 죄수를 독방으로 보내는 것은 징벌이지, 편하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 아니다. 사람은 어울려야 하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

 

拔茅茹以其彙 征 吉
띠풀 하나를 뽑으면 뿌리가 얽힌 여러 포기가 함께 뽑히니(拔茅茹以其彙) 그렇게 사람들과 엮여서 나아가야(征) 길하리라(吉).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맹세가 단순한 호기가 아니다. 지구상의 많은 생명들 중에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동물이 있고 그렇지 않는 동물이 있다. 사람은 무리를 지어 어울려야 하는 생명체다. 단독으로는 호랑이의 힘을 당해낼 수 없고, 치타의 빠르기를 당해낼 수 없어도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까닭은 뭉쳐서 힘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包荒用馮河 不遐遺朋亡 得尚于中行
작은 나룻배로 거친 물살을 건너는(包荒用馮河) 과감한 용기도 중요하지만 친구를 멀리하거나 잃지 않아야(不遐遺朋亡) 바른 길로 나아가는데(于中行)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得尚).
  모두가 NO라고 할 때, YES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소신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 소신을 펼치기 위해 고립되고 고독해지기 보다는 친구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하니, 모두 함께 YES하도록 만들어 어울려 나가는 것이 좋다. 통하지 않는다고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보다는 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또한 현명할 것이다. 사악함이 무리를 흔들 수 있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불가능한 것을 애쓰지 말고 은거하라는 은자의 충고에 아파하며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 사람이 함께 숲에서 어울려 생활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내가 인류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고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논어 제18편 미자 제6장]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 无咎 勿恤 其孚于食有福
비탈지지 않은 평지는 없고(无平不陂) 돌아오지 않는 떠남은 없으니(无往不復) 고난으로 끝나더라도(艱貞) 허물이 없다면(无咎) 걱정하지 말라(勿恤). 신념을 추구했다면(其孚) 그렇게 살았음에(于食) 복이 있음이다(有福).
  허물(咎)은 내적인 것이요, 길흉(吉凶)과 명예는 외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돌아보아 허물이 없다면 그 결과가 신통치 않더라도 상심하지 말라는 말이다. 만사가 의도한대로 되는 것 만은 아니니, 바른 신념을 추구했다면 결과를 따져 근심할 필요는 없다. 과정이 더 중요할 것이다.

 

翩翩 不富 以其鄰 不戒以孚
훨훨 나는(翩翩) 새의 무리는 부유하지 않더라도(不富) 그 이웃과 함께 하니(以其鄰) 신념이 있음으로써(以孚) 두려울 것이 없는 법이다(不戒).
  새는 인간에게 많은 교훈과 감동을 주는 동물이다. 특히 기러기는 그 아름다운 사랑과 가족애 때문에 남자가 조각하여 베필을 맞으려 가져가기도 하였다. 무리를 지어 함께 이동하는 새들은 부유함으로써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차별이 없고 견줌이 없다. 함께 하는 것 그것을 좋아하며 무리를 지어 어울린다.

 

帝乙歸妹 以祉 元吉
제을이 딸을 시집보내는 것(帝乙歸妹)은 복(以祉)으로써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제을(帝乙)은 딸을 문왕에게 시집보냈다. 주공과 문왕은 공자께서 흠모하던 공자 이전 시대의 성인들이기도 하다. 혼사로서 문왕과 인연이 맺어져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은 하늘이 맺어준 복이요, 하늘이 맺어준 어울림이다. 아무나 문왕과 혼사로서 어울릴 수는 없을 것이니, 근원적으로 길한 어울림이다.

 

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 吝
마른 도랑으로 인해(于隍) 성이 무너졌어도(城復) 전쟁을 하려 하지말라(勿用師). 고을에 찾아가 엎드려 도움을 청해도(自邑告命) 끝내(貞) 어렵게(吝) 될 것이다.
  성을 쌓고 그 주위로 도랑을 만들고 물을 채우는 이유는 적이 쉽게 성을 오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도랑이 말라있는 이유는 마을 사람들과 성주의 어울림이 각박한 까닭이다. 이웃과 어울려 그 마음을 나누지 못했는데 어떻게 어려울 때 도움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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履虎尾 不咥人 亨
【初九】素履 往 无咎
【九二】履道坦坦 幽人 貞吉
【六三】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 爲于大君
【九四】履虎尾 愬愬 終吉
【九五】夬履 貞 厲
【上九】視履 考祥 其旋 元吉

  리(履)괘는 밟는다는 뜻이니, 아프게 하는 말을 뜻한다. 공자께서는 “말 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교만이라 하고, 말할 때가 되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 하고, 안색과 상황을 살피지 않고서 말하는 것을 맹목이라고 한다”[논어 제16편 계씨 제6장]고 하셨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履虎尾 不咥人 亨
호랑이 꼬리를 밟았으나(履虎尾) 사람을 물지 않으니(不咥人) 성장(亨) 하게 된다
.
  호랑이는 사람을 물어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상징하니, 곧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절대 권력자로 보아도 될 것이다.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것을 묻자 공자께서는 “속이지 말고, 거스를 수도 있어야 한다"[논어 제14편 헌문 제22장]고 하셨다. 절대 복종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꼬리를 밟는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고 충언(忠言)을 하는 것을 말한다. 꼬리를 밟았는데도 물지 않았으니 성장하게 된다. 충심이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종때 조광조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시작해서 바른말로 신임을 받아 대사헌에 이른 것을 연상하게 한다.

 

素履 往 无咎
소탈하게 밟는다면(素履) 계속하여도(往) 허물이 없다(无咎)

  급하거나 거칠게 밟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 ‘말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한다’는 가르침을 새기게 된다. 충분히 기다려주고 부득이할 때 비로소 꼬리를 밟아야 하니, 그렇지 않다면 무시하는 것이며,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履道坦坦 幽人 貞吉
일관되게 밟아야 하니(履道坦坦) 그윽한 사람(幽人)이어야 끝까지 길하다(貞吉).

  일관성이 있는 그윽한 사람은 가치관이 곧게 서 있는 사람을 말한다. 곧기만 한 곧음은 옳지 못하다. 섭공이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고발하였다’며 고을 자랑을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고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기니 진정한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8장]라고 하셨다. 공자는 판박이가 되는 학문을 경계하고 융통성을 강조하였으니, 공자의 직속 제자들은 개성이 모두 살아 있었다.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 爲于大君
한쪽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眇能視) 절름발이도 밟을 수 있지만(跛能履)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면(履虎尾) 사람을 물 것이니(咥人) 흉하다(凶)
.
  조화롭게 보지 못하고, 조화롭게 나아가지 못하니, 곧 안목이 없고 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제 분수를 모르고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을 뜻한다. 호랑이가 물어버릴 것이다. 충심이 없기 때문이다.

 

武人 爲于大君
무인이라면 군주에게(于大君) 속해 있어야(爲) 한다
.
  절대 충성을 해야 하는 지위에 있는 자가 무인이다. 공자께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직분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4장]고 하셨으니, 무인이 꼬리를 밟는 것은 직분을 망각하고 나서는 것이라, 취지는 바르다 할지라도 군주에게는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履虎尾 愬愬 終吉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履虎尾) 놀라고 두려운 마음(愬愬)이어야 끝내 길하다(終吉).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는 것은 예(禮)를 지켜서 충언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께서 미운 사람이 있는지 묻자 자공은 “추측하여 다 안다는 사람, 불손함을 용기라 하는 사람, 들추어내는 것만 정직이라 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논어 제 17편 양화 제24장]고 하였다. 두려움이 없는 용맹한 사람이 예(禮)와 의(義)를 망각하면 난을 일으키고 도적이 될 뿐이다.

 

夬履 貞 厲
거친 직언(夬履)은 그 끝이(貞) 위태롭다(厲).
 
  바른 말도 기술이 필요하다. 진정한 신하와 친구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욕을 하거나 나무라는 방법은 아니어야 한다. 자유가 말하길 “군주를 섬기면서 간언이 지나치면 부끄러움을 당하고, 친구를 대하면서 충고가 지나치면 소원하게 된다”[논어 제4편 이인 제26장]고 하였다. 시간을 두고 진중히 지켜보다가 그의 능력으로 알지 못하고 있거나, 고치지 못하겠다 싶은 것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권해야 하는 것이다. 훗날 원시유학이 추구했던 이러한 중용의 선을 벗어나 ‘충신은 욕을 당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거나 ‘죽음으로써 간한다’와 같은 거친 방법으로 변질되어 갔다.

  아랫사람에게에게 하는 충고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인격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젊은 사람은 경외해야 하니 어찌 내일의 사람이 오늘의 사람만 못하다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십, 오십세가 되어도 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젊은 사람보다 경외할 필요가 없다”[논어 제9편 자한 제23장]라고 하셨다. 무조건적으로 나이로 들먹이게 된 까닭은 것은 공경(恭敬)의 의미를 잘못 전달해온 소인유(小人儒)들 때문일 것이다.

 

視履 考祥 其旋 元吉
밟는 것을 살펴(視履) 좋고 나쁨을 가려(考祥) 바로잡으면(其旋)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것은 아프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은 아프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바른길로 오도록 도와주려는 뜻이다. 그 도움은 눈높이를 맞추어 다가가야 한다. 시리고상(視履考祥)은 이렇게 밟으니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나고 이렇게 밟으니 군주가 느끼게 되는지를 헤아려 보고 관찰해 보는 것을 뜻한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기술(技術)이 필요한 법이니,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안색과 상황을 살펴서 말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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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小畜 亨 密雲不雨 自我西郊.
【初九】復自道 何其咎 吉
【九二】牽復 吉
【九三】輿說輻 夫妻反目
【六四】有孚 血去惕出 无咎
【九五】有孚 攣如 富以其鄰
【上九】既雨既處 尚德 載 婦貞厲 月幾望 君子 征 凶

  여러 번 언급했지만 소(小)는 가정(家)을 의미한다. 그래서 소인(小人)은 한 가정 꾸리기에 온 힘을 다하는 필부필부(匹夫匹婦)하는 보통의 백성을 가리키는 의미라고 했었다. 소축(小畜)의 괘는 가정에서의 중요한 이룸이니 곧 임신을 뜻한다. 『효경』에서 '신체를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선조의 생명을 건강한 상태로 연속시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맹자』에서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불효'라고 하는 것도 역시 비슷한 의미이다. 과거에 소인유(小人儒)들이 불임의 책임을 여성에게로 떠넘겨 부인을 핍박하고 축첩의 명분으로 삼았던 창피했던 역사가 있었다. 임신은 가족의 축복임과 동시에 또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축복이기도 하다. 주역이 9번째 순서로 소축(小畜)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과거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였기 때문일 것이다.

 

小畜 亨 密雲不雨 自我西郊
임신(小畜)은 성장기(亨) 때의 일이다. 구름이 빽빽하나 비가오지 않는 까닭은(密雲不雨) 스스로(自) 서쪽교외에서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我西郊).
  무슨 일이건 때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 주역의 첫번째 가르침이었다. 자식을 보는 소축(小畜)은 젊었을 때 이뤄야 할 일이다. 반면에 33번째의 사회적 성취를 뜻하는 대축(大畜)은 결실기(利)와 마감기(貞)의 일이다. 삶을 마감할 시점에 자식을 보려고 하는 것은 시간의 도(道)를 어긴 것이니, 마땅히 때에 맞게 힘써야 할 일이 달리 있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으로 곧 어두움, 어려움을 상징하는 방향이다. 구름이 빽빽한데도 비가 오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 하면 비가 오는지 어두워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성교육을 하고 접할 수 있는 정보량이 많지만, 옛날에는 그러하지 못했던 까닭이었을까?

 

復自道 何其咎 吉
스스로 그 도를 깨닫고 돌아오면(復自道)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何其咎)? 길할 것이다(吉)
  본능적으로 음양조화 도(道)를 따라 알게 된 것이다. 즉 어떻게 하면 부부관계를 잘 할 수 있는 지를 스스로 깨닫고 밝은 동쪽으로 돌아왔으니 길하다.

 

牽復 吉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끌려 돌아와도(牽復) 길하다(吉).
  타인의 손에 이끌려 제자리(동쪽)으로 돌아오는 것도 길하다. 묻지도 않고 혼자 끙끙 앓는 것이 가장 좋지 못한 것이니, 부끄러워 하지 말고 타인의 조언과 도움을 구해도 좋으니, 곧 리견대인(利見大人)하라는 뜻이다.

