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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의 눈처럼 머리 세어도
구름 사이 달처럼 맑자 하였죠.

들으니 그대! 두 마음이시기에
마지막 정(情)을 정리하려
이 술자리로 모십니다.

날 밝으면
개울가로 나가
물길을 따라
동과 서로 걸어가야겠네요.

처량하고 또 처량하겠지만
시집왔던 것이니 울지는 않겠어요.

한마음의 사람을 만나
백발이 되도록 헤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 낚싯대는 저리 하늘하늘하고,
어째서 물고기 꼬리는 저리 간들거릴까요?

사나이는 의기가 중한데,
어찌 재물에 휘둘리려 하나요?

白頭吟  -卓文君-

皚如山上雪  皎若雲間月
聞君有兩意  故來相決絕
今日斗酒會  明旦溝水頭
躞蹀御溝上  溝水東西流
淒淒復淒淒  嫁娶不須啼
願得一心人  白頭不相離
竹竿何嫋嫋  魚尾何簁簁
男兒重意氣  何用錢刀為


재벌 탁왕손의 무남독녀로 열일곱에 청상과부가 되었던 탁문군!

 
어느 날 사마상여라는 가난한 문인에 반해 (아버지의 반대를 피해) 도망을 쳤고, 이 절절한 사랑의 도피에 반한 중국 역사는 사분(私奔)이라는 단어가 유래토록 허락하였다.


소소한 물품을 팔아 조그만 주점을 운영하며, 곤궁해도 님과 함께라 행복했던 탁문군!


그 님이 장인의 재물을 물려받고
한무제의 신임으로 명성을 얻게 되니, 무릉의 한 젊은 첩을 얻으려 한다. 첩과 더불어 사랑을 나눌 것인가?


탁문군은 이별주로 정을 끝내자는 씩씩한 모습으로 울음을 숨기고 있다.

사내놈 마음이 낚싯대처럼 휘청거리고, 물고기 꼬랑지처럼 간들거린다고 비꼬면서도
......
재물에 팔려가는 것이라고 해야만 한다.


나만을 사랑함에도

재물에 눈이 멀어진 것이라 해야만 
님을 떠나 보낼 수 있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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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의 시(詩) - 남회근 선생 소개  (2) 201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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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念身不求無病
身無病則 貪欲乃生
是故大聖化人
以病苦爲良藥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병고를 양약으로 삼으라」하셨느니라.

二.
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 驕奢必起
是故大聖化人
以患難爲解脫
세상살이에 어려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없으면 교만하고 사치스러워지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경을 해탈로 삼으라」하셨느니라.

三.
究心不求無障
心無障則 所學躐等
是故大聖化人
以障碍爲逍遙
배움에 있어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움이 얕아지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장애를 걸림없이 노닐어라」하셨느니라.

四.
立行不求無魔
行無魔則 誓願不堅
是故大聖化人
以群魔爲法侶
수행하는데 마귀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귀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마귀를 도와주는 벗으로 삼으라」하셨느니라.

五.
謀事不求易成
事易成則 志成輕慢
是故大聖化人
以事難爲安樂
일을 도모함에 쉽게 이뤄지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이루어지면 뜻이 가벼워지고 오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어려움을 안락으로 삼으라」하셨느니라.

六.
交情不求益我
情益我則 虧失道義
是故大聖化人
以幣交爲資糧
남과 사귐에 있어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도의를 저버리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손해보는 사귐을 재산으로 삼으라」하셨느니라.

七.
於人不求順適
人順適則 內心自矜
是故大聖化人
以逆人爲園林
남이 내 뜻대로 복종하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복종한다면 마음이 저절로 거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거스르는 사람으로 동산의 숲을 삼으라」하셨느니라.

八.
施德不求望報
德望報則 意有所圖
是故大聖化人
以市德爲棄屣
덕을 베풀면서 보답을 바라지 말라.
덕이 보답을 바라면 계산하는 바가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베푼 덕을 헌신짝으로 삼으라」하셨느니라. 

九.
見利不求霑分
利霑分則 癡心必動
是故大聖化人
以踈利爲富貴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마음이 반드시 어리석어 지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도 부귀해지라」하셨느니라.

十.
被抑不求申明
抑申明則 人我未忘
是故大聖化人
以受抑爲行門
억울함을 당했다고 밝히려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려하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감내하여 수행의 문으로 삼으라」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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做天難做四月天 (주천난주사월천)

蠶要溫和麥要寒 (잠요온화맥요한)

出門望晴農望雨 (출문망청농망우)

採桑娘子望陰天 (채상낭자망음천)

하늘 노릇 해 먹기도 어려운 사월이어라

누에는 온기를, 보리는 냉기를 바라고

길손은 맑기를, 농부는 비 오기를 바라며

뽕잎 따는 아가씨는 흐리길 바라도다

 

출처 : 금강경강의 <남회근 저/신원봉 옮김> 17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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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큰 지혜로 마음을 피안으로 보내버리자는 경전

  마하(摩訶)는 초월적으로 크다는 뜻이며, 반야(般若)는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바라밀다는 수행입니다. 반야심경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주문을 숙지하고 외자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문은 나를 주체로 삼으면 저 언덕(세계)으로 가자는 것이며, 나를 객체로 하면 저 언덕(세계)로 보내 버리자는 것입니다. 완전히 보내버리자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내라는 것일까요? 망령된 마음입니다. '없앤다', '비운다', '내려놓는다', '벗는다' 같은 많은 표현이 있지만,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갇힌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라밀다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 표현으로는 잃어버린 본성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세음보살께서는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시고
5온이 모두 공(空)한 것을 꿰뚫게 되시어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나시었다.

  5온(五蘊)은 거듭 반복되므로 외워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5온(五蘊)은 ①색(色)수(受) ③상(想) ④행(行) ⑤식(識)을 말합니다. 

색(色)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受)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想)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행(行)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식(識)은 고정관념을 갖는 것입니다.

 

레몬이 있습니다. 그것은 색(色)입니다.
노란 빛깔과 상큼한 향기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수(受)입니다.
먹고 싶다 맛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상(相)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숨겨 놓습니다. 그 반응이 행(行)입니다.
레몬 맛이 남습니다. 레몬을 보면 침부터 고입니다. 이것이 식(識)입니다.

  관자재보살께서 하신 방법을 배워보겠습니다. ①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합니다. ② 그러면 이 5온이 모두 공(空)함을 꿰뚫게 됩니다. ③ 그러면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야!
색은 공과 다름이 없고 공은 색과 다름이 없으니, 색은 곧 공이요 공은 곧 색이다.
(5온의 나머지 4가지인) 수상행식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사리자는 처음에는 회의파 철학자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논리적인 면이 강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석가께서 사리자의 논리성을 고려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공(空)이라는 관념을 논리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컵에 물을 채운 후 무엇이 있느냐고 하면 대개는 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그것은 '지금'이라는 기준으로 했을 때 맞는 답입니다. '지금'이라는 기준을 놓아버리면 그 답은 어떻게 됩니까? 논리는 다른 한쪽을 받치는 상대성에 의존합니다.


  노자가 말했습니다.[도덕경 제2장]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면서 아름답다는 인식만 생겨난 줄 알지만, 추하다는 인식이 받쳐주고 있는 것이고, 착하다 하면서 착하다는 인식만 생겨난 줄 알지만, 못되다는 인식이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아주며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관념으로 여기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승찬스님이 말했습니다.

도(道)에 이르기가 어렵지 않으니, (나누어 한쪽을) 택하려는 마음만 버리면 됩니다[至道無難 唯嫌揀擇] 미워하고 사랑하는 (나누는) 마음만 없어지면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야! 이 세상의 모든 있다는 것의 실체가 공(空)이니,
생겨나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고,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느니라.

  살아간다는 관념은 뒤에서부터 기준으로 삼으면(관점을 바꾸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 되며, 저것은 또한 이것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저것과 이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란 상대적 개념이 없는 것, 그것을 일러 도(道)의 지도리라 한다. 중추가 되어야만 비로소 둥근 고리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어 무궁한 변화에 응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는 모두 공(空)으로 되돌아갑니다. 죽음이 어떠한지 모르면서 죽음을 괴롭게 여기고 두려워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100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데요.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그런 까닭에 공(空)의 입장에서는 색이 없으니, 수상행식도 없고,
눈귀코혀몸뜻도 없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향기, 맛, 촉감, 옳음 역시 없느니라.
보이는 것에서부터 생각하는 것까지 아무것도 없느니라.

  색-수-상-행-식은 앞서 관세음보살이 공(空)한 것임을 꿰뚫어 보셨다던 5온입니다. 장미가 붉습니다. 완벽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강아지의 눈에도, 나비의 눈에도 그리 보이겠습니까? 절대의 색깔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육체의 한계 내에서 보이는 색깔입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초식동물의 고기를 먹고, 순록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먹고, 올빼미는 쥐를 즐기네. 넷 가운데서 누가 '참으로 올바른 맛'을 아는 건가?

