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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4. 20:32

제2편 위정(爲政) 제24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4. 20:32

공자 말씀하셨네[子曰: ]
- 조상의 귀신이 아닌데 제사하는 것은 아첨이다 [非其鬼而祭之 諂也]
- 의로와야 함에도 멈추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見義不為 無勇也]

 

  귀(鬼)는 육체를, 신(神)은 영혼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귀(鬼)는 흙으로 돌아가고, 신(神)은 하늘로 돌아간다. 같은 의미로 백(魄)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魂)은 하늘로 돌아간다. 그런데 혼백(魂魄)이라고 할 때는 하늘이 앞이고, 귀신(鬼神)이라고 하면 땅이 앞이다. 혼동하기 쉽다.

 

  공자 때문에 제사가 생겨났다는 오해도 있는데, 오히려 공자는 상고시대에 무분별한 제사를 일소해서 없앴다는 평가를 받는다. 감히 왕이 아니면 하늘에 제사지낼 수 없었다. 우리도 조선 초기에는 고급관료가 아니면 부모께만 제사지낼 수 있었다. 주자학이 힘을 얻은 후 3대 제사가 허용되어 환호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안 지내고 싶어하니 재미있는 반전이다.

 

  한편, 유가에서 말하는 용기(勇)는 차원을 달리한다. 맹자는 "칼을 잡고 노려보며 '저 녀석이 나를 당하겠는가' 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용기이므로 겨우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공자가 수신의 세 가지 덕목으로 제시한 지인용(知仁勇) 수준에서의 용(勇)은 지치(知恥) 즉, 부끄러움을 아는 수준이다. 그 뿌리는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가슴속에 살고 있는 성(性)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性)에 부끄럽지 않음이 쌓이고 쌓여 축적된 '호연지기'가 바탕이 되는, 생사조차 건드릴 수 없는 당당하고 굳셈이다.

사람에게는 삶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으며,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다.<맹자 고자 상 11.10>

 

  언뜻 보면 제사와 의로움이라는 이질적인 얘기를 하는 듯하다. 그러나 《중용(中庸)》의 측면에서 보면 잘 어울리는 가르침이다. 예가 지나쳐서 과한 것을 말했고, 용기가 부족하여 모자란 것을 말했다. 그리고 이 둘의 마음이 통(通)한다. 지나치게 빌며 복을 얻으려는 사람은 이득을 얻겠다는 마음, 의로운 일에 소극적인 사람은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결국, 이익을 더 우선하려는 같은 뿌리에서 과한 행동과 모자란 행동이란 가지가 뻗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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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2013. 1. 14. 20:24

제2편 위정(爲政) 제23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4. 20:24

자장이 여쭈기를 [子張問: ]
 - 십 대 뒤를 알 수 있습니까? [十丗可知也]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이었으니 그 손익을 알 수 있다[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이었으니 그 손익을 알 수 있다[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 어떤 나라가 주나라를 계승하면 백세 뒤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其或繼周者 雖百丗 可知也]

 

  공자는 중국의 통일왕조를 얘기하고 있다. 하나라 - 은나라 - 주나라로 이어졌으나, 공자시대는 전국시대로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그리고 훗날 CHINA의 연원이 되는 진나라로 이어진다. 과연 공자는 진나라의 문화를 미리 알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유학 탄압과 유생들의 생매장을 미리 방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공자의 답은 십 대 뒤를 완전히 장악해서 다 안다고 했던 말은 아니다.

 

  자장은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고, 내적으로 수신(修身)하는 실질적 군자(君子)가 아니라, 외적인 정치인 군자(君子)를 지향했다. 그의 질문도 미래의 드러난 사회의 모습인데, 공자의 답은 내적으로 뿌리가 되는 정신문화 세계다.

 

  공자의 미래 예측은 현실적이다. 직관이나 통찰과 다르다. 점을 쳐서 묻거나 신비에 기대어 판단하지 않는다. 은나라로 이어지면서 발전된 것과 없어진 것을 분석해보고, 주나라로 이어지면서 발전된 것과 없어진 것을 분석해보면 그림이 그려진다는 뜻이다. 생겨나는 어떤 것도 계승하고 연속하기 마련이며, 아무런 기초가 없이 단번에 높은 건물이 세워질 수 없다는 이치를 말하고 있다.

 

  미래의 중국 역시 우리가 알 수 있다. 유/불/선에 바탕을 둔 사상과 문화는 미래에 어떤 정치체제가 들어서더라도 이어질 것이다. 덜어내고 붙여지는 조정을 받게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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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4. 20:15

제2편 위정(爲政) 제22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4. 20:15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사람이 믿음이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큰 수레에 예(輗)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軏)이 없다면 [大車無輗 小車無軏]
어찌 움직일 수 있겠는가 [其何以行之哉]

 

  믿을 신(信)은 하나와 하나를 연결(人)시키는 말(言)이라는 의미다. 악당들조차 믿음이 없다면 그 무리는 해체된다. 좋은 연결이건 나쁜 연결이건, 연결되려면 믿음(信)이라는 연결끈이 있어야 한다. 예(輗)는 소가 끄는 우차에 소를 연결하고, 월(軏)은 마차에 말을 연결하는 기구이다.


  유가에서의 인간의 본성을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으로 분별한다. 분별은 언제나 조화를 지향하는 것. 결국은 성(性)으로 한 덩어리이다. 가슴속(心)에 살아있는(生) 것이 성(性)인데, 유가의 지향점은 이 성(性)을 찾는 것이다.

학문의 도(道)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 [맹자 고자 상 11.11]


  공자는 체득의 영역인 인(仁)은 그저 인(仁)이라며 설명하지 않았지만, 맹자가 보완하고자 설명하면서 부작용이 생겼다. 소위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비유 때문에 "측은지심 = 인(仁)"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후학들이 안과 밖에 있는 것을 가린다고 논쟁했다. 이렇게 다시 설명해보려고 한다.

"가녀린 아이가 불량배에 피가 터지도록 맞고 있다"

  맞고 있는 어린아이가 가여운 마음이 인(仁)이고, 이 폭력을 저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의(義)며, 북량배를 죽여버리지 않으려는 절제가 예(禮)이며, 나서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지 따져봄이 지(知)며, 이 사건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직시하는 것이 신(信)이다.


  끼워맞춰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마음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함께다. 의(義)를 강조했던 맹자 역시 의(義)는 독립되고 붙잡을 수 있는 관념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라고 설명했다.

