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1

« 2024/11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80

  1. 2010.02.01 49. 革卦(혁괘) : 혁명과 반란의 구별은 백성들의 신임여부에 달려있다. 1
  2. 2010.02.01 48. 井卦(정괘) : 고인 우물물은 썩기 마련이다.
  3. 2010.02.01 47. 困卦(곤괘) :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
  4. 2010.02.01 46. 升卦(승괘) : 차곡차곡 쌓아 올린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5. 2010.02.01 45. 萃卦(췌괘) :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쉽
  6. 2010.02.01 44. 姤卦(구괘) : 팜므파탈(Femme fatale)의 힘을 가진 여인
  7. 2010.02.01 43. 夬卦(쾌괘) : 원수도 바름(正)으로 대해야 한다.
  8. 2010.02.01 42. 益卦(익괘) : 앵벌이 하는 사람을 지나쳐야 하나?
  9. 2010.02.01 41. 損卦(손괘) : 하늘은 지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채워준다.
  10. 2010.02.01 40. 解卦(해괘) : 사람에게 구하고 사람에게 나아가야 한다.
  11. 2010.02.01 39. 蹇卦(건괘) :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12. 2010.02.01 38. 睽卦(규괘) : 사별(死別)의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2
  13. 2010.02.01 37. 家人卦(가인괘) : 아이와 가정은 여성의 특권이다.
  14. 2010.02.01 36. 明夷卦(명이괘) : 천하가 태평하지 않으면 숨어야 한다.
  15. 2010.02.01 35. 晉卦(진괘) : 방어적이지 않은 권력은 악(惡)이다. 1
  16. 2010.02.01 34. 大壯卦(대장괘) : 힘을 집중할 수 있어야 성취할 수 있다.
  17. 2010.02.01 33. 遯卦(둔괘) : 버리면 얻는 것을 알아도 버리기가 쉽지는 않다.
  18. 2010.02.01 32. 恒卦(항괘) : 신념은 남에게 강요함이 아니라 자기를 깨우는 것이다.
  19. 2010.02.01 31. 咸卦(함괘) : 부부관계는 욕정의 해소가 아니라 마음의 교감이다.
  20. 2010.02.01 30. 離卦(리괘) : 공든탑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21. 2010.02.01 29. 習坎卦(습감괘) : 함정은 잴 수 있지만, 절망의 깊이는 잴 수 없다.
  22. 2010.02.01 28. 大過卦(대과괘)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23. 2010.02.01 27. 頣卦(이괘) :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입 무거운 사람이 좋다.
  24. 2010.02.01 26. 大畜卦(대축괘)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5. 2010.02.01 25. 无妄卦(무망괘) : 자연을 지키지 못하면 인류를 지킬 수 없다.
  26. 2010.02.01 24. 復卦(복괘) :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27. 2010.02.01 23. 剝卦(박괘) :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28. 2010.02.01 22. 賁卦(비괘) : 멋을 부리고 치장하는 것은 젊을 때의 일이다.
  29. 2010.02.01 21. 噬嗑卦(서합괘) :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인간이다.
  30. 2010.02.01 20. 觀卦(관괘) : 미래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49

革 已日 乃孚 元亨利貞 悔亡
【初九】鞏用黃之革
【六二】已日 乃革之 征 吉 无咎
【九三】征 凶 貞厲 革言三就 有孚
【九四】悔亡 有孚 改命 吉
【九五】大人 虎變 未占 有孚
【上六】君子 豹變 小人 革面 征 凶 居貞 吉

  혁명과 반란은 구별하기 힘든 개념이며, 역사의 평가도 일정하지 못하다. 어떤 시대는 혁명이라고 말하고 어떤 시대는 반란으로 말한다. 왕건과 이성계가 만약 실패하였다면 혁명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실패하였지만 전봉준의 농민혁명이라고 한다. '성공'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주역은 성공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라, 혁명이기에 성공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때가 도래하고 바른 뜻이 있고 민심도 따르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라 한다.

 

革 已日 乃孚 元亨利貞 悔亡
혁명(革)은 이미 때가 도래하고(已日) 뜻이 있기에(乃孚) 처음부터 끝까지(元亨利貞) 후회가 없는 것이다(悔亡)
  차면 기우는 것이 주역이 말하는 변화의 법칙이요, 때가 도래하였음은 차서 기우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곧 천명을 얻은 자가 불선(不善)으로 나가가 백성의 신임을 잃어 천명을 잃은 때이다. 대학에서 “위대한 천명을 지키기가 쉽지 않으니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나라를 얻고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된다”[대학 제10장 치국평천하]하였다.

 

鞏用黃之革
황소의 가죽으로 단단히 묶어야 한다(鞏用黃之革)
  개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황소의 가죽처럼 굳세어야 하고, 또한 백성들의 신임을 확고히 얻은 것을 말한다. 어려움을 만나면 곧 포기하거나 현실과 타협하려 하는 약한 마음으로는 개혁을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已日 乃革之 征 吉 无咎
때가 도래하였다면(已日) 개혁하여(乃革之) 나아감(征)은 길(吉)하고 허물이 없다(无咎)
  가장 중요한 것이 개혁은 때가 도래하여야 하는 것이다. 잠용일때 움직이지 마라는 건(乾)괘의 뜻이다. 시기가 맞아야 한다. 일시적인 실정으로 민심이 흔들리는 상태라고 해서 곧 천명이 바뀌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서두는 것은 교만일 따름이다. 개선의 가능성이 없어진 때가 나아가야 할 때이다.

 

征 凶 貞厲 革言三就 有孚
나아감(征)은 일견 흉(凶)하고 끝까지 위태로우니(貞厲) 혁언을 세 번 성취해야만(革言三就) 비로소 신임을 얻는다(有孚)
  혁명이란 곧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난과 쉽게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처음에는 힘과 기상으로 부딪혀 나아갈 수 밖에 없어 흉하고 끝까지 위태로움이 따르는 법이다. 45번째 췌(萃)괘에서 사람을 모을 때는 큰 희생양(大牲)과 호통(號)으로 시작하는 것이 순서라 했다. 그 이후에 신념을 펼치고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개혁으로 나아가는 초기는 신념이 아니라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혁언을 세 번 성취하는 것은 공언한 것을 힘과 기상으로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하늘의 뜻을 받은 것으로 여겨 비로소 신임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悔亡 有孚 改命 吉
후회가 없으리니(悔亡) 신임이 있다면(有孚) 천명을 고쳐도(改命) 길(吉)하다.
  혁언을 세 번 성취하고 신임을 얻었다면 곧 천명(天命)을 얻은 것이다. 군주의 시대에는 군주의 지위도 천명(天命)이라 여겼다. 그러나 천명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혁언을 세 번 성취하고 신임을 얻었다면 천명을 고쳐도 길하다고 한다. 대학에서도 “천명은 일정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선하면 얻게 되고 선하지 않으면 잃게 됨을 말한다.”[대학 제10장 치국평천하]고 하였다.

 

大人 虎變 未占 有孚
대인(大人)이 호랑이처럼 변하면(虎變) 점을 치지 아니하여도(未占) 신임을 얻을 수 있다(有孚)

  대인은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덕으로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니 유순하던 그 사람이 호랑이처럼 변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아래 효의 표범과는 다른 나아감이다. 점을 칠 필요도 없다는 것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절대적으로 신임을 얻고 천명을 받을 것이다.

 

君子 豹變 小人 革面 征 凶 居貞 吉
군자(君子)가 표범처럼 변하여(豹變) 소인(小人)이 두려움에 낯을 바꾸어(革面) 나아가면(征) 흉(凶)하니 끝까지 멈추는 것(居貞)이 길(吉)하다.
  대인은 표범으로는 변할 수는 없기에 대인이며, 군자는 표범으로도 변할 수도 있기에 군자이다. 호랑이는 사람들이 저절로 받들고 따르기에 신임을 얻은 것이지만, 표범은 위협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덕으로 감화시키는 것과 힘으로 굽히게 만드는 것과의 차이이다. 소인들도 두려움으로 그렇게 나아가는 길은 반란을 따르는 것이니 끝까지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길하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48

井改邑 不改井 无喪无得 往來井井 汔至 亦未繘井 羸其瓶 凶
【初六】井泥不食 舊井 无禽
【九二】井谷 射鮒 甕敝漏
【九三】井渫不食 爲我心惻 可用汲 王明 並受其福
【六四】井甃 无咎
【九五】井 洌寒泉食
【上六】井收勿幕 有孚 元吉

  이전의 곤(困)괘는 마음이 중용(中庸)의 도를 벗어났기 때문에 겪는 곤경이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정(井)괘는 그 마음을 중용의 도에 따르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니 쉼없이 배움을 추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물물은 아무리 사용해도 부족하지 않으니 끊임없이 샘솟는다. 그래야 좋은 우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머리도 끊임없이 사용하고 채우면서 깨끗하고 차게 유지시켜야 한다. 그렇게 순환을 시키지 않으면 곧 고여서 썩게 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우물이 되어버린다. 성인으로 추앙 받는 공자께서도 미혹되지 않게 된 40, 천명까지 알게 된 50, 귀가 순해진 60, 마음대로 행동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된 70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자랑하시기도 하셨다. “열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에도 나처럼 충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은 반드시 있겠지만, 나처럼 이렇게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논어 제5편 위령공 제28장]

 

井改邑 不改井 无喪无得
우물이 마을을 열지만(井改邑) 마을이 우물을 열수는 없다(不改井) 우물물은 줄지도 넘치지도 않아야 한다(无喪无得)

  맑고 깨끗하고 줄지도 넘치지도 않는 좋은 우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는 것처럼, 좋은 우물과 같은 사람이 사람을 모이게 한다. 그러나 고을을 만들만큼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라고 하여 그 곳에 좋은 우물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처럼, 고을을 형성할 정도로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우물과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우물물은 줄지도 넘치지도 않아야 좋은 우물이니, 기존의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움만 추구하는 배움은 곤란하고 기존의 가르침만 고집하여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중용을 지켜야 한다.

 

往來井井 汔至 亦未繘井 羸其瓶 凶
사람들이 반복해서 우물을 왕래하면(往來井井) 우물이 금새 다 마르고(汔至) 두레박 줄이 우물물에 미치지 못하여(亦未繘井) 두레박조차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니(羸其瓶) 흉(凶)하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곧 그 밑천이 보이게 될 것이니, 사람들이 우물을 거듭(井井) 찾으면 우물이 말라서 퍼 갈 물이 없게 될 것이니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우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두레박은 사람들에게 우물물을 퍼 주었던 조력자이니, 두레박은 군주를 상징하고 우물은 인재를 상징한다. 인재가 받쳐주지 않는 군주도 쓸모가 없다. 융통성 없는 고집스러움으로 중요한 두 사람이 쓸모없게 되었고, 전체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井泥不食 舊井 无禽
우물물이 진흙물이 되어 먹을 수 없는(井泥不食) 오래 방치된 우물이라면(舊井) 날짐승조차 없을 것이다(无禽)

  스스로 쓸모없게 되었고 그 조력자까지도 쓸모없게 만들었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낡은 이론만 고수하고 배우려 하지 않으니 날짐승조차도 찾아오지 않는다. 사람은 물론이요 이제는 짐승조차도 외면하는 아무런 쓸모없는 생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井谷 射鮒 甕敝漏
우물물이 골짜기를 타고 흘러(井谷) 붕어에게 향하고(射鮒) 두레박도 깨져서 물이 샌다(甕敝漏).

  짐승조차도 먹어주지 않으니 그 진흙탕이 된 우물물이 골짜기를 타고 흘러 미물인 붕어에게만 혜택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참으로 초라한 우물이 되었다. 두레박은 이미 쓸모가 없어졌기에 사람들이 깨어버린 까닭일 것이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라면 나라의 지휘부가 함께 망하는 것이다. 절대 진리란 없다. 시대정신에 맞아야 한다. 공자께서도 “삼베 관을 쓴 것이 예(禮)인데 지금은 명주 관이 검소하니 나는 대중과 시류를 따르겠다. 대청 아래에서 읍하는 것이 예(禮)인데 지금은 대청 위에서 읍하지만 교만하니 대중과 시류에 어긋나더라도 대청 아래에서 읍하겠다”[논어 제9편 자한 제3장]고 하셨다. 변함없이 고수해야 할 원칙도 있고 시대정신에 따라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것도 있으니 지나치게 원칙만 고집하여 미물에게만 쓸모 있을 따름인 학식이어서는 곤란하다.

 

井渫不食 爲我心惻 可用汲 王明 並受其福
우물을 깨끗이 해도 먹을 수 없으니(井渫不食) 내 마음이 측은하다(爲我心惻) 능히 물을 공급할 수 있다면(可用汲) 임금을 밝혀(王明) 더불어 그 복을 받도록 하라(並受其福).
  설(渫)은 우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우물이 깨끗하게 되었으니, 그 인재가 이제 바른 길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런데 그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두레박이 깨어지고 없다. 이미 군주의 마음이 돌아섰기 때문일 것이며, 군주의 신임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물물과 그것을 퍼 내는 두레박 모두가 조화를 이뤄야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이제 두레박만 있으면 되니, 왕을 일깨워 두레박의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인재도, 군주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井甃 无咎
우물은 돌담을 쌓아 정비해야(井甃) 허물이 없다(无咎)
  우물은 돌담을 쌓는 것은 아무나 함부로 망칠 수 없도록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을 말함이니,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청아래에서 읍함이며, 시대를 가리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는 그 신념은 지켜주는 것을 말한다.

 

井 洌寒泉食
우물물은(井) 차고 맑고 끊임없이 샘솟아야 먹을 수 있다(洌寒泉食)
  그러나 돌담을 지나치게 쌓아서 순환시키지 않으려 한다면 고이고 썩어 쓸모없는 우물이 되고 만다.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명주 관을 쓰는 것을 말함이며, 시대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차고 맑게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井收勿幕 有孚 元吉
우물을 거두더라도 덮개를 씌우려 하지는 말아야 하니(井收勿幕) 신념이 있어야(有孚)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우물을 거두는 것은 고여서 썩는 것을 방비함이다. 그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덮개를 씌우는 것은 그 우물의 자존까지 뭉개는 것이니 지나친 것이다. 억지로라도 시대정신을 따라서 나아가게 해야 하지만 그 신념까지 무너뜨리는 것은 옳지 못하니 스스로 깨우쳐 나아갈 수 있는 기회까지 박탈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야 근원적으로 길하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47

困 亨 貞 大人 吉 无咎 有言 不信
【初六】臀困于株木 入于幽谷 三歲不覿
【九二】困于酒食 朱紱方來 利用享祀 征 凶 无咎
【六三】困于石 據于蒺蔾 入于其宮 不見其妻 凶
【九四】來徐徐 困于金車 吝 有終
【九五】劓刖 困于赤紱 乃徐有說 利用祭祀
【上六】困于葛藟 于臲卼 曰動悔 有悔 征 吉

  곤(困)괘는 내적으로 부족하거나 지나쳐 중용에 곧게 서지(利) 못함을 뜻하는 괘이다. 공자께서 “도를 실천하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안다. 지혜로운 사람은 너무 똑똑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자라기 때문이다”[중용 제4장]라고 하셨다. 곤(困)은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겪게 되는 곤란이 아니라 전적으로 마음이 중용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곤경이다.


困 亨 貞 大人 吉 无咎 有言 不信
곤경(困)은 모자라거나(亨) 지나친(貞) 이유이니 대인(大人)은 길(吉)하고 허물이 없다(无咎) 여러 소리가 들리겠지만(有言) 신뢰할 수 없다(不信)
  곤경(困)은 열매를 맺지(利)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좌로 치우쳐 여물지 못했거나(亨) 우로 치우쳐 기울어(貞) 만나게 되는 것이다. 대인이 길한 이유는 대인은 중용(中庸)의 도를 알기 때문이다. 곤경에 부딪히면 여러 소리들이 들리게 마련이다. 경청할 소리도 있으나 도움의 소리가 아니라 잘난 척 스승을 자처하는 교만의 소리도 있을 것이다. 약자에게는 입을 열고 모여들고 강자에게는 귀를 열고 모여들기 때문이다.

 

臀困于株木 入于幽谷 三歲不覿
곤장을 맞아 엉덩이가 곤란을 겪으려 하면(臀困于株木)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入于幽谷) 삼년 동안 세상을 돌아보지 마라(三歲不覿).

  죄인으로 몰려 부당한 형벌을 받게 되는 곤경에 처하니, 세상의 도가 무너졌는데 나아가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는 은둔 해야 하는 것이 중용이다.

 

困于酒食 朱紱方來 利用享祀 征 凶 无咎
먹거리로 인한 곤경에 처하면(困于酒食) 주황색가리개를 하고 찾아가(朱紱方來)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이롭다(利用享祀) 내세우면(征) 흉(凶)하나 허물은 없다(无咎)

  먹거리로 곤경에 처하니 곧 궁핍한 가난이다. 주불(朱紱)은 천자의 명으로 제후나 공경의 높은 지위의 신하가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가리개이다. 당장 주불을 받을만한 능력이 있는 자가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뜻을 지나치게 숭상하기 때문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길흉(吉凶)은 외면적 시각이고, 허물(咎)은 내면적 시각이다. 자리를 달라고 내세우면 보기에 흉하지만 허물은 없다. 때를 기다리는 수(需)괘에서 말한 경제적인 기반 속에서 기다림(需于酒食)이어야 중용이기 때문이다.

 

困于石 據于蒺蔾 入于其宮 不見其妻 凶
돌 위의 곤경(困于石)으로 가시덤불 속에서 잠을 청하니(據于蒺蔾) 집에 들어가더라도(于其宮) 그 아내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不見其妻) 흉(凶)하다.
  돌 위에서 자는 것은 부부관계를 혐오하는 지나치게 고상함을 따르려는 곤경이다. 납가새(蔾)는 가시덤불을 이루는 한해살이 풀로 그 곳에서 잠든다는 것은 성욕을 참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지나치게 고상하여 마음을 닫았으니 그 아내가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 흉하다. 동물적 본성을 지나치게 혐오하지 말아야 한다. 대소변을 누는 것도 고상한 일은 아니다.

 

來徐徐 困于金車 吝 有終
서서히 오는(來徐徐) 금차에서의 곤경(困于金車)은 궁색해지면(吝) 끝낼 수 있다(有終)
  금차에서의 곤경은 부자의 곤경이다. 서서히 오는 것은 이웃들의 수근거림이며, 그 까닭은 인색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베풀어 스스로 궁색해지면 그 곤경은 마무리를 할 수 있다. 부자는 욕심을 줄이고 그 재물을 나누는 것이 중용이다.

 

劓刖 困于赤紱 乃徐有說 利用祭祀
코를 베이고 다리를 절단 당하는(劓刖) 적불에서의 곤경(困于赤紱)은 천천히 기쁘게 하여야 하니(乃徐有說)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롭다(利用祭祀)
  적불은 천자의 명으로 대부들이 제사에 사용했던 가리개이다. 주불(朱紱)을 받는 신하보다 낮은 계급의 신하이다. 코가 베이고 다리가 절단 당하는 형벌을 받은 까닭은 제 분수를 모르고 제사에 참석하라는 천자의 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자의 명을 받들어 기쁘게 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롭다. 공자께서는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4장]고 하셨다. 본분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또한, 갑자기 기쁘게 하는 것은 변절자가 가지는 태도이니 서서히 고집을 꺾어 기쁘게 하는 것이 중용을 따르는 것이다.