 

  사람이 완전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나를 가지기에' 오류를 갖습니다. 눈을 감고 눈의 간섭을 없애면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릴 수 있습니다. 느끼지 못했던 맛을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누적된 식(識)으로 인해 맛있게 '번데기'를 먹지만, 외국인들은 혐오스럽게 생겼다는 (識)에 의해 번데기를 보고서는 번데기를 쉽게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눈을 감기고 모른 채로 맛보게 하면 잘 먹기도 합니다. 

 

  노자가 말했습니다. [도덕경 제13장]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은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자신이 없는데까지 이를 수 있다면 무슨 근심·걱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어리석음도 없으며 또한 어리석음이 없는 것도 없으며
결국 늙는 것도 죽는 것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이 없는 것도 없느니라.

괴로움이 없으니 그 원인도 없으며 없앨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느니라.
깨달음이 없으니 또한 얻을 것도 없으며 얻지 말아야 할 것도 없느니라.

  어리석다는 것, 지혜롭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 괴롭다는 것, 깨달았다는 것, 그런 것들은 생각을 하므로 생겨납니다. 사람이라는 한계를 가졌기에 생겨납니다. 호랑이는 배가 부르면 더는 생명을 죽이지 않습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말했습니다. [도덕경 제20장]

배웠던 것을 끊어버리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어떤 이가 얘기합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더 좋았을 것을.' 내일 먹을 걱정이 없었으면 하는 지혜로운 생각이 오늘의 걱정을 만듭니다. 늙음을 모르고 죽음이 다가옴도 모른다면, 늙음이 안타깝고 죽음에 대한 걱정이 생길 리 없겠지요. 그렇다면, 공(空)을 말하는 석가, 무위(無爲)를 말하는 노자는 생각을 다 없애서 바보가 되라고 한 것일까요? 결국, 죽음을 찬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석가는 중생구제에 나섰고, 노자는 도덕경을 남겼고, 장자 역시 남화경을 남겼습니다. 비운다는 공(空)과 의욕 하지 않는 무위(無爲)는 허무의 관념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어차피 죽으니 애써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空)에서 끝남이 아니고 무(無)에서 멈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워지면 채워지기 시작하는 법이고 무(無)에서 다시 유(有)로 흐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의욕적이고 밝게 삶을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변만화(千變萬化)에 결코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그런 까닭에 보살께서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존하시어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되시었고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된 까닭에 두려움이 없게 되시었고
잃어버린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보게 됨으로써 열반에 이르게 되시었다.

  관세음보살께서는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마음을 붙잡는 것이 없게 되셨으니, 마음을 잡아두고 있는 것이 없게 되셨다고 합니다. '생각이 한번 바뀌는 것'으로서 열반에 이르게 되셨다고 합니다.

 

 맹자가 말했습니다. [맹자 고자 상 11.11]

배우는 도(道)가 다른 데 있겠는가? 자기의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일 뿐이다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존함으로써
아뇩다라 삼막 삼보리(완전한 해탈)에 이르시는 것이니라.

  관세음보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깨달은 분들께서도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궁극의 해탈에 이르게 되셨고, 이르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진리의 문은 완전한 믿음과 동행해야 열립니다. 사람은 자기가 언제 태어났는지 자신의 지혜로만 알 수 있습니까? 어머니를 믿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는 알아낼 수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결과로 따르는 것이겠지요. 요체는 참되게 믿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미움과 친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이 살기(殺氣)를 키우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를 믿으시건, 완전하게 나를 맡기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시오...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그러니 반야바라밀다를 알아야 한다.
이는 큰 신(神)이 되는 주문이며, 훤히 밝아지는 주문이며, 더 클 수 없는 주문이며,
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문이니,
능히 일체의 고통을 없애주며, 참으로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느니라.

  이 반야바라밀다가 법(法)은 아니어야 합니다. 좇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자 함도 욕(欲)이요, 하지 않고자 함도 욕(欲)입니다. 내려놓음, 비움, 피안으로 감도 자연(自然)이 아니라면 욕(欲)입니다. 

 

 승찬스님이 말했습니다[신심명]

있음을 버리려 하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함을 따르려 하면 공(空)함을 등지게 됩니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密多呪卽說呪曰
그러기에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씀하셨던 것이었으니, 이제 그 말씀하신 주문을 전해주려 한다.

  지금까지 반야바라밀다의 의미를 석가께서 설명했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글이 아니라 그 뜻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손가락 끝(글)을 보지 말고 가리키는 달(뜻)을 보라' 했습니다. 노자 역시 도덕경에서 '말이 없는 가르침'을 얘기합니다. 말이라는 표현수단을 보지 말고, 그 뜻(본질)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 아주 작습니다'라며 아쉬워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네가 안다고 생각하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야'라고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드러난 것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습니다. 글 역시 하나의 색(色)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보내어라. 보내어라. 피안으로 보내버려라. 피안으로 완전히 보내버려라.
그리하면 깨닫게 될 것이다.

보내어라. 보내어라. 피안으로 보내버려라. 피안으로 완전히 보내버려라.
그리하면 깨닫게 될 것이다.

보내어라. 보내어라. 피안으로 보내버려라. 피안으로 완전히 보내버려라.
그리하면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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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冥有魚
其名為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為鳥
其名為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
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摶扶搖 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것을 곤(鯤)이라 부른다.
곤(鯤)의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는 없다.
그 곤(鯤)이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이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붕(鵬)이라는 새가 솟구쳐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같다.
이 붕(鵬)이라는 새는
바다의 출렁임을 따라
남쪽 바다로 나아갈려고 하는데
그 남쪽 바다가 천지(天池)이다

「제해(齊諧)」라는 책은 그 뜻이 괴이하다.
적혀있는 말은 이러하다 :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나아갈 때에는
물결치는 것이 3천리에 이르고
회오리를 타고 9만리를 날아올라
반년이 지나서야 쉰다.'


  존재라는 것은 저 홀로 위대할 수는 없다. 계산으로 측정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곤(鯤)이라고 해도 북명이라는 바다가 길러주어야 하며, 어마어마한 붕(鵬)이라고 해도 남명이라는 바다가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곤은 붕이 된 것이며, 붕이 되면 왜 남명으로 날아가려 하는가? 

  곤이 붕으로 변한 것은 스스로의 뜻이 아니다. 남명으로 날아가야 하기에 하늘이 날개를 준 것이다. 하늘은 제 사명을 다했다. 그리고 선택권은 붕새에게 넘겨졌다. 과연 솟구쳐 날아오를 것인가? 그 길은 어마어마한 물결과 회오리를 동반하여 다시 잠잠해지지까지 6개월이 걸리는 힘든 여정이다.

  사람이 원초적 본성을 찾은 것이 붕새로 변해 날개를 가진 것과 다르지 않다. 솟구쳐 오르는 것은 수행을 의미하며 남명은 초월적인 세상을 상징한다. 곧 남명은 신선계요, 열반이다. 티베트에서는 완전히 자란 모습으로 태어나는 '가루다'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가루다의 새끼는 알 속에 있을 때 이미 완전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알을 깨고 나오기 전에는 결코 날 수가 없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불성의 발현으로 이야기한다. 세세한 차이는 있지만, 붕새의 비유와 닮아있다.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為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里
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掊風
背負青 天而莫之夭閼者
而後乃今將圖南
아지랑이와 먼지는
생물이 불어내는 입김이다.
하늘이 푸르른 것은
저 하늘 본래의 색이던가?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인가?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보아도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대개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한 잔 물을 뜰의 패인 곳에 부으면
지푸라기는 띄워지겠지만
술잔을 띄우면 가라앉고 만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큰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쌓인 것이 깊지 않아도
저 붕새의 큰 날개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구만리는 되어야
바람이 그 밑에 있게 되고
그 후에야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채 걸림없이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붕새가 남명으로 날아가는 여정은 깨달음의 길. 소요유(逍遙遊)! 속된 세상을 초월하여 아무런 걸림없이 참된 자유의 세계에서 노니는 지인(至人)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다. 물이 깊어야 큰 배를 띄울 수 있고, 높이 솟구쳐야 바람을 탈 수 있는 법. 큰 고난과 큰 시련이 동반되는 험난한 길일게다. 불행의 깊이가 깊지 않은 사람은 행복의 깊이도 얕은 법! 구만리를 솟구쳐 깊게 쌓인 바람을 타고 대도(大道)의 세상으로 날아가야 한다.

 

蜩與學鳩笑之曰:
‘我決起而飛 槍榆枋而止
時則不至而控 於地而已矣
奚以這九萬里而南為?’