의(義)를 행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의를 행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에서 잊어서도 안 되지만, 억지로 조장해서도 안 된다. [맹자 공손추 상3.2]


  얘기가 길어진 것 같다. 신(信)은 성(性)의 일면이라는 것. 신(信)이 없음은 한 덩어리로 융화하려는 도(道)에 역행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마무리 해야겠다. 예수를 믿지 못하면 예수와 이어질 수 없고, 붓다를 믿지 못하면 붓다와 이어질 수 없다. 마나님을 믿지 못하면 차려준 음식을 고맙게 먹을 수 없다. 멀어지고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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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공자께 말했다.[或謂孔子曰:]
선생께선 왜 정치에 종사하지 않는가요? [子奚不為政]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서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書云:]
효(孝)다. 오직 효다. 형제간 우애있으면 정치에 이르는 것이다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이것이 정치인데 어찌 정치를 따로 하겠습니까? [是亦為政, 奚其為為政]

 

  하지 않는 것을 물으면 피곤한 법이다. "육식을 왜 하지 않지? 주식을 왜 하지 않지?" 취향에 속하는 이런 질문은 그나마 괜찮다. 하지만 "결혼을 왜 하지 않지? 치마를 왜 입지 않지?" 같은 질문은 신중해야 한다. "누군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느냐고" 하면서 부글부글할 수 있으니. 주유천하로 유명한 공자였다. 14년을 천하를 돌며 도덕정치를 구현할 군주를 찾았다. 그러니 어찌 정치에 종사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 글은 어떤 이(或)가 아픈 곳을 찔러도 무시하지 않았다는 예(禮)를 전하고자 함일까? 아니면 만사에 단절이 없다는 도(道)를 설명한 수준 높은 가르침일까? 《서경》까지 인용하는 걸로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늘날에도 유명인의 말이나 글을 빌려 와 수식을 하곤 한다. 조선조는 유교경전과 공자 왈 맹자 왈을 할 수 있어야 지성인이었는데, 요즘은 서구인을 언급해야 더 있어 보인다고 한다. 상표와 간판도 서구어로 넘쳐나니 문화적 경향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어쨌건, 공자께서도 말에 더 신뢰를 얻기 위해 《시경》과 《서경》을 종종 언급 하셨다. 잡설을 이리 늘어놓는 이유는 이어지는 글이 무겁기 때문이다...

  유가의 도(道)는 '분별'에서 출발하기에 난해하다. 그 이론에 곧고 강직했던 선비 이미지가 오버랩되면 엄격하게 맺고 끊는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그러니 이 장처럼 효가 곧 정치요, 우애가 정치라고 하면 어렵다. 나를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이 곧 제가(齊家)요 치국(治國)이요 평천하(平天下)라고 하면 더욱 혼란스럽다. 본래 유가의 철학 중용(中庸)은 분별해서 가르지 않는다. '분별 후 조화'를 도모한다. 가르기 위한 분별이 아니라 붙이기 위한 분별임을 이해해야 한다. 유학은 도(道)를 가장 간명하고 자신있게 설명하는 학문이다.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다 할 수 있다. 본질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不貳 [중용 제26장]


  남녀로 나누고, 형제와 4촌을 나누고, 군주와 신하를 나누어 둘이 되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로 합쳐짐을 지향한다. 분리의 이미지가 없다. 태극기의 태극처럼 떨어진 둘이 아니라 꼭 붙어있는 둘, 그래서 결국은 하나이다. 조금 더 자세히는 <이곳> 설명을 참조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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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위정(爲政) 제20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2. 13:44

계강자가 묻기를 [季康子問:]
백성이 공경하고 충성하고 이를 권면하게 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使民敬, 忠以勸, 如之何]
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엄숙히 임하면 백성이 공경하게 되고[臨之以莊, 則敬]
효도하고 자애하면 백성이 충성하게 됩니다[孝慈, 則忠]
선한 이를 등용하여 그렇지 않은 이를 교화하면 권면하게 됩니다[舉善而敎不能, 則勸]


  앞 장의 애공의 질문과 다를 것이 없는 질문이다. 답도 마찬가지다. "너나 잘하세요."


  왜 《논어》에서 연속으로 실어놓았을까? 시대와 문화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게 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내 마누라가 남편을 무시하지 않게 하려면 어찌해야죠? 내 학생이 선생의 말을 잘 따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런 식의 질문으로 변해서 이어진다. 수백 년이 지나도 비슷한 상담을 받으려 줄을 서지 않을까? "당신 탓이요" 라는 마음이 이런 질문의 본질이기에 그리 예상한다.

  너만 바꾸면 다 좋아질 것이라는 계산. 그러나 나를 떠나서 답을 찾지 말라는 것이 유가(儒家)의 확고한 가르침이다.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유학은 말한다.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요구한다[제15편 위령공 제20장]


  가정불화를 겪는 두 남녀가 공자를 찾았다고 하자. 남편이 물으면 남편 도리부터 잘해라, 부인이 물으면 부인 도리부터 잘해라가 답이다. 그렇다면 백성이 계강자를 바르게 하는 방법을 물어도 마찬가지일까? 역시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경하라는 답이 예상된다. 하지만 "그것은 가신들에게 맡겨두고"라는 전제를 깔 것이다. 말하자면, 유학의 명분론이다. 백성이라는 이름이 아닌 가신이 되어야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음이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무에 간섭하려 하지 마라[제8편 태백 제14장]


  유학의 이 명분론(名分論)이 오해와 비난을 많이 받곤 한다. 이것은 권위주의인가? 아래에서 편향적으로 보면 그러하다. 그러나 남편 역시 부인의 살림살이를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맡은 본분에 충실하고 그 밖의 일은 믿고 맡긴다는 것이 핵심이다. 결코, 권위가 주(主)가 아니다. 공자 역시 향당(부형과 종족이 사는 고을)에 있을 때는 마치 말을 못하는 벙어리처럼 있었다.

공자께서 향당에 계실 때는 신실하셔서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과 같으셨고, 종묘와 조정에서는 분명히 말씀하시되 삼가서 하셨다. [제10편 향당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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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1. 20:24

제2편 위정(爲政) 제19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1. 20:24

애공이 묻기를 [哀公問曰:]
 - "어찌하면 백성을 복종시킬 수 있습니까?" [何為則民服]
공자 말씀하셨네 [孔子對曰:]
 - 곧고 바른 사람을 등용해서 굽은 사람 위에 두십시오 [舉直錯諸枉]
 - 그러면 백성이 복종할 것입니다 [則民服]
 - 굽은 사람을 등용해서 곧은 사람 위에 두신다면 [舉枉錯諸直]
 - 백성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則民不服]

 

  애공(哀公)은 공자의 출신지인 노(魯)나라의 군주였다. 애공은 이 문제가 백성들 탓이라 여겼으리라. 그래서 강력한 형벌로 다스릴지 혹은 교육을 시킬지 갈등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공자의 답은 '당신이 인사(人事)를 잘하세요'다. 《논어》에는 이런 뜻의 가르침이 많다. 계강자의 정치 질문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솔선해서 스스로 바로 하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 [제12편 안연 제17장]

 

  관심 있게 지켜볼 점은 '없애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음이다. 굽은 사람이라고 결코 제거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곧은 사람을 윗 자리에 두면 그에게 감화될 것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이는 논어의 그 유명한 '바람과 풀의 비유'와도 통한다. 

(계강자가 무도한 사람들을 죽여버릴 것을 묻자 공자 말씀하시길)
그대는 정치를 한다면서-정치는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일인데-  어찌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가? 그대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면 백성도 저절로 좋아질 것이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백성의 덕은 풀이라서, 풀은 바람을 따라 눕는 법이다. [제12편 안연 제19장]

 

  그리고 과거에 굽었더라도 고치면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이미 지난 잘못은 허물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용서에 인색한 사람 역시 소인 아닐까?

잘못을 하고서 고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 [제15편 위령공 제30장]
이미 지나간 일이라면 더는 탓하지 않는다. [제3편 팔일 제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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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위정(爲政) 제18장 간상(赶上)/논어(論語)2013. 1. 10. 20:44

자장이 간록을 배우려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子張學干禄. 子曰:]
 - 많이 들어 의문을 없애고, 의문없는 바를 신중히 말하라 [多聞闕疑 慎言其餘]
 - 그러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則寡尤]
 - 많이 보아 위험을 없애고, 위험없는 바를 신중히 행하라 [多見闕殆 慎行其餘]
 - 그러면 후회가 적을 것이다 [則寡悔]
 - 말을 조심해 허물을 줄이고 행동을 조심해 후회를 줄이면[言寡尤 行寡悔]
 - 그 속에 녹(禄)이 있을 것이다 [禄在其中矣]


  간록(干禄)은 벼슬자리라는 견해가 있고, 《시경》편의 간록(복을 구한다는 의미)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쨌거나 군자가 되는 게 아닌 현실적 질문이다.