 

困于葛藟 于臲卼 曰動悔 有悔 征 吉
칡덩굴처럼 얽히고 섥힌 곤경(困于葛藟)과 위태위태한(于臲卼) 곤경은 말하자면(曰) 후회가 움직일 것이라는 뜻이니(動悔) 뉘우치고(有悔) 극복하기 위해 나선다면(征) 길(吉)하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고 위태위태한 곤경이란 잘못을 즉시 바로잡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가 그 문제가 걷잡을 수 업게 된 상황에 처한 것을 뜻한다. 그제서야 뉘우치게 될 것이니 극복하기 위해 나서면 길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때이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는 “태어나면서 안다면 최고요, 배워서 안다면 그 다음이요, 곤경을 만나 배우면 그 다음이요, 곤경을 처해서도 배우지 않는다면 참으로 하등이다”[논어 제16편 계씨 제9장]고 하셨다. 뉘우치고 극복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곤경에 만나 비로소 느껴서 배우려고 하는 것이니 길하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46

升 元亨 用見大人 勿恤 南征 吉
【初六】允升 大吉
【九二】孚乃利用禴 无咎
【九三】升虛邑
【六四】王用亨于岐山 吉 无咎
【六五】貞吉 升階
【上六】冥升 利于不息之貞

  승(升)괘는 크게 발전하여 올라가는 것을 뜻하는 괘이다. 앞의 췌(萃)괘에서 만들어진 탄탄한 조직으로 뜻을 펼치려 나아가는 것이 승(升)괘이다. 13번째 동인(同人)괘에서 모여서 도(道)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마찬가지로 세상을 도(道)로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升 元亨 用見大人 勿恤 南征 吉
나아감(升)은 근원을 갖추어 성장하는 것이니(元亨) 대인을 만나서 그를 사용하고(用見大人) 근심하지 말고(勿恤) 바른길을 정복하면(南征) 길(吉)하다.
  앞의 췌(萃)괘로서 만들어진 조직이 승(升)의 근원(元)이다. 그 근원을 갖고 성장(亨)해 나가는 것이 곧 승(升)이다. 그 조직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문호가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근심하지 말고 남쪽을 정벌하라는 말은 남쪽은 따뜻한 곳이므로 곧, 바른 도리(道理)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함이다. 그래야 길하다.

 

允升 大吉
속임 없이 나아가야(允升) 크게 길하리라(大吉).
  윤(允)은 진실함이며 신의를 의미한다. 더불어 잘 살자며 남쪽으로 나아갔지만 그 숨겨진 진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흉한 것이다. 속임없는 진실함과 신의와 의로움으로 나아가야 크게 길할 것이다.

 

孚乃利用禴 无咎
신념을 갖고 검소한 제사를 지내면 이로우리니(孚乃利用禴) 허물이 없다(无咎).

  공자께서는 “예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 장례는 장중하게 치르기 보다는 진정으로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논어 제3편 팔일 제3장]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신념이 살아있기에 검소한 제사를 지내도 이롭고 허물이 없는 까닭이다. 췌(萃)괘에서 말한 큰 희생양을 사용하는 방법이 필요한 시기는 지났으며, 조직을 갖추었으니 신념으로 나아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升虛邑
나아가는 것은 비어있는 고을과 같다(升虛邑)
  비어있는 고을이 백성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승(升)의 발전도 백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목적과 목표가 같다는 말이다. 민초들이 저절로 모여들도록 편안하고 따뜻한 세상을 여는 것이 곧 승(升)이 목표하는 결과이다.

 

王用亨于岐山 吉 无咎
왕은 기산에 올라 제사를 지냄으로써(王用亨于岐山) 길(吉)하고 허물이 없다(无咎).
  기산(岐山)은 주나라 문왕의 할아버지였던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정착한 곳이다. 그 기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는 것은 태왕(太王)을 공경하는 마음이며, 지나온 전통을 공경하는 마음이다. 그럼으로써 또한 정통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야 길하고 허물이 없다. 승(升)은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貞吉 升階
끝까지 길하구나(貞吉) 차곡차곡 성장함이여(升階).
  서두르지 않고 계단을 밟아 오르듯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다. 차곡차곡 나아가지 않는 것은 전통을 공경하지 않는 나아감이다. 일의 선후와 본말을 가려서 단계적으로 공든탑을 쌓아가듯 나아가야 한다.

 

冥升 利于不息之貞
드러나지 않는 나아감(冥升)이라도 끝까지 쉬지않아야 이롭다(利于不息之貞)
  명승(冥升)은 성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발전을 말한다. 그러나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성장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니 내실을 다져 나가는 나아감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쉬거나 멈추지 말고 끝까지 나아가야 이롭다는 말이다. 승(升)은 바른 도(道)를 따르는 남쪽을 정벌하는 나아감이니,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논어의 첫 장부터 시작해 계속 반복되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원망이 없으리니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논어 제1편 학이 제1장]

:
Posted by 오빠야닷컴
45

萃 亨 王假有廟 利見大人 亨利貞 用大牲 吉 利有攸往
【初六】有孚不終 乃亂乃萃 若號 一握爲笑 勿恤 往 无咎
【六二】引 吉 无咎 孚乃利用禴
【六三】萃如嗟如 无攸利 往 无咎 小吝
【九四】大吉 无咎
【九五】萃有位 无咎 匪孚 元永貞 悔亡
【上六】齎咨涕洟 无咎

  췌(萃)는 사람이 모이는 것을 상징하는 괘이며, 효사는 그 모인 사람들을 조직화하여 이끄는 리더쉽에 관한 얘기들이다. 주역은 수단을 부려서라도 사람을 모으고, 그 모인 무리를 장악하고, 작은 고통은 무시하고, 위계질서를 갖추라고 한다. 그렇게 갖춰진 조직이 다음괘 승(升)괘의 성장하는 반석이 되는 것이다.

 

萃 亨 王假有廟 利見大人 亨利貞 用大牲 吉 利有攸往
사람이 모이는 것(萃)은 성장(亨)의 동력이니 왕이라면 종묘에 나가 제사를 드리고(王假有廟)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 성장하여 결실을 맺고 소멸하려면(亨利貞) 제사에 큰 희생양을 사용하여야(用大牲) 길(吉)하다. 시간이 지나가면 이롭다(利有攸往)
  사람이 모이면 제사를 드리는 공익을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사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제사에 큰 희생양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화려함을 뜻함이니 기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한 기술을 사용했더라도 시간이 지나가면 이롭다.

 

有孚不終 乃亂乃萃 若號 一握爲笑 勿恤 往 无咎
신념이 있으나(有孚) 확립되지 않았다면(不終) 모인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것이나(乃亂乃萃) 호통으로(若號) 한 손에 쥐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니(一握爲笑) 근심하지 말고(勿恤) 나아가면(往) 허물이 없다(无咎).

  뜻이 있어도 확고하지 않다면 모인 사람들을 이끌어감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모인 군중들을 초기에 이끄는 힘은 확립된 바른 뜻이 아니라 강한 기운이다. 한번의 호통 즉, 굳센 기운으로 군중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화려함과 기운으로 모임을 형성하고 장악하는 것은 일종의 지혜일 수도 있을 것이다.

 

引 吉 无咎 孚乃利用禴
군중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면(引) 길(吉)하고 허물이 없으니(无咎) 신념을 펼치면(孚) 검소한 제사를 이용해도 이로울 것이다(孚乃利用禴)
  지혜로운 기술을 통해 사람들을 모았으니 이제는 그 모인 군중을 제대로 이끌어 가야 하는 단계가 된 것이다. 그 군중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은 신념(孚)이다. 군중들의 신임을 얻었으니 제사를 검소하게 지내도 이롭다. 화려함으로 모임을 장악해야 하는 단계에서는 화려함으로 이끌고, 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단계에서는 신념으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萃如嗟如 无攸利 往 无咎 小吝
모인 사람들이 탄식을 하게 되면(萃如嗟如) 유리할 것이 없으나(无攸利) 탄식을 무시하고 나아가야(往) 허물이 없으니(无咎) 작은 고통은 있게 마련이다(小吝)
  모임은 당연히 소소한 불만이 표출되기 마련이다. 유리할 것은 없으나 아무 탄식도 없는 모임을 만들 수는 없으니 때로는 무시하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탄식을 다 받아주어 와해의 불씨를 남겨두기 보다는 그 불씨를 미리 꺼 버리고, 보다 탄탄한 내실을 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초창기에는 감수해야 하는 작은 고통일 뿐이다.

 

大吉 无咎
탄식은 크게 길한 것이고(大吉) 허물이 없는 것이다(无咎) 
  아무 탄식도 없는 모임이 아니라 오히려 탄식이 나오는 것이 크게 길하다고 까지 한다. 더 무서운 것은 드러나지 않아 썩어 들어가는 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탄식이 나오는 것이 크게 길하다고 하는 까닭이다.

 

萃有位 无咎 匪孚 元永貞 悔亡
무리는 위계질서가 있어야(萃有位) 허물이 없다(无咎) 신념이 없더라도(匪孚)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될 수 있으니(元永貞) 후회가 없다(悔亡).
  탄식을 도려내고 탄탄한 무리가 형성이 되었다면 이제는 위계질서를 갖추어야 할 때다. 위계질서를 갖추면 앞으로는 설령 신념과 가치를 일시적으로 잃더라도 끝까지 유지될 수 있으니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기둥을 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齎咨涕洟 无咎
탄식과 한숨 눈물과 콧물이 있더라도(齎咨涕洟) 허물이 없다(无咎)

  탄식뿐 아니라 한숨과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리는 것은 불만이 더욱 심하게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탄식과 한숨과 눈물 콧물이 늘어나게 되니, 그것은 모임이 가진 속성이다. 하지만 위계질서를 갖추었기 때문에 탄식과 한숨 눈물이 있어도 와해되지 않을 것이니 허물은 없다. 21번째 서합(噬嗑)괘에서 주역은 유가의 예(禮)보다는 법가의 법치주의(法)에 더 가까운 듯 하다고 했다. 췌(萃)괘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직의 질서를 강조하고 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44

姤 女壯 勿用取女
【初六】繫于金柅 貞吉 有攸往 見凶 羸豕 孚蹢躅
【九二】包有魚 无咎 不利賓
【九三】臀无膚 其行次且 厲 无大咎
【九四】包无魚 起凶
【九五】以杞包瓜 含章 有隕自天
【上九】姤其角 吝 无咎

  구(姤)괘는 우연한 만남을 뜻한다. 이 만남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만남이다. 괘를 보면 하나의 음(陰)효를 두고 다섯의 양(陽)효가 쌓여 있으니 한명의 여인이 다섯의 남자를 감당하는 괘상이다. 많은 남자들 앞에서 여왕 노릇을 하는 모양새다. 서양으로 치면 팜므파탈(Femme fatale)의 힘을 가진 여인일 것이며, 우리나라로 치면 옹녀의 이미지에 가까운 여인일 것이다.

 

姤 女壯 勿用取女
만나서(姤) 여자의 기운이 세면(女壯) 취하려 하지 마라(勿用取女)
  여자의 기운이 지나치게 강하다면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어 서로 해로운 까닭이다. 양기는 음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음기는 양기가 부족하니, 지나치고 모자라 중용을 벗어나니 서로가 해롭다.

 

繫于金柅 貞吉 有攸往 見凶 羸豕 孚蹢躅
쇠로 만든 얼레에 실을 담아두듯(繫于金柅) 조화를 이뤄야 끝까지 길한 것인데(貞吉) 기운이 맞지 않으니 시간이 지날수록(有攸往) 흉함을 만나리라(見凶) 굶주린 돼지가(羸豕) 발버둥치는 듯 할 것이다(孚蹢躅)
  남녀의 만남과 교합은 얼레에 실이 잘 감겨있는 것처럼 조화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시간이 지나가더라도 해결책이 없다. 노력하고 애쓰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더욱 흉해질 뿐이다. 근원적으로 소위 궁합이 맞지 않는 까닭이다.

 

包有魚 无咎 不利賓
푸주간에 고기가 있으면(包有魚) 허물은 없을 것이나(无咎) 손님이 될 것이니 이로울 것은 없으리라(不利賓)
  고기가 있는 것은 남자가 경제적인 부양의 의무는 충분히 하는 상황을 말한다. 허물은 없어 부부로서의 위치를 지킬 수는 있을 것이나, 손님처럼 금방 집 밖으로 나가야 될 것이요, 집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롭지는 못하다. 사람에 만족하여 부부로서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보고 참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臀无膚 其行次且 厲 无大咎
엉덩이가 패일 것 같아(臀无膚)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니(其行次且) 위태로우나(厲) 큰 허물은 없으리라(无大咎)
  엉덩이가 패이는 것은 곤장을 맞는 것과 마찬가지의 봉변을 당할까 두려워 부부관계로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아도 큰 허물이 아닌 까닭은, 나아가도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며 푸주간에 고기가 있도록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包无魚 起凶
푸주간에 고기가 떨어지면(包无魚) 흉함이 일어난다(起凶)
  고기를 보고 참고 있었는데, 그 근원이 사라진 것이다. 곧 한계에 봉착할 것이니 흉함이 일어난다.

 

以杞包瓜 含章 有隕自天
그러한 여인은 혼기에(以杞包瓜) 품어주면(含章) 하늘의 복이 있을 것이다(有隕自天)
  오이(瓜)는 혼기가 찬 여인을 말한다. 과년(瓜年)한 딸을 뜻하는 것으로 대략 15세 전후의 어린여자를 지칭하던 것으로 알려지니, 아직은 기운이 왕성한 상태가 아닐 것이다. 선천적으로 강한 여인이라면 기운이 왕성하지 않은 과년한 시기라야만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여인도 과년할 때 느낄 수 있었던 기쁨은 그 시기가 지나면 더 이상 없을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은혜를 베푼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복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姤其角 吝 无咎
뿔이선 만남(姤其角)이라서 궁색해 보이나(吝) 허물은 없다(无咎)

  과년한 여인과 관계하여 기쁨을 줄 수 있는 남자는 또래의 어린 남자일 수 없으며, 양기가 정점에 있는 남자여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모양새가 조화롭게는 될 수 없으니 외부에서 보기에는 궁색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음양조화가 맞을 수 있으니 허물은 아닌 것이다.

  구(姤)괘는 강한 여성을 빗대어, 그 강함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된 리더는 사람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백가지가 모자라더라도 한가지 쓸모를 찾아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주는 자이다. 과년할 때 품어주라는 것은 기운을 맞추어주라는 것으로, 예컨대, 화를 지나치게 내고 싸우는 사람은 고객을 응대하는 곳에 쓰지 말고 사람과 덜 접촉하는 곳에서 쓰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43

夬 揚于王庭 孚號 有厲 告自邑 不利即戎 利有攸往

【初九】壯于前趾 往 不勝 爲咎

【九二】惕號 莫夜有戎 勿恤

【九三】壯于頄 有凶 君子夬夬獨行 遇雨若濡 有慍 无咎

【九四】臀无膚 其行次且 牽羊 悔亡 聞言不信

【九五】莧陸夬夬 中行 无咎

【上六】无號 終有凶

  쾌(夬)괘는 악(惡)에 공정함(正)으로 맞서는 것을 말하며 의로움을 추구하는 결단이다. 공자께 은혜로 원수를 대하면 어떠한지 여쭈니, 공자께서는 “그러면 은인은 어떻게 대할 것인가? 공정하게 원수를 대하고 은덕으로 은인을 대해야 한다” [논어 제14편 헌문 제34장]고 하셨다. 공자께서는 동해보복(동일한 해로움으로 복수)으로 원수를 대하는 것 즉, 원수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바름(正)으로 대해야 한다고 하셨다. 바름 곧, 의(義)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쾌(夬)이다.

 

夬 揚于王庭 孚號 有厲 告自邑 不利即戎 利有攸往

결단(夬)은 왕정에 알리는 것(揚于王庭)이며 신념을 부르짖는 것(孚號)이니 위태로움은 있겠지만(有厲) 고을에 숨어 외치면(告自邑) 적이 되어 맞서는 것이니 이로울 것이 없다(不利即戎) 시간이 지나가면 이롭다(利有攸往)

  악(惡)을 보고 방관하는 것은 악(惡)을 부흥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 마땅히 의롭게 나서야 한다. 비겁하게 숨어서 외치면 그것은 충언이 아니라 대항하는 것이 되니 결실이 없다. 위태롭더라도 왕정에 올라 외쳐야 한다. 시간이 지나가면 이로우리니 결국은 정의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壯于前趾 往 不勝 爲咎

크고 강한 기운이 발 앞에 모여있어(壯于前趾) 그렇게 나아가면(往) 이길 수 없고(不勝) 허물만 남는다(爲咎)

  행동하기 위해 기운이 발에 모여있으니 혈기만 가지고 서두는 것이다. 용맹이 지나쳐 과격한 것을 말하니, 의로움을 펼치는 것이 무모함이 되지 않으려면 냉철해야 하고 냉정해야 한다.

 

惕號 莫夜有戎 勿恤

두려워서 호소하면(惕號) 밤을 틈타 급습을 할 것이니(莫夜有戎) 두려워하지 말라(勿恤)

  지나친 용맹과 반대로 지나치게 두려워서 부르짖는 것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 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도적이 들었는데 두려워 울부짖으면 재물만 잃고 말 것을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생기는 법이다. 발 앞에 모여있는 과격한 용기도 모자라는 용기도 악(惡)을 바로잡을 수 없다.

 

壯于頄 有凶 君子夬夬獨行 遇雨若濡 有慍 无咎

큰 기운이 광대뼈에 있다면(壯于頄) 흉함이 있지만(有凶) 군자라면 결연히 홀로 가다가(君子夬夬獨行) 비를 만나게 되어도(遇雨若濡) 온기를 뺏기지는 않을 것이니(有慍) 허물이 없다(无咎)

  큰 기운이 광대뼈에 있는 것은 안색을 숨길 수 없어 의욕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견제를 받아 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군자라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허물이 없을 것이다. 군자는 의로움을 따르는 자이니, 오히려 드러난 의욕을 보고 바른 사람들이 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드러난다고 해치려는 자만 모이는 것이 아니기에 온기를 완전히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臀无膚 其行次且 牽羊 悔亡 聞言不信

엉덩이에 살이 없으니(臀无膚)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其行次且) 백성들을 이끌면(牽羊) 후회는 없겠지만(悔亡) 말은 들어주더라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聞言不信)

  분수에 맞지 않는 지위에 앉아있으니 자리가 편하지 않아 엉덩이에 살이 없게 된 것이다. 백성들을 이끌 지위에 위치하고는 있지만 그 지위에 걸맞는 능력은 없는 사람이다. 내적으로 후회는 없을지라도 신임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고 한다.

 

莧陸夬夬 中行 无咎

뭍에서 뛰어 노는 산양이 큰 결단을 내릴 때는(莧陸夬夬) 중용의 길을 가야(中行) 허물이 없다(无咎)

  뭍에서 뛰어 노는 산양은 민초들을 뜻한다. 위에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중용의 길을 가면 혁명이 되고, 중용을 벗어나면 반란이 될 것이다.

 

无號 終有凶

부르짖지 않으면(无號) 끝내 흉함이 있다(終有凶)

  의로운 줄 알면서 의로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는 “안으로 살펴서 부끄러움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논어 제12편 안연 제4장]라고 하셨다. 생사(生死)는 천명(天命)이니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의로운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나약한 마음인 것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42

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初九】利用爲大作 元吉 无咎

【六二】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永貞吉 王用享于帝 吉

【六三】益之用凶事 无咎 有孚 中行 告公 用圭

【六四】中行 告公從 利用爲依 遷國

【九五】有孚惠心 勿問 元吉 有孚 惠我德

【上九】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 凶

  보태주는 것(益)은 하늘의 일을 대신 맡은 것이니 무거운 짐을 진 것이다. 공자께서 “나는 군자는 급한 곳을 구제해 주고 부유한 곳에는 보태주지 않는다고 들었다”[논어 제6편 옹야 제4장]고 하셨으나, 제자 염유가 부유한 계씨의 재산을 늘려주자 “나의 제자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울려 성토해도 좋다”[논어 제11편 선진 제17장]고 진노하셨다. 모자라면 보태주고 넘치면 덜어내는 것은 하늘의 도(道)이며, 그 바른 천도(天道)를 따르는 것이 군자의 사명이다.