適莽蒼者
三餐而反 腹猶果然
適百里者 宿舂糧
適千里者 三月聚糧
之二蟲又何知!
매미와 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힘써 날아올라야 느릅나무와 박달나무에 이른다
때로는 그곳조차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지고 마는데,
어찌 9만리를 날아올라 남쪽으로 갈 수 있다는가?”

가까운 들판에 나가는 자는
세끼를 먹지 않아도 배를 유지할 수 있지만
백 리를 가는 자는 밤새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 리를 가는 자는 3개월분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을
이 두 벌레 같은 것이 어찌 알겠는가?


  매미와 비둘기도 날개가 있다. 그러나 날개가 있다고 다 남명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낮은 식견에 붕새의 날개를 제 가진 날개인 양 생각한다. 노자도, 공자도 조롱을 받았다. 예수는 죽임을 당했다. 본래 바둑고수는 하수를 조롱하고 비웃지 않는다. 하수를 조롱하고 훈수를 두는 것은 작은 날개를 달고 있는 급수들이다. 장자가 일갈한다. 벌레같은 것들이 무엇을 안다고 까부느냐!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奚以知其然也?
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
此小年也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為春 五百歲為秋
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為春 八千歲為秋
此大年也


而彭祖
乃今以久特聞
眾人匹之
不亦悲乎!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게 산 것은 오래 산 것에 미치지 못한다
어떤 것이 소년(小年)과 대년(大年)인지 아는가?
아침만 사는 버섯이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하니
이런 것들이 소년(小年)한 것이다.


초(楚)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 불리는 거북이 있었는데
5백년을 봄으로 삼고 5백년을 가을로 삼고 살았다
오랜 옛날에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8천년을 봄으로 삼고 8천년을 가을로 삼고 살았다.
이런 것들이 대년(大年)한 것이다. 


그럼에도 8백년을 살았다는 팽조(彭祖) 따위를
오늘날까지 오래 살았다며
사람들이 그와 같아지고자 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장자는 말한다. "까불지 말거라. 적어도 3만년을 넘게 산 대춘정도는 되어야 오래 살았다고 할만하지, 고작 8백년을 산 팽조따위를 오래살았다고 하느냐!" 참고로 장자가 오래 사는 것을 높인다고 오해하여 '불로장생'사상이 도교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장자도 백년을 못 넘겼다. 많아야 80이라고 추정한다. 

 

湯之問棘也是已.
湯問棘曰 :
’上下四方有極乎?’
棘曰 : 
‘無極之外 復無極也
窮髮之北有冥海者
天池也
有魚焉 其廣數千里
未有知其脩者
其名為鯤
有鳥焉 其名為鵬
背若泰山
翼若垂天之雲
摶扶搖羊角而上者九萬里
絕雲氣
負青天 然後圖南
且適南冥也’

 

斥鴳笑之 曰 :
’彼且奚適也?
我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翱翔蓬蒿之
此亦飛之至也間
而彼且奚適也’


此小大之辯也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鄉
德合一君
而徵一國者
其自視也亦若此矣 

탕왕(湯王)이 신하 극(棘)에게 물은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탕왕(湯王)이 극(棘)에게 물어 말하기를
”상하사방이 끝이 있는가?”
극(棘)이 말하기를
”끝없음의 바깥에 다시 끝없음은 없습니다.
궁발(窮髮)의 북쪽에 명해(溟海)라는 바다가 있는데
천지(天池)라고 합니다.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크기가 수 천리나 되어
그 길이를 아는 자가 없는데
곤(鯤)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거기에 새도 있는데 붕(鵬)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등은 태산만 하고

날개는 하늘에 뒤덮은 구름과 같은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솟구쳐
구름을 벗어나
푸른 하늘을 등진 후 남쪽을 향하여
남쪽 바다로 간다고 합니다.”

 

메추리가 이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것들은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내가 힘껏 뛰어올라 보았더니
몇 길 못 오르고 내려와
쑥대밭 속에서 펄떡거려야 했는데
이까지가 최고로 오를 수 있는 것이던데
저것들은 어디까지 오른다고 저 짓이냐.”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다.
그러기에 무릇 지혜가 한 관직 정도 맡을만하고
행실이 한 고을 사람들이 알아줄 정도이고
덕은 한 임금의 마음만 만족케 할 정도이고
능력은 한 나라에 쓸모 있을 정도임에도
스스로 뽐내는 것은 이 메추리와 같은 것이다.


  같은 얘기의 반복이다.

 

而宋榮子猶然笑之
且舉世而譽之而不加勸
舉世而非之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竟
斯已矣
彼其於世未數數然也
雖然 猶有未樹也

夫列子御風而行
泠然善也 旬有五日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
彼且惡乎待哉!

송영자(宋榮子)는 이런 자들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는 세상이 그를 칭찬한다고 해서 열심히 하려 하지 않았고
세상이 그를 비난한다고 해서 그만두려 하지 않았으니
안팎의 구분을 정할 수 있었고
영예와 굴욕의 경계를 구분하였으니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직 흔치 않지만
비록 그렇다 해도 자라지 못한 나무와 같다.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원함이 좋아서 보름이 지나서야 돌아오곤 했다.
그처럼 복을 받은 사람이
여전히 흔하지는 않다
그러나 비록 걷는 것을 면했다 하여도
여전히 의지할 바람이 있어야 한다.


만약 저 천지의 바른 기운을 타고
천지의 대기운인 육기(六氣)의 변화에 맡겨
무궁에 노니는 자라면
그는 기댈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천지의 대기운인 육기의 변화에 맡겨 무궁에 노니는 자라면 그는 기댈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그러기에 말하였다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신인(神人)은 이룸이 없고,
성인(聖人)은 이름이 없다.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이룸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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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4. 16:37

도덕경(道德經) 제1장 간상(赶上)/노자(老子)2013. 1. 4. 16:37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無名 天地之始 (무명 천지지시)
有名 萬物之母 (유명 만물지모)

故 常無 欲以觀其妙 (고 상무 욕이관기묘)
常有 欲以觀其徼 (상유 욕이관기요)

此兩者 同出而異名 (차량자 동출이이명)
同謂之玄 (동위지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 常(상) ≒ 영원한. 불변의.


▣ 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로 끊어 해석하면, '무욕으로서 묘(妙)를 보고 유욕으로 요(徼)를 본다'

▣ 觀(관) ≒ 꿰뚫어 봄.
▣ 妙(묘) ≒ 말하기 어려운 오묘함.
▣ 徼(요) ≒ 현상으로 나타남

▣ 玄(현) ≒ 아득한 심오함 

도(道)를 도(道)라 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도(道)일 수 없고,
무엇을 이름으로 부를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이름일 수 없습니다.

이름없음에서 천지가 시작 되고,
이름있음에서 만물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참된 무(無)로서 그 신묘함을 보고자 하며,
참된 유(有)로서 그 나타남을 보고자 합니다.

이 무(無)와 유(有)도 함께 생겨나 이름이 다른 것입니다.
함께라고 하니 아득합니다.
아득하고 아득함이 모든 신묘함의 문입니다.

 

  영원불변의 도(道)가 도(道)라는 이름을 갖는 순간 그것은 진정한 도(道)가 아니게 됩니다. 진정한 도(道)는 명칭과 형상이 끊어져 말로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시작은 이렇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내(노자)가 도(道)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완전한 도(道)일 수 없음을 참작하고 들으세요."

  귀로 듣지 말고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통(通)하라는 당부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금강경의 상(相)에 관한 개념으로 대체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도(道)라는 상(相)에 사로잡히면 진리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죠.

무릇 모든 상(相)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

  노자는 무(無)로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무(無)라고 이름 한 것일 뿐, 불교의 공(空)이나 다른 종교의 신(神)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모두 가리키고 있는 곳은 마찬가지니까요. 가리키는 손가락만 다를 뿐.

 

  무(無)로부터 나온 천지라는 이름이 하나를 낳고 둘을 낳고 만물을 낳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입니다. 도덕경 제42장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슬픈 현실이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이름입니다. 나타나는 것은 다 그러합니다. 만나고 헤어집니다. 생겨나서 소멸합니다. 드러나는 현상의 측면은 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노자는 무(無)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노자는 말합니다. 무(無)와 유(有)를 함께 일통하여 하나임을 보자고 합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나지만, 그 무(無)는 유(有)가 있어야만 무(無)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서로가 서로를 이루고 있음을 보자는 말입니다. 무(無)와 유(有)가 서로서로 이루고 있음을 보는 것이 모든 신묘함을 풀어줄 열쇠라고 합니다.