  하지만 공자의 대답은 다를 바 없다. 수신(修身)하라. 군자(君子)가 되라고 하신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춘추전국시대. 공자는 그런 세상에 도덕을 설하여 군자를 꿈꾸게 하였다. 교주가 연상되는 그 능력을 이해할 수 없다면 공자의 답은 짜증 날 수준이다. 반대로 자장 역시 신기한 인물이다. 단순하고 과격한 자로였다면 엎어버렸을지 모르는데... ^^

 

  이 장은 대학(大學)의 '삼강령'을 빌려 오는 게 좋겠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마침과 시작이 있다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공자학은 근본(根本)을 지향한다. 조상을 돌아보는 제사 또한 뿌리와 근본(根本)을 돌이키는 의식이다. 나라의 역사를 배우기에 앞서, 내 집안의 역사부터 아는 것이 순서라 했다. 세종대왕이 좋아했던 음식이 무엇이었을까? 그보다 내 부모님께서 좋아하는 음식을 아는 것이 먼저라 했다.

 

  자장에 대한 공자의 대답을 이렇게 줄여볼까?

'자장아! 먼저 해야 할 근본에 더 힘쓰려무나'

 

  한편, 공자는 '자하는 부족하지만 자장은 지나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거침없는 언행을 보였다고 알려졌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지 못하고 남의 행동을 지켜봐 주지 못했던 듯하다. 인(仁)이란 사람(人)이 둘(二)이라는 뜻이다. 소통이고 어울림이며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자장에게는 인(仁)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개선을 했을까? 《자장》편을 보면 고치지 못했다는 의심이 들 수 있다.

 

자유가 말하길 : 자장은 능히 어려운 일을 해내지만 아직 어질지는 못하구나. [15장]

증자가 말하길 : 당당하다 자장이여. 그러나 함께 인을 행하기는 어렵구나.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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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유야, 내가 안다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다 [由, 誨女知之乎]
-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知之為知之]
-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 [不知為不知]
- 그것이 진실로 아는 것이다 [是知也]


  유(由)는 자로이다. 힘을 숭상하고 다혈질에 직설적이며 참을성이 부족한 캐릭터다. 공자의 직계제자 중에 가장 소인다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여러 차례 공자에 맞서곤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공자를 너무 존경한 것이 아니었을까? 장수가 더 어울리는 그였지만,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로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고, 공자는 통곡하며 절인 고기를 더 이상 먹지 않았다는 게 기록이다.


  어쨌건, 이 장에서 공자는 절제력이 부족했던 유(由)에게 지(知)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으로 구분하곤 하는 공자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자로가 모르면서 아는 척 까불거리다가 혼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공자학은 스스로를 갈고 닦는 수신(修身)과 스스로를 이겨내는 극기(克己)에서 출발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뿌리가 신독(愼獨)과 무자기(毋自欺)다. 자신을 아무도 볼 수 없고,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자리로 옮겨놓으라 한다. 그 지점에서 울려나오는 참된 소리를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이 신독(愼獨)이다. 그 소리를 듣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 무자기(毋自欺)다. 


  논어에는 공자가 하늘을 날아다녔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모른다는 고백,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심지어 부족해서 배운다는 걸 자랑하기까지 한다. '나보다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모자라고 모르고 배워야 했던 공자를 성인이라 칭하며 존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로가 공자에게 죽음에 대해서 물었다. [제11편 선진 제11장]

삶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 [未知生 焉知死]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면 크게 두 가지 병폐에 빠진다. 첫째,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도 배우려 하지 않기에 성장이 멈춘다. 둘째, 가르치려고만 하게 된다. 맹자의 표현을 빌리면 '내 밭은 버려두고 남의 밭만 김매려고 애쓴다'는 그 늪에 빠지게 된다.  


  유학만 그런가? 노장도 지(知)에 대해 마찬가지로 가르치고 있다. [도덕경 제71장]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다[知不知上]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不知知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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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이단이라며 공격하려 하면 해롭다[攻乎異端,斯害也已]



  이 장은 해설이 분분한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이단이라며 공격하면 해롭다 ② 이단은 공격해서 그 위험을 없애야 한다 ③ 이단을 공부하면 해로울 뿐이다.

  이단(異端)이란 극과 극이 되어 결코 통(通)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종교에서 더 자주 쓰는 용어로 보이는데, 근본 교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근본을 잠식할 위험이 있는 것을 이단이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종북'이라 칭하는 쪽을 이단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북한의 모든 가치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면 어떻게 대해야 하나? 그 답을 공자께서 해 주셨다.


  그런데 공자의 답을 모두 다르게 해석해서 더 혼란스러워졌다. 종북주의자의 생각을 경청하면 안된다는 것이 3번이다. 종북주의자를 교도소에 구금하여 억압해야 한다는 것이 2번이다. 종북으로 구별하지 말라는 것이 1번이다. ㅠ.ㅠ


  이단(異端)은 사악(邪惡)한 것이 아니라, 단지 끝에서 끝에 위치한 상대적 관념이다. 우리의 기준에서는 종북이 이단이지만, 북한의 기준에서 보면 종북이 정통이고 우리가 이단이다. 기독교의 기준에서 보면 타종교가 이단이지만, 타종교에서 보면 기독교가 이단이다. 이단(異端)이라는 개념은 상대적 관념이다. 그러니 진리의 입장에서 따져나가면 부정해야 할 이단(異端)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


  유학의 제1조가 무엇인가? 수신(修身)이다. 남을 탓하고 남을 나무라고 남의 험을 보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직 나를 바르게 세울 뿐이다. 수신(修身)! 그것을 이루면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저절로 따르게 된다. 즉, 이단(異端)이 보이는 것은 수신(修身)에 이르지 못했기에 생겨나는 마음 작용이다. 남을 보고 있기에, 남에게 요구하려 하기에 생겨난다. 그래서 공자는 이단(異端)으로 규정하여 공격하려는 자기 내면의 마음자리를 돌아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장의 가르침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까?

이단을 찾아내어 공격하려 하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하거라.

 

  한편, 이단(異端)을 '진리에 비추어' 악(惡)이라 한다면 유학의 입장은 어떨까? 의(義)를 따라야 하는데, 의(義)로움의 칼은 죽이기 위한 칼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방어를 위한) 칼이다. 추후에 더 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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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學而不思則罔]
-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게 된다 [思而不學則殆]


  계속 반복하며 이어지는 한 쪽으로 모나게 치우지지 말라는 중용(中庸)의 가르침을 전하는 장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판단력이 없어질 것이다. 유가의 후학들은 공자를 존경해도 신(神)으로 여겨 무조건 숭배하지는 않았다. ‘공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논어는 이렇게 가르쳤기에 왕양명은 ‘마음에 비추어 옳지 않다면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어도 옳다 할 수 없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성리학의 시대에는 유학 경전을 해석한 주희가 신(神)이 되기도 했다. 조선중기 이후는 주희의 해석에 따르지 않았다고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죽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였다. 본래 유학은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반면, 배우지 않고 생각으로만 다 통하려고 하는 것도 치우침이다. 옛말에 ‘한양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이 한양에 가본 사람을 이긴다’고 하는 말과도 통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쌓이면서 강해지는 욕구라고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와 마찬가지로 ‘모르겠습니다’를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정자의 잊지 말아야할 배움의 다섯가지가 떠오르는 장이다.