 

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보탬(益)은 시간이 지나야 결실이 있다(利有攸往) 큰 내를 건너듯(利涉大川)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

  보태주는 것은 단번에 끝맺는 것이 아니라 꾸준함이 필요한 일이다. 마음 또한 재물에 얹어 보태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앞의 손(損)괘에서 말한 거친 베옷을 입은 사람에게 거친 베옷을 입고(曷之用) 다가가는 것이다. 주위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과단성 있게 나아가야 한다.

 

利用爲大作 元吉 无咎

크게 만들어 나가도록 사용해야 이로우니(利用爲大作) 근원적으로 길하고(元吉) 허물이 없다(无咎)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방법으로 현명하게 보태주라는 의미이다. 오직 짐승처럼 먹여주는 방법을 사용하기 보다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방법이 좋고, 쌀을 보태주기 보다는 농사를 짓도록 해 주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다.

 

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永貞吉 王用享于帝 吉

누군가가 보태주는 것은(或益之) 십붕의 비싼 거북점으로도(十朋之龜) 어긋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니(弗克違) 계속 끝까지 길할 것이다(永貞吉). 왕이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도(王用享于帝) 길(吉)할 것이다.

  혹익지(或益之)는 앞의 손(損)괘에서 나온 기적과 같은 횡재를 말한다. 천명(天命)으로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간접적인 베품이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제물을 사용하는 것이기에 사사로이 쓰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益之用凶事 无咎 有孚 中行 告公 用圭

보태주는 것은(益之) 흉한 일에 사용하면(用凶事) 허물이 없다(无咎) 신념을 가지고(有孚) 중용을 따라(中行) 공익을 도모하고(告公) 임금의 뜻이 닿는 곳에 사용하라(用圭).

  모자라면 채워주고 과하면 덜어내는 중용의 도를 따라야 한다. 나에게 넘치는 재물을 흉한 일을 당한 이웃을 도와주는 것으로 사용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임금의 뜻은 빈부의 지나친 치우침이 없이 백성이 고루 부유하고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中行 告公從 利用爲依 遷國

중용을 행하고(中行) 공익을 따라(告公從) 의지해야 하는 곳에 사용하면 이로우니(利用爲依) 나라를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遷國).

  대학의 “한마디 말이 대사를 그르치기도 하고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한다”[대학 제9장 제국치가]는 가르침이 연상되는 효이다. 나의 얼마되지 않는 기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라를 변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먼 길은 가까운 길부터 시작해 나아가며, 높은 산도 낮은 곳부터 올라가야 한다.

 

有孚惠心 勿問 元吉 有孚 惠我德

베푸는 마음에 신념이 있다면(有孚惠心) 묻지도 말라(勿問)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신념이 있다면(有孚) 나의 덕을 보태는 것(惠我德)이다.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속셈을 갖고 베푸는 경우도 있다. 사건을 무마하고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 위해 재산을 내 놓는 대기업 총수도 있으나, 그러한 보태줌이 아니라 마음으로 즐거워 베푸는 것은 어디에 물을 필요도 없이 길한 것이라고 한다.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덕을 보태는 것이라고 한다.

 

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 凶

보태주는 것이 막히거나(莫益之) 누군가 공격하면(或擊之) 마음을 세우되 방법을 고집하려 하지마라(立心勿恒) 흉(凶)하다.

  베푸는 선한 일이 방해 받는 경우가 있다. 장애인을 내세워 뒤에서 그것을 착취하는 소위 ‘앵벌이’의 경우처럼 나의 베품이 이용당하게 되는 것을 알았다면, 마음은 변함없이 세워놓되 그 방법을 고집하려 하면 흉하다고 한다. 결국 악을 돕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보태주는 것은 크게 만들어나가도록(用爲大作) 현명하게 보태주어야 하고 이용당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보태주어야 하니, 그래서 하늘은 그 임무를 맡길 만한 사람을 골라서 사명을 맡기는 것일 것이다. 현명한 방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보탬을 주라는 것이지 외면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41

損 有孚 元吉 无咎 可貞 利有攸往 曷之用 二簋 可用享

【初九】已事 遄往 无咎 酌損之

【九二】利貞 征 凶 弗損益之

【六三】三人行 則損一人 一人行 則得其友

【六四】損其疾 使遄 有喜 无咎

【六五】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元吉

【上九】弗損益之 无咎 貞吉 利有攸往 得臣无家

  손(損)괘와 다음에 이어지는 익(益)괘는 중용(中庸)을 뜻하는 괘이다. 손(損)괘는 과하기 때문에 덜어내고, 익(益)괘는 모자라기 때문에 보태주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도(道)이다. 부족하면 채워주고 지나치면 덜어내는 것이 순리이니, 지나치게 그 손익에 집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하늘이 덜어내기 전에 뜻 있는 곳에 스스로 덜어내는 것은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니 근원적으로 길할 것이다.

 

損 有孚 元吉 无咎 可貞 利有攸往 曷之用 二簋 可用享

덜어냄(損)은 뜻이 있어야(有孚) 근원적으로 길하고(元吉) 허물이 없으니(无咎) 신념을 끝까지 유지하면(可貞) 시간이 지나가면 이롭다(利有攸往) 거친 베옷을 입어야 이롭고(曷之用) 두 그릇의 밥을 베풀어(二簋) 제사를 지내도록 도와주면 이롭다(可用享)

  부(孚)는 생각이 없는 것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 없이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가치 있게 덜어내는 것을 말한다. 뜻 있게 사용하면 다시 돌아오게 되니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면 이로운 것이다. 거친 베옷은 서민들이 입는 옷이다. 서민들에게 서민으로 다가가는 것을 뜻한다. 덜어내더라도 면 옷을 입고 교만을 부리지 말해야 하며, 생계만 유지할 수 있게 각박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제사까지 지낼 수 있도록 넉넉히 베풀라고 한다.

 

已事 遄往 无咎 酌損之

이미 지난일(已事)은 속히 보내버려야(遄往) 허물이 없을지니(无咎) 그 덜어냄을 생각해 보라(酌損之)

  29번째 감(坎)괘에서 구덩이에 빠지고 다시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흉하다고 했으니, 물리적인 구덩이에 빠졌다고 정신적인 구덩이(절망)에 빠지지는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미 지나간 손해가 있었다고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은 재차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로 덜어내야 할 것은 지나간 일에 대한 집착이다.

 

利貞 征 凶 弗損益之

그래야 끝까지 이로울 것이니(利貞) 정벌하려 하면(征) 흉(凶)하다. 덜어내었다고 보태주지는 않을 것이다(弗損益之)

  정벌(征)은 본전생각이 나서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본전생각을 하면 결국 있는 것 모두를 덜어내게 되는 대표적인 것이 도박이다. 안목이 단지 물질적인 손익만 생각할 줄 아는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의 도(道)는 모자란 것은 채워주고 넘치는 것은 덜어주어 중용(中庸)의 도리를 지킨다. 그러나 하늘이 도박하여 덜어내는 것까지 보태주지는 않을 것이니, 오히려 물질을 더욱 덜어냄으로써 마음의 모자람을 채워주려 할 지도 모른다.

 

三人行 則損一人 一人行 則得其友

세 명이 나아가면(三人行) 한명을 잃게 되고(則損一人) 한명이 나아가면(一人行) 친구를 얻게 된다(則得其友)

  실제 만남 사람은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이 만나면서 한 사람을 더 끼워들이면 관계가 깨어질 것이니, 없는 한 사람을 더 끌여들여 비교하는 것을 3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완벽한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일 것이다. 한명이 나아가는 것은 있는 자신을 덜어내고(損)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것이다. 그래야 친구가 되어 소통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중용의 도(道)이다.

 

損其疾 使遄 有喜 无咎

덜어내고 병을 얻으면(損其疾) 빨리 그 병통을 고쳐야(使遄) 기쁨이 있고(有喜) 허물이 없다(无咎)

  덜어내고 병을 얻는 것은, 잃은 것이 아까워 얻게 된 마음의 병이다. 물리적인 질병보다도 그러한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다. 부족하면 하늘이 다시 채워주는 것이 하늘의 법도인데 이미 근심(병)으로 그 비어짐이 다 차 버렸으니 채워줄 그릇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元吉

누군가가 보태주는 것은(或益之) 십붕의 비싼 거북점으로도(十朋之龜) 조정 할 수 없는 것이니(弗克違)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붕(朋)은 옛적에 화폐로 사용하던 조개껍질이다. 물질적 손익은 우연성이 많이 개입되기도 한다. 요즘으로 치면 로또에 당첨되는 것 같은 우연히 횡재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그러한 횡재는 아무리 비싼 거북점을 쳐도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내린 복으로 근원적으로 길하다. 주역점은 거북의 등껍질을 태워 그 갈라지는 것을 통해 점을 치는 것이 시초였고, 산가지(대나무)로 점을 치는 방법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弗損益之 无咎 貞吉 利有攸往 得臣无家

덜어냄으로써 보태주는 것이 아니니(弗損益之) 허물이 없고(无咎) 끝까지 길하여(貞吉)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으리니(利有攸往) 가정이 없는 신하를 얻으리라(得臣无家)

  하늘이 우연히 보태주는 것은 반드시 부족하다고 보태주는 것이 아니니 숙명이다. 자하는 “죽음과 삶에는 명이 있고 부유함과 귀함은 하늘에 달려있다(死生有命 富貴在天)”고 배웠다고 하였다.[논어 제12편 안연 제5장] 하늘이 준 복이니 근원적으로 길한 것이요,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복을 하늘이 왜 주었는지 알게 될 것이니, 곁을 떠나지 않는 충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가정이 없는 신하는 충복을 상징하며, 이 충복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모자란 곳을 찾아 채워주는 하늘의 일을 대신하도록 사명을 맡긴 것이라는 의미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40

解 利西南 无所往 其來復 吉 有攸往 夙 吉
【初六】无咎
【九二】田獲三狐 得黃矢 貞吉
【六三】負且乘 致寇至 貞 吝
【九四】解而拇 朋至 斯孚
【六五】君子 維有解 吉 有孚于小人
【上六】公用射隼于高墉之上 獲之 无不利

  해(解)괘는 술술 풀리는 것이다. 우레가 진동하고 비가 쏟아지는 괘상이니 곧 메마른 세상이 촉촉하게 적셔지고 있는 것이다. 앞의 건(蹇)괘는 시간이 주는 시련이며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시련이라고 했었다. 이제 시간이 도래하여 반대의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니 그것이 곧 해(解)이다. 건(乾)괘에서의 용이 비상하여 하늘을 날고 있는 것(飛龍在天)과도 같다. 건(乾)괘에서 그러한 전성기가 도래하면 마땅히 도와준 사람에게로 나아가야한다(利見大人)고 하였는데, 마찬가지로 해(解)의 시기에도 사람에게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解 利西南 无所往 其來復 吉 有攸往 夙 吉
술술 풀릴 때(解)도 힘들지만 바른길이 이롭다(利西南) 갈 곳이 없다면(无所往) 되돌아와도(其來復) 길(吉)하다 시간이 지나면(有攸往) 곧(夙) 길(吉)해 진다.
  어려웠던 시기 건(蹇)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풀리는 해(解)의 시기에도 역시 힘들더라도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한다. 바른 길을 가는 것은 상황과 환경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갈 곳이 없다면 그 이유는 어려웠던 시절부터 바른 곳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解)의 시기의 시작은 우레가 진동하고 비가 쏟아지는 것에서 시작을 한다. 상황이 반대로 꺾이는 것은 반드시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벼락이 치고 비가 쏟아지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우레와 비가 그치고 세상이 촉촉해질 것이니 시간을 기다리면 곧 길하게 된다.

 

无咎
술술 풀릴 때는 허물 될 것이 없다(无咎)

  시간이 지나 우레와 비가 그치고 대지가 촉촉히 적셔진 상황을 말한다. 아무런 허물 될 것이 없다.

 

田獲三狐 得黃矢 貞吉
사냥을 하면 여우 세마리를 얻고(田獲三狐) 황금 화살촉도 얻게 될 것이니(得黃矢) 끝까지 길하다(貞吉)
  여우는 영리한 짐승이라 한 마리를 잡기도 힘드는데, 세 마리를 잡은 것만해도 큰 성취이지만 그 몸 속에 박혀있는 황금 화살촉까지 얻었으니 정말로 술술 풀리는 시기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술술 풀리는 시기라도 가만히 기다린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사냥을 나가야 그러한 성취를 얻을 수 있다.

 

負且乘 致寇至 貞 吝
짐지고 수레를 타면(負且乘) 도적을 불러들여(致寇至) 끝까지(貞) 어려워진다(吝).

  잡은 여우와 황금 화살촉을 빼앗길까 두려워 짐을 수레에 내려놓지 못하고 몸에 짐지고 수레를 타는 것이니, 반드시 도적을 불러들이게 된다. 독차지하려는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만나는 도적(근심)이다. 공자께서 "없으면 얻으려고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근심하니, 잃을까 근심하면 못할 짓이 없게 된다"[논어 제17편 양화 제15장]고 하셨다. 잃을까 걱정하는 근심만 늘어난 것이니 곧 도적을 만나 끝까지 어려워지게 되는 까닭이다.

 

解而拇 朋至 斯孚
풀려도(解而) 엄지발가락으로 시작해야(拇) 벗이 찾아와(朋至) 뜻을 함께 한다(斯孚).
  엄지발가락으로 시작함은 함(咸)괘에서 부부관계로 마음을 교감하려 할 때 엄지발가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즉 매사에는 순서가 있고 원형리정의 순차적인 변화를 겪어 열매가 맺히는 법이니, 풀리기 시작했다고 조급하게 바로 열매를 맺으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히 순서를 밟아 나가라는 가르침이다. 먼 곳을 가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부터 출발해야 한다.

 

君子 維有解 吉 有孚于小人
군자(君子)는 풀릴 때를 지탱할 수 있어야(維有解) 길(吉)하니 소인에게 뜻을 두어야 한다(有孚于小人)
  군자는 소인을 위해서 그 풀리는 기운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군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술술 풀린다고 자기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인들을 부유해지도록 도와야 한다. 공자께서 "군자는 의로움에 기뻐하고 소인은 이로움에 기뻐한다"[논어 제4편 이인 제16장]고 하셨으니 마땅히 군자는 소인을 이롭게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군자가 의로움을 추구하여 기쁨을 얻는 것이다.

 

公用射隼于高墉之上 獲之 无不利
공개적으로(公) 높은 성벽위의 독수리를 쏘아도(用射隼于高墉之上) 그것을 잡을지니(獲之)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높은 성벽위에 있는 독수리는 지위가 높은 흉수이다. 그 독수리에게 쏘겠다는 공개를 하고 쏘아도 잡을 수 있는 까닭은 군자로서 의로움을 추구하여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고, 흉수는 피할 곳이 없어진다. 술술 풀리는 시기는 사람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9

蹇 利西南 不利東北 利見大人 貞吉
【初六】往蹇來譽
【六二】王臣蹇蹇 匪躬之故
【九三】往蹇來反
【六四】往蹇來連
【九五】大蹇朋來
【上六】往蹇來碩 吉 利見大人

  건(蹇)괘는 어려운 때를 말한다. 산 위에 물이 고여있는 괘상이니 물이 산 아래로 흘러 강과 바다로 내려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즉 건(蹇)괘는 시간이 주는 시련이며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시련이다. 오래지 않아 끝나게 될 어려움이다.

 

蹇 利西南 不利東北 利見大人 貞吉
어려운 때(蹇)는 힘들어도 바른길이 이롭고(利西南) 수월해도 옳지 않은 길은 이롭지 않다(不利東北) 대인을 만나봄이 이로울 것이니(利見大人) 마침내 길할 것이다(貞吉)
  동쪽은 해가 뜨는 밝은 곳이니 곧 쉽게 볼 수 있는 수월한 곳을 상징하고 서쪽은 어두우니 쉽게 볼 수 없는 힘든 곳을 상징한다. 남쪽은 따뜻하고 편안한 곳이니 곧 도리에 맞는 곳을 상징하고, 북쪽은 추워서 기피하는 곳이니 곧 도리에 맞지 않는 곳을 상징한다. 어려운 때를 만났지만 설령 힘이 들어도 바른길을 가야하고, 쉽게 현실과 타협하여 바르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은 옳지 않다. 건(乾)괘에서 자리를 모르고 밭에있는 용(龍在田)은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고 했으니, 마찬가지로 어디가 바른 곳인지 알 지 못한다면 대인의 만나 도움을 받으라고 한다.

 

往蹇來譽
그래야 어려움이 지나가면(往蹇) 명예를 얻을 수 있다(來譽)

  힘이 들어도 바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공자께서 “추운 겨울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논어 제9편 자한 제28장]고 하셨다. 힘들어도 바른 길을 가야 한다.

 

王臣蹇蹇 匪躬之故
정치가 어렵고 또 어렵다면(王臣蹇蹇)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匪躬之故).
  하늘이 하나요(-) 땅이 하나요(-) 사람이 하나(-) 이니 곧 삼(三)은 천지인의 합일을 말한다. 그 하늘과 땅과 사람을 곧게(I) 연결시켜주는 것이 왕이니 곧 왕은 하늘과 땅과 인간을 소통 시켜주는 자를 뜻한다. 그가 신하들과 더불어 행하는 정치가 어려운 것은 천지인이 소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렵고 또 어려움(蹇蹇)은 산 넘어 산이 가로막는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방법이 없는 것을 뜻하니, 왕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이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往蹇來反
어려움이 지나가면(往蹇) 반대의 상황이 오게 된다(來反)
  주역이 말하는 핵심적인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가르침이다. 비가 계속될 수도 없고, 맑은 날도 계속될 수가 없다. 반드시 반대의 상황이 오게 마련이니 양이 극에 이르면 음이 되고 음이 극에 이르면 양이 되는 까닭이다. 어렵고 또 어려움(蹇蹇)도 반드시 반대의 상황을 맞게 된다.

 

往蹇來連
어려움이 지나가면(往蹇) 반대의 상황은 오랫동안 계속되리라(來連)
  어렵고 또 어려웠으니(蹇蹇) 그 어려웠던 만큼 오랫동안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大蹇朋來
큰 어려움은(大蹇) 벗이 찾아와(朋來) 도와줄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어려움은 반드시 도와주는 벗이 찾아온다고 한다. 옛말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거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과 연결된다. 그것이 하늘의 법칙이다. 하늘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往蹇來碩 吉 利見大人
어려움이 지나가면(往蹇) 큰 인물이 나오게(來碩)되니 길(吉)하다. 대인을 만나보아야 이롭다(利見大人)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듯이 어려움이 지나면서 큰 인물이 나오는 법이다. 곧 하늘이 어려운 시기를 배분한 이유는 큰 인물을 세상에 내기 위한 까닭이기도 하다. 아무리 하늘이 낸 영웅이라도, 혼자의 힘으로 영웅이 될 수는 없다. 마땅히 사람과 함께 어울려야 한다. 사람의 도움으로 일어서고, 일어선 후 사람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8

睽 小事 吉
【初九】悔亡 喪馬勿逐 自復 見惡人 无咎
【九二】遇主于巷 无咎
【六三】見輿曳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
【九四】睽孤 遇元夫 交孚 厲 无咎
【六五】悔亡 厥宗 噬膚 往 何咎
【上九】睽孤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匪寇婚媾 往 遇雨則吉

  규(睽)괘는 어긋나다는 뜻이니, 단절과 헤어짐을 뜻한다. 12번째의 비(否)괘와의 차이는 비(否)괘는 수치스러워도 숙이고 복종하면 어울림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헤어지는 것이며, 규(睽)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단절이다. 예를 들면 이혼을 하여 다른 길을 가는 결별은 비(否)괘이지만 배우자와 사별(死別)하게 되는 것은 규(睽)괘이다. 37번째 가인(家人)괘에 이어서 등장하는 이유는 부인이 지아비를 잃는 상황을 상정한 까닭이다. 과거 전쟁 등으로 사별하는 여인들이 많았기에 과부들도 많았을 것이다.