  앞에 언급한 금강경 사구계와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상(相)을 유(有)로 바꾸어 볼까요? '유(有)가 유(有)가 아님을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 여래(如來)는 진리, 도(道), 불(佛) 무엇으로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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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學而不思則罔]
-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게 된다 [思而不學則殆]


  계속 반복하며 이어지는 한 쪽으로 모나게 치우지지 말라는 중용(中庸)의 가르침을 전하는 장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판단력이 없어질 것이다. 유가의 후학들은 공자를 존경해도 신(神)으로 여겨 무조건 숭배하지는 않았다. ‘공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논어는 이렇게 가르쳤기에 왕양명은 ‘마음에 비추어 옳지 않다면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어도 옳다 할 수 없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성리학의 시대에는 유학 경전을 해석한 주희가 신(神)이 되기도 했다. 조선중기 이후는 주희의 해석에 따르지 않았다고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죽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였다. 본래 유학은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반면, 배우지 않고 생각으로만 다 통하려고 하는 것도 치우침이다. 옛말에 ‘한양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이 한양에 가본 사람을 이긴다’고 하는 말과도 통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쌓이면서 강해지는 욕구라고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와 마찬가지로 ‘모르겠습니다’를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정자의 잊지 말아야할 배움의 다섯가지가 떠오르는 장이다.

①널리 배우고 ②깊이 묻고 ③신중하게 생각하고 ④분명하게 판단하고 ⑤독실하게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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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군자는 널리 어울려 편애하지 않고 [君子周而不比]
소인은 편애하여 널리 어울리지 못한다 [小人比而不周] 

   본래 유학의 시각에서는 군자와 소인은 우월의 관계는 아니다. 군자와 소인은 서로 잘난 점도 있고 못난 점도 있다. 유가의 중용(中庸)철학은 좋고 나쁘다는 우열의 관계로 떼어놓는 사상이 아니라 ‘다르다는 분별후 조화’를 도모한다. 서로가 조금 낫고 조금 못난 점이 있으며, 때에 따라 가진 특성이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두루 어울릴 수 있는 것’도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중용(中庸)의 사상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두루 어울릴려고 고집하는 것도 ‘좋은사람 컴플렉스’에 걸리는 일이다. 그래서 공자는 ‘가는 길이 다르면 함께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했다.

  반면 편애하는 것도 나쁘다고만 보지 않는다. 어머니가 자식을 우선 챙기는 것은 성(性)의 발현으로 당연하다고 본다. 자기-가족-사회로 확장되는 유가철학은 편애도 무조건 나쁜것으로 보지 않기에, 묵가의 후학들로부터 차별적 사랑이라며 집중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문제는 편애가 아니라 편애가 지나쳐 갈라서고자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유가의 사고이다. 그래서 나와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즐겁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르고 다른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미워하고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로 나아간다. 옛 시대에는 사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나 말과 문자도 하나의 표현방법에 불과할 것이다. 그림과 사진과 영화와 음악은 어찌 철학을 표현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소재를 열심히 관찰하여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미술가의 마음, 곡식의 특성을 열심히 헤아리는 농부의 마음도 역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린다’는 인(仁)의 마음으로 통해 갈 것이다. 

  물론, 공자의 제자들이 군자(정치인, 공무원, 지성인)가 되기를 원하던 까닭에 본래 이 장의 무게감은 군자에게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널리 어울리려 하면서 그 지나침도 경계하지 않으면 소인이 된다고 하는 뜻으로 해석하면 충분하다. 소인을 멸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자극하여 분발하도록 만들기 위해 선택한, 제자들을 헤아리는 학습법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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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군자를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子貢問君子 子曰:]
- 말에 앞서 행하려 하고, 행하려는 바를 좇아서 말해야 한다 [先行其言而後從之] 

 

   자공의 (실천보다) 말을 잘 하는 단점을 일깨워 준 것이라고 한다. 논어는 제자의 특성을 헤아린 맞춤식 답변이 대부분이다. 자공은 말 잘하고, 영민하며, 명랑함이 잘 드러나는 제자였다. 

  유학은 ‘실천행위’에 의의를 두는 학문이다. 그래서 ‘삶이 무엇이냐, 나는 누구인가’의 존재의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보편원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하는 자기의 길을 구하기 위해 나아간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도 말만 번지르한 사람을 미워하고 무시하는데 응용하면 안되며, 스스로에게 요구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유학의 제1조를 자기를 닦는다는 수신(修身)이라고도 했기에.

  유학이 중시하는 행위는 완성되고 갖추어진 행위는 아니다. 본래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는다. 운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의 완성이 있을까? 배움을 쉬면 안된다고 하는 이유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유학에서 의미하는 행위는 ‘완성을 향해 의욕하고 노력하며 나아가는 행위’이다. 그래서 이 장은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는 하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을 말하여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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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君子不器]

 

   이 장은 '공야장'편의 자공과의 문답이 연상되어 웃음짓게 한다.

자공이 여쭈었다 - 저는 어떤가요?
공자 말씀하셨다 – 너는 그릇이지
자공(상한 기분으로)이 여쭈었다 – 어떤 그릇인데요?
공자 말씀하셨다 – 너는 제사에 쓰는 옥그릇이지

  자공을 골려주려고 농담을 한 것인데, 자공이 그릇이라면 어떤 그릇인지 따지듯 되묻는 까닭이 이 장에서 처럼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유학이 추구하는 사회는 역할을 분담하여 조화를 이루는 사회였다. 과거에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살림을 하는 것은 일을 분담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름으로 나누어 할 일이 다르다고 하였으니 곧, 유학에서 말하는 명분론(名分論)이었다. 남편은 남편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그 이름값을 다 하라고 했다. 군자 역시도 군자다워야 한다.

  그런데 이 이름으로 나뉜 역할 분담을 조화를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나는 돈을 벌어오는 기계야?’ ‘나는 살림을 하는 기계야?’라고 불만이 생기게 된다. 그러니 조금 풀어서 ‘군자라는 이름은 도구(부품)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유학은 ‘쉬는 것’과 ‘일하는 것’도 중용(中庸)의 길을 찾아간다. 할 일이 없는 것, 더 이상 누구를 위해 필요없는 존재가 되는 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본다. ‘이제 당신이 필요없어. 당신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아’라고 하면 완전한 해방감을 느껴 새처럼 자유로울까?

  이 장을 다시 말하면 ‘해야 할 (군자)의 도리에 즐거운 사명감을 느껴라’로 바꾸고 싶다. 유학의 실천행위는 남편의 도리를, 부모의 도리를, 자식의 도리를 의무감으로 억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당신의 남편일 수 있어서 고맙고, 내가 너의 부모일 수 있어서 고맙고, 내가 부모님의 자식일 수 있기에 고맙다는 마음으로 즐겁게 가는 길이었다. 맹목적으로 믿게 만들어 공자가 의무를 이행하도록 주입시키려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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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과거를 돌이켜 미래를 알게해야 [溫故而知新]
- 스승이 될 수 있다 [可以為師矣]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이미 고사성어가 된 말로, 과거의 ‘축적된 경험’을 미래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로 흔히 인용한다. 역사와 고전을 배우는 것은 과거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또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유학은 많이 기억하는 지식의 저장 창고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누가했는지 모르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 사람과 그 말을 알아도 ‘너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을 자기에게 응용하지 못하는 배움을 경계한다.

  미래를 아는 지신(知新)은 미래의 세상을 훤히 내다보는 점쟁이처럼 되라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 스스로 자기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고,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스승, 부모, 어른)도 그리 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때로는 많이 경험해보고 완전한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예견된 실패를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언제나 성공만 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작은 실패조차 두렵게 하여 자생력을 잃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끌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해야 하는 중용(中庸)의 기준선을 벗어나면 삶을 풍부하게 살지 못하도록 새장에 가두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아이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리는 인(仁)으로 나아가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스승, 부모, 어른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학생이, 자식이,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서가 아니고, 혀를 차며 걱정할 정도로 요즘 아이들이 어긋나서도 아니고, 다가가서 마음으로 교감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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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그 행위(현재)를 보고 [視其所以] 
동기(과거)를 살펴보고 [觀其所由] 
바램(미래)을 통찰해라 [察其所安] 
어찌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人焉廋哉]
어찌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人焉廋哉]

 

  인(仁)은 다양하게 정의하며 그 개념 논쟁도 많지만, 정서를 중시하는 측면에서 ‘참된 사랑’이라고 쉽게 정의하기도 한다. 그 뜻을 조금 더 풀어서 ‘남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헤아려 관계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본래 자신의 속마음도 정확히 몰라서, 왜 내가 이러는지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는데, 어찌 남의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말일까? 그것에 대한 답이 되는 장이기도 하다.