①널리 배우고 ②깊이 묻고 ③신중하게 생각하고 ④분명하게 판단하고 ⑤독실하게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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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군자는 널리 어울려 편애하지 않고 [君子周而不比]
소인은 편애하여 널리 어울리지 못한다 [小人比而不周] 

   본래 유학의 시각에서는 군자와 소인은 우월의 관계는 아니다. 군자와 소인은 서로 잘난 점도 있고 못난 점도 있다. 유가의 중용(中庸)철학은 좋고 나쁘다는 우열의 관계로 떼어놓는 사상이 아니라 ‘다르다는 분별후 조화’를 도모한다. 서로가 조금 낫고 조금 못난 점이 있으며, 때에 따라 가진 특성이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두루 어울릴 수 있는 것’도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중용(中庸)의 사상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두루 어울릴려고 고집하는 것도 ‘좋은사람 컴플렉스’에 걸리는 일이다. 그래서 공자는 ‘가는 길이 다르면 함께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했다.

  반면 편애하는 것도 나쁘다고만 보지 않는다. 어머니가 자식을 우선 챙기는 것은 성(性)의 발현으로 당연하다고 본다. 자기-가족-사회로 확장되는 유가철학은 편애도 무조건 나쁜것으로 보지 않기에, 묵가의 후학들로부터 차별적 사랑이라며 집중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문제는 편애가 아니라 편애가 지나쳐 갈라서고자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유가의 사고이다. 그래서 나와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즐겁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르고 다른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미워하고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로 나아간다. 옛 시대에는 사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나 말과 문자도 하나의 표현방법에 불과할 것이다. 그림과 사진과 영화와 음악은 어찌 철학을 표현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소재를 열심히 관찰하여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미술가의 마음, 곡식의 특성을 열심히 헤아리는 농부의 마음도 역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린다’는 인(仁)의 마음으로 통해 갈 것이다. 

  물론, 공자의 제자들이 군자(정치인, 공무원, 지성인)가 되기를 원하던 까닭에 본래 이 장의 무게감은 군자에게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널리 어울리려 하면서 그 지나침도 경계하지 않으면 소인이 된다고 하는 뜻으로 해석하면 충분하다. 소인을 멸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자극하여 분발하도록 만들기 위해 선택한, 제자들을 헤아리는 학습법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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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군자를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子貢問君子 子曰:]
- 말에 앞서 행하려 하고, 행하려는 바를 좇아서 말해야 한다 [先行其言而後從之] 

 

   자공의 (실천보다) 말을 잘 하는 단점을 일깨워 준 것이라고 한다. 논어는 제자의 특성을 헤아린 맞춤식 답변이 대부분이다. 자공은 말 잘하고, 영민하며, 명랑함이 잘 드러나는 제자였다. 

  유학은 ‘실천행위’에 의의를 두는 학문이다. 그래서 ‘삶이 무엇이냐, 나는 누구인가’의 존재의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보편원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하는 자기의 길을 구하기 위해 나아간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도 말만 번지르한 사람을 미워하고 무시하는데 응용하면 안되며, 스스로에게 요구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유학의 제1조를 자기를 닦는다는 수신(修身)이라고도 했기에.

  유학이 중시하는 행위는 완성되고 갖추어진 행위는 아니다. 본래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운동을 쉬면 근육이 굳는다. 운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의 완성이 있을까? 배움을 쉬면 안된다고 하는 이유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유학에서 의미하는 행위는 ‘완성을 향해 의욕하고 노력하며 나아가는 행위’이다. 그래서 이 장은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는 하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을 말하여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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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君子不器]

 

   이 장은 '공야장'편의 자공과의 문답이 연상되어 웃음짓게 한다.

자공이 여쭈었다 - 저는 어떤가요?
공자 말씀하셨다 – 너는 그릇이지
자공(상한 기분으로)이 여쭈었다 – 어떤 그릇인데요?
공자 말씀하셨다 – 너는 제사에 쓰는 옥그릇이지

  자공을 골려주려고 농담을 한 것인데, 자공이 그릇이라면 어떤 그릇인지 따지듯 되묻는 까닭이 이 장에서 처럼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유학이 추구하는 사회는 역할을 분담하여 조화를 이루는 사회였다. 과거에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살림을 하는 것은 일을 분담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름으로 나누어 할 일이 다르다고 하였으니 곧, 유학에서 말하는 명분론(名分論)이었다. 남편은 남편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그 이름값을 다 하라고 했다. 군자 역시도 군자다워야 한다.

  그런데 이 이름으로 나뉜 역할 분담을 조화를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나는 돈을 벌어오는 기계야?’ ‘나는 살림을 하는 기계야?’라고 불만이 생기게 된다. 그러니 조금 풀어서 ‘군자라는 이름은 도구(부품)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유학은 ‘쉬는 것’과 ‘일하는 것’도 중용(中庸)의 길을 찾아간다. 할 일이 없는 것, 더 이상 누구를 위해 필요없는 존재가 되는 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본다. ‘이제 당신이 필요없어. 당신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아’라고 하면 완전한 해방감을 느껴 새처럼 자유로울까?

  이 장을 다시 말하면 ‘해야 할 (군자)의 도리에 즐거운 사명감을 느껴라’로 바꾸고 싶다. 유학의 실천행위는 남편의 도리를, 부모의 도리를, 자식의 도리를 의무감으로 억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당신의 남편일 수 있어서 고맙고, 내가 너의 부모일 수 있어서 고맙고, 내가 부모님의 자식일 수 있기에 고맙다는 마음으로 즐겁게 가는 길이었다. 맹목적으로 믿게 만들어 공자가 의무를 이행하도록 주입시키려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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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 과거를 돌이켜 미래를 알게해야 [溫故而知新]
- 스승이 될 수 있다 [可以為師矣]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이미 고사성어가 된 말로, 과거의 ‘축적된 경험’을 미래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로 흔히 인용한다. 역사와 고전을 배우는 것은 과거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또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유학은 많이 기억하는 지식의 저장 창고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누가했는지 모르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 사람과 그 말을 알아도 ‘너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을 자기에게 응용하지 못하는 배움을 경계한다.

  미래를 아는 지신(知新)은 미래의 세상을 훤히 내다보는 점쟁이처럼 되라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 스스로 자기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고,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스승, 부모, 어른)도 그리 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때로는 많이 경험해보고 완전한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예견된 실패를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언제나 성공만 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작은 실패조차 두렵게 하여 자생력을 잃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끌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해야 하는 중용(中庸)의 기준선을 벗어나면 삶을 풍부하게 살지 못하도록 새장에 가두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아이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리는 인(仁)으로 나아가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스승, 부모, 어른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학생이, 자식이,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서가 아니고, 혀를 차며 걱정할 정도로 요즘 아이들이 어긋나서도 아니고, 다가가서 마음으로 교감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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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그 행위(현재)를 보고 [視其所以] 
동기(과거)를 살펴보고 [觀其所由] 
바램(미래)을 통찰해라 [察其所安] 
어찌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人焉廋哉]
어찌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人焉廋哉]

 

  인(仁)은 다양하게 정의하며 그 개념 논쟁도 많지만, 정서를 중시하는 측면에서 ‘참된 사랑’이라고 쉽게 정의하기도 한다. 그 뜻을 조금 더 풀어서 ‘남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헤아려 관계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본래 자신의 속마음도 정확히 몰라서, 왜 내가 이러는지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는데, 어찌 남의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말일까? 그것에 대한 답이 되는 장이기도 하다.

