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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5. 14:42

한음등천(翰音登天)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3. 5. 14:42

  한음등천(翰音登天)은 『주역』중부(中孚)괘의 마지막 효사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한음(翰音)의 문리적 해석을 두고 논란이 있습니다. 한음(翰音)은 ‘닭’을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기』에도 ‘닭을 한음이라 일컫는다[鷄曰翰音]’라고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의리역학의 시초인 왕필의 해석을 따라 후대에도 한(翰)은 높이 날아오를려는 것으로 음(音)은 파닥거리는 소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닭이 하늘을 날아오르려고 한다’ 혹은 ‘날아오르려는 소리가 하늘까지 들린다’는 것은 ‘지나치고 과한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꿈깨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인용합니다. 닭이 날개가 있다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비꼬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그에 맞는 능력을 갖춰라’는 당부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욕심때문에 힘만 쓰는 꼴이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날아오를려고 파닥거리는 소리가 하늘까지 들리는 것이니, 상상을 해 보면, 불쌍하기조차 합니다. 과도한 욕망은 결코 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욕망은 더 높은 욕망을 낳을 뿐,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의 의미와는 정반대로,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닭이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것은 ‘기적이 이루어졌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날아오르려고 하는 소리가 하늘까지 들리면, 즉 하늘에 도달하는 열정이라면 이르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주역의 명언정리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주역』이 어렵다 생각되시는 분들께서는 명언들을 먼저 한번 훝어보신 후 주역을 접하신다면 조금은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역 64괘중에서 제 개인적으로 선택하여 딱 반(32개)만 추려냈습니다. 

고전으로 돌아가 지혜를 구하는 것은 고루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했는데,
온고(溫故)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미래로 나아가는 지신(知新)을 목적하지 못하기에
생겨난 편견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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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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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

눈이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목이 색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귀는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물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이를 포태할 수 없습니다.
말은 완전하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귀도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머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
상상만은 한계가 없습니다.


상상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되지 못하는 것은 없고
상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로
중용 제4장에서 앎과 모름을 지적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知者過之]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하구나 [愚者不及也]

그럼, 지나치지도 모자람도 없는 앎이란 무엇입니까?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재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것은 뭐가 무섭습니까?

‘앎의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사실은 더 무섭습니다.

재물은 있는 척 하더라도 금방 들통나지만,

아는 척 하는 것은 금방 들통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말 안다고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일으킵니다.

 

정치인 MB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정치인 KH의 속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속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속에 있는 속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아는척을 합니다. 그리고 타방을 미워합니다.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

말 잘하는 사람의 말재주에 걸려들어 냉정한 판단력을 잃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보다 특별하다'는 상상과 결부시킵니다.

나는 특별하고 너는 바보입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시비를 정확히 가립니다.

나는 특별하기에 의도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너는 한심하고 무지합니다.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미워하는 첫번째도 ‘짐작으로 다 안다는 사람’입니다.

자공아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추측하여 다 안다는 사람,

불손함을 용기라 하는 사람,

들추어내는 것만 정직이라 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논어 제17편 양화 제24장]

 

물 속에서 좀 더 오래 잠수할 수는 있어도
물 속에서 물고기처럼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성(性)이 가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성(性)에 의해
물 속에서 더 오래 잠수할 수 있는 차이가 있는 것인지,
나는 물속에서도 물고기처럼 살 수 있는 것인지
그 선을 분명하게 감지해 가는 것이 중용입니다.

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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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lleaf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성(性)을 따르는 것으로 관점을 돌려보겠습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하늘이 준 것을 한번 따져 보겠습니다.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닌 게 무엇입니까?
생명, 사람, 이세상, 남자, 부모님 등은 쉽게 보입니다.
도(道)의 '떨어질 수 없음'을 접목하여 안목을 넓히면,
생명만 준 것이 아니라 죽음이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남성만 준 것이 아니라 여성도 함께 붙어 있었음을,

나중에는 사람만 아니라 자연도, 다른 생명도, 다른 사람도 함께 붙여준 것으로 의미를 넓혀가야 합니다만,

지금은 제한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으로 들어와서 생각해 봅니다.
감정도 욕구도 지혜도 모두 하늘이 준 것입니다.