  ‘다름의 분별후 조화’를 핵심으로 하는 중용철학은 한계와 가능 역시 마찬가지로 분별한 후 조화를 도모한다. 사람은 날 수 없다(한계). 사람은 도구를 만들 수 있다(가능). 그래서 스스로는 날 수 없지만 비행기를 만들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불가능을 가능과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 인위(人爲)라는 측면인데, 이러한 관념은 무위(無爲)를 주장하는 노장사상의 후학들에게 집중공격을 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학에서 판단하는 사람이 사람의 속마음까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한계이다. 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짐작이다. 그래서 조화를 도모하여, 최대한 짐작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 장에서 말하는 ‘헤아림’이다. 최대한의 짐작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상대방의 과거부터 열심히 살펴주려는 노력이다.

  과거(동기)는 현재와 미래를 이끄는 힘이 있다. 담배를 처음 피우고 난 후, 나쁜일을 하고 난 후, 손찌검을 하고 난 후, 그 이후에 그 행위가 보다 수월하게 행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과거의 경험은 현재와 미래로 연결시키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좋지 못한 일 뿐 아니라 좋은 일도 그러하다. 그래서 처음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두번부터는 쉬워진다. 이 과거(동기)를 헤아린다는 것은, 그렇게 습관화되어 나와 경험이 다른 까닭에 나와 생각과 취향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미국인이기에 마늘냄새가 역겨울 수 있고, 먹기 싫어 하겠다는 짐작을 우선 하는 것은 내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알아서가 아니라, 그가 지내온 과거(동기)를 추측하여 나와 다를 수도 있겠다는 배려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권해야 하나? 대화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란 미국인일 수도 있고, 마늘을 경험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사를 확인해서 마늘을 먹고 싶다고 하면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있나? 권하는 여인이 미인이라 먹고 싶은 척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에 무게를 둔다. 이 세상이 모두 착한 사람만 살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유학의 사유이다. 다만 최선을 다하여 노력한다는 것이다. 논어 후반부 18편에 많이 나오는 공자에게 ‘불가능임을 알면서도 하려는 자’라는 은자들의 조롱을 제자들이 논어에 꺼리낌없이 실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유학은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려는 ‘실천행위’에 의의를 둔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공자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지동설을 알았던 것도 자동차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의 시대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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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내가 안회와 종일 얘기했는데 [吾與回言終日]
다른 의견이 없어 어리석다고 여겼다 [不違如愚]
그 이후에 사생활을 살펴보고 [退而省其私]
도리어 내가 깨우치게 되었으니 [亦足以發]
안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다 [回也不愚]

 

   안회에 대한 공자의 감탄은 여러차례 나온다. 본래 유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길러준다는 관계였다. 중용이 말하는 조화(和)로움의 사고이며, 논어의 첫 장부터 강조하고 있는 더부는 즐거움(樂)의 사고이다. 유학은 본래 단절이 없었고 ‘함께’를 지향했는데, 스승은 가르칠 것만 있는 사람이어야 마땅하고, 학생은 배울 것만 있어야 마땅하다는 권위적 관계로 어긋나 버렸다.

  공자는 전지전능함이 없었기에 신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모자란 것도 있고 나은 점도 있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앉아 걸식하는 걸인이라고 해도, 하는 일 없이 앉아 있기 경쟁을 해 보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유학은 묻는다. 사람이 아는 것이 있어 봐야 얼마나 알 것이며, 사람이 잘난 것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잘날 수 있겠는 지를 묻는다. 유학이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는 분별 후 조화’를 모색하는 사상이다. 우월함, 존귀함 그런 것은 없다. 내가 나은 것으로 보태주려 하고 내가 모자라는 것은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중용(中庸)의 조화로운 어울림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장은 공자께서 안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반성이다. 안회는 스승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있었는데, 공자는 안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회가 공자보다 더 뛰어난가? 안회도 또한 공자보다 나은 점이 있었고, 모자란 점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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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가 효에 관해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子夏問孝 子曰:]
인상을 찡그리면서 [色難]
일이 생기면 대신 일하고 [有事弟子服其勞]
술과 음식을 먼저 드시게 한다고 [有酒食先生饌]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曾是以為孝乎?]

 

  앞의 자유의 대한 답변과 의도하는 뜻은 유사하다. 마음의 발현이 아닌 억지로 하는 효행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신다. 아마도 자유는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것에 치중했고, 자하는 종종 짜증스런 표정을 드러내곤 하였기에 공자께서 지적해 준 것으로 추측하곤 한다.

  그렇다면 정말 짜증스러운데 즐거운 척 하는 것은 위선이기에 잘못이며 나쁜 것일까? 유학의 철학인 중용(中庸)의 사유에서는 꾸밈을 무조건 추하게 보지 않는다. 이상적인 것은 마음의 발현에서 오는 효행이겠지만, 부모님의 마음을 편히 해 드리기 위해서라면 연기를 하는 것도 긍정한다.

  새가 특별히 부여 받은 날개를 쓰지 않고 걸어다니는 것이 자연(自然)이 아닌 것처럼, 특별한 지능을 부여받은 인간이 머리를 쓰지 않는 것도 자연(自然)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행위 측면에서의 예(禮)의 꾸밈은 ‘행동이 마음을 이끄는 힘’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도덕으로 따르게 한 측면이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남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리는 인(仁)함을 추구하는 뜻이 있기도 했다.
  
  표정을 밝게 하는 것이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내 자신에게 합리화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표정이 밝지 않으면 부모님께서 어떤 마음이실까를 먼저 헤아리는 마음에서 꾸미는 표정이기에, 외형상 거짓인 꾸밈이지만 인(仁)을 행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거짓말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착한 거짓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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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효에 관해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 子游問孝 子曰:]
오늘날 효라는 것이 봉양을 잘 하는 것이라 얘기하곤 하는데 [今之孝者 是謂能養]
개나 말도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至於犬馬 皆能有養]
공경함이 없다면 (개와 말과 부모님이) 어찌 다르다 하겠는가 [不敬 何以別乎]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말씀이다. 물질적으로 봉양을 잘 한다고 해서 효행을 다했다고 여기는 것은, 부모님을 기르는 개나 말 취급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하신다.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공경하는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애완견을 잘 먹이면서 사람보다 더한 애정을 주고 받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애정과는 또 어떻게 다르다는 뜻일까?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맹자 진심 상 13.37]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먹여주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짐승으로 기르는 것이요, 사랑은 있으되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를 짐승으로 사귀는 것이다.

 
  다소 추상적인 얘기지만
경(敬)에는 신성하고 두려운 정서가 포함된다. 공포가 아니라 존경과 숭배에서 발현되는 두려움의 감정인데, 이것은 이해해야 하기보다 체험해야 할 영역인 것 같다. 유학에서 경(敬)이라는 개념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인데, 대강 경외와 숭배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정도의 관념을 가지고 앞으로 경(敬)에 대해서 접근하시면 좋을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만 보면 어려울 것이 없다.
부모님께 단지 물질적으로만 잘 봉양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가? 그점을 자문하면 쉬이 가슴으로 공감이 되는 가르침일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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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무백이 효에 관해서 묻자 [孟武伯問孝]
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 부모님께서 오직 (너의) 병만 걱정하게 해 드려야 한다 [父母唯其疾之憂]

 

  마지막 부분의 해설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장이다. 공자의 대답은 묻는 제자들마다 다르셨기에, 저 제자는 어떤 사람인지, 저 상황은 어떤 상황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확실한 기록이 많지 않아서 상상을 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많다.

 
  맹무백은 앞 장에서 말한 맹의자의 아들인데, 권력을 전횡하던 3가의 한 명인 맹의자였지만, 공자의 학식은 인정하여 아들을 공자에게 배우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맹무백은 시호의 무(武)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자로와 마찬가지로 용맹이 지나쳐 주변을 걱정시키는 제자였다고 한다. 그런 성격 탓에 싸우다 다치지 않을까 늘 걱정을 끼쳤기에 말해준 것으로 해석하는 쪽이 유력한 것 같다. 이 외에 '부모는 (자신의  병이 아니라) 자식의 병만 근심하신다', '부모께 다만 자식의 질병만을 걱정하도록 해 드려야 한다'는 등등의 해설이 있다. 

  어쨌건, 효(孝)의 본질은 ‘부모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려야 한다’는 인(仁)의 관계함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자식에게 연기할 때는 어떤 배우보다도 더 완벽하게 하신다고 한다. 들통나면 자식이 맛있게 먹지 못할까봐, 정말 소화가 잘 안되시는 것처럼 완벽히 연기하시는 힘이 있으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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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의자가 효에 관해서 묻자 [孟懿子問孝]
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 [無違]
번지가 수레로 모시자 공자 말씀하셨다 [樊遲御 子告之曰:]
-맹의자가 내게 효에 관해서 묻기에 어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번지가 물었다 [樊遲曰:]
-무슨 뜻인지요? [何謂也?]
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살아서는 예로 받들며, 죽어서는 예로 상을 치루고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예로 제사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祭之以禮]

 

   상상해보면 재미난 대화이다. 상황설명을 하자면, 맹의자는 노나라 군주(제후)를 업신여기며 군주(제후)만이 할 수 있는 예(禮)뿐 아니라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예(禮)까지도 행하던 노나라의 실권을 가진 3가중 한 명이었다. 그가 공자를 청해 효(孝)에 관해 물은 것이다. 추측건대, 공자는 더 자세히 물을 줄 알고 압축하여 얘기했는데 맹의자가 알아들은 척 하며 더 얘기를 들어주지 않은 것 같다.