  ‘다름의 분별후 조화’를 핵심으로 하는 중용철학은 한계와 가능 역시 마찬가지로 분별한 후 조화를 도모한다. 사람은 날 수 없다(한계). 사람은 도구를 만들 수 있다(가능). 그래서 스스로는 날 수 없지만 비행기를 만들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불가능을 가능과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 인위(人爲)라는 측면인데, 이러한 관념은 무위(無爲)를 주장하는 노장사상의 후학들에게 집중공격을 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학에서 판단하는 사람이 사람의 속마음까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한계이다. 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짐작이다. 그래서 조화를 도모하여, 최대한 짐작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 장에서 말하는 ‘헤아림’이다. 최대한의 짐작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상대방의 과거부터 열심히 살펴주려는 노력이다.

  과거(동기)는 현재와 미래를 이끄는 힘이 있다. 담배를 처음 피우고 난 후, 나쁜일을 하고 난 후, 손찌검을 하고 난 후, 그 이후에 그 행위가 보다 수월하게 행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과거의 경험은 현재와 미래로 연결시키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좋지 못한 일 뿐 아니라 좋은 일도 그러하다. 그래서 처음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두번부터는 쉬워진다. 이 과거(동기)를 헤아린다는 것은, 그렇게 습관화되어 나와 경험이 다른 까닭에 나와 생각과 취향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미국인이기에 마늘냄새가 역겨울 수 있고, 먹기 싫어 하겠다는 짐작을 우선 하는 것은 내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알아서가 아니라, 그가 지내온 과거(동기)를 추측하여 나와 다를 수도 있겠다는 배려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권해야 하나? 대화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란 미국인일 수도 있고, 마늘을 경험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사를 확인해서 마늘을 먹고 싶다고 하면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있나? 권하는 여인이 미인이라 먹고 싶은 척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에 무게를 둔다. 이 세상이 모두 착한 사람만 살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유학의 사유이다. 다만 최선을 다하여 노력한다는 것이다. 논어 후반부 18편에 많이 나오는 공자에게 ‘불가능임을 알면서도 하려는 자’라는 은자들의 조롱을 제자들이 논어에 꺼리낌없이 실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유학은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려는 ‘실천행위’에 의의를 둔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공자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지동설을 알았던 것도 자동차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의 시대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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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내가 안회와 종일 얘기했는데 [吾與回言終日]
다른 의견이 없어 어리석다고 여겼다 [不違如愚]
그 이후에 사생활을 살펴보고 [退而省其私]
도리어 내가 깨우치게 되었으니 [亦足以發]
안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다 [回也不愚]

 

   안회에 대한 공자의 감탄은 여러차례 나온다. 본래 유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길러준다는 관계였다. 중용이 말하는 조화(和)로움의 사고이며, 논어의 첫 장부터 강조하고 있는 더부는 즐거움(樂)의 사고이다. 유학은 본래 단절이 없었고 ‘함께’를 지향했는데, 스승은 가르칠 것만 있는 사람이어야 마땅하고, 학생은 배울 것만 있어야 마땅하다는 권위적 관계로 어긋나 버렸다.

  공자는 전지전능함이 없었기에 신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모자란 것도 있고 나은 점도 있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앉아 걸식하는 걸인이라고 해도, 하는 일 없이 앉아 있기 경쟁을 해 보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유학은 묻는다. 사람이 아는 것이 있어 봐야 얼마나 알 것이며, 사람이 잘난 것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잘날 수 있겠는 지를 묻는다. 유학이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는 분별 후 조화’를 모색하는 사상이다. 우월함, 존귀함 그런 것은 없다. 내가 나은 것으로 보태주려 하고 내가 모자라는 것은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중용(中庸)의 조화로운 어울림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장은 공자께서 안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반성이다. 안회는 스승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있었는데, 공자는 안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회가 공자보다 더 뛰어난가? 안회도 또한 공자보다 나은 점이 있었고, 모자란 점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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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가 효에 관해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子夏問孝 子曰:]
인상을 찡그리면서 [色難]
일이 생기면 대신 일하고 [有事弟子服其勞]
술과 음식을 먼저 드시게 한다고 [有酒食先生饌]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曾是以為孝乎?]

 

  앞의 자유의 대한 답변과 의도하는 뜻은 유사하다. 마음의 발현이 아닌 억지로 하는 효행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신다. 아마도 자유는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것에 치중했고, 자하는 종종 짜증스런 표정을 드러내곤 하였기에 공자께서 지적해 준 것으로 추측하곤 한다.

  그렇다면 정말 짜증스러운데 즐거운 척 하는 것은 위선이기에 잘못이며 나쁜 것일까? 유학의 철학인 중용(中庸)의 사유에서는 꾸밈을 무조건 추하게 보지 않는다. 이상적인 것은 마음의 발현에서 오는 효행이겠지만, 부모님의 마음을 편히 해 드리기 위해서라면 연기를 하는 것도 긍정한다.

  새가 특별히 부여 받은 날개를 쓰지 않고 걸어다니는 것이 자연(自然)이 아닌 것처럼, 특별한 지능을 부여받은 인간이 머리를 쓰지 않는 것도 자연(自然)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행위 측면에서의 예(禮)의 꾸밈은 ‘행동이 마음을 이끄는 힘’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도덕으로 따르게 한 측면이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남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리는 인(仁)함을 추구하는 뜻이 있기도 했다.
  
  표정을 밝게 하는 것이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내 자신에게 합리화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표정이 밝지 않으면 부모님께서 어떤 마음이실까를 먼저 헤아리는 마음에서 꾸미는 표정이기에, 외형상 거짓인 꾸밈이지만 인(仁)을 행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거짓말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착한 거짓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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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효에 관해 묻자 공자 말씀하셨다 [ 子游問孝 子曰:]
오늘날 효라는 것이 봉양을 잘 하는 것이라 얘기하곤 하는데 [今之孝者 是謂能養]
개나 말도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至於犬馬 皆能有養]
공경함이 없다면 (개와 말과 부모님이) 어찌 다르다 하겠는가 [不敬 何以別乎]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말씀이다. 물질적으로 봉양을 잘 한다고 해서 효행을 다했다고 여기는 것은, 부모님을 기르는 개나 말 취급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하신다.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공경하는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애완견을 잘 먹이면서 사람보다 더한 애정을 주고 받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애정과는 또 어떻게 다르다는 뜻일까?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맹자 진심 상 13.37]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먹여주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짐승으로 기르는 것이요, 사랑은 있으되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를 짐승으로 사귀는 것이다.

 
  다소 추상적인 얘기지만
경(敬)에는 신성하고 두려운 정서가 포함된다. 공포가 아니라 존경과 숭배에서 발현되는 두려움의 감정인데, 이것은 이해해야 하기보다 체험해야 할 영역인 것 같다. 유학에서 경(敬)이라는 개념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인데, 대강 경외와 숭배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정도의 관념을 가지고 앞으로 경(敬)에 대해서 접근하시면 좋을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만 보면 어려울 것이 없다.
부모님께 단지 물질적으로만 잘 봉양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가? 그점을 자문하면 쉬이 가슴으로 공감이 되는 가르침일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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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무백이 효에 관해서 묻자 [孟武伯問孝]
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 부모님께서 오직 (너의) 병만 걱정하게 해 드려야 한다 [父母唯其疾之憂]

 

  마지막 부분의 해설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장이다. 공자의 대답은 묻는 제자들마다 다르셨기에, 저 제자는 어떤 사람인지, 저 상황은 어떤 상황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확실한 기록이 많지 않아서 상상을 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많다.