먹기 싫다고 먹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싫다고 자지 않을 수 없고,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정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입니다. 
 

가장 쉽게 정의하면 ‘태생적 한계’가 성(性)에 가깝습니다.

이쯤에서 장자의 설명을 빌려오겠습니다.
나를 엮고 있는 백개의 뼈마디와 아홉개의 구멍 오장육부들 중에서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게 있습니까?
하늘은 우위와 열위로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르게 만들어 역할을 달리하게 해 조화로움을 도모했습니다.

 

태생적 한계가 성(性)이지만,
태생적 한계가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입니다. 
눈과 귀가 똑같이 소중한데,
눈이 들을 수 없다고 속상해 하고,
귀가 볼 수 없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인간이 머리가 중용을 벗어나 만들어낸 것입니다.

 

성(性)을 따르는 욕구, 곧 도(道)와
성(性)을 따르지 않는 욕구, 도(道)가 아닌 욕구가 있습니다.

‘자기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인식이 그렇게 만듭니다.
나는 특별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다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해서 예뻐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서 로또에 당첨될 수 있습니다.

… 
나는 특별해서 새처럼 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와 너는 다를 뿐입니다.
나은 것도 있고, 모자란 것도 있고, 그렇게 다를 뿐입니다.
결국 함께 있습니다.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도(道)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성(性)을 따르는 것은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예시한 몇 가지가 아니라, 안목을 넓혀 더 많이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중용에서는 거짓과 위선을 걷어낸 순결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중용 제22장에서 말합니다.

오직 세상에서 가장 지극한 진실함(誠)으로서
그 성(性)을 다하게 할 수 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사람답게 살았다고 하는 평가에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다르게 부여받은 천명을 알고, 그 성(性)에 따라 내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고통스런 의무의 길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길입니다.

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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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小過 亨 利 貞 可小事 不可大事 飛鳥遺之音 不宜上 宜下 大吉

【初六】飛鳥 以凶

【六二】過其祖 遇其妣 不及其君 遇其臣 无咎

【九三】弗過防之 從 或戕之 凶

【九四】无咎 弗過 遇之 往 厲 必戒 勿用永貞

【六五】密雲不雨 自我西郊 公 弋取彼在穴

【上六】弗遇過之 飛鳥離之 凶 是謂災眚

  앞의 중부(中孚)는 중용에 바로 서 있는 것이지만, 소과(小過)는 모자라고(小) 지나쳐(過) 중용의 길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28번째 대과(大過)는 시기를 놓쳐 지나간 것을 말하는데 소과(小過)는 문자상으로는 대과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겨지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소과는 모자라거나(小) 지나쳐(過) 중용을 벗어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과(小過)괘는 중부(中孚)괘와 정반대의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小過 亨利貞 可小事 不可大事 飛鳥遺之音 不宜上 宜下 大吉

치우침(小過)은 인식이 있는 시기(亨利貞)에 생긴다. 조금 기울어짐은 괜찮으나(可小事) 크게 기울어짐은 불가하다(不可大事) 높이 나는 새가 그 소리를 남기니(飛鳥遺之音) 올라가면 마땅하지 않고(不宜上) 내려옴이 마땅하니(宜下) 내려온다면 크게 길하리라(大吉).

  중용을 벗어나는 것은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시기중에 형리정(亨利貞)의 시기의 일이라고 한다. 씨앗인(元) 상태에서는 중용을 벗어날 수 없다. 인식이 생김으로써 그 지혜가 지나치거나 모라라서 중용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본성은 가깝지만 학습으로 멀어진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장]고 하셨다. 중용에서 치우치는 것이 약간 기울어진 것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크게 기울어짐은 불가하다. 높이 나는 새가 그 소리를 남기는 것은 한계에 봉착했기에 힘이 부친 까닭이다. 한계를 알았으니 조금 기울어진 것이다. 한계를 느꼈음에도 더 올라가려 한다면 크게 기우는 것이 된다.