 

輿說輻 夫妻反目
수레바퀴가 틀어지면(輿說輻) 부부가 반목하기 마련이다(夫妻反目).
  수레바퀴가 틀어지는 것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함이다. 스스로 제 자리로 오건, 도움으로 제 자리로 오건 돌아와야 한다. 수레바퀴가 틀어져 있으면 결국 부부가 반목하게 된다.

 

有孚 血去惕出 无咎
마음이 있고(有孚) 피가 흘러(血去) 부부관계의 두려움이 사라져야(惕出) 허물이 없다(无咎)
  첫 경험이 지난 후라는 의미이거나, 월경을 지나 가임기가 되었을 때라는 의미이거나 모두 해석이 가능하나 어떻게 해석해도 주역의 뜻을 심각하게 해치지는 않을 것 같다. 소축(小畜)을 이루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거시적으로는 젊을 때(亨)여야 하고 미시적으로는 가임기여야 한다.

 

有孚 攣如 富以其鄰
마음으로(有孚) 단단히 묶어두면(攣如) 그 이웃과 더불어 그 부를 나누게 될 것이다(富以其鄰).
  마음 즉, 돈독한 사랑으로 단단히 묶여져 있다면 축복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씨족, 부족단위의 공동체로 이루어졌던 과거에는 임신은 더욱 동네의 경사로 여겨 이웃이 함께 기뻐하고 축복해주었을 것 같다.

 

既雨既處 尚德 載 婦貞厲 月幾望 君子 征 凶
이미 비가 오고 그치기가(既雨既處) 계속되니 자랑할 덕(尚德)이 생긴다. 부인을 업고 기뻐하지만(載) 부인은 아이의 출생까지 염려가 계속된다(婦貞厲) 배가 불러 보름달이 되었는데(月幾望) 군자(君子)가 부부관계로 계속 나아가면(征) 흉하다(凶)
  비가 오고 그치는 것은 부부관계가 계속적으로 원활히 이뤄지고 있음을 말함이다. 당연히 오래지 않아 임신이 될 것이고, 남편은 부인을 업고 기뻐하게 되는데, 오히려 부인은 염려가 계속된다. 아이가 무탈하게 태어날 때까지 근심이 계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게다. 월기망(月幾望)은 보름을 넘긴 것을 말함이니, 곧 배가 불러온 것을 상징한다. 그런데도 군자가 계속 나아가니 흉하다. 현대 의학에서도 태아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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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比 吉 原筮元 永貞无咎 不寧方來 後夫 凶
【初六】有孚 比之无咎 有孚盈缶 終來有它 吉
【六二】比之自內 貞 吉
【六三】比之匪人
【六四】外比之 貞 吉
【九五】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上六】比之无首 凶

경쟁은 사람이 모이면 이뤄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경쟁은 다툼(訟)과는 달리 상대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므로 긍정적인 것이다. 그래서 비(比)는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공자께서도 “군자는 겨루지 않지만 활쏘기는 예외이니 서로 읍하여 예를 갖추고 당에 올라 시합한 후 벌주를 마시는 것이다. 이런 것이 군자의 경쟁인 것이다”[논어 제3편 팔일 제7장]라고 하셨다. 명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남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던 ‘남에게 요구하지 않고 나에게 요구한다’는 취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比 吉 原筮 元永貞 无咎 不寧方來 後夫 凶
경쟁(比)은 길하니(吉) 처음 점을 친(原筮) 마음으로 처음부터(元) 끝까지(貞) 계속되면 허물이 없을 것이나(无咎) 편안하지 않아(不寧) 다시 점을 치려는 마음이면(方來) 그 후에는 장부라도(後夫) 흉할 것(凶)이다.
  주역의 네 번째 몽(蒙)괘에서 말한 처음 점을 치는 마음과 재차 점을 치는 더렵혀진 마음을 빗대어 경쟁의 길흉을 논하고 있다. 처음에 순수한 경쟁으로 시작한 마음이 끝까지 계속되어야지 길하고 허물이 없지만, 그 마음이 바뀌어 승부욕이 생긴 이후라면 흉하다고 한다. 성리학이 리(理)와 기(氣)의 관계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던 것과 같이 ‘행동이 마음을 이끌 수 있는가’는 쉽게 답하기 힘든 논제일 것이다. 일례로, ‘착한 행동을 의식 없이 하다 보면 착한 마음이 생기는가’의 문제인데, 어쨋건 주역은 행위가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처음에는 훈육하는 마음으로 뺨을 한대 때렸다가 자기도 모르게 동물적 폭력성이 발동하여 아이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한 교사의 동영상이 유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경쟁이란 행위를 시작하여도 그 행위에 내재한 승부욕에 굴복하지 말고 처음의 순수성을 끝까지 지켜야 길하다고 한다.

 

有孚 比之无咎 有孚盈缶 終來有它 吉
신념을 가진(有孚) 경쟁이어야 허물이 없다(比之无咎) 신념을 질그릇을 넘치게 할 정도로(有孚盈缶) 돈독히 하면 경쟁이 끝나도 상대가 남아있게 될 것이니(終來有它) 길하다(吉).
  신념이 있는 경쟁이란 승부욕이 배제된 예컨대, 함께 지혜를 모아 찾아가는 그러한 경쟁이다. 질그릇을 넘치게 할 정도로 넉넉한 마음이 아니라면, 모르는 것도 아는 것으로 둔갑시키고 한양을 못 가본 이가 한양을 가 본 이를 이기려 하니 곧, 경쟁이 아니라 다툼(訟)이 되어버린다. 점을 재차 치는 더럽혀진 마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공자께서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라고 하셨다.

 

比之自內 貞 吉
경쟁이라는 것은(比之) 자기 내면(自內)과의 승부라면 끝까지(貞) 길하다(吉).
  경쟁의 본질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찾지 않고 그 탓을 남에게 돌리면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 이미 여러번 언급하였지만, 공자께서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比之匪人
경쟁이라는 것은(比之) 사람이 우열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匪人).

  실력이 절대적으로 이기는 것이라면 아마도 스포츠 경기는 재미가 없어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브라질이 늘 월드컵에서 우승하지는 못하는 이유는 반드시 전력으로만 우열이 가려지지는 않고 "승운"이라는 알 수 없는 힘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사람이 장악할 수 없는 것이 또한 경쟁의 결과이다.

 

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사냥 같은 큰 경쟁에 있어서도(顯比) 임금은 세 방향만 막고(王用三驅) 한 곳은 남겨두는 법이다. 설령 사냥감을 놓쳐도(失前禽)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배려이니(邑人不誡) 이런 경쟁이 길하다(吉)
  세 방향을 막고 한 곳을 남겨두는 것은 그 책임을 자기에게서 찾으려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사냥감을 놓친 백성탓이 아니라 한방향을 막지 않도록 한 임금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자 한 까닭이다. 경쟁에서 뒤쳐진 자가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 길하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학생들의 시험은 싸움이 아니라 경쟁이다. 그런데, 경쟁에서 뒤쳐지면 두려워 해야 한다. 승자독식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比之无首 凶
그러나 경쟁에서 우열을 정하지 않는 것(比之无首)은 흉하다(凶)

  우열을 정해주지 않으면 경쟁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역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순조로운 변화를 말한다. 그러나 경쟁이 시작되어 우열을 정하지 않는다면 끝맺음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니 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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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師 貞 丈人 吉 无咎
【初六】師出以律 否臧 凶
【九二】在師 中吉 无咎 王三錫命
【六三】師或輿尸 凶
【六四】師左次 无咎
【六五】田有禽 利執言 无咎 長子師師 弟子輿尸 貞 凶
【上六】大君有命 開國承家 小人勿用

  전쟁이 초래하는 참담함이 어떠한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6.25전쟁으로 인한 그 참상이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3년이 넘는 전쟁으로 수많은 국민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시설이 파괴되고 강산이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휴전 중에 있을 뿐이다.

 

師 貞 丈人 吉 无咎
전쟁(師)은 파멸(貞)을 가져온다. 부득이 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건장한 남자(丈人)여야 길하고(吉) 허물이 없다(无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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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말한 '정의로운 전쟁(bellum justum)'처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부득이 맞설 수 밖에 없는 전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경우에도 건장한 남자들로 전쟁을 치르라고 주역은 말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백성들을 7년 동안 가르쳐 전쟁에 나아가게 해야 한다” “백성들에게 군사훈련을 지속적으로 시키지 않음은 백성들을 버리는 것이다”[논어 제13편 자로 제29장,제30장]라고 한 말씀과 뜻을 같이 한다. 적을 사상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에서 방어력을 갖추어 생명의 피해를 최소화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장인(丈人)의 의미에 대해서는 유능한 장군, 능력있는 지휘관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주역의 사상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장군의 명성이 커진 만큼 죽어간 생명은 많은 법이다.

 

師出以律 否 臧 凶
전쟁을 위해 출정을 하면(師出) 군율로써(以律)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否) 큰 군대(臧)라도 흉하다(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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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율이 세워지지 않은 오합지졸의 군대 역시 생명을 빼앗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군율이 세워지지 않은 군대는 백성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백성을 해치는 군대로 탈바꿈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전쟁은 인간의 숨은 야성을 드러나게도 한다. 전쟁 통에 학살, 강도, 강간등을 비롯 인간이 얼마만큼 잔학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군율을 세우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승리를 위해서 기술해 놓은 것이 아닐 것이다. 전쟁도 인간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在師 中 吉 无咎 王三錫命
전쟁에 임할 때(在師) 중용을 지키면(中) 길하고(吉) 허물이 없어(无咎) 임금이 세 번이나 상을 내릴 것이다(王三錫命).

  전쟁에 임할 때도 중용의 도(道)를 지켜야 한다. 대치하고 있음으로써 족한데 싸움을 하고, 생포할 수 있는데 사살해 버리고, 말머리를 돌려 배반을 하는 등등, 전쟁은 위험하고 긴장된 상황으로 나가기 때문에 냉정(중용의 바른 길)을 지킬 수 없는 위험이 크다. 임금도 장수도 군사도 백성도 전쟁에 임하게 될 때에는 중용을 지켜야 길하다. 공자께서 위험에 처했을 때 "군자는 어쩔 수 없는 때에도 원칙을 벗어나지 않지만, 소인은 어쩔 수 없게 되면 곧 함부로 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장]고 하셨다. 상황이 위급하고 급박하게 변하면 냉철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師或輿尸 凶
승리와 관계없이 전쟁으로 수레에 밟힐 정도의 시체가 생긴다면(師或輿尸) 흉하다(凶)

  주역이 공맹의 사상을 접목하여 읽을 수 있는 까닭은 공자가 주나라 시대의 올바른 문화를 전승하겠다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고, 주나라의 주공을 흠모했다는 것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공자께서는 제사, 전쟁, 질병을 신중하게 대하셨다’[논어 제7편 술이 제13장]는 뜻은 ‘죽은 생명, 위태로운 생명, 고통 받는 생명’을 신중하게 대했다는 생명존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레에 밟힐 정도로 많은 시체가 생긴다면 어떤 변명도 필요없다. 흉하다.  
 

師左次 无咎
그렇게 사상자가 생길 전쟁이라면 전쟁을 멈추거나 후퇴하는 것(師左次)이 허물이 없다(无咎)

  왼쪽을 뜻하는 좌(左)는 후퇴를 의미하고 차(次)는 다음을 기약하는 것을 뜻한다. 승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레에 밟힐 정도의 시체가 생기게 될 것이라면 후퇴하거나 멈추라는 뜻이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사상자가 생기게 되는 전쟁을 주역은 반대하고 있으니, 적장만 처단하고 부하들을 놓아주라는 30번째 리(離)괘의 ‘우두머리는 참수해도 그 부하들은 죽이지 않아야 길하다'는 생명존중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주역은 많이 죽이고 승리하는 전쟁을 찬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田有禽 利執言 无咎 長子師師 弟子輿尸 貞 凶
사냥감이 밭에 있다면(田有禽) 입으로 잡아야 이롭고(利執言) 허물이 없다(无咎). 지휘관이 잘 통솔하더라도(長子師師) 부관이 수레에 밟힐 정도의 시체를 만든다면(弟子輿尸) 결국(貞) 흉하다(凶)

  사냥감이 밭에 있음은 적이 사냥할 수 있는 장소에 나타난 것을 뜻한다. 활을 쏘아 잡을 수 있어도 말(言)로 잡아야 이롭다는 뜻은, 피를 흘리는 싸움이 아니라 항복을 받는 싸움을 의미한다. 지휘관이 잘 통솔하는 것은 이렇게 항복으로 유도하는 지휘를 말하는데, 부관이 시체를 쌓이게 만드는 것은 군율이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부관만 흉한 것이 아니고 지휘관도 흉하고 군주도 흉하고 백성도 흉하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흉하게 된다. 
 