  맹의자의 신하가 되어있던 제자 번지가 공자를 운전해서 바래다 주는데, 맹의자에게 전해주라는 의미로 번지와 대화를 하고 있다. 그냥 바로 얘기하면 될 것을, 굳이 번지가 질문하도록 유도하여 대답을 해 주는 공자가 재미있다. 호기심 많았던 번지도 맹의자처럼 변했을까 확인하려는 의도였는지, 묻기에 답해주는 것으로 체면을 세우고 싶어서였는지 그 속내는 물론 알 수 없다. 번지가 가볍게 질문을 하니, 기다렸다는 듯 열심히 설명해주는 공자는 정감이 가는 캐릭터이다. ^^

  이 장도 논어의 다른 대부분의 응답과 마찬가지로 효(孝)가 무엇이다는 일반원칙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맹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적해주는 눈높이 맞춤식 답변이다. 어쩌면 맹의자에게 ‘당신이 효를 행하고 싶으면, 예부터 바르게 행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번지에게 주군을 그렇게 되도록 모시라는 가르침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논어는 상황을 상상할 수 밖에 없고, 궁금함이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인 것 같다.

  예(禮)는 형식이 아니라 실질[마음]이 근본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차례 언급하였지만, 여기서는 형식을 따르는 것도 중요함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억지로라도 착한 행동을 반복하면 착한 마음이 생길까? 나쁜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나쁜 마음이 생길까? 행위가 마음을 이끌수도 있다는 것이 유학적 사유이다. 그래서 예(禮)는 담고있던 마음이 외부로 표현되는 것임과 동시에, 마음을 조절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논어의 후반부쯤에서 조금 더 깊게 논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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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나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
30살에 자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三十而立]
40살에 의혹이 없어졌고 [四十而不惑]
50살에 천명을 알게되었고 [五十而知天命]
60살에 귀가 순해졌고 [六十而耳順]
70살이 되어서야 마음가는대로해도 [七十而從心所欲]
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不踰矩]


   논어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장이다. 칼로 자르듯 그 나이에 딱 그리 되었다는 것은 아니며, 제자들에게 나이를 기준으로 성취해야 할 목표를 일러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40살이 되어서 의혹이 없어졌으니 나는 5년정도 늦어도 만족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 제자들은 없었고, 40이면 나도 선생님처럼 의혹이 없어야 겠다고 각오를 다지게 했던 게 공자학의 한 매력이었다. 공자는 신이 아니라 먼저 태어나 경험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일 뿐이었으며, 우월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이해시켰기에 제자들은 공자의 나이라면 공자와 같아질 수 있어야 하겠다며 노력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어른과 스승에 대한 공경은 무조건적 복종이 아니라 앞선 경험을 존중한다는 의미였으니, 오늘날처럼 '너 몇살이냐' 혹은 ‘내가 누구이냐’를 강요해 무조건 숙이라는 군대식 복종과는 달랐었다. 나이와 지위에 관계없이 개인의 인격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경은 나이와 지위를 내세워 복종을 강제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저절로 표현하는 것이 존경이며, 존경을 받으면 우월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먼저 태어났을 뿐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화답하는 것이었다. 나이의 지칭에 대한 의미를 자세히 적으려면 상당한 분량이 될 것이고, 논어의 다른 장에서도 반드시 언급해야 하니 여기서는 간략히 정리하며 지나갈까 한다.

지학(志學)이라 하는 15살로 대표되는 청소년기에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깨우치는 공부를 시작할 나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적성과 재능을 가늠하며 사회에 어떤 일원이 될 것인가 하는 꿈을 찾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성적에 맞추어 의대와 법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은 먼저 찾은 후 배울 곳(대학)을 찾는 것이 순서임을 다들 아는데...

이립(而立)이라 하는 30살은 자립(立)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자리를 잡은 상태, 토대가 마련된 상태이다. 본래는 학문의 근본이 세워진 상태를 말했던 것이겠지만,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아마에서 프로가 될 수 있는 반석을 마련한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려고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불혹(不惑)이라 하는 40살은 마음이 혼란으로 흔들리지 않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삶이 늘 예상한대로 흘러가지도 않고, 삶이라는 그림을 원하는 대로만 그려갈 수 없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이니, 갑작스런 변화(사건)가 생겨도 갈팡질팡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라고 한다. 어느날 북한이 침공했다는 뉴스가 나올 수도 있고 직장을 잃을 수도 있으며 로또에 당첨되는 횡재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놀랍고 심란한 감정은 가지더라도, 당황하고 혼란스럽고 두려워하여 어찌해야 할 지 몰라서는 안되는 단계이다. 이 나이까지는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천명(知天命)이라 하는 50살은 하늘이 명한 '인생의 뜻'을 아는 나이이다. '나' 중심에서 벗어나 세상속에서의 '나'를 이해하는 단계이며,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우연의 연속이기도 한 인생의 숭고한 뜻을 인식하게 되어야 한다고 한다. 천명에 대한 얘기는 논어에서 종종 반복되고 있으니, 다시 자세히 얘기하기 위해 나중으로 미룰까 한다.

이순(耳順)이라 하는 60살은 '귀가 순해진 나이'이다. 들리는 소리에 크게 개의치 않는 나이이니, 누가 욕하건 누가 칭찬하건 빙그레 지나칠 수 있게 되고, 어떤 소리라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단계이다.

종심(從心)이라 하는 70살은 마음가는대로 해도 도리를 벗어나지 않게 되는 나이이니 완성의 경지에 다다른 수준일 것이다. 두보의 시로부터 유래한 만나보기 드문 나이를 의미하는 고희(古稀)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게 사용되는 것 같기는 하다.

이상 정리하면, 이 장은 그 나이에는 그 나이에 맞는 사람이 되라는 목표를 정해주는 것이며, 사람이 성숙해져 가는 것도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니 단번에 종심의 단계에 이를 수는 없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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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정책으로 따르게 하고 형벌로서 규제하면 [道之以政 齊之以刑]
백성들은 모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될 것이다 [民免而無恥]
덕으로 따르게 하고 예로서 규제하면 [道之以德 齊之以禮]
부끄러움을 느껴 저절로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有恥且格]


   이 장은 강압적 정치의 단점을 덕치의 장점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형벌을 앞세워 강제하는 통치는 ‘마음의 반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재수없게 법에 걸린 것이지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아니다'고 하게 될 것이며, 법을 잘 피해다니는 것을 지혜로 여기고, 법을 피해갈 줄 모르는 것은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덕성을 찬미한 위정 제1장의 북극성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정치는 오직 덕치주의여야만 한다’고 하는 것도 곤란하다. 덕과 힘이 중용(中庸)의 조화를 이뤄야만 하는데, 공자시대에는 예(禮)라는 완화된 힘(규제)으로도 충분히 조절 가능하다고 판단하셨던 듯 하다.

  다원화된 오늘날에는 예(禮)의 규제보다는 법(法)이 조절작용을 해야할 것 같다. 그렇지만 덕을 지향하는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한다. 사람을 채찍에 움직이는 짐승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人間性)을 회복하여 사람의 길을 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은 블로거 입장에서 저작권법을 생각해보게 한다. 최근에는 TV영상을 몇 장면 캡쳐했다고 문제가 되었다는 글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강력한 단속으로 죄어가는 것이 순서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하는게 순서이지 않을까? 대화하고 조율하고 수긍하는 과정없이 힘을 앞세워 밀어붙이려는 것에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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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 『시경』의 3백수의 시를 한마디로 묶을 수 있다[詩三百 一言以蔽之]
그러면서 말씀하셨다[曰:]
- 속이는 뜻이 없다 [思無邪]

 

지금은 다 표현하지 않고 비워두는 시(詩)의 ‘절제미’를 보다 강조하는 것 같지만, 예전 학문의 교과서였던 시경은 ‘진솔함’을 보다 강조했던 것 같다. 충신, 효자, 홀아비, 과부등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의 지극한 감정이 실려있는 것이 옛날의 시(詩)였다. 돈으로 변할 수 있어야 생산을 하려는 지금 시대에, 심금을 울리는 진솔함과 교감하기는 참 어려워진 것 같기도 하다. 문득 황진이의 시를 남겨두고 싶어진다.