 

睽 小事 吉
헤어짐(睽)은 작은 일로 받아들여야(小事) 길(吉)하다.

  헤어짐은 하늘의 순리로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며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이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나지 않았으면 이별이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니, 주역에서 말한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자연의 섭리라고 받아들여야 길하다.

 

悔亡 喪馬勿逐 自復 見惡人 无咎
후회가 없다면(悔亡) 잃어버린 말을 다시 찾으려 하지 마라(喪馬勿逐) 스스로 돌아오기 마련이다(自復) 악인을 외면하지 않아야(見惡人) 허물이 없다(无咎)
  후회가 없어야 한다(悔亡)는 것은 자책은 하지 마라는 말이다. 떠나는 것(사랑)을 막으려 하지 말고 오는 것(惡人)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惡人)은 마음속에 살고 있는 악마이니 임을 떠나 보내고 원망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그를 외면하지 말라는 말이니 역설적으로 ‘자책을 하지 말고 하늘을 원망하고 미워하라’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원망(惡人)은 저절로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허물이 아니다. 옛 성현들께서 강물을 대하시며 생각하시던 ‘그 들고나는 물은 쉼 없이 바뀌지만 강물이 흐르는 것은 변함없이 일정한 모습이구나’하는 뜻과 닮아있다. 사랑은 다시 찾아온다.

 

遇主于巷 无咎
우연히(遇) 거리에서 주군을 만나니(主于巷) 허물이 없다(无咎).

  잃어버린 말은 찾으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오듯 사랑은 다시 찾아온다. 나의 새로운 주인 될 낭군님도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역은 수절하고 사는 과부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형사취수”는 동양에서는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었다고도 하니(고구려 고국천왕의 부인이었던 우씨의 산상왕 선택) 홀로된 여인을 배려하기 위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見輿曳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
소가 끌어야 할 수레를 보니(見輿曳其牛掣) 그 사람이 코가 잘리고 죄수의 표식을 하고 수레를 끌고 있다(其人天且劓)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나(无初) 끝이 있는 것(有終)이다
.
  한 사람의 삶이 너무도 비참한 지경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어 안타깝고 가여운 마음에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어찌할 줄 모르게 될 것이나 그 사람의 불행한 삶도 하늘(영원한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찰나일 뿐이다.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은 변하고 끝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끝이 있으며, 모든 만남은 이별이 있다. 죽음의 의미를 깨달으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의 큰 일은 아닌 것이다.

 

睽孤 遇元夫 交孚 厲 无咎
이별은 외로움을 낳지만(睽孤) 근원적 아버지를 만나게 되니(遇元夫) 믿음으로 교류하면(交孚) 위태로워도(厲) 허물은 없다(无咎).
  사람이 혼자 남겨지고 고독해지면 깨달음이 생긴다고 한다. 근원적 아버지(元夫)는 종교로 말하면 신이며 철학으로 말하면 깨달음일 것이다. 아프고 괴롭기 때문에 근원적 아버지를 만나고 그를 믿고 따르며 구원을 바라는 것은 냉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믿음이라 위태로움은 있을 것이지만 의지해도 허물은 아니라고 한다.

 

悔亡 厥宗 噬膚 往 何咎
후회를 없애면(悔亡) 가족이나 종족이(厥宗) 고기를 씹도록 해 줄 것이니(噬膚) 그렇게 나아감(往)에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何咎)

  후회는 스스로 자책하여 자신을 망치는 것을 말한다. 자책하지 않고 이별의 순리를 인식하고 순리로 받아들여 작은일(小事)이라 여기는 것이 후회를 없애는 것이니,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종족으로부터 위로해주고 보살펴주는 도움의 손길이 있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이다.

 

睽孤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匪寇婚媾 往 遇雨則吉
이별은 외로움이 따르나(睽孤) 진흙을 바른 돼지를 만나게 될 수도 있어(見豕負塗) 한 수레의 귀신처럼 실려온다(載鬼一車) 먼저 화살로서 맞서보면(先張之弧) 후에 활을 내려놓게 될 것이니(後說之弧) 도적이 아니라 혼인을 청하러 오는 것이다(匪寇婚媾) 손잡고 나아가면(往) 비를 만나 진흙이 씻겨져 나갈 것이니 길하다(遇雨則吉)
  사별하고 난 후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주역은 말한다. 팔을 벌려서 새 인연을 맞아 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귀신이라 여기고 ‘화살로서 맞서보라’고. 그러면 그가 귀신이 아니라 돼지임을 알게 되고, 결합하러 찾아 오는 새 인연임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나에게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날을 세우면서도 서서히 마음이 열려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드라마의 줄거리가 생각나는 효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7

家人 利女貞
【初九】閑有家 悔亡
【六二】无攸遂 在中饋 貞吉
【九三】家人嗃嗃 悔厲 吉 婦子 嘻嘻 終吝
【六四】富家 大吉
【九五】王假有家 勿恤 吉
【上九】有孚 威如 終吉

  과거에는 여성과 남성을 나누어 태어나게 하고, 각기 다른 신체적 능력을 준 것을 하늘이 다른 역할을 맡기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사람마다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 소위 명분론(名分論)의 근원이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부인은 부인답게 이름으로 구분된 그 역할을 다 하여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바람직한 세상이라 여겼다. 그래서 집안일은 여성의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하였다.

 

家人 利女貞
집안을 이끄는 사람(家人)은 결실기와 마감기 사이에 있는 여성이다(利女貞).
  남자는 바깥일에 힘쓰고 집안일은 여성이 힘쓰는 남녀 역할분담의 사회가 고대가 지향한 사회였으니, 서로가 맡은 역할에 있어서는 그 주도권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남편이 밖에서 벌이는 사업을 부인이 주도하려는 것도 명을 어긴 것이며, 남편이 집안일을 주도하려는 것도 명(命)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남편이 어디서나 제왕으로 군림하려 했던 시절도 있었다. 결실기와 마감기 사이의 여성인 까닭은 며느리와 시어머니와의 여성간 역할 분담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閑有家 悔亡
집안을 잘 단속해야(閑有家) 후회가 없다(悔亡)
  집안을 잘 단속하는 것은 살림을 잘 단속하는 것과 자녀를 잘 단속하는 것 등 집안내의 중요한 일들을 잘 단속하고 관리하여 남편이 집안일을 걱정하고 근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여성을 차별하여 가정이라는 울타리 내로 가두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성별에 따라 역할분담을 하여 조화로움을 이루고자 한 명분론의 사회를 지향했던 까닭이다.

 

无攸遂 在中饋 貞吉
나아가 벌어오는 것이 없어도(无攸遂) 중용의 덕으로 먹여주면(在中饋) 끝까지 길하다(貞吉)
  중용은 곧 좌로도 우로도 기울지 않고 바로 서 있는 것이다. 남편이 벌어오지 않으면 먹여주지 않는 ‘GIVE AND TAKE’식의 단순한 중간이 중용이 아니다. 남편이 남편의 도리를 하는가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용이다. 물론 반대로 여인이 집안을 잘 단속하지 못하더라도 남편이 남편의 도리를 저버려서도 아니 된다.

 

家人嗃嗃 悔厲 吉 婦子 嘻嘻 終吝
여인이 가혹하고 냉혹하게 단속하면(家人嗃嗃) 후회가 있고 염려가 있겠지만(悔厲) 길(吉)하다. 오히려 어머니와 아들이(婦子) 희희낙낙하면(嘻嘻) 마침내 궁색해진다(終吝)
  지나치게 냉혹하면 남편을 공처가로 자식을 마마보이로 만들겠지만 지나치게 너그러워도 안되니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중용(中庸)의 도(道)를 따르는 집안단속이 필요하다.

 

富家 大吉
집안을 부유하게 하면(富家) 끝까지 길하다(大吉)
  가인(家人)의 중요한 사명은 집안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다. 단순한 물질적 부가 아니라 알뜰히 살림을 하여 낭비되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많아도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고, 적어도 저축을 하면서 가계를 꾸리는 사람도 있다. 구두쇠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쓰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계를 잘 단속하여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것을 막는 것이 집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며 크게 길한 것이다.

 

王假有家 勿恤 吉
왕(王)은 가정에 너그러우니(假有家)을 근심하지 말라(勿恤) 길(吉)하다.
  여인이 가정을 잘 꾸려 집안이 잘 단속되고 부유한 가정이 되었다면, 혹시 부유함으로 인해 왕의 의심을 받지 않을까? 왕이 뺏어가지 않을까? 왕의 사명은 가정을 부유하게 해 주는 것이지, 부유함을 뺏어가는 것이 아니다. 흉년이 들어 국가재정이 부족하자 애공이 유약(공자의 제자)에게 방도를 물으니 유약은 10분의 1법을 시행하라고 하였다. 애공은 10분의 2법도 부족한데 어찌 10분의 1법을 하라는가 라며 화를 낸다. 유약은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어찌 풍족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이 부족하다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겠습니까?”[논어 제9편 안연 제9장]라고 답했다. 이른바 고대의 '군민일체'의 사상이니 군주는 백성에게 부유함을 저장해 둔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유하고 바른 가정은 곧 왕의 뜻이기도 한 것이다. 왕이 바른 왕이라면 근심할 필요가 없다.

 

有孚 威如 終吉
신념이 있고(有孚) 존엄을 잃지 않아야(威如) 끝까지 길하다(終吉)

  부(孚)는 주역의 전체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생각이 없는 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신념, 신의, 가치관 등등 적절히 번역이 되어야 되는 개념이다. 이 부(孚)가 무너지기 쉬운 곳이 또한 가정이다.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할 위험이 많은 곳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부모라고 해서 남편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정은 신념이 통해야 하고 개인의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끝까지 길하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6

明夷 利艱貞
【初九】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六二】明夷 夷于左股 用拯馬壯 吉
【九三】明夷于南狩 得其大首 不可疾貞
【六四】入于左腹 獲明夷之心 于出門庭
【六五】箕子之明夷 利貞
【上六】不明 晦 初登于天 後入于地

  명이(明夷) 괘는 밝음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공자께서 한탄했던 도가 무너진 세상을 의미한다. 공자께서는 “천하에 도가 살아있으면 나와서 일해야 하고 천하가 태평하지 않으면 숨어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13장]고 하셨다. 물론 산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갈고 닦으며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明夷 利艱貞
세상의 도가 무너지면(明夷) 성숙기와 말년사이가 어렵다(利艱貞)
  열매를 맺고 마감을 해야 하는 짧은 시간 속에서 도가 무너졌으니 뜻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으니 시절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명이(明夷)의 시절에 전성기가 지나가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해 결실을 맺고 마감을 할 수 없다면 그것도 천명(天命)일 지 모른다.

 

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도가 무너지면(明夷于飛) 날아야 할 때 그 날개를 접어야 한다(垂其翼) 군자의 길을 가면(君子于行) 3일 동안 먹을 수 없게 되고(三日不食) 시간이 지나가도(有攸往) 주인의 꾸지람만 듣게 된다(主人有言)
  도가 무너진 세상에서 오히려 군자의 길을 가면 배고픔이 있다고 한다. 좋은 소리를 들을수도 없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하게 될 것이요, 명예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해야 하는가? 주역은 날아야 할 때 그 날개를 접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변신하여 현실과 타협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나아가려고 애쓰지 말라는 뜻이다.

 

明夷 夷于左股 用拯馬壯 吉
도가 무너져서(明夷) 왼쪽 허벅지에 화살을 맞더라도(夷于左股) 구조에 사용할 말의 힘이 세면(用拯馬壯) 길(吉)하다.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왼쪽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으니 바르지 못함에 당한 것이다. 그러나 왼쪽 허벅지는 치명적이지 않은 신체의 부분이다. 치명타를 입지는 않았고 도와주는 센 힘이 있다면 큰 걱정이 아니다. 길(吉)한 이유는 날개를 접지 못하고 있는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날개를 억지로 접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明夷于南狩 得其大首 不可疾貞
도가 무너졌을 때 남쪽으로 사냥을 떠나서(明夷于南狩) 그 적의 수괴를 사로잡았다 하더라도(得其大首) 끝까지 서둘지 마라(不可疾貞)
  따뜻한 남쪽은 바른 도리를 상징한다. 그 곳에서 우두머리를 얻었으니 곧 세상을 밝은 도리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끝까지 서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도가 무너져 있으므로 급하게 세상을 변하도록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성왕이 나타나더라도 한 세대가 지나야만 세상을 어질게 만들 수 있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2장]고 하셨다. 세상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入于左腹 獲明夷之心 于出門庭
왼쪽 뱃속에 들어가(入于左腹) 도가 무너져있는 마음을 알았다면(獲明夷之心) 속해있던 집단에서 나와야 한다(于出門庭).

  왼쪽 뱃속이란 곧 심장이 위치한 곳을 말한다. 옛 사람들은 사람의 생각이 살고 있는 장소는 뇌가 아니라 가슴으로 여겼다 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고 생각하였고, 전통적으로 사람의 사망을 심장이 정지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근래에 뇌사를 인간의 사망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이 강하고 아마도 곧 그렇게 바뀌게 될 것 같기는 하다. 여하튼 그 마음을 통찰하여 도가 무너져 있음을 알았다면 속히 그 집단으로부터 나와야 현명하다고 한다.

 

箕子之明夷 利貞
도가 무너졌음을 알고 있는 현자(箕子之明夷)는 끝까지 이롭다(利貞)

  도가 무너졌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도 안목이 없다면 판단하기 힘든 일이다. 명이(明夷)의 세상에는 교묘한 말이 진실을 속이고, 사이비가 진짜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도가 무너진 세상은 말재주가 좋은 사람과 화려하게 꾸밀 줄 아는 사람이 존중 받는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난무하는 세상이라면 바른 도가 무너져 있는 세상일 것이다.

 

不明 晦 初登于天 後入于地
도가 무너졌음을 알지 못하는(不明) 어두움(晦)이라면 처음에는 하늘에 올라도(初登于天) 곧 땅으로 추락함으로써(後入于地) 마감을 하게 될 것이다.
  도가 무너졌음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안목을 가졌다면 처음에는 하늘에 오르는 것으로 착각하여도 후에 그 곳이 땅으로 추락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바른 도(道)가 무너졌음을 왜 알지 못할까? 도(道)에 마음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 지 못한다”[대학 제7장 정심수신]고 하였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5

晉 康侯 用錫馬蕃庶 晝日三接
【初六】晉如 摧如 貞吉 罔孚 裕 无咎
【六二】晉如 愁如 貞吉 受茲介福于其王母
【六三】衆允 悔亡
【九四】晉如鼫鼠 貞厲
【六五】悔亡 失得勿恤 往吉 无不利
【上九】晉其角 維用伐邑 厲吉 无咎 貞吝

  중국은 천자(天子)가 각 지역의 제후들을 통솔하는 체제를 갖고 있었다.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여 한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리게 하고 그 제후를 지배하는 형태의 정치체제 였는데, 그래서 조공을 받쳤던 우리나라가 중국의 제후국이었느니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晉)괘는 천자의 권력이 아닌 제후의 권력을 말하며, 천자에 충성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晉 康侯 用錫馬蕃庶 晝日三接
권력(晉)은 강후의 지위를 받고(康侯) 마필을 상으로 받으며(用錫馬蕃庶) 하루에(晝日) 세 번 임금을 배알함을(三接) 말한다.
  천자로부터 제후로 봉해지면 천자의 신하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천자를 조현(朝見)하여 업무 보고와 인사를 하여야 하며, 조공을 받쳐야 하며, 천자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천자에게 불충한 다른 제후를 토벌하여야 하는 등 여러가지 신하로서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제후로 봉해졌는데 마필을 상으로 받고 하루에 세 번이나 천자를 배알하게 되니 곧 올바른 권력이며 천자에 충성하는 권력이어야 한다는 의미한다. 반드시 하루에 세 번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청해도 천자가 만나줄 정도의 신임을 의미한다.

 

晉如 摧如 貞吉 罔孚 裕 无咎
권력으로(晉如) 정적을 굴복시켜야(摧如) 끝까지 길하다(貞吉) 굴복한 적수가 신뢰할 수는 없더라도(罔孚) 관대하게 대해야(裕) 허물은 없다(无咎)
  권력은 정적을 굴복시키지 못하면 위협이 되는 무서운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권력으로 정적을 굴복시켜야 하는 것은 제후로서의 의무 중 하나인 ‘불충한 다른 제후를 토벌해야 할 의무’를 의미한다. 중국의 역사는 제후들의 커진 힘을 막지 못해 결국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여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권력은 정적을 힘으로 굴복을 시켜야 하지만 그 반면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 중용(中庸)의 도를 지키라는 것이다. 채찍과 당근이 조화되어야 하니 ‘교육’의 도(道)와 마찬가지이다.

 

晉如 愁如 貞吉 受茲介福于其王母
권력은(晉如) 근심이 있어야(愁如) 끝까지 길하니(貞吉) 왕모로부터 그 복을 받을 것이다(受茲介福于其王母)
  제후의 권력은 천자로부터 다른 지역의 제후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견제를 받게 되는 자리이다. 권력의 근심은 그러한 권력의 견제를 말한다. 권력이 견제를 받지 못하면 액톤(Acton)의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말처럼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오늘날 삼권분립(三權分立)이 제도로써 자리잡은 까닭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천자와 다른 제후들의 의심을 사게 되는 심한 견제를 받으면 왕모가 살펴 줄 것이라고 한다. 왕모는 역사적으로 문왕의 어머니였던 태임(太任)을 지칭한다고 한다. 천자는 혹 간신배들에게 휘둘려 분별력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어머니의 모성본능은 아들을 해롭게 하는 자와 이롭게 하는 자를 본능의 눈으로 더 잘 알게 되는 까닭일 지 모른다.

 

衆允 悔亡
민중의 지지가 있어야(衆允) 후회가 없다(悔亡).
  바른 권력인지 바르지 못한 권력인지의 여부는 민중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탕왕이 걸왕을 내쫓고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것을 두고 맹자는 남을 해치고 잔인하게 구는 한 명의 인간을 처형한 것일 뿐 군주를 시해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군주가 군주답지 않으면 군주가 아니라는 뜻인데, 바른 권력이란 무조건적으로 천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와 민중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晉如 鼫鼠 貞厲
권력이(晉如) 들쥐와 집쥐와 함께 하면(鼫鼠) 끝까지 위태롭다(貞厲).
  들쥐는 떼를 지어서 농작물에 단번에 큰 피해를 주고, 집쥐는 집안에 기생하며 조금조금씩 피해를 주는데 그러한 성향의 간신배들을 상징한다. 공자께서는 “스며드는 참소와 애통한 무고가 통하지 않는다면 널리 밝히는 통찰력을 가졌다 할 수 있다”[논어 제12편 안연 제6장]고 하셨다. 논어 원문의 침윤지참(浸潤之譖)과 부수지소(膚受之愬)는 이미 고사성어가 된 말이다. 침윤지참(浸潤之譖)은 물이 점점 스며드는 것과 같이 쌓고 쌓이게 하여 모함하는 것이며, 부수지소(膚受之愬)는 살을 에는 듯한 간절한 하소연으로 단번에 흔들리게 모함하는 것을 말하니, 침윤지참은 집쥐와 의미가 같고 부수지소는 들쥐와 의미가 같다.