大君有命 開國承家 小人勿用
승리한 임금은 명을 내려(大君有命) 나라를 다시 정상적으로 열고(開國) 생업으로 돌아가게(承家) 해 주어야 한다. 소인(농사꾼)을 계속 전쟁에 사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小人勿用).
  주역이나 논어나 소인은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 나눈 개념은 아니다. 소(小)는 사(私)를 말함이고 대(大)는 공(公)을 말함이니, 곧 소인은 집(家)을 중히 여기는 사람, 필부필부 하는 과거의 농사꾼을 말한다. 전쟁이 끝났다면 다시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게 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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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訟 有孚 窒惕 中 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初六】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九二】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六三】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九四】不克訟 復即命 渝 安貞吉
【九五】訟元吉
【上九】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송(訟)괘는 다툼을 의미한다. 싸움은 필요악이다. 공자께서도 "좋구나 좋구나를 연발하는 사람은 덕을 해치는 사람이다"[논어 제17편 양화 제13장]고 하셨으니,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그러나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우고, 싸움이 지나쳐서 문제가 된다. 본래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군자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자기에게 요구하며,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여 억지로 끌고 오려는 이는 아니다. 감화되어 저절로 따라오면 함께 벗이되어 즐겁고, 따라오지 못하면 보살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즐거운 자이다. 그런데도 왜 싸워야 할 때가 생기는가?

  강도가 약자들의 재물을 뺏고 죽이려 할 때는 맞설 힘이 있다면 맛서야 한다. 강도에게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강요하여 강도와 싸우려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해를 당하게 될 사람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행위만이 죽이는 것이 아니다. 우물에 빠질려는 아이를 방치하는 방관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과 남에게 맞서는 것이 모순은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에 간섭하려고 싸울려는 것인지, 물리쳐야 할 해악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분별력에 있을 것이다.  

 

訟 有孚 窒惕 中 吉 終凶
다툼(訟)은 추구하는 가치가 있어야(有孚) 하는 것이니, 사사로운 이익을 배척하여(窒惕) 중용의 도(中)를 지키면 길하나(吉) 패자가 생기면 흉하다(終凶)
  어떤 신념을 위해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미워서 사람을 누르고 패배 시키기 위한 그러한 다툼은 좋지 못하다. 공자께서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있다”[논어 제4편 이인 제3장]고 하셨다. 사사로운 감정에 의거하여 나와 같으면 좋고, 나와 다르면 미워하는 그러한 호악을 경계한 까닭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의 바른 말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3장]는 것처럼 사사로움을 배척하여 중용의 도를 지켜야 길하다고 한다. 종흉(終凶)이란 마침(終) 곧, 끝장나는 자가 생기는 것을 말함이니 그것은 흉(凶)하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승자가 쓰러진 자를 내버려 두고 승리만 돌아보는 것이니, 마땅히 쓰러진 자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어야 하는 다툼이어야 한다. 모두 함께 잘 되기 위해 신념을 다툴 수는 있겠지만, ‘나 살고 너 죽어라’는 다툼은 곤란한 것이다.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대인을 만나봄이 이로우니(利見大人) 큰 강의 건너듯 과단성을 가지고 밀어부침은 이롭지 못하다(不利涉大川).
  신념도 그것이 아집일 수 있으니 자문을 구해보기도 하고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공자께서는 “무의무필무고무아(毋意毋必毋固毋我)”하셨다고 하는데 즉, ‘맘대로 해석하는 것, 반드시 하려는 것,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 자신만 옳다고 하는 것’ 이 네 가지를 결코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논어 제9편 자한 제4장]

 

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다툼은 오래 지속하지 않으면(不永所事) 소소한 말은 들을지라도(小有言) 마침내 길하다(終吉).
  질질 끌어서 가장 좋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다툼일 것이다.

 

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다툼에 굴복하여(不克訟) 돌아가 숨으면(歸而逋) 그 고을사람 3백호가 편안해지니(其邑人三百戶) 재앙이 없어진다(无眚)
  다툼에서 도망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주변사람 모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도망치는 자가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일 수 있다. 공자께서는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논어 제14편 헌문 제28장]고 하셨다. 결국 용기도 내면적 정서이니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참 용기가 아닌 것이다. 단속해야 할 것은 『중용』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내면의 마음의 움직임’일 뿐이다. 사람을 향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늘(자기양심)을 향한 부끄러움이 없어야 그 자가 용자(勇者)이다.

 

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다투고자 하는 본성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食舊德) 끝까지 극복하기 어려운 성향이지만(貞厲) 끝낼 수 있어야 길하니(終吉) 왕의 일을 맡는 큰일을 담당하여도(或從王事) 왕이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无成)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께서도 ‘본연지성’은 선하지만 태어나면서 받은 ‘기질지성’이 달라 선악의 가능성이 공존한다고 하셨으니, 태어난 사람마다 품성의 차이가 있음은 인정하신 것 같다. 유전적으로 강한 호전성을 물려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전적인 호전적 성향은 끝내어야 길하다고 한다. 그래야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무성(无成) 유종(有終) 할 수 있다고 한다. 곤(坤)괘에서 나온 것처럼 ‘왕의 일을 대신하여 공로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결과만을 원한다’는 뜻이다. 공자께서는 “군자가 용감하면서 의로움이 없으면 난리를 일으키게 되고, 소인이 용감하면서 의로움이 없으면 도둑이 된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3장]고 하셨으니, 호전성을 의로움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왕이 되려 할 것이다.

 

不克訟 復即命 渝 安貞吉
다툼에서 패하더라도(不克訟)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아(復即命) 승복(渝)하면 끝까지 편안하고(安貞) 길(吉)하다
  패자의 깨끗한 승복은 계속 다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다툼은 악을 물리치고, 신념을 펼치기 위한 것이어야지 서로 원수로 갈라서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툼의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것은 용기를 의로움으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장남이었던 정진은 아버지를 역적으로 내몰아 죽였던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고 훗날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정진의 진심을 속단 할 수는 없지만, 호랑이가 토끼를 낳지는 않는 법이니, 구차하게 살고자 한 까닭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訟元吉
다툼(訟)은 근원적(元)으로는 길한 것(吉)이다.
  다툼은 필요악이다.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우고, 싸움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유전적인 용감함도 근원적으로 좋은 것이다. 다만, 의로움으로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호전성이 지나치면 왕으로부터 큰 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或錫之鞶帶) 마침내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그 상을 세 번 빼앗기게 될 것이다(終朝三褫之).
  왕의 마음을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세 번이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까닭은 호전성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거침없는 용기는 근원적으로는 길하고 왕에게 큰 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자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툼 이후에는 왕을 비롯하여 세상 모두가 평화롭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전적 호전성을 억누르지 못하기에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상을 세 번이나 빼앗기게 되는 것이니, 용감함을 의(義)로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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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初九】需于郊 利用恒 无咎
【九二】需于沙 小有言 終吉
【九三】需于泥 致寇至
【六四】需于血 出自穴
【九五】需于酒食 貞吉
【上六】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 來敬之 終吉

  주역은 첫 괘에서 ‘잠용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마라’고 충고하면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때가 언제일까? 그에 대한 답이 되는 괘가 수(需)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청하지 않은 세 명의 손님이 찾아오면 때가 도래하였다고 하였으니, 곧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때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아 움직인다. 그러나 사막에 사는 동물도 있고 북극에 사는 동물도 있다. 스스로가 따뜻하다면 따뜻함을 좋아하는 사람(귀인)이 찾아올 것이요, 스스로가 차갑다면 추위를 좋아하는 사람(악인)이 찾아올 것이다. 결국 바르게 살면 그 바름(따뜻함)에 이끌려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공자께서는 “덕은 외로울 수가 없으니 반드시 이웃이 생긴다”[논어 제4편 이인 제25장]고 하셨다.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기다림(需)은 뜻이 있어야(有孚) 크게 형통하니(光亨) 끝까지 길하다(貞吉). 큰 강을 건너는 과단성을 가져야 이롭다(利涉大川)
  부(孚)는 주역에서 정말 자주 만나게 되는 단어다. 새가 알을 품는 것을 뜻하는 글자인데, 믿음, 신념, 마음, 사상 등등 적당하게 번역하기가 어렵다. 어쨋건, ‘생각 없는 것’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뜻을 추구하기 위한 기다림이어야지 생각 없이 시간만 보내는 것을 경계한 뜻으로 새기면 될 것이다.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리섭대천(利涉大川) 또한 주역 전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말이다. 큰 강은 ‘소통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것이니, 잘 소통되지 않더라도 건너라는 과단성을 의미하고 있다. 『맹자』의 "부유하고 귀한 것이 흔들 수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것이 바꾸게 할 수 없고 위협과 무력이 굽히게 할 수 없다"는 구절이 떠올려진다.  
 

需于郊 利用恒 无咎
장소를 벗어난 기다림(需于郊)이라면 뜻을 잃지않고 확고히 하여야 이롭고(利用恒) 허물이 없다(无咎)
  유비가 때를 기다리며 농사꾼으로 지내기도 했고, 흥선대원군이 바보 행세를 하며 세도가의 가랑이를 기어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러나 가슴에 품은 뜻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恒). 힘겨우면 쉽게 현실과의 타협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需于沙 小有言 終吉
모래밭에서 기다림(需于沙)은 소소한 비난은 있을지언정(小有言) 끝내 길하다(終吉)
  모래밭에서 기다리는 것은 쉽게 장소를 옮길 수 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교수를 꿈꾸던 사람이 잠시 곤궁을 벗어나려고 학원강사가 되었다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학원강사로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껴 ‘정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찾아간 것일 것이다. 모래밭과 진흙밭은 ‘강물’이라는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모래밭), 근접하여 있는(진흙밭) 거리의 차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需于泥 致寇至
진흙밭에서 기다림(需于泥)은 도적을 불러들이는 일이다(致寇至)
  진흙밭에서 기다리는 것은 쉽게 장소를 옮길 수 없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빠져 나오기 힘든 곳에 있는 것이니, 그런 장소로 나아가 기다리는 것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훔쳐가고 있는 도적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需于血 出自穴
피가 흐르게 되면(需于血) 스스로 굴 밖으로 나와야 한다(出自穴)
  혈(血)은 신변에 위협이 되는 위험이 닥친 것으로, 주역은 기다림을 고집하지 말고 굴 밖으로 나오라고 충고한다. 그 곳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으로 합리화 시키면서 고집을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 것일게다. 기다림은 수동적으로 웅크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어야 한다. 위험을 방관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需于酒食 貞吉
경제적 기반 속에서 기다려야(需于酒食) 끝까지 길하다(貞吉)
  술과 음식은 생계에 대한 걱정은 없는 것을 말한다. 과거 선비들이 산림에 묻혀서 처사형 학자로서 일생을 살 수 있었던 까닭은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공자께서 왜 다재다능한지를 질문 받고 “젊어서 곤궁했기 때문에 잡다한 기술을 배웠다”고 하셨다[논어 제9편 자한 제6장]. 성인께서도 뜻을 펼치기 이전에 생계를 먼저 돌아보신 것이다.  『상전』은 길한 까닭을 ‘중정(中正)하기 때문이다’고 해설한다. 유가(儒家)는 이로움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행복이 물질과 완전한 별개로 떨어져 있다고 보지도 않는 것이 유학의 시선이다. 때를 기다림도 최소한의 물질적 기반은 갖추어야 길할 것이다. 