동짓달 기나 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되면 굽이굽이 펴리라

그날 밤이 한 허리만 떼 내어도 족할 정도로 그리도 길었을까?
님과 함께 하는 밤이 얼마나 짧았기에, 그 시간에다 보태고 싶었을까?

사람들이 고시(古時)를 좋아하는 이유는 절제미와 더불어 ‘속임 없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시유학은 본시 인간감정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지나치지 않게 조화를 도모했다.
천박하다고 주입시킨 것은 주희의 성리학이었다고 생각되며,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엉엉 울어도 되는 것이 원시유학이었기에,
부인이 죽었을 때 덩실덩실 춤추었다는 장자가 보통사람들과 가장 멀리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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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為政以德]
북극성으로 비유할 수 있다 [譬如北辰]
가만히 있지만 다른 별들은 그 중심을 돈다 [居其所而衆星共之]


이 장은 덕(德)이 가진 장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북극성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다른 모든 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
즉, 다른 별들이 북극성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이 따뜻함을 따라가는 것으로 비유해도 될 것이다.
후덕함은 분명 저절로 따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상적인 정치는 북극성처럼 덕으로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만, ‘오직 정치는 덕치(德治)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강제적 억제가 조절을 하여 조화를 이뤄야만 하는 것이니, 유가(儒家)의 현실적 모델은 예(禮)의 통제로 받쳐주는 것이었다.

윗 자리에서 따르도록 해야 할 때, 후덕함과 억제의 중용(中庸)의 기준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제 매를 들어야 하고 언제 사탕을 주어야 하나? 상대에 대한 이해가 그 출발선이 된다.
부하직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내 아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보다 적합한 기준을 찾아낼 수 있음이다. 그래서 남과 진정으로 통하고, 남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헤아리는 인(仁)의 관계함이 근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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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 子曰:]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不患人之不己知]
내가 남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患不知人也]

 

   비슷한 가르침이 논어 제1장부터 시작해 위령공(16), 헌문(32)편 등등 계속 반복되고 있지만, 뒷부분에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이 장에서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말은 본래 내가 남을 제대로 알 수는 있는 것인지 바꾸어 생각해보라는 뜻도 담겨있다.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도 내가 남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앎의 교만에 빠졌기에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드러나고 보여지는 것을 통해 ‘짐작’을 하는 것이지 아는(知) 것이 아닐 것이다. 경험과 정보가 많아지면 짐작이 맞을 확률이 조금 높아진다는 것일 뿐,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남들도 나를 제대로 알아줄 수 없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외로운 존재인가? 사실, 나를 알아주는 완전한 친구가 있다. 내 안의 나’는 나를 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나를 정확히 보고 있으며, 그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으니 정말 완벽히 나의 진면목을 알아주고 있을 것이다. 시인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원했던 그 하늘이 곧 ‘내 안의 나’이기도 할 것이다.

  이치상은 나도 남을 모르고 남도 나를 모르는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아무도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주지 않으면 외롭고 슬픈것이 사람이다. 성인이라 칭송받는 예수께서도, 석가께서도, 공자께서도 세상이 몰라준다고 역시 아쉬워하셨다. 감정조차 없어져야 한다는 뜻, 정(情)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며, 그 감정에 장악당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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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여쭈었다 [子貢曰:]
-  가난하다고 아첨하지 않고 [貧而無諂]
-  부유하다고 교만하지 않으면 어떤가요? [富而無驕 何如?]
공자께서 대답하시길 [子曰:]
-  좋구나 [可也] 그렇지만 가난함을 즐기고 [未若貧而樂]
-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한 것 같구나 [富而好禮者也]
자공이 말하길 [子貢曰:]
-  시경의 절차탁마(切磋琢磨)가 이같은 뜻입니까? [詩云, 如切如磋如琢如磨 其斯之謂與?]
공자 말씀하시길 [子曰:]
-  자공아! 이제 너와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  지난 것을 돌이켜 미래로 나아갈 줄을 아는구나 [告諸往而知來者] 

 

   뜻을 음미해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대화이며 자공의 영민함을 느낄 수도 있다. 자공은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억제하는 단속으로 도달하였다’고 여기고 여쭤보았는데, 공자께서는 ‘즐길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쳐 준 것이다.

  그 말에 자공이 ‘내가 모자라구나’하고 침울하지 않고, 시경의 시를 인용하여 즐겁게 받아들이며 화답을 한다. 이것은 ‘가난한 성취(배움)를 즐기는 태도’ 이니, 곧바로 가르침에 화답하여 실행에 착수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단순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시(詩)를 통해서 즐기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제가 경솔하게 아는 것으로 여겼군요’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절차탁마’를 인용할 수 있는 상황인지를 질문하여, 우회적인 시적인 ‘숨김의 미학’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즐거움의 경지에 이르라는 가르침, 계속적인 발전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좋지만, 스승과 제자간의 정다운 대화라서 또한 더 좋다. 공자의 감탄은 당연한 것 같은데, 공자께서도 지지않고(?) 돌려서 칭찬을 하고 있다. ‘하나(과거)를 알려주면 둘(과거+미래)를 안다’는 것인데, 자공이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써 먹는다. ^^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논어 제5편 제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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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군자는 배부르게 먹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君子食無求飽]
편안하게 거주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居無求安]
일을 부지런히 하고 말을 신중하게 하고 [敏於事而慎於言]
도를 향하여 바르게 행한다면 [就有道而正焉]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可謂好學也已]

 

   이 장도 스스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유가(儒家)에서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호학(好學)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제1장에서부터 강조하였듯이, 아기새가 어미새를 따라서 날개짓을 하는 그 행위에 의의가 있음이니,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다. 

  한편, 군자라고 해서 맛있게 먹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요, 편안히 잠자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지(욕심내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배부름과 편안한 주거를 추구한다면 ‘소인’이라는 하찮은 사람이 된다는 것일까? 그런 뜻도 아니다. 군자는 소인에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위해 봉사’해야하는 다른 사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도 배불리 먹고 편안한 주거를 추구한다면 제 본분을 망각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군자(정치를 하려는 자)가 물욕에 빠지면 큰 도적이 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무겁게 새기도록 경계시킨 것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군자는 불쌍한 사람처럼 보인다. 부지런히 일해야 하고, 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해야 하며, 배불리 먹고자 해서도 안되고, 편안히 거주하고자 해서도 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달픈 삶이 아니라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행복해지는 것에 공자학의 의의가 있다. 

  공자가 쇠뇌시킨 걸까? 종교일까? 도(道)의 안경을 쓰고 보지 않는다면 당장 이해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오지로 가서 열악한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는 의사들의 삶은, 보편적 시각에서는 희생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진심으로 행하는 그 얼굴이 불행한 표정인지를 관찰해보면 뭔가 이상스럽기는 할 것이다. 짐작을 통해 ‘그 길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져봄직 하지 않을까? 
  
  도(道)는 ‘길’로 잘 비유한다. 선명한 길은 사람이 많이 다녀서 잘 드러나는 것 뿐이며, 정해진 도(道)라는 것은 없다. 자기가 ‘이 길이다’고 인식하며 걸어가는 그대로의 삶이 곧 도(道)다. 남들처럼 사는 것도, 특이하게 사는 것도 각자 나름의 길이다. 도를 바르게 한다는 것[道而正]은 가고자 하는 길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뜻이다. 그 길로 가라고 남에게 요구하려는 것도, 그 길로 가지말라고 남에게 요구하려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오직 인간만이 나와 똑같게 만들고 싶어하고, 나의 우상을 똑같이 숭배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다.  하늘은 비슷하게 만들고서 멈춘다. 결코 똑같은 것을 만들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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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신의는 의로움이 있어야 가까이 하여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며 [信近於義 言可復也]
공손은 예가 있어야 가까이 하여 치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恭近於禮 逺恥辱也]
의지하더라도 친근함을 잃지 않아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역으로 읽어보면, 정의롭지 않은 약속은 지키지 않아야 하며, 예가 없다면 치욕을 당하더라도 공손하지 않아야 하며, 의지한다고 해서 싫어하면 떠나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앞 장에서 ‘조화만을 위한 조화를 찾는’ 꽉 막힌 사고를 지적했는데, 마찬가지로 꽉 막힌 사고를 지적하고 있다. 무조건을 고수하는 것은 맹신과 맹목을 추구하는 것일 따름이다.

  ‘독립투사들께서 거짓말을 하여 동지를 팔지 않은 것’을 거짓말을 했다하여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다. 거만으로 대하는 무례한 사람에게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공손으로 화답할 필요가 없고, 의지한다고 해서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면 떠나야 하는 것이라 한다.