 

悔亡 失得勿恤 往吉 无不利
후회가 없다면(悔亡) 권력을 잃고 얻음에 근심하지 말라(失得勿恤) 그렇게 나아가면 길하고(往吉)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권력이 단지 욕망이라면 그만큼 무상한 것도 없다. 옛 속담에 ‘정승 개 문상은 가도 정승 문상은 안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권력을 잃고 얻는 것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바름을 도모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권력은 그 바름을 도모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晉其角 維用伐邑 厲 吉 无咎 貞吝
권력의 뿔을 세우면(晉其角) 그 권력으로 이웃을 치게 되니(維用伐邑) 위태하다(厲) 결과가 좋고(吉) 허물은 없더라도(无咎) 끝내는 어려워질 것이다(貞吝)
  권력의 뿔을 세우는 것은 권력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 가진 힘을 행사하여 이웃을 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힘으로 제압했기 때문이며 힘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권력이라는 강한 힘을 가졌으되 그 힘은 공격적으로 행사되어야 하는 힘이 아니라 바른 도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행사여야 바른 까닭이다. 공자께서 소(韶)음악은 정말 아름답고 참으로 좋다고 하셨지만 무(武)음악은 아름답지만 참으로 좋지는 않다고 하셨으니[논어 제3편 팔일 제25장], 무왕은 힘으로 자신의 주군이였던 주왕을 참살하고 천하를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4

大壯 利 貞
【初九】壯于趾 征 凶 有孚
【九二】貞 吉
【九三】小人用壯 君子用罔 貞 厲 羝羊觸藩 羸其角
【九四】貞 吉 悔亡 藩決不羸 壯于大輿之輹
【六五】喪羊于易 无悔
【上六】羝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无攸利 艱則吉

  주역뿐 아니라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담긴 글에 나타나는 소(小)와 대(大)는 가정과 사사로움을 도모하는 의미의 소(小)와 나라와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의미의 대(大)로 나누어 구분한 것이다. 그래서 소인(小人)은 가정을 가장 중시하는 곧 필부필부(匹夫匹婦)하면서 사는 일반 백성들을 의미하고, 대인(小人)은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사명을 다하는 사회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대장(大壯)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대(大)에 중점을 둔 왕성한 힘이며(壯)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힘이니 이어지는 진(晉)괘의 권력을 이루기 위한 힘을 의미한다.

 

大壯 利貞
왕성한 기운(大壯)은 결실을 맺고(利) 마감하기(貞) 위해 쓰이는 기운이다.
  대장(大壯)은 결실을 맺고 마감을 하기 위한 기운의 발산이니, 대축(大畜)괘에서 말한 대축리정(大畜 利貞)과 같은 의미이다. 소축(小畜)은 성장기(亨)에 의욕 해야 하는 일이며, 대축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해서(利貞) 이뤄야 하는 일이라고 했었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기 위한 사용해야 할 소장(小壯)의 기운이라면 성장기(亨)이겠지만 사회를 위한 기운의 발산이므로 리정(利貞)인 것이다.

 

壯于趾 征 凶 有孚
기운이 발에 모여 있을 때(壯于趾) 나아감(征)은 흉(凶)하다. 뜻이 있어야 한다(有孚)
  기운이 발에 있음은 행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육체적 힘에 치우쳐 있는 것을 말한다. 발(육체적 힘)과 머리(정신적 힘)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강한 물리적 힘으로 나아가는 것은 흉하니 정신가치가 뒷받침되지 않는 권력찬탈에 불과한 쿠테타가 오래갈 수 없는 까닭이다.

 

貞 吉
마지막(貞)이 되어야 길(吉)하다.

  대장(大壯)괘에서 말하는 강한 기운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한 리정(利貞)의 힘이니, 곧 정점에서 가장 강력하게 터트리는 힘의 발산이다. 힘을 집중하여 남김없이 발산하여야 길하다. 배수의 진을 친 군대를 이기기가 힘든 까닭은 남김없이 힘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小人用壯 君子用罔 貞 厲 羝羊觸藩 羸其角
소인은 육체적 힘만 사용하려 하고(小人用壯) 군자는 그물만 사용하려 하면(君子用罔) 끝까지(貞) 위태롭다(厲) 새끼양이(羝羊) 울타리를 들이받고(觸藩) 그 뿔이 처량하게 된다(羸其角)
  열매를 맺고 마감하는 강한 힘의 집중은 혼자서 애쓰는 힘이 아니며 함께 뭉쳐서 행사하여야 할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소인과 대인이 따로따로 분산된 힘을 발산하고 있으니 위태로운 것이다. 양은 제사에서 희생양으로 삼는 동물인데, 힘없는 민초(백성)를 말함이다. 소인과 군자가 힘을 조화롭게 뭉치지 못하면, 애꿎은 백성들의 희생만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貞 吉 悔亡 藩決不羸 壯于大輿之輹
마침내(貞) 길(吉)해지고 후회가 없게 되려면(悔亡) 울타리가 터져서(藩決) 처량함이 없어지고(不羸) 큰 수레를 타고 큰 기운이 터져나가게(壯于大輿之輹) 해야 한다.
  음과 양의 조화로움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있는 벽이 곧 울타리이다. 그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음양의 조화가 이뤄지면 거침없이 큰 기운이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상호간에 조화를 도모하여 중용(中庸)의 도를 지켜야 한다.

 

喪羊于易 无悔
길 잃은 양은 돌아오게 해야(喪羊于易) 허물이 없다(无悔)
  큰 기운이 퍼져 나가기 위한 음양조화를 위해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요, 뜻하지 않은 희생 역시 있었을 것이다. 길 잃은 양은 두려워 도망친 백성을 말함이니 다시 제자리로 데려와 보살펴주어야 허물이 없다. 어떻게 데려와야 하는가? 자공이 정치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면 멀리서도 저절로 모여들 것입니다”[논어 제13편 자로 제16장]라고 하셨다. 길 잃은 양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바른 정치로 도(道)를 밝히는 것이다.

 

羝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无攸利 艱則吉
새끼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아(羝羊觸藩) 물러나지 못하고(不能退) 나아갈 수도 없다면(不能遂) 유리할 게 없지만(无攸利) 그 어려움이 있음으로(艱則) 길(吉)하다.
  길 잃은 양이라면 어디서 헤매고 있는지 몰라서 구해주러 찾아 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하니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진퇴양난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양이라면 길 잃은 양을 찾는 것 보다는 쉽게 구할 수가 있다. 길 잃은 양은 속박되지는 않았으나 구해주기 어려운 양이며, 오도가도 못하게 된 양은 속박되어 보다 어려움에 처한 양이지만, 큰 기운이 터져나가 성취가 된 후에는 가장 먼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려움이 있는 것이 오히려 길(吉)한 까닭이다. 그래서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였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3

遯 亨 小利貞
【初六】遯尾 厲 勿用有攸往
【六二】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九三】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九四】好遯 君子吉 小人否
【九五】嘉遯 貞吉
【上九】肥遯 无不利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것이 바른 도(道)이다. 둔(遯)괘는 숨는다는 뜻이나 비겁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용기있게 물러나는 것이다. 둔(遯)은 집에서 기르던 돼지(豚)가 우리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공자께서 “함부로 위험한 나라에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 거처하지 않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살아있으면 나와 일해야 하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숨어야 한다”[논어 제8편 태백 제13장]고 하셨으니, 외형은 물러남이지만 결과는 바른 곳으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둔(遯)괘이다.

 

遯 亨 小利貞
물러나야(遯) 할 때는 성장기(亨)여야 하고 결실기와 마감기(利貞)에는 득이 적다(小)
  물러나는 것도 때를 놓치면 어렵게 된다. 일을 시작하여 성장하는 단계에서 물러나는 것이어야지 이미 결실기와 마감기로 접어드는 때 물러나는 것은 발을 너무 깊게 담근 상태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초창기에 과단하게 발을 빼야 한다. 시기가 늦으면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배신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遯尾 厲 勿用有攸往
미련을 남겨두면(遯尾) 위태로우니(厲) 시간이 지나가도록 기다리지 말라(勿用有攸往)
  많은 경우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기다리는 것은 좋지 못하다. 물러나야 할 때라면 미련을 두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과단하게 물러나야 한다.

 

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황소의 가죽처럼 굳세고 질기게 물러나야 하니(執之用黃牛之革)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물러나겠다는 말을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莫之勝說)
  미련을 남기지 말고 황소의 가죽처럼 단호하게 물러나야 한다.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여 혼란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맹자』의 ‘부유하고 귀한 것이 흔들 수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것이 바꾸게 할 수 없고 위협과 무력이 굽히게 할 수 없다’는 말처럼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물러나야 할 때라면 과단성 있게 물러나야 한다.

 

係遯 有疾 厲 畜臣妾 吉
물러남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係遯) 병통이 있고(有疾) 위태로울 수도 있다(厲) 대비하여 신첩을 길러야(畜臣妾) 길(吉)할 것이다
.
  물러나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어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물러나기가 어렵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다섯번째 괘 수(需)괘에서 말한 발을 빼기 쉬운 모래밭에 있는 것(需于沙)이 아닌 발을 빼기 힘든 진흙밭에 있는 것(需于泥)이다. 진흙밭에 거주해야 한다면, 만약을 대비하여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신첩의 신(臣)은 남자종 첩(妾)은 여자종을 의미한다.

 

好遯 君子吉 小人否
즐겁게 물러나는(好遯) 군자는 길하나(君子吉) 소인은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小人否)
  즐거운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는 이유는 밀려나는 것이 아니요,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요,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니 곧, 바른 길(道)을 따르는 것이기에 즐겁고 그 결과도 길(吉)할 것이다. 중용에 “군자가 중용을 행하는 것은 군자로서 때와 상황을 헤아려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인이라면 오직 ‘물러난다’는 사실만 아프게 직시하여 즐거울 수 없을 지 모른다.

 

嘉遯 貞吉
칭찬속에 물러나니(嘉遯) 끝까지 길하다(貞吉)
  물러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고 아름답게 여기니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물러나는 마음을 알아주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구나. 달아날 때 홀로 뒤쳐져 있다가 성문을 들어올 때 말을 채찍으로 때리며 뒤를 지킨 것이 아니라 말이 빨리 달리지 않았다고 하는구나”[논어 제6편 옹야 제15장]라고 칭찬하셨다.

 

肥遯 无不利
물러나더라도 풍족하다면(肥遯)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풍족은 단지 물질적 풍족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니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던 은자(隱者)들처럼 탐심을 없애니 오히려 더 커진 마음의 풍족함이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지으신 ‘도산잡영(陶山雜詠)’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돌우물이 맛있고 시원하니 진실로 풍족하게 물러날 수 있는 장소를 베풀어 주셨도다(石井甘冽 允宣肥遯之所)’라는 표현에서 이 비둔(肥遯)을 만날 수 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2

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初六】浚恒 貞 凶 无攸利

【九二】悔亡

【九三】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九四】田无禽

【六五】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上六】振恒 凶

  항(恒)괘는 변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곧 신념을 뜻한다. 지나치게 강한 신념은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지만, 신념이 없으면 자기 생과 삶을 개척해 나가지 못하고 이목에 이끌려 피동적으로 따라다니는 삶을 살게 만든다. 신념은 맹목과 맹신이 아니다. 귀를 닫고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귀를 더 열고 눈을 더 크게 떠야 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의무필무고무아(毋意毋必毋固毋我)'하셨다고 하니, "맘대로 짐작하는 것, 반드시 하려는 것,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 자신만 옳다고 하는 것" 이 네 가지 병통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논어 제9편 자한 제4장]

 

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신념(恒)을 세우는 것은 성장기여야(亨) 허물이 없고(无咎) 성숙기와 마감기로(利貞) 시간이 지나가면 결실을 맺게 된다(利有攸往)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모범의 틀에 갇혀있으면 1등을 할 수는 있겠지만 수동적인 틀에 박힌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공자께서는 "함께 배운다고 반드시 같은 길을 가지는 않으며, 같은 길을 간다고 반드시 같은 성취가 있는 것이 아니며, 같은 성취가 있다고 반드시 같은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9편 자한 제30장]고 하셨다. 사람은 기계부품처럼 같을 수 없으니 젊을 때 자아를 확립하고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을 때의 확립된 자아와 신념은 식견이 부족하여 냉정하고 정확할 수는 없을 것이나 허물은 아니다. 성숙기 마감기를 향해 시간이 지나가면, 식견이 높아지고 그 신념이 바르게 확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浚恒 貞 凶 无攸利

지나치게 고집하면(浚恒) 끝(貞)이 흉(凶)하니 유리할 것이 없다(无攸利)

  준항(浚恒)은 조금의 융통성도 용납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고집스러움을 뜻한다. 논어에 “큰 절개는 엄격해야 하지만, 작은 절개는 때론 들고 날 수가 있다”[논어 제19편 자장 제11장]고 하였다. 제자 안회가 죽자 공자께서도 지나치게 슬퍼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상심하였느냐? 그러나 이런 사람을 위해서 지나치게 상심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서 지나치게 하겠느냐?”[논어 제11장 선진 제9장]고 하셨다. 조선조의 유학은 작은 절개가 들쑥날쑥하면 마음이 방종해져 큰 절개를 해친다고 주장하며 엄격한 원칙론을 고수하였으니, 주역에서 말하는 준항(浚恒)이 아니었는가 싶다.

 

悔亡

그러나 후회는 없을 것이다(悔亡).

  지나친 원리원칙주의자는 외적으로는 흉하나 내적으로 후회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맞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옳다고 믿기 때문에 고수하는 것이기 때문인 까닭이다.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신념 없이 순종하는(不恒其德) 것이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하고(或承之羞) 끝내(貞) 어려움을 당하게 한다(吝)

  신념이 있는 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자아가 확립되고,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신념 없이 순종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고 끝내 어려움을 당하니, 생각이 없어 갈대처럼 휘둘리는 사람보다는 지나쳐 융통성이 없을지라도 신념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田无禽

사냥을 해도(田) 잡은 짐승이 없을 수는 있다(无禽)

  신념으로 인해 먹는 문제 즉, 경제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는 있다. 순종하는 사람과 지나치게 고집하는 사람 모두 중용을 벗어난 것이다. 신념 없이 순종하면 수치스럽게 되니 곧 정신적인 아픔을 당하고, 지나치게 신념을 고집하면 고고함은 지킬 수 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런 심리적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신장은 욕심이 많은데 어떻게 굳셀 수 있겠는가?”[논어 제5편 공야장 제11장]라고 하셨다.

 

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그 덕이 한결같아(恒其德) 끝까지(貞) 변치 않으면 부인은 길하겠지만(婦人吉) 남편은 흉하다(夫子凶).

  그래서 부인의 뜻을 꺾기가 더 어려울 지도 모른다. 남편은 집안과 가정을 위해서 그 뜻을 쉽게 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양의 의무감은 남자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역의 손(損)괘에서는 가정이 없는 충복(得臣无家)을 얻는다는 효사가 등장한다. 가정이 있으면 완전한 충복이 되기가 어렵다. 가정의 생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인의 덕은 가정을 단속하는 것이기에 변치 않아야 길하고, 남편의 덕은 소축기(가정), 대축기(사회)를 거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변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결같으면 흉하다라는 해석도 좋은 것 같다.  

 

振恒 凶

신념을 흔드는 것(振恒)은 흉(凶)하다.

  신념은 내면적인 자존이다. 외부에서 영향을 주어 신념을 가지도록 하거나 신념을 굽히도록 강제하는 것은 흉할 뿐이다.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삼군대장의 권력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일개 보통사람이라도 그 의지를 빼앗을 수는 없다”[논어 제9편 자한 제26장]고 하셨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1

咸 亨利貞 取女 吉
【初六】咸其拇
【六二】咸其腓 凶 居 吉
【九三】咸其股 執其隨 往 吝
【九四】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九五】咸其脢 无悔
【上六】咸其輔頰舌

  “군자의 도는 부부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극함에 이르면 하늘과 땅에 밝게 드러난다”[중용 제12장]고 하였으니, 부부만큼 중요한 관계도 없을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인(仁)은 사람(人)이 둘(二)이라는 것이며, 공자께서 말씀하신 서(恕)는 마음(心)을 같게(如) 한다는 뜻이다. 나와 너가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곧 도(道)는 부부관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咸 亨利貞 取女 吉
관계(咸)는 성장기부터 시작해 생의 끝까지 이어지니(亨利貞) 관계를 갖는것이(取女)이 길(吉)하다.
  불교는 성관계를 혐오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교의 교리가 부부관계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수도승의 경우에 욕(慾)이 생겨 수행을 방해하므로 금하기도 하는데, 처자를 거느리고 수행하는 대처승도 있으며, 원효대사께서도 환속하셨다. 지나침은 모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용을 벗어난 치우침이다. 성도 과하거나 모자라는 것이 문제이지 부부관계를 하지 않아야 바른 것이 아니다. 한편, 괘사가 생의 끝까지 성관계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젊었을 때는 성관계가 대표적인 한 방법이겠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손을 한번 잡아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교감을 끊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咸其拇
엄지발가락을 애무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咸其拇).

  부부관계도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의 과정을 겪어서 시작과 끝이 있어야 길하다. 단번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교감하기 위한 준비와 과정이 필요하다. 중용에 "먼 곳을 가기 위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야 하며,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중용 제15장]고 하였으니, 엄지발가락부터 시작해야 한다.

 

咸其腓 凶 居 吉
그 종아리를 애무하고 있으니(咸其腓) 흉(凶)하다. 멈추는 것이(居) 길(吉)하다
.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종아리는 성감대가 아닌 까닭일 것이다. 보통은 자극에 예민하고 신경이 많이 모여있는 신체적 부분을 통해 교감을 시도하고 진도를 나아가야 한다. 멈춤의 도(道)를 뜻하는 간(艮)괘에서는 종아리에서 멈추는 것은 마음을 불괘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 그것은 전체적인 부부관계를 멈추는 것을 말하고, 여기서의 거(居)는 단순히 종아리의 애무를 멈추는 것을 말한다. 발가락을 애무함으로써 생긴 흥분 또한 사라질 것이니 쓸데없는 종아리의 애무는 멈추는 것이 길하다.

 

咸其股 執其隨 往 吝
그 허벅지를 애무하고 있으나(咸其股) 반응하는 대로 급하게 따라잡으려 하면(執其隨) 나아가더라도(往) 어렵다(吝).
  허벅지를 애무하는 것은 흥분이 절정에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마음의 속도와 몸의 속도가 같지는 않다. 고통없이 관계를 가질 수 있으려면, 윤활액이 충분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급하게 나아가는 것은 어렵다.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마침내 길해지며 후회가 없게 되니(貞吉悔亡) 끊임없이 왕래해도(憧憧往來) 몸이 생각을 따를 것이다(朋從爾思).

  마침내 길해지는 것은 몸도 준비가 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왕래하는 것은 반복운동을 말하며, 붕종이사(朋從爾思)는 직역하면 벗이 너의 생각을 따른다는 것이니, 몸이 생각을 따른다거나 상대와 잘 호흡을 맞춘다거나, 어떻게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없는 것 같다.