 

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 來敬之 終吉
목적지로 나아감은(入于穴) 청하지 않은 세 명의 손님이 찾아오는 때이니(有不速之客三人) 그들을 공경으로 받들면(來敬之) 마침내 길하다(終吉)
  세 사람의 손님은 천지인(天地人)이다. 궁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람 즉, 귀인이라고 부르는 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세 명의 손님을 공경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하니, 하늘과 땅과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라는 주역의 당부도 담겨있다. 입우혈(入于穴)을 피냄새가 진동하여 빠져나왔던 그 위험한(血) 곳으로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삼인(三人)을 많은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해도 통(通)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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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初六】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 吝
【九二】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六三】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六四】困蒙吝
【六五】童蒙吉
【上九】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몽(蒙)괘는 몽매함, 어두움을 뜻하는 괘다. 순조롭게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을(貞) 수 있는 원형리정(元亨利貞)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건(乾)괘 구삼(九三)효의 '군자(君子)가 되어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乾乾) 것'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익힐 습(習)자가 어미새의 날개짓을 따라하는 새끼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배움은 날개짓을 보여주는 어미새의 가르침에서 출발을 한다. 그래서 주역의 몽괘는 주로 몽매함을 깨우쳐 주는 입장에서 효사를 서술하고 있다.

  한편, 주역의 첫 4괘가 독립적이고, 순차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배워(蒙) 자신을 닦고, 때가 되어(乾) 사람을 만나고(屯) 사람을 만나 제 자리로 나아가고(坤) 그래서 다시 나아갈 때가 도래하고(乾)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몽매함(蒙)은 성장기(亨)의 일이니 내가 동몽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匪我求童蒙) 동몽이 나에게 요구하여야 한다(童蒙求我)

  몽매함을 깨우쳐야 할 때는 성장기(亨)여야 한다. 배움도 배워야할 시간에 맞아야 한다. 동몽(童蒙)은 몽매한 어린아이이다. 그 어린아이가 자발적으로 몽매함을 깨뜨리려 다가와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어린아이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주입식으로 교육함은 바르지 않다는 뜻이니, 곧 공자께서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9장]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나아가려고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처음 점을 치면 미래를 알려주지만(初筮告) 계속 점을 치면 더럽혀지고(再三瀆) 더럽혀지니 알려주지 않는다(瀆則不告). 그렇게 점을 치려면 그쳐야 이롭다(利貞)
  처음 점을 치는 마음은 곧 호기심과 궁금함일 뿐이다. 그러나 계속 점을 치는 까닭은 의심하고 더 이로운 점괘를 원하는 욕심과 탐욕이 생겨난 때문일 것이다. 즉, 마음이 맑지 못하면 점도 배움도 소용없는 것이니 차라리 그치는 것이 이롭다.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 吝
몽매함을 깨우쳐 주는 것(發蒙)은 형인을 사용하면(用刑人) 이로우나(利) 그 속박을 풀어주어야 하니(用說桎梏) 형벌로만 나아가면(以往) 어렵게(吝) 된다. 
  발몽(發蒙)은 몽매함을 깨우쳐 스스로를 개발하게 하는 것이다. 형인을 사용함은 곧 매를 들어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을 말함인데, 그러한 교육이 본질적으로는 이로우나 그 엄격한 속박을 풀어주기도 해야 하니, 곧 채찍과 당근의 조화로운 교육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질(桎)은 손을 묶고, 곡(梏)은 발을 묶는 형구라고 한다. 지나치게 엄격해도 지나치게 달콤해도 바람직한 교육이 될 수 없다. 중용에 서야 한다.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몽매함을 아울러야(包蒙) 길(吉)하니 부인의 생각을 받아들여야(納婦) 길(吉)하다. 그래야 자식이 집안을 잘 이루게 된다(子克家)
  포몽(包蒙)은 몽매함을 함께 보듬어야 한다는 뜻이니 곧, 남편이 부인 의견도 받아들여서 함께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남자는 여성인 어머니로부터 몽매함을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다. 여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훗날 집안을 조화롭게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여자(女)를 취하려 하지마라(勿用取) 그 여자는 사내를 돈으로만 보아(見金夫) 있어야할 곳을 벗어날(不有躬) 것이니 유리할게 없다(无攸利)
  여자(女)는 몽매(蒙)한 여인을 말한다. 계모가 아니라 친모라도 본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부인(婦)이 될 자격이 없는 여자(女)이다. 있어야 할 곳은 자녀를 교육하는 어머니의 자리를 말한다. 몽매하여 남자의 돈만 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몽매한데, 어찌 자식의 몽매함을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困蒙吝
몽매함이 곤궁하면 소용없다(困蒙吝)

  배움에 뜻이 없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아이들을 말함이니, 그런 아이들에게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공자께서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10장]고 하신 말씀을 떠 올리게 한다.

 

童蒙吉
차라리 동몽(童蒙)이어야 길(吉)하다
  배움에 뜻이 없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곤몽의 아이들은 차라리 동몽으로 남겨두는 것이 길하다는 것이다. 애쓰면 애쓰는 사람도 따라야 하는 사람도 힘들고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다. 이 효사를 ‘어린아이의 순순함을 간직하게 해야 하는 것이 길하다’로 해석하거나, ‘동몽처럼 늘 가르침을 청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하는 것이 길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몽매함 깨뜨리는 것(擊蒙)은 도적이 되는 것은 이롭지 않고(不利爲寇) 도적을 방어하는 것이어야 이롭다(利禦寇)
  격몽(擊蒙)은 율곡 이이 선생의 『격몽요결』의 서문에서 언급한 학문이 나아갈 방향을 의미한다. 도적은 사람의 내면에 잠재한 악(惡)성이다. 악성을 없애는 공부가 아니라면, 배운 지식은 도적질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다. 도적을 방어하는 것은 곧 마음속에 도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함이니, 선성(善性)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유학에서의 배운 선비는 그 배움으로 부족한 자를 도와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 자이다. 그래서,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는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 인을 짐져야 하니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어서야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어찌 멀지 않겠는가?[논어 제8편 태백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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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屯 元亨利貞 勿用 有攸往 利建侯
【初九】磐桓 利居貞 利建侯
【六二】屯如邅如 乘馬班如 匪寇婚媾 女子貞不字 十年乃字
【六三】即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 幾 不如舍 往 吝
【六四】乘馬班如 求婚媾 往 吉 无不利
【九五】屯其膏 小貞吉 大貞凶
【上六】乘馬班如 泣血漣如

  준(屯)괘는 만남을 뜻하는 것으로, 건(乾)괘에서 말한 순조로운 원형리정(元亨利貞)을 위해 대인을 만나는 것(利見大人)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시켜도 무방할 것 같다. 屯을 '둔'으로 읽기도 한다. 주역은 첫 괘에서 시간(하늘)의 이야기를, 두 번째 괘에서 자리(땅)의 이야기를 세 번째 괘에서 만남(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는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고, 커서는 가정과 사회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한자로 풀면 사람(人)은 하나가 하나를 받쳐주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 받쳐주는 근원이 되는 만남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사람은 때가 되면 저절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오직 사람의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이다. 만남의 성질이 음과 양의 만남이기에, 준괘의 효사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을 예로 들고 있을 것이다. 양과 음은 만나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억지로 이룰려고 해서도, 서둘러서도 안된다. 

 

屯 元亨利貞 勿用 有攸往 利建侯
만남(屯)이 있어야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貞) 된다. 그러나 애쓰지 마라(勿用) 시간이 흐르면(有攸往) 자연스레 이뤄지는 것이니, 그보다 제후를 세우는 큰 뜻(建侯)을 펼치는 것이 이롭다(利)
  부모의 만남도 연인의 만남도 자식의 만남도 친구의 만남도 모두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 곧 인연(因緣)이 있어서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애쓰지 말라고 한다. 엄밀히 구분하면 혈연적인 만남은 한계지어진 곤(坤)괘의 뜻이며, 연인과 친구와의 만남이 준괘과 의미하는 만남일 것이다.

  고대 중국은 천자가 모든 천하를 지배하여 다스릴 수 없기에 각 지역에 제후를 세워 정치를 맡겨 관리하던 봉건체제로 운영되었다. 제후는 그 지역의 왕이었지만 천자에게는 신하였다. 과거 조공을 받치던 우리나라를 중국의 제후국이었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이러한 중국의 전통적 지배체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어쨌건 제후를 세운다는 것은 천자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제후를 세우듯, 큰 뜻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만남에 애쓰지 말고 큰 뜻을 펼치는데 애쓰라는 말이다.

 

磐桓 利居貞 利建侯
큰 돌을 놓아(磐桓) 멈추어야 이롭고(利居貞) 제후를 세우는 큰 뜻을 펼치는 것이 이롭다(利建侯)
  반환(磐桓)은 큰 돌을 상징하니, 고인돌을 반환이라고도 했다. 꼼작할 수 없게 큰 돌로 막아 멈추라는 말은 사랑에 방황하고 흔들리지 말라는 말이다. 과거에도 사랑의 방황은 고인돌만큼 크고 무거운 돌을 쌓지 않으면 막기 힘든 것이었나 보다. 큰 뜻을 펼치는데 진력하라는 가르침을 첫 효사부터 다시 강조하고 있다.

 

屯如邅如 乘馬班如 匪寇 婚媾 女子貞不字 十年乃字
사랑(屯如)에 혼란하여(邅如) 말을 타고 따라가면(乘馬班如) 도둑이 아닌데도(匪寇) 혼인을 청하는데(婚媾) 여자가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다(女子貞不字). 10년은 지나야 허락을 하게 된다(十年乃字)
  말을 타고 따라가는(班) 것은 지나치게 빨리 서두는 것을 말한다. 도둑이 아님은 나쁜 사람이 아님을 말한다. 사람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급하게 서두는 까닭과 억지로 이루려는 까닭에 여자의 허락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10년은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것을 말하니,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시간이다. 주역은 지나치게 서둘러 나아갔어도 또한 억지로 이루려고 나아갔어도 10년이란 세월을 인내할 수 있다면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공자께서는 “어질지 않은 사람이라면 궁핍한 가난을 오래 견딜 수 없고, 풍요를 오래 누릴 수도 없다[논어 제4편 이인 제2장]”고 하셨으니, 10년으로 상징되는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음은 이미 성취를 이룬(제후를 세운)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即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 幾 不如舍 往 吝
사슴을 잡으러(即鹿) 몰이꾼이 없이(无虞) 숲으로 들어가면(惟入于林中) 군자라도(君子) 한번 그러면(幾) 숲을 나오지 못하는 법이니(不如舍) 가면(往) 어렵게 된다(吝)
  우(虞)는 사냥할 때 새와 짐승을 좇는 몰이꾼 역할을 하던 관리를 말한다. 사슴이란 여인을 상징한다. 10년을 기다리는 것이 정석이 아니라, 준비를 충분히 하고 사슴(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 정석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사람(사슴)을 얻기 위해서도 사람(몰이꾼)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만남을 두 사람의 의지로만 유지시킬 수도 없는 까닭이다. 대표적인 예가 집안 내의 갈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乘馬班如 求婚媾 往 吉 无不利
말을 타고 따라가면서(乘馬班如) 사랑을 얻으려 했더라도 혼인을 허락 받으면(求婚媾) 나아감이(往) 길하고(吉)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여인을 얻으려고 말을 타고 서둘렀지만 10년을 기다렸으니(十年乃字) 혼인을 허락 받게 된 것이다. 시간을 서둘렀지만 곧 시간을 기다릴 줄 알았으니 길하고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공자께서 "잘못을 하고서도 고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30장]고 하셨으니, 고치면 그것으로 좋다.

 

屯其膏 小貞吉 大貞凶 
이득을 만나는 것(屯其膏)은 과하지 않다면 괜찮을 것이나(小貞吉) 지나치다면 흉할 것이다(大貞凶)
  고(膏)는 살찌고 기름진 고기를 뜻한다. 만남은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며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조력자를 만나는 것이지, 독고동락(즐거움은 나눌 수 있어도 고통은 너 혼자해라)의 만남이 아니어야 한다. 심지어 독고독락(고통은 너 혼자, 즐거움은 나 혼자)의 만남을 꿈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득(고기)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고통을 나누는 정도의 작은 이득을 꾀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지나치게 큰 고기를 만나려고 한다면 끝내 흉할 것이다.