 

飛鳥以凶

계속 비상하려고 하니 흉하다(飛鳥以凶)

  계속 비상하려는 것은 욕심이다. 욕심이 과하기 때문이니 중용을 벗어난 것이요, 또한 계속 비상하려는 것은 제 자신의 분수를 모름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으니 제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중용을 벗어나는 이유는 제 자신을 모르고 욕심이 과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過其祖 遇其妣 不及其君 遇其臣 无咎

그 할아버지를 지나쳐(過其祖) 그 할머니를 만나고(遇其妣) 그 임금께 나아가지 못하고(不及其君) 그 신하를 만남은(遇其臣) 조금 지나친 것이지만 허물은 아니다(无咎).

  할아버지를 지나친 것은 과(過)했으나 할머니를 만났으니 그 뜻이 할아버지에게 전달될 것이요, 임금께 나아가지 못한 것은 모자랐으나(小) 그 신하를 만났으니 그 뜻이 임금께 전해질 것이다. 지나치고(過) 부족한(小) 것이지만 정도가 약하기에(小事) 허물은 아니다. 주역은 말하는 것 같다. 중용의 도가 최선이기는 하지만,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도 중용은 아니라고.

 

弗過防之 從 或戕之 凶

지나치지 않았을 때(弗過) 그것을 방지해야 하지만(防之) 지나침을 따르면(從) 혹 그것이 끝장날 수도 있으니(或戕之) 흉(凶)하다.

  모자란 것(小)은 다시 채울 수 있지만 지나친 것(過)은 그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끝장날 수도 있음이니 곧 “모자란 물은 채울 수 있지만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을 말함이다. 공자께서는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말씀하셨으나, 그 같다는 것은 중용의 도를 벗어난 것이 같다는 말씀이셨으며, 지나침과 모자람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모자란 것이 낫다고 하실 것 같다.

 

无咎 弗過 遇之 往 厲 必戒 勿用永貞

허물이 없이(无咎) 지나치지 않았는데(弗過) 점점 지나치게 되면(遇之) 그대로 나아가면(往) 위태롭다(厲) 반드시 경계해야 하니(必戒) 끝까지 계속하려고 하지 마라(勿用永貞).

  딱 한번만 더 하고 멈춘다고, 딱 한번만 더 하고 멈춘다고 하다가 그 선을 넘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을 경계한 말이다. 예를 들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술 한잔인 것 같다. 딱 한번만 더, 딱 한잔만 더 하면서 끝맺음을 하지 못하니 중용을 벗어나는 위태로운 것이다.

 

密雲不雨 自我西郊 公 弋取彼在穴

구름이 일어도 비가오지 않음은(密雲不雨) 나 스스로 어두운 서방에 있기 때문인데(自我西郊) 무왕(公)이 구멍에 피해있는 새를 활로 쏘아 잡았다(弋取彼在穴) 다소 모자랐다.

  옛 성현들이 제후의 신분으로 천자의 신하였었던 무왕이 천자인 주왕을 정벌한 것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칭송하지는 않았다. 공자께서도 마찬가지셨다. 상나라가 이미 덕을 잃어 주왕이 구멍에 피해있는 신세와 마찬가지였는데도 힘으로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왕을 참살하였기 때문이다. 중용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주역은 과(過)한 것이 아니라 조금 모자란 것(小)이라고 하고 있다. 주나라를 태동시킨 무왕을 변명하는 까닭인 듯 하기도 하다.

 

弗遇過之 飛鳥離之 凶 是謂災眚

만나지 아니하고 지나치니(弗遇過之) 새가 날아 이별하게 되니(飛鳥離之) 흉(凶)하다. 이것을 말하여 재앙(是謂災眚)이라고 한다.

  요(堯)임금이 아들에게 지위를 넘긴 것이 아니라, 덕이 있던 순(舜)임금에게 천자의 지위를 넘긴 것처럼, 상나라 주왕이 무왕을 만나 그 지위를 넘겼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니, 곧 한계에 다다른 새가 더 높이 날기 위해 비상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주역은 상나라의 멸망의 책임은 조금 부족했던(小) 무왕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과했던(過) 주왕 때문이라고 탓을 하니, 무왕의 정벌을 변명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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