 

咸其脢 无悔
관계가 끝난 후 등살을 애무해야(咸其脢) 후회가 없다(无悔)
  관계가 끝났다고 바로 일어서는 것은 배려심이 없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신체와 마음이 동일하지 않은 이성(異性)이다. 남성은 오르가슴이 있은 후 일정 기간 흥분을 느끼게 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여성은 반복적으로도 다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남자처럼 즉시 긴장이 풀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배려가 필요하다. 욕정의 해소로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咸其輔頰舌
뺨과 혀를 애무함으로써(咸其輔頰舌) 마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뺨과 혀를 애무함으로써 부부관계의 순탄한 원형리정(元亨利貞)의 단계를 마쳐야 한다. 주나라 시대의 주역이 이렇게 부부관계의 도(道)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다. 성(性)은 단순한 욕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교감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얼굴을 부비며 가벼운 입맞춤으로 도탑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30

離 利貞 亨 畜牝牛 吉
【初九】履錯然 敬之 无咎
【六二】黃離 元吉
【九三】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九四】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六五】出涕沱若 戚嗟若 吉
【上九】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리(離)괘는 아래 위로 해가 두 개인 괘이다. 이미 해가 있으면 다시 해를 만들지 않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리(離)괘는 해가 있음에도 하나의 해를 더 만드는 것이니, 곧 바람직하지 않은 힘의 행사이다. 새로운 해는 기존의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세상에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저물어 없어지고 난 후에 나서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 시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옳지 못한 침략을 상징한다.

 

離 利貞亨 畜牝牛 吉
침략(離)은 결실을 얻고 끝을 낸 후에(利貞) 성장시키겠다는 것이나(亨) 순한 암소를 기르듯(畜牝牛) 순응해야 길(吉)하다.
  주역이 말하는 순탄한 변화의 법칙은 씨(元)가 자라서(亨) 열매를 맺고(利) 소멸하는(貞)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침략은 엎어버린 후에(利貞) 성장(亨)을 도모하는 것을 말함이니 천도(天道)를 벗어난 것이며 섭리에 따르지 않는 조급함이다. 곧 해가 있는데 해가 나서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긋남을 도모하지 말고 순한 암소를 기르듯 해야만 길할 것이다. 암소는 곤(坤)괘의 암말과 마찬가지로 유순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유순하지 못하면 전쟁이 있고 파괴가 있고 이별이 있게 된다.


履錯然 敬之 无咎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면(履錯然) 그것을 공경해야(敬之) 허물이 없다(无咎)

  이착연(履錯然)은 발소리가 어지럽다는 말이다. 어지러운 발소리는 군사들이 훈련을 하는 소리이다. 급박하게 뒤섞인 발소리를 들으면, 보지 않아도 군사의 훈련임을 안다. 비가 오기 전에는 청개구리가 울고, 제비가 낮게 나는 등등의 비의 징조가 있고, 태풍이 불기 전에는 별이 지나치게 맑거나 해륙풍이 무너지는 징조가 나타난다. 중용에도 “나라와 집안이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고, 나라와 집안이 망하려 하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조짐이 있다”[중용 24장]고 하였다. 어지러운 군사의 발소리는 침략의 징조이다.

 

黃離 元吉
중용의 덕으로 침략을 대하면(黃離)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문종이 김종서에게 ‘중정(中正)’에 관해서 물으니, "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으며 지나침도 없고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을 뜻합니다. 정(正)이란 것은 지극히 공평하여 조금도 사심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정(正) 또한 중(中)입니다" 즉,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의 중간이 아니라, 바른 것이 중(中)이라는 말이다. 중은 또한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中)으로 침략을 대하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해가 중천에 있는데 다른 해를 만들려는 것이라면 응징해야 하고, 이미 기운 해라면 물러나는 것이 곧 중(中)을 따르는 것일 게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나라가 희망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고려에게 나라를 바쳤으니, 그 또한 중용으로 침략을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해가 기울면 침략을 대비해야 하는데(日昃之離) 북을 쳐서 경계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니(不鼓缶而歌) 경험 많고 혜안이 있는 노인네가 탄식하게 되어(則大耋之嗟) 흉(凶)하다.
  해가 차서 기울고, 기존의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등장하게 되는 변화가 이어지게 하는 것이 하늘의 섭리이다. 해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해가 떠 오르는 순조로운 순환이 이뤄지면 좋겠지만,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급하게 그 틈을 노리는 침략의 위험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침략을 대비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만 하고 있으니 경험 많은 노인네가 어찌 탄식이 없겠는가? 공자께서 “사람이 멀리 내다보고 고민하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이 가까운 날 생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2장]고 하셨다.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침략은 갑작스레 이뤄져(突如其來如) 불태워버리고(焚如) 죽여버리고(死如) 내다버리고(棄如) 한다.

  평화롭던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것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와 힘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공든 탑은 오랜 시간이지만 그 무너지는 것은 일순간이다. 급작스럽게 불타고 죽고 버려지게 된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出涕沱若 戚嗟若 吉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出涕沱若) 탄식이 쏟아져 나오니(戚嗟若) 길(吉)하다
.
  눈물이 비오듯 하고  탄식소리가 끊임없는 까닭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니 길하다. 불타고 죽고 버려져도 끝장이 난 것이 아니니, 침략자가 순리를 따르지 않은 까닭이다. 해가 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해를 만들려고 한 침략세력의 과욕 때문이니 천명(天命)이 침략자들에게 있지 않은 까닭이다.

 

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왕이 출정하여(王用出征) 기쁨을 줄 것이다(有嘉). 우두머리는 참수(折首)해도 그 부하들은 죽이지 않아야(獲匪其醜) 허물이 없다(无咎).
  왕이 출정을 하는 것은 바른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이다. 왕이 사람들을 모아 반격을 하여 승전할 것이나 다만 우두머리는 참수해도 그 부하들은 죽이지 않아야 한다. 주역의 이 가르침에 의하면 일본의 위정자들은 미워해도 일본 국민을 미워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된다. 백성들은 모두 같은 힘없고 가엾은 생명일 뿐이다. 참수하고 미워해야 할 이는 그들을 이용한 우두머리 계층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9

習坎 有孚 維心亨 行 有尚

【初六】習坎 入于坎窞 凶

【九二】坎 有險 求 小得

【六三】來之坎坎 險 且枕 入于坎窞 勿用

【六四】樽酒 簋貳 用缶 納約自牖 終 无咎

【九五】坎不盈 祗既平 无咎

【上六】係用黴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

  인생은 함정의 연속이기도 하다. 사람의 교활함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만 그물을 펼치고 함정을 만들지는 않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한 적은 인간이라고 하였다. 공자께서는 "사람마다 모두 자신이 지혜롭다고 과신하지만 그물과 덫이나 함정으로 몰아넣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중용 제7장]고 안타까워 하셨다. 습감(習坎)괘는 함정에 빠짐을 의미하는 괘이다. 습(習)은 잘못 들어간 글자로 보아, 감(坎)괘라고 하기도 한다.

 

習坎 有孚 維心亨 行 有尚

함정에 빠져도(習坎) 신념을 잃지 말고(有孚) 마음을 붙들어야(維心) 발전(亨)이 있다. 그렇게 나아가야(行) 복이 생긴다(有尚)

  영특한 제자였던 제아가 공자에게 "어진 사람이 있는데 우물에 사람이 떨어졌다고 하면 그는 구하려 내려갈까요?"라고 여쭈었다. 말하자면 어진 자를 속이고 이용해 먹기는 쉽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공자께서는 "어진 사람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를 우롱할 수는 없을 것이다"[논어 제6편 옹야 제26장]고 답을 하셨다. 인자(仁者)를 속일 수도 있으니 그를 함정에 빠뜨릴 수는 있다. 하지만 속임을 당했다고 속인자를 미워하거나 어질었기에 당했음을 한탄하여 어질지 않은 길을 가도록 변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셨다. 그 뜻은 유학에서 말하는 ‘신독’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 즉 자신만이 아는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니, 물리적 함정보다 더 위험한 것은 정신적 함정이다.

 

習坎 入于坎窞 凶

구덩이에 빠지고(習坎) 다시 구덩이에 빠지면(入于坎窞) 흉(凶)하다.

  처음의 구덩이는 물리적인 함정이지만, 또 다시 빠지게 되는 구덩이는 자기 내면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함이니, 곧 마음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함정에 빠졌다고 뜻을 저버리는 것은 재차 함정에 빠지는 것이니, 공자께서 "군자는 어쩔 수 없는 때에도 원칙을 벗어나지 않지만, 소인은 어쩔 수 없게 되면 곧 함부로 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장]고 하신 말씀이 연상되는 효사이다.

 

坎 有險 求 小得

구덩이에(坎) 위험이 있을지라도(有險) 절망하지 않고 방도를 구하면(求) 적게라도 얻음이 있을 것이다(小得)

  외적인 함정은 벗어날 수도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였고,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하였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은 마음의 함정이며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來之坎 坎 險 且枕 入于坎窞 勿用

구덩이로 와서(來之坎) 빠지지는 않았으나 구덩이(坎)가 위험하다고(險) 잠자듯 나아가지 못한다면(且枕) 그 역시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같으니(入于坎窞) 그렇게 잠자듯 하지 말아야 한다(勿用)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재물이 아까워 쓰지 못하고 묻어두는 부자는 재물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자와 다를 것이 없다. 구덩이에 빠질까 두려워 나아가지 못함은 구덩이에 빠져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樽酒 簋貳 用缶 納約自牖 終 无咎

술을 정성스레 마련하고(樽酒) 두 그릇의 기장밥을 준비하는 마음으로(簋貳) 소박하게 하여(用缶) 창을 통해 들이고 받으며(納約自牖) 제사를 지내면 마침내(終) 허물이 없을 것이다(无咎).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는 까닭은 바른길을 가게 해 주십사, 세상을 바르게 해 주십사 비는 것이다. 혜택을 비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움을 비는 것이며, 나를 위해 비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비는 것이다. 공자께서 병이 들었을 때 자로가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러 가려고 하였다. 공자께서 그런 선례가 있는지를 물으니 자로는 자신 있게 '너를 위해서 천지신령께 기도한다'는 고대의 문헌을 근거로 내 세웠다. 그러자 공자께서는 그 문헌에서 말하는 기도는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 길을 가게 해 주십사 하는 기도이니, “그런 기도라면 내가 행한지 오래되었다”고 하셨다.[논어 제7편 술이 제35장] 함점에 빠졌어도 내가 아닌 전체를 둘러봐야 허물이 없다.

 

坎不盈 祗既平 无咎

구덩이가 아직 차지 않았을 때(坎不盈) 세상이 바른 기운으로 돌아온다면(祗既平) 허물이 없다(无咎).

  함정은 악을 가두기 위해 마련한 감옥이 아니라, 바르지 못한 자가 바른 자를 해치기 위하여 준비한 함정이다. 세상이 바르게 돌아온다면 바르지 못한 자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구덩이가 차지 않았다면 곧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 또한, 함정에 빠진 바른이가 그 곳에서 빠져나오는 것 보다 세상이 바로잡히는 것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허물이 없다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係用黴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

팔다리가 단단히 묶여서(係用黴纆) 빽빽하게 심겨진 가시나무속에 갇히게 되었다면(寘于叢棘) 삼년이 지나도 풀려날 수 없음이니(三歲不得) 흉(凶)하다.

  팔다리를 단단히 묶여야 하는 까닭은 그가 강자이기 때문이다. 강자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함정을 헤어나기 어렵게 된다. 강자가 함정에 빠진 이유는 강한 힘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 때 드러냈기 때문이다. “뛰어난 재주를 어리석음으로 감추고, 지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명철함을 지키고, 청렴함을 혼탁 속에 가려두고, 굽힘으로써 몸을 펴는 것, 이런 처세가 험난한 세상을 건너는 배를 타는 것이며, 몸을 보호하는 방편이다”[채근담 제116장]

:
Posted by 오빠야닷컴
28

大過 棟 撓 利有攸往 亨

【初六】藉用白茅 无咎

【九二】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九三】棟橈 凶

【九四】棟隆 吉 有它 吝

【九五】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上六】過涉滅頂 凶 无咎

  대과(大過)는 심하게 지나간 것이니, 시기가 너무 늦었음을 말한다. 주역의 첫 가르침,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야 하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하는 순리(乾)를 따르지 않았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시들고 메마른 버드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니 법이라고 한다. 대과(大過)괘의 효사는 시기를 놓친 남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기가 어긋나 있어도 기운이 조화를 이룰 수도 있는 법이니, 사람마다 기운이 일정하지 않고 일찍 열매를 맺을 수도 늦게 열매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도(道)가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완전한 법칙은 아니라는 말이다.

 

大過 棟撓 利有攸往 亨

혼기를 놓쳤으니(大過) 용마루가 굽을 것이지만(棟撓) 시간이 지나면 이로울 것이니(利有攸往) 발전해 나갈 것이다(亨)

  용마루가 굽은 이유는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을,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용마루로 비유한 것이다.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것이니 시간이 지나도 이로움이 없을 것이나,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늦은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이로움이 있게 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높았던 눈이 낮춰지고 분수를 알게 되어 과거에는 부족하다고 외면했던 짝이라도 충분하다 여겨지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치마만 두르면 되는 것이다.

 

藉用白茅 无咎

흰 띠로 자리를 짜서 사용하듯(藉用白茅) 순박한 마음이면 허물이 없다(无咎)

  자용백모(藉用白茅)는 제사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는 흰 돗자리를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마음 즉, 때 묻지 않은 맑고 경건한 마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도 약탈혼이 빈번하였다고 알려진다. 주역에서 혼인을 언급할 때 말(馬)을 등장시키는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나라는 문화가 성숙되고 도(道)과 예(禮)에 대한 관념이 자리잡아 힘을 숭상하는 관념이 약해지고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순간에 약탈혼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니, 순박한 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대과(大過) 하였다고 힘으로 취하려는 것을 경계한 의미일 것 같다.

 

枯楊生稊 老夫 得其女妻 无不利

시든 버드나무에(枯楊)도 싹이 돋는 법이니(生稊) 나이든 지아비가(老夫) 어린부인을 맞으면(得其女妻)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나이든 홀아비는 양기가 쇠하고 어린 여자는 음기가 성장하고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기운이 음양조화에 어긋나여 궁합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시든 버드나무에는 새싹이 돋는다. 버드나무는 물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매우 강해서 아무리 메말라도 좀처럼 죽지 않기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 그래서 강한 성(性)을 상징하기도 하는 나무이다. 버드나무의 이런 성질 때문에, 창기(娼妓)를 두고 영업을 하던 술집을 버들 류(柳)자를 써서 화류(花柳)라고도 불렀다.

 

棟橈 凶

용마루가 굽으면(棟橈) 흉하다(凶).

  초육에서 말한 것과 같은 뜻이다.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 무게에 억눌려 있으면 흉(凶)하다는 말이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도 어렵고 시든 버드나무에 싹을 틔울 수도 없을 것이니, 늙음을 의식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棟隆 吉 有它 吝

단단하고 곧은 나무여야(棟隆) 길(吉)하지만 뱀처럼 힘이 없다면(有它) 어려워진다(吝)

  용마루가 굽은 것은 마음에 장애가 생긴 것을 말하지만, 뱀(它)은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뜻한다. 나무처럼 곧고 단단하지 못하고 뱀처럼 물렁거리고 휘어지는 성기라면 어려워진다. 그러나 흉(凶)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교감을 이루지 못하는 용마루가 휜 것이 흉(凶)하다고 하였으니, 신체가 따르지 못함보다 마음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 보다 큰 문제이다.

 

枯楊生華 老婦 得其士夫 无咎 无譽

시든 버드나무라도(枯楊) 꽃이 피는 법이니(生華) 나이든 부인이(老婦) 젊은 지아비를 얻어도(得其士夫) 허물이 없다(无咎) 그러나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无譽).

  버드나무는 강한 성(性)을 상징한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그래서 여인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허물은 없어도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니, 그것이 옛 시대의 관념인 듯 하다. 늙은 사내가 어린 처녀와 조화를 이루면 자랑하려고 하지만, 늙은 여인이 젊은 사내와 조화를 이루면 음탕하다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적인 시각에서 보면 허물(咎)은 아니다.

 

過涉滅頂 凶 无咎

지나친 부부관계는 기력을 소진시켜(過涉滅頂) 보기에 흉(凶)하나 허물은 없다(无咎)

  지나치게 관계하여(過涉) 정점까지 이르러 끝을 본다면(滅頂) 흉측하지만 허물은 아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허물(咎)은 내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며, 길흉(吉凶)과 명예(譽)는 외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대과(大過)하여 조화가 맞지 않는 외양을 가진 한 쌍의 남녀가 부부관계를 과하게 가지면 외면적인 시각에서는 흉(凶)측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고 하건 당사자들에게는 허물은 아닌 것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7

頣 貞吉 觀頣 自求口實
【初九】舍爾靈龜 觀我朵頣 凶
【六二】顛頣 拂經 于丘 頣 征 凶
【六三】拂頣貞 凶 十年勿用 无攸利
【六四】顛頣 吉 虎視眈眈 其欲逐逐 无咎
【六五】拂經 居貞 吉 不可涉大川
【上九】由頣 厲 吉 利涉大川

  "군자는 말은 더디게 하고 행동은 부지런히 한다”[논어 제4편 이인 제24장], "옛사람들이 쉽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행하지 못할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논어 제4편 이인 제22장]"등등, 공자께서 말에 대해 언급한 것은 논어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PR시대가 되고 방송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이(頣)는 턱을 제대로 쓰는 것을 말하니, 말을 잘 가려 하는 것을 뜻한다.

 

頣 貞吉 觀頣 自求口實
말을 가리면(頣) 끝까지 길하니(貞吉) 말로 인한 여파를 헤아려(觀頣) 그 말이 결실을 맺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自求口實)
  공자께서 “큰 길에서 듣고 작은 길에서 뱉어버리는 것은 도덕을 버리는 것이다”[논어 제17편 양화 14장]라고 하셨다. 바쁘게 흘러가는 세상이라 그런지 껍데기를 주워듣고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여기고, 심지어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舍爾靈龜 觀我朵頣 凶
영적인 거북이 떠나게 됨은(舍爾靈龜) 자기의 늘어진 턱을 고려해 보면(觀我朵頣) 알 수 있을 것이니, 입 단속을 못한 까닭이라 흉(凶)하다
.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거북의 등껍데기로 점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거북은 북방을 지키는 수호신이기도 했다(현무). 이 신령스런 거북이 떠나가는 이유는 턱이 늘어져 입을 닫지 못할 정도로 떠들고 다니기 때문이다. 입은 재앙의 근원이라 하였다.

 

顛頣 拂經 于丘 頣 征 凶
턱이 뒤집혔는데(顛頣) 도리가 곡해되고 있다고(拂經) 언덕에 올라(于丘) 말하고자 하니(頣) 그렇게 나아가면(征) 흉(凶)하다.

  턱이 뒤집혔다는 것은 조리 있게 말을 잘 못하는 것이다. 경전의 훌륭한 뜻을 제대로 전달할 능력이 부족하다. 사람들이 모인 언덕에서 바른 뜻을 전하고자 하지만 흉하다. 왜냐하면 언덕 위에 모인 군중은 쉽게 흥분하니 말재주로 선동하기가 쉬운 만큼 돌을 맞기도 쉽기 때문이다. 웅변력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을 말로써 바른 도리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니 흉하다.

 

拂頣貞 凶 十年勿用 无攸利
입단속은 끝까지 하지 못하면(拂頣貞) 흉(凶)하다. 십년을 잘 참았더라도(十年勿用) 유리할 것이 없다(无攸利).
  비밀을 지켜준 시간이 하루이거나 10년이거나 결국 뱉어버리면 똑같이 흉할 뿐이다. 말이 퍼지는 속도는 번개보다 빨라서 따라잡지 못하니 "한마디 말(言)이 이미 나오면 네마리 말(馬)로도 따라가기 어렵다"[논어 제12편 안연 제8장]고 하였다. 친부모가 아니라는 비밀을 10년을 잘 지켜주었더라도 입단속을 못하고 뱉어버리면 10년을 참아 주었다고 유리할 것이 없다.