  이 모두는 ‘내면의 자존(自存)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의롭다는 것, 공손하다는 것, 친근하다는 것을 얻기 위해서 본질을 버리지는 말고, 스스로를 버리지는 말라는 의미이다. 자존이 무너지면 삶이 고달파진다. '좋은사람 컴플렉스'라는 말처럼, 좋은 평가를 의식해서 끌려다니지는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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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예의 작용은 조화로움이 중요하다 [禮之用 和為貴]
선왕의 도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先王之道斯為美]
작고 큰 것이 조화를 이뤄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小大由之 有所不行]
조화를 위한 조화만 알고 [知和而和]
예로써 조절할 줄 모른다면 [不以禮節之]
순조로울 수가 없다(참된 조화가 아니다) [亦不可行也]

 

   이 장이 해석이 분분한 이유는 ‘어떻게 해라’는 선명한 실천행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의 철학인 중용(中庸)을 설명하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禮)는 내면의 실질과 드러난 꾸밈의 조화이다. 마음이 없는 예는 허례이며, 솔직한 마음을 꾸밈없이 다 발산하는 것도 무례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中庸)의 균형선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곧 조화라고 하여 조화만을 추구하려는 꽉막힘도 문제이다.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힘을 사용해 막아야 하는 행위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형식적 예에 어긋나고 부자간의 조화가 깨어지더라도, 근본의 예[실질]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참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장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이고 늘 그러해야 한다는 고정된[죽은] 원칙은 없다는 중용(中庸)의 조화라는 관념이 정립되면 좀 더 선명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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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적에는 뜻을 살펴보고 [父在 觀其志]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지나온 행적을 살펴보고 [父沒 觀其行]
3년동안은 바꾸지 않아야 효라고 할 수 있다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이 장의 핵심은 ‘진실한 마음은 가벼울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삼(三)은 '오래다'는 의미로 고래부터 사용한 하나의 상징과도 같으니, 반드시 숫자적 3년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라는 선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칼릴 지브란과 메리 헤스켈의 러브레터와 일기, 작품등에서 발췌하였다고 하는데, 이 책의 제목은 마치 명언처럼 유명해져 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작고 드러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부모님의 생각과 뜻을 쉽게 바꾸려는 것은 부모님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는 마음일 지 모른다. 생각이 달라도 살아서는 부모의 뜻을 꺾으려 하지 않고 지켜 보는 것,  돌아가신 후에는 지난 행적을 신중히 관찰해 보는 것, 그리고 단번에 바꾸지 않고 깊이 심사숙고 해보는 것은 모두 부모님의 일생의 뜻을 가볍게 여기고 경시하지 않는 것이기에 효(孝)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효(孝)는 마음이 실질이기에, 드러나는 외형적 행위에 집착하라는 뜻이 아니다. 반드시 3년을 그리해야 한다고 못박아 버리면 맹신적인 종교가 된다. 지켜야만 하는 법률 같은 효(孝)가 되어버린다. 한편, 그 시대에는 아버지의 역할이 주도적이기 때문에 부(父)라고 하고 있겠지만, 오늘날에는 부모님을 통칭하는 의미로 읽으면 될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뜻이 남녀차별이 아니므로 그런 것에 민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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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금(子禽)이 자공(子貢)에게 묻기를 [子禽問於子貢曰:]
선생님께서는 어느 나라에 가시던지 정사에 관해 들으려 하시는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말해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군주의 요청을 받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求之與? 抑與之與?]
- 자공이 말하기를 [子貢曰:]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시기에
정사에 관해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말해 달라 하시지만 [夫子之求之也]
다른 사람이 (벼슬을 탐하여) 그러는 것과는 다릅니다 [其諸異乎人之求之與]

 

   공자께서는 섬길 군주를 찾아다니며 14년의 주유천하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여씨춘추』에 의하면 약 80여명의 군주를 만났다고 한다. 두 제자가 주고 받고 있는 대화는 그의 정치욕(?)에 관한 의문으로, 자금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 역시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소심(?)해서인지 예(禮)가 아니라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승께 직접 여쭈지 못하고 공자와 절친한(?) 제자 자공에게 대신 물어보고 있다. 

  자금(子禽)의 질문은 '먼저 원한 사람이 누구인가'가 주된 의문이 아니라, ‘공자께서 먼저 요구했다’는 답변을 기다려 ‘권력을 얻고 싶어하는 탐욕 때문이 아닌가’를 재차 묻고자 하였으리라 추측되는데, 명석했다는 자공이기에 한 번에 대답을 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자공의 말을 요약하면 첫째, 정치에 대해 먼저 말해달라 했더라도, 강요하는 것도, 난처하게 한 것도, 잘난체 하려는 것도 아니었기에, 군주들이 말해주고 싶어서 말하게 된 것과 다를 것 없다는 말이며 둘째, 대부분의 사람이 정치에 대한 말을 들으려는 것은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벼슬을 탐하는 것이 실제의 본심이지만, 공자께서는 군주를 도와 궁극적으로 백성들을 돕고자 하는 것이 본심이라는 말이다.

  예상대로 자공은 스승을 잘 변호하고 있다. 우리같은 독자는 ‘공자는 어떤 인물인가’를 알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를 배우고자 읽는 것이니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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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 말씀하셨네 [曾子曰:]
마음을 다해 장례를 치르고 [慎終]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면 [追逺]
백성들의 덕성도 후덕하게 될 것이다 [民德歸厚矣]

 

   사람들에게 후덕하게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행위를 잘 하는 것 만으로 저절로 사람들은 후덕해 진다고 한다. 유학의 배움은 언제나 나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나를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이 유가(儒家)의 제1조이다. 

  신종[慎終]이란 분에 넘치는 장례가 아니라, 마음을 극진히 하여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말하며,
  추원[追逺]이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 두가지는 논어 제3편 팔일 제3장에서 말하는 근본을 잃지 않은 예를 말한다.

예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 검소하게 하는 것이며,
장례는 형식을 잘 갖추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즉, 예(禮)는 거절할 수 없는 내면의 마음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이다. 장례와 제사는 왜 효(孝)의 연장인가?
효(孝)는 "내가 받은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며, 고마움을 아는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건 살아계시건 그런 객관적 사정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 마음이 잊을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고마움이기 때문이다. 고마움을 아는 것에서 인간관계가 후덕하게 된다. 당연하다’는 인식과 ‘고맙다’는 인식의 차이가 될 것이다.

  당신은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하는 인식은 개인적이다. 개인주의 대표격인 영어권에서 조차도 "Thank you"라고 인사하지 않는가?

  한편,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면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은 유가에서 말하는 도(道)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다. 짝사랑하던 여인이 나에게 사랑을 고백해 오기를 기대하는 것, 권위적인 남편이 갑자기 변하여 다정다감해지기를 기대하는 것, 그렇게 나는 결코 변하지 않으면서 타방이 변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내가 변해야 타방이 변한다'는 것이 유가의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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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군자라도 무겁게 대하지 않으면 흔들리는 것이니 [君子不重則不威]
배웠더라도 붙잡지 못하게 된다 [學則不固]
지극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니 [主忠信]
자기만 못한 이를 벗삼으러 하지 말고 [無友不如己者]
허물이 보이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過則勿憚改]

 

  이 장은 오랜동안 '자기보다 못한 이를 친구로 삼지 마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다 유학의 철학이 분별하여 멸시하는 사상이 아니라는 본질에 주목한 학자들이 새로운 해석을 개진하고 있다. ‘자기만 못한 사람은 본래 없는 법이며, 스스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삼으려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벗을 대하려 하지마라' 는 의미로 해석하는 추세이다. 

  ‘자기만을 향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벗이라 하면서도 나만 못하게 여기려는 것이며, ‘자기만을 향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자기의 잘못은 이해하고 숨기고 덮고 꾸미려 한다는 의미이다.

  역으로 말하면, 나만을 진정으로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로 보기에, 남은 나보다는 보잘것 없는 존재임이 당연한 것이고, 나의 허물은 누구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소한 것이 되어야 마땅하고, 남의 잘못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이, 무게감(重)이 없이 흔들리는 경망함(不威)이다. ‘위엄이 서지 않는다’로 번역하면 남에게 보여주는 위엄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논어 제1장에서부터 강조하듯 ‘남이 알아주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군자이기에  위엄, 체통과의 의미가 다르다. 나의 입장에서만 헤아리고, 남의 입장에서 헤아리지를 못하니, 나의 저울로는 1KG이라 측정하고, 남의 저울로는 1g이라 측정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소중하다는 인식으로, 남도 스스로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인식하고, 남의 허물이 보이는 것처럼 나의 허물도 보아야 하는 것이니, 숨기려 하지 말고 고치려고 해야 한다. 변명을 찾고, 허물을 덮고 감추려는 것은, 남의 이목에 의해 나의 자존(自存)이 흔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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