 
  맹무백은 앞 장에서 말한 맹의자의 아들인데, 권력을 전횡하던 3가의 한 명인 맹의자였지만, 공자의 학식은 인정하여 아들을 공자에게 배우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맹무백은 시호의 무(武)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자로와 마찬가지로 용맹이 지나쳐 주변을 걱정시키는 제자였다고 한다. 그런 성격 탓에 싸우다 다치지 않을까 늘 걱정을 끼쳤기에 말해준 것으로 해석하는 쪽이 유력한 것 같다. 이 외에 '부모는 (자신의  병이 아니라) 자식의 병만 근심하신다', '부모께 다만 자식의 질병만을 걱정하도록 해 드려야 한다'는 등등의 해설이 있다. 

  어쨌건, 효(孝)의 본질은 ‘부모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헤아려야 한다’는 인(仁)의 관계함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자식에게 연기할 때는 어떤 배우보다도 더 완벽하게 하신다고 한다. 들통나면 자식이 맛있게 먹지 못할까봐, 정말 소화가 잘 안되시는 것처럼 완벽히 연기하시는 힘이 있으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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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의자가 효에 관해서 묻자 [孟懿子問孝]
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 [無違]
번지가 수레로 모시자 공자 말씀하셨다 [樊遲御 子告之曰:]
-맹의자가 내게 효에 관해서 묻기에 어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번지가 물었다 [樊遲曰:]
-무슨 뜻인지요? [何謂也?]
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살아서는 예로 받들며, 죽어서는 예로 상을 치루고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예로 제사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祭之以禮]

 

   상상해보면 재미난 대화이다. 상황설명을 하자면, 맹의자는 노나라 군주(제후)를 업신여기며 군주(제후)만이 할 수 있는 예(禮)뿐 아니라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예(禮)까지도 행하던 노나라의 실권을 가진 3가중 한 명이었다. 그가 공자를 청해 효(孝)에 관해 물은 것이다. 추측건대, 공자는 더 자세히 물을 줄 알고 압축하여 얘기했는데 맹의자가 알아들은 척 하며 더 얘기를 들어주지 않은 것 같다.

  맹의자의 신하가 되어있던 제자 번지가 공자를 운전해서 바래다 주는데, 맹의자에게 전해주라는 의미로 번지와 대화를 하고 있다. 그냥 바로 얘기하면 될 것을, 굳이 번지가 질문하도록 유도하여 대답을 해 주는 공자가 재미있다. 호기심 많았던 번지도 맹의자처럼 변했을까 확인하려는 의도였는지, 묻기에 답해주는 것으로 체면을 세우고 싶어서였는지 그 속내는 물론 알 수 없다. 번지가 가볍게 질문을 하니, 기다렸다는 듯 열심히 설명해주는 공자는 정감이 가는 캐릭터이다. ^^

  이 장도 논어의 다른 대부분의 응답과 마찬가지로 효(孝)가 무엇이다는 일반원칙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맹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적해주는 눈높이 맞춤식 답변이다. 어쩌면 맹의자에게 ‘당신이 효를 행하고 싶으면, 예부터 바르게 행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번지에게 주군을 그렇게 되도록 모시라는 가르침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논어는 상황을 상상할 수 밖에 없고, 궁금함이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인 것 같다.

  예(禮)는 형식이 아니라 실질[마음]이 근본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차례 언급하였지만, 여기서는 형식을 따르는 것도 중요함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억지로라도 착한 행동을 반복하면 착한 마음이 생길까? 나쁜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나쁜 마음이 생길까? 행위가 마음을 이끌수도 있다는 것이 유학적 사유이다. 그래서 예(禮)는 담고있던 마음이 외부로 표현되는 것임과 동시에, 마음을 조절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논어의 후반부쯤에서 조금 더 깊게 논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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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나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
30살에 자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三十而立]
40살에 의혹이 없어졌고 [四十而不惑]
50살에 천명을 알게되었고 [五十而知天命]
60살에 귀가 순해졌고 [六十而耳順]
70살이 되어서야 마음가는대로해도 [七十而從心所欲]
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不踰矩]


   논어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장이다. 칼로 자르듯 그 나이에 딱 그리 되었다는 것은 아니며, 제자들에게 나이를 기준으로 성취해야 할 목표를 일러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40살이 되어서 의혹이 없어졌으니 나는 5년정도 늦어도 만족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 제자들은 없었고, 40이면 나도 선생님처럼 의혹이 없어야 겠다고 각오를 다지게 했던 게 공자학의 한 매력이었다. 공자는 신이 아니라 먼저 태어나 경험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일 뿐이었으며, 우월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이해시켰기에 제자들은 공자의 나이라면 공자와 같아질 수 있어야 하겠다며 노력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어른과 스승에 대한 공경은 무조건적 복종이 아니라 앞선 경험을 존중한다는 의미였으니, 오늘날처럼 '너 몇살이냐' 혹은 ‘내가 누구이냐’를 강요해 무조건 숙이라는 군대식 복종과는 달랐었다. 나이와 지위에 관계없이 개인의 인격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경은 나이와 지위를 내세워 복종을 강제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저절로 표현하는 것이 존경이며, 존경을 받으면 우월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먼저 태어났을 뿐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화답하는 것이었다. 나이의 지칭에 대한 의미를 자세히 적으려면 상당한 분량이 될 것이고, 논어의 다른 장에서도 반드시 언급해야 하니 여기서는 간략히 정리하며 지나갈까 한다.

지학(志學)이라 하는 15살로 대표되는 청소년기에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깨우치는 공부를 시작할 나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적성과 재능을 가늠하며 사회에 어떤 일원이 될 것인가 하는 꿈을 찾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성적에 맞추어 의대와 법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은 먼저 찾은 후 배울 곳(대학)을 찾는 것이 순서임을 다들 아는데...

이립(而立)이라 하는 30살은 자립(立)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자리를 잡은 상태, 토대가 마련된 상태이다. 본래는 학문의 근본이 세워진 상태를 말했던 것이겠지만,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아마에서 프로가 될 수 있는 반석을 마련한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려고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불혹(不惑)이라 하는 40살은 마음이 혼란으로 흔들리지 않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삶이 늘 예상한대로 흘러가지도 않고, 삶이라는 그림을 원하는 대로만 그려갈 수 없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이니, 갑작스런 변화(사건)가 생겨도 갈팡질팡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라고 한다. 어느날 북한이 침공했다는 뉴스가 나올 수도 있고 직장을 잃을 수도 있으며 로또에 당첨되는 횡재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놀랍고 심란한 감정은 가지더라도, 당황하고 혼란스럽고 두려워하여 어찌해야 할 지 몰라서는 안되는 단계이다. 이 나이까지는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천명(知天命)이라 하는 50살은 하늘이 명한 '인생의 뜻'을 아는 나이이다. '나' 중심에서 벗어나 세상속에서의 '나'를 이해하는 단계이며,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우연의 연속이기도 한 인생의 숭고한 뜻을 인식하게 되어야 한다고 한다. 천명에 대한 얘기는 논어에서 종종 반복되고 있으니, 다시 자세히 얘기하기 위해 나중으로 미룰까 한다.