乘馬班如 泣血漣如
말을 타고 따라가는 것(乘馬班如)은 피눈물을 줄줄 흘리게 될 것이다
  말을 타고 급하고 격정적으로 따라간 것이 사랑이었고, 인연이었다면 10년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기에 혼인을 허락 받을 수 있어 길할 것이다.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 실체가 사랑이 아닌 이득(고기)를 만나러 한 것이기에 10년을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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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坤 元亨利 牝馬之貞 君子 有攸往 先迷後得主 利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初六】履霜 堅冰至
【六二】直方大 不習 无不利
【六三】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六四】括囊 无咎 无譽
【六五】黃裳 元吉
【上六】龍戰于野 其血玄黃
【用六】利永貞

  곤(坤)괘는 자리를 말하며 한계를 말한다. 건(乾)괘의 시간을 대하는 사람은 그 시간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기다릴 때, 나아갈 때, 물러날 때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곤(坤)괘의 자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부자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선진국에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나고,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지금 시대에 태어나고 등등, 이미 선택되고 정해진 것도 있는 법이다. 남자로 살기 싫어서 여자로 살려고 하는 것은 주역의 시각에서 보면, 자리의 도를 거스르는 잘못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대표적인 인간의 한계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일 것이다. 그럼 이러한 유한성을 인간은 어찌 대해야 하는가? 한탄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은 곧 하늘이 나에게 맡긴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왜 그런 한계를 주었는지에 대한 자리의 도(道)을 헤아리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찾았을 때, 즉 제 자리에 앉았을 때 비로소 삶을 가치 있게 이끌 수 있을 것이다.

 

坤 元亨利 牝馬之貞 
제 자리(坤)라야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순한암말처럼 죽게(牝馬之貞)된다 
  시간(하늘)만이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씨는 변화의 순리에 따르지 못하고 싹이 트지도 못하고 죽어버린다. 장소(坤) 역시 생성, 성장, 성숙(元亨利)의 변화의 법칙과 관계하게 되지만, 순한 암말처럼 마감 하는 것(牝馬之貞)이 특징적이다. 암말을 뜻하는 빈마(牝馬)는 유순함을 상징한다. 소리를 내거나 과시하지 않는 유순한 성질 때문에 마차를 끄는 말은 어미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순한 암말처럼 죽는 것은, 이어지는 효사에서 용의 전쟁으로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천수(天壽)를 다하고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君子 有攸往 先迷後得主 利
군자(君子)로써 시간이 지나면(有攸往) 처음에는 미혹하였어도 후에 주인을 얻게 될 것이니(先迷後得主) 이롭다(利)
  주인을 얻는 것(得主)은 곧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는 것을 말함이니, 군자(君子)가 되어 시간이 흐르면(有攸往) 처음에는 미혹하였어도(先迷) 곧 자리(사명)을 깨닫게 될 것(後得主)라는 뜻이다.

  『순자』「대략」에 다음과 같은 자공과 공자의 문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자공은 ‘할 일이 많아 힘드니, 군주를 섬기는 것 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어버이를 섬기는 것 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처자를 부양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친구와 관계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논밭을 경작하는 것만이라도 쉬면 안 되는지’ 차례로 공자께 여쭈었다. 공자께서는 쉬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한탄하며 "그렇다면 저는 조금도 쉴 수 없는 것입니까?"하고 공자께 하소연을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저 들을 보아라. 흰 듯, 찬 듯, 막힌 듯하지 않느냐? 저 곳이 네가 쉴 곳이다" 자공이 감탄하며 말했다. "위대하구나 죽음이여! 군자도 쉬고 소인도 쉴 수 있도록 해 주는구나!" 하늘이 시간을 주어 세상에 보낸 이유는 할 일을 시키려 보낸 것이다. 쉬도록 해 주려 하였다면 죽음의 공간 속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유유왕(有攸往)은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풀었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서남이면 벗을 얻을 것이요(利西南得朋) 동북이면 벗을 잃으니(東北喪朋) 편안한 마감이어야(安貞) 길(吉)하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으로 밝은 곳을 상징하니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반대로 서쪽은 해가 지는 어두운 곳이니 쉽게 갈 수 없는 힘든 곳이다. 남쪽은 따뜻한 곳으로 올바른 곳을 상징하며, 북쪽은 추운 곳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곳을 상징한다. 그래서 힘들어도 옳은 곳(西南)으로 움직이면 친구를 얻고(得朋), 쉽지만 바르지 못한 곳(東北)으로 움직이면 친구를 잃을 것(喪朋)이라고 하니, 힘들어도 옳은 곳을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친구는 자리를 찾아 사명을 다하고 편안하게 죽는 것, 순한 암말처럼 죽음(貞)에 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履霜 堅冰至
서리를 밟게 되어서야(履霜) 단단한 얼음에 도달할 것을 안다(堅冰至)
  늙음을 빗대어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흰 머리가 나고 흰 수염이 나는 까닭은 이제 마감을 할 얼음(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하늘의 신호이다. 얼음이 어는 겨울이 올 것임을 방관하고 살다가, 서리를 밟게 되어서야 비로소 생의 무상함에 안타까워 하는 것이 바쁜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노랫말처럼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가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좀 더 일찍 해 보면 좋지 않을까?

 

直方大 不習 无不利
대지(直方大)의 도는 의욕하지 않으니(不習)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직방대(直方大)는 광활한 대지의 덕성을 묘사하고 있다. 땅은 모든 것을 차별없이 포용한다. 대추씨가 들어오건 사과씨가 들어오건 차별하지 않고 양분을 주고 키워준다. 사람의 자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주어진 한계를 의욕(習)하여 바꾸려고 하지 않아야 하니, 남자가 여자됨을 의욕하지는 않아야 한다. 배우고 힘써 의욕해야 하는 것은 자리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지처럼 이롭게 해 주는 역할[사명]을 다 하는 것에 두어야 할 것이다.

  유학의 명분론에 대한 의미와도 연결되는데, 명분론(名分論)이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계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기에 조금 보충하고자 한다. <여기를 참조> 하시기 바란다.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한계를 아는 현자(含章可貞)는 왕의 일을 따르게 되면(或從王事) 완성없이(无成) 마치려 한다(有終)
  함장(含章)은 바름을 머금은 것이며 가정(可貞)은 정해진 한계를 수용하는 것이니, 곧 자리를 알고 사명을 아는 바른 현자를 말한다. 왕의 일이란 만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려 바른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완성이 없다는 것(无成)은 그 공로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마침이 있다(有終)는 뜻은 올바른 결과만을 얻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세종실록』에 충녕대군을 잘 단속하라는 원경왕후의 말에 충녕대군 부인이었던 소헌왕후가 주역의 이 효사를 인용하여 대답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곧 충녕대군이 애쓰는 일은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무성유종(无成有終)하기 위함이라는 뜻이었으니, 공로를 탐내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 바른 결과만을 원하다는 뜻이었다. 

 

括囊 无咎 无譽
돈주머니를 묶어놓는 것은(括囊) 허물은 아닐 것(无咎)이나 명예롭지도 않을 것이다(无譽)

  돈주머니를 묶는 것은 혹종왕사(或從王事)하지 않고 재능을 쓰지 않는 것을 뜻한다. 혹종왕사하여 유성(有成)하려고 하면 제 자리를 모르는 지나친 것이며, 혹종왕사조차 하지 않는 것은 모자라는 것이니, 모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자공이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상자에 잘 보관하겠는지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팔 것인지를 여쭈니 공자께서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도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논어 제9편 자한 제13장]고 하셨다. 쓰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주역에서 말하는 허물은 내(內)적인 시각이며 길흉(吉凶)과 명예(譽)는 외(外)적인 시각이라고 했었다<여기를 참조>. 돈 주머니를 풀지 않는 것은 안으로, 자기 내적으로 허물은 아니어도 외적으로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고 한다.

 

黃裳 元吉
황색치마(黃裳)가 근원적으로는 길하다(元吉)
  황색치마(黃裳)는 황제가 입는 치마를 말하는 것이니, 곧 현자가 왕의 일을 대신맡아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것 보다는 왕이 왕으로서의 일을 해야 근원적으로 길하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충녕대군이 혹종왕사(或從王事)하기보다 양녕대군이 왕사(王事)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길하다는 뜻이다. 양녕대군이 자리의 도리(坤)를 잊고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 충녕대군이 자리를 옮겨 조화를 맞추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양녕대군이 제 자리에 앉고 충녕대군도 제 자리에 있는 것이 근원적으로 길한 것이다.

 

龍戰于野 其血玄黃
용들이 들판에서 싸우면(龍戰于野) 그 피가 검고 누르게 된다(其血玄黃)
  검고 누른 것(玄黃)은 천자문에도 나오는 하늘과 땅(天地)이 검고 누른것(玄黃)이니 곧, 온 세상을 말한다. 들판에 있는 용 또한 건(乾)괘의 현룡처럼 제자리를 잡지 못한 용이니, 그들이 잘못된 자리에서 다투면 온 세상이 피로 물든다는 말이다. 제 자리[사명]를 모르는 용들이 세상을 혼란으로 이끄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장래희망, 꿈, 사명에 대한 생각을 접고, 오로지 돈을 많이 벌고 부러워하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물질만능주의가 심각한 듯 하다. 천지에는 풀도 있고 토끼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곰도 있어 셀수 없는 다른 생명체가 다른 역할을 하며 생태계의 조화를 이룬다. 사람도 모두 공평하고 소중한 생명이지만, 인간 세상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사람마다 맡은 역할은 다르다고 하였으니, 각기 다른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공자께서도 세상을 바른 도리로 세우고자 하였어도 천자의 지위를 얻고자 하지는 않으셨다.

 

利永貞
열매를 맺으려는 것(利)은 끝까지 계속(永貞)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가 맡은 사명을 알고 자기 자리를 찾아 역할분담을 하여 열매를 맺어야 세상이 조화롭게 된다. 열매를 맺으려는 것은 천성(天性)이라 끝까지 지속되는 것인데, 어긋난 자리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기에 세상의 조화가 파괴되어 피로 물들게 되는 것이다. 즉, 용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세상이 피로 물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자리를 잡고서 그 곳에서 열매를 맺으려 하는 천성 때문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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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乾 元亨利貞
【初九】潛龍勿用
【九二】見龍在田 利見大人
【九三】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九四】或躍在淵 无咎
【九五】飛龍在天 利見大人
【上九】亢龍有悔
【用九】見群龍无首 吉

  하늘 아래의 모든 생명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씨(元)로부터 시작해, 꽃을 피우고(亨), 열매를 맺고(利), 소멸하게(貞) 하였다. 모든 생물(生物)이 이 변화의 법칙을 순리대로 따를 수 있을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싹이 텄으나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있고, 꽃이 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논어 제9편 자한 제22장]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열매를 거둬야 할 때가 있다. 겨울에 씨를 뿌리면 소용이 없으니,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시간만 맞추면 순조로울까? 비옥하지 않은 모래밭에 씨를 뿌리면 역시 소용없다. 무슨 일이든 무슨 생명이든 마땅한 장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때가 맞고 자리가 맞으면 모든 것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가? 봄에(시간) 비옥한 땅에(장소) 씨를 뿌려도 가뭄이 들면 소용이 없다. 하늘이 보살펴야 한다. 동물은 자존능력을 갖출 때까지는 어미가 젖을 먹이고 지켜주어야 한다. 시간, 공간 , 보살핌(사랑), 그것으로 완전할까? 사고(事故)가 없어야 한다. 토끼 새끼가 호랑이의 먹이가 되고, 호랑이 새끼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럼 그러한 사고는 어찌하여 생길까? 『중용』의 "하늘은 만물을 살리심을 그 재질에 따라 두터이 하시니, 바르게 심어져 있으면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린다"[중용 제17장]는 가르침을 언급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바른 길을 가도록 애쓰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乾 元亨利貞
시간(乾) 아래의 인간은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貞) 된다
  시간은 영원불변하며 완전하다. 시간은 변치 않고 영원히 흐르지만, 그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 생물은 영원한 것이 없다. 영원한 하늘의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이치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순탄하게 그 변화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선 시간에 맞추어 씨를 뿌려야 한다. 원형리정(元亨利貞)은 주역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며, 해석여하에 따라 전체의 의미를 다르게 하는 부분이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潛龍勿用
잠용(潛龍)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마라(勿用)
  물에 잠겨있는 용(潛龍)은 아직 나아가야 할 때를 만나지 못한 용이다. 용(用)은 동(動)의 뜻으로 해석한다. 잠용은 나아갈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새기면 될 것이다. 즉,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 때를 말한다.