 

顛頣 吉 虎視眈眈 其欲逐逐 无咎
오히려 턱이 뒤집히는 것이(顛頣) 길(吉)하다.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때를 잘 가리고(虎視眈眈) 말하고자 하는 바가 순수하여야(其欲逐逐) 허물이 없기(无咎) 때문이다.

  턱이 뒤집히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말을 조리있게 잘 하는 웅변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웅변력이 없음에도 오히려 길(吉)한 이유는 말재주가 부족하니 급하게 말할 수도 없고 사람들이 귀 기울어 들어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은 호랑이가 먹이를 잡듯 때를 잘 가리고 살펴서 순수한 마음을 다해 뜻을 전하려고 해야 허물이 없는데, 말재주가 있는 사람은 오히려 서두르고 급하게 말을 뱉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공자께서도 “말은 잘해서 무엇 할 것인가? 말만 잘할 뿐이라면 미움만 받게 될 뿐이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5장]라고 하셨다.

 

拂經 居貞 吉 不可涉大川
도리가 어긋나 있어도(拂經) 끝까지 멈추어 있는 것이(居貞) 길(吉)하니, 큰 내를 건너듯 과단하게 나아감은 불가하다(不可涉大川)
  말재주가 있어도 오히려 멈추는 것이 길하니, 말로서 사람을 감화시켜 경전의 바른 도리를 깨닫게 하기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는 말이 행동을 넘어서는 것을 엄히 경계를 시켰다. "스스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면 저절로 명령하지 않아도 따르고,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논어 제13편 자로 6장]고 하셨으니, 진정으로 바른 도리를 전하려고 하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이로울 것이다.

 

由頣 厲 吉 利涉大川
입을 단속한 까닭에(由頣) 위태로울 수도 있으나(厲) 길(吉)하다. 큰 내를 건너듯 과단하게 고집해야 이롭다(利涉大川)
  입을 잘 단속한 까닭에 위태로울 수도 있으니 즉, 외롭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역은 끝까지 입을 잘 단속하는 것이 길하다고 한다. 재미를 위한 어울림은 입이 가벼운 사람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하고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입이 무거운 사람과 어울리려고 할 것이다. 물론, 입이 무거운 사람과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은 다르다. 때와 장소를 잘 헤아려 말하는 사람이 입을 잘 단속하는 사람이다. 공자께서 “말 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교만이라 하고, 말할 때가 되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 하고, 안색과 상황을 살피지 않고서 말하는 것을 맹목이라고 한다”[논어 제16편 계씨 제6장]고 하셨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6

大畜 利貞 不家食 吉 利涉大川
【初九】有厲 利已
【九二】輿說輹
【九三】良馬逐 利艱貞 曰閑輿衛 利有攸往
【六四】童牛之牿 元吉
【六五】豶豕之牙 吉
【上九】何天之衢 亨

  주역의 아홉번째 괘 소축(小畜)은 가정에서의 성취를 뜻하여 임신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대축(大畜)괘는 사회에서의 성취를 뜻한다. 윤봉길 의사께서 말씀하신 이상(理想)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理想)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理想)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靑年時代)에는 부모(父母)의 사랑보다 형제(兄弟)의 사랑보다 처자(妻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江山)과 나의 부모(父母)를 버리고 라도 그 강의(剛毅)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決心)하여 이 길을 택(擇)하였다”[윤봉길 의사 어록]

 

大畜 利貞 不家食 吉 利涉大川
큰 성취(大畜)는 열매를 맺고 마감하는 시기(利貞)의 일이니, 가족의 먹이는 것이 아니라야(不家食) 길(吉)하고, 큰 강을 과단성 있게 건너야 이롭다(利涉大川)
  소축은 성장기(亨)에 의욕해야 하는 일이며, 대축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해서(利貞) 이뤄야 하는 일이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대축은 소축과 달리 가정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니 가족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야 하고, 과단하게 나아가야 이롭다. 윤봉길의사께서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대장부가 집을 저버리고 나서니 살아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자식으로서의 도리, 남편으로서의 도리,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못하고, 집을 나서니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셨다. 가족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는 모든 일은 근본과 말단이 있다. “모든 일은 근본과 말단이 있으며, 시작과 마침이 있으니,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대학 제1장]

 

有厲 利已
위태로움이 있구나(有厲)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함이여(利已)
  대축(大畜)은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소축(小畜)과는 다른 것이요, 사회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성장기를 지나서 열매를 맺고 마감해야 할 시간에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하늘(시간)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요, 땅(자리)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니 위태로움이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 꾀꼬리를 보시고 “머무를 때에 그 머물러야 할 곳을 아니 사람이 새 보다 못할 수 있으랴!”[대학 제3장]라고 하셨다.

 

輿說輹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함은 수레에서 바퀴가 빠져버린 것과 같다(輿說輹) 
  앞 효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대축은 열매를 맺고 마감하기 위해서(利貞) 이뤄야 하는 일이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소축(小畜)을 이뤄야 할 시기 곧 형(亨)의 시기에 의욕 해야 하는 일이다. 대축을 이룬다면서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은 수레에서 바퀴가 빠져버린 것과 같은 어긋남이다.

 

良馬逐 利艱貞 日閑輿衛 利有攸往
좋은 말은 달려야(良馬逐) 하는 것이니, 끝까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달려야 이로운 것이다(利艱貞) 날마다 수레를 세우면서(日閑輿衛) 시간을 보내야 이롭다(利有攸往)
  하늘은 사람을 내면서 임무를 맡기셨다고 했으니 곧 맡은바 사명을 부여하셨다. 말이 달려야 하는 것처럼 사람도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말이 잘 달리기 위해서는 수레가 튼튼하고, 바퀴가 잘 맞아야 한다. 늘 세우고 점검하는 철저한 준비성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니, 사람도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준비와 대비를 철저히 하고 신중하여야 한다.

 

童牛之牿 元吉
송아지의 뿔은 사람을 찌르지 못하도록 해 두어야(童牛之牿)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송아지는 냉정하지 못하고 혈기가 잘 제어가 되지 않는 사람을 비유한다. 대축은 혼자서 도모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마땅히 어울려 나아가야 하는데, 송아지는 그 혈기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 뿔이 자신을 다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므로 나무토막을 대어 방비를 해 둔다. 그런 부류의 사람과 함께 하려면 단속이 필요하다.

 

豶豕之牙 吉
거세한 돼지는 잘 먹여야(豶豕之牙) 길(吉)하다.
  돼지의 수컷은 거세를 해야 냄새가 없어지고 고기가 연하게 된다고 한다. 거세를 했다는 말은 대축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을 한 것을 말한다. 그 희생을 모른 척 하지 말고 잘 먹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니, 논공행상을 잘 해야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何天之衢 亨
하늘의 뜻을 알고 따라야(何天之衢) 형통(亨)한다. 
  하늘의 준 사명이 있는데, 다른 일을 도모하는 것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는 일이 막히기만 하고 잘 풀려나가지 않으면 하늘이 크게 쓰려고 시련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물을 거스르고 있는 것인지 하늘의 뜻을 헤아려 보는 것이 필요하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5

无妄 元亨利貞 其匪正 有眚 不利有攸往
【初九】无妄 往 吉
【六二】不耕 穫 不菑畬 則利有攸往
【六三】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九四】可貞 无咎
【九五】无妄之疾 勿藥 有喜
【上九】无妄 行 有眚 无攸利

  사람에게 고기를 주기 위한 것으로 명이 바뀐 동물이 있고, 사람의 치장을 위해, 사람의 건강을 위해 멸종에 이르는 동물도 있고, 인간 거주의 편의를 위해 없어지는 산과 강이 있다. 주역은 인간의 탐욕으로 자연(自然)이 파괴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자연 곧 천도(天道)가 무너지면 인간 역시 생존하지 못한다. 무망(无妄)은 하늘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니,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것을 뜻한다.

 

无妄 元亨利貞 其匪正 有眚 不利有攸往
천도에 순응(无妄)하여야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순탄한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천도에 순응하는 그 바름을 따르지 않는다면(其匪正) 재앙이 있으리니(有眚) 천도를 거스르며 시간을 보낸다면 이로울 것이 없다(不利有攸往)

  씨앗이(元) 자라서(亨) 열매를 맺고(利) 죽게 되는(貞) 순탄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려면 시간과 공간과 사람과 노력 등등이 필요하지만, 또 하나 필요한 것이 무망(无妄)이다. 주역은 하늘(시간)외에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인류도 언젠가는 종말을 맞게 될 것 같다. 인간에게 주어진 지능으로 인해서 오히려 멸할 수 있는 위험이 있으니, 뛰어난 지능으로 인해 하늘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태어나서 죽게 되는 것은 하늘이 주관하는 일이지만, 고기를 먹기 위해 생명을 만들고 생명을 죽이고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버리니 다른 생명이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도록 하면서 스스로는 천수(天壽)를 누릴려는 중용을 벗어난 모순을 꿈꾸는 것이다. 공자께서 “사랑하는 이는 살기를 바라면서 미워하는 이는 죽기를 바란다면 살리기를 원하면서 죽이기를 원하니 이것은 모순인 것이다”[논어 제12장 안연 제10장]라고 하셨다. 사람이 인위(人爲)로 천수(天壽)를 주관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천수(天壽)를 끊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无妄 往 吉
천리에 순응하여(无妄) 나아가야(往) 길(吉)하다.
  누구나 보전된 자연(自然)을 보면 아름답게 여기고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자기의 이익과 관련되면 곧 그 자연(自然)이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곧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탐욕이다. 공자께서 “멀리 내다보고 고민해 보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이 가까운 날 생길 것이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12장]라고 하셨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하며, 하늘을 두려워 해야 한다.

 

不耕 穫 不菑 畬 則利有攸往
밭을 갈지 않아도(不耕) 얻을 수 있고(穫) 개간하지 않아도(不菑) 경작할 수 있으니(畬)  그렇게(則)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이로움이 있다(利有攸往).
  주역은 인간이 조작하지 않아도 자연이 배려한 자연 생산물로 살 수가 있다고 한다. 생태계가 그러한 조화를 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도가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랑이는 배가 부르면 토끼를 잡아먹지 않는다. 만약 호랑이에게 인간의 머리를 주었다면 호랑이는 두고두고 먹으려고 토끼를 잡아 비축해 두고자 경쟁했을 것이기에 벌써 생태계의 조화가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무망의 재앙은(无妄之災) 누군가가 매어둔 소를(或繫之牛) 지나가는 행인이 가져가서(行人之得) 고을 사람들이 의심을 받게 되는 재앙(邑人之災)이다.
  천리에 순응하지 않으면 결국은 하늘이 재앙을 부른다고 한다. 하늘의 재앙은 자연을 망친 자에게 직접적으로 향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말이다. 운이 나쁜 사람이 벼락을 맞는다고 하였다. 누군가가 매어둔 소를 도적질한 것은 지나가는 행인이었지만, 의심을 받는 것은 고을 사람들이니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 하늘과 땅처럼 위대한 존재에게도 사람들은 서운해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중용 12장]라고 하셨나 보다. 자연을 파괴한 이들은 선진문명국이지만, 가뭄과 재앙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오히려 더 발생하고 있다.

 

可貞 无咎
끝까지 순리를 지키면(可貞) 허물이 없다(无咎)
  무망을 따르지 않는 재앙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 것'과 같은 억울한 결과가 생긴다고 해서 곧 변신하여 천도(天道)를 어기려 하지 마라는 말이다. 허물(咎)은 길흉(吉凶)과는 다른 내적인 시각이다. 무망을 따른다는 것이 손해와 이익을 견주어 이해관계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바른 길이기에 무망의 길을 가고 천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无妄之疾 勿藥 有喜
자연적인 병통(无妄之疾)은 약을 쓰려 하지말고(勿藥) 기쁨으로 받아들여라(有喜).
  천리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병, 즉 노환으로 천수를 다하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약이 개발이 되어도 불로초가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무의미한 연명을 위한 치료가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병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천리에의 순응이 아니라, 천수(天壽)가 다 하여 찾아오는 병을 거부하고 삶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삶의 집착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남는다고 하였다.

 

无妄 行 有眚 无攸利
천리에 순응(无妄)하는 것을, 억지로 행하려고 하면(行) 재앙이 있고(有眚) 유리함이 없다(无攸利)
  행(行)하려는 것은 의욕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역시 자연스러움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위(人爲)적인 것이다. 무망(无妄) 괘는 인간이 인위(人爲)로 만들려고 하는 탐욕에 의해서 천도(天道)가 무너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데, 천도를 따르는 것 조차 억지로 인위로 하려고 하니 더 모순적인 일이다. 재앙만 있을 뿐이며 유리할 것이 없다고 한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4

復 亨 出入无疾 朋來无咎 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初九】不遠復 无祇悔 元吉
【六二】休復 吉
【六三】頻復 厲 无咎
【六四】中行 獨復
【六五】敦復 无悔
【上六】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 以其國 君 凶 至于十年 不克征

  복(復)괘는 본래 자기 자리로 되돌아 오는 것을 말한다. 가야 할 길이지만 쉽게 갈 수 있도록 해 놓지 않았으며, 가지 말아야 할 길인데도 쉽게 갈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 하늘이 정해 놓은 길(道)이다. 땀 흘려 곡식을 얻기는 어렵고 도박과 투기로 재물을 불리기는 쉬워 보인다. 그러나 땀 흘려 일군 곡식은 해롭게 하고 얻은 것이 아니지만, 도박과 투기로 불린 재산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가져온 것이다. 어렵더라도 바른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도전을 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로또 복권을 긁는 기이한 일을 도모하는 것도 아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편안하고 일상적인 도를 따르는 것이니, 곧 송충이가 솔잎을 먹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

 

復 亨 出入无疾 朋來无咎 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복귀(復)는 성장기(亨)여야 한다. 들고 남에 병통이 없고(出入无疾) 벗이 찾아오는 것이니 허물이 없다(朋來无咎). 진정으로 복귀하는데(反復其道) 7일이 걸릴 것이나(七日來復) 그 시간이 지나가야 이롭다(利有攸往)
.
  어긋난 길로 들어섰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성장하는(亨) 시기여야 한다. 이미 때가 지나 어긋난 열매(利)를 맺어 버리면 늦으니,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미 회복불능의 시간을 지나지 않은 형(亨)의 시기라면 들고 나는 시행착오가 반복되어도 병통이 되지 않는다. 벗(깨우침)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히려 배움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7일은 음양오행을 말한다. 음양오행의 변화를 한번 거쳐야 진정으로 복귀가 가능한 까닭은 미련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어긋난 길의 끝으로 한번 가 보아야 미련을 두지 않고 “이 길이 아니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不遠復 无祇悔 元吉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오면(不遠復) 뉘우침도 늦춰지지 않을 것이니(无祇悔) 근원적으로 길하다(元吉)
  주역은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라고 본다. 그래서 첫 괘가 건(乾)괘로 시작한다. 오래지 않아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오면 시간을 그만큼 아낀 것이니 근원적으로 길하다.

 

休復 吉
여유로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休復)이 길(吉)하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돌아오는 길은 시간을 잃어버리고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급하게 돌아와 잃은 시간을 만회하려 급하게 서둘지 않아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다.

 

頻復 厲 无咎
절박한 복귀(頻復)는 위태롭기는 해도(厲) 허물은 없다(无咎)
  급하게 돌아오는 빈복(頻復)은 휴복(休復)이 아니라서 길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허물은 없다. 제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고집을 부리고 돌아오지 않으려는 것이 가장 흉(凶)하다. 그래서 “소인이 잘못을 범하면 허물을 덮으려고만 한다”[논어 제19편 자장 제8장]는 가르침처럼, 고치지 않으려는 것을 더 큰 잘못으로 본다.

 

中行 獨復
중용의 도를 따라(中行) 외롭더라도 돌아와야 한다(獨復)
  ‘모두가 YES 할 때 NO라고 하고 모두가 NO 하는데 YES’라고 하던 광고가 있었다. 아무런 신념이 없이 그렇게 한다면 소위 왕따가 될 뿐이다. 중(中)은 좌로 치우치지도 않고 우로 치우치지도 않은 곧음이니, 지극히 곧은 것을 말한다. 곧 중용의 도를 기준으로 삼아 옳다면 설령 외롭게 되더라도 돌아와야 한다. 바른길임을 알았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선택이 아닐 것이다.

 

敦復 无悔
후덕한 마음으로 돌아와야(敦復)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无悔)
  돌아오는 길은 실패를 하고 돌아오는 까닭에 원망을 담고 올 위험이 있다. 잃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왜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느냐는 등의 원망하는 마음이 갖지 않고 내 탓으로 여겨 자기를 책하는 반성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돈복(敦復)이다. 그래야 후회를 남기지 않고 좋은 경험이자 배움이었다는 감사한 마음일 수 있다.

 

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 以其國 君 凶 至于十年 不克征
혼미한 상태로의 복귀(迷復)는 흉(凶)하니 재앙이 있을 것이며(有災眚)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면(用行師) 마침내 크게 패할 것이다(終有大敗) 그 나라의(以其國) 임금(君) 역시 흉(凶)하게 될 것이니, 설령 10년이 된다 하더라도(至于十年) 이기지 못할 것이다(不克征)
  ‘이 길이 아니구나’하는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돌아오지 못하여 미련이 남은 까닭이다. 이렇게 미련을 남기고 돌아오면 다시 그 잘못된 길이 바른 길인지 혼란하여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흉하여 재앙이 따를 것이다. 전쟁에 나간 장군처럼 높은 지위의 사람이 혼미한 상태로 돌아와 착각 속에 오판하고 있으면 자기만 흉한 것이 아니라 결국 군사를 죽이게 만들고 그 임금까지도 해롭게 만들 것이니 흉하다. 10년의 시간은 준(屯)괘에서 말한 10년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안되는 것이지만 결국 통하게 만드는 지극한 정성을 의미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상황이 군사를 사용하는 전쟁이라면 지극한 정성으로도 통하지 않는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장수는 모두를 해롭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장군이 전 조선수군을 궤멸되었던 아픈 역사가 생각난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3

剝 不利有攸往
【初六】剝床以足 蔑 貞 凶
【六二】剝床以辨 蔑 貞 凶
【六三】剝之 无咎
【六四】剝床以膚 凶
【六五】貫魚 以宮人寵 无不利
【上九】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박(剝)은 떨어져 나가고 무너지고 파괴되고 박살 나는 것을 뜻한다. 괘를 보면 하나의 양(陽)이 다섯의 음(陰)에 밀려 위에 서 있는 형상이다. 떼를 지어 덮치는 데 당해낼 힘이 없어 쓰러지는 것이 박(剝)괘이다. 대표적으로 중세의 참혹한 ‘마녀사냥’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약한 여성을 마녀로 몰아 화형을 시키는 것이 일도 아닌 시대가 있었다. 요즘에 인터넷의 폐단의 하나인 악의적인 글로써 공격하여 여론을 악의적으로 몰아가 떼를 지어 공격을 감행하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괘이다. 올바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자이기 때문에 힘이 없어 당하게 되는 것이 박(剝)이다. 또한 박(剝)의 파괴는 시간이 지나면 곧 새살이 돋아 지난 일이 되어버리는 수준의 시련정도가 아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정도의 회복할 수 없는 무너짐이다.

 

剝 不利有攸往
박살이나면(剝) 시간이 지나도(有攸往) 이로울 게 없다(不利)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다’는 시간의 섭리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 박(剝)괘가 담고 있는 강력한 파괴성이다. 지독한 가난은 상황이 변하면 추억이 될 뿐이다. 그러나 팔다리가 잘려나가면 시간이 지난다고 새로 팔다리가 생겨 회복되지는 않는다.