이순(耳順)이라 하는 60살은 '귀가 순해진 나이'이다. 들리는 소리에 크게 개의치 않는 나이이니, 누가 욕하건 누가 칭찬하건 빙그레 지나칠 수 있게 되고, 어떤 소리라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단계이다.

종심(從心)이라 하는 70살은 마음가는대로 해도 도리를 벗어나지 않게 되는 나이이니 완성의 경지에 다다른 수준일 것이다. 두보의 시로부터 유래한 만나보기 드문 나이를 의미하는 고희(古稀)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게 사용되는 것 같기는 하다.

이상 정리하면, 이 장은 그 나이에는 그 나이에 맞는 사람이 되라는 목표를 정해주는 것이며, 사람이 성숙해져 가는 것도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니 단번에 종심의 단계에 이를 수는 없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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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정책으로 따르게 하고 형벌로서 규제하면 [道之以政 齊之以刑]
백성들은 모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될 것이다 [民免而無恥]
덕으로 따르게 하고 예로서 규제하면 [道之以德 齊之以禮]
부끄러움을 느껴 저절로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有恥且格]


   이 장은 강압적 정치의 단점을 덕치의 장점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형벌을 앞세워 강제하는 통치는 ‘마음의 반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재수없게 법에 걸린 것이지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아니다'고 하게 될 것이며, 법을 잘 피해다니는 것을 지혜로 여기고, 법을 피해갈 줄 모르는 것은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덕성을 찬미한 위정 제1장의 북극성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정치는 오직 덕치주의여야만 한다’고 하는 것도 곤란하다. 덕과 힘이 중용(中庸)의 조화를 이뤄야만 하는데, 공자시대에는 예(禮)라는 완화된 힘(규제)으로도 충분히 조절 가능하다고 판단하셨던 듯 하다.

  다원화된 오늘날에는 예(禮)의 규제보다는 법(法)이 조절작용을 해야할 것 같다. 그렇지만 덕을 지향하는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한다. 사람을 채찍에 움직이는 짐승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人間性)을 회복하여 사람의 길을 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은 블로거 입장에서 저작권법을 생각해보게 한다. 최근에는 TV영상을 몇 장면 캡쳐했다고 문제가 되었다는 글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강력한 단속으로 죄어가는 것이 순서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하는게 순서이지 않을까? 대화하고 조율하고 수긍하는 과정없이 힘을 앞세워 밀어붙이려는 것에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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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다 [子曰:]
- 『시경』의 3백수의 시를 한마디로 묶을 수 있다[詩三百 一言以蔽之]
그러면서 말씀하셨다[曰:]
- 속이는 뜻이 없다 [思無邪]

 

지금은 다 표현하지 않고 비워두는 시(詩)의 ‘절제미’를 보다 강조하는 것 같지만, 예전 학문의 교과서였던 시경은 ‘진솔함’을 보다 강조했던 것 같다. 충신, 효자, 홀아비, 과부등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의 지극한 감정이 실려있는 것이 옛날의 시(詩)였다. 돈으로 변할 수 있어야 생산을 하려는 지금 시대에, 심금을 울리는 진솔함과 교감하기는 참 어려워진 것 같기도 하다. 문득 황진이의 시를 남겨두고 싶어진다.

동짓달 기나 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되면 굽이굽이 펴리라

그날 밤이 한 허리만 떼 내어도 족할 정도로 그리도 길었을까?
님과 함께 하는 밤이 얼마나 짧았기에, 그 시간에다 보태고 싶었을까?

사람들이 고시(古時)를 좋아하는 이유는 절제미와 더불어 ‘속임 없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시유학은 본시 인간감정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지나치지 않게 조화를 도모했다.
천박하다고 주입시킨 것은 주희의 성리학이었다고 생각되며,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엉엉 울어도 되는 것이 원시유학이었기에,
부인이 죽었을 때 덩실덩실 춤추었다는 장자가 보통사람들과 가장 멀리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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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為政以德]
북극성으로 비유할 수 있다 [譬如北辰]
가만히 있지만 다른 별들은 그 중심을 돈다 [居其所而衆星共之]


이 장은 덕(德)이 가진 장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북극성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다른 모든 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
즉, 다른 별들이 북극성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이 따뜻함을 따라가는 것으로 비유해도 될 것이다.
후덕함은 분명 저절로 따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상적인 정치는 북극성처럼 덕으로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만, ‘오직 정치는 덕치(德治)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강제적 억제가 조절을 하여 조화를 이뤄야만 하는 것이니, 유가(儒家)의 현실적 모델은 예(禮)의 통제로 받쳐주는 것이었다.

윗 자리에서 따르도록 해야 할 때, 후덕함과 억제의 중용(中庸)의 기준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제 매를 들어야 하고 언제 사탕을 주어야 하나? 상대에 대한 이해가 그 출발선이 된다.
부하직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내 아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보다 적합한 기준을 찾아낼 수 있음이다. 그래서 남과 진정으로 통하고, 남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헤아리는 인(仁)의 관계함이 근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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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 子曰:]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不患人之不己知]
내가 남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患不知人也]

 

   비슷한 가르침이 논어 제1장부터 시작해 위령공(16), 헌문(32)편 등등 계속 반복되고 있지만, 뒷부분에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이 장에서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말은 본래 내가 남을 제대로 알 수는 있는 것인지 바꾸어 생각해보라는 뜻도 담겨있다.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도 내가 남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앎의 교만에 빠졌기에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드러나고 보여지는 것을 통해 ‘짐작’을 하는 것이지 아는(知) 것이 아닐 것이다. 경험과 정보가 많아지면 짐작이 맞을 확률이 조금 높아진다는 것일 뿐,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남들도 나를 제대로 알아줄 수 없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외로운 존재인가? 사실, 나를 알아주는 완전한 친구가 있다. 내 안의 나’는 나를 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나를 정확히 보고 있으며, 그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으니 정말 완벽히 나의 진면목을 알아주고 있을 것이다. 시인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원했던 그 하늘이 곧 ‘내 안의 나’이기도 할 것이다.

  이치상은 나도 남을 모르고 남도 나를 모르는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아무도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주지 않으면 외롭고 슬픈것이 사람이다. 성인이라 칭송받는 예수께서도, 석가께서도, 공자께서도 세상이 몰라준다고 역시 아쉬워하셨다. 감정조차 없어져야 한다는 뜻, 정(情)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며, 그 감정에 장악당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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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여쭈었다 [子貢曰:]
-  가난하다고 아첨하지 않고 [貧而無諂]
-  부유하다고 교만하지 않으면 어떤가요? [富而無驕 何如?]
공자께서 대답하시길 [子曰:]
-  좋구나 [可也] 그렇지만 가난함을 즐기고 [未若貧而樂]
-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한 것 같구나 [富而好禮者也]
자공이 말하길 [子貢曰:]
-  시경의 절차탁마(切磋琢磨)가 이같은 뜻입니까? [詩云, 如切如磋如琢如磨 其斯之謂與?]
공자 말씀하시길 [子曰:]
-  자공아! 이제 너와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  지난 것을 돌이켜 미래로 나아갈 줄을 아는구나 [告諸往而知來者] 

 

   뜻을 음미해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대화이며 자공의 영민함을 느낄 수도 있다. 자공은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억제하는 단속으로 도달하였다’고 여기고 여쭤보았는데, 공자께서는 ‘즐길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쳐 준 것이다.