 

見龍在田 利見大人
나타난 용이(見龍) 밭에 있으니(見龍在田)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밭은 용이 있어야 할 제 자리가 아니다. 용은 하늘을 날아야 한다. 씨를 뿌릴 시간이 도래하였어도 모래에 뿌리면 소용이 없다.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대인(大人)은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말한다. 즉, 현룡은 도움을 받아야 할 때를 말하고 있다.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군자(君子)가 되어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乾乾) 어두움(夕)을 경계한다면(惕) 위태로울지라도(厲) 허물이 없다(无咎)
  때를 만나고(天), 바른 자리를 잡고(地), 사람을 도움을 얻은(人)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이 이루어졌다고 만사 순탄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였다. 힘써 배워야 할 때를 말한다. 한편, 주역에서 말하는 군자(君子)는 어떠한 사람일가?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或躍在淵 无咎
연못에서 과단하게 비상해야(或躍在淵) 허물이 없다(无咎) 
  혹(或)을 문언전의 해석대로 ‘의심하다’는 의미의 혹(惑)으로 해석하면, 만반의 준비가 완료 되었더라도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한편, 혹(或)은 ‘갑작스럽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과단성있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가르침이 된다. 지금은 나아가야 할 때다. 신중해야 하는가, 과단해야 하는가? 여기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자기로부터 찾아야 할 해답일 것이다. 과단성이 부족한 나는 후자의 의미로 새기며 읽는다.

  

飛龍在天 利見大人
하늘을 날고 있으니(飛龍在天)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利見大人)
  거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전성기이다. 열매를 맺은 시기(利)이다. 그렇지만 도와준 대인(大人)을 만나야 이롭다고 한다. 전성기가 도래하였으니 그 복을 내가 누리는 것에만 써야 할까? 사람은 하늘(시간)과 땅(자리)에게 성취한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는 없지만,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는 내가 이룬 결실을 나누어 보답해 줄 수 있다. 은혜를 잊지 말라는 말이다. 재아가 3년상을 1년상으로 바꾸겠다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식으로 태어나 최소한 3년은 되어야 보살핌이 없어도 살 수 있게 된다. 재아도 부모에게 최소한 3년의 보살핌은 받지 않았더냐?"[논어 제17편 양화 제21장]. 이미 갖춰지면 고마움을 쉬이 잊어버리기도 한다. 비룡은 베풀어야 할 때를 말한다. 

 

亢龍有悔 
오를려고만 하는 용(亢龍)은 후회가 있다(有悔)
 
  문언전은 항(亢)을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나는 것을 알 지 못하며, 존재만 알고 없어질 것을 모르고, 얻는 것만 알고 내 놓을 줄을 모른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며,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러날 때가 되었다면 놓아야 한다. 때가 되면 부모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부모의 역할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면, 자식은 독립하지 못하고 마마보이가 되어버린다. 사람은 본시 영원을 갈망한다. 영원한 삶을 꿈꾸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영원한 안락을 꿈꾸곤 한다. 그렇지만,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은 흐른다」는 하늘의 법칙 밖에 없다. 그 하늘아래에서 모든 것은 원형리정의 법칙에 따라서.변한다. 항룡은 물러나야 할 때다.

 

見群龍无首 吉
용의 무리에(見群龍) 우두머리가 없으니(无首) 길(吉)하다
  세상에는 잠룡(潛龍)만 있지도 않고, 현룡(見龍)만 있지도 않고, 비룡(飛龍)만 있지도 않고, 항룡(亢龍)만 있지도 않다. 모두 함께 더불어 세상을 이룬다. 그 차이는 때와 때의 선택에 따라 다른 모습에 불과할 뿐, 모두가 같은 용이다. 우주의 시간에서 볼 때는 불꽃처럼 사라지는 찰나의 시간만 가진 별 다를 것 없는 생물이다. 그러니 나 잘났다고 머리를 내밀지 마라는 뜻이다.

  공자께서 소인을 하찮게 여기라고 소인과 군자를 구별한 것은 아니었다. “군자는 의로움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로움을 생각한다”고 하시고는 그러니 "소인을 우선 이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소인을 멸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자께서는 「사랑」을 말한 것이었지 「미움」을 말한 것이 아니셨다. 번지가 인(仁)을 여쭈자 공자 말씀하시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지(知)에 대해 여쭈자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知人)"라고 하셨다[논어 제12편 안연 제22장]

 

oon

  첫괘, 건(乾)괘의 효사에서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용어가 제법 있다. 길(吉)한 것과 흉(凶)한 것, 이로운 것(利), 허물이 없는 것(无咎), 후회가 있는 것(有悔),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厲) 등등, 구분히 모호한 한자어가 등장한다.  <여기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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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을 때 극복하지 않으면 길을 헤메는 관문이 있다.
중(中)의 관념이 서지 않으면 혼돈으로 빠져든다.
중(中)에서의 직선은 가둠을 관통하는 있는 것을 말한다.
갇힌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통(通)하여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엇으로 그 가둠을 관통하고 있을까?

공자께서 "증삼아 내가 말하는 도는 하나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자 증삼은 "그렇습니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이 "뭔 말이야?"라고 묻자, 증삼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지극한 서(恕)야" 라고 하였다. [논어 제4편 이인 제15장]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을 동(同)하여 관통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중(中)은 가둠의 안과 밖을 마음으로 일관하여(恕) 관통하는 「진리」이다.

원효대사께서 마신 해골에 담긴 물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다.

사물은 변한 것이 없는데 (해골에 담겨있던 물은 똑 같은 물이었지만)
눈으로 보고나니 마음이 변하더라.

이 일화를 「일체유심(一切唯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대학』 역시 마음(心)을 강조한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대학 제7장 정심수신]


중(中)은 마음으로 통(通)하여야 알 수 있는 「진리」이므로
노엽고, 두렵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걱정스러우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공자의 말씀도, 석가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모두 머리에서 지워내어야 할 것이다.

 

용(庸)은 이러한 중(中)의 진리」에 조화롭게 맞추어 대응하는 「응답이다.
정이의 "바뀌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라는 설명은 오해를 일으키기 딱 좋다. 주희의 "일상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묶어 설명하려고 하니, 진순처럼 "오곡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은 만고의 일상이라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갈수록 이해하기만 어렵게 하였다.

 

위 속에 음식이 알맞게 차 있도록 유지시키는 것이 중용(中庸)은 아니다.
그러려면 그 중간을 맞추기 위해 하루종일 조금조금 먹고만 있어야 한다.
밥을 많이 먹고, 다시 많이 부족해지면 다시 과하게 채우는 것이 밥먹는 중용이다.
그래서 배가 부를 때를 만나고, 적당히 좋을 때를 만나고, 배가 고플 때를 만난다.
각 시기(時)에 알맞는 응답은 모두 다르다. 100년치 밥을 한꺼번에 먹고 한꺼번에 배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중용의 응답은 시공(時空)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즉, 용(庸)은 일반적 인식으로는 바뀌는 것으로 설명해야 오해가 덜하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지능도 모두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10대, 20대, 30대가 다르다.
이러한 다름을 분별(分別)하여 가장 적합하게 맞추어 조화롭게 응답하는 것이 중용이다.
병(病)을 기준으로 똑같은 약을 쓰는게 아니라,
각 사람의 특성을 기준으로 다른 처방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동양의학이었고,
역시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 제자들마다 그 다른 특성을 감안하여 다르게 가르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한 마디는 그 한마디 말과 글에만 갇혀서 이해하려면 오해가 생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무엇을 위해서 그러한 대화를 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증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대화는 상상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중(中)의 사유는 안과 밖을 통(通)하는 것이며,
중용(中庸)의 사유는 분별(分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어리석은 중생아 개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왜 모르느냐고 한다.
그렇지만 개와 사람이 교감하기 위한 육체사랑을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는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기도 하다는 중(中)이며,
진리에 반응하는 응답은 개와 사람이 다르다는 분별(庸-용)이다.

현상계가 만들어 내는 거짓에 갇혀있는 중생들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현상계가 만들어내는 것은 허상이라는 깨달음에 갇혀서,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무지(無知)도 생각을 가두고, 지(知)도 생각을 가둔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지(知)도 중용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까닭을 알겠구나. 지자(知者)는 과(過)하고 우자(愚者)는 부족하구나” [중용 제4장]


결국 유가의 진리는 세속과 초월의 한 쪽이 아니라 통(通)하는 것이기에,
속세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높고 원대한 이론으로 나아가 고원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로 돌아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것이 곧 도(道)이기도 하다.
현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도(道)이기는 하여도, 중용의 도리에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자기와 남은 별개의 분별(分別)된 개체이면서 또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에
개인(個人)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옷을 벗고 싶어도 아무곳에서나 나체로 있으면 안되며 예(禮)를 지켜야 한다.
물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중용에 따라 그 적합한 응답은 변한다.

그런데,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이 중용의 생기발랄함과 융통성이 없어져 버렸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말하였다 “큰 덕은 한계를 지켜야 하지만, 작은 덕은 들고 나는 것이다 [논어 제19편 미자 제11장]

송대 이후의 학자들이 이 장을 비난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작은 덕이 어찌 들고 날 수 있겠는가? 작은 덕이라고 해서 들쑥날쑥한다면, 곧 마음이 방종해져서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는 등등의 실랄한 비난을 받았다. 아마도 자하의 말이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 같다. 그러나 자하가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송대이후의 학자들도 고원함과 깨끗함을 추구할 수록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고원함은 사람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송대 이후의 학자들은 소인은 멸시하여 멀리하고, 선비라는 자들끼리만 어울리는 계급과 권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단발령이 일제의 강제라고 해서 선비들이 반발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의 명령이라고 해도 따를 수 없었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정절을 유린당한 여인처럼 실성하여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 목을 매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어찌 유학만 고여서 막히고 가두어 졌겠는가? 사찰과 교회도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과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가두고 막아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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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乾)괘가 '군자'가 되어 스스로 노력하는 주동적인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곤(坤)괘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성찰은 죽음이 다가오는 서리가 내릴 즈음에 더 진지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리가 내리면[늙으면] 비로소 꽁꽁 얼음이 어는 시기[죽음]이 있음을 절감한다는
때 늦은 통찰을 언급하며 곤괘는 시작을 한다.
곤괘의 가르침을 짧게 정리하면 한계를 이해하는 것 즉, '정해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계와 정해짐은 자연의 뜻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자리에도 있는가?
유학에서는 인간이 만든 자리도 그 자리를 거스러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대신에 누르고 억압하고 부려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우월적인 자리가 아닐 것을 요구한다.

 

윗자리에 있다하여 아랫사람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며,
아랫자리에 있다 하여 윗사람에게 매달리라는 것이 아니니
오직 나를 바르게 할 뿐, 남에게서 구하지 않는다
.[중용 제 14장]

 

유가의 신하는 군주에게 굽신거리는 이가 아니었다.
신하의 지위에 있으므로 신하의 도리를 다 하면서, 군주에게는 군주의 도리를 다 하도록 도와주려던 이였다.
폭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군주의 잘못된 이름을 가진 악한에 불과하니 엎어 버려도 되는 것이었으니,
이름에 앞서, 이름에 맞는 제 도리를 다 하는가 하는 이른바, 정명사상(正名思想)을 중요시했다.
임금에 복종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주인에게 복종하고, 양반에게 복종하는
무조건적 ‘복종’만을 강조하기 위해 이 명분론을 이용했던 것은 변질된 유학의 잔재였을 따름이다.

 

사람은 자유롭고 싶어한다.

때로는 아버지라는 자리, 남편이라는 자리, 자식이라는 자리, 엄마라는 자리에서 벗어남을 꿈꾼다.
그러나 자리를 벗어나 욕구가 이끄는대로 제약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그 자리를 속박이라고 여기지 않는 편안함에 도달하는 것이 유학에서 추구하는 자유이다.
자식으로서는 자식의 도리를, 아버지로서의 아버지의 도리를, 남편이 되어서는 남편의 도리를 다 한다.
그 도리를 다 함은 의무감으로 따르는 길이 아니라 마음이 이끌기에 가고 싶은 행복한 길이다.

 

자리는 하늘이 잡아 놓기도 했고, 유학에 의하면 사람이 잡아 놓기도 했다.
사람이 잡아 놓은 그 자리 역시 명분(名分)에 맞아야 한다. 그러려면 '문화'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군주주의 시대에는 그 문화로 정해진 자리가, 민주주의 시대에는 그 문화에 맞는 자리가 다를 것이다.