 

剝床以足 蔑 貞 凶
침상다리만 부서져도(剝床以足) 전체가 궤멸된 것이니(蔑) 끝까지(貞) 흉(凶)하다.
  이렇게 어려운 박(剝)의 시절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 침상다리를 내어주고 침상의 상판을 보전하려고 하는 것이 길(吉)할까? 박(剝)괘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파괴를 뜻하고 힘이 약하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강력한 급류에 가족이 휩쓸렸고 한 명만 구할 미약한 힘만 가지고 있는 남편이 부인만 구하고 아이들을 포기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리만 부서진 침상이 제 역할을 못하듯, 아이가 그런 사고를 당한 가정이 본래대로 회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체이기 때문이다.

 

剝床以辨 蔑 貞 凶
침상의 상판만 부서져도(剝床以辨) 전체가 궤멸된 것이니(蔑) 끝까지(貞) 흉(凶)하다.
  침상의 다리만 부서지는 것과 반대의 상황이다. 아이를 살리고 아내를 포기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으니 그 역시도 흉하다. 삶이 힘들어 자살을 하는 어머니가 어린 아이와 함께 생을 마감하는 뉴스를 어렵게 않게 만날 수 있다. 저 혼자 죽을 것이지 왜 죄없는 아이들까지 함께 데려가느냐고 욕을 하기도 하지만,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

 

剝之 无咎
차라리 모두 부서져야(剝之) 허물이 없다(无咎).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것,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하는 것, 그것이 강력한 파괴의 기운인 박(剝)의 시기에 처신하는 조화로운 방법이라고 한다. 처자식이 급류에 휩쓸렸는데 단지 한 명만 구할 힘이 있다면 부인을 구할 것인가? 아이를 구할 것인가? 주역은 부인과 아이를 함께 구하기 위해 애쓰다가 힘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다면 함께 죽는 것이 남편의 바른 처신이라고 보는 듯 하다.

 

剝床以膚 凶
침상의 껍데기가 부서졌으니(剝床以膚) 흉(凶)하다
.
  완전히 부서진(剝) 것이 아니라, 침상의 껍데기(膚)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급류에 휩쓸린 가족의 예를 계속해서 든다면 모두 온전하게 살아 남기는 했으나, 팔을 잃거나 다리를 잃거나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해를 당한 상태로 살아남은 것을 뜻한다.

 

貫魚 以宮人寵 无不利
물고기를 쭉 꿰어놓은 것처럼(貫魚) 궁녀들을 사랑하면(以宮人寵)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박(剝)이라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파괴를 당하는 이유는 힘이 약하여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나의 양(陽)이 다섯의 음(陰)을 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군주는 혼자서도 능히 수십 수백의 궁녀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 한 번에 그 많은 궁녀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쭉 꿰어놓은 것처럼 한 번에 한 명씩 상대하기 때문이다. 힘을 분산시킬 수 있으면 나누어 상대하면 이롭지 않음이 없다.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종자를 먹지 않고 남겨둔(碩果不食) 군자는 수레를 얻겠지만(君子得輿) 소인은 오두막마저 깨뜨리게 된다(小人剝廬)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이미 고사성어가 된 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종자는 먹지 않고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박(剝)의 어려움은 단순한 시련 수준은 아니다. 배고픔은 상황이 바뀌면 지난 일이 되어 버리지만 박(剝)은 끝까지 안고가야 할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큰 해를 입는 박(剝)의 파괴를 만났어도 종자(씨과실)를 먹어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 박(剝)의 시간도 영원히 계속될 수 없으니 결국은 변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종자를 남겨두어야 훗날 수레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수확을 기약할 수 있다. 소인은 상황을 절망하여 남겨진 오두막마저 다 부수어 버리고 말 것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모든 것은 극에 이르면 반드시 뒤집힌다’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가르침을 전하는 효사는 주역에 참으로 많이 등장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법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2

賁 亨 小利 有攸往
【初九】賁其趾 舍車而徒
【六二】賁其須
【九三】賁如 濡如 永貞吉
【六四】賁如 皤如 白馬翰如 匪寇 婚媾
【六五】賁于丘園 束帛 戔戔 吝 終吉
【上九】白賁 无咎

  외모를 꾸미고 치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획일적인 교복에서 벗어나 좀 더 개성적으로 꾸며 입고자 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억지로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무분별한 자유를 허용하는 방종과 개인의 개성을 존중해 주는 것은 다른 일인 것 같다.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공자께서는 외양을 꾸미는 것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비유를 하면서 "덕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용모를 좋아하듯 하라"[대학 제6장 성의]고 하셨다. 꾸미고 치장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 여우를 멸종 시키는 인간의 탐욕이 무서운 것이다.

 

賁 亨 小利 有攸往
치장하고 꾸미는 것(賁)은 성장기(亨)의 일이니 성숙기에는 효과가 적다(小利) 시간은 흐른다(有攸往)
  외모를 치장하고 꾸미고 가꾸는 것은 성장기(亨) 때의 일이라고 한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시기(利)에 접어들면 즉, 노화가 시작된 후라면 아무리 꾸며도 효과가 적으니(小) 젊음의 아름다움을 치장으로 이겨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나가게 마련이고 사람은 늙기 마련이다.

 

賁其趾 舍車而徒
그 발을 꾸미게 되면(賁其趾) 수레를 버리고(舍車而) 걸으려 한다(徒).

  예쁜 신발을 신고 발을 꾸미게 되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수레를 버리고 걸으려고 하니 그만큼의 고생이 따르는 법이다. 얻으려 하면 잃는 것이 있게 되는 이치이다. 그렇다는 것이지, 주역은 그것이 허물이라는 등의 평가를 하지는 않고 있다.

 

賁其須
남자도 그 수염을 꾸미려 한다(賁其須)
  발을 꾸미고 싶어하는 것은 여자의 치장을 빗대어 말한 것이지만, 남자도 역시 마찬가지로 꾸미고 치장하고 싶어 하는 젊음의 기운을 갖고 있는 것이요, 치장은 성별을 떠난 젊음의 본능이니 그 수염을 꾸미려고 할 것이라 한다.

 

賁如 濡如 永貞吉
꾸밀 수 있는 것은(賁如) 은혜를 입은 것(濡如)이니 끝까지 계속할 수 있어야 길하다(永貞吉).
  꾸미고 싶어도 꾸밀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농담 삼아 '호박을 꾸민다고 수박이 되냐?'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농담이기도 할 것이다. 끝까지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신체를 끝까지 잘 간수하라는 말이다. 『효경』에서 신체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주역이 쓰여진 주나라 시대의 봉건 사회에서는 성형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기에, 성형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다치고 병드는 것으로 신체를 훼손시키는 것을 뜻한 말일 것이다.

 

賁如 皤如 白馬翰如 匪寇 婚媾
멋지게 꾸민(賁如) 백발의 신사(皤如)가 백마를 타고 갈기를 날리니(白馬翰如) 도적이 아니라(匪寇) 혼인을 청하려고 하는 것(婚媾)이다.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가진 것을 뺏어가려는 도적일 것이요, 다른 하나는 마음으로 함께 어울리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백발의 신사는 젊음은 잃었으나 오히려 내면의 중후한 멋을 가진 사람을 비유하니, 내면에서 우러나는 중우한 멋이 있는 사람이다. 내면적인 멋을 지닌 사람이라면 도적이 아니라 함께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일 것이라는 말이다. 내면의 덕은 나이를 들면 외모를 통해 드러나는 법이다. 그래서 마흔 이후의 얼굴은 자기 책임이라고 한다.

 

賁于丘園 束帛 戔戔 吝 終吉
정원을 잘 가꾸었으나(賁于丘園) 예물이 적으면(束帛) 불평이 있어(戔戔) 어려움이 있겠지만(吝) 마침내 길하다(終吉). 
  혼인은 둘만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과의 결합이라고 한다. 정원을 잘 가꾼다는 것은 ‘둘이서 화목하게 가정을 잘 꾸리는 것’을 말한다. 예물이 많더라도 두 사람의 금술이 좋지 못한 것보다 예물이 적더라도 두 사람이 잘 사는 것이 부모들의 근원적인 바램일 것이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고 하듯 작은 것을 탐하면 오히려 큰 것을 잃어버린다.

 

白賁 无咎
순박하게 꾸미는 것(白賁)이야말로 허물이 없다(无咎).

  화려함으로 꾸미는 것이 아닌 담박하게 꾸미는 것을 뜻한다. 『중용』에서 시경을 인용하며 ‘비단옷을 입고 흩옷을 덧입는다’[중용 제33장]고 하였다. 겉은 소박한 옷으로 걸쳤지만 속의 비단무늬가 은은히 우러나오는 것처럼 입어야 담박하기 때문에 싫증을 내지 않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니, 비단옷만 걸치고 거리를 활보하면 곧 싫증이 나게 된다는 말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1

噬嗑 亨 利用獄
【初九】屨校 滅趾 无咎
【六二】噬膚 滅鼻 无咎
【六三】噬腊肉 遇毒 小吝 无咎
【九四】噬乾胏 得金矢 利艱貞 吉
【六五】噬乾肉 得黃金 貞厲 无咎
【上九】何校 滅耳 凶

  서합(噬嗑)은 입 속의 음식물을 강하게 씹는 것이니, 곧 ‘이권을 씹어 먹으려는 바르지 못한 힘’을 말한다. ‘악(惡)’의 하나이다. 서구 열강의 이권쟁탈로 인해 우리민족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그만 상가에서 조차도 조폭까지 동원한 이권쟁탈전이 벌어지는 뉴스를 접하게 되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형으로 아무리 엄격하게 다스려도 살인자가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는 하다. 그 악이 전체로 번지고 퍼져나가지 않게 ‘최소한으로 제어’할 수 있는가가 사회의 당면한 과제일 것이다.

 

噬嗑 亨 利用獄
악(噬嗑)도 성장해 나가는 것(亨)이니, 감옥을 이용해야 이롭다(利用獄).

  이권을 탐하는 악성(惡性)도 열매를 맺으려고 성장한다. 선도 악도 모두 전파성이 있다. 감옥을 이용하는 것은 그 악(惡)을 강력하게 단속하는 것을 말한다. 그 수단이 법이건(법가) 예이건(유가)간에 강력하게 단속하지 않으면 퍼져나가게(亨) 되는 것이다. 비워진 가게에서 너도나도 물건을 훔쳐가면 죄의식을 잃고 모두가 물건을 훔치려고 할 것이다. 현재의 사회는 공권력의 통제력이 무너지면 곧 악마의 세상으로 변해버릴 수 있을 만큼 가치관이 상실되어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법령으로 지도하고 형벌로써 규제한다면 민중은 형벌을 피하려고 할 뿐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 덕으로써 지도하고 예로써 규제하면 부끄러움을 느껴 마음으로 따르게 된다”[논어 제2편 위정 제3장]고 하셨다.

 

屨校 滅趾 无咎
족쇄를 채워(屨校) 발을 잘라버려도(滅趾) 허물은 없다(无咎).

  악이 퍼지는 속도를 덕(德)으로써 통제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감옥 같은 구속이 필요하지만 더 나아가 악의 기운이 세상을 활보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잘라버려도 허물은 아니라고 한다. 강제성과 힘으로 막아도 괜찮다는 뜻이니, 주역은 법가의 사상에 가까운 일면이 있다. 법치주의는 쉬운 방법이므로 현실적인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할 것이다.

 

噬膚 滅鼻 无咎
고기를 먹으려 한다면(噬膚) 코를 베어버려도(滅鼻) 허물은 없다(无咎)

  고기는 이권, 경제력, 권력 등을 상징한다. 고기를 먹으려는 것은 악이 곧 지도부로 파고드는 것이다. 윗 물이 탁하면 순식간에 사회전체가 오염이 되어버리니 이권을 탐하는 세력이 권력과 부를 노린다면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코를 베어버려도 허물은 없다고 한다.

 

噬腊肉 遇毒 小吝 无咎
오래된 고기를 먹는 것(噬腊肉)은 독을 만나나(遇毒) 조금 어려워도(小吝) 허물이 없다(无咎).
  오래된 고기는 기득권층이 축적해 놓은 것을 말한다. 고기를 나누지 않고 축적해 놓은 까닭에 오래된 것이니 그 역시 이권을 축적해 놓은 것이며 악이다. 그것을 탐하여 싸우는 것은 악과 악의 다툼이니, 허물은 없다고 한다. 부패한 기존 권력층을 몰아내는 자가 바른 세력이 아니라 역시 마찬가지로 이권을 탐하여 일어선 경우이다. 그 놈이 그 놈인 것이다. 허물이 없음은 길(吉)하다는 말이 아니다. 내면적인 시각에서 괜찮다는 뜻이다.

 

噬乾胏 得金矢 利艱貞 吉
마른 밥 찌꺼기를 먹는데(噬乾胏) 쇠로된 화살촉이 나왔으니(得金矢) 끝까지 먹기 어려우니 이롭고(利艱貞) 길(吉)하다.
  마른 밥 찌꺼기는 배고픈 서민들의 양식이다. 이 곳에 악의 기운이 스며들었지만 쇠로 된 화살촉 즉, 마른 밥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민중의 저항이 나왔다. 세상이 난세에 이르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의로운 이들은 오히려 일반 민중이다. 민중 속에서 나타난 영웅은 그 쇠로 된 화살촉(출신이 귀하지 않지만)이지만 길(吉)하다.

 

噬乾肉 得黃金 貞厲 无咎
마른 고기를 씹다가(噬乾肉) 황금을 얻게 되면(得黃金) 끝까지 어렵지만(貞厲) 허물은 없다(无咎)

  마른 고기는 가진 자, 기득권층의 재산이다. 그곳으로 스며든 악이 고기를 씹어먹으려는데 황금이 나와 제대로 씹을 수 없었으니, 곧 출신성분이 좋은 영웅을 상징한다. 주역은 기득권측에서 나온 영웅은 민중 속에서 나온 영웅에 비해 한계가 있다고 본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한 최영장군도 권문세족의 출신이었던 까닭에 신분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악을 찌를 수 있는 황금화살촉이 아니고 단순한 황금일 수 밖에 없다. 허물(咎)은 외면적인 시각의 길흉(吉凶)과 달리 내면적 시각에서 본 것이다. 내부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는 뜻이지만 길(吉)한 것은 아니다.

 

何校 滅耳 凶
형구에 매어(何校) 귀를 잘라버리면(滅耳) 흉(凶)하다.

  악마가 세상을 어지럽히기도 하니, 심심찮게 희대의 살인마가 나타나 인간에 회의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주역은 감옥에 가두고,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발목을 잘라버릴지언정 귀는 잘라서는 안된다고 한다. 귀를 잘라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개과천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마라는 것이다. 귀로 들을 수 있어야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역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세상의 이치를 담고 있는 책이기에 설령 악마일지라도 천사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주역은 생명사랑의 이념을 곳곳에 기술하고 있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20

觀 盥而不薦 有孚顒若
【初六】童觀 小人无咎 君子吝
【六二】闚觀 利女貞
【六三】觀我生 進退
【六四】觀國之光 利用賓于王
【九五】觀我生 君子无咎
【上九】觀其生 君子无咎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운명을 믿고, 자기의 생활과 앞 길을 지배하는 주재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여 신에게 기도하여 구하려 하고, 점을 쳐서 복을 구하려 하고 재난을 면하려 한다. 아무런 혜안이 없는 나에게 누군가가 미래를 알려달라고 찾아와도 자신 있게 답해 줄 수 있는 미래가 있다. 당신은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여 말할 수 있다. 비가 내리고 있으면 정확히 언제 그칠지는 몰라도 분명히 그친다는 것은 알며, 찜통 같은 더위가 계속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추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 올 것을 장담할 수 있다. 공자께서 “과거를 돌이켜 미래를 살필 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논어 제2편 위정 제11장]고 하셨다. 유학은 신비한 능력으로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觀 盥而不薦 有孚顒若
통찰(觀)은 몸을 씻고(盥而) 마음을 정갈히 하여(不薦) 믿음으로서(有孚) 공경을 다하여야 한다(顒若).
  관(盥)은 제사를 시작하기 전에 몸과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을 말하며, 천(薦)은 제사 때 제물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깨끗이 하지만 제사를 드리는 중이라면 마음이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관이불천(盥而不薦)은 초심을 잃지 않는 깨끗한 마음을 의미한다. 불가에서는 수행으로 마음이 맑아지면 일반적이지 않은 6가지 신통한 능력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반면, 공자께서는 평범을 벗어난 궁벽한 이치를 찾고 괴이한 일을 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바른 마음으로 보다 넓은 안목을 가지게 될 수는 있어도 전생과 내생까지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에는 반대하셨을 것 같다. 어느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공통분모는 ‘마음이 맑아지면’ 안목이 넓어진다는 것 일게다.

 

童觀 小人无咎 君子吝
아이의 어리석음으로 바라보는 것은(童觀)은 소인에게는 허물이 없으나(小人无咎) 군자라면 어려워진다(君子吝).
  소인은 사사로움을 도모하고 제 한 가정을 잘 꾸리기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는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손해를 입지 않는가 하는 그런 정도의 어리석은 혜안이니 소인에게는 허물이 없다. 그러나 군자는 혜안을 그러한 사사로움을 도모하는데 쓰려는 사람이 아니니, 동관(童觀)을 도모하는 것은 어렵게 된다. 군자로서 맡은 바 사명을 잊지 말고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말라는 뜻이다.

 

闚觀 利女貞
엿보는 통찰(闚觀)은 여자에게는 끝까지 이롭다(利女貞).
  요즘 시대에 '예기'에 나오는 여성의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언급한다면 무척이나 강심장이라고 할 것이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르라'는 뜻처럼 여인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삶을 엿보면서 보살펴주는 ‘땅의 덕성’으로 살라는 뜻을 담은 것이 이 효이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구분한 것도 하늘이 성별을 가려 세상에 낸 이유가 있으니, 그 역할을 다하여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다. 이른바 조선조의 소인유(小人儒)들이 세상을 현혹시켜 여성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멸시하고 복종을 강요하였으나, 옛 성현의 진실한 뜻은 음과 양이 조화로움을 이루는 ‘중용’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觀我生 進退
자기의 생을 통찰하여(觀我生)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그 말이 의미하는 뜻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라는 것을 아는가를 지식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객관식용 시험에 맞추어진 교육의 폐단이다.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늘이 더 크게 쓰려고 시련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 하기에(하늘이 맡긴 사명을 거스르기 때문에) 힘들고 성과는 없는 것인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통찰력(觀國之光)을 가졌다면 임금으로부터 손님으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니 이롭다(利用賓于王).
  이름난 지자(知者)들은 천기를 헤아려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고 하는데, 주역에서도 그런 인물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나라의 영광까지를 내다볼 줄 아는 통찰력을 가졌다면 유비가 제갈공명을 삼고초려로 모시었듯 그렇게 귀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觀我生 君子 无咎
자기를 통찰할 수 있는(觀我生) 군자는 허물이 없다(君子无咎).

  군자와 소인의 사명은 다르다고 하였다. 소인은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고 군자는 사회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 자기를 통찰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소인이 아니라, 자기를 통찰하여 공공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군자여야 혜안을 가져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

 

觀其生 君子 无咎
타인과 다른 사물을 통찰하는 것(觀其生)도 군자라야 허물이 없다((君子无咎).
  바르지 못한 이가 혜안을 가진다면 세상은 더 어렵게 된다. 알려진 역사의 진실과 평가를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한명회에 대한 평가가 맞다면, 한명회가 혜안을 가짐으로써 세조가 권력을 찬탈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희생되었다. 자기 자신의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과 미래의 세상을 보는 혜안을 가졌더라도 군자로서 바른 도를 추구하는데 사용하여야만 허물이 없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