  그 말에 자공이 ‘내가 모자라구나’하고 침울하지 않고, 시경의 시를 인용하여 즐겁게 받아들이며 화답을 한다. 이것은 ‘가난한 성취(배움)를 즐기는 태도’ 이니, 곧바로 가르침에 화답하여 실행에 착수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단순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시(詩)를 통해서 즐기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제가 경솔하게 아는 것으로 여겼군요’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절차탁마’를 인용할 수 있는 상황인지를 질문하여, 우회적인 시적인 ‘숨김의 미학’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즐거움의 경지에 이르라는 가르침, 계속적인 발전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좋지만, 스승과 제자간의 정다운 대화라서 또한 더 좋다. 공자의 감탄은 당연한 것 같은데, 공자께서도 지지않고(?) 돌려서 칭찬을 하고 있다. ‘하나(과거)를 알려주면 둘(과거+미래)를 안다’는 것인데, 자공이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써 먹는다. ^^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논어 제5편 제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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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군자는 배부르게 먹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君子食無求飽]
편안하게 거주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居無求安]
일을 부지런히 하고 말을 신중하게 하고 [敏於事而慎於言]
도를 향하여 바르게 행한다면 [就有道而正焉]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可謂好學也已]

 

   이 장도 스스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유가(儒家)에서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호학(好學)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제1장에서부터 강조하였듯이, 아기새가 어미새를 따라서 날개짓을 하는 그 행위에 의의가 있음이니,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다. 

  한편, 군자라고 해서 맛있게 먹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요, 편안히 잠자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지(욕심내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배부름과 편안한 주거를 추구한다면 ‘소인’이라는 하찮은 사람이 된다는 것일까? 그런 뜻도 아니다. 군자는 소인에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위해 봉사’해야하는 다른 사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도 배불리 먹고 편안한 주거를 추구한다면 제 본분을 망각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군자(정치를 하려는 자)가 물욕에 빠지면 큰 도적이 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무겁게 새기도록 경계시킨 것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군자는 불쌍한 사람처럼 보인다. 부지런히 일해야 하고, 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해야 하며, 배불리 먹고자 해서도 안되고, 편안히 거주하고자 해서도 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달픈 삶이 아니라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행복해지는 것에 공자학의 의의가 있다. 

  공자가 쇠뇌시킨 걸까? 종교일까? 도(道)의 안경을 쓰고 보지 않는다면 당장 이해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오지로 가서 열악한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는 의사들의 삶은, 보편적 시각에서는 희생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진심으로 행하는 그 얼굴이 불행한 표정인지를 관찰해보면 뭔가 이상스럽기는 할 것이다. 짐작을 통해 ‘그 길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져봄직 하지 않을까? 
  
  도(道)는 ‘길’로 잘 비유한다. 선명한 길은 사람이 많이 다녀서 잘 드러나는 것 뿐이며, 정해진 도(道)라는 것은 없다. 자기가 ‘이 길이다’고 인식하며 걸어가는 그대로의 삶이 곧 도(道)다. 남들처럼 사는 것도, 특이하게 사는 것도 각자 나름의 길이다. 도를 바르게 한다는 것[道而正]은 가고자 하는 길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뜻이다. 그 길로 가라고 남에게 요구하려는 것도, 그 길로 가지말라고 남에게 요구하려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오직 인간만이 나와 똑같게 만들고 싶어하고, 나의 우상을 똑같이 숭배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다.  하늘은 비슷하게 만들고서 멈춘다. 결코 똑같은 것을 만들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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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신의는 의로움이 있어야 가까이 하여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며 [信近於義 言可復也]
공손은 예가 있어야 가까이 하여 치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恭近於禮 逺恥辱也]
의지하더라도 친근함을 잃지 않아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역으로 읽어보면, 정의롭지 않은 약속은 지키지 않아야 하며, 예가 없다면 치욕을 당하더라도 공손하지 않아야 하며, 의지한다고 해서 싫어하면 떠나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앞 장에서 ‘조화만을 위한 조화를 찾는’ 꽉 막힌 사고를 지적했는데, 마찬가지로 꽉 막힌 사고를 지적하고 있다. 무조건을 고수하는 것은 맹신과 맹목을 추구하는 것일 따름이다.

  ‘독립투사들께서 거짓말을 하여 동지를 팔지 않은 것’을 거짓말을 했다하여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다. 거만으로 대하는 무례한 사람에게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공손으로 화답할 필요가 없고, 의지한다고 해서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면 떠나야 하는 것이라 한다.

  이 모두는 ‘내면의 자존(自存)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의롭다는 것, 공손하다는 것, 친근하다는 것을 얻기 위해서 본질을 버리지는 말고, 스스로를 버리지는 말라는 의미이다. 자존이 무너지면 삶이 고달파진다. '좋은사람 컴플렉스'라는 말처럼, 좋은 평가를 의식해서 끌려다니지는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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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예의 작용은 조화로움이 중요하다 [禮之用 和為貴]
선왕의 도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先王之道斯為美]
작고 큰 것이 조화를 이뤄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小大由之 有所不行]
조화를 위한 조화만 알고 [知和而和]
예로써 조절할 줄 모른다면 [不以禮節之]
순조로울 수가 없다(참된 조화가 아니다) [亦不可行也]

 

   이 장이 해석이 분분한 이유는 ‘어떻게 해라’는 선명한 실천행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의 철학인 중용(中庸)을 설명하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禮)는 내면의 실질과 드러난 꾸밈의 조화이다. 마음이 없는 예는 허례이며, 솔직한 마음을 꾸밈없이 다 발산하는 것도 무례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中庸)의 균형선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곧 조화라고 하여 조화만을 추구하려는 꽉막힘도 문제이다.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힘을 사용해 막아야 하는 행위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형식적 예에 어긋나고 부자간의 조화가 깨어지더라도, 근본의 예[실질]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참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장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이고 늘 그러해야 한다는 고정된[죽은] 원칙은 없다는 중용(中庸)의 조화라는 관념이 정립되면 좀 더 선명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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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말씀하셨네 [子曰:]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적에는 뜻을 살펴보고 [父在 觀其志]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지나온 행적을 살펴보고 [父沒 觀其行]
3년동안은 바꾸지 않아야 효라고 할 수 있다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이 장의 핵심은 ‘진실한 마음은 가벼울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삼(三)은 '오래다'는 의미로 고래부터 사용한 하나의 상징과도 같으니, 반드시 숫자적 3년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라는 선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칼릴 지브란과 메리 헤스켈의 러브레터와 일기, 작품등에서 발췌하였다고 하는데, 이 책의 제목은 마치 명언처럼 유명해져 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작고 드러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부모님의 생각과 뜻을 쉽게 바꾸려는 것은 부모님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는 마음일 지 모른다. 생각이 달라도 살아서는 부모의 뜻을 꺾으려 하지 않고 지켜 보는 것,  돌아가신 후에는 지난 행적을 신중히 관찰해 보는 것, 그리고 단번에 바꾸지 않고 깊이 심사숙고 해보는 것은 모두 부모님의 일생의 뜻을 가볍게 여기고 경시하지 않는 것이기에 효(孝)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효(孝)는 마음이 실질이기에, 드러나는 외형적 행위에 집착하라는 뜻이 아니다. 반드시 3년을 그리해야 한다고 못박아 버리면 맹신적인 종교가 된다. 지켜야만 하는 법률 같은 효(孝)가 되어버린다. 한편, 그 시대에는 아버지의 역할이 주도적이기 때문에 부(父)라고 하고 있겠지만, 오늘날에는 부모님을 통칭하는 의미로 읽으면 될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뜻이 남녀차별이 아니므로 그런 것에 민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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