 

공자께서 새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머물러야 할 곳이 숲인 줄 아니, 사람이 새보다 못해서 되겠는가?" [대학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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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往)이 독자적으로 쓰일 경우에는 ‘나아가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장소를 뜻하는 유(攸)와 결합하면, 유유왕(有攸往)은 '나아갈 곳이 있다면'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나는 왕(往)이 언제나 나아가는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 "내 보낸다"는 뉘앙스를 가진다고 생각되는 곳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에서 왕(往)은 래(來)와 결합하여 곧 잘 사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大往小來(대왕소래)"는 큰 것을 내 보내고 작은 것을 받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유유왕(有攸往)은 ‘시간을 내 보내는 것’으로 풀었다.
일반적으로 유(攸)는 장소를 뜻하지만, '시간이 오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해석을 시도했냐고 하면,
대부분은 그렇게 해석해야 전체적으로 문맥과 더 어울려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리유유왕(利有攸往)'갈 곳이 있으면 이롭다'해석하는 것과
'시간이 지나가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해석이 되어버린다.
그 점을 감안하면서 주역을 보시길 바란다.

 

나아감을 뜻하는 말은 정(征)과 행(行)도 있다. 왕(往)은 길을 모르고 나아가는 것이라면,
정(征)은 바르다는 내적 확신을 하고 힘차게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행(行)은 피동적인 뉘앙스로 ‘따라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쁠 부(孚)에 대해서 그 의미에 큰 논란은 없다.
새가 그 다리를 바꿔가며 알을 품어주어, 그 알을 깨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인데,
특히 유부(有孚)라는 결합어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신념’이요, ‘믿음’이요, ‘생각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는 어렵지 않으나 문맥상 적당히 번역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이 없어 곤란한 면이 있다.
생각없이 하는 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을 갖고 하는 것'이란 뉘앙스로 해석했으면 한다.

 

이상, 주요한 용어에 대한 간단한 원론적인 설명을 마친다. 이러한 용어풀이가 모든 주역에 통용되는 주역 사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변화를 거쳐서 괘효사가 추가, 삭제, 수정되는 과정에서 전체를 통괄하는 완벽한 통일성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이러한 상식을 갖고 문맥에 가장 어울리게 해석하는 융통성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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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吉)은 길(吉), 대길(大吉), 원길(元吉), 종길(終吉) 등등으로 주역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며 ‘좋다’는 의미이다. 흉(凶)은 흉(凶), 유흉(有凶), 종흉(終凶), 흉사(凶事) 등등으로 역시 주역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며 ‘나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좋다는 늬앙스를 가진 것은 허물이 없다는 무구(无咎), 후회가 없다는 무회(无悔), 형통하다는 형(亨), 이롭다는 이(利) 명예롭다는 예(譽)와 같이 여러가지 다른 표현들이 있다. 흉(凶)도 마찬가지이다. 뉘우침이 있다는 회(悔), 어렵다는 린(吝), 위태롭다는 려(厲), 허물이 있다는 구(咎) 등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보통은 좋고 나쁘고의 정도의 차이로 해석하여, 길흉은 아주 좋거나 나쁘고, 나머지는 그 보다 아래단계라고 해석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만 바라보기에는 해석이 난해해지는 부분들이 많이 생긴다. 예컨대, 대과(大過)괘의 상육(꼭대기 효)효의 효사는 '過涉滅頂 凶 无咎(과섭멸정 흉 무구)'이다. "흉한데, 허물은 없다"고 한다.


정교하게 좋고 나쁘다는 여러 표현들을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내 생각에 따라서 그 기준을 나누어 해석을 시도했다. 첫째, 길흉(吉凶)은 외면(外面)적인 시각에서의 판단이며 내부적으로는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허물(咎)은 내면(內面)적인 시각에서의 판단이며 외부적으로는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대재벌이 되는 것은 길(吉)한 것이지만, 오히려 내심은 불편하고 그 위치에 서고 싶지 않으면 길(吉)하여도 허물이 있는 것(有咎)이고, 흥선대원군이 세도가의 바지가랭이를 기어다니는 것은 흉(凶)하지만, 그 내심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멋지게 속이고 있는 것이니, 오히려 쾌재를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라면 흉(凶)하지만 허물이 없을(无咎)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후회(悔)는 원하던 결과를 염두해 둔 내면(內面)적 판단이다. 회(悔)는 결과가 좋으면 바뀔 수 있는 내면의 마음이다. 예컨대, 술잔과 물잔이 있었는데, 마음은 술을 먹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물잔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으니 허물(咎)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술잔에는 독이 들어 있어서 술을 먹은 사람은 죽고, 물은 먹은 자신은 살았으니 회(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셋째, 명예(譽)는 길흉과 같은 외면((外面)적인 시선이지만, 길(吉)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도 있는 성취임에 비하여, 예(譽)는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벌이 되는 것은 길(吉)한 것으로서 존경을 받을 수도 부러움을 받을 수도 있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능력에 따른 당연한 성취로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외면(外面)적으로 판단되는 사람이 그만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 곧 명예(譽)이다.

 

넷째, 형(亨)은 계속적으로 상승되어가는 좋음을 말하며, 리(利)는 그 양의 대소에 관계없이 얻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어렵다는 린(吝)은 실패의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며, 위태롭다는 려(厲)는 고생스럽고 힘들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것을 기본으로 하여 해석을 시도했다. 그러나 100%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으며,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현재의 주역은 1인이 논리를 가지고 통일되게 기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역의 괘효사는 오랜시간을 통하여 수정, 첨가, 삭제가 되어 전해져 온 것이기에 그 과정을 거치면서 혼용되기도 했고, 다른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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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서 첫 괘가 하늘(乾)로 시작하는 까닭은 시간과 공간의 우주이치를 말하기 위한 까닭은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시간을 말하고,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간의 도를 말하기 위해서다.
짧은 시간이라고 조급하게 쓸려고 서두르지도 말고, 더 붙잡고 있으려고 미적거리지도 말라는 의미이다.
「소주역」이라는 별칭을 가진 「중용」에서 '군자의 중용은 군자의 시중(時中)이다'고 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리고, 나아가야 할 때는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는 물러나야 한다.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부분은, 점이나 부적 방술과 같은 방법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지 말하는 셋째효의 의미이다. 인간이 주도적 입장이 되어 선택해야 할 시간을 말하고 있다.
기다려야 할 때(잠용), 구해야 할 때(현룡), 나아가야 할 때(비룡), 물러나야 할 때(항룡)를 잘 판단하라는 가르침을 전하지만, 그 때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인사대천명! 오직 사람의 일을 다할 뿐이다.

점쟁이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신이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역은 점에 의지하라고, 신께 기도하라고, 부적에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른 분별력을 가진 군자가 되어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유학에서의 군자는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다.
다만, 그 옳고 그름의 잣대, 진리의 잣대는 '나에게 요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육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를 건강하게 하려 요가를 배우듯이,
정신 건강을 위해서 학문을 배우는 사람도 '자기'를 수양하려 배움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수신이 최선순위에 오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
남에게 요구하기 위한 옳고 그름은 싸움을 낳고 미움을 낳게 되는 해악이 될 뿐이다.
자기의 사상과 종교가 절대적 진리라는 믿음으로 쉬지 않고 다투고 있고,
얼마나 많은 인간이 목숨을 잃게 되어야 했던가?

 

군자는 나를 바로 세우는 사람일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감화된 사람이 저절로 벗이 되려고 찾아오기도 하는 사람이다.
논리와 말로 이겨서 사람을 끌고오려는 승리자, 내세우려는 잘난 이가 군자가 아니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은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부단히 강조한다.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 [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같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논어 제13편 자로 제23장]

 

군자가 되어 자기를 다듬는다는 이 수신이 결코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가 전해주는 가르침은 '물은 변한게 없었지만 내 마음이 변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은 아닐 것이다.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알고서 구토가 일어났다는 것은 지나간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착하는 경지를 벗어났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자기자신을 깨우친 것도 깨달음의 한 이유였다고 한다. 맛있게 먹었다는 기억을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더러운 물이네 할 것이지, 구토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로서 자기를 착각하지 않고 냉정하고 철저하게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자라서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지혜롭다는 사람도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경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신(나를 닦고) 제가(집안을 바로하고) 치국(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세상을 평화롭게 하는)하는 것이, 순서대로 완성 한 후 나아가는 선후의 단계적 의미는 아니다. 수신이 곧 제가와 다르지 않고 치국과 다르지 않고 평천하와 다르지 않음이다. 즉, 수신(修身)은 평생 수련해야 하는 것이지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어지듯, 배움도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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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리정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다. 주요한 해석을 간추려보면,

1. 크게(元) 형통하리니(亨) 끝까지(貞) 이롭다(利).
2. 크게(元) 형통하려면(亨) 곧아야(貞) 이롭다(利).
3. 크게(元) 형통하리니(亨) 이롭다는(利) 점괘이다(貞)
4. 크고(元) 형통하고(亨) 이롭고(利) 곧다(貞)
5. 시작되고(元) 자라나고(亨) 이루어지고(利) 완성(貞)된다.
6. 태어나(元) 자라고(亨) 열매맺고(利) 소멸한다(貞)

으뜸 원(元)은 ①첫째 ②시작 ③크다 ④근본, 근원 등으로 사용되는 글자이다.
주역 전체에서 원(元)은 보조적으로 쓰이기에, 원(元)은 형(亨)을 수식하는 말로 풀이하여
'원형/리정'을 분리하는 입장이 위 1,2,3번의 해석이다.
원(元)은 "원길(元吉)"처럼 다른말과 결합하여 쓰이는 것이며,
이로울 리(利)는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다'는 리견대인(利見大人)처럼
주역의 다양한 효사에서 다른 말과 결합하여 사용된다.
그래서 리정(利貞) 역시 함께 붙어서 의미를 가지는 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貞) 역시 "정길(貞吉)"처럼 떨어져 쓰이지는 않는다는 것도 '원형/리정'을 나누는 근거로 든다.

 

반면, 괘사(卦辭)는 문왕이 만들었고 효사(爻辭)는 주공이 만들었기에,
괘사와 효사가 문법적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고 단정할 수 없고,
괘사와 효사는 후대에 첨삭, 수정, 가공되었던 부분도 많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성과 통일성을 갖추고 있을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문맥에 맞게 적절하게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며,
원형리정(元亨利貞)은 괘사(卦辭)의 나오는 경우에는
독자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조화스럽고 어울린다고 한다.
위의 4,5,6번의 해석은 '원/형/리/정'을 각각 독자성을 가진 의미로 풀이하는 입장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위 5,6번의 해석론을 기준으로 풀었다.
일반적으로는 각각 독립적이고 평등한 레벨로 본다.

예컨대, 원(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견으로는 원(元)은 단지 근원(根原)이며, 정(貞)도 단지 마침(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4duk

사견으로는 원(元)과 정(貞)은 고정이고 변함이 없기에,
주역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성장 즉, 형(亨)에 집중하여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성장(亨)하는가에 따라 결실(利)이 다르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존경하는 공자께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현재의 사람도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알 수가 없는데,
수천년전의 사람을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으며 장담할 수 있을까?
진실은 공자는 나쁜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꾸미고 각색한 사람이라고 해도,

속았다며 공자를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의 이미지를 존경하는 것이지, 공자의 행적이 진실이라고 확신해서 존경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존경할 만 하다면 소설 속의 인물도 존경할 수 있다.

 

주역은 점 치는 책은 아닌가? 점 치는 책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점만 치는 책은 아닌 것 같다.
점을 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하여, 점을 쳐서 묻는 일을 줄이게 만드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어 소중히 생각하는 책이며, 그래서 내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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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 생각에 우울증, 피로, 위장장애, 어지러움 같은 스트레스로 인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주로 주부들이 겪는 문제로 생각했으나, 최근에는 남편, 미취업자, 미혼자, 시어머니 등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산업화 이후 전통적 가족 문화에서 개인주의 문화로 변화화면서 생겨난 문화 갈등이 이유일 것이다.

 주부들에게 명절이 반갑지 않는 까닭은 시댁에 가서 차례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 요즘에는 차례 음식을 주문하여 사용한다고도 하고, 제사와 차례 때문에 기독교 신자가 된다고도 하는데, 나는 시대적 생명이 다한 예법(禮法)은 바뀌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차례상
차례상 by queenck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조선초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부모께만 제사를 지냈다.

  『경국대전』「예전(禮典)」「봉사조(奉祀條)」에는 문무관 6품 이상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3대를 제사하고, 7품 이하는 부모, 조부모의 2대를 제사하고, 서인은 돌아가신 부모만을 제사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예기』「제의(祭義)」에 강조한 것처럼, 절차로 인해 실질인 '공경'을 잃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祭不欲數(제불욕삭) 數則煩(삭즉번) 煩則不敬(번칙불경)

제사는 많지 않아야 한다. 많으면 번잡해지고, 번잡해지면 공경함이 없어진다.

예는 마음이 근본이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다.

예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 장례는 장중하게 치르기 보다는 진정으로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 『논어 제3편 팔일』「제3장」

 

  공자께서는 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셨을까?

  효(孝)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없는 내면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시건, 부모님이 돌아가시건 그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효(孝)의 마음이 변하지 않음을 표현하는 의식인 것이다. 그래서 제사는 효의 연장이라고 하셨다.

돌아가신 조상을 살아 계신 듯 섬기는 것효에 이르는 것이다 -『중용(中庸)』「제19장」

제사는 봉양하는 것을 좇아서 효도를 계속하는 것이다-『예기』「제통(祭統)」

  즉, 부모님의 고마움을 잊지 않도록 제사라는 행위를 통해 기억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우리는 조선중기를 기점으로 신분제의 동요가 심했고, 10% 정도에 불과하던 사족(士族)이 편법으로 계속 늘어만 갔다. 공명첩, 납속책, 족보위조 등을 통해서 사족으로 둔갑하여 현재는 대부분이 모두 사족의 혈통이 되었다.

  새로이 사족이 된 계층이 사족처럼 제사를 지내려 하면서 제사가 혼란스러워 졌고, 권위를 지키려고 한 사족 계층이 또 방어를 하면서 형식적으로 치우치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이이 선생께서는 각 가정마다 다른 제사의식을 문제 삼으셨다.

지금 세속의 대다수가 예를 알지 못하여 제사 지내는 의식이 집집마다 같이 않으니 심히 웃을 만하다(今俗 多不識禮 其行祭之儀 家家不同 甚可笑也) [격몽요결 제7장 제례]

  그러나 이이 선생께서 제사의식을 문제삼은 것은 '형식에 치우친 예'를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기득권자(사족)의 입장에서 방어하고자 한 까닭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널리 알려진 속담처럼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러니 '조율이시'니 '홍동백서'니 하는 것이 중요한 바가 아니다. 『예기』「제의(祭義)」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를 잊지 않으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제사를 지내면서 ①부모님께서 거처하셨던 곳을 생각해보고 ②부모님이 웃음소리와 말소리를 생각해보고 ③부모님께서 뜻하셨던 바를 생각해보고 ④부모님이 즐거워 하는 바를 생각해보고 ⑤부모님께서 좋아하실 음식을 생각해 본다.

 

  예(禮)를 행한다고 하면서 지나치게 형식에 치우쳐 실질을 잃어버리고 있는 듯 하다.

공자께서는 서(恕)로 일관하셨다고 하셨으니, 마땅히 조상님께서 살아계셨다면 무엇을 좋아하셨을 지, 마음으로 통(通)해야 할 것이다.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하라는 ‘사망여사존(事亡如事存)’도 그러한 뜻이리라.

 

  손주가 좋아하는 '피자'를 상에 놓으면 좋아하실 수 있으며, 간소하게 차림으로써 며느리와 아들이 화목하다면 더 좋아하실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께서 생전에 드시지 않던 술을 올리는 것이 과연 예(禮)일까? 경조사에 축하와 위로의 마음 없이 주고받는 돈으로 셈하고자 함이 과연 예(禮)일까? 오늘날 예(禮)는 지나치게 형식에 치우쳐 있는 듯 보인다. 마땅히 변해야 할 것은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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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트가 주장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자아이가 3세에서 5세 정도에 이르면 어머니에 대한 연정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질투심, 경쟁심, 적의심을 일으키게 된다는 이론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했다'는 결과만을 가져와 이름을 붙였기에, 「오이디푸스」가 어머니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였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신화 속 「오이디푸스」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패륜아가 되어버린, 잔인한 숙명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신화 속 「오이디푸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오이디푸스」는 코린트의 왕 「폴리부스」와 왕비 「페리보이아」의 아들로 행복한 왕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연회석상에서 술에 취한 오이디푸스의 친구가 말했다.

오이디푸스! 너는 주워온 자식이야

  아버지 「폴리부스」가 정색을 하고 친부자간이라고 나무랐지만, 과한 반응에 「오이디푸스」는 의심이 더해졌다. 그래서 델포이 신전으로 찾아가 「아폴론」에게 신탁을 청했다. 그런데「아폴론」은 친자여부가 아닌 엉뚱한 답을 내놓는다.

 
Gustave Moreau: Oedipus and the Sphinx (1864)
Gustave Moreau: Oedipus and the Sphinx (1864) by euthman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간음을 하게 될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상심했다. 아버지(양친)와 어머니를 떠나면 운명도 어쩔 수 없으리라 판단한 「오이디푸스」는 눈물을 흘리며 코린트로 돌아가지 않고 방랑의 길을 나서게 되었다. 이것을 기억하자. 「오이디푸스」는 패륜의 운명을 용납할 수 없어 이별을 선택했음을...


  길을 가던 「오이디푸스」는 마차를 몰던 한 노인을 만난다. 길을 비키라는 언쟁 끝에 격분한 「오이디푸스」는 그 노인을 살해해 버린다. 그런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죽은 노인이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던 때문만이 아니었다. 죽은 그가 바로「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였던 까닭이다. 오래전 「라이오스」는 아들에게 죽는다는 예언을 들었다. 그래서 갓난아이 「오이디푸스」를 외국으로 보내 인연을 끊었다. 그러니 이 둘이 서로서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생사결을 했던게 어찌 패륜일 수 있겠는가? 


 「오이디푸스」가 발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곳은 「라이오스」가 다스렸던 테베! 그곳은 공포와 혼란으로 어수선했다. 질투의 여신 「헤라」가 보낸 「스핑크스」라는 괴물로 인해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죽어나가던 지옥이었다. 당연히 왕「라이오스」가 한 젊은이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도 사람들의 관심사 밖에 있었다. 


 「라이오스」왕이 죽은 후 임시 섭정을 하던 「크레온」 역시 스핑크스를 물리칠 방도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스핑크스를 처치하는 사람을 테베의 왕으로 삼겠노라 공언을 했다. 그러자 우리「오이디푸스」가 나선다.

  스핑크스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자를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간단히 풀어버렸다. 그리고 스핑크스는 수치심에 자살을 선택했다. 이렇게...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평온을 찾아주었고, 왕으로 등극한다.

네 발로 걷기도 하고, 두 발로 걷기도 하고, 세 발로 걷기도 하는데, 네 발로 걸을 때가 가장 느린 것은 무엇이냐?

  어릴 때는 네 발로 걷고, 성장해서는 두 발로 걷고, 노인이 되어서는 지팡이를 가지고 세 발로 걷는 「인간」을 뜻하는 수수께끼였다. 


  「오이디푸스」는 공석이던 테베의 왕으로 즉위했고 「라이오스」왕의 왕비였던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아내가 된 「라이오스」왕의 왕비는 누구일까? 「라이오스」가 친부였다는 사실을 알면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친어머니였던 것이다. 


  이렇게해서「오이디푸스」는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지만, 이야기속의 「오이디푸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임을 기억하자.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아내 「이오카스테」와 금슬 역시 좋았었다. 슬하에 아들 두 명, 딸 두 명을 두게 되었고, 나날이 평온 속에 번영하던 테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고 한발이 들어서 인심이 흉흉해졌다. 그래서 테베의 왕「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전으로 사람을 보내어 「아폴론」에게 신탁을 청하였다.

지금의 테베의 사태는 부정한 자가 있기 때문이다.

  부정한 자를 찾던 「오이디푸스」는 전왕 「라이오스」왕의 의문사가 떠올랐다. 그 사건을 조사하던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죽인 노인이 「라이오스」임을 알았다. 그리고 결국 모든 전말을 다 알게 되었다...
  친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였고, 친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자녀까지 두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친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사이에는 「안티고네」가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딸이였지만 어머니 「이오카스테」와의 관계를 따지면 누이동생이기도 했다. 「오이디푸스」는 「안티고네」와 세상을 유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테세우스」에게 가서 여생을 마쳤다.


  「오이디푸스」의 패륜이 알려진 후 모든 사람들이 그를 증오했다. 신화 속 인물이지만 프로이트가 못을 박아버린 까닭에 그는 오랫동안 패륜의 이미지로 남게 될 것이다. 따지고보면「오이디푸스」는 패륜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코린트를 떠났던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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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26. 20:14

효(爻)의 순서와 명칭 간상(赶上)/보충(補充)2009. 8. 26. 20:14

효는 맨 밑에서부터 순서대로 올라간다.
그래서 밑에서부터 순서대로 1효,2효, 3효, 4효, 5효, 6효라고 칭하기도 하고,
처음효와 마지막 효를 처음효, 2효, 3효, 4효, 5효, 꼭대기효 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역전』의 명칭을 존중하여,
음을 뜻하는 6양을 뜻하는 9를 붙여,

Xb91DllLGS

처음효는 초육(음일때), 초구(양일때)
둘째효는 육이(음일때), 구이(양일때)
셋째효는 육삼(음일때), 구삼(양일때)
.
.
여섯째효는 상육(음일때), 상구(양일때)
라고 칭한다.

다만,
모두 양효인 건(乾)괘는 전체를 아우르는 용구(用九)를 하나 가지고 있으며
모두 음효인 곤(坤)괘는 전체를 아우르는 용육(用六)을 하나 가지고 있다.

 

오른쪽 이미지의 감(坎)괘를 예로들면, 둘째효와 다섯째효가 양이므로 9가 되며,
첫째효, 셋째효, 넷째효, 마직막효가 음이므로 6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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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점은 대나무 50개를 산(算)가지로 사용해서 점치는 것이 정통입니다.

그러나 재료를 구하기 힘들고, 덜고 옮기는 계산이 번잡하여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동전이나 주사위 혹은 윷 같은 대체품을 많이 이용합니다.

다른 방법은 인터넷 등을 통해 많이 알려졌으니,

1개 주사위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주사위 한 개는 1,2,3,4,5,6 이라는 여섯의 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홀수를 뜻하는 1,3,5는 양(陽)이며, 짝수를 뜻하는 2,4,6은 음(陰)입니다.

주사위를 여섯 번 던져 나오는 짝홀수에 따라 음(-)(-)과 양(-)을 아래로부터 쌓아나갑니다.

그러면 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치는 점은 음/양만 찾으면 충분합니다.

혹 고급점을 치고자 하시면 나왔던 수를 꼭 기록해 두시기 바랍니다.

주사위를 던져 차례로 3, 3, 2, 1, 6, 4 가 나왔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러면 귀매(歸妹)괘를 얻게 된 것입니다. <주역 도해는 여기를 클릭!>

 

귀매괘를 얻었으니, 주사위를 한 번 더 던져 6개의 효중에 어디에 해당하는지 물어봅니다.

그래서 묻고자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귀매괘의 '괘사'와 마지막 던진 주사위로 선택한 '효사'를 해석하여 찾으면 되겠습니다.

 

각 괘마다 효가 6개이면

괘를 잡기 위하여 주사위를 6번, 효를 잡기 위하여 주사위를 1번 던지면 된다

이렇게 정의해도 되겠지만,

첫번째 건(乾)괘와 두번째 곤(坤)괘는 전체 6개의 효를 아우르는 효,

즉 용효(用爻)를 하나씩 더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사위를 6번만 던지는 예외적인 경우가 두가지가 있습니다.

여섯번 모두 3(순양)이 나오면, 용효를 잡은 것으로 합니다.

여섯번 모두 4(순음)이 나오면, 용효를 잡은 것으로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점을 치시면 되겠습니다.

 

지금부터, 조금 더 고급단계로 나아가겠습니다.

귀매괘를 얻은 음양에 대해서 그 기운을 살펴봅니다.
주사위의 홀수 1,3,5가 같은 양(陽)이긴 하지만
그 기운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짝수 2,4,6이 모두 음(陰)이긴 하지만
그 기운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3은 중정(中正)한 양이지만,
1은 양기가 모자라고, 5는 양기가 넘칩니다.
4는 중정(中正)한 음이지만,
2는 음기가 모자라고, 6은 음기가 넘칩니다.

 

그래서 ‘중용’의 치우치지 않은 행위로 나아가면 선택한 괘와 효가 변화가 없지만,

‘중용’의 기준에서 모자란 행위로 나아가면 약했던 기운이 반대로 바뀌어 버립니다.

‘중용’의 기준에서 과한 행위로 나아가면 강했던 기운이 반대로 바뀌어 버립니다.

변효(變爻)의 이론을 